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3)
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3)
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3)2015. 1. 9. 16:53https://m.blog.naver.com/1019milk/220235017145사도신경의 첫째 항: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 바르트는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 사도신경의 첫 번째 항을 ‘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간략히 요약한다. 이 표현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전적 타자’로서의 면모를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신앙 밖에서 ‘신(神)’이라고 불리는 여러 존재자들 중 하나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체험과 개념들로부터 ‘신’을 찾고자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인간적 해석 틀에 제한되기를 거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그 모든 해석 틀을 부수며 자신을 스스로 알려오는 타자이다. 바르트는 인간학으로부터 신에 대한 견해들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모든 입장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그는 인간이 개념적으로 추구하여 발견한 것의 완성, 최종, 최고, 최선의 완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른 때 하나님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것 대신에 등장해 와서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제외하고 홀로 진리라고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모르면 그리스도교회가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은 스스로 추구 발견하지 못한 실재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찍 찾아보지 못하고 어느 귀가 듣지 못하고 어느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못한 것,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라고 바울은 이 사실을 말했다.(고린도전서 2:9)”1‘높은 데 계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나타내고 있다. 바르트는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 있어지어다.”라고 이야기하는 『누가복음』 2:14를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인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는 『전도서』 5:2의 구절을 변형하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다(Gott ist im Himmel und du auf Erden).”라는 말로도 하나님의 타자성을 표현하였다. 그분은 전적 타자이기 때문에 주체가 결코 손아귀에 쥘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을 주장하며 그를 우리에게 알려 오실 때에야 일어난다. 바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위에 말한 바와 같이 이 ‘높은 데 계신’이란 말은 그는 우리와 우리의 최고 최심의 감정 노력 직관을 다 초월해 있고, 인간 정신의 산물 중에 가장 우수한 것까지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첫째로 그 분이 우리에게 설정되거나 인간의 성향이나 가능성에 일치하는 일이 없고 어떤 의미로서도 바로 자신 속에 근거를 두고, 그같이 현실 존재를 하신 분이란 것을 의미한다. 또 그가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는 것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느끼고 생각하고 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항상 자기를 통하여서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그대로 인간에게 향하시고 자기를 인간에게 주시고 알게 하신다.”2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괴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면서도 인간의 편에 서 계시며 인간을 긍정하신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시도를 비판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도신경이 말하는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고 우리의 것으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자기에게로 인도하신 분이시다.” 3이 점에서 바르트는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동시에 ‘하나님의 인간성’을 주장하는 신학자이다. 이것은 이후 사도신경의 두 번째 항목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심으로써 스스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의 하나님을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사변적 증명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질 수 있는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시기에 우리의 기대나 추론을 부수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알려 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의 증언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타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 성서가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논증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 아니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에게 인간 주체의 모습을 덧씌워 우상을 만드는 일이다.이 때문에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써 설명한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추측에 따라 만들어낸 신들의 모습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로우시다. 이러한 자유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바르트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자유’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이때의 ‘자유’와 ‘사랑’조차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개념들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둘째 개념은 성서적인 것일지라도, 거기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자유이시다. 무엇이 자유이며 무엇이 사랑임을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4바르트는 ‘유일신 신앙’ 역시 하나님의 타자성과 관련하여서 설명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단순히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의 전적 타자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분은 다른 비교대상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기 때문에 유일하신 분이시다.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오는 계시만이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하나님 아버지”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 이 호칭이 인간적인 아버지 개념을 하나님께 투영시킨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론해 내려는 시도로서 비판 받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성(父性)으로부터 참된 부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바르트는 『에베소서』를 인용하며 “천지 가운데 모든 부성이 그에게서 나왔다.”5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자신을 설정하셨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삼위일체의 존재양태를 통해 자신을 ‘성부’와 ‘성자’로서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이미 영원한 부성이 있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표현은 그가 우선적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의미이다.반면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인 본성이 시간 속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창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영원 이전의 결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하셨고, 그 결의에 따라 시간 속에서 활동하신다.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한 것이 지금 우리를 위하여도 그같이 되기 원하시고 그의 영원에서 가진 존재대로 우리를 위하여 계시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부성에 힘입어──자유로운 은총에서 함이지 자기의 생업이기 때문이 아니게──우리의 아버지 되시기를 원하신다는 이 진리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알아낼 수 없다.”6 “하나님의 본성에서 참된 것이 시간 중에서 참이 된다.”7 따라서 피조 세계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을 뿐(factus) 그에게서 출생한(genitus) 것이 아니므로 엄격히 말해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다. 하지만 성부는 피조물들의 근거인 성자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 또한 성자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다는 한에서 그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다.“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성 역시 인간 주체의 전능 개념을 전제하고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물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힘이시며, 모든 피조물들의 기저, 규준,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시며 모든 것들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식의 철학적 언술로는 하나님의 전능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세상에는 유력하고 전능하다고 일컬어지면서 하나님의 전능과는 아무 상관없는 많은 힘이 있다. 우리는 이것으로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8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세 가지 항목으로 설명한다. 이 중에서 마지막 세 번째 항목이 전능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 첫째로 하나님의 힘은 무력(無力)하지 않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위에 계신다. 어떠한 권력들도 하나님과 경쟁할 만한 것들이 아니며, 하나님은 이들 권력들에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힘은 결코 ‘권력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권력 자체’라고 불리는 것과 대립하여 계신다. 바르트의 세 번째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두 항목과 달리 보다 심도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바르트는 하나님을 모든 지배권이나 구체적인 권력(potentia)의 총화로 이해하는 태도를 우려한다. 그는 바로 히틀러가 하나님을 “전능한 분”이라고 곧잘 불러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조건적인 자유와 절대적 가능성 속에 있는 ‘권력 자체’란 혼돈이며 악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와 같은 ‘혼돈과 공허(tohuwabohu)’의 힘을 몰아내어 버리셨다. 이와 같은 점을 통해 바르트는 아무런 제약 없이 역동성만을 지닌 ‘권력 자체’가 결코 하나님의 전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과 대립하여서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악’이자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부하신 ‘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한 힘은 이와 같은 권력을 전복시키시며 권력자들을 무너뜨리시는 데서 나타난다. 개념적으로 구별하자면 하나님의 힘이란 무차별적인 가능성으로서의 힘인 ‘포텐시아(potentia)’가 아니라 법에 근거한 힘인 ‘포테스타스(potestas)’이다.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경우 하나님의 전능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원하시는 사랑의 힘이다. 바르트는 나중에 이 내용을 사도신경 두 번째 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다.”라는 고백과 연결 짓는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치고 하늘에 오르기 전 “나에게 천지간에 모든 권세가 주어졌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말은 그가 무의미한 권력 자체를 제한 없이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권력 자체를 분쇄시키고 ‘무’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것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전능이란 그가 인간을 구원하시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힘을 지니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전능은 “하나님이 둘의 제곱을 다섯으로 만들 수 있는가?”와 같은 유치한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트는 이러한 힘이 무의미한 힘일 뿐만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며 지배할 수 있다고 여기는 무력이라고 지적하며 이 힘이 하나님과 대립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은 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사랑의 힘의 충만함이다.“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고백은 다른 종교와 신화들에서 신을 창조주로서 일컫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신을 창조주로 묘사하는 데서 그리스도교나 이방종교나 비신앙인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르트에게서 이러한 생각은 인간적 추론으로부터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도출해 내려는 잘못된 시도라고 비판받는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창조된 하늘과 땅’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고, ‘창조’라는 사업을 믿는다는 것도 아니며, 바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창조 사건의 주어인 이 ‘창조주’가 누구이신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므로 “창조하였다.”라는 술어의 공통점만 가지고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다른 종교와 신화의 창조주와 동일시하여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 세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자연신학의 시도를 거부한다.바르트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와 성서의 『창세기』를 구별한다. 이 내용은 그의 『교회교의학』Ⅲ/1에서 매우 상세하고 뛰어난 방식으로 비교 분석되지만, 『교의학개요』에서는 간략히 ‘신화(Mythus)’와 ‘사화(Sage)’의 구분만이 소개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신화는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질서를 다룬다. “생과 사의 문제, 잠을 잠과 깸의 문제, 출생과 사망, 조석 주야의 문제 같은 무시간적인 것이 신화의 제목이다.”9 신화가 말하는 세계는 언제나 이미 있었고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세계의 한계를 ‘창조’라는 이름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이것은 생성과 소멸의 반복되는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 ‘창조 신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점은 바르트뿐만 아니라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 중 하나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또한 주장하는 내용이다.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신화』라는 저서에서 신화의 이야기들이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원형적인 질서를 표현한다고 분석한다.그런데 신화가 이러한 특징을 지닐 경우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신화에 속한다고 볼 수가 없다. 『창세기』는 세계의 무시간적이고 영원한 질서를 나타내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시간적이며 변화하는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고대 근동의 신화와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이 점에서 서로 완전히 대비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시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때 『창세기』가 증언하는 역사는 우리의 역사적 인식(Historie) 밖에 있는 원역사(Geschichte)이므로 이것을 과학적으로나 역사비평적으로 추적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신화가 세계의 무시간적 질서를 말하고자 하고, 성서가 하나님의 시간적 활동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닌 것으로서 구별되어야 한다. 바르트는 이 때문에 『창세기』의 내용을 ‘신화’가 아니라 ‘사화(史話, 역사 이야기)’라는 뜻의 독일어 ‘자게(Sage)’로 분류한다.에밀 브루너(Emil Brunner)와 칼 바르트(Karl Barth), 둘은 20년 동안 자연신학 논쟁을 벌였다.바르트에게서는 자연신학이 거부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창조주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부각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에 근거해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비애와 행복이 교차된 세계는 흐릿한 거울이 될 뿐이다. 이 거울에 대하며 우리는 낙관적으로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결론지어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일월성신이나 자신에게서 진리를 연역해 내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우상이었다.”10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바르트에 따르면 “창조는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님 밖에 연장되어 나가 시간 내에 이루어진 한 유비(analogia)이다.”11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성부와 성자로 설정하셨다. 그리고 그는 성자가 되심으로써 창조 세계에 속해 있는 피조물이 되셨다. 즉 영원 이전에 하나님은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결의하셨다. 창조는 이 결의가 시간 가운데 시행되어 이루어졌다. 따라서 모든 창조 세계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기로 한 영원 전의 결의 통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피조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창조주와 창조 사건을 발견한다. 스스로 피조물이 되신 하나님을 통해서 그가 자신 외의 다른 존재자들을 기쁘게 허용하셨음을 보게 된다. 또한 피조물이 되신 하나님이 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maja)’라는 이름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현실적인 실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바르트는 이러한 창조가 순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자기 밖의 타자에게 현실성과 존재를 자유롭게 부여하셨다. 사실 하나님은 고독하시지 않으시므로 창조 세계를 전혀 필요로 하시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와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행하신 창조에 대해 감사할 뿐 여기서 우리 자신의 공로나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 피조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세계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다거나,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왔다는 주장들은 성서가 말하는 창조와 어긋난다.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세계는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원리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io)’가 의미하는 바이다. 자유롭게 존재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생겼으므로 세계는 아무런 자신의 내적인 원리 없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게 ‘무’가 만방에서 폭발해 나온다. 피조물 자체는 자기를 구속하거나 보존할 수 없다.”12바르트는 독일 고백교회를 대표하여 나치에 저항하는「바르멘 신학 선언」을 썼을 뿐만 아니라2차 세계대전 당시 자원하여 스위스 방위대에 들어가 라인 강변을 지키기도 하였다.모든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긍정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한 영원 전의 결의에 따라 시간 가운데 활동하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이다. 하나님은 ‘악(惡)’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악과 같이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힘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부하신 ‘무(無, Nichtige)’이다. 이름 그대로 이러한 ‘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약 ‘무’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름 붙이고 일종의 실재로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부정 선언에 근거를 두고 있는 힘이라고만 해야 한다. ‘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긍정을 통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거부로 인해 ‘무’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근거를 가지게 된다. ‘무’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은 것이라는 제3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창조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영역 곧 죽음, 죄, 악마, 지옥 등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고 그의 창조에서 제외된 것, 거기 대하여 하나님의 부정을 선언한 것이라 함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악의 실재가 있다면 이것은 제외당한 부정당한 실재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것을 선하게 지으시고, 그것을 지나간 뒤에 남겨 둔 실재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은지라.’ 선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시지 않았고 피조적 존재를 가지지 않았고, 그것을 만일 보통으로 존재한 것으로 친다면 또 존재치 않은 것이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정 선언’의 무게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힘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 속에 암흑을 찾아서는 안 된다.”13‘무’는 창조세계에 역설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있다는 것이 성서가 드러내고 있는 실재의 참 모습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없을 때 가려지게 된다. 이때 피조물은 존재하지도 않는 ‘무’의 힘에 의해 억압당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를 주시지 않았고, 오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긍정 속에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분리시키길 원하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반역이며 ‘무’의 힘이 세상 가운데 활동하는 사건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르트 신학은 얼핏 관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내용들은 심오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성서적이다.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그가 영원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자기 속에서 결의하셨고,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바르트 신학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2000년 전 유대 땅에 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뒤 부활하신 역사적 인물을 넘어선다. 그리스도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영원 이전의 약속이다.또한 하나님의 부정 선언으로서 ‘무’에 대한 논의 역시 결코 관념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이 점은 『창세기』 1:2에 ‘혼돈과 공허’로 번역되어 등장하는 ‘토후와보후(tohuwabohu)’라는 단어의 고대 근동신화적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이 단어의 어원이 되는 ‘테홈(tehom)’은 혼돈의 물을 의미하며, 바르트가 앞서 ‘권력 자체’라고도 표현한 무제약적인 힘을 상징한다. 고대 근동신화들에서 ‘창조’는 신들이 이 혼돈의 힘과 싸워 이김으로써 이루어진다. 성서가 이러한 신화적 상징들을 차용하고 있다면, 『창세기』 1:2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세계를 자신이 거부하시는 무의 힘으로부터 지키신다는 의미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다. 바르트는 이 내용을 『교회교의학』Ⅲ/1에서 『창세기』 1:2를 주석하며 상세하게 다룬다.칼 라너(Karl Rahner)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뿐만 아니라 바르트는 그리스도론을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신학 체계들에서 이루어진 여러 구분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혁명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시는 창조 세계 안의 ‘일반 계시’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특별 계시’로 구분되지 않는다. 창조 세계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지어졌으므로 창조 속에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지옥에 떨어질 자를 각각 예정하셨다는 장 칼뱅(Jean Calvin) 신학의 이중예정론도 무너진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폭군이 아니시다. 예정이 존재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유일한 사랑과 구원의 예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은 이후 칼 라너(Karl Rahner)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등의 학자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과 ‘만유구원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하늘과 땅” 사도신경에서 쓰인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니케아-콘스타티노플 신경이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에 대응한다. 고대 근동과 성서의 세계상에서는 세계는 커다란 종 모양이었다. 이때 하늘은 ‘궁창(rakia)’이라는 것으로 덮여 있다고 생각되었다. 궁창 위에는 거대한 바다가 있으며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본원의 하늘이 있다고 여겨졌다. 따라서 사도신경이 말하는 ‘하늘’이란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물리적인 대기층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는 피조적 세계이다. 이 세계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운 신비를 자아내는 세계로서 경탄의 대상이다. 반면 ‘땅’은 인간이 접촉하며 살아가는 세계, 인간이 경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의 세계인 ‘땅’은 하늘 아래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이해할 수 없는 더 높은 세계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따라서 사도신경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는 암묵적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둘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존재자이다. 그는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종속되어 있다. “인간은 피조물 전체가 집중하여 오며 동시에 자신을 초월해 나가는 피조물 안의 한 장소이다.”14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인간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찬송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의 의미이며, 기초이며, 목적이다. 바르트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 이전의 계약을 상기시킨다.“이는 우리가 계약이라고 말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말하자면 이차적인 것이나 후에 부가된 것이 아니고 계약은 창조 그것과 같이 오래다. 피조물의 존재가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 맺음이 시작되었다. 존재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계약에서 밝히 나타나며 유효하게 되는 하나님의 활동을 따라 하나님의 의도를 이미 보여주는 한 존재한 모든 것은 인간을 목표로 질서지어져 있다. 계약은 창조와 같이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이것보다도 더 오랜 것이다. 세계가 있기 전 천지가 있기 전 하나님의 칙령과 결의가 있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상하게도 참되고 현실로 되어진 인간과의 교통을 유지하려고 일으킨 이 사건을 고려하고 있다. 우리가 현 실재와 피조물의 의미를 묻고 그 기초와 목적을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된 이 계약을 생각하여야 한다.”15영원 이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결의에 따라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 이 결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겠다는 결의였다. 그리고 이 결의에 따라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피조물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다. 창조 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 사랑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 세계 전체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증언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의 실존 중에서, 창조물의 안에와 그것 위에 반드시 일어날 사실을 가리키는 징표와 지시와 약속이 되며 곧 창조주와 피조물의 만남과 공재(共在)와 교통이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둘의 통일이 되는 것이다.”161. 칼 바르트, 전경연 옮김, 『교의학개요』, 1983, 대한기독교서회, 51-52쪽.2. Ibid., 52쪽.3. Ibid., 53쪽.4. Ibid., 56쪽.5. Ibid., 61쪽.6. Ibid., 63쪽.7. Ibid., 64쪽.8. Ibid., 66쪽.9. Ibid., 72쪽.10. Ibid., 74쪽.11. Ibid.12. Ibid., 80쪽.13. Ibid., 81쪽.14. Ibid., 90쪽.15. Ibid., 90-91쪽.16. Ibid., 91쪽.https://m.blog.naver.com/1019milk/220235017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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