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내가 믿습니다(2)
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내가 믿습니다(2)
칼 바르트, 『교의학개요』: 내가 믿습니다(2)프로필YOUN2015. 1. 6. 4:21바르트 신학의 근거로서 삼위일체론: 주체의 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타자에 대한 묘사주체의 해석 틀에 근거하여 타자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타자가 스스로 말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다. 이것은 단지 주체 자신의 모습을 타자에게 덧씌우는 일이며, 주체에게 미리 전제된 것을 타자에게서 다시 발견하는 일에 불과하다. 바르트는 근대신학이 바로 이와 같은 잘못에 빠져서 그들이 전제한 인간학적 이상을 성서의 하나님에게서 찾아내려 하였다는 점을 강력히 비판한다.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건은 인간 주체의 해석 틀 안에 국한되어 일어날 수 없다. 만일 타자로서의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 하나님는 스스로를 주장하시기 위해 인간 주체의 해석 틀을 파괴시키며 찾아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가 『로마서 강해』 제2판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기(Krisis)’로 표현한 이유이다. 진정한 하나님, 살아 있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자신을 타자로서 주장하시는 분이시므로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신다. 따라서 그분은 ‘전적 타자’로서 모든 인간 적인 것들에 대해 심판과 진노를 선언하시는 분, 인간을 위기에 빠뜨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아무도 있을 수 없다는 『로마서』의 내용을 이와 같이 해석함으로써 모든 인간에 대해 ‘전적 타자’로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자 했다.이 점은 바르트의 후기 신학인 『교회교의학』에서까지 본질적으로는 변화되지 않는다. 물론 바르트는 후기에 이르러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하며 ‘하나님의 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급진적인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는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철회가 아니라 또 다른 차원의 신학적 발견이다. 인식론적으로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알려질 수 없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에게 은혜로우시며 인간의 편에 서 계시며 인간을 무한히 긍정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적 타자 개념은 사실상 바르트의 후시 신학까지도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인간학적 하나님 해석을 거부하고자 한 것이 바르트의 가장 핵심적인 고민이었으며, 이제 그의 신학은 이 자리에서부터 출발한다.인간은 자신의 미리 전제된 이해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스스로가 말씀하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라는 원칙에 자신의 모든 신학적 근거를 둔다. 여기서 바르트 신학의 가장 혁명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그는 계시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를 해명한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토대로 자신의 모든 신학적 체계들을 전개시켜간다. 이러한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19세기의 신학들과 대비시켜 보았을 때 명백하게 부각된다. 자유주의 신학은 삼위일체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 교의를 모순될뿐더러 불필요한 내용으로 생각하였다. 삼위일체를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 전체의 마무리돌(Schlußstein)로서 중요하게 생각한 슐라이에르마허조차도 이 주제를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었을 뿐 삼위일체가 전체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면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문제를 신학의 가장 첫 부분에서 계시의 문제와 관련시킴으로써 모든 신학이 삼위일체를 바탕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르트는 그 이전까지의 신학 체계들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축을 마련하게 된다.하나님은 자신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인간의 차원으로부터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원칙적으로 부당하며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실 때 가능하다. 인간은 계시 앞에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놓인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며, 또 그 계시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계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며, 계시의 내용도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계시자(Offenbarer)’와 ‘계시(Offenbarung)’와 ‘계시됨(Offenbarsein)’ 사이에는 긴밀한 일치가 존재한다. 계시는 순전히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여기에는 다른 인간적인 요소가 끼어 들어갈 틈이 없다. 바르트는 이렇듯 계시의 ‘주어’, ‘술어’, ‘목적어’의 구조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체성을 발견한다.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드러내셨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타자로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사건의 묘사하고 있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제 내용과 상관없는 관념적인 교의가 아니다. 또한 삼위일체는 성서의 단편적인 본문을 뒤져서 발견될 수 있는 신학의 잡다한 부분들 중 하나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바르트는 계시론에 근거한 삼위일체론으로써 ‘삼위성 안의 일체성’과 ‘일체성 안의 삼위성’을 체계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양태론적 해석과 종속론적 해석을 비판하는 훌륭한 신학적 근거로서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모든 신학의 출발점에 대한 고백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계시가 해석되도록 주도하신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이르려는 인간의 노력이 무능력할 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다.에밀 브룬너(Emil Brunner)는 바르트의 계시론에서 인간의 역할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은 반대로 생각해 보았을 때 바르트 신학의 강점이기도 하다.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제한된 인간 주체의 맥락을 찢고 들어오셔서 스스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우리의 폐쇄적인 세계에서 안주하지 못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곧 타자 일반에 대한 경험으로 확대될 수 있다면, 실재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경험으로 여겨질 수 있다면, 바르트 신학은 놀라운 함의를 지닌다. 이것은 주체의 예상을 계속해서 어긋나가며 주체를 당혹스럽게 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근대철학에서는 이러한 타자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외부 세계의 모든 대상들은 주체의 인식에 매개되므로 주체가 미리 설정한 인식의 질서 속에서 자리 잡아야 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의 주체는 자신의 인식에 근거하여 세계에 대한 법칙을 세울 수 있었으며 세계 전체를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였다. 반면 바르트에게서는 이러한 주체에 대항하여 주체의 질서에 갇히지 않은 채 오히려 그 질서를 무능력하게 하고서 자신을 계시하는 타자에 대한 경험이 신학의 제일 첫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그 자신이 미처 깨닫지는 못했겠지만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장-뤽 마리옹(Jean-Luc Marion) 같은 현대철학자들의 타자 이론에 앞서서 이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주장을 신학적인 방식으로 개진시킨 셈이 된다. 타자는 우리가 세운 질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며, 우리가 끊임없이 이전에 속해 있는 세계를 넘어서게 한다. 타자는 결코 완결된 질서 속에 포착되지 않으며, 타자로서의 실재 전체 역시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여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계속해서 발견하도록 만든다. 실재는 형이상학적 체계나 자연과학적 법칙 안에 담기지 않는 무한한 타자성으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는 것이다.내가 믿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바르트는 『교의학개요』의 서두인 제1-4장까지의 내용에서 자신의 교의학이 지닌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교의학’이라는 학문분야의 과제를 설정하며 사도신경의 제일 첫 고백인 “내가 믿습니다(Credo).”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말씀해 오시는 분이시다. 신앙이란 인간 주체의 자기 내면에 대한 증언이 아니라 스스로를 말씀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며 인식이며 고백이다. 이후에 전개될 바르트 신학의 내용들은 서두 부분에서 다루어지는 이 내용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교의학』 Ⅰ/1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는 계시론과 삼위일체론 역시 『교의학개요』에서는 “내가 믿습니다.”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이 때문에 책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서두에서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연구과제” 바르트에 따르면 ‘교의학(Dogmatik)’이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때그때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여기에 타당하도록 성서의 규준에 맞추어 신앙고백의 인도를 받아 해명하는 비판적인 학문이다. 교의학의 주체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선교할 것을 위탁받았으며, 이 복음의 선교는 교의학이 연구하는 대상이자 사실이다. 그러나 교의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복음의 선교를 다룬다고 하여서 자신의 절대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인간 역사의 오류와 한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교의학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다만 자신이 ‘자기가 깨달은 인식의 그때그때의 입장’을 해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세상 속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선포한다. 이때 교의학은 주석(Exegese)과 실천신학 사이에 위치한다. 교의학은 복음 선교의 유래나 방법과도 관련이 있지만 이것을 직접 묻지는 않고, 오히려 ‘지금 여기서(hic et nunc)’ 세상을 향해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Was)’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이러한 탐구는 교회의 근본이자 내적 생을 지어주는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도록 하는 ‘성서의 규준’에 맞추어 일어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비록 성서의 권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교부들의 증언을 비롯하여 교회 안에서 권위를 얻은 ‘신앙고백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교의학은 ‘비판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신앙은 신뢰이다.” 교의학은 복음의 선교 과정에서 지금 여기 선포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묻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을 믿습니다.”라는 교회의 고백에서 그 속에 들어가는 “……을”이 무엇인지가 교의학의 핵심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선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어야 한다. 이 대상이 결코 인간 주체 자신의 체험이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르트는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한다.“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한 만남이 문제된다. 그 고백문에는 ‘내가 ……을 믿습니다.’라고 쓰였다. 이 ‘을(an)’에 모든 것이 걸려있다. ‘크레도’는 이 ‘을’, 곧 신앙의 대상을 설명하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주체적 신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도신경은 이 처음말 ‘내가 믿습니다.’하는 것 밖에는 신앙의 주체적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뒤집어진 때,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행위나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의 충동을 웅변했을 때, 또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에 관해서는 침묵하였을 때는 결코 좋은 때는 아니었다. 신경은 주체의 행위에 대하여 침묵하며, 객관적인 신조를 말함으로써 가장 좋게, 깊게, 완전하게 우리와 관계있는 것, 우리가 반드시 되어야 하고 행하며 체험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성구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잃는 자는 그 생명을 도로 얻으리라 하는 말이다.”1바르트는 여기서 그가 이후에 보다 자세히 설명할 하나님의 영원 이전의 결의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자유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다. 이 내용은 사실상 바르트 신학 전체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믿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증언이다. 그 하나님은 영원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기로 결의하신 하나님이시며, 결코 인간을 비참함 가운데 홀로 남겨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내가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우리와 함께 계신 은혜로운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한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진다. 바르트는 “신앙은 인식이다.”라는 두 번째 설명에서 이야기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소개한다. 이것은 그의 계시론에 대한 간략한 요약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듣는다. 따라서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2라고 설명한다. ‘계시자’와 ‘계시’는 여기서 일치한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내고 있다.“이러하다는 것을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은혜롭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교 사상의 중심 개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은총의 말씀이다. 어디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하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듣게 하시는 분을 지시하고, 신조의 둘째 항으로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참 하나님, 참 인간이신 분이시고, 임마누엘,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다.”3이렇듯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물로서 주어진다. 이 선물은 우리에게 고귀한 자유를 가져온다. 이 부분에서 ‘계시자’와 ‘계시됨’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영원 이전부터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의하신 하나님, 인간과 함께 하시며 결코 인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여 있으며, ‘악’이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거부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극복된 ‘무(無, Nichtige)’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해방된 자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계시로서 발견하고 신뢰하게 되는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계시를 계시되게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에게 일으키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우리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할 능력을 갖춰있다는 것을 아무리 변호한대도 우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소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등장하여 와서 우리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와 만나고 이 만남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사요 우리 쪽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다.”4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를 얻어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감사하는 일이다. 이것은 나를 신뢰한다거나 다른 법칙, 권위를 신뢰한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법칙이나 권위들은 운명적인 형태로 인간을 구속하는 반면, 신앙은 이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 진정한 안정은 우리 편에 서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게만 있다.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약속을 신뢰한다.바르트는 신뢰로서의 신앙을 네 가지 요소로 풀어낸다. 신뢰란 “이를 반대하는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 배타적으로, 전적으로”5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이성’과 같은 인간적 근거들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이므로 바르트에게서 철저히 거부된다. 따라서 신뢰는 인간적 조건이나 상황을 배제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다. 또한 신앙이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최후의 결정적인 결단이므로 ‘단 한 번’이 문제시된다. 진정한 신앙은 한 번의 결단으로 그 뒤의 내 모든 생 전체를 좌우하며, 일시적인 한 순간의 상태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더 이상 인간적인 다른 진실에 의존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시도에 대한 포기이므로 ‘배타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은 삶의 특정 영역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그분의 말씀에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전적인’ 신뢰이다.“신앙은 인식이다.” 바르트는 이 항목에서 자신의 계시론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그는 우선적으로 신앙이 불가해한 가르침이 아니라 이성에 근거한 인식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이때 ‘이성적이’라는 말은 신앙의 내용을 논증으로 증명될 수 있다거나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신앙이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신비체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성서와 교회의 고백을 통해 선포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때 신앙을 깨닫는 일이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이념이나 철학적 가치에 국한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생래의 능력, 오성(悟性)과 감성에 의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가장 나은 경우에도 최고의 존재, 절대의 본질, 순수 자유 능력의 이념, 만물 위에 있는 존재 같은 것이다. 이 절대 최고의 것, 이 궁극적이고 가장 심오한 것, 이 ‘물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적 사고, 인간적 창안이 가진 직관과 제한된 가능성에 속한다. 이것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로 자신을 이해하도록 만들 때에라야 생각되고 인식될 수 있다.”6바르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는 원리를 명백히 주장한다. 계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을 조명하여 계시를 깨닫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인식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어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조명이 있고, 사람의 의식의 전달이, 또 이 교사의 인간 교육이 독특하게 일어날 때 성립한다.”7 바르트는 또한 다음과 같이 이 내용을 표현하기도 한다.“하나님은 대체 인식될 수 있을까? 사실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통하여 인식된다는 것이 참이고 현실적이므로 하나님은 인식될 수 있다. 이 사실이 일어날 때 인간은 자유로이 가능하게 또 유능하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한 신비이지만 하나님 인식은 전혀 그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움직여지고 방향이 작정된 인식이다.”8바르트는 그리스도교적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지(知, Wissen)’와 그것을 포괄하는 보다 깊은 차원의 ‘지혜(知慧, Weisheit)’를 구별한다. 라틴어로 둘은 ‘사이엔티아(scientia)’와 ‘사피엔티아(sapientia)’로 구별되며, ‘사피엔티아’는 그리스어 ‘소피아(sophia)’에 유래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별에서의 ‘지혜’란 증명 가능한 것이라거나 철학적 논증의 결과에 대한 앎이 아니다. ‘지혜’는 ‘실천적인 지’로서, 우리 삶 전체를 이끌어주는 통찰, 곧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한 앎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앙이 인식이라는 말의 의미는 신앙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후 논의되듯이, 인간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영원 이전부터 자신을 사랑하시기로 결의하셨으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신앙은 고백이다.” 신앙을 통해 하나의 결단이 내려진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인간 차원의 응답이 생겨나는 것이다. 신앙하는 인간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복종함으로써 응답한다. 이렇게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시간 중에서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실현하고, 완수하도록 만듦으로써 신앙이 있는 곳에는 역사가 일어난다. 바로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가 생기며, 이 공동체를 통해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다.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의 신앙을 공표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전한다. 이렇게 해서 신앙하는 사람은 자신의 신뢰와 인식을 공적인 영역에서 고백함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바르트는 세 가지 형식의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을 이야기 한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말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 자신의 말이란 바로 성서의 언어를 비롯한 특수한 교회의 용어이며, 바르트는 이를 ‘가나안의 언어’라고도 표현한다. 둘째로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단순히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가나안의 언어’로만 신앙을 고백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언어는 교회 밖의 일상적인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불경건하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도 이야기한다. 또한 그는 나치 당시 복음주의 교회들이 교회 밖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였으므로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작성하여 전 세계 교회가 나치에 대항해서 싸우도록 이끈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이 그의 주장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셋째로 교회는 “현실에 부합하는 행위와 태도 가운데”9 고백해야 한다. 바르트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두 번째 형식과 구별하여 신앙인들의 고백이 특정한 영역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전 인격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1. 칼 바르트, 전경연 옮김, 『교의학개요』, 1983, 대한기독교서회, 24쪽.2. Ibid., 26-27쪽.3. Ibid., 26쪽.4. Ibid., 27쪽.5. Ibid., 30쪽.6. Ibid., 35-36쪽.7. Ibid., 36쪽.8. Ibid., 36-37쪽.9. Ibid., 49쪽.https://m.blog.naver.com/1019milk/22023104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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