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신학의 이단성 2_김효성
자유주의신학의 이단성 2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훼퍼는 급진파로 분류되며 또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이다. 인용된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New York: Macmillan, 1959.
Ethics. New York: Macmillan, 195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67.
1.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145)
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146)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147)
3.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148)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149)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150)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51
4.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152)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153)
5.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154)
6.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영감[문자적 영감]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155)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156)
7.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서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157)
8.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158)
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159)
10.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160)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161)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救贖史) 학파(the Heilsgeschichte)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Epworth, 195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rev. ed., 1963].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8.
1.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162)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163)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164)
하나의 전체로서의 구속사는 ‘예언’이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165)
그 과정 전체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으로는 오직 계시의 대상일 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그것들은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결정을 통한 확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성경의 책들(역사서)에 언급된 것은, 완전히 믿음과 독립된 역사적 시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166)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와 본질들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167)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168)
3.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16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17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171)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 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172)
4.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발견한 바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용감하고 기쁜 원시적 기독교의 소망과, 불멸적 영혼의 잔존에 대한 평화로운 철학적 기대 간에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73)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174)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혼의 불멸]의 이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17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1968년부터 1994년까지 독일 뮌헨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었고 판넨베르크 학파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Revelation as History. New York: Macmillan, 1968.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2nd ed. 1977].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The Apostles' Cre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2.
1.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176)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현재 사건들의 규명된 목표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일어난 후에만 하나님의 신성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계시를 역사의 끝에 두는 것은 계시의 간접성에 근거한다.177)
바울의 복음은 그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이 그 완성된 형태로, 들리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의 저작 사이에 바울의 사상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반대되는 가장 작은 증거가 아니다.178)
2.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근본주의적 관점은 텍스트에 적힌 진술 하나하나에 대해 모두 무오류(無誤謬)의 진리성을 고수해야 한다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 . . 이럴 경우 오히려 성경 본문 자체가 지니는 진정성을 말살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179)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178)
3. 사도신경의 진리성(眞理性)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181)
사도신경의 표현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182)
4.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과정들의 미래이었다.183)
5.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가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184)
신학은 예수의 처녀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185)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186)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187)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188)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189)
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를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190)
8.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191)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192)
물론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의 죽음간의 이 교통은 예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193)
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선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194)
10.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방식에서 나온다.195)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독일의 신약신학자이며,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65.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Scribner, 1971.
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19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 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197)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 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 나왔을 것이다.198)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199)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200)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2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 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절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202)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203)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204)
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칭의(稱義)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205)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206)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207)
피에르 드 샤르댕(Pierre T. de Chardin, 1881-1955)
피에르 드 샤르댕은 카톨릭 예수회 신부이며 철저한 진화론자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Hymn of the Universe.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Divine Milieu: An Essay on the Interior Life. New York: Harper & Row, 1965.
Science and Christ. New York: Harper & Row, 1968.
The Future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9.
1.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208)
2.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209)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210)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211)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212)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213)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214)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 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 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215)
3.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216)
4. 에큐메니칼[교회연합]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217)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218)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219)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크리스터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장이었고 신자유주의 학파로 분류된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Krister Stendahl. New York: Harper & Row, 1957.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8.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Edited and Published by National Geographic Society, n.d.
1.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22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221)
2.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222)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223)
3.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224)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225)
4. 기독교의 절대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드러나게 다르다.226)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린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227)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228)
4. 교회에 끼친 영향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단지 몇몇 신학자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상당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이 배교적이 되었고 미국의 교회들도 1920년대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유럽과 미국 교회들의 변질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예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 각 교파 교회들 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잘 증거한다.
1967년의 제프리 해든의 설문 조사
1967년,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이 미국의 성직자 10,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답한 7,441명의 응답 결과가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고, 그 후 여러 차례 인용 혹은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미국 교회의 평신도들이 아니고 성직자들(목사들)이 얼마나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증거한다:229)
(1)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UMC) 성직자들의 60%, 감독교회(ECA) 성직자들의 44%, 연합 장로교회(UPC) 성직자들의 49%, 침례교회(ABC) 성직자들의 34%, 루터교회(ALC) 성직자들의 19%, 미주리 대회 루터파(MSLC) 성직자들의 5%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2)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51%,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0%,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35%,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3%,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3)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37%,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47%,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33%,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14%, 미주리 대회 루터파 성직자들의 7%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4)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 미주리 루터파 성직자들의 24%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1985년에 시작된 '예수 세미나'
1985년 약 125명의 개신교와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하였다.230) 그 결과, 1988년 예수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거기에는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를 표시했다. 또 1993년에는 오복음서: 예수님이 참으로 말씀하신 것(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994년 초까지 이 세미나의 대략적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며,231)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 연구가 얼마나 배교적인지를 잘 나타낸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1) 예수의 말들의 오직 20%만 실제로 그의 말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2) 주기도도 예수의 말이 아니다.
(3)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4)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5) 예수는 죽은 자들로부터 결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6) 예수는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7)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8) 예수는 독신이 아니었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1999년, 이 세미나를 주도하는 로버트 펑크는 미국의 한 연합그리스도교회의 강연에서 "[성경에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확실한 것은 20퍼센트도 안 된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나 비유들과 재치 있는 말들은 역사적이다," "니케야 신조는 넌센스이며 수정할 가치가 없다," "고대 교회의 신조들은 상상의 산물들이다"라고 말하였고, 그는 그 모임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인 다음과 같은 21개의 명제들을 배부하였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창세기 이야기의 비(非)문자적 해석은 원죄의 교리를 종결지었다.
(4)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5)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하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6) 예수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7)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8) 예수가 처녀에게서 났다는 것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에 대한 모욕이다.
(9) 속죄의 교리는 이성적이지 못하고(sub-rational) 또한 윤리적이지 못하다(sub-ethical).
(10)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1)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2)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젼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3) 예수는 인간의 선함을 믿었다.
(14) 예수는 축제(celebration)를 믿었다.
(15) 예수는 성적 방향성[타고난 기질]에 근거한 경계선을 포함한 사회적 경계선을 거부하였다.
(16)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보자들은 없다.
(17) 예수는 예배 의식들을 믿지 않았다.
(18) 하나님의 나라는 끝없는, 영구적 방랑의 여행이다.
(19) 다른 신화들이 그렇듯이, 성경의 정경(正經)은 시대에 맞추어 축소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20) 성경은 객관적 행동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
(21) 예수의 비젼의 재구성은 항상 수정되어야 한다.
2004년 바나 연구회의 보고
2004년, 바나 연구회(Barna Research Group)는 미국 개신교 목사들의 49%가 다음과 같은 성경의 핵심적 신념들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1) 성경에 기초한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가 있다, (2) 성경의 교훈은 정확하다, (3) 예수는 죄가 없으셨다, (4) 사탄은 실제로 존재한다, (5)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다, (6)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다, (7)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해야 할 개인적 의무를 가지고 있다. 두 개의 가장 큰 교단 중, 성경적 견해를 가진 목사들의 비율은 남침례교회가 71%로 가장 높았고, 감리교회가 27%로 가장 낮았다.233)
미국 장로교회(PCUSA)
1923년, 미 북장로교회의 '어번 선언서'
1923년 12월 26일, 미 북장로교회에 속한 150명의 목사들이 뉴욕주 어번시에 모여 한 문서를 발표하였다. 후에 어번 선언서(Auburn Affirmation)라고 불리운 이 문서는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내용은,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하고 1916년, 1923년에 재확인한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한 내용이란 다음 다섯 가지 교리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라는 것인데, 그 교리들은 첫째로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둘째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셋째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넷째로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다섯째로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 등이다. 어번 선언서는 이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특히 성경 무오의 교리는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쉬운 교리라고 하였다.
미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신앙고백
1967년 미 연합장로교회[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가 됨]가 채택한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234)
1) 성경의 초시간적 진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에 대하여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유일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하신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수락되고 순종된다. 성경은 다른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비길 데 없는 증거이다. . . .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 형식, 문학 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경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1. 3. 2).
2) 타종교들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종교들과 자신의 종교간의 비슷한 점들을 발견하며, 모든 종교들에 대해 열린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반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갱신을 촉구하시려고 비기독교인들의 통찰력을 사용하셨다(2. 1. 3).
3) 속죄의 교리를 한 이론으로 돌린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목의 행위는 성경이 여러 가지 방식들로 묘사하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어린양의 제물,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주심, 제사장의 속죄로 불리며, 또한 종의 속전(贖錢), 빚의 지불, 법적 형벌의 대리적 보상, 그리고 악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로 불린다. 이것들은 모든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에 머무는 한 진리의 표현들이다(1. 1. 1).
4) 화목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보인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2. 1. 1).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 3. 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해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 1. 1).
교회는 모든 민족차별의 폐지를 위해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 1.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 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 1. 1).
또한, 미 연합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서약도 변경하였다. 변경된 임직서약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선언되지 않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지도 아래 행한다고 선언된다. 1965년 5월 17일자 자유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앤드 크라이시스(Christianity and Crisis)는 말하기를, “새 신앙고백서는 1924년 어번 선언서의 교리적 노선으로 내려간다. 40년 전에 겨우 허용되었던 소수파의 견해가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하였다.235)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의 케이스맨 목사 사건
1981년, 미 연합장로교회(오늘날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재판국은, 그 총회 내에서 사역하던 연합그리스도교회 소속 맨스필드 케이스맨(Mansfield M. Kaseman)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무죄성(無罪性), 대리적 속죄, 육체 부활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지노회가 케이스맨의 견해를 새 임직서약에 의해 허용된 ‘용납할 만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옳았다고 판결하였다.236) 미 연합장로교회는 이단을 제거할 뜻이 없음을 명백히 드러내었다. 이것이 배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2000년,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수상함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루이즈빌 장로교 신학교와 루이즈빌 대학교가 수여하는 2000년 루이즈빌 그로메이어 상과 상금 20만불을 받았다.237)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3년 1월 11일자는 그를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1993년 1월 23일자는 몰트만이 삼위일체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절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의 신학을 위해 문을 연다고 말했다.238)
자료출처 http://www.oldfaith.net/03modern/01자유주의신학.htm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