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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과제들과 교회 및 그 신학

현대사회의 과제들과 교회 및 그 신학
http://cafe.naver.com/modernth/999   
김영규 목사-개혁주의성경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칸트나 에드문트 훗설이 제 과학들과 철학 자체를 비판하듯이 문명 혹은 문화로 인한 사실과 자연적 사실, 혹은 자연적 사실이나 자연주의적 사실과 있는 그대로의 사실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런 구별들은 제 과학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원리적으로 그런 사실들 중 어느 사실에도 기초하거나 의존하고 있지 않고 신적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즉 무로부터 인격적 대상을 창조하시고 그 인격적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런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종교나 일반 학문들과 기독교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진리가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사실에 의존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의미로서 계시된 사실들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질적인 무한한 비약 때문에 처음부터 독단적이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 닫힌 체계로 되어 있는 생명체들에게 그런 계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혹은 명령적이든 설명적이든 관계없이 독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다른 의미로서 자신과 동일할 정도로 높은 차원에서 다른 인격체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그 창조와 더불어 모든 것이 있도록 은혜를 주신 바로 그 창조자가 스스로 나타내시기 전까지는 피조된 자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독단적이지 않고 적응적이고 설득적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기본 의미들에 따라서 신학이 제 학문과 대화할 수 있다.  
문화와 사실의 구별
플라톤은 그의 언어 정의들에 대해서 다룰 때, 그 당시 법에 대한 통용되는 그리스 정신을 반영하여 소위 헌법(노모스)과 법률(패피스마 혹은 도그마)을 구별하여 정의하였다. 고상한 권위를 가진 한 개인의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합리성을 내세우는 다수의 횡포에 의해서 이루어지든, 근원적으로 그 모든 법들은 개인에게 독단적인 성격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권위의 상징으로서 그런 법은 민주사회로 점점 발전된 현대사회에 중요한 기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올림픽 대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치사회로 가는 현대사회의 핵심 기능의 내용에 들어와 있다. 일찍이 헬라-로마 문화권 안에 있었던 유대인들이나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모세의 책이나 구약 전체에 대해서 플라톤의 정의의 면에서 전자의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종종 하나님의 이름으로 후자의 용어를 성경에 대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세기의 요셉푸스는 후자의 용어에 따라 구약의 모든 기록들을 신의 도그마라고 칭하였고 역시 신약의 사도들을 계승한 로마의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도 신약의 모든 기록들을 후자의 개념에 따라 주님과 사도들의 도그마라고 칭하였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물론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도시문화사회들은 정기적으로 혹은 임시적으로 모인 민회나 관원회의(원로원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결정사항들을 선포하는 수많은 비문들을 남긴 것처럼, 역시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난 대로 교회의 첫 사도들과 장로들도 그 회의의 결정된 사항들을 후기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의 발전된 도그마의 문서형식에 따라 교회들에게 편지하였다.
그 편지는 오래된 근동사회나 그리스, 헬라, 로마시대에 시장 앞이나 성전 앞에 세운 비문들처럼 후기 로마사회에 볼 수 있는 하나의 고대의 문서출판의 한 방식이었다. 이미 성경에는 그렇게 당시대의 문명과 문화의 흔적이 있지만, 시대적 문명과 문화의 상대적 오류들이 성경에는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이레니우스 이래 계속 교회는 성경에 그런 오류가 없음을 주장해 왔다.
그런 문화적 흔적은 마치 현대사회의 뿌리에 있는 변형된 외래 문화의 영향에 비해, 헬라시대나 로마시대에 일정한 거리마다 있는 우편국에 3시간 혹은 2시간 단위로 문서들이 도착하는 유명한 포발제도가 현대사회에 미친 형식적인 내용과 비교될 수 있다. 여러 민족사회에 수용이 되고 있는 그런 문화들은 지배문화라기 보다는 합리적 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진리와 문화를 구별할 수 있듯이, 지금 문화와 사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석기시대의 문화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해도 태평양 조그만 섬에도 남아 있는 석기문화와 고대 근동사회의 석기문화와는 시대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화의 근원지에서는 문화들이 쉽게 사라지고 빨리 지나간다. 문명과 문화의 근원지로부터 먼 지역일수록 오래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문화 중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진정 자랑할만한 것이 있다면 우리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민족주의 입장에서 본 우리말과 객관적 사실로서의 우리말은 서로 구별될 필요도 있다. 사실로서의 우리말은 우랄알타이 문화보다 오히려 인도를 장기간 지배한 아리안족 문화 이전의 드라비다언어 문화와 만나고 있다. 인도문명의 근원인 하플라문화가 아프리카의 사하라문화와 만나고 있다면, 일부 우리의 기본 인칭명칭은 드라비다언어 문화와 만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본 친족명칭들은 놀랍게도 아주 오래된 고대근동사회의 셈문화와 함문화가 섞여 있었던 시대의 언어들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시대적으로 아주 분명히 구별될 수 있는 '할아비'와 '할어미'의 경우 주전 2400년 이후 '아비-할'과 '어미-할'의 언어방식 이전의 방식과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대 슈메리언어 많은 단어들이 우리말과 많은 단어들이 일치하는 드라비다언어보다 더 우리말에 더 많이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순수한 언어인 '독(항아리)'이란 칭호는 후대 게르만족의 언어와 우리말이 만나는 '그릇'보다 오래된 주전 3000년대 토판들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의 접속사 중에 '~ 와 ~'의 사용방식은 고대 셈족들(주전 2300년대)과 만나는 문장 뒤의 '~며'(and)나 그리스 언어에서 볼 수 있는 단어 사이의 '~ 과 ~', 주전 2000년대의 셈족의 단어나 문장전의 '~우' 혹은 '~와', 역사적 유럽 언어권(고대 이탈리아 언어, 켈트족 계열언어 등)에서 발달된 단어 뒤의 '~과'와는 다른 방식으로서 사라진 옛 에블라토판들(주전 2400년 전)에서만 볼 수 있다.
확실히 모계를 통해서 유전된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에 의해서도 한국인은 몽고-퉁구스인이나 일본인, 우랄인보다 중동인, 드라비다인, 이란인에게 가깝고 중동인들 중에 북쪽 터키인에게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역시 미토콘드리아 DNA에 있어서 몽고-퉁구스인보다 가까운 고대 게르만족이나 고대 그리스인들의 경우에도 적어도 '불'이란 용어를 같이 사용하면서 함께 거주하였던 시기에 '하나', '둘', '많이'와 같은 숫자문화도 함께 공유하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고대유물 중 독특한 여신상의 경우, 실제로 고대 터키 땅의 세계 최초 도시문화의 여신상과 일치되는 점과 그 유적에 나온 인물상이 동양적이라는 점도 간과될 것이 아니다. 지금 그런 뿌리 찾기를 통해서 세계를 향해 가는 한국사회나 글로벌사회로 가는 모든 사회는 고유한 문화보다 객관적 사실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비가역적 사실들과 신학
순수학문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비가역적 사실들을 발견하고자 추구하고 있다. 토마스 쿤은 과학적 혁명의 구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비가역적 사실들의 누적이란 개념을 발견하였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에만 초점을 둔 나머지 역사적 상대주의 및 회의주의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각 나라가 자신의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의 한 문화권을 위해서 좀 더 공헌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 숨어 있는 비가역적 사실들의 누적에 초점을 맞추어야 볼 필요가 있다.
교회와 그 신학이 만나는 부분은 이런 누적된 비가역적 사실들과 만나고 있다. 성경은 창조의 기록을 통해서 우주의 기원을 과학적 환원주의처럼 원리로 돌아가 축소되기를 원치 않고 인격체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나머지 모든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그 인격체가 어떤 인격체로 존재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인격체는 우주보다 크고 그것에 초월해 있기 때문에, 피조물 세계의 어떤 표상으로 대신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빛과 그 만물의 창조성 사이에 우주의 존재 근원과 목적으로서 그 인격체의 속성들이 있다.
그 인격체의 역사에는 창조보다 먼저 어떤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그 속성들과 창조 사이에는 영원한 작정이나 예정에 대한 계시가 있다. 인류의 기원과 발전 및 멸망은 지구나 우주의 기원과 파괴, 사람의 계속적 고통과 죽음보다 훨씬 깊은 데 있다는 말이다. 죄란 창조자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치명적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식의 지향성의 돌발적인 비가역적인 전환이 원인이 되어 양심, 심리적 도피 행위, 거짓, 핑계, 고통, 살인 등으로 발전된 것이다.
구원이란 이런 죄로부터 창조자의 특별한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담론들과 제 과학의 물음들이 이런 문제와 관계가 없는 물음들이기 때문에, 신학은 제 과학의 체계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비판적이다. 태양도 중심이 아니요 지구도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도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모든 원리들이나 전제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기반이요 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빛은 비가역적이고 그 속도는 영원한 상수이기 때문에 태초의 정보나 우주 밖의 정보가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다면, 그 비가역성과 그 속도, 열역학 제2 법칙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이다. 광자나 중성미자 등 소립자들의 속도나 자체의 스핀의 방향과 속도가 우주의 태초가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도, 조그만 생명체가 갖는 닫힌세계와 열린세계의 균형점,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에 여러 형태의 스칼라-벡타 공간들 사이의 경계점들이 보존되고 있는 한, 극저물리학에 있어서 빛의 정지나 엔트로피의 제로의 경계들인 우주의 한계 영역을 포함한 모든 것을 동시에 생각해야 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우주는 수많은 불변의 상수들(프랑크 상수, 빛의 속도, 중력상수, 최근 변한다고 알려진 알파상수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체세포복제에 의한 고등동물의 복제나 인간복제, 인간과 같은 로봇의 제작에 대해서 교회가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 인간의 창조와 남자의 뼈로부터 여자의 창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기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비가역적 사실들의 발견을 통해서 그런 기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자연에 가까운 창조물을 구현하고자 하면 할수록 매개변수 혹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변수들이 차원적으로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인간의 치명적 인자들인 지향성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인식구조나 항상 구체적 표상을 추구하는 판명성의 오류 때문에, 환경을 동시에 창조하지 못하는 제 2의 창조물들은 첫 창조를 파괴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의식이나 마음이란 비유로 있는 것이요 그로부터 산출된 수학적 개념이나 표상들은 첫 창조의 자연에는 없다. 이런 인간인자들에 의해서 이미 파괴해 버린 시공간세계 밖에서는 우주 자체가 인간의 실수와 죄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기억 정보 덩어리일 수 있다.          
맺는 말: 바른 교회와 바른 신학에 대해서
그러나 성경은 우주 창조를 더 좋은 선물을 위한 예비 선물로 소개하고 있다. 더 좋은 선물이란 우주를 선물로 줄만큼 그 가치를 높인 인간에게 창조자 자신까지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물로 받을 만큼 고귀한 존재로 초대받기 위해서는 그 삶의 내용과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야 했다. 그 삶의 내용과 방식이 처음 신명기 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가치의 내용을 인간이 그 모든 역사를 통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지금 온 세계로 확대된 교회와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내용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런 선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라고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자유성과 공적에 집착하였던 것이다.
이런 집착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속성들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에 대해서, 성령에 의한 구원의 효과들에 대해서, 마지막 이 모든 것의 가장 먼 원인으로서 영원한 예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처음부터 세상과 그 가치기준이 달라 핍박받고 있는 교회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왔다.
바른 교회의 사명과 바른 신학은 이런 성경의 기본 선포들을 어떤 원인이나 형태로도 가감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교회의 존립이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활동(학문, 설교, 정치, 권징 등), 예배의식, 생활, 사고, 휴식까지도 그런 독특한 삶의 원리와 내용을 보존하고 빼앗기지 않게 하며 오히려 잘 구현화 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바른 교회, 바른 신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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