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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자료1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1_김효성

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김효성 목사
2018년 6월 10일  수정

머리말
본서는 저자가 이.전에 쓴 현대교회문제(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현대교회문제: 배교, 타협, 혼란, 개정증보판(옛신앙, 2001), 현대교회문제 자료집(옛신앙, 2004), 및 현대교회문제, 제3판(옛신앙, 2007)에 있는--그 중 일부는 지금은 절판된--자료들을 모은 것이다. 이렇게 한 목적은 오늘날 교회들 속에 널리 들어와 있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좀더 잘 알리기 위함이다. 저자는 이로써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교인들이 바른 분별력과 지식과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생활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본서나, 저자가 쓴 이전의 책들은 현대신학을 학문적으로 논한 것이 아니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자료에 근거해서 확증하고 비평하려는 책이다. 저자는 목회자로서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자료들에 인용된 일차적 자료들을 다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자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누가 자유주의 신학이 없다든지 그것이 이단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는 무지하든지 사실을 은폐하려는 자일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면, 저자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현대 교회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낙태와 동성애의 포용,교리적 분별력 없는 교회연합운동, 우상숭배적 천주교회와의 친교, 잘못된 선교 개념, 심지어 종교다원주의적 경향, 말씀 중심의 옛 길을 벗어난 은사운동,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는 목사들의 타협적 태도,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의 안수, 세속적인 교회음악과 예배 방식의 도입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현대 교회에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직시하고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이 주의 종들에게 얼마나 있는지 매우 염려된다. 주께서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편지하게 하시면서 교회들의 문제들을 지적하셨다(계 2-3장). 바른 교회의 건립은 주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께서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셨다"고 증거하였다(엡 5:26-27).

오늘날 교회의 정로(正路)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천주교회를 포용치 않는 것이다. 또 참 기독교는 은사 체험을 추구하지 않고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옛 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고 옛 길, 바르고 선한 길을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오늘날이 엘리야 시대 같고(왕상 18:21-22) 미가야 시대 같고(왕상 22장) 예레미야 시대 같을지라도(렘 5:1),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생각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불변적 말씀인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를 생각하고 바른 길을 구해야 하며, 비록 그 길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그 길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 66권에, 그리고 오직 거기에만 밝히,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 글들이 오늘 시대에 교회들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여 교회의 정로(正路)를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참고와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내용 목차

 1. 비평의 필요, 근원, 분류

 2. 기독교와의 차이

 3. 이단 사상의 예들

 4. 교회에 끼친 영향

 5. 윤리적 부패

 6. 성경적 반박

1. 비평의 필요, 근원, 분류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말한다. 다수의 현대 신학들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온 하나님의 진리들을 버리고 표류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틀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신학은 한마디로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들을 포용하거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평의 필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평이 필요한 까닭을 간략히 생각해보자.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가장 무서운 이단적, 적그리스도적 사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마 7:1)은 성도 상호 간에 사사로이 판단하고 비평하지 말라는 뜻이지, 주의 종들이 교리적 이단들을 비판하지 말고 묵인하고 포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였고(마 7:15),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분별하라"고 하였다(요일 4:1).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단에 대해 명확히 비판하였고, 디모데후서 2:17에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들며 비판하였다. 유다서 3절은 이단에 대하여 힘써 싸우라고 교훈하였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이단이며 적그리스도적 사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자를 포용치 말아야 하고 또한 그를 포용하는 자들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면 신앙생활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생활은 연결되어 있다. 경건한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도 부패할 것이며 그러면 교인인지 세상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왜 유럽이나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쇠잔해졌는가 하는 한 이유이다. 교회가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 죄 씻음을 받고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감격이 없다면, 사람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회에 진리가 있고 기쁨과 감격과 새 생활이 있어야,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임을 바로 알아야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 우리 자녀들이 교회를 선택하고자 할 때 아무 교회나 출석하지 않고 바른 교회를 찾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비교적 순수한 교회에 속할 의무와 특권이 있다. 참 성도는 자유주의적 교회에 속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협의회(WCC나 NCC)에 속한 교회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나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측) 등에 속한 교회들이 과연 건전한 교회들인가 살펴야 한다. 참된 성도들은 성경적 신앙을 지키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회에 속해야 한다.

교회 소속 문제만 아니라, 교회연합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성경적 보수 교회들이 자유주의적 혹은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함께 주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주께서 그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외국 교회들과의 교류나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보수적 교회들은 보수적 교회들이나 단체들과만 협력해야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활동들은 조만간 부패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왜 처음에는 건전하게 시작되었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점점 변질되었는가 하는 주요한 한 이유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받아들이게 하고 또 목사들의 사상을 변질시켜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背敎) 운동을 분별하고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 사상인가를 잘 분별하고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녀들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대처해야 한다.

 근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 방식에서 나왔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인간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도 비평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 즉 소위 '고등비평'이라 불리는 성경의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또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 철학자 칸트의 사상은 지성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이나 촬스 다윈의 진화론 등의 사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의심과 불신앙의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고 성장하였다. 

 

  분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쉴라이엘마허와 릿츨과 하르낙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던 불신앙적인 신학 사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밥죤스 대학교의 스튜어트 카스터(Stewart Custer)는 그것들을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는 본서에 인용된 인물들임.)

1. 구(舊)자유주의--*Adolf Harnack, *Harry E. Fosdick, Henry P. Van Dusen, L. Harold DeWolf, Nels F. S. Ferre

2. 후(後)불트만 학파--*Rudolf Bultmann, Hans Conzelmann, Erich Dinkler, Ernst Käsemann, Günther  Bornkamm,  Ernst Haenchen, Reginald H. Fuller

3. 해석학파--Gerhard Ebeling, Ernst Fuchs, James M. Robinson

4. 불트만 급진 좌파--Herbert Braun, Manfred Mezger

5. 편집 비평학파--Willie Marxsen

6. 급진파--*Dietrich Bonhoeffer

7. 과정 신학--Schubert Ogden, John Cobb, Charles Hartshorne, Norman Pittenger

8. 세속화 신학--Paul van Buren, Harvey Cox, John A. T. Robinson

9. 신 죽음의 신학--Thomas J. J. Altizer, William Hamilton

10. 진화론 신학--*Pierre Teihard de Chardin

11. 신정통주의--*Karl Barth, Emil Brunner, Karl Heim,

    [영국] *C. H. Dodd, Peter T. Forsyth, [미국] *Reinhold Niebuhr, Richard Niebuhr, William Hordern, *Paul Tillich,  [스칸디나비아] Anders Nygren, Gustave Aulen,

12. 독립파--Helmut Thielicke, Ethelbert Stauffer, *Joachim Jeremias, Jürgen Moltmann

13. 판넨베르크 학파--*Wolfhardt Pannenberg, Rolf Rendtorff, Trutz Rendtorff, Ulrich Wilckens, Klaus Koch, Martin  Elze, Dietrich Rössler

14. 구속사 학파--*Oscar Cullmann, W. D. Davies, Werner Kümmel, Otto A. Piper, Eduard Schweizer, Alan Richardson, A. M. Hunter

15. 신(新)자유주의--Millar Burrows, Floyd V. Filson, George E. Wright, Carl E. Braaten, Paul Minear, *Krister Stendahl, Charles C. Anderson, Hugh Anderson 


 

2. 기독교와의 차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것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의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메이천은 당시의 논쟁을 이렇게 표현했다.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싸움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 신앙과 싸우고 있는데, 이 종교 신앙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파괴적일 뿐이다. 현대의 이 비(非)속죄적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린다.1)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 1924년 1월 3일자 사설은 두 파의 차이를 더욱 인상적이게 이렇게 말했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는 오는 세대들을 위해 우리 세대에 의해 아마 해결될 문제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들에게와 현대주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어느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어느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그리스도인가, 어느 성경이 기독교의 성경인가, 어느 교회, 어느 하나님의 나라, 어느 구원, 어느 종말이 기독교의 교회,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종말인가? 미래가 말해 줄 것이다.2)

자유주의에 의한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교리는 기독교적 경험 혹은 생활을 한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표현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며 따라서 교리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고 한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는 태도이었다. 19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쉴라이엘마허는 말하기를, 종교는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며, 종교의 핵심은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항상 그러하였고, 종교인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다. 19세기 중엽, 릿츨도 좀 다른 각도에서이긴 하지만 말하기를,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사람의 가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19세기 말, 하르낙도 주장하기를, 사람이 스스로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했다.3) 하르낙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했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4)

이들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 혹은 생활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 더 정확히 말하여 전통적 교리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윌리암 호던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적 태도를 이렇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방식은 기독교 신학을 현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계의 초기 신조들이 작성되었던 이후 세계는 급격히 변해 왔고 그래서 그 신조들은 현대인에게 낡고 비실제적이게 들린다고 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현대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방식들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해리 E. 포스딕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 즉 ‘영속적 경험들’을 표현해야 하고, 이것들을 과거에 표현되었던 ‘변하는 범주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영속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악을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으며, 이것은 전통적으로 악을 파괴하고 선을 세우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범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더 이상 이 낡아빠진 범주[재림]를 보존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이 고대의 사고 방식이 표현하려고 했던 진리를 믿을 수 있다고 했다.5)

메이천은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대 자유주의가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특수한 점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기독교 교리들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救贖)의 교리들에 대해 과학적 반론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 특수한 점들을 단지 종교의 어떤 일반 원리들의 시대적 상징들로 생각하며, 그 일반 원리들을 건지려고 하고, 또한 그것들을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6)

 

 성경에 의한 기독교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이 아니고 교리에 근거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또한 기독교 교리는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기독교는 교리(敎理, doctrine)에 근거함

기독교는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여기에서 교리란 단순히 진리의 진술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고찰함으로써 확인된다. 최초의 기독교 전파자들은 단순히 어떤 신비적 경험이나 하나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는데,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2-23에서 그가 전파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고, 고린도전서 15:3, 4에서 복음의 요지를 언급할 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그 시초로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에서도 확인된다. 로마서 16:17,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의 본을 굳게 붙들라"(원문 직역).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직역).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바른 교리가 본질적임을 전제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임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말과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또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시편 102:26-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들에서도 확증된다. 첫째로,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다.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면, 그것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확증하는 표임을 보인다.

셋째로, 기독교 복음은 목격한 증인들의 증거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그들의 목격자적 증거들의 최후 확증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와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 성격들에 의해서 확증된다.

덧붙여, 성경에는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이 분명한 말로 선언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사도 시대의 교회들이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다. 아무도 그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그 고정된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고 후시대에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두 사상 체계의 차이는 실로 심각하다.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들을 경시하고 쉽게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여기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異端性)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이나 그러한 포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큰 실수요 불성실한 일이다.


 

3. 이단 사상의 예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들의 예들을 전부 다 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또한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것은 다음에 인용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예들을 통해 분명하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로서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임을 부정하고,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그의 주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 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7)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8)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9)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10)

 

 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11)

축자(逐字, 단어)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13)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14)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15)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16)

 

 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17)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18)

 

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19)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20)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21)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22)

 

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23)

 

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24)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25)

 

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28)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2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30)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31)

 

10.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32)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33)

하나님의 ‘예’[용납]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36)

 

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은 스캔들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다.”37)

 

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38)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39)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C. H. 다드는 영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신약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29.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32.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51(1936).

About the Gosp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 sity Press, 1953.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40)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41)

요한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42)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43)

 

2.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4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45)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 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 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46)

 

3.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도덕에 위험물이 된다.47)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48)

 

4.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49)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50)

 

5.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51)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진다.

그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즉 우주의 의미를 표현하는 생애의 기록이다. 영원한 로고스[말씀]가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 생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서이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 . . 그 서두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어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신적 의미 혹은 원리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바로,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으나 실제상 그와 분리되지 않는, 이 원리이다’.52)

 

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귀라고 간주한다.

요한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이기 때문에 . . . 부활이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느 저자들에게 가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의를 거의 가질 수 없다.53)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승귀(昇貴)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지만.54)

 

8.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56)

 

9.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57)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58)

 

10.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정한다.

그 서신의[데살로니가후서의] 첫 번째 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구절(7-10절)은--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것이 문체에 있어서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고 논평했는데--유대교적이든지 혹은 유대-기독교적이든지 간에 실상 당시의 어떤 묵시 문학의 인용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거기에는 그 내용에서나 그 일반적 어조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59)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라인홀드 니이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회윤리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Beyond Traged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38.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43.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55. 

 

 1.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60)

 

2.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61)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62)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63)

 

3.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64)

 

4.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반대론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65)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66)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67)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68)

 

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69)

‘처녀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70)

 

7.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71)

 

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72)

 

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73)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상징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내버려질 수도 없다.74)

 

10.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75)

 

11. 마지막 심판을 부정한다.

신약의 상징론에서 에스카다(eschata) 혹은 ‘마지막 일들’은 세 개의 근본적 상징들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부활이다.76)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77)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루돌프 불트만은 불트만학파의 시조이며 신약신학자이었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Scribner, 195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asil Blackwell, 1970.

Theology of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1951-55.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1. 

 

 1.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적 증거성을 부정한다.

그 두 이야기들은 역사적 서술들로서 조화될 수 없다. 실상, 그렇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각 이야기의 독특한 의도를 파괴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16-20에 나오는 두 장면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믿을 만한 역사적 전통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78)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메시아 혹은 인자(人子)는 유대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난의 예언들에서 인자라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이 재해석되었다는--혹은 더 낫게 표현한다면, 독특하게 부요하게 해석되었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러한 재해석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사건들 후에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79)

만일 그 계시가 그[공동체=초대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그 공동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이 기도에서도 그 안에 계실 것이다. 사실 누가 기도하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 공동체이다.80)

비록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정죄되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지라도, 요한의 묘사는 거의 더 나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81)

 

 2.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82)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83)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8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85)

 

 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86) 

 

 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르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87)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88)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89)

 

 6.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90)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교회는] 지상의 예수를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91)

여하튼, 아주 초대교회는, 비록 예수를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92)

[요한복음 10장] 17절 이하에서 복음서 기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라는 신화적 진술을 했고, 예수의 권위의 증명을 위한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풍자적 대답을 첨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했다.93)

 

 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94) 

 

 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9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96) 

 

 10.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대는 망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 선포가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즉, 세상의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그 기대가 망상으로 판명되었을 때--그의 신 개념이 또한 망상적이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97)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공관복음서의 전통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혹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말들이 없다.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는 파루시아라는 말도 기독교의 최초의 시기에는 '돌아옴'으로가 아니고 '도착, 도래(到來)'로 정확히 이해되었다).98)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99)

 

 12.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100)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폴 틸리히는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에 있다고 표현된다. 그의 사상들은 매우 과격하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1.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 101) 

 

 2.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102) 

 

 3. 특별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103) 

 

 4.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10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105)

 

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107) 

 

 6.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108) 

 

 7.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10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110) 

 

 8.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111) 

 

 9.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112)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113)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114)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115) 

 

 10.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116)

 

 11.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117) 

 

 12.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119)



 13.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120)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121) 

 

 14.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122) 

 

 1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123)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 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 124) 

 

 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125)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126)

 

 18.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127) 

 

 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케 하는 인상은 그의 자기 복종적 사랑의 인상이다. 이 사랑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마지막 말이라고 확신하는 응답적 사랑을 사람 안에 일깨운다.128)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존재가 소외의 상태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에 대한 묘사이다.129)

하나님의 속죄적 행위는 그가 실존적 소외와 그것의 자멸적 결과들에 참여하심이라고 이해해야 한다.130)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심이 드러나게 된다.131) 

 

 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132)

신들과 반신(半神, 절반쯤의 신)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순간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133)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심지어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13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아마 그럴 것이라는]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13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136)

 

 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137)

 

 2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138)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139)

 

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이라고 한다.

'재림'의 상징. 140)

 

 24.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려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141)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은 가장 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이다.142)

[영원한 죽음은]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액면 그대로 해석되면 완전히 모순되는, 영원과 죽음이라는 두 개념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결합은 영원으로부터 ‘떠난’(away) 죽음, 즉 영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 시간성에 내버려져 있음을 의미한다.143)

 

 25.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144) 

자료출처 http://www.oldfaith.net/03modern/01자유주의신학.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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