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
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
최 신 한 / 문예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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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철학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äeutik)과 플라톤의 변증법,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토대 위에 구체화된 헤겔의 변증법에서 대화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데카르트 이래 의식철학의 전통에서는 독백적 사고가 중요한 반면, '언어적 전환' 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는 '대화'가 새롭게 주제화된다. 현대 해석학의 전통, 하버마스와 아펠의 담론 윤리학, 그리고 현대와 탈현대의 논쟁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데올로기 '이후'의 시대적 상황 속에 있는 인간의 삶은 '하나'와 '중심'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지 않으며 그것이 '여럿' 및 '주변'과 형성하는 관계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자아'의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반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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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요체는 생각의 교환에 있다. 생각은 자기반성 없이 불가능하며, 대화는 자기반성이 산출한 지식의 실제적 교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생각의 전달과 수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는 '생각'의 측면에서 이론과 관련되며 '나눔'의 측면에서 실천과 관련된다. 대화는 이론과 실천의 교차점이자 그 종합이다. 실제적인 삶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대화는 인간의 현실적 삶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틀인 것이다. 인간이 철학적 이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이론이 인간을 향해 정립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현대 철학은 그 어떤 철학보다 인간에 대한 반성을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다면, 현대 철학이 현실적 삶을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틀을 '대화'에서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책은 이러한 현대의 관점에서 씌어졌다. 그러나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은 근대 철학에 속한다. 근대 철학의 전통 가운데 현대적 관점이 발견된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변증법적 사유'는 근대 속에 숨어있는 현대적 사유이다. 그의 사유가 '해석학적'이라는 데서 사유의 존재연관을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이 '변증법적'이라는 데서 사유와 사유와의 대화적 만남이 드러난다. 여기서 실재론적 요소와 관념론적 요소의 접점이 발견된다. 실재-관념론은 존재와 사유의 만남을 비환원적 입장에서 보여주며, 이로써 어느 한 쪽으로 수렴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의 유한한 구조를 드러낸다. 그러나 존재와 만나는 인간은 이를 늘 '새롭게' 드러내며 이 새로움을 타자와 나누면서 진리에 좀더 가깝게 다가선다. 이 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사유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접점으로 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책의 제1부는 슐라이어마허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을 칸트의 선험철학과 독일 관념론 철학의 맥락 가운데서 정리하고, 더 나아가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현재성을 조명한다. 주관성 철학 및 상호주관성 철학과의 관계, 학문 이론, 대화론적 논리학, 주체 이론, 자기의식 이론은 모두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대화론적 변증법'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제2부는 '대화론적 변증법'의 실제를 서술한다. 『변증법』을 근간으로 하여 그것이 『해석학』 및 『윤리학』과 형성하는 학문 부문 간의 관계를 재구성하며 『종교론』을 매개로 하여 대화론적 공동체의 가능한 경우를 제시한다. 다른 학문 부문과의 실제적 대화를 통해 구체화되는 변증법적 대화 이론은 '학제 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현재의 학문적 상황과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언급한 '개방적 체계'는 학문들 간의 대화 및 체계들 간의 대화가 갖는 구조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의 저자로, 감정의 신학자 정도로 알려져 있을 뿐 아직 너무 낯설다. 신학사가들에 의해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규정된지 오래된 중심 사상가이지만 우리에게는 신학계에서조차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온당치 못한 평가와 함께 심지어 '위험한 인물'이라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나돈다. 철학 진영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유를 신학적 전제를 가진 사유로 치부하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규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슐라이어마허를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진실로 굳어져버리는 세상 가운데 귀중한 사유의 주인공들이 묻혀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왜곡된 상(像)은 대표적으로 현대 해석학과 현대 신학의 전개에서 만들어졌다. 소위 '뜬' 슐라이어마허에게 '안티 행위'를 함으로써 성공한 경우로 가다머(H.-G. Gadamer)와 바르트(K. Barth)를 든다면 그 자체가 이들에 대한 왜곡이 되는가.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해석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당사자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인정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사상가에 대한 선입견이 그 원형을 결정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진귀한 철학이 그에게 있다면, 그에 관한 잘못된 해석에 대해 판단중지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사상가를 그 누구에 의해 해석된 모습으로 대하기에 앞서 그를 순수하게 대하는 것 자체가 '학문적 대화'의 선결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상가는 한 부문의 천착에 전 생애를 바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철학자이면서도 신학자였고 교육학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그야말로 인간의 삶 전반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를 학문으로 구체화했다. 여기에는 정신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학의 영역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경험적인 것을 중시하면서도 결코 사변적인 것을 포기하지 않는 철학으로 나타나며, 그렇기 때문에 전체존재에 대한 대화론적 철학으로 귀결된다. 필자와 슐라이어마허와의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석사 학위논문을 쓸 때부터 몰두해온 헤겔 연구를 구체화하기 위해 유학한 튀빙겐 대학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큄멜(F. Kümmel), 프랑크(M. Frank), 윙엘(E. Jüngel) 교수가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 이 분들의 세미나에서 만난 슐라이어마허는 '변증법', '해석학', '자기의식', '종교철학' 등의 주제와 더불어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와 같은 문제성에서 쉽게 포기될 수 없는 헤겔과 더불어 슐라이어마허는 필자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지만, 이들에게는 아직도 파헤쳐져야할 연구의 미답지가 수없이 남아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1997년에 나온 『헤겔철학과 종교적 이념』에 이은 또 다른 연구보고서인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상반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도 일치되는 두 철학으로 파고들면서 그려보게 된 새로운 정신세계는 이 둘을 징검다리 삼아 언젠가는 펼쳐내야 할 필자의 철학적 과제로 남아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름조차 낯선 현실 가운데, 입문을 위한 단순한 안내서를 넘어서는 책을 내놓는 것이 너무도 조심스럽다. 슐라이어마허의 의미 있는 사유가 이 책으로 인해 '채 자라나기도 전에 뽑혀버리는' 경우를 맞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질정(叱正)을 바라마지 않는다. 필자와 슐라이어마허와의 만남을 독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준 문예출판사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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