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리스도와 종교다원주의
제2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비판과 수용을 통해 로마 카톨릭의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 대한 저항으로 파니카나 피에리스는 '익명의 기독교'를 말하는 자들은 '익명의 힌두교', '익명의 불교'를 함께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런가하면 판넨베르크는 틸리히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종교현상학과 역사의 문제를 자신의 종교신학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미래에 연관된 사건이며,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은 타종교와 문화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 죤 캅(John Cobb)이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 그리스도론(Christ in a Pluralistic Age)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등식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 예수'의 문제의식은 그에게 배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게 하는 중요한 사고로 등장한다. 특히 역사적 예수의 육체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로고스의 씨앗은 타종교와 문화에서 발견된다. 70년대 들어오면서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인 주장인 '우주적 그리스도론'(The cosmic Christ)은 인도의 신학자들 예를 들어 토마스(M. M. Thomas)나 사마르타나에게 특히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수용되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한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여전히 역사적 예수의 절대적인 규범에 매여있다면- 대표적으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The Crucified God)이후 유럽의 신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길'(Der Weg Jesus Christi)에서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제시하는데, 전형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토마스(N. M. Thomas)는 바르트의 계시를 통한 종교비판을 탁월한 신학의 통찰로 받아들이면서, 계시를 동시에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립시켜나갔다. 니터는 이러한 입장을 바르트에 대한 왜곡으로 설명하지만 바르트를 왜곡하는 것은 니터 자신의 바르트 해석처럼 보인다.
사마르타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 여전히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가 있음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중심은 신 중심을 향해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과 혁명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힉(J. Hick)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삼위일체론적인 등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긴 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일 수가 없다. 통전자로서의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의 매개자들은 그가 예수든 부처든 마호멧이든 절대 초월적인 하나님 앞에서 급진적으로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힉이나 또는 신 중심적인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시도하는 종교신학자들 안에서 영성신학의 전통적인 흐름인 부정의 신학(Aphophatic Theology)의 새로운 수용을 보게 된다.
그러나 파니카는 이러한 힉의 무차별한 상대주의와 하나님의 보편성으로 모든 종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은폐된 제국주의적 사고의 연장으로 비판한다. 종교는 서로 다르다. 서로 다름의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은 포스트모던주의의 핵심적인 사유에 속하는데, 이것은 동시에 근대성의 기획에 사로 잡혀있는 종교신학의 논리에 하나의 비판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파니카에 의하면 익명의 그리스도론은 익명의 제국주의를 암시할 수밖에 없다. 파니카의 신인일치적 (Theandric)관계는- 동방교회교부들의 구원론의 핵심인 신화(Theosis)의 새로운 표현으로 제시되는데-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를 통전적으로 포함하면서, 힌두교 안에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그리스도"(Unknown Christ)를 향해 개방한다. 힌두교에 대한 파니카의 탁월한 그리스도론적 해석은 힉이나 폴 니터의 보편적 우주신학과는 달리 각각의 종교의 다름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 신학 속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근원성과, 성자와 성령을 앞서가는 성부 하나님의 부정적 측면(Darkness of Godhead),(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을 불교와 힌두교와의 대화 속에서 심화시켜 나간다.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기서 기독교에 대한 나의 신앙고백은 상대화되거나 무력화되지 않는다. 개인의 영적이며 고백적인 기독교의 이해(christic understanding)는 오히려 불교나 힌두교 속에 있는 미지의 그리스도이해를 통해 더욱 깊게 강화되거나 변혁될 수가 있다.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실증주의의 깃발아래 여타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거절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토마스가 통찰한 것처럼 바르트에게서 계시는 종교와 불가공약성을 갖는다. 계시와 종교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리고 이 계시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서 있다. 적어도 바르트는 타자를 통합하거나 기독교의 깃발아래 모든 종교를 끌어 모으려는 여타의 종교 제국주의적 발상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파니카처럼 바르트의 관심은 문화현상으로서의 기독교(Christendom)나 종교적인 기독교(Christianity)보다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적 의식(christic consciousness)이 대화와 증언에 중요하다. 기독교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Der Name Jesus Christi)의 현실 안에서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러한 태도는 그가 유대교의 문제를 다루는데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유대교와의 만남에서 개종은 불필요하다. 역사적 예수가 없는 유대교는 자체상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에 서있는 백성들이다. 그렇다면 타종교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대화는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패러다임을 제공할 수 있다.
4.1. 바르트의 종교다원주의
바르트는 후기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에서 로마서주석에서 나타나는 해석학과 사회분석의 통합개념인 하나님의 혁명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현실 안에 보다 깊이 있게 해석학적으로 독해한다. 바르트 자신이 1956년 강연에서 시인하듯이 자신의 초기적 관심을 붙들고 있었던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너무 지나치게 절대화됐고, 추상화되었으며, 그의 하나님이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보다는 철학의 초월적 하나님에 보다 더 근접하지 않았었는지 우려한다. 하나님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그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은 기독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화해론적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자리바꿈' (Austausch)에서 발생한다. 고후 5:18-21에 의해 이러한 '자리바꿈'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받아들였으며, 죄인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었다는 데 근거한다. (IV/1. 72-73) 자리바꿈의 또 다른 측면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담당했다는 의미에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에 놓여졌다는데 근거한다. 인간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에게 방향전환 되었다(IV/1.,76). 바르트는 이러한 '자리바꿈'의 역동성과 하나님과 인간, 세계와의 파트너쉽의 관계를 세가지 주제 아래서 다루어 나간다: 1)종으로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IV/1, 157-642) 2)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IV/2,3-613) 3)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IV/3.1, IV/3.2, 481-680).
종이 되신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 언급에서 인간의 죄악된 세상에 나갔던 하나님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 탕자의 비유를 은유로 사용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류를 위해 순종의 길을 취했다. 이 순종의 길은 신약성서의 표현을 빌어 "자기를 비우심" "종이 되심"(빌 2:7), "겸허하심" "십자가에 달리심"(빌2:8), "고난"(히 5:8)등으로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수납은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아래 서 있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다. 이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들의 순종이며 겸허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주권적인 하나님으로 계신다.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성부의 수난설"로 인도할 수 있는 케노시스(kenosis) 기독론을 승인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은 스스로에 대항하여 존재하셨다(Gott gegen Gott),(IV/I184). 여기서 우리는 바르트에게 미친 루터의 십자가신학을 만나게된다.
인간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겸허를 다루는데 비해 주님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항목에서 바르트는 하나님과 참된 관계로 고양된 인간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모델이라면 그는 또한 화해된 인간에 대한 모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간성'과 더불어 '인간의 인간성'이 매우 역동적으로 다루어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의 갱신과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낮아지심(exinanitio)과 인간의 고양됨(exaltatio)이라는 '자리바꿈'에서 가능하다(IV/2,21).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인성과 신성의 역동적 연합은 칼케돈 신조에서 드러나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과도함에 대해 자기방어를 한다. 이 연합은 모든 인간의 본질과 모든 인간성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가하면 안디옥학파의 신학에 대항하여 바르트는 인간본질의 어떠한 요소도 이러한 연합에서 배제되거나 영향을 벗어날 수가 없다고 밝힌다. 인간성의 고양(Exaltation)은 인간성의 파괴나 변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와 같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여전히 우리와는 여전히 다른 차원을 말한다. 여기서 바르트는 기독론적인 anhypostasis와 인간학적 enhypostasis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파악하길 원한다. Enhypostasis-Anhypostasis를 근거로 하는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은 그의 신학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바르트의 신학적 문화해석학에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독론적 포괄주의를 구성하는 교의학적 이해이다. 루터파와 개혁파들의 성찬 논쟁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했던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와 급진적인 칼빈주의 교리(Extra Calvinisticum)에서 루터파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난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직접적으로 참여한다고 보았다. 물론 이것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근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편재설을 옹호한다. 그러나 개혁파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적 주권성은 간접적으로만 관계되며,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늘에 무한하고 영원하게 주권적으로 머문다고 본다. 성찬이해를 둘러싼 논쟁에서 루터파들은 실재적 임재(Real Presence)를 편재설에 근거하여 주장했지만, 개혁파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주권성을 근거로 성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영적 임재 내지 기념설로 받아들인다.
마르크바르트는 "신학과 사회주의"(Theologie und Sozialismus)에서 "육체의 수납과 유적(類的)인간"을 다루면서 바르트의 기독론적 해석학 (Enhypostasis-Anhypostasis)을 자연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물론 그의 주장은 바르트 학자들에 의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논지는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본성의 존재(enhypostasis)를 통해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수납되고 있음을 밝히고, 이것을 통해 확장되고 완성된다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유적 존재(Gattungswesen)로서 집단적인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된 말씀의 인간성안에 그 존재양식(enhypostasis)을 갖는다. 여기서 Extra Calvinisticum(유한은 무한을 포용할 수 없다)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은 히틀러 투쟁기간동안에 완고하게 계시중심주의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동기로 사용된 신학의 개념인데, 역설적으로 마르크바르트는 이 교의학적 개념을 인류를 향한 기독론적 포괄주의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계시신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편적 인간성은 자연신학의 내용에 의미를 부여한다. 영원한 말씀의 화육은 바르트에게서 단순히 역사적 인물인 예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을 포함한다. 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기독론적 주장은 바르트 제자들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 놓았고, 좌파들의 시도는 바르트를 유대교와의 대화속에서 그런가하면 종교다원주의와의 대화를 위해 바르트를 여전히 중요한 전거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좌파들의 해석의 최대의 난점은 바르트의 신학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에버하르트 융엘(E. J ngel)은 헤르베르트 브라운(H. Braun)과 논쟁을 벌였던 골비처의 입장이 지나치게 유신론적인 잔재를 극복하지 못했고,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 이해를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골비처는 마르크바르트를 옹호하면서 쓴 서문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신학은 스콜라주의적이거나 단지 계시 중심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실천과의 연관성에서 하나님의 혁명론으로 독해되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신학계에서 몰트만의 제자인 헌싱거(G. Hunsinger)는 마르크바르트의 논쟁을 소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헌싱거는 마르크바르트에 대해 감정적으로 편향된 헤르만 디엠의 비판점을 지지한다. 최근에 들어 북미의 신학계에서 이 논쟁에 대한 보다 학문적인 평가는 골비처 문하에서 교수논문을 쓴 훗(Robert Hood)인데, 그의 책을 통해 미국에서 바르트의 좌파적 해석과 종교다원주의와의 연관성이 활기차게 토론되고 있다. 이 논쟁을 위해 다소간의 교의학적인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칼케톤 신조의 기독론(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을 변호하기 위해 비잔틴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는 안디옥 학파의 수장격인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시릴 (Cyril of Alexandria)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가현설(Docetism)과 에비온주의(Ebionitism)의 양극단을 피해가기 위해 두가지 용어(anhypostasis와 enhypostasis)를 사용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성(Enhypostasis of Jesus Christ)은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로서) 그분의 신성에 독립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영원한 말씀인 로고스에서만 존재하는데, 만일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영원하신 말씀과의 일치 에서 존재하는 한, 그것은 동시에 참된 인간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현설과 에비온주의는 설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말씀의 신성과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에비온주의).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떨어진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신성도 불가능하다(가현론). 그러므로 (영원한 신성)안에 거하는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인간성(Enhypostasis)은 이와는 다른 존재의 유형을 갖지 않는다 (anhypostasis). 참된 하나님, 참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칼케톤의 규정을 레온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위성을 주면서(이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안디옥 학파의 강조점인 예수의 인간적 본성을 수용한다.
바르트에게 미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향은 그의 복잡한 기독론과 삼위일체이해를 둘러싸고 잘 드러난다. 바르트는 초기에 예수의 인간성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Logos Asarkos)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영원한 로고스는 역사적인 한 개인 나사렛 예수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고난의 십자가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적어도 바르트는 히틀러와의 투쟁을 거치면서 Extra Calvinisticum을 육체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에 연결시킴으로써 개혁교회의 입장을 넘어서 사고한 적이 있다, 이것이 마르크바르트로 하여금 바르트가 계시신학 안에서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개방했다고 해석하게 한다. 그러나 마르크바르트 해석의 문제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그는 바르트의 십자가 신학의 성격을 오해한다. 적어도 바르트의 십자가의 신학은 루터 이후 하나님의 고통의 문제(God's passibility)를 기타모리- 기타모리는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을 전후 일본의 상황에서 토착화 시킨 적이 있다- 나 몰트만에 앞서 매우 진지하게 취급했다. 여기서 바르트는 개혁교리인 Extra Calvinisticum이 아니라, 루터의 속성의 교리를(Communicatio Idiomatum) 하나님의 활동의 교류(Communicatio operationis)의 관점에서 역동화 시킨다. 적어도 바르트가 보기에 칼케톤 신조의 두 본성의 기독론은 여전히 예수의 인간성과 신성의 교류를 추상적으로(communicatio indiomatum in abstracto) 파악하며 가현론의 위험을 피해갈 수 가 없다. 예수의 인간성이 이미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체적으로 연합되고 교류된다면 인간성을 자체 안에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Extra Calvinisticum은 인간성을 내재적으로 수용하시는 하나님이해에 부적합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둘째로 마르크바르트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피해갈 수밖에 없었다. 바르트는 후기에 들어오면서 마르크바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육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을 일관성 있게 견지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으로, 그리고 성령론적으로 통합한다. 예수의 인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 인간 예수는 내적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 이미 포함된다. 내재적으로 성부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인류를 위해 선택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은 경륜적인 의미에서 역사적인 계시사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보편적인 선택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초기 교회 교의학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은 주님으로서 자신을 계시했다"는데 한정되지 않는다.
몰트만은 성급하게 여기에 초점을 맞춰 바르트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주님으로 계시할 경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아니라 군주론적인 이해에 불과하게 되며, 더욱이 한 하나님이 세 가지 존재양식(Seinswesise)을 통해 '자기반복'으로 드러날 경우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필연적으로 양태론(Modalism)이나 사벨리안주의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칼 라너의 세 가지 본질방식 (distict manner of subsisting)에 대해서도 무차별하게 적용된다. 몰트만은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위해 동방교회의 교부인 요한의 다마스커스에게서 차용한 페레코레시스(Perechoresis)를 역사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삼위일체의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본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류를 위한 구원론적인 맥락에서가 아니라(물론 구원론적인 맥락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관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러나 칼 라너의 삼위일체의 유명한 규칙- 내재적 하나님은 경륜적 하나님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을 받아들임으로써, 몰트만은 우주와 세계와 인류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내재적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을 바르트처럼 전개하지 못했다. 결국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구상은 동방교회의 교부로부터 빌려온 삼위의 개념- 몰트만은 이 개념을 Person으로 과감하게 사용한다- 을 공동체적인 친교와 사귐, 그리고 사랑으로 해석함으로써, 삼위-일체(Tri-Unity)의 하나님의 사회성과 인간의 사회적 공동체와의 연관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전개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론을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타종교의 진리주장과 문화를 유럽중심의 존재론으로 함몰시키려는 부르주아 이론으로 비판했지만, 자기자신 역시도 삼위일체론에서 타자를 위한 해석학적인 이해나 개방을 봉쇄한다. 왜냐하면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통받을 수 없음'(Aparteia)만 제외하고는, 희랍의 존재 철학에 함몰되어있던 교부들의 전통을 충실히 답습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삼위일체론은 몰트만이 그토록 주장하고 싶은 것처럼 타문화와 종교를 향해 열려있는 '개방의 삼위일체론'(Open Trinity))이 아니라 구원에 관한 역사적 예수중심을 심화하는 자기 폐쇄적인 전통의 삼위일체론의 연장에 불과하다.
4.2. 삼위일체와 종교다원주의
바르트는 주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켄터버리 안셀름을 근거로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반복"을 그의 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즉 하나님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God who loves in freedom)이다. 이 하나님의 존재는 '만유 안에서 모든 것을 변혁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바르트는 레온티우스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화육은 항상 역사적 예수 이전에 '선재하는 영원하신 말씀의 화육'이며, 화육하신 말씀은 인간이 된(Enhypostasis)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임을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항상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었다(anhypostasis). 그러므로 화육은 한 개인 예수의 인간성에 국한되기 전에 내재적으로 전 인류를 향해 개방된다. 삼위일체 안에 선재적으로 수용된 인간성은 한 개인의 육체가 아니라 부정의와 불의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인간성을 말한다. 이것이 바르트가 십자가의 신학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처음부터 인간성을 수납함으로써 인류와 우주의 고통과 내재적으로 연대하는 '사랑 가운데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간성'과 '인간의 인간성'을 해석학적으로 중재함으로써 기독교의 타자의 성숙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바르트 신학의 깊은 통찰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성안에 인류의 집단적인 인간성이 포함되어있다면, 육체의 수납은 마르크바르트처럼 Extra Calvisticum과 육체외부에 존재하는 그리스도론과의 연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타문화를 위해 이미 선재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파악되어야한다. 만일 타키자와가 그의 "신인간학적인 일치"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과 십자가 신학에서 추구했다면 선불교와의 대화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통찰에 속하는 우주적인 두카(dukkhar)와- 여기서 불교의 두카는 우주적인 고난의 맥락을 갖는다-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다키자와는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고통신학"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서 역사적인 예수 안에 드러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상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힉), 그렇다고 해서 많은 구원의 중개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파니카).
유적본질로서 집단적 인간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 바르트의 보편주의(Universalismus)는 구체적인 역사 사회적 차원을 향해 개방할 뿐 만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타종교들을 향해 역사적 예수에 한정되지 않는 삼위일체론적인 보편신학을 개방한다. 그러나 이 보편성은 근대성의 보편적 이성을 지지하지 않고, 고난의 특수성을 지지한다. 적어도 기독교의 거대담론은 근본적으로 '적은 이야기'를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 관련되어있다는 Enhypostasis에 대한 바르트의 입장은 한 인간 개인이 아니라(homo), 인간성에 육체를 수용했다는 그의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화육 하신 분은 역사적인 한 인물 예수의 특수성과 유일성을 구체화 할 뿐 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은 인류의 인간성을 이미 수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류의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이데올로기나, 타종교의 진리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초기로마서주석에서 가난한자의 해석학은 후기에 이르러 삼위일체론적인 전개 속에서 타종교와 문화를 향해 심화되고 확장된다.
여기서 예수는 인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화육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절대적인 구원과 진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고난받는 인류의 인간성을 자신의 존재 안에 포함으로써, 계시는 더 이상 역사적 예수의 계시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한 부분이 된다. 다시 말해 인류와의 화해 속에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낯 설은 존재와 영역은 없게 된다. 설령 그 영역이 아무리 악한 기원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때론 그것이 무신론적이며 반(anti) 기독교적인 형식을 갖는다고 해도, 내재적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화해된 인류의 인간성은 역사적인 예수의 계시 사건을 통해-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그리고 이것을 넘어서서 모든 타종교와 문화의 종교성안에 수납되고 화육 된다.
여기서- 마르크바르트의 좌파적 해석의 운명이 달려있는- 바르트의 자연신학의 기독론은- 바르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내재적 삼위일체론적으로(God beforehand in himself)- 타 종교와 문화, 그리고 역사 사회적 현실을 변혁하는 하나님의 행동과 더불어 이 세계의 고통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할 때 한층 더 의미가 있게 된다. 적어도 삼위일체론에서 종교다원주의를 향한 바르트의 문화 해석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인간성을- 단순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넘어서서- 확정하려고 한다.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안에 존재- 인격적으로(anhypostically and enhypostatically, CD IV/2,60)연계 된다는 바르트의 주장은 전통적인 기독론이 갖는 서구 문화 우월주의나 배타주의적인 은폐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를 타종교와 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고난의 문제를 향해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탁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동방교회의 신화론(Theosis)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이레니우스의 명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를 다음처럼 받아들이면서 수정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IV/2.106). 이것은 바르트적인 의미에서 '밑에서 위를 향한'(unten nach oben) 기독론적 표현이며, 영성의 표현이다. 그리스교부들에게서 발견되는 구원론의 핵심개념인 신화는 신학의 영성을 명료하게 밝혀준다. 종교개혁의 의인론의 지나친 법정론적 주장 때문에, 신화의 역동성과 영성의 깊이는 종교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종종 간과되거나 오해되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여기서 하나님처럼 되어 가는 과정을 동방교회처럼 단순히 개인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지 않고,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종말론적 지평에서 하나님의 화해를 향해 움직여나가는 인간의 해방의 실천으로 파악한다. 하나님이 고통받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처럼 고양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계의 고난의 현실 가운데 연대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한 예언자적인 제자직을 의미한다. 그의 해석학적 모티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인간의 자기실존이해보다는 바르트가 서 있었던 정치사회적 현실의 전 이해에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인간학적-영성적(Anthropologisch-spiritual)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바르트는 예수의 삶과 사역을 칼빈의 삼중 직분론에 근거해서 기술한다. 왕의 직무는 왕적 인간(the royal man)에서, 제사장의 직무는 '종 되심'이라는 항목에서 그리고 예언자적 직무는 참된 증언자라는 항목에서 다룬다.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제사장직무와 왕적 직무에서 정치사회적 연관성을 다루고 난 후 예언자적 직무에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를 진지하게 다룬다(IV.3.1.12).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생명의 빛'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바르트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예언자의 사역을 비교 검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의 빛으로 동일시한다. 물론 그는 이러한 주장이 새로운 빛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타종교들의 영역에 대해 너무 제한적인 것임을 인정한다. 더욱이 도덕적으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간의 의사소통을 단절할 수 있으며,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비관용으로 흐를 수도 있으며, 다른 종교적 견해와 양심의 문제를 다룰 때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이 주장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승리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론과 타종교의 불가공약성 때문에 그러하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계시와 종교는 서로 다르다. 이 불가공약성은 종교신학자들처럼 상대화되거나 폐기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신앙에 대한 성숙한 고백을 가지지 않는 사람과는 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든지 상관없이 연대관계에 서 있다(IV/3/1.81). 더 나아가 이 그리스도는 기독교 외부의 타종교에서 그 진리의 빛들을 통해 언제든지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와 종교에 관한 불가공약성은 다른 종교나 문화 속에 주목할 만한 진리의 주장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서나 교회밖에 있는 다른 진리주장이나 종교적 계시들은 오류나 거짓 예언들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일하신 말씀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종교 다원주의의 사회 속에서 다른 진리주장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바르트의 해석학적 접근은 이들의 진리주장들이 내재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빛에서 인정될 때 유의미하다. 역사적 예수 없이도 타종교와 문화의 진리주장들은 신인간학적인 일치(Theanthropoogische Einheit)가운데 서 있다. 이 진리 주장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본래적인 임마누엘의 사실- 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키자와(K. Takizawa)의 해석은 뛰어난 바르트의 해석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다키자와는 일본의 경도학파에서 선불교의 철학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의 선생인 니시다의 소개로 그는 본(Bonn)에서 바르트의 강의를 들었고, 이후 아시아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바르트의 총애를 받던 제자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임마누엘의 본래적 사실(Urfatum Immanneul)-에 대한 그의 탁월한 해석은 바르트 신학안에 있는 신일치론적인(theoanthropologisch)관계를 해명할 뿐 만 아니라 선불교의 소쿠(Soku)사상- 신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한다- 과의 종교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다키자와의 이러한 입장은 바르트 좌파들에게 중요하게 수용되었고, 마르크바르트에 의해 집단적인 인류의 인간성을 포함하는 기독론적인 보편주의로 심화되었다. 그러나 다키자와는 모든 이름을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의 본래적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묻지 못한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역사적 예수의 신앙 고백과 그 정치 사회적 중요성은 간과 되어버린다.
종교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세속주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과 그 복음을 거절하는 무신적 진리주장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세계는 하나님과 화해가 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거절되는 여타의 세속의 영역을 갖지 않는다(IV/3.1.119). 그런가하면 다른 형식의 세속주의가 있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 질문되도록 자신을 개방하며, 복음과의 상관성에 서 있을 수 있다.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의 세속주의는 기독교인에 의해 낯 설은 영역이 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확장해주는 안내판과 지침으로 간주되어야한다. 이러한 진리주장들은 복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해석학적으로 제공해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적 사건들과의 상호연관성을 갖는다. 그리고 교회와 사회적 삶에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제도화된 교회는 세계의 사건들 속에서 그리고 다른 종교나 문화를 통해 중요한 영적 통찰들과 그 조명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자체상 자신의 진리의 빛들을 정당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IV/3.1.132,139).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증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삶에 유익한 빛으로 해명될 수 있다. 화해의 사역이 창조의 사역을 부정하지 않듯이, 화해는 창조의 빛들과 언어들을 파괴하지 않는다(IV/3/1,139).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세계의 말씀들과의 관련에서 해방의 기능을 갖는다. 하나님 말씀은 이 세계를 공격해 들어오면서 인간의 죄는 해결되었고, 세계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해방의 기능을 통해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자유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과 연대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성취된 계약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그리고 화해의 파트너쉽 안에서 이웃동료들로서 이해된다. 이것이 바르트가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 안에서 전 인류가 연관되어있다는 내용이며, 기독론적 존재양식(Christological anhypostasis)이 인류학적 존재양식(Anthropological enhypostasis)을 통해 확장되고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론적 이해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혁명론과 깊은 연관 속에 있는 그의 내재적인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여타의 이데올로기나 문화를 기독교화 하는 시도에 혐의를 둔다.
5. 나가는 글
몰트만은 그의 새로운 성령론을 전개하면서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인간의 경험과 특히 신비주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신학의 영역에서 영성과 경험의 문제를 불구화로 만들어 버린 개혁신학의 딜레마가 바로 바르트에게 출발하고 있음을 진단한다. 예를 들어 신학의 출발점이 바르트처럼 '전적인 타자' (totaliter aliter)로서 하나님에게 있다면 인간과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거나 체험될 수가 없다. 그런가하면 신학의 출발이 슐라이에르마허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절대의존적 감정'에 주어진다면 하나님의 존재의 객관성은 실종 되어버릴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성령론을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경험의 양자택일'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의 빛에서 새롭게 해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바르트 자신이 서 있던 사회 현실적 상황과 이 상황에 깊숙이 연계된 그의 신학의 해석학적 성격을 종종 오해한다.
흔히 바르트의 경험-실천신학은 이른바 바르트 좌파라로 불려지는 골비처와 마르크바르트 그리고 이들의 후계자들의 노선에서 해명되어왔다. 이들은 특히 바르트의 신학을 그의 정치적 실천과 사회역사적 현실과의 연관시켜 해명했다. 이들의 해석에서 '의심의 대가'로서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는 바르트로 하여금 신학적 진술 속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폭로하고 해체하도록 고무한다. 바르트 좌파적 해석의 대표급적 신학자인 베를린대학의 마르크바르트 교수는 바르트 전체신학에 미친 사회주의적 영향을 분석하면서 바르트의 초기와 후기의 사상의 연속성을 메워 나간다. 마르크바르트에게서 하나님나라와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은 해석적 원리에 속한다. 그러나 그의 해석의 문제점들은 바르트의 십자가 신학과 삼위일체론을 간과한데 있다.
그런가하면 좌파적 시도에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융엘의 해석은 바르트 신학에서 나타나는 실천적 개념이나 혁명적 표현들을 하나의 은유(Methaphor)로 파악함으로써 바르트 신학에서 정치적 이론과의 연관성을 배제한다. 이외에도 수 없는 바르트 신학에 대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비판점을 공유한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융엘의 바르트 해석이나 골비처- 마르크바르트적 해석 또는 몰트만적 바르트 해석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지만 하나의 해석의 시론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6세기의 어거스틴 해석과 중세의 어거스틴주의 그런가하면 20세기 어거스틴주의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텍스트가 자신의 세계를 독자들 앞에서 펼쳐나갈 때 이미 '저자의 죽음 (미셀푸코)은 예견될 수밖에 없다. 해석자 역시 그의 언어나 삶 그리고 역사, 사회적인 '해석학적 제한성'(가다머) 때문에, 항상 해석은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지평융합을 통해 특수하거나 상황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시도해온 나의 바르트 해석은 여기에 근거한다.
바르트의 화해론에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 모티브들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그리고 기독론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본다. 이미 본회퍼에 의해 비판되었던 '계시실증주의'(Offenbarungspositivismus)는 바르트에 의해 '하나님의 인간성'에서 성인이 된 세계의 문제를 수용한다. 그리고 세례론(Tauflehre KD IV/4, S.X(Vorwort))에서 '성숙해야만 하는 인간'에 대한 강조를 만나게된다. 더욱이 화해론의 전망에서 전개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세계의 말씀들, 그리스도의 빛과 세상의 빛들과의 상관관계는 유대인과의 대화를 새로운 해석학적 지반에서 열어줄 뿐 만 아니라 동시에 타문화와 종교들에 대한 해석학적 통찰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는 바르트가 아니라 바르트의 제자들에게 속하는 새로운 신학적 과제에 속한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현실에서 하나님에게 낯 설은 세속성(Profanitat)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자체상 진리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도전하는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진리주장일지라도 교회는 귀를 기울려야 한다. 정치사회 이론이나 그 보편적 주장뿐 만 아니라 타종교나 문화 속에 있는 우주론적 통찰과 진리주장들 역시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 해석학적 통찰들을 담고 있다. 에른스트 푹스(E. Fuchs)의 말처럼 바르트의 교의학이 그 제자들에 의해 반드시 평가되고 새로운 전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면, 문화에 대한 해석학적 통찰은 새로운 과제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신학의 담대성(Verwegenheit)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그의 신학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타자'들을 어떻게 해석학적으로 독해해내며, 이러한 정치적 해석학이 그의 후기 화해론에서 어떻게 문화 해석학적인 통찰로,- 다시 말해 타종교와 문화의 성숙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전개되는지를 살펴보았다. 틸리히의 문화 해석학이 그의 유명한 상관방법(The Methode of Correlation)을 근거로 편협한 교회지상주의의 타율성(Heteronomy)을 벗어나 타문화와 종교의 영역 안에서 드러나는 자율성(autonomy)으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원을 지양하는 종말론적 신율성(theonomy)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움직여 나간다면, 바르트의 해석학은 역사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현실성이 (교회를 넘어서서) 어떻게 세계의 현실과 문화 종교적 영역에 연관되는 가를 제시하는 정 반대의 방향을 취한다. 마크 테일러는 틸리히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헌신(Commitment)과 종교 다원성 (Plurality)에 대한 급진적인 개방성(Openness)을 지닌 경계에 서있는 신학자로 평한 적이 있다. 김경재 교수는 이미 '해석학과 종교신학'에 대한 탁월한 이론적인 통찰을 통해 틸리히 신학방법의 해석학적 함의를 해명해 놓았다. 여기서 김경재 교수는 틸리히와 더불어 종교에 대한 바르트 비판의 정치사회적 성격을 정당하게 취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종교비판을 넘어서서, 그의 후기신학에서 나타나는 문화 해석학의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바르트는 틸리히 신학의- 복음에 대한- 헌신과-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급진적인 개방성의 내적 긴장을, 기독교의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타종교와 사회 문화운동(대표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주론적인 진리의 빛들을 해석학적인 순환을 통해 자신의 신학에 통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영역 즉 교회의 밖에 존재하는 타종교나 문화에서 찾아 질 수 있고, 이것을 통해 교회는 새롭게 변혁될 수 있어야한다. 적어도 교회는 타자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히 경청할 수 있어야한다.
바르트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한계를 오버벡의 종말론을 통해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담대하게(mit Verwegenheit) 20세기의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듯이, 개혁교회의 신학과 교회는 새로운 밀레니움 앞에서 타자의 성숙성의 요구와 도전들 앞에서 움츠려들거나 계시실증주의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논쟁은 사랑'이기 때문에, 타자의 성숙성에 대한 종교신학이나 포스트모던사유와의 논쟁은 바르 바르트 신학의 새로운 전개와 심화를 위해 진지하게 취급될 필요가 있다. 바르트의 말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지만, 화해의 사건을 통해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은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상황가운데서 계시며 자유와 고난 속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며, 자기 겸허를 통해 세계와 문화와 타종교의 종교성안에 '육체의 수납'(Asumptio carnis)을 허락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타자의 세계는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에 서 있고, 그 거절은 성숙성으로 인정될 수 있어야한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유대교적인 부정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성숙성의 귀결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비종교적인 세계나 또는 타종교와 문화의 성숙성들, 말하자면 무신론적 진리주장이나 타종교와 문화의 보편적 진리주장들은 더 이상 인간의 교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의미 있는 도전과 새로운 통찰로 인정되어야한다. "악인들이 극락에서 받아들여지는데 하물며 선량한 사람이야" "심지어 선인들이 극락에서 받아들여지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랴"(신란) 기독교의 타자의 성숙성을 인정하는 시도는 이론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와 사랑에 대한 영적 나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8519&key=10&kword=%C4%AE%B9%D9%B8%A3%C6%AE&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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