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2)
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2)
*이 글은 홍정수 목사 관련한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자료출처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984)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2)손승호 승인 2013.02.05 13:17:40홍정수와 그의 옹호자들의 반론홍정수는 신학자의 직무는 교회의 교사에 있으며 행정적으로야 교회의 권력에 종속되지만 "우리들을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직무"에 있어서는 그 어떤 권위로부터도 독립해 있으며 "이것은 양보할 수 없는 신학자의 소명"14) 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입장을 변론했습니다. 14)홍정수, "감리교 신학의 바른 이해," 「세계의 신학」14호 (1992. 3), 121. 그의 변론은 자신의 말을 왜곡했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요. 15) "저보다 저를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김홍도 목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 … 그의 피가 동물들이 흘리는 피보다 월등하게 효과가 있다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고 했습니다. 즉 개, 돼지의 피나 예수의 피나 같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속의 종교인데, 이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어디 있습니까?(「불기둥」, 766호) 그리고 총회석상에서 감독회장님은 이같은 김 목사의 발언을 이어 받아, "예수의 피가 개피라고 했습니다"라고 발언하심으로써, 총대들을 흥분시켰음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글귀는 제가 운영하는 …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용의 방식이 너무 조잡합니다. 앞뒷말 다 자르고, 말 몇 마디를 한 데 붙여놓은 것입니다," 홍정수, "감리교 신학의 바른 이해," 「세계의 신학」14호 (1992. 3), 122-123.앞의 글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사실이긴 하네요. 물론 출교의 부당함을 우려하는 교단 내외의 목소리도 있었겠죠? 1991년 11월 21일에는 여러 교단의 신학자 45명이 두 교수에 대한 징계 결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철회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92년 3월 16일에는 재미 감리교 교역자 136명이 감독회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4월 23일에는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일동이 "감리교회는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 때문에 출교 구형까지 내린 것은 감리교 전통이나 감리교 교회법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16)라고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였고요. 16)감리교신학대학 교수 일동,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재판위원회가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에게 내린 출교 구형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2. 4. 23)5월 12일에는 감리교를 염려하는 기도모임이 열려 여기에서 "감리교의 화해를 위하여"라는 문건이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① 신학은 법으로 규정지어질 수 없다. ② 신학은 다양하고 상대적인 것이다. ③ 우리 모두 주체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화해의 노력을 기울이자는 것이었는데요, 17) 이 기도모임은 5월 28일 기도 모임 발족 성명을 발표하면서 다시 그 입장을 밝혔답니다. 17)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Ⅱ』(서울: 기독교대한감리교회 유지재단, 1994), 1006-1009."우리는 지난 19회 총회에서 발단된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의 재판이 서울연회에서 '출교'라는 극형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직시하면서 감리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간절히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우리 교회는 분열에서 화해로,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추구하며 발전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한국 감리교회의 전통과 웨슬리 정신을 완전히 망각한 신학의 획일성과 신앙의 배타주의가 지배하였습니다. 그것도 교단이 주체가 되어 교리와 신학을 토론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무시한 채 일부 임의단체의 힘이 교단 위에 군림하여 재판을 좌우하여 교단의 권위를 실추시켰음을 볼 때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 감리교단을 염려하는 기도 모임 참가자 일동, "감리교단을 염려하는 기도 모임 발족에 즈음하여," (1992. 5. 28),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Ⅱ』(서울: 기독교대한감리교회 유지재단, 1994), 1009-1010에서 재인용.출교에 대한 반론들을 종합하여 보자면 이 사건은 포스트모던 신학을 둘러싼 혐의가 날조되었으며, 그 절차가 적법하지 않았고, 그 내용이 감리교 정신에 위배되며, 특정단체가 교단을 쥐고 흔들어 발생한 정치적인 면이 있는 사건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문제제기는 무력하였고 결과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견지했던 두 학자는 보수적 입장의 감리교 부흥단의 주도로 출교되었습니다. 일부 임의단체란 ‘한국감리교 전국 부흥단’을 의미하거든요.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구도로 놓고 보면 이 사건은 이런 거죠. 힘의 불균형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신학적 진보와 보수 간의 다툼이 있었고 이미 힘의 논리에 의해 보수적 집단의 승리가 점쳐지는 가운데 중도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다수의 감리교 인사들이 침묵 혹은 동조로 보수 측에 힘을 실어주면서 발생한 '오해된 포스트모던 신학 때려잡기'입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이 문제는 간단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왜 홍정수의 신학이 문제가 되었는지부터가 이해되지 않아요. 그것은 그의 신학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의 신학의 내용을 기초로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19)"포스트모던 신학은 이 누명에 대하여 그저 억울할 뿐이다. 이 혐의 사항들 중 2, 3항은 실제로 홍정수의 신학을 고의로 크게 조작 오도한 것일 뿐이며, 포스트모던 신학과는 실로 아무런 연관도 없다," "포스트모던 신학과 한국 기독교" 「기독교사상」427호(1994. 7), 22.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비난의 형태를 띠고 진행되는 것, 그것은 논쟁도 아니죠. 김홍도 목사님은 당시 매주일 낮 예배시간에 두 교수님을 “기독교 자체를 파괴하는 이단, 성경을 부인하는 이단,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의 종, 적그리스도”라고 설교하면서 설교내용을 테이프로 복사해 수 만개의 테이프를 전국 감리교회에 뿌렸다고 하네요. 금란교회가 돈이 많아서 다행이군요. 그러고 보니 한기총이 NCC, WCC를 이단이네 사탄이네 그러는데, 아 좀! 적당히 좀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확 그냥 JP영감님과 보수기독교 단체 설립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 해버리기 전에 조용히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암튼 뭔가 이게 신학적 대립으로만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기는 영 찝찝하니까 신학적 이유가 아닌 다른 모종의 이유가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 뭐 나쁠게 있겠습니까? 몇 가지의 가설이 가능해요. ① 점점 교단내의 권력을 잠식해가다가 거의 정점을 찍은 부흥단이 교단의 신학교를 접수하기 위해 방해가 될 교수진 중 적당한 인물들을 제거했다. ② 사실 부흥단 측의 타겟은 홍정수가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그들과 라이벌 관계의 유력자로 그 사람의 손발을 잘라내고 교단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실력을 행사했다. ③ 홍정수의 말대로 (그의 신학이 뭔지도 잘 모르는 인물들에 의해 출교될 정도로) 그가 감정적으로 심각한 미움을 받았다.갑자기 ‘감리교 부흥단’, ‘부흥단’이라고 말씀 드리니 이 사람들은 누군가 싶으시죠? 걱정마세요. 제가 또 여간 친절한 게 아니잖아요. 현 CBS 방송본부장이신 권혁률 본부장님이 1992년에 쓴 기사 20) 를 인용해 볼게요. 20) “변선환학장 징계한 감신대 종교재판의 진상” 「월간 말」 1992. 1. 당시에는 새누리신문 취재부 차장이셨군요. 신문이름이 모당의 기관지 같아서 영 맘에 들지 않네요.“지난 70~80년대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적 팽창에 발 맞추어 성장한 이들 부흥사들은 감리교단내에서도 대부분의 대형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등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면서도 ‘호헌’ ‘정동’ 등 이른바 서클 위주로 교단정치가 이루어져온 감리교단내 풍토로 인해 교단내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각 서클이 급격히 약화된 반면 부흥사들간의 결속력은 역으로 높아지는 현상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90년 10월 총회에서 한국감리교 1백년 역사상 처음으로 부흥사 출신의 감독회장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취임한 감독회장과 주변의 부흥사 그룹은 임기 2년 동안 그간 부흥사 입장에서 볼 때 불만이 많았던 교단분위기를 바꿔놓고 특히 감신대의 ‘자유주의적 신학풍토’ 개선작업을 해야겠다는 구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여기에 최근 교계의 박사학위 선호 붐에 편승해 해외의 보수적 신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들어온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자신의 보수적 신학을 교단내에서 당당하게 펼치고 감신대 강의실에까지 전파하려는 욕구도 결합돼 이들이 ‘비감리교적인 신학논리’로 ‘감리교 신학’을 재단하는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부흥단이 생긴 것은 1972년이고 그 이후로 부흥단에서 활동하신 부흥사 목사님들이 성장해 대부분의 대형교회를 담임하시면서 감리교 신학교를 접수하고 교단 분위기를 장악하려고 한다. 뭐 그런 이야기인데요.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 부흥단이 발행한 <한국감리교회 부흥운동사>, 혹은 <한국감리교 전국부흥단 30년사>라는 책을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암튼 제 가설 1번과 2번을 뒷받침 해주시는 권혁률 부장님 늘 존경해왔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 졸업하고 난 다음 먹고 살 일이 걱정인데 CBS에 취직 좀 시켜 주세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권혁률 부장님의 지인이 계시다면 꼭 좀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제가 늘 존경하고…, 아오, 참 말로 다 할 수가 없네요. 그 중에서도 가장 존경스러운 문구가 여기 있습니다.“대개의 신학논쟁은 보수적 성향이 강한 교권세력이 일반 목회자와 신자들의 소박한 신앙심을 이용해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려는 선각자들을 내쫓는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 감리교단에서 제대로 교리재판을 하자면, … “다른 종교인들이 적어도 참된 종교를 지향하는 한 그들은 자기들의 영역 내에서 선하다”고 주장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부터 재판정에 불러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의혹은 여러 대목에서 스믈스믈 피어오릅니다. 감리교 제19차 특별총회 회의록을 보면 찬성 299, 반대 2로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에 대한 면직을 감신대 재단에 통보하기로 하면서 두 신학자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는데요. 그해 총회 등록인원이 1,300여 명이에요. 그런데 이 사안을 301명이 투표하는 거죠. 1/4이 안되는 인원입니다. 정족수는 되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이 날이 수요일이었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교회 수요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웠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때 다루기로 되어 있었던 안건은 감리교단의 헌법인 교리와 장정의 개정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주욱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원래의 안건이 아닌 것을 긴급 상정해서 날치기로 처리하려 했다고 하면 이상하려나요. 더욱이 교리와 장정에 따르면 감리교에서 교리에 위배되는 신학에 대한 심사는 총회가 아니라 연회에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연회차원의 논의 없이 총회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교단의 헌법을 무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요. 암튼 수상합니다. 저는 이렇게 무리한 처리를 진행하는 것은 본 사건의 본질이 신학에 있지 않고 정치에 있는 증거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본 사건의 근본 원인이 신학적 내용에 있다면 변선환, 홍정수 두 분이 교수 1~2년 한 것도 아니고 두 분의 성향이 숨겨져 있다가 적발(?)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긴박하게 일을 처리할 이유가 없죠. 그렇다면 이 정치적 싸움으로 장기적으로 누구를 제거하고자 했으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가 중요하겠죠? 그러나 그 지점에서 안타깝게도 풍문은 있으나 기록이 없으니 그 대목은 읽으시는 분들의 상상에 맡겨야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앞으로 더 이전에 있었던 흑역사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 풍문을 듣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당시 특별총회가 열리던 장소는 광림교회였습니다. 김선도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셨죠. 아시다시피 김선도 목사님은 김홍도 목사님과 친형제시고요. 막내이신 김국도 목사님까지 해서 삼형제 분들이 모두 부흥단의 유력한 목사님이시기도 하죠. 문제제기는 김선도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 재판은 김홍도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이루어졌네요. 아마 대규모의 회의와 재판의 장소가 될 수 있을 정도의 대형교회가 부흥단 측의 목사님들의 목회 아래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겠죠?물론 감리교단의 감독회장까지 하신 큰 어른들을 제가 감히 외람되게 뭐 어쩌고저쩌고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다 한국교회 전체와 특히 감리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사랑하시고 지켜내려는 뜨거운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다만 절차상 티끌처럼 사소한 문제들과 말해서 무엇 할 별 것도 아닌 의혹이 있었다는 겁니다.(저도 살기는 살아야죠).감리교의 신학논쟁(으로 포장된 코미디)을 이야기 했으니 다음 글에서는 장로교의 신학논쟁(으로 포장된 코미디)과 그에 따른 분열을 들춰봐야겠네요.덧글입니다. 혹시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김홍도 목사님에 대해서 누군지 잘 모르시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위해 인터넷 검색은 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경우에 따라 검색결과를 보고 다소 혈압이 상승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1. 단행본홍정수. 『베짜는 하느님』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Ⅱ』 서울: 기독교대한감리교회 유지재단, 1994.이덕주. 『서울연회사 Ⅱ』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2009.2. 논문홍정수. "신앙과 지성." 「신앙세계」1990년 8월호 (1990. 8).______.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해석." 「한몸」 7호 (1990. 7).______. "감리교 신학의 바른 이해." 「세계의 신학」 14호 (1992. 3).______. "종교신학의 필요충분 조건." 「세계의 신학」22호 (1994. 3).______. "포스트모던 선교론." 「세계의 신학」11호 (1991. 6).______. "단두대에 선 포스트모더니즘." 「세계의 신학」13호 (1991. 12).______. "근본주의 복음주의 신학은 무엇을 '수호'하는가." 「세계의 신학」16호 (1992. 9).______. "'영적 해석'이란 이름의 폭력?." 「세계의 신학」20호 (1993. 9).______. "성령의 열매-제3 교회." 「세계의 신학」9호 (1990. 12).______. "다종교 상황과 선교론." 「신학과 세계」23호 (1991).______. "포스트모던 신학과 한국 기독교." 「기독교사상」427호 (1994. 7).김성찬. "포스트모던 신학 그 변명과 흥분 사이." 「활천」460호 (1992).편집실. "근대 후기 세계의 출현." 「한몸」7호 (1990. 7).3. 기사 및 발표문감리교신학대학 교수 일동,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재판위원회가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에게 내린 출교 구형에 대한 우리의 입장." (1992. 4. 23)“변선환․홍정수 교수의 이단사상 및 통일교 연루 사실을 폭로한다.” 「조선일보」 1992. 1. 26일자."뉴스초점 변선환 학장․홍정수 교수에 대한 서울연회재판위원회 판결과 상소문제." 「기독교세계」 1992년 7․8월호홍정수.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크리스찬신문」 1991. 3. 30일자.손승호 천성이 음모론 신봉자. 음모론에 입각하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깨닫고 연세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은 반드시 소녀시대 티파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사회에 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깊은 회의를 품고, 역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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