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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1)

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1)

*이 글은 홍정수 목사 관련한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포스트모던 신학 논쟁과 홍정수의 출교(1)
손승호 승인 2013.01.28  19:47:24  

먼저 드리는 말씀! 스크롤 압박에 주의하세요. 그리고 연재 순서는 가까운 과거부터 시작해서 먼 과거로 갈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1990년대 이야기입니다. 시작할게요. 

아르헨티나에는 리오넬 메시라는 축구선수가 있습죠. 네, 단연 최고입니다. 발롱도르를 4년 연속으로 탔어요. 한글2010에서 한번 쳐보세요. 축구선수 이름을 쳐서 밑에 빨간 줄이 생기지 않는 선수들이 있어요. 펠레, 호나우두 등등의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선수들이죠.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는 호날두는 빨간 줄이 생기죠. 이게 두 사람의 차이일 수도 있겠네요. 암튼 메시가 최고!! 

제 친구들 중 일부는 그를 축구의 신이라며 ‘메느님’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언젠가 대학원에 다닐 때(아직 졸업 못했습니다만) 수업이 끝나고 한 선배가 제게 이런 의미의 말을 했어요. “메시를 다른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아주 조금 더 잘할 뿐이야. 아주 미약하지만 그 조금의 차이가 메시를 만들어내는 거야.” 저는 그 의견에 동의했고 후에 메시의 팬인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제 생각인양 그들에게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저를 맹비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저에게 욕설과 함께 내뱉은 내용을 보자면 “메시가 최고가 아니면 베르마엘렌 따위가 세계 최고냐. 그게 말이 되냐”, “이교도!”, “메느님은 축구공과 근본 본체시다!” 등등이었습니다. 

제가 친구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그들의 비난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비록 제가 베르마엘렌이라는 선수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제가 15년째 응원하는 아스날의 주장이거든요) 그가 세계 최고라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는 분명하게 메시가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물론 전적으로 농담이 오고 간 내용이며 웃어넘기면 그만인 에피소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저는 홍정수라는 신학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코미디에 가까운 포스트모던신학 논쟁이 이 에피소드와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어요.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논쟁이 무엇인지 잘 모르시겠죠? 감리교신학대학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가 각각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이라는 이유로 감리교에서 출교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기독교계에 한국적 신학을 만들어내려는 신학적 노력들이 매우 약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말은 뭐 올바른 감리교 신학을 지키기 위한 한국감리교의 읍참마속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넌센스입니다. 끝까지 읽어만 주셔요. 길어서 죄송해요.

홍정수의 출교과정에서 나타나는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비판

홍정수에 대한 출교조치는 1991년 10월 29일부터 개최된 제19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특별총회에서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특별총회의 회의록을 살펴보면 압도적인 동의로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출교조치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죠. 1)“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신학의 입장은 감리교회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결의하여 동시에 이와 같은 신학을 주장하여 교회 확장사업에 장애물이 되는 이에 대하여 의법조치하자는 김홍도 목사의 동의와 박기창 목사의 재청을 재석자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하다. (반대자 1)… 이어서 건의안 제2호에 관하여 토론을 계속하여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신학을 주장하는 변선환 목사와 홍정수 목사에 대하여 제재조처 방안을 논의하매 해당 기관 재단이사회에 면직하도록 하는 총회 결의를 통보하고 당해자가 소속한 연회의 감독은 장정 199단 제8조에 의거하여 심사위원회에 회부케 하자는 리승수 목사의 동의와 임덕순 장로의 재청을 찬성 299, 반대 2로 가결하다.” 「제19회 총회 특별총회 회의록」1991, 10, 30, 제5차 회집,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 회의록 Ⅱ』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2005), 791. 


11월 21일에는 교리수호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공동회장으로 김홍도와 유상렬이 선출되었습니다. 특정 인물의 이름만으로도 뭔가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음모론자의 자질을 갖추신 겁니다. 암튼 이들은 12월 2일 서울연회에 “두 목사는 이단 사상을 교수하고, 통일교 거물급 인사를 5년 동안 비호, 졸업시켰다”는 고소장을 보내었고, 1992년 1월 26일에는 조선일보, 하필이면 조선일보! 어쩜 그렇게 끼리끼리 친하신지!! 암튼 그 빛나는 한국 1등 신문 조선일보에 “변선환․홍정수 교수의 이단사상 및 통일교 연루사실을 폭로한다”는 성명서를 게재했습니다. 두 교수님은 사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받았는데요. 이 성명서에서 홍정수의 이단 사상으로 거론된 내용들의 일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아요. 이해를 돕기 위해 근거로 사용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볼게요. 괄호안은 근거로 사용된 문구가 어디에 수록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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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감리교 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변선환, 홍정수 교수가 이단 사상을 가르쳤다며 고소장을 보냈다. 두 교수의 이단사상으로 거론된 내용들.
이 성명서는 그 마지막 부분에서 타교파 목사님들께 드리는 말씀으로 “감리교회는 복음주의, 경건주의 교단입니다. 몇몇 잘못된 신학자들 때문에 감리교 전체가 이단인 것처럼 매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단이 아니므로 이들을 속히 척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쓰여져 있어요. 2)“변선환․홍정수 교수의 이단사상 및 통일교 연루 사실을 폭로한다,” 「조선일보」 1992. 1. 26일자.

감리교 목사님들 혹시 이 글 읽으시면 감리교회가 복음주의 경건주의 교단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댓글 좀 달아주세요. 

   
▲ 홍정수 목사 ⓒ한국기독교연구소 1992년 5월 7일 금란교회에서 열린 서울연회 재판위원회는 변선환과 홍정수에 대해 출교 판결을 내렸습니다. 금란교회는 잘 아시다시피 김홍도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이지요. 교리수호대책위원회는 다시 조선일보! 또! 또! 그 찬란한 대한민국 1등 신문 조선일보 5월 10일자에 “감신대 변선환, 홍정수 두 교수는 감리교에서 출교되었습니다”라는 제호로 판결문과 광고를 냈습니다. 3)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Ⅱ』(서울: 기독교대한감리교회 유지재단, 1994), 1000.

이 판결문을 살펴보면 그 판결의 내용이 1월의 성명서를 요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에 대한 공격은 대충 저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한 가지 새롭게 선보이는 공격이 있다면 이정도?

9. “3. 피고는 골고다 선상에서의 예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광주 망월동 민중항쟁으로 죽은 많은 민주 인사들의 죽음을 동일시하였다. 또한 피고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믿는 자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로 보지 않고 정의를 외치다 한을 품고 죽은 이들의 정신의 공헌과 같이 간주하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반성서적인 주장이다.” 4) “판결문,”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의 역사Ⅱ』(서울: 기독교대한감리교회 유지재단, 1994), 1004에서 재인용.


그럼 이게 왜 코미디인가

자 그럼 홍정수에 대한 공격의 근거들을 교리수호대책위원회에서 제시해 주셨으니 하나씩 찾아봐야겠죠?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지요. 아 이런 게 제일 즐거워요. 아흥흥. 우선 홍정수교수의 대표 저작 '베짜는 하느님' [5). 참고한 도서는 2002년에 개정된 것으로 페이지가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의 원문부터 살펴볼게요. 밑줄 친 부분이 고소를 당한 부분입니다.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보여드리기 위해 인용이 좀 긴 점 양해해 주세요. 다 제가 친절해서 그런 거에요.

3.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치유의 기적, 용서의 행위, 귀신 추방의 사역 등이 하는 말뜻과 죽음이 하는 말뜻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깊고 깊은 좌절과 혼란에 빠졌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라는 인간의 생체조직이 신적인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거나 그의 피가 동물들이 흘리는 피보다는 월등하게 효과가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했다는 뜻이요, 나아가 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삶의 구체적인 발자취와 “하나”였다는 고백의 말이다. …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써 말했고, 그의 삶이 그의 말보다 더욱 진하고, 더욱 고차적이고, 더욱 신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생애(삶)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지, 그가 입으로만 전하는 말만 듣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그가 한 말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고백되고 있다는 사실을 소흘히 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 왜 그는 하느님의 말씀의 성육신인가?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살려 내셨다”는 또 다른 고백이 답해 준다.” 6)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236-237.


우리 접속어에 대해서 초등학교 때 배웠죠? 앞에 ‘그렇다면’이 붙어있네요? 이 단어는 어떨 때 사용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앞에서의 전제들이 충족된다고 가정할 때 뒤 따라 나오는 내용이 성립된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이지요. 그것도 그것이지만 저 문장의 내용도 뭐 앞뒤 문맥을 보면 별로 문제될 게….

4. “사실상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단지 하나의 마술이나 부적같이 여겨지고 있다. 과거의 어느 한 날 예수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인류의 죄, 나의 죄가 영원히 속죄되었다고 믿고 십자가를 찬미거리로 만든다. 이것이 문자적으로 사실이라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대신하여 예수가 처형된 셈이다. 동물들의 해방만세! 과거의 사람들은 죄짓고, 자기 분수에 따라 동물 하나를 선택하여 제사를 드리면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가 죽음으로써 다시는 불쌍한 동물들이 죽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그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물들을 위해 죽은 것이다. “예수의 피흘림”은 상징적 언어요. 그것은 그의 공생애 전체를 가리킨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따라서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피의 마술을 믿는 교회와 그 교인들은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7)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179.

이 부분도 그렇네요. 그렇다면!!! ‘그렇다면’을 좀 보라고!!! 꼼꼼히 읽어보시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공격하는 것이지 예수의 죽음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흠 말이 좀 거칠기는 하네요.

5. “성서는 세밀히 분석해 보면 예수의 신성한(신으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서는 오히려 그가 소위 공생애 초기부터 이미 죽음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대권인 인간의 죄 용서를 감히 그가 대행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그런 일에 동참할 것을 요청(명령)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던 한 설교자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 곧 피흘림은 그의 죽음 자체에 어떤 마술적 힘 또는 신화적인 힘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죽음 또는 피흘림은 그의 삶의 결정적 요약이요 정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삶이 버젓이 있는 한, 그의 죽음의 형식이 혹 달랐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메시아 됨에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8)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233.


오! 앞 글들과 함께 주욱 읽으시면 홍정수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아시겠나요? 한마디로 그가 던지는 메시지의 핵심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싶어요. “예수의 죽음만 보지 말고 그의 삶을 좀 봐! 값싼 복음에 도취하지 말고 자기 십자가는 좀 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거나 그의 죽음에 대속의 능력이 없다거나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다라고 홍정수가 말한 적이 없단 말이죠. 아, 제가 다 억울해요. 책을 한번 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면 이해하실 거에요.

6. “일반적으로 존재를 묻는 질문은 대개 우리가 그 존재의 주인공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묻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질문이 혹 그렇게 제기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물음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 … 따라서 “하느님은 계신가?” 라는 질문은, “기독교인은 누구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가?” 또 “무엇을 근거로 하느님이란 용어를 발설하는가?”라고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철학자들처럼 일반적인 신 개념을 먼저 설정해 놓고, 거기서 출발하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는다. … 만일 “신은 계신가?”하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신 혹은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신은 역사(사건)를 이야기해 오던 ‘기독교인들의 하느님 이야기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 기독교의 하느님이 누군지, 무엇인지를 알려면 예수 경험을 이해해야 한다.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9)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67-69.


하아,  이쯤되면 너무하죠. 이건 조작이에요. 조작. 고발된 문장에서의 ‘신’은 관념신이죠. 인격신인 하나님을 믿고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관념신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왜 문제야!! 왜!!

7. “포이에르바하나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망사고 이론 또는 투영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 처음에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떤 적극적인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좌절된 욕망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약자들이 “하늘”이라는 가상의 세계에다 그 욕망을 투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 길키에 의하면, 인간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떤 적극적인 감격을 받고, 그것에 대해 이끌리는 “응답”의 행위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응답론”이라고 했다. 무신론자 포이에르바하의 입장보다는 평신도 신학자였던 길키의 입장을 따르고 싶다. …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의 자극 또는 유혹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앙이란 밖에서 주어지는 사건과 나 자신의 적극적인 응답이 합치될 때 비로소 탄생한다.“ 10)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39-40.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이 군계일학이에요. 홍정수가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글을 홍정수의 주장으로 고발한 케이스입니다. 진짜 대단합니다.

8. “예로부터 종교를 갖는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는 “유아기의 무력감”에서 연유한 정신 질환의 일종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어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 교회, 특히 가정과 교회 생활을 등지면서까지 그 어디엔 가에 자기를 몰두시켜 버리려는 광신자들의 경우는 특수한 의미에서 가히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31-32.


어머! 가운데 말을 쏙 빼버렸어요!!!! 가정과 교회생활마저 버리는 광신도들의 경우가 이 문장에서 빠지면 의미가 너무 많이 바뀝니다. 이런 식으로 문장을 세탁하다니 탁월합니다. 아 탁월해요.

9. “만일 예수의 죽음이 그의 생애의 요약이요 절정이며,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설교(말씀 선포)행위였다면, 그의 죽음은 오늘날의 투사의 죽음과 매우 유사하다. 즉 단순한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다. 억울한 의인의 죽음도 아니다. 순교자나 억울한 의인들의 죽음은 외부에서 닥쳐오는 폭력의 희생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설교자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이 아니라 ”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선택된 죽음이다. 이런 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구호를 외치며 투신 또는 분신해 쓰러져 간 젊은이들의 죽음과 매우 유사하다. …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예수의 죽음이 투사들의 죽음과 유사하지만, 우리는 위에서 예수가 사셨던 ”제5 운동“, 곧 ”상생의 길“이 그 당시의 서로 다른 4 집단의 민족주의 신앙 운동과 다름을 지적했었다. … 오히려 그의 죽음의 특징은 처형의 방식이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의 생애(삶) 자체에 있다. 따라서 ”피“가 우리를 속량한다는 성서의 증언은 피로써 말한 예수라는 설교자의 ”말씀“(그것은 이미 그의 생애 속에서 시작되었다)이 인간 우리를 해방시키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고백이다.” 12) 홍정수, '베짜는 하느님'(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2), 234-235. 문제 제기된 동일시는 “동작동 기독교와 망월동 기독교,” 「크리스찬 신문」1991. 03. 30일자에 더욱 확연히 등장한다. “우리 시대 의인들, 충신들은 지금 동작동에 묻혀 있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죄인들, 역적들은 대부분 망월동에 묻혀 있다. … 이 두 공동묘지를 나란히 두고 성서의 부활 사건 이야기를 읽으면 그 의미는 이렇게 분명해진다.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 묻혀 있던 죄인, 역적 하나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역사 속으로 되돌아 오게 된 사건”이요 임금이 역적과 죄인이라고 처형해 버린 불의한 자들, 곧 망월동에 묻혀 있던 자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 의해서 되살아난 사건”이다. 이것은 썩다가 만 한 인간의 부활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시작을 뜻한다. … 이 세상이 처형한 그 죄인이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심판할 새로운 정의로서 확정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활 사건은 망월동에서 시작되어 동작동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심판 사건의 시작이다.”


음 감리교 어르신들이 난독증이 있는 게 분명해요. 현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것과 두 개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드리는 이야기 잘 따라오고 계시죠? 1번과 2번도 한 번 살펴볼까요?

1. "세계적인 칼빈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만일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과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죽은 자들의 부활')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보라고!!! 바르트가 한 말이 문제가 되는지 안되는지는 둘째치고서, 홍정수가 한말이 아니라 인용문이잖아!! 2번의 경우 원문을 입수하지 못해 뭐라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홍정수의 저술에서 찾아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이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영원히 생존한다고 믿는다. 죽음, 생물학적 죽음이 모든 생명체의 필연적 귀결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만은 예외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엄청난 이기심, 아집, 집착의 표현이다. … 그런데 기독교는 오늘도 우리 자신의 신체가 언젠가 되살아나리라는 집착적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다. … 그래도 우리의 신체가 부활에 동참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우리의 신체가 주님의 재림 때에 부활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사용하던 그 원소들의 집성체인 그 신체들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여해 주시는 새로운 신체들이고, … 단지 여기서 시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결론은 나의 신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헌신한 나'가 부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내가 바쳐졌다면, 그렇게 헌신된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존할 것이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존하는 나'가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나'는 부활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15)홍정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해석', 「한몸」 7호 (1990. 7), 27-29.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그 몸뚱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음 전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사실 제가 제 체형에 유감이 많거든요. 음, 뭐가 문제일까요. 알 수 없군요. 다음 글에서는 홍정수와 그의 옹호자들의 반론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손승호 천성이 음모론 신봉자. 음모론에 입각하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역사라는 것을 깨닫고 연세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로 박사과정까지 수료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은 반드시 소녀시대 티파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사회에 본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깊은 회의를 품고, 역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중이다. 
(자료출처 http://www.crosslow.com/news/articleView.html?idxno=966)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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