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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와 웨슬리신학'의 발제 논문들에 대한 논찬

'구약성서와 웨슬리신학'의 발제 논문들에 대한 논찬  
http://cafe.naver.com/modernth/1033   
 감리교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김 홍 기
 
I.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본 존 웨슬리의 인간이해"(서명수 박사)에 대한 논찬:
 
 웨슬리의 인간이해에 관한 중요한 세 개의 설교들을 중심으로 구약신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은 서박사의 큰 학문적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리에게서의 구원론의 목표는 완전 곧 창조 본성의 회복이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그 회복의 완성이 죽기 전에 지상에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웨슬리 구원론의 특징을 이룬다.
웨슬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 of God),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 of God), 도덕적 형상(moral image of God)으로 이해된다. 타락함으로 전적으로 상실된 형상은 도덕적 형상이다. 그 도덕적 형상은 의로움(righteousness)과 거룩함(holiness)이다. 따라서 구원은 그 잃어버린 의로움과 참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다(엡 4:24). 그리고 본성적 형상과 정치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타락하였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서박사의 구약적 해석에서 아쉬운 점은 너무 웨슬리의 본성적 형상으로서의 인간이해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리의 정치적 형상이나 도덕 형상은 전혀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첫 설교 "하나님의 형상"에서 웨슬리의 본성적 형상이해 중에서 감정이나 자유의지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이성에 관한 부분만을 취급한 아쉬움이 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에서 다음과 같이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모든 시대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진리를 확고하게 보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근원인 하나님과 아주 유사하다고(likeness)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에게서 여전히 신적 부모(divine Parent)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릴 때 사용한 자료들이 허락하는 한 그의 인간 그림에 그의  형상을 가능하면 많이 스며들게 하셨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창조론이 끊임없이 공격받아 온 사실을 웨슬리는 언급하고 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얼룩지게 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무수한 불완전함은(imperfection)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하고 무신론자들은 공격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어리석은 도전을 이렇게 소개한다.
왜 인간의 몸이 질병과 고통을 당하며, 마침내는 완전히 소멸하게 됩니까? 왜 인간의 영혼은 여전히 무지와 실수, 자제할 수 없는 열정, 심지어는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보다 더 악한 악덕에 의해 수치를 당하며 추악해집니까? 이 무지하고 비참하며, 죄 많은 피조물이 현명하시고, 행복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려진 훌륭한 그림이라니! 말하기에 부끄럽지만 우리 시대와 우리나라에서도 이 낡아빠진 반박을 열렬히 지지하여서 인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멸망할 짐승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짐승의 모양대로 창조되었으며, 그들도 역시 솔로몬이 말한 것보다도 더 문자적 의미에 가까운 짐승들이라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웨슬리는 어거스틴처럼 마니교적 선과 악의 이원론(dualism)적 창조를 공격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곧 일원론(monism)적 창조를 주장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고 선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웨슬리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과 피조물이 선을 택하지 아니하고 악을 택하는 잘못된 꾀에 빠졌음을 전도서7장 29절에 나타난 솔로몬의 글을 통해 해석한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롭고 선한 본성을 스스로 상실하고 타락하고 부패시키는 선택을 하였다는 것이다.
솔로몬의 설명의 본질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많은 꾀들을 찾아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타락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죄와 고통과 타락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인간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그가 손수 만드신 타락한 인간을 버리시지 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창조되었던 원래의 형상대로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는 수단을 인간에게 제공해 주신다고 강조한다. 웨슬리는 창조된 인간이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 도덕적 형상(moral image),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인간이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에서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첫째 인간의 이성의 이해력(understanding)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그를 만드신 분을 닮았기에, 자연으로 보이는 모든 것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 단순한 식견으로써, 혹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함으로써, 또는 종종 이전에 존재하는 비교로부터 더 심오한 진리를 추론해 냄으로써,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
웨슬리는 인간 이성의 이해력의 의로움(just), 분명함(clear), 신속함(swift), 위대함(greatness)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의롭고, 명료하고, 신속하고, 포괄적인 이해력,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원래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두 번째 자질인 완전한 의지(will)를 말한다. 둘째로 인간의 본성적 형상은 의지(will)이다. 이 속성이야말로 이성보다 더욱 위대하고 더욱 고귀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의지력은 그러한 이해력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우리가 감정(affection)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의 감정은 합리적(rational)이고, 공평(even)하였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love) 그 자체였다. 사랑이 그의 영혼 속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의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곧 사랑이었다. 인간의 마음은 다른 열정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바로 그의 생동감 있는 열기였다. 사랑은 그의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따듯한 온기였다. 사랑의 불꽃은 그가 나온 하나님께로 타오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오히려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감정(affection)을 의미한다. 그리고 웨슬리가 강조하는 세 번째 속성인 자유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다. 셋째로 인간의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은 인간이 본래 즐겼던 자유(liberty)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지 않은 의지(uncorrupted will)와 완전한 자유(perfect freedom)를 누릴 수 있었다. 인간은 그의 첫 번째 신분을 보존하든지 바꾸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 상태로 창조되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하도록 맡겨졌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자신의 선택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하지 않고서는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유일한 주인이며 재판관이었다.
이러한 실수 없는 이해력, 부패하지 않은 의지력, 완전한 자유의 결과는 행복이라는 왕관을 인간에게 씌움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마지막 성공을 이루게 된 것으로 웨슬리는 이해한다. 그 때는 참으로 사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그 때 인간의 의지는 선했으므로 인간의 이해는 진리에 만족했다. 그 때 인간은 창조주로 행복해 하고, 창조의 세계를 즐기고, 고통이 전혀 섞이지 않은 아주 새롭고 아주 순수한 기쁨의 강속에 흠뻑 빠지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있었다. 
웨슬리는 이렇게 지혜롭고, 미덕을 지니고, 행복한 피조물이 어떻게 이러한 완전성을 박탈당했는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가를 설교한다. 웨슬리는 쉽게 대답한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견딜 수 있는지 없는지를 선택할 수 없다. 이 필수적인 시험을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이 정원의 실과는 모두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 그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고 행하도록, 즉 이 유일한 명령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를 아담에게 명시하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너는 진정코 죽게 되리라.'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먹었고 따라서 그 결과 그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죽음이 닥쳤으며 죽음, 병, 고통, 어리석음, 악과 종의 멍에를 지게 되었다.
인간의 이해력은 처음으로 알맞은 기관 활동을 하기에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 인간의 이해력은 더 이상 완벽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이해력은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실수가 뒤따랐고 무지가 증가했다. 인간의 이해력은 더 이상 명료하지 않았고, 이해력의 거울은 뿌옇게 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투명함을 상실했다. 이해력의 명료함과 함께 신속성도 사라져 버렸다. 혼돈과 둔함(slowness)이 나타났다. 인간 이해력의 거대한 능력이 손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 작용의 신속성도 손상되었다. 전에 가졌던 화려한 의지 대신에 지금은 비천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슬픔, 증오, 분노, 두려움과 수치심이 한꺼번에 인간 의지에 쏟아 부어졌다. 일련의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악마적인 열정들이 인간 의지에 달라붙어서 인간 의지를 산산조각 내었다. 인생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빛인 사랑 그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휴식을 찾아 방황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둘째로, 도덕적 형상이란 본성적 형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성적 형상은 영의 이해와 감정과 결단의 기능이라면, 도덕적 형상은 영적 기능에 의해 형성되는 영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적 형상은 피조된 인간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곧 의로움(righteousness)과 참 거룩함(true holiness)이다.
타락한 인간이 전적으로 상실한 부분도 바로 이 도덕적 형상이요, 은총으로 구원받은 인간이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도 바로 이 도덕적 형상이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본성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잃어버렸다가 은총으로 구원받았을 때 부분적으로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는 강조하지 않은 이 도덕적 형상을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이라는 설교에서 본성적 형상과 비교하면서 본성적 형상과 함께 도덕적 형상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본성적 형상으로만 만들지 않으시고 그의 도덕적 형상으로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식(knowledge)으로만 만들지 않으시고 의와 참 거룩함(righteousness and true holiness)으로도 만드셨습니다. 그의 이해력(understanding)에 있어서도 흠이 없고 완전한 것처럼, 그의 감정(affection)에 있어서도 흠이 없고 완전했습니다. …… 하나님의 자유로운 대행자로서 인간은 무엇이든지 선한 것을 그의 이해력의 이끌림에 따라 확고하게 선택하였습니다. 인간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인간 안에 거하시며, 성령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함께 끊임없이 친교하고, 그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선하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을 그의 양심이 증거 하였습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에서 이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인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타락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하였고,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상실하였다." 그런데 그의 설교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하였다고(whole moral image) 지적한다. 그는 거룩하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으며 죄책 의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웨슬리는 "신앙의 발견에 관하여"(On the Discoveries of Faith)라는 설교에서 믿음으로 우리는 불멸의 영으로, 본성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으로, 다시 말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썩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지음 받았음을 믿게 되고, 똑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지금은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고 허물과 죄로 죽었고 선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로 전적으로 상실된 도덕적 형상과 부분적으로 상실된 본성적 형상이 회복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의 설교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여기에 모든 우리의 질병과 우리의 모든 부패한 본성에 대한 치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개입을 통하여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의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으로 새롭게 갱신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곧 지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이해력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식으로 우리를 계몽시키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의 도덕적 형상(moral image), 곧 의로움과 참 거룩함을 새롭게 갱신시키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의 거룩함의 참여자'(partakers of his holiness)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웨슬리의 주관적 능동적 은총의 개념(impartation)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회복된 상태는 아담의 타락 이전 보다 더 훨씬 높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을 상태 보다 훨씬 더 높은 거룩함과 훨씬 더 높은 영광의 상태에로 성도들은 회복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 시킴으로 훨씬 더 나은 구원의 상태로 회복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강조한다(롬8:28)
따라서 웨슬리가 은총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때는 대부분 도덕적 형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의로움과 참 거룩함의 회복을 중요시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거듭남"(The New Birth)에서 거듭남이란 주로 도덕 형상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는 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무엇이 이 교리의 기초입니까?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그 형상이란 단순히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이 아닙니다. 곧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과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와 감정을 지닌 영적 존재만을 뜻함이 아닙니다. 또한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곧 지상 세계의 통치자로서 하늘의 새들과 땅의 가축들과 바다의 물고기들을 다스리는 존재를 의미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주로 도덕적 형상(moral image)을 의미합니다. 곧 사도가 말한 대로 의로움과 거룩함입니다.
   
셋째로, 웨슬리는 정치적 형상을 언급한다. 정치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이란 용어는 웨슬리가 아이작 왓츠(Isaac Watts)로부터 빌려 왔다. 웨슬리는 그의 논문 "원죄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에서 길게 인용한다. 웨슬리는 구약 창 1: 28과 그의 설교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사용한 구약 시 8: 6-8에 나오는 우주의 지배자의 개념을 정치적 형상으로 표현한다.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을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요 왕자 같은 정치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창조주와 그의 피조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채널의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피조물들도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self-motion), 이해력(understanding), 의지와 감정(will, passion), 그리고 선택의 자유(liberty, power of choi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분명히 밝힌다. 동물은 인간처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다름을 강조한다. 이것이 건널 수 없는 큰 만(great gulf)라고 해석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사랑으로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완전이요, 동물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동물의 완전임을 설교한다. 그들이 인간의 통치와 지배를 받으면서 복종할 때 행복하고 선하고 완전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두려움의 존재가 되지 아니하고 인간의 정치적 형상은 두려움의 폭력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이끌려져서 동물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독사를 두려워하거나 독이 있는 거미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타락함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두려움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아담에게는 야생 동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였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타락한 역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노아에게는 야생 동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웨슬리의 생태학적 신학의 발상이 나오고 우주적 성화로까지 그의 구원론이 전개될 수 있는 발상이 나온다. 인간의 도덕적 형상이 파괴됨으로 인하여 정치적 형상도 자연 세계에는 긍정적 의미의 보호자요 구원자요 주인이 아니라 부정적 의미의 정복자와 파괴자와 공포의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까닭에 웨슬리의 구원론에는 인간이 자연과의 아름다운 조화와 사랑의 관계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자연 세계의 구원, 우주의 구원까지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탄식하고 있는 피조물을 더욱 탄식시키지 아니하고 피조물들을 올바르게 돌보고 관리하고 구원하는 바른 관리인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적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자연과 우주마저도 새롭게 재창조되는 종말론적 구원을 웨슬리는 희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정치적 형상을 가지고 만물을 지배하려고만 하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만물을 다스리는 능력(dominion power)을 만물을 그의 손으로 관리하고 돌보는 가운데 구원으로 인도하는 책임(charge)을 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일반적 구원"(The General Deliverance)이란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우주적 구원을 설교한다.
 
또한 피조물 심지어 야생 생물들조차 모두 통탄할 상태에 남아 있을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확신을 갖는 것을 금지하십니다. 그러한 사상을 즐기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는 동안(인간들이 이 탄식에 참여하든 아니하든) 그들의 탄식은 허공에 퍼져 있지 아니하고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의 귀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의 피조물들이 함께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동안 그분은 그들의 고통을 알고 새 창조의 계절에서 성취될 탄생에로 더욱 가깝게 더욱 가깝게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뜨거운 갈망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 열망 속에서 그들 스스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은 전적 파괴를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적 파괴가 아닌 구원을 의미합니다.) 현재적 타락의 속박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해방으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교수가 폰라드의 해석 곧 지배권으로 하나님형상을 소개한 것은 이미 웨슬리의 정치적 형상의 개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서교수는 "죄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로 웨슬리의 자유의지 이해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죄를 짓는 자리도 자유의지라고 보았지만, 자유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응답할 수도 있음을 강조하였다. 루터나 칼빈은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을 곧 노예의지신세를 말하지만, 웨슬리는 항력적 은총(resistable grace) 곧 인간의 의지의 자유를 선재적 은총에 의해서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의 유명한 설교 "우리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관하여"에서 요5:17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를 사용하면서 성령의 100%은총에 인간이 100%응답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human-Divine cooperation의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고 철저히 Divine-human cooperation을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교수는 웨슬리는 아직 교의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기의 신학자이기에 교의학적 분석이 미흡하다고 하였지만, 현대 어느 교의학자보다 웨슬리는 정교하게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해석하였다.
 

II. "웨슬리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이사야의 성화와 소명"(우택주 박사)에 대한 논찬:

 웨슬리의 성화론을 영적 차원에만 국한하지 않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의 상황과 연결시키려는 우박사의 노력은 '삶의 자리'(sitz-im-leben)를 배경으로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연구하는 구약학자다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최근 옥스퍼드감리교신학연구회(Oxford Institute of Methodist Theological Studies)를 중심으로 하는 웨슬리연구가 바로 이런 시각에서 웨슬리의 성화를 여성해방, 흑인해방, 남미해방과 연결시키는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 탐구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옥스퍼드연구회는 옥스퍼드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중심으로 "Sanctification and Liberation," "The Portion of the Poor"라는 책들까지 출판하였다. 특히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웨슬리의 성화론을 취급하는 성결교회 학자들의 입장과는 다르게 최근에 영미에서 웨슬리를 전공한 감리교회나 나사렛교회 학자들은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웨슬리의 성화를 그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상황과 연결시켜서, 다시 말해서 웨슬리의 '삶의 자리'(sitz-im-leben)에서 연구하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본 웨슬리의 성화를 웨슬리 자신의 설교들이나 논문들 속에서 언급하거나, 혹은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웨슬리 학자들의 연구서 들과 사회적 성화론에 관한 웨슬리 학자들의 문서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웨슬리가 감리교찬송서문에서 사회적 성결을 중요하게 언급한 것이나, 산상수훈강해에서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언급했어야 한다. 웨슬리에게있어서 종교는 사회적이여야 하고, 또한 성화도 사회적이여야 한다. 그는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르고,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내면적 경건과 사회적 개혁, 인격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의 생동감있는 조화를 그의 [찬송가 서문](Hymns and Sacred Poems(published in 1739)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독한 종교는 복음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거룩한 고독은
  '거룩한 간음행위'와 같음을 복음은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 종교 아닌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크리스쳔 완전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더하여 준다. 참으로 그의 형제들을 말로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자는
  선행들을 열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의 영혼 속에서
  선행들을 실천하기 위해 타오르는 끊임없는 갈망이 이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주님처럼 매사에 선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웨슬리는 또한 그의 "빛과 소금" 강해에서 기독교를 사회적 종교로 해석하고,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산상수훈강해 VI]에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이 지상에서의 은혜의 왕국의 연속성과 완전성 속에서 이어짐을 강조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은 이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기쁘게, 완전하게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웨슬리학자 아우틀러( Albert Outler)는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고,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복음주의(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면서 웨슬리의 사상은 바로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풀이한다.  이렇게 건전한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적 본질(inward essence)과 사회적 증거(social evidence)를 종합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한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의 목표를 희년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희년의 실현을 위해 세금 제도의 개혁, 고용 제도의 개혁, 노예 해방, 여성 해방, 청지기 의식에 의한 경제적 분배와 나눔, 재산 상속 반대, 광부와 농부와 산업 노동자의 노동조합 운동 등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감리교가 발전한 New Castle, Bristol, Kingswood 지역에 이미 희년 사회가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우박사가 웃시야왕의 죽던 해를 사회정치적(socio-political)으로 잘 분석해내고 그것을 이사야의 성화체험과 연결시킨 것은 괄목할 만한 공헌이라고 생각한다. 웃시야시대에 영토확장으로 인해 자국의 농민에게 지워진 조세의 부담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지역 특용작물재배 정책으로 인하여 농민의 기초 생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생산은 농민이 하고 이익은 지배층이 독차지하는 불공평한 부의 재분배 구조가 형성되었음을 잘 분석하였다. 이러한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이사야가 왕실예언자로서 왕의 정책의 고문 역할을 담당한 장본인으로써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구조악을 만든 공동 죄인임을 고백하는 회개를 하였고, 이제는 자신의 과거 행각을 참회하고 정부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계획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일하겠다는 성화체험을 하였다는 해석은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박사는 그 이사야 본문 주석 마지막부분에서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웨슬리가 강조한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이런 사회적 역동성을 지닌다."고 결론을 내린다. 너무 짧은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체험의 '삶의 자리'도 이사야와 너무나도 유사한 상황이였음을 제시하였더라면 우박사의 논문이 얼마나 더 돋보였을까 생각하여 본다.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에서 인류 최초로 일어난 산업혁명의 과정 속에서 수공업에서 기계공업으로 넘어가면서 기계에 익숙치 않았던 노동자들이 정신적으로 불안하였고, 산업화의 과정에서 산업의 혜택을 누리는 지배자와 부유층에 비하여 고도의 경제 성장의 혜택을 못 누리는 노동자와 농민과 광부의 불만은 하늘로 치솟을 때였다. 웨슬리는 그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노동자속회, 광부속회, 농민속회를 조직하여 인류최초의 노동조합운동이 감리교도들에 의하여 이끌려져 가게 하였고, 고용주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가게 함으로써 그의 신앙운동은 민족개혁운동 내지는 사회혁명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그러한 성화의 사회적 역동성을 웨슬리에게서 조금이라도 끌어내어 비교연구하였더라면 이 논문은 걸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11: 6에 나오는 새 창조의 이야기를 웨슬리는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문자적으로 믿었다: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거할 것이요(이 말은 상징적으로뿐 아니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독사가 어린아이와 함께 누울 것이요." 그러나 새 창조의 세계에서는 그들이 독을 발하지 아니하고 먹이사슬의 약육강식에서 해방되어, "그들은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사 11:9) 이사야와 함께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만 아니라 우주적 성화(cosmic sanctification)를 꿈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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