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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관점에서 본 존 웨슬리의 인간이해

구약성서의 관점에서 본 존 웨슬리의 인간이해  
http://cafe.naver.com/modernth/1032   서명수 (협성대·구약학)
 
 I. 서언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의식을 갖기 시작이래 끊임없이 추구해온 항구적인 질문 중의 하나이다. 무릇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의 근저에는 이 질문이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 신앙 역시 인간학적인 전망으로부터 출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존재의 기원, 인간사회의 악과 죄의 근원, 인간의 구원, 인간 영혼의 미래, 이 모든 것들은 인간학적인 질문으로 환언될 수 있는 주제들이다.
    존 웨슬리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은 그의 신학사상과 사유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발표에서는 구약성서를 본문으로 한 그의 세 편의 설교에 초점을 맞춰 그의 인간이해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 하필 세 편의 설교인가? 그가 사용하고 있는 세 편의 설교 본문들은 인간의 창조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는 본문으로 구약성서의 인간이해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내용전개에 있어서는 먼저 세 편의 설교내용을 요약 소개한 후 그가 설교본문으로 삼은 구절들에 대한 현대 구약학의 연구성과를 대비시키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내용소개와 대비를 통해 구약본문에 기초한 그의 인간이해의 폭과 깊이, 그리고 성서학 연구가 본격화하기 이전에 형성된 그의 인간이해의 한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명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분석을 위해 택한 그의 저작집은 Albert C. Outler(ed.), The Works of John Wesle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7)이며, 이 발표에서는 WJW로 약칭하고, 설교(Sermon) 번호는 S에 숫자를 붙여 약칭하고자 한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그의 설교 세 편은 다음과 같다.
       
    1. S141, "하나님의 형상"(창1:27),  in WJW, vol. IV, pp. 292-303.
                                      설교년도:1730/11/1.
    2.S103,"인간이란무엇인가"(시8:3-4),inWJW,vol.III,pp.455-463.                                                        설교년도:1787/7/23.
    3. S116, "인간이란 무엇인가"(시8:4), in WJW, vol. IV, pp. 20-27.
                                      설교년도:1788/5/2.
            

 
                     II. 세 편의 설교내용 요약과 분석
 
        1. S141,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 창1:27
    이 설교는 존 웨슬리가 1730년도 11월 1일 작성하여 같은 해 11월 15일 St. Mary 칼리지에서 행한 그의 첫 번째 '대학설교'(university sermon)이다. 설교의 내용은 삼 단계로 전개되고 있다. 아담과 이브 안에 있는 하나님 형상의 완전성,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 형상의 손상, 은총의 신비와 형상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그것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아담의 완전성(Adamic perfections)인데, 이에 대한 생각은 웨슬리 자신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옥스퍼드에서는 두루 퍼져있던 생각이었다. 웨슬리는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이자들(Cambridge Platonists)과 John Norris를 통해 접하게 된 기독교 플라톤주의(Christian Platonism)의 '본래적 의'(original righteousness)의 전통을 활용하였다(WJW, IV, 290). 이 설교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의 인간이해에 관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웨슬리는 하나님 형상에 따른 인간창조와 형상의 상실, 그리고 회복에 관한 다음과 같은 총론적인 진술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 고결하게(upright)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많은 조작들(inventions)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남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죄와 비참, 부패로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자비로운 창조주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고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방법을 제공하였다(292). 이러한 총론적 진술에 이어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후 관찰(all-seeing Nature)과 비교(comparing one thing with another)를 통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I.1, 293). 이 능력에 의한 인간의 이해는 정당했으며, 모든 것이 자신의 특성대로 인간에게 나타났다. 사물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어떤 오류나 실수도 없었으며, 무엇을 지각하고 수용하든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였다. 인간은 결코 많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잘못 생각하지도 않았다(293). 있는 그 자체로 명료하였다. 진실과 증거가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갔으며, 거짓 불빛이나 희미한 불빛 아래 놓이지 않았다. 빛은 저녁 어스름과 같이 모호하지 않고 무지의 그림자가 물러갈 때마다 지식의 광휘(光輝)는 번쩍였으며, 인간은 실수와 의심에 낯설었다(293).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명료성, 민첩성, 복합적 이해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게는 보다 고상한 것, 즉 의지가 부여되었는데, 그의 의지 역시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과 동등하게 완벽한 것이었다. 그의 영혼은 사랑으로 가득 찼으며, 경쟁자 없이 사랑이 그를 소유하였다. 매순간 그의 가슴은 사랑이었다(294).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존 웨슬리의 이해를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첫째, 참과 거짓(선과 악)에 대한 구별능력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참과 거짓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양심이나 도덕적 감수성과 같은 추상적인 것에 맡기지 않고 관찰과 비교라는 매우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에 맡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영국 특유의 경험적 사고의 존중과 18세기의 과학기술적 사고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는 명료한 인식능력을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포함시키고 있다. 모든 사물이 명료하게 다가서고 인식되기 때문에 실수와 의심에 낯설 뿐이다. 셋째, 명료성과 민첩성, 복합적 이해 능력이다.
    웨슬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포함시키고 있는 이상의 내용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명석, 판명을 강조한 데카르트적인 인식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결과 참다운 인식능력을 상실하였고 보고 있다(298). 이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가 인식능력과 결부되고 있는 것은 그가 17세 이래 유럽의 지적 풍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데카르트적 사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인식태도에 대해「방법서설」중 제2부("方法의 主要規則)")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 천명한 바 있다.
첫째는 내가 명증적으로 참되다고 안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즉 속단과 편견을 조심하여 피할 것.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조금도 없을 정도로 아주 명석하게 또 아주 판명(判明)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내 판단 속에 넣지 않을 것.
    데카르트의 이러한 명석판명한 인식태도는 17세기 서구 형이상학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왔으며, 18세기의 존 웨슬리 역시 이러한 인식론적 경향에 익숙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S103,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시8:3-4
    이 설교는 웨슬리가 아일랜드 방문에서 돌아온 직후인 1787년 7월 23일 월요일 맨체스터(Manchester)에서 작성한 것인데, 웨슬리는 전체적으로 창조 안에서의 인간의 상대적 비천성(relative insignificance)과 인간의 역할과 가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문화신학에 관한 에세이 성격이 강한 설교이다. 대체로 웨슬리의 설교는 수사적 절정(rhetorical climax)을 지니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서는 적용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이 글에는 그와 같은 특징적인 요소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Introductory comment, 454).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인간의 위대성(magnitude)및 수명(duration)과 관련시켜 고찰하면서 점층법적인 논증방법을 사용하여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상대적 비천성을 드러내고 있다.
 위대성과 관련하여, 인간은 무엇인가? 영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한 개인이란 무엇인가?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란 지구 전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무엇인가?(456) 태양계와 비교하여 볼 때 지구 자체의 위대성이란 무엇인가? 태양과 주변의 수많은 행성들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의 총량은 얼마인가?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이 수많은 것들의 수효를 세며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가? 망원경으로 볼 때 훤히 드러나는 전체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또 얼마나 먼가? 창조의 범위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고정된 별들의 구역을 넘어서는가 넘어서지 않는가? 천체의 공간은 무엇이며, 무한한 것과의 비교해 볼 때 유한한 공간은 무엇인가? 이러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457)
수명과 관련하여,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의 수명이 최종적으로 줄어든 이래로(모세시대에 줄어든 것 같다) 70-80년(시90:10)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표준적인 수명이 되었다. 이 수명의 인생도 수고와 슬픔 속에 지나간다. 무드셀라(969세)의 수명과 비교해볼 때 인간 수명 70-80년은 얼마나 짧은가! 천사의 수명에 비하면 무드셀라의 수명은 또 얼마나 짧은가! 유한한 수명(finite duration)과 무한한 수명(infinite duration) 사이에는 어떤 비례(proportion)가 존재할 수 있는가? 수 천년 혹은 수 만년과 영원 사이에는 어떤 비례가 존재하는가?(458) 영원과 비교해볼 때, 인생 칠십 평생이란 무엇인가? 이 둘 사이의 간격을 어떤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인간의 지극한 왜소함에 인간수명의 찰라성을 더한다면 생각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갖게 될 것이며,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의 통치자는 인간과 같은 미미한 피조물을 등한시할 것이다(459). 
    이 글에서는 창조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상대적인 왜소성과 인간수명의 덧없음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피조물들이 전체 창조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전체와 비교해볼 때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가 점층적인 상대적 비교를 통해 인간존재에 초점을 맞춰 그 비천성과 유한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위대하나 그 안의 창조물 하나하나는 창조세계의 전체와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지극히 왜소하고 미세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 수명 또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창조물 하나 하나의 제한성과 특별히 인간의 왜소, 비천성은 역설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성을 드러내준다 하겠다.
             3. S116,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시8:4
    이 설교는 웨슬리의 기독교 인간론에 관한 간략한 축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영육이원론(body-soul dualism)과 복잡한 기계로서의 육체에 관한 가정에 이어 대두된 제3세대 데카르트주의(third-generation Cartesianism)를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Norris와 Malebranche를 통해 접하게 된 기독교 플라톤주의(Christian Platonism)에 뿌리를 두고 있다(19).
인간은 두렵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진 신기한 기계이다. 흙의 한 부분인 인간은 미세한 먼지들이 머릿결보다 수 천 배 얽혀 더 고운 수 많은 섬유를 구성하고, 이것들이 사방으로 놀랍게도 막(membrance)을 이루고, 이 막들이 동맥, 정맥, 신경, 그리고 선(腺)을 만들고, 이것들은 다양한 유체(fluid)를 포함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기계 전체를 순환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순환을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며, 공기는 엔진(폐)에 의해 목적에 맞게 심신의 질(habit) 속으로 들어간다. 에테르성 불(ethereal fire)은 공기와 물의 입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공기와 물, 불은 폐로 수렴되며, 그곳에서 불은 공기와 물에서 분리되며, 지속적으로 밖으로 내뿜어지고, 그것들에서 분리된 불은 피 속으로 들어가 섞인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공기, 불, 물, 흙 네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적당한 비율로 섞여있다(20). 나는 이 네 가지 원소들 외에 내 안에서 이것들의 혼합으로 이룰 수 없는 '사고하고 있는'(thinks) 것을 발견하게 된다. 뭔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느끼는데, 이 모든 것들은 사고의 양식(modes of thinking)이다. 이러한 감각에 의해 대상을 수용하게 되며, 대상에 대한 내적 관념들(inward ideas)을 형성하게 된다. 내적 관념은 대상들에 관해 판단하며, 이 판단은 대상들이 서로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 지를 주시한다. 내적 관념은 대상들에 관해 논리적으로 생각한다. 즉 다른 것으로부터 하나의 명제를 추론해낸다(21). 사고는 육체 안에 깃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의 어떤 부분에 깃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뇌의 송과선(pineal gland)인지 뇌의 다른 부분인지는 결정할 수 없다. 사고작용이 어느 부분에 자리잡든지 간에 이 내적 원칙(inward principle)은 사고뿐만이 아니라 사랑, 미움, 기쁨, 슬픔, 욕망과 같은 것, 흔히 열정, 애착이라고 부르는 다른 내적 감정의 전체열차(a whole train of other inward emotions)의 근거가 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일반적으로 의지에 의해 구체화되며, 다양한 감정들은 서로 섞이며 수천 가지 방식으로 다양화된다. 그것들은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내적 원칙 안에서 행동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22). 나는 무엇인가? 의심할 바 없이 육체만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내 몸이 죽을 때 나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나는 존재할 것이다. 현재 내 몸은 영혼과 친밀하게 연결되어 나는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실존에 대한 현재의 상태에서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부활 후에 영생을 누릴 것이다(23). 나는 보통 자유라 불리는 하나의 고유성으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빈번히 의지와 혼동되나 그 본성은 매우 다르다. 자유는 의지의 고유성이 아니라 육체의 동작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기능들과 관련하여 발휘될 수 있는 영혼의 독특한 고유성이다. 그것은 비록 우리의 모든 사상과 상상력으로 확대되지는 않을지라도 일반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확대되는 자기 결정력이다. 나는 이러한 자유로 충만해 있다. 말을 하고 안하고, 행동을 하고 안하고, 이것을 찬성하고 반대하고는 나에게 달려있다. 나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소위 갈등의 자유(a liberty of contradiction)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할 수도 있는 불일치의 자유(a liberty contrariety)를 가지고 있다(24).
    이 설교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인간이해에 있어 웨슬리가 희랍철학적 사유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물, 불, 흙, 공기라는 4원소의 합성으로 보는 것은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웨슬리가 인간을 4원소의 합성에 한정시키지 않고 사유를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감각기능과 연결시켜 감각을 사유의 양식으로 본 것은 이오니아 철학자들의 인간이해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 사유의 양식인 감정은 의지에 의해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중요한 활동인 사유는 최종적으로 의지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 점에 있어 웨슬리는 앎과 덕을 하나로 본 소크라테스의 지행합일적인 윤리적 낙관주의와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설교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점은 자유와 의지의 관계에 관한 그의 의견이 명료히 표현되어있다는 점이다. 흔히 웨슬리의 '자유의지'를 말하나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분명 자유는 의지의 고유성이 아니라 영혼의 독특한 고유성이다. '갈등의 자유와'와 '불일치의 자유'로 대표되는 인간의 자유는 의지에 선행하는 영혼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적 활동인 사유는 사유의 양식인 감각과 연결되고, 이 감각은 의지에 의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자유는 사유의 구체화 수단인 의지에 의해 표출된다. 이러한 일련의 유기적 과정을 거쳐 비로소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형성되게 된다.
                     
 
                        III. 구약성서의 인간이해    
 
    1) 창1:27절의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논의는 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이래로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어왔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 사이에 오고간 '접촉점'(Ankn pfungspunkt)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레네우스 이래 많은 학자들이 교의학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려 시도하였다. 그 결과 영혼의 능력, 지성과 의지, 인격성, 자유의지, 인간의 언어성, 책임성 등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구약학자들은  elem을 기본적으로 어떤 모양을 닮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고, 고대근동에서 제국의 왕들이 직접 행차할 수 없는 지역들에 통치권의 상징으로 자신의 형상을 세워두듯이 하나님의 주권의 징표로서의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을 강화, 유지하도록 부름 받은 대리인이라는 견해(von Rad)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능력을 의미한다는 견해(Westermann)와 고대근동에서 신의 형상으로서 왕이 지상에서 신을 대표하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라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Schmidt)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들에 비추어 볼 때 존 웨슬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설교(S141)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로 관찰과 비교를 통한 구별능력, 특별히 참과 거짓(선과 악)의 구별능력으로, 그리고 명료성, 민첩성, 복합적 이해능력으로 파악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교의학적 전통에 가까이 있으면서 당시에 풍미하던 데카르트의 인식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웨슬리 당시에는 구약학이 교의학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의학적인 하나님 형상이해를 따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며, 당시의 한 지성인으로서 옥스퍼드에 널리 소개된 데카르트의 인식론의 영향을 받은 것 또한 낯선 일이 아니다.
    2) 시8:3-4절에 관한 설교(S103)에서 인간의 비천성을 읽어낸 것은 매우 적절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에 떠 있는 웅장한 천체들을 바라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8:3). 그래서 "사람이 무엇이기에"(m -'en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노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이 설교에서 3절에 강조점을 두고 인간의 비천성을 끌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웨슬리는 5-8절에 나오는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분명 시8편은 인간의 초라함을 토로하고 있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비록 인간이 초라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처럼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오히려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 시8편에는 신의 형상성(Gottebenbildlichkeit)에 대한 창세기 1장의 P전승의 신학이 반복되어 있다고 볼 때 시8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비천성보다 존귀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년이 못되어 웨슬리는 다시 시8:4절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한다. 이전 설교에서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에 의한 인간존재의 고양을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한 것인가? 4절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설교에서 이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의지, 자유의지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사실 창2-3장을 본문으로 삼아야 마땅한 주제이다. 시8:4절은 분명 비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극진한 관심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을 지칭하는 두 단어가 등장하는데, 'en  와 ben-' d m이 그것이다. 둘 다 인간의 연약성과 피조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 두 단어에 대응하여 '기억하다'(z kar)와 '돌보아주다'(p qad)가 연결되고 있다. 전자는 곤궁한 처지를 기억해주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약자를 돌보아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설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사랑을 다루면서도 인간존재의 고귀성의 문제로 넘어가지 못하고 죄의 문제로 귀결되는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V. 결어
 
    구약성서를 본문으로 한 존 웨슬리의 세 편의 설교에서 그의 인간이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추론해볼 수 있다.
    첫째, 존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구약학이 교의학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기 이전의 교의학적인 인간이해의 경향(하나님의 형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한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명석판명한 분별/인식능력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웨슬리에게 있어 인간이해에 관한 한 인간의 고귀성이나 위대성보다는 인간영혼의 특별한 고유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의 문제와 사유의 양식으로서의 감정을 구체화하는 의지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자유의지의 문제가 보다 더 긴급한 성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 인간의 타락과 구원에 관한 문제가 인간의 위대성이나 고귀성을 드러내는 문제보다 더 긴급한 문제였음을 암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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