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신학의 재발견
존 웨슬리신학의 재발견
http://cafe.naver.com/modernth/651
김홍기 목사(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Ph.D.)
21세기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와 미주 한인교회는 개혁과 갱신을 도모하고 있다.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신학적 성숙은 이루지 못하였다. 건전한 신학 위에서 건전한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항상 교회개혁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지혜를 재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종교개혁도 역사의 재발견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오늘의 한국교회와 민주한인교회의 신학과 목회와 영성의 개혁을 제안하여 보고자 한다.
1.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
웨슬리는 루터의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의 영성 신학에 철저히 근거하면서도 성화 신학을 칼빈보다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성화 신학이 칼빈의 성화 신학보다 더욱 행동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에서 나타난다. 칼빈의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서 인간 속에서 행하는 행동이지 인간은 노예 신세이다.
거기에 반하여 웨슬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이 먼저 역사 하지만 거기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응답으로 곧 신인 협조로 성화가 이루어진다. 신앙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거듭남도 성령의 내재의 은총으로 되어지지만 성화는 믿음(하나님의 선물)과 사랑(인간의 선행적 참여)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생각한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원죄설을 받아들인 루터와 칼빈의 개신교 전통을 따라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적 회복이 가능함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신앙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총, 곧 선재적 은총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양심, 종교성, 자유의지라는 빛을 주셨다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는 은총은 모든 사람이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도록 하신다. 그의 성령도 때때로 모든 사람 속에서 일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들을 가능한 한 억누르거나(stifle), 후에 잊어버리거나(forget), 부인한다(deny)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나 중세 천주교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자유의지론-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남-과 다르다. 웨슬리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뿐 아니라 양심과 종교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향해(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원의 은총을 열망하는 열심과 사모하는 마음도 의미한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 교회의 Gregory of Nyssa와 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 교회의 Augustine의 영향, 그리고 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총론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적 응답과 책임적 결단을 무시하고 거부할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인 자유의지론은 또한 칼빈의 제한된 속죄론을 비판한다. 곧, 제한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제한된 사람, 예정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가 혹은 안 믿는 가라는 믿음의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다. 뿐만 아니라 예정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칼빈주의적 견인의 은총을 비판하면서, 성도라 할지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적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서 선재적 은총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도 있고 다윗의 실수처럼 타락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특히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지론을 거부하고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룩함에 관하여"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표현을 인용한다. 어거스틴은 불가항력적 은총을 펠라기우스와의 논쟁(De Gratia et Libero Arbitrio)에서 강조했지만, 선재적 은총과 자유의지를 마니교화의 논쟁(De Libero Arbitrio)에서 강조했다. 따라서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론은 알미니우스적이면서도 어거스틴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먼저 역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human-Divine cooperation)이 아니라(인간 50% 하나님 50%)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면 인간이 응답하는 것(Divine-human cooperation)이다(하나님 100% 인간 100%): "먼저 하나님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할 수 있다(can). 둘째로, 하나님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must)... 만일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당신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그의 선재적 은총론을 동방 교회에서 배웠다. 동방 교회의 교부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을 통하여 자유의지적 책임성을 배웠다. 그들은 은총에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로워질 뿐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을 주장했다. 인간의 의지적 참여인 사랑의 행동이 없는, 사랑으로 역사 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생각한 동방 교부들의 사상을 웨슬리는 받아들인다.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이 구원의 과정에서 갖는 역할을 다시 요약하면:
첫째,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
둘째,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
셋째,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유의지적 참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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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목사(서울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Ph.D.)
21세기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와 미주 한인교회는 개혁과 갱신을 도모하고 있다.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신학적 성숙은 이루지 못하였다. 건전한 신학 위에서 건전한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항상 교회개혁은 역사 속에서 나타난 지혜를 재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종교개혁도 역사의 재발견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오늘의 한국교회와 민주한인교회의 신학과 목회와 영성의 개혁을 제안하여 보고자 한다.
1. 복음적 신인협조설(Evangelical Synergism)
웨슬리는 루터의 신앙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의 영성 신학에 철저히 근거하면서도 성화 신학을 칼빈보다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성화 신학이 칼빈의 성화 신학보다 더욱 행동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에서 나타난다. 칼빈의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서 인간 속에서 행하는 행동이지 인간은 노예 신세이다.
거기에 반하여 웨슬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이 먼저 역사 하지만 거기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응답으로 곧 신인 협조로 성화가 이루어진다. 신앙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거듭남도 성령의 내재의 은총으로 되어지지만 성화는 믿음(하나님의 선물)과 사랑(인간의 선행적 참여)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생각한다.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원죄설을 받아들인 루터와 칼빈의 개신교 전통을 따라서 인간의 타락과 원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적 회복이 가능함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신앙 이전에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은총, 곧 선재적 은총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양심, 종교성, 자유의지라는 빛을 주셨다고 해석한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는 은총은 모든 사람이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도록 하신다. 그의 성령도 때때로 모든 사람 속에서 일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들을 가능한 한 억누르거나(stifle), 후에 잊어버리거나(forget), 부인한다(deny)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나 중세 천주교의 반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의 자유의지론-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남-과 다르다. 웨슬리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났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뿐 아니라 양심과 종교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향해(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또한 구원의 은총을 열망하는 열심과 사모하는 마음도 의미한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계속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성령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적 응답과 참여에 의해 구원이 완성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은 동방 교회의 Gregory of Nyssa와 John Chrysostom의 영향, 서방 교회의 Augustine의 영향, 그리고 James Arminius의 영향 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총론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인격적 응답과 책임적 결단을 무시하고 거부할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알미니우스적인 자유의지론은 또한 칼빈의 제한된 속죄론을 비판한다. 곧, 제한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보혈이 제한된 사람, 예정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는가 혹은 안 믿는 가라는 믿음의 조건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다. 뿐만 아니라 예정된 성도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신다는 칼빈주의적 견인의 은총을 비판하면서, 성도라 할지라도 자유의지 때문에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적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서 선재적 은총인 자유의지에 의하여 구원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열지 않을 수도 있으며, 구원받은 성도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도 있고 다윗의 실수처럼 타락하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특히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의 지론을 거부하고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론을 받아들여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룩함에 관하여"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는 어거스틴의 표현을 인용한다. 어거스틴은 불가항력적 은총을 펠라기우스와의 논쟁(De Gratia et Libero Arbitrio)에서 강조했지만, 선재적 은총과 자유의지를 마니교화의 논쟁(De Libero Arbitrio)에서 강조했다. 따라서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론은 알미니우스적이면서도 어거스틴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먼저 역사하면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human-Divine cooperation)이 아니라(인간 50% 하나님 50%) 하나님이 먼저 역사하면 인간이 응답하는 것(Divine-human cooperation)이다(하나님 100% 인간 100%): "먼저 하나님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할 수 있다(can). 둘째로, 하나님이 역사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must)... 만일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당신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그의 선재적 은총론을 동방 교회에서 배웠다. 동방 교회의 교부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을 통하여 자유의지적 책임성을 배웠다. 그들은 은총에 응답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였으며, 믿음으로 의로워질 뿐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로 채워지는 믿음을 주장했다. 인간의 의지적 참여인 사랑의 행동이 없는, 사랑으로 역사 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생각한 동방 교부들의 사상을 웨슬리는 받아들인다.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이 구원의 과정에서 갖는 역할을 다시 요약하면:
첫째,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
둘째,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
셋째,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유의지적 참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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