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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선행은총론(先行恩寵論)

웨슬리의 선행은총론(先行恩寵論) 
http://cafe.naver.com/modernth/600   
  
1. 머리말
2. 은총의 개념
3. 선행은총의 의미
4. 웨슬리와 선행은총
5.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서의 선행은총
6 선행은총의 작용
7. 선행은총의 요소 : 선행은총과 원죄 / 선행은총과 이성 / 선행은총과 율법 / 선행은총과 양심 / 선행은총과 자유의지
8. 선행은총의 보편성
9. 선행은총과 구원 : 이방인의 구원 / 어린아이와 정신이상자의 구원
10. 선행은총과 신인협력설
11. 맺음말

 
1. 머리말
 
선행은총은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웨슬리 신학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특히 웨슬리는 은총의 화두로 선행은총을 말하고 있다. 선행은총 없이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의 원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 율법, 양심, 그리고 자유의지 등과 같은 속성들도 소유할 수도 없다. 이같은 인간의 속성들은 모든 인간에게 에외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런 속성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접촉점을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접촉점들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응답할 수 있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의 체계는 원죄와 선행은총을 근간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웨슬리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행은총론의 내용을 살펴서 차후에 논의될 인간론의 전이해로 삼고자 한다.

2. 은총의 개념

 
웨슬리 전문 신학자 아우틀러(A. Outler)가 진술한바와 같이 은총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활동"이다. 은총은 인간의 실존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하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은총'을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사랑'을 전제한다. 따라서 은총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우리를 전적으로 성화시키기 위해서 성령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의 될 수 있다. 웨슬리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은총으로 보았다. 은총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은 강제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본질도 아니고 사랑의 본질도 아니다. '사랑으로서의 은총'은 일반적으로 '신적인 사유와 용서', 또는 '우리 본성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은총을 받으면 하나님의 용서와 사유가 있게되고 또한 인간의 갱신을 동반한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유 그리고 인간의 갱신을 동반하는 은총은 인간의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은총없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구원받은 자는 어느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요청된다. 은총이란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베푸시는 지배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기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은 구원의 근원(foundation)이요. 신앙은 구원의 조건(condition)이 된다.

 
3. 선행은총의 의미

선행은총에서 '선행'의 의미는 착한 행위의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보다 앞서, 먼저, 예비하는' 뜻으로서의 선행(先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보다 먼저 오는 은총(grace that goes before), 우리의 회심이전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은총,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은총, 즉 아직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롬 5:8). 인간이 구원받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으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며 구원을 준비시킨다. 이러한 은혜를 웨슬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라 한다. 또한 선행은총은 만인을 위한 은총(universal grace)이며 만민 안에 작용하는 보편적 은총이다. 뿐만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골고루 주시는 은총이다. 따라서 인간이 간구하기 이전부터 이미 인간 자체 안에 주어져 존재하는 은총, 즉 미리 역사하는 은총이다.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이 은총밖에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행은총 없이 존재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선행적으로 값없이 만인에게 주시는 선행은총은 주로 이성 또는 자기결정을 위한 자유의지 등의 '정신적인 본성'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자연적 양심'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어느 정도의 욕망을 말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아래 있는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지향할 수 없으므로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체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행은총은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고 하나님께 응답하기 위한 최소한의 은총이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며 깨닫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4. 웨슬리와 선행은총

역사적으로 선행은총에 대한 구체적 신학적 개념은 터툴리안(Tertullian),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키프리안(Cyprian) 등과 같은 초대 교부들의 신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펠라기우스(Pelagius)는 "선을 향한 인간의 본래의 타고난 능력"을 선행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어거스틴(Augustine)도 역시 은총은 모든 것에 선행한다는 선행은총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은총은 인간이 선을 행하기 이전에 선행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행하는 은총에 뒤따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먼저 선재하고 그 다음에 그 은총에 대한 인간의 긍정적 반응의 결과로 인간은 선을 행할 의지를 얻게된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에 대한 사상은 초대고부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 16세기 화란의 신학자인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1560-1609), 그리고 16-17세기의 영국 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웨슬리는 크리소스톰으로부터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 은총에 대한 응답의 필요성, 은총 안에서의 성장과 퇴보, 그리고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칼빈의 예정론이 성서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주장한 16세기 화란 신학자 아르미니우스로부터 예지에 기초한 조건적 선택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에 따라 제한되는 만인구속설을 배웠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먼저 인간의 전적 부패와 함께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행은총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주의를 떠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입각해서 웨슬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자유의지가 결여된 상태에 있다고 보았다. 자연인(The natural man)은 완전히 타락하여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인간이며, 이들은 구원의 능력이나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이들의 자유의지는 악을 선택하는데만 자유롭기 때문에 이들은 진노의 자식이며 죄의 종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와 통찰력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배푸시는 구원에 대한 수용여부를 자유롭게 결단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구원받은 인간과 멸망받을 인간을 구별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와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이 멸망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의 이러한 견해는 성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 일치한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성서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멸망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으로 주신 우리의 자유의지를 인간이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주장과 같이 인간은 선행은총에 의하여 도덕적인 상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의 계시와는 별도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5.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서의 선행은총

웨슬리는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신학적 관심을 두고, 인간이 택해야 할 길을 보여주며, 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은총'을 제시해 준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구원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고 생각하고 "구원은 일반적으로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고 말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웨슬리 신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이에 대한 인간의 적응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양심과 같은 선행 은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 계시하시고, 그 다음에 복음의 은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 실제로 구원의 과정에서 은총의 역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으로부터 시작한다. 웨슬리 신학에서 구원의 순서는 1) 선행은총의 역사, 2) 칭의 전의 회개, 3) 칭의, 4) 신생, 5)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6) 완전성화의 순서를 따른다. 구원의 순서에서 보듯이 선행은총은 구원의 첫 단계에 서있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웨슬리의 구원단계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구원의 시작이 선행은총이라면 선행은총의 목표는 구원이다. 선행은총은 넓은 의미에서 구원의 시작일 뿐이지 실제적으로 구원의 사건(칭의, 중생)을 일으키는 은총이 아니며 더군다나 구원의 완성을 가져오지 않는다. 선행은총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역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제한된 정도에서만 적용된다. 인간의 본질적인 변화는 선행은총을 넘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신앙으로 일깨워 사랑의 힘을 갖게 하는 새로운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선행은총의 빛으로 구원의 완성은 불충분하다.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열번째 조항에 의거하여 선의 실행은 선행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선행은총은 신앙에 의해서 시작된 은총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비적 은총에 불과하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충분한 은총은 될 수 없다. 선행은총은 단지 구원의 시작과 완성 전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으로서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으로 기능하지 구원 자체를 위한 충분한 은총으로 기능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6. 선행은총의 작용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나타난 결과 가운데 무엇보다도 제일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깨달음을 촉발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선행은총이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일깨워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로서 우리의 찬송과 기도가 살아나고 성경 말씀이 역동적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과 양심과 이성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선행은총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선행은총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우리 자신의 의지를 구사하여 은총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받은 능력은 부정적 능력과 수용적 능력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인간은 매순간마다 은총에 순종할 수 있고 반항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갖게된다. 이런 능력으로 인간은 회개에 이르게 되어 구원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행은총의 작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응답의 능력은 인간을 책임적 존재가 되게 한다.

셋째로 선행은총의 작용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의지의 자유 등이 회복되어있다. 인간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 양심, 선악 개념, 하나님과 내세(구원)에 대한 소망 등은 선행 은총에 의해 회복된 은혜의 선물이다.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는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행은총으로 이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한다. 타락에 의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선행은총에 의하여 부분적이나마(자연적, 정치적 형상) 회복되어 타락전후의 인간성은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선행은총은 사실상 아담 이후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되기 전부터 역사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대속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져 타락으로 완전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이나마 회복된 것이다. 선행 은총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먼저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7. 선행은총의 요소

선행은총의 요소들은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 분별력, 양심, 율법 등을 들 수가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선행은총의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를 영접하며, 의와 불의, 진리와 비진리를 식별하고, 양심을 통하여 악을 깨달아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회심 또는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선행은총에 의해 시작된다. 즉 선행은총에 의하여 진리이신 예수님을 분별하고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고 의인으로 칭함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므로 회개와 의인의 반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행은총에 의한 것이다. 그러면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요소들과 그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선행은총과 원죄

웨슬리에게서 원죄는 인간의 죄책과 죄성을 말한다. 이 원죄는 영원한 사망을 초래한다. 그러나 웨슬리에 의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원죄 때문에 죽지 않는다. 만약 죽게 된다면 그것은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인간 개인이 의도적으로 지은 자범죄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원죄 때문이 아니라 자범죄 때문이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은 태어나자마자 제거되었다. 원죄의 죄책은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지워진 연대책임이라면 원죄의 죄책 역시 선행은총에 의하여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연대사면된 것이다. 원죄의 죄책이 연대 사면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이다. 선행은총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만인에게 적용되게 함으로써 만인은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선행은총과 이성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을 때 이성도 본래 기능을 상실하였으나 선행은총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성은 이해력, 판단력, 토의력의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이성을 통해 인간은 어느 정도 신을 알게 된다. 회복된 이성이 신인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선행은총 안에서의 이성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총인 믿음을 통하여 일깨워지는 이성이 되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찰하게 한다.

이성은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지각(perception)으로서 마음에 사물을 느끼게 한다. 둘째, 판단(judgement)으로서 인식을 서로 비교한다. 셋째, 담화(discourse)로서 하나의 판단으로부터 또 다른 판단에 이르는 마음의 진보를 이룬다. "이성은 어떻게 사물들이 서로 작용하는지를 파악하게 한다. 즉 질서와 관계를 식별하게끔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올바르게 판단을 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한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세계를 향한 인간 실존이 취해야 할 태도는 신앙과 합리성이다. 인간이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합리성을 추구할 수 없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서 신앙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에 대해서 합리적인 태도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인간의 세계에 대한 태도는 합리성에 있다. 세계는 피조물이지 신이 아니다. 따라서 세계에 대한 신앙적 태도는 상대의 절대화,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관리는 신앙적이 아닌 합리적으로 해야한다. 따라서 인간은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이성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사항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이성은 기독교 진리를 해석하는데 필요불가결의 도구이기는 하나 기독교 진리의 내용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행은총과 율법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부분적으로 다시 하나님의 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과 동시에 내면의 율법인 도덕법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하셨다. 이것이 선행은총이다. 어느 정도 회복된 도덕법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이 작용한 결과이다. 선행은총이 구원의 충분한 은총이 아니듯이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율법도 죄를 깨닫게하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지,. 죄인을 의롭게하여 구원을 얻게 하지는 못한다.

 
선행은총과 양심

우리는 본질상 죄 중에 죽어있는 상태에 있지만 어느 누구도 자연적 양심을 져버린 사람은 없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양심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의미에서 양심은 자연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적 인간이 지닌 양심은 웨슬리에 의하면 자연적이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인 선행은총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양심과 선행은총을 동일시하고 죄인이 지닌 양심을 선행은총의 증거로 본다. 웨슬리에게 양심이 모든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상 자연적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양심은 우리의 기질, 생활, 사고, 언어, 행동의 본성과 본질을 통찰하고, 어떤 기준에 의하여 우리가 행동해야 할지를 인지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되어 자기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양심은 제한된 정도로 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웨슬리는 이 양심을 "세상에서 온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그들의 마음이나 삶, 그들의 견해, 사상, 말과 행실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혹은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웨슬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여 선을 위하여 자신을 결단하는 인간의 능력은 좌우간에 하나님의 은사임을 확신한다. 양심은 인간 자신의 견해와 행동에 대한 판단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을 따를 때 만족감을 얻으며, 거부할 때 불안을 느끼게 함으로써 어떤 방향으로의 행동을 유도하는 도구로 양심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양심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면 양심은 무디어 지고, 양심에 순종하면 그 양심은 더욱 새로워진다.

웨슬리는 양심을 선한 양심(good conscience)과 부드러운 양심(tender conscience), 그리고 굳어진 양심(harden conscience)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것을 피하는 양심이다. 부드러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날 때 즉각적으로 후회하고 자기를 반성하여 탄식으로 크게 부르짖게 하는 양심이다. 굳어진 양심은 하나님의 금하신 것을 행하는 화인맞은 양심이다.

윌리암즈(C. Williams)는 인간은 선행은총에 응답하고 자기의 양심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피력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양심을 가진 인간이 범죄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은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은총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행은총의 사용이 인간의 공적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급된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응답이 되고, 또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그의 은총으로 우리를 계속적으로 북돋우어 줄 때에만 열려질 수 있다." 인간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양심을 부인하면 구원에서 멀어진다. 양심도 이성이나 율법처럼 구원의 은총이 아니다.

런연(Theodore Runyon)은 선행 은총 안에서의 양심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으며, 우리 죄의 심각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 건강한 역할을 감당한다." 양심은 회개를 유발시킨다. 따라서 양심은 구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이로서 양심은 성령의 목적에 봉사하며 선행은총에 의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선행은총과 자유의지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며 하나님을 용납 또는 배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선행 은총을 통하여 응답 또는 반항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선행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용납 또는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속에 창조한다.

선행은총으로 우리는 선과 악을 택하는 자유, 즉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를 가지고 있다. 의지의 자유는 단순히 의지의 작용이 아니고 인간 영혼의 한 속성으로 각 영혼의 정서와 이성, 그리고 의지를 관장하는 능력이다. 이 자유는 인간의 영혼의 본성에 속하며 모든 인간- 신자이건 불신자인건-이 이 본성을 가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선행은총에 의하여 회복된 것이다.

선행은총에 의해서 회복된 의지의 자유의 유용에 따라 선악의 행위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행동에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은 강요받은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도덕적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선행은총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원죄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따라서 인간이 원죄에 눌려 구체적으로 악한 마음을 가지고 죄를 범하게 되면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거쳐야 하지마는 영원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행사하지 않은 인간의 무책임 때문에 그 형벌을 받는다. 인간의 주체성의 강조와 자유의지에 의한 결단에 대한 강조가 웨슬리 신학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Council of Trent, 1545-1563)의 카톨릭 교회의 선행은총의 교리는 아니다. 로마카톨릭 경우는 인간이 하나님의 선행은총과 협력함으로서 사랑에 의하여 형성되는 신앙을 획득하게 된다는 다분히 사변적이다. 웨슬리의 경우는 유대교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이해와 비슷하다. 자유와 결단과의 역설은 '나와너'의 만남의 중심에 존재한다. 자기결단의 한 복판에서 그 결단 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유효하다는 칼빈의 예정설에 반대한다.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개인의 책임을 주장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으나 구원받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개인의 책임과 자유의지가 중시된다. 의지의 확립이 없는 어린아이에게는 선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이 져야한다.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의 신인협력설을 따라, 무조건적 선택설이 아닌 조건적 선택설을 수용하였다. 선행은총과 의지의 자유의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에 대한 문제로 발전하여 웨슬리의 신인협력설로 발전된다.

 
8. 선행은총의 보편성

타락으로 인하여 도덕적 형상이 상실된 인간은 죄짓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개입 없이, 인간 자신의 어떠한 종교적 또는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적 변화를 시도할 수 없다. 자연적 인간은 사랑에 대해 무능력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다. 자연적 인간의 상태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 영적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2) 신적인 것에 대한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관하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3) 복음적 성화에 관하여 어떤 표상도 갖고 있지 못하다. 3)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모르고 따라서 그가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웨슬리는 선행은총이 없는 자연적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선행은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멀리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완전히 이탈된 자연적 상태의 인간은 없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은 선행은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올바르게 간직하여 이를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을 따르고 악을 버리라는 요청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요청도, 이성과 합리성을 존중하라는 요청도, 이 요청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도 모두 선행은총의 활동인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령의 선행적 역사를 회심 시기에 한정하고 있는데 웨슬리는 사람이 세상에 출생할 때에 이미 인간 안에 성령이 역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선행하는 성령의 역사가 회심에로 인도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을 성령을 통하여 처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이해한 까닭에 신앙이전에 생기는 죄의 확신과 회개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과 동일시하고 그 양자를 신앙 이후에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이 회심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보편적으로 주어진 접촉점 즉, 선행은총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의 행위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사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각각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부여되어졌다는 것이 웨슬리의 확신이다. 기독교적인 선행들의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의 활동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기 이전의 인간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양심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모든 이슬람교도들과 모든 이교도들 심지어 야만인들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양심은 선행은총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행은총에서 제외된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은 인간이면 누구나 선행은총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선행은총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9. 선행은총과 구원

 
이방인의 구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으로 인간이 의인(義認)될 수 있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의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웨슬리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웨슬리는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는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신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 은총에 대한 반응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도덕은 그리스도인은 물론 기독교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도덕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을 위해 힘을 발하지 못한다. 성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교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우리는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 - 이교도나 이슬람교 등 - 이 모두 저주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운명은 하나님께 있다. 기독교권 밖의 사람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웨슬리는 그들의 도덕성에 두고 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한 근거를 그의 선행은총의 교리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받으실" (행 10:35) 것이기 때문이다.

런연은 웨슬리가 미국 감리교회에 보낸 종교강령(the Articles of Religion)에서 영국 교회의 제18조 강령("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얻는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을 뺀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은혜로운 계시의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사 하신다고 본다.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이 은총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따라 심판된다고 믿는다. 웨슬리는 복음을 들은 적은 없으나 그들의 영혼 속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선행 은총의 역사에 응답한 자들은 그 응답의 열매로 의인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이전의 인간도 성령의 예비적인 역사에 응답함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을 종용받는다. 그러나 익명적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주님의 완전한 계시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된다. 이런 면에서 린드스트롬(Lindstrom)이 말한 바와 같이 웨슬리에게서 자연신학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웨슬리에게서 찾아 볼 수 없다.

웨슬리의 선행은총은 모든 이에게 역사하신다. 웨슬리는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선행은총에 따라 심판된다고 믿었다. 즉 복음을 들은 일이 없으나 그들의 영혼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선행은총에 응답한 자들은 그들에게 종말에 나타날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신앙으로 칭의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정신이상자의 구원

어린아이는 원죄에 저항할 힘도 없으며 도덕적 분별력이 없으며, 의지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에 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어린이가 죽는다면 그 어린이의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웨슬리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원죄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이 경우의 어린아이는 선행은총에 의해서 구원받는다고 보았다. 그 까닭은 선행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가 온 인류(어른, 어린아이 모두)의 죄책을 사면해 주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는 선행은총이 구원의 은총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도덕적 무능력자, 정신박약아, 정신이상자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어린아이에 해당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본다. 따라서 선행은총이 어린이에게 구원의 은총이듯이 이들에게도 선행은총은 구원의 은총이 된다.

 
10. 선행은총과 신인협력설

이미 구원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선행은총임을 밝혔다. 그러나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이지 구원의 충분은총이 아니다. 선행은총의 개념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있어서 책임을 진다. 왜냐하면 선행은총으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므로 인간의 멸망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고도 활용하지(응답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예정론도 선행은총론으로 인하여 배격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에서 칼빈과 웨슬리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은혜의 역사 방법에서 다르다. 칼빈에게 은혜는 제한적이며 특수적이다. 웨슬리와 칼빈의 차이점은 선행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할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책임이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좌우되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으나, 웨슬리는 모든 사람이 선행은총으로 자기의지의 결정에 따라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행은총의 개념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 있으므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은총에 응답하면 구원이요, 거절하면 멸망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협력한다. 은총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사업에 협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선행은총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선행적인 활동에 상응하게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의 작업에 인간의 동참은 필연적이다. 웨슬리의 사상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선행은총이 있어야 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의지 속에서 응답해야 한다. 성령은 인생의 각가지 단계에서 죄로부터 성결에 이르기까지 지도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역사에 협력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복음적 신인협력설(Evangelical Synergism)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신인협력설은 반펠라기우스주의나 중세 카톨릭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협력과 인간의 협력이 절반씩 나눠 맡는 협력이 아니다. 웨슬리의 신인협력설은 구원의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그 주도권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능력을 강조한다.

콜린 윌리암즈(Coollin Williams)는 인간이 선행은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응답하는 것을 인간의 공적이나 수고의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음적 신인협력설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책임있는 위치에서 함께 호응하여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선행은총은 구원의 시작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며 웨슬리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과 상통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웨슬리는 기본적으로는 칼빈주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은총에 대하여 동의하지만 칼빈주의적인 은총관은 자유를 포함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웨슬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동방교회 교부들에게 나타나는 '협동적인 은혜'를 추종하였다. 즉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한 어거스틴과 같이 구원의 모든 단계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synergy)을 주장하였다.

청교도들은 39개조 종교강령 중 제17강령, "예정과 선택에 관하여(이 강령은 웨슬리가 미국 감리교회가 사용하도록 보낸 종교강령에서는 제외시켰다)"라는 교리에 의해서 예정론의 합당함을 주장했다. 웨슬리의 추종자들 가운데서도 이 예정론에 설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조오지 휫필드(G. Whitefield), 헌팅톤 여사(Huntington), 웰쉬의 칼빈 감리교 연회(Welsh Calvinist Methodist Conference)와 후에는 찬송가 작가인 어거스트 톱 레이디(A. Toplady) 등이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불가항력적인 칙령의 능력에 의해서 한 부류의 인간은 확실히 구원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확실히 멸망한다"는 예정론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나타나는 약점에 대해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1) 모든 설교가 헛될 것이다. 설교에 상관없이 선택받은 자는 구원받을 것이요 선택받지 못한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모든 설교를 헛되게 만들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령인 설교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한 거룩성을 파괴시킬 것이다. 예정의 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 대한 지향성을 삭감시킬 수가 있다. 3) 기독교의 행복과 종교의 위로를 파괴할 것이다. 이미 예정되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행복과 위로를 찾을 수 없다. 4) 선한 일을 위한 열심을 파괴하여 버릴 것이다. 우리의 선행과 사랑을 줄어들게 한다. 왜냐하면 이미 멸망으로 예정된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의미는 물론 열매도 없기 때문이다. 5) 예정의 교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위선자요 백성을 속이는 분으로 나타낸다.

웨슬리에 의하면 칼빈주의자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준비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지을 것을 아시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아시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웨술리는 선행은총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유로이 응답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유의지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께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였다. 물론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웨슬리는 칼빈주의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강조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주도권에 대한 인간의 협력적 응답을 강조하여, 구원의 각 단계마다 인간과 신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
11. 맺음말

 
웨슬리의 은총 개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으로 출발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은총은 무조건적으로, 값없이, 선행적으로,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은총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웨슬리의 선행은총이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이 예비은총은 만인에게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보편적 은총의 성격을 지닌다.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서 중시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책임이다. 인간이 선행은총으로 회복된 형상들을 통해서 인간이 응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책임 사상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 된다. 웨슬리의 신학을 인본주의로 오해하는 것은 은총안에서의 응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응답인 책임은 언제나 은총안에서 이다. 인간의 자력에 의한 회개의 행위에 의하여 구원이 성취되지 않는다. 죄의 자각을 획득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자력적 행위는 아니다. 선행은총은 모든 외적인 경건, 회개와 선행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잠정적이고 상대적이다. 그렇게 때문에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예비은총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보다 큰 은총이 요구된다. 이 은총은 영구적이며 절대적이며 지속적이다. 성령의 은총이 그것이다. 이미 부여된 선행은총 위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믿음과 성화를 촉진시킨다. 이로서 선행은총은 구원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보다 계속적인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 속에 종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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