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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의 인간론 이해

웨슬리의 인간론 이해   http://cafe.naver.com/modernth/599   
 
I. 들어가는 말
독일의 세계적인 신학자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우리들은 인간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오늘날 시급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인간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과연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인간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인간이 언제나 추구해온 물음이지만 아직도 계속해서 묻고 있는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 창조된 인간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많은 학자들은 인간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생물학적 인간학, 타인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려는 문화적 또는 인류학적 인간학, 신과 비교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려는 신학적 또는 종교학적 인간학 등 다양한 인간학이 우리 시대에 연구되고 있으나 모든 인간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아직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의 생명공학 기술은 인간 게놈(genome) 지도를 완성하여 인간을 보다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생각되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이해의 시도 역시 인간 이해를 위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인간에 대하여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정보는 초기 원시인들이 고대의 동굴 벽에 그려 놓은 자신들의 그림과 동물들의 그림들뿐이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언제 어떻게 기원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확증적인 결론을 맺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의 기원과 연대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이론들은 매우 사색적이고 억측에 가까운 것들로서, 고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 몇 개를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고 있거나 유전학적 연구 결과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데 제한되어 있다. 인간 이해의 이성적 제한은 신학적 인간학에 귀를 기울이게 하였고 또한 신학적 인간학에 의존하게 하였다.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기원과 본성, 운명, 존재의의, 가치, 사명, 죄와 악 그리고 죽음 등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이해한다. 웨슬리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이해를 성서적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웨슬리 당시 이성은 진리의 기준과 심판이었다. 이성에 기초한 합리주의가 시대정신이 되었고, 그 결과 기독교에도 이신론(Deism)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인간론의 대원칙은 자연질서가 아닌 영적질서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이해를 기본구조로 하여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하여 다시 그 형상이 회복되는 구원론적 인간론을 전개한다. 웨슬리는 인간을 구원의 대상(사랑의 대상)으로 보면서, 인간이해의 핵심을 '하나님의 형상'에 두고 있다. 이런 웨슬리의 인간 이해는 그의 복음사역의 동기와 목적을 제공한다.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웨슬리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오늘의 신앙적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진단하게 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르게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론에 대한 연구는 현대를 사는 감리교인의 인간관의 본질을 조명해 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본고에서는 웨슬리가 이해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을 통하여 조명해보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려 할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을까?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 ren Kierkegaard)는 "사람이 사람됨은 그가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신학적 인간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심미적 존재, 윤리적 존재, 종교적 존재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종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Adoption)에서 자연적 인간의 상태와 율법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 그리고 은총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자연적 상태(Natural State)에 속한 인간은 죄의 종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에서 잠자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다. 이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암흑상태에 있는 인간이다. 이 상태의 인간들은 죄에 대한 싸움도 없으며 또한 그로 인한 승리도 없다. 이들은 거짓 평화를 누리며, 고의로 죄를 범한다. 웨슬리는 자연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신이 함정에 빠져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쾌락을 탐한다. 그는 날마다 죄를 짓기에 언제나 죄의 종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의 근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적 상태(Legal State)의 인간은 죽음의 잠으로부터 깨어난 상태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이들은 죄와 싸우기는 하나 죄를 극복 또는 정복하지는 못한다.

복음적 상태(Evangelical State)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간의 상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찬 빛을 보고, 평화와 자유를 즐기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죄와 싸워 이긴다. 그러나 복음적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어떤 때는 율법적 상태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전 단계인 자연적 상태의 특징을 경험한다. 따라서 복음적 상태의 인간은 선천적 상태(자연적 상태), 율법적 상태로 전락하여 다시 한번 이전의 회개를 필요하게 될 위험성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상태로 갈 위험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다.

 
1.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형상

전술한 바와 같이 웨슬리의 인간론의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의 출발은 웨슬리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창 1:27). 웨슬리는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영원성의 형상' 즉 부패하지 않는 영광의 하나님의 모습대로 지으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웨슬리 인간관의 핵심이라고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아우틀러(Albert Outler)는 주장하였다.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의미한다. 인간 창조에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가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27)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형상을 갖고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 할 사항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대로 복제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며 또는 하나님이 될 수도 없다.

 
2.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웨슬리 연구의 대가인 데오도레 런연(Theodore Runyon)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을 통한 새로운 창조가 바로 기독교의 핵심임을 웨슬리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데오도레 런연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타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지니는 어떤 재능이나 능력, 즉 이성이나 양심 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웨슬리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와는 달리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재능이라고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살아있는 관계성이라고 보았다. 런연은 웨슬리가 의미하고 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관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런연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긴 하지만 그 자체에 의해서 영위되는 독립된 인자(因子)가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아야 할 어떤 인자로 본다.

웨슬리는 창조된 인간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 형상으로 설명한다. 첫째 형상은 자연적 형상(the natural image of God)으로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서 불사(不死)의 존재이며, 이해력과 의지의 자유 그리고 사랑의 감정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로서 고통을 경험하는 일이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런연은 하나님의 형상의 제1의 특성이 자연적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자연적 형상이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의식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이신 것과 같이 자연적 형상은 영으로서의 형상을 말한다. 이 형상의 기본적인 자질로서 '이해'(understanding 혹은 이성) '의지'(will, 혹은 결단), '자유'(freedom, 혹은 해방)를 들 수가 있다. 이러한 자질과 기능들은 사물의 본질과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웨슬리는 아담이 자연적 형상의 첫째 기능인 '이해력'(understanding)에 있어서 완전하였다고 보았다. 만물을 분명하게, 신속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담의 완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의 이해력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이해력은 한계가 있어서 한편으로는 무지하여 실수하거나 유혹 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연적 형상의 둘째 기능은 아담이 가지고 있는 '의지(will)'인데 이 기능은 다양한 감정을 유발하는 기능으로서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등을 유발한다. 모든 인간은 이 의지를 통하여 감성의 활동을 한다. 이 중에서도 사랑의 감성은 모든 감성 중에 으뜸가는 감성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랑이듯이 태초의 인간은 사랑이 충만한 인간이었다.

자연적 형상의 셋째 기능은 '자유'(freedom)이다. 이 자유는 외적인 압력이 없이 스스로 선택하고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지는 감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자유는 선택과 결단의 기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자연적 형상의 둘째 기능과 셋째 기능인 의지와 자유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선택과 결단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은 바람직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가 있는 인간이야말로 사랑의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는 인간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유가 배제된 행위에 대하여 인간은 책임을 질 수 필요가 없 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단지 대리인에 불과하다. 후에 논의되겠지만 이 자유의지는 칸트(I. Kant)가 의도한 바와 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자연적인 것으로 신의 선물이며 타락한 피조물을 책임적인 존재로 설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런 자연적 형상들은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반영해야 하는 소명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것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이것들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

둘째 형상은 정치적 형상(the political image of God)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제2의 형상이다. 이 형상은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관리하는 능력(창 1:28), 즉 인간이하의 피조물들 - 즉 바다의 고기와 땅위에 있는 것들 - 을 다스리고, 인간들 사이의 교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수행하는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다른 피조물(동물)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 이해력과 감정과 의지- 을 공유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형상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자질이라고 하였다. 정치적 형상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치리자라는 것을 증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의 치리자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정치적 형상이 주는 중요한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피조물에게 중개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치적 형상의 기능이 바르게 행사될 때 짐승은 인간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짐승은 인간에게 순종함으로써 만물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런 본래의 정치적 형상은 오늘의 생태신학과 생명신학의 현장에서 서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신학적 틀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제3의 형상이다. 도덕적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의롭고 거룩한 존재임을 말하는 형상이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과 같이 인간의 시조 아담에게도 사랑의 기질이 침투되어 아담의 사고와 행위의 지배적인 원칙이 사랑이었으며 죄에 대하여 무구(無垢)하였음을 말하는 형상이다. 따라서 도덕적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사랑, 자비, 정의, 진리, 그리고 성결의 품성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형상으로서 아주 민감하여 손상 받기 쉬운 형상이다. 이 도덕적 형상이야말로 인간을 타 피조물로부터 결정적으로 구별하는 형상이다. 인간은 이 도덕적 형상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 형상은 인간의 거룩성을 의미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의 기능이 왜곡될 때 이들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지 않지만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상실된다. 따라서 도덕적 형상은 죄에 대하여 매우 민감한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형상은 인간성 안에 있는 재능도 아니고 창조주를 떠나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능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조물들이 창조주로부터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고, 그 받은 것을 중개해야 하는 관계성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형상은 영적 호흡에 해당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정의, 자비,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계속적으로 행사하고 더욱 교통해야 하는 형상이다.

웨슬리는 이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서 도덕적 형상을 인간의 본래적 형상으로 보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도덕적 형상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유성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우주 속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특수성에 해당된다. 타 피조물들은 이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도 이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의 유무에 달려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등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차이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인간의 완전이라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동물의 완전이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의 특징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상태는 어떠하였을까?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이 그가 만든 세상에서 보시기를 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인간 즉 본래적인 인간이었다.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은 사랑의 객체로서 우리 인간을 그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요일 4:16).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이성 등의 기능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바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의 첫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이성, 감정, 의지가 아니라 인간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다.

본래적 인간의 두번째 해당하는 특징은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창조시 인간은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조시 인간의 본성은 거룩하고 성결했다. 따라서 창조 당시의 인간은 거룩한 인간이었다. 창조된 원 상태로서의 인간 즉, 타락이전의 인간은 의롭고 성결하였으며, 사랑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본래적 인간은 최초의 아담으로서 무죄한 인간이었다. 즉 최초의 아담은 원죄와 함께 태어나는 모든 인류와는 달리, 원죄 없이 창조되었다.

세번째 특징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원죄 없이 태어난 본래적 인간은 신보다는 못하지만 모든 피조물중의 으뜸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가운데서 무죄한 인간으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책임과 권리가 있었다. 웨슬리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타락 이전의 인간의 원 상태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분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으로서 원의를 즐기며 피조물을 돌볼 책임과 권리를 갖고 있는 피조물 중 최고의 존재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하나님의 창조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는 물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 나눌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타 피조물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4. 인간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웨슬리는 인간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런 목적을 위해 영광스럽고, 신비스럽게 창조된 피조물이다. 웨슬리는 "어떤 목적 때문에 생명이 사람의 자녀들에게 수여되었는가? 왜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졌는가?"라는 물음에 "그것은 한 가지 목적, 즉 '영원을 준비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오로지 이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고 그리고 이 목적 때문에 "생명이 주어졌고 계속 되는 것"이라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이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창조 목적은 영생을 준비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위대한 창조주를 알고, 사랑하며 그를 섬겨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긴 자연세계와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종교개혁자이며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도 웨슬리와 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배우며, 우리를 강권하는 어떠한 궁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온갖 선한 일들을 찾으며,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만이 모든 선한 것의 창조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면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경외한다고 보았다.

 
5. 인간의 구조

웨슬리는 인간은 몸(Body), 혼(Soul), 영(Spirit)의 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삼분설(Trichotomy) 보다는 육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이분설(Dichotomy)을 주장한다. 웨슬리는 인간 육체의 구성성분은 만물의 4성분인 흙, 물, 불, 바람으로 되어 있으며, 혼(Soul)은 생각, 판단, 상상, 기억 등의 오감의 능력을 갖는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만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 보고 인간은 인간의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웨슬리는 인간을 구성하는 영혼의 정체를 '하나님의 형상'에서 찾는다.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영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혼은 육(Body)과는 다른 존재로서 육체의 사멸 후에도 계속 존속된다. 육과 혼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부활 후에도 몸과 혼으로 구성된 존재로(영적인 몸) 있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지 않지만 구별되는 것으로 보면서 이 영혼이 불멸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현재 육체와 영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부활할 그 때에도 다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라는 점을 웨슬리는 수용한다.

웨슬리는 육과 혼 이외에도 '영'의 요소를 추가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본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혼(Psyche), 육(Soma), 영(Pneuma) 중에서 영은 기독교인에게서만이 발견되는 하나님의 은사이고 이것은 초자연적 요소인 성령이라고 했다. 웨슬리도 바울과 같이 혼과 육을 인간의 자연적 구성 분자로 보고, 영은 기독교인에게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라고 하였다.

 
6. 인간의 의지와 자유

웨슬리는 인간 영혼의 여러 속성들- 생각, 판단, 상상, 기억 등- 외에 '의지와 자유'를 또 하나의 심적 요소로 보아 이것으로 행동의 결단과 선악간의 선택을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will)는 인간의 육체적 요소와 연관된 감정에 속하고, 인간의 자유(freedom)는 인간의 자기 결단의 능력에 속한다. 자유는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독립된 속성으로서 영혼의 모든 심리작용과 신체의 동작을 관장하는 능력이다. 자유가 결단의 능력이라면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는 행동을 결단하며 선과 악을 선택한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이나 악을 택한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불변하게 창조된 것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는 있으나 타락하기 쉬운 존재다.

웨슬리는 본래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이 완전한 인격적 피조물에게 완전한 법을 주시어,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완전한 복종을 하도록 요구하였다. 사랑의 법에 복종하면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된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은 인간의 자유 남용에 의해 즉,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바르게 행사하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한 인간이 악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의 자유의 오용으로 비롯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관점을 인간의 타락과 죄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III.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타락한 인간

1. 인간의 타락

 
타락 이전의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었다. "인간에게는 창조주를 반사하고 반영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중개하는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최고의 역할이 주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보다 현실적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처음 인간은 사랑이 충만하였으며, 그 사랑은 인간의 본성, 사고, 언어, 그리고 행동의 유일한 행동의 원리가 되었다. 사랑과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거룩하고 무죄한 인간이었다. 따라서 창조시의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유, 이성 등의 기능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나누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시험에 견딜 수는 있을지라도 불변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었다. 창조시의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타락하게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나누지 못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했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결정으로 창조주의 뜻 대신에 인간 자신의 뜻을 택하였다는 것은 곧 악을 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택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자신에게 수여된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취해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였으며, 이 관계를 깨어지게 한 인간의 불순종은 인간의 원죄가 되었다. 따라서 웨슬리는 죄의 기원을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으로 보며 그것을 인간의 원죄로 보았다. 웨슬리는 죄의 도입에 관하여 마귀에게 그 원인을 돌린다. 웨슬리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었고 이 사탄은 뱀의 몸 안에 자신을 감추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의 행복을 질투하여 인간을 유혹했다고 본다. 만약 인간의 범죄가 사탄의 유혹에 위한 것이라면 인간의 범죄에 사탄이 책임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웨슬리는 비록 뱀이 유혹했을지라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는 유혹은 단지 유혹(temptation)일 뿐이며, 하나님은 아담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선택은 인간의 책임적인 결단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죄는 인간 본성의 창조적인 독립적인 행동이며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이다. 따라서 죄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원죄와 유전

아담은 전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전 인류의 운명은 아담에게 의존되어 있다. 모든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한 최초의 범죄는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지은 죄였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과 그 죄책은 전 인류에게 전가되었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원죄이다. 웨슬리는 이 원죄를 계속번지는 고집스러운 악이라 했다. 원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는 인간의 오만스러운 죄악이며 인간의 활동을 통해 죄를 창조하는 죄이다. 웨슬리는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욕망이라고 말한다. 독립과 자기충족은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여 하나님보다는 피조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취하려는 고집으로 귀착된다(롬1:25). 인류의 대표자 아담이 계약한 하나님과의 약속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순종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과의 약속에 실패하게되자 전 인류는 아담과 함께 타락하게 되었으며,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그들 스스로 어떤 죄를 범하기 전에 이미 원죄성을 지니게 되었다.

원죄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을 위해 웨슬리는 존 테일러(Dr John Taylor of Norwich)가 1750년 런던에서 출판한 "원죄의 성서적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Original Sin)에 대한 답으로서 약 272쪽이나 되는 분량의 "원죄의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란 책을 쓴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테일러(Taylor)는 죄를 개인의 행위로부터 보려한다. 개인의 행위는 반복을 통해 습관이 되고, 이 개인의 행위는 인간의 성향과 기질에 영향을 끼쳐 사람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한다. 테일러는 인간의 죄는 환경의 영향으로 조성된 나쁜 습관의 결과라고 보았다. 나쁜 습관은 나쁜 교육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는 죄는 인간 본성이 물려받거나 타고난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테일러는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는 악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며, 중립에서 선과 악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어느 한 쪽의 계속적인 습관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그는 이성과 의지의 힘이 어떤 모델이나 도덕적인 덕을 따른다면 죄로 향한 인간의 경향성은 극복되고 따라서 악의 세력은 점점 제거될 것으로 보았다. 테일러는 원죄는 인간의 책임성을 회피하게 하는데 인간의 책임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이 원죄의 교리는 사라져야 할 교리로 보았다. 그러나 웨슬리는 테일러와 같이 인간의 자유성과 책임성을 강조하지만 테일러와 같이 원죄의 교리를 사라져야 할 교리로 보지 않고 오히려 중시하였다. 웨슬리의 논리는 선한 행위가 행해지기 전에 인간 그 자체가 선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인간은 악한 행위만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 안에 원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원죄사상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견해, 즉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사상과 거의 동일하다. 웨슬리는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그 성품과 영혼이 완전히 부패하였으며,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악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범죄로 본래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인 원의에서 떠나 본질상 악한 성향을 갖게된 것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갈 희망도 없다.

타락한 인간의 인간성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수여한 그 분과의 관계 복원이 없이는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다. 다시 인간들이 인간 창조의 원초적인 목적에 합치하려는 협력작용(synergy)이 존재할 때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성 그 자체로는 이 협력작용을 주도해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도권은 인간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기 때문이다.

원죄에 대해서 웨슬리와 칼빈은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죄는 하나님이 미리 예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유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웨슬리와는 달리 칼빈은 원죄는 하나님이 미리 계획적으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도 칼빈과 같이 인간의 전적타락(Toatal depravity)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Augustine) 견해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순수한 자연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이 아니고 은혜의 도움 아래 있다고 보았다. 은혜의 도움이 아담을 그와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였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항상 죄를 범할 위험에 처해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다. 이에 반하여 웨슬리와 종교개혁자의 견해는 타락 이전의 아담은 초자연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선의 상태 즉, 아담의 완전한 상태(Adamic perfection)를 주장한다. 타락 이전의 아담은 죄가 없는 전적으로 무흠한 존재, 이해력과 사랑 그리고 의에 있어서 완전한 존재, 타 피조물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던 낙원에 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한 존재였다.

원죄론은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중심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웨슬리는 구원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의 범죄사실을 중요시하며 인간의 죄의 진상과 범람하는 죄와 그 기원을 원죄로 설명한다. 웨슬리는 자신의 원죄를 아는 것은 은혜를 받은 이들에게만 알려진 진리라고 보면서, "이방인들은 전혀 자기의 원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웨슬리는 자기의 원죄를 아느냐의 유무가 이방인과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근거가 된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될 때에 구원이 시작된다고 보고, 그는 그의 설교 "원죄"(Original Sin)에서 '원죄'를 부정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교도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원죄설은 기독교 교리의 중심교리이며 이것을 신앙하는 여부로 기독교와 이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웨슬리는 복음 선교를 할 때에 항상 청중이 죄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여기에 기초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였다.

아담은 인류의 원형 또는 대표이므로 모든 인류의 상태는 아담에게 달려있다. 그의 의지적 범죄로 모두가 타락하였고 고통, 슬픔, 온갖 불행을 상속하였으며, 또 죄성을 얻어 세상을 더럽히는 모든 죄와 악덕을 낳았다.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 어린이가 아직 범죄하지 않았어도 아담안에서 함께 죽음을 당한다. 이 죽음에는 영혼의 영원한 죽음도 포함된다. 이 퍼져나가는 원죄의 저주는 아담을 넘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조직 및 피조물을 함께 타락시켜 고통을 겪게 한다. 모든 피조물에 번지는 악은 타락의 직접적 결과이고 증거이다.

우리가 원죄를 가지고 있다면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었을까? 웨슬리는 아담이 전 인류를 대표하는 시조로서 그의 후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표로서 행동하였는데 아담 한 사람의 타락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며 그 죽음은 온 인류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웨슬리는 실제로 원죄가 어떻게 유전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원죄의 유전을 설명할 학설이 없다고 하여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서와 체험에 의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하여 알고있지 않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원죄는 어떻게 유전되었을까? 하는 질문은 무익한 호기심의 충족을 일삼는 것으로서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일반적으로 원죄는 성적인 결합에 의하여 유전된다고 보았다. 원죄는 인간성을 통하여 육체적으로 출생할 때에 부모로부터 아이에게 옮겨진다. 아이의 순수한 영혼이 수태시에 여자의 태 속에서 인간적으로 생겨난 육체와 결합되면, 아이의 영혼은 그러한 결합으로 더렵혀지게 되며 타락한 인간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부모는 그들 자신의 본성을 아이에게 전달해 주면서 자식을 낳는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죄의 값은 사망(롬6:23)인데 영아가 죽는다는 사실은 영아의 원죄를 입증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원죄의 사슬 아래 있다고 보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담의 죄의 댓가인 사망이 영아들에게까지 선고될 수 없을 것이다."

 
3. 원죄와 특수한 죄

웨슬리는 죄를 원죄와 특수한 죄로 구분하는데 양자간의 관계는 유기적이고 밀접하다. 원죄는 인간본성의 내적 타락으로 열매맺게 하는 악의 뿌리이며 특수한 죄는 원죄에서 나온 악한 싹이다. 웨슬리는 특수한 죄 즉, 자범죄(voluntary transgression)를 둘로 나눠 내적인 죄(inward sin)와 외적인 죄(outward sin)로 본다. 내적인 죄는 유혹을 받을 때 물리치지 못하고 싹트기 시작하는 죄이며 외적인 죄는 죄의 싹이 성장하여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를 말한다. 자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로서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이다. 인간을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원죄가 아니라 자범죄 때문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죄와 비고의적인 죄로 웨슬리는 무지, 오류, 이해력의 결여, 상상력과 기억력의 빈곤, 실언, 실수 등이 있는데, 이들을 실제로 죄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지만 이러한 죄들도 모두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모든 잘못된 것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웨슬리는 자범죄 가운데 소극적인 내적인 죄가 있는데 그것은 무관심의 죄와 태만죄라 하였다. 이는 인간의 하나님과 멀어짐과 형제의 죄를 책하지 않음과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 하는 것 등이다. 무관심의 죄와 태만죄를 방치하면 결국에는 신앙과 사랑이 사라져 범죄하게 된다. 또 다른 내적인 죄는 자랑, 성냄, 하나님 이외의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피조물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 등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내적 죄는 성장하여 결국 영혼을 어둡게 만들어 외적인 죄로 노출된다. 곧 특수한 죄는 인간 본성에 잠재한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죄 즉 죄성은 모든 다른 죄의 씨앗이며 인간 마음과 생활에 나타나는 모든 특수한 죄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생한 신자는 이 죄성을 발견하고 이 죄성의 퇴치를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요청하여 사랑으로 충만하여 성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자기자신과 자신의 성취를 무한히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원죄의 실제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웨슬리에 있어서, 죄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 형상으로 피조된 다른 인간에 대하여 사랑의 원리를 침해할 때 죄이다.

원죄의 해결로서 웨슬리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의 교리를 강조하였다. 선행은총이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된 죄보다 우선하거나 앞서며, 아담의 후손을 사면해 주신다. 이러한 선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다.

마틴 슈미트(Martin Schmidt)는 기독교와 이교의 차이점은 죄의 보편성에 대한 교리에 있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격 안에서 죄된 본성, 기질,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떠나있다. 인간의 원죄성은 죄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죄의 보편성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복음의 출발점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임을 전제한다.

 
4. 인간의 타락의 결과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나타난 타락의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나타났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지음 받을 때 지녔던 자연적 형상은 비록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을지라도 부패되었고, 정치적 형상도 그 재능은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 통치가 부패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결과는 아담이 지니고 있었던 도덕적 형상은 완전히 소멸되고 대신에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날 그 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이 박탈당하자 곧 불행하게 됨과 동시에 악마의 형상인 교만과 아집에 빠지게 되었고, 멸망할 짐승의 형상인 관능적인 욕망과 정욕에 빠지게 되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도덕적 형상과 자연적, 정치적 형상이 비뚤어져 버렸다. 이로 인해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는 모든 인류의 자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하였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이성과 의지의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은 자기사랑으로 바뀌었다. 또한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와 성결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로 태어난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악마의 형상과 짐승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을 상실했다. 만일 인간이 타락시에 하나님의 전체 형상을 완전히 훼손했거나 상실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를 수 있는 또는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접촉점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전적인 부패를 가져다주어 온 인류가 타락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타락이후 인간의 완전성은 변하였고 그 본성도 완전 부패한 것으로 본다. 물론 타락이전의 아담은 공의(original righteousness)하였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공의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연결되고 이로서 인간은 육체적, 영적 죽음을 보게 되었다

셋째로 타락의 결과는 죄책과 악에로의 경향을 지녀 행복을 상실하고 고통과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죄는 인간들 사이의 교제(Communion)를 침해하며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웨슬리는 하나님과의 접촉점을 상실한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계속해서 죽음을 재촉하여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서두른다고 하였다. 죄의 저주로서 사망이 왔다. 사망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형벌이다. 물론 웨슬리는 육적인 죽음만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죽음 -하나님의 생명과 형상을 잃어버림- 까지 말했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죽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고통을 가져와 인간의 행복을 거두어 가버렸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할 때만이 행복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정신생활과 인간의 육체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도덕적인 죄와 무서운 오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체적 약함과 결함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체는 영혼을 압박하여 영혼의 활동을 방해하고 인간의 지력은 오류와 무지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이 창조시 창조한 세계는 결함과 오점, 부패, 파괴, 죽음, 죄, 고통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시도 속에서 자신과 모든 피조물을 죽음 속에 쓸어 넣었다. 하나님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왜 고통이 존재하느냐? 그것은 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 죽음과 여러 고통이 오게 되었다.

넷째로 아담의 타락의 결과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흐트러지게 하였다. 인간에게는 정치적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다. 하나님의 정치적 형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 이하의 피조물과의 교제의 매개자가 되게 하였다. 인간 이하의 피조물은 운동의 방향을 조장할 수 있는 원리와 어느 정도의 이해력과 그리고 행복과 불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간이하의 피조물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땅은 저주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파괴되고, 동물과의 신뢰관계가 파괴되는 등 모든 피조물은 죽음과 고통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 많은 피조물들이 인간에게서 달아나고 있으며, 인간의 증오스런 현존을 피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피조물들은 인간에게 공공연히 반항하며 그들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과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다.

인간의 타락의 결과에서 보듯이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 타락한 아담에 의해 죄성을 지닌 자연인은 영적 수면 상태에 있다. 그는 하나님이나 그의 법도, 영적 선물, 영적 사건을 전혀 모르며 항상 위기 가운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하며 범죄하면서도 자책감이 없는 죄의 종이다. 웨슬리는 자연인을 우상숭배자로 규정한다. 그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섬기고,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 이전에 완전한 자유를 지녔으나, 타락이후 자연인은 원하는 대로 악을 선택할 자유는 있어도 선을 택할 자유는 잃었고, 하나님 대신 마귀의 속성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이런 자연인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고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며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위해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은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악을 어떤 것인지 알고 선택했을까? 웨슬리는 아담은 악을 선으로 착각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담은 절대 무오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악을 선으로 착각한 것은 그 이전에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전제가 따라 온다. 이 전제는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시조 아담을 그처럼 타락으로 이끈 정체는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하여 묻게 한다. 과연 아담의 타락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웨슬리는 악에서 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웨슬리는 타락한 천사 루시퍼(Lucifer)를 악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새벽별 루시퍼는 자유를 행사하여 최초에 죄를 범하여 이 세상에 악을 끌어들인 존재이다. 루시퍼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오만과 자기 뜻대로 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죄에 떨어져 그 자신뿐만 아니라 천사의 1/3을 길동무로 삼았다. 그 결과 영광된 행복을 상실하고 하늘에서 추방당했다. 추방당한 루시퍼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질투하여 인간의 행복을 빼앗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뱀의 모습으로 숨겼다(창 3장).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되었다는 점에서 지옥의 형벌의 본질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으므로 악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전파의 법칙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지마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책임은 사람에게 있다. 악마는 그의 자유와 책임으로 타락했다. 웨슬리는 이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하고있지 않다.

우리는 위의 문제에 이어서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아담의 타락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물어 볼 수 있다. 웨슬리의 대답으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부패와 고뇌를 체험한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편이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던 경우보다는 인간에게는 더 큰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이 없다면,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신앙, 이웃 사랑도 없을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으로 고난과 죽음이 와서 그 덕분에 우리는 인내의 신앙을 기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셋째로 인간의 고난은 이웃을 향한 봉사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사랑의 성장을 가능케 하고 하늘의 상급을 더 풍성케 했을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이해는 타락한 인간 이해에서 뚜렷해진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죄의 기원과 인간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으며, 죄에 대한 책임도 역시 인간에게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순종은 인간의 자유를 남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타락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다. 웨슬리는 펠라기우스(Pelagius)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인간이 구원을 못 받았으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

 
5.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의 선행 은총

만약 우리가 계속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계약(covenant)을 맺어야 한다. 웨슬리는 이것을 '은총의 계약'(the covenant of grace)이라고 부른다. 이 은총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a gift of God)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사명을 실현하도록 초대하는 하나님의 초청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총으로 인해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웨슬리는 그것을 '선행은총'이라고 부른다. "구원은 이른바 일반적으로 일컫는 선행은총과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은 타락한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아니하고, 선행적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율법 아래로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의 타락을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은총으로써 인간의 타락을 인지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회개로 이끄신다. 웨슬리는 율법의 첫째 목적은 죄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지만 율법으로 죄인들을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인간은 전적으로 원죄 아래에 있어서, 나면서부터 선이 부패되어 있어 많은 악덕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대속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의 회심 전까지는 18세기의 합리주의 영향력 아래에서 낙천적인 인간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인간관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타락으로 인한 영원한 죽음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희망 또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서만이 가능하다. 계속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지는 원죄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것을 웨슬리는 "선행은총"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타락으로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을 모두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의 원죄를 용서받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을 해결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의 형상도 부분적으로 회복되고, 선택의 자유의지도 부분적이나마 회복된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아래 있는 존재임을 말한다.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받고 있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도 선행은총에 의하여 원죄의 죄책이 제거된다고 믿었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는 선행 은총의 개념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선행 은총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에도 모든 인류에게 역사하고 있었다고 본다. 인간이 먼저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먼저 모두에게 값없이 은혜를 주심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예비적으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인간이 은혜가 없어서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모든 인간에게 미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셨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웨슬리는 아담이 선이나 악을 선택할 자유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선행은총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의 인간관은 인간을 추상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간론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인간론은 단순한 인간론이 아니라 신학적 인간론이다. 웨슬리가 이해하는 인간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으나 원죄의 죄책에서 해결되어 있으며, 자유의지가 부분적이나마 회복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함께 협동할 수 있으므로 자기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은 그 하나님의 은총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를 신인협동설(Synegism)이라 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주장하는 신인협동설은 인간이 절반, 하나님이 절반 나누어 맡는 식의 협동이 아니라, "인간 의지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 수동적으로 협동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아무런 이의 없이 협동하는 것"을 말한다.

웨슬리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의 관계에 있어서 이중택일의 원리를 적용하지 아니하고 양자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의 주도권을 인간의 책임에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둠으로써 인간은 그의 의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든다. 웨슬리는 오늘날 인간과 하나님의 양극단의 모습을 지양하고 복음적 신인협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신 앞에서 성실히 순응하는 삶을 살게하는 신학을 제공해주고 있다.

웨슬리는 은혜만을 강조하는 신학과 인간의 의를 강조하는 신학의 양극단 신학의 갈등에 빠지지 아니하였다. 그는 인간의 죄의 심각성에 빠져 비관주의에 빠지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의한 인간의 낙관적 삶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은 시작되고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임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구원에 대한 가능성과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가능성과 희망은 인간의 책임을 요청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웨슬리는 만인구원설과 예정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인간의 책임을 요청하는 은총으로만의 구원의 교리를 확립하였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변증법적인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 양자를 창의적으로 종합하는 복음적 신학을 정립하는 공헌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선행은총과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에 대해서는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지만 웨슬리는 칼빈의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칼빈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는 구원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동기를 차단하고 그들의 자유의지 행사권을 무효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진술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우주적으로 주어지는 선행은총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인간이 자유의지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에 나오는 예정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도 하나님은 그의 예지(foreknoweledg of God)로 많은 사람들을 택하셨음을 알고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고레스 왕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선포를 위해 선택되었으며, 또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복을 누리도록 택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이 출생하기 전에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라고 하셨고, 그리스도를 "창세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13:8)이라고 하였으며, 아직 택정되지도 않은 신자를 "창세 때부터 택한 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갈3:26)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실제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의 말대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는"(벧전1:2) 때에만 실제로 택함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예지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예지론(Foreknowledge)은 다음과 같은 논법을 따른다.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에 걸쳐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결정을 하셨다. 이 결정을 기초로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하나님의 행동 계획을 세웠다. 그 행동 계획 중에 예정된 사람들을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는데 이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을 예지하셨다. 웨슬리의 예지론에 따르면 1)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범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2)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은 아니다. 3)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상과 형벌을 받게 된다. 4) 하나님은 영원에서 모든 일을 동시에 아신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후지(afterknowledge)도 없고 예지(foreknowledge)도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현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가지 일을 다른 한 가지 일 이전에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한 가지 일 이후에 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일하고 계시면서 인간의 자유를 파괴시키지 않고 감독하신다. 웨슬리의 예지론의 약점은 자유는 예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이 미리 안다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는데 있다.

웨슬리는 칼빈과는 달리 이방인과 유태인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롬9:30-33)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미 멸망 받기로 예정되어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IV.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새로운 인간

하나님은 자신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과 사랑의 교제를 끊고 인간을 고통과 죽음의 상태로 남겨두지 않고 선행 은총을 베푸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 즉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사건을 통하여 우리를 의인과 성화의 사람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능력을 통하여 자신의 형상대로 새로운 인류를 다시금 창조하고 계신다.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구원사역에 복종하게 될 때 우리가 아담을 통하여 상실한 본래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이 선행 은총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됨을 주장한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

이미 전술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선행은총으로부터 구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책과 형벌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원죄를 용서받고, 그 원죄의 죄책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제거된다. 웨슬리는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선행은총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시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요,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곧 선행은총에 의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를 믿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비록 부분적으로 그 형상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여전히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회복하여 구원받는 새로운 인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지상에서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2.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은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웨슬리의 인간관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인간은 바로 이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형적(prototypical)인간,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볼리비아 감리교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소명(vocation), 사명, 운명을 완전히 깨닫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며 인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인간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닮고 변화를 받아 그에게 헌신한다면 그들은 진실된 인간이 될 것이다.

위의 선언서는 하나님을 닮고 변화를 받아 그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인간을 진실된 인간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인간관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의 웨슬리 전문 연구 신학자인 노로요시오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에 기초를 두고 일생 동안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웨슬리의 인간 이해에는 시시각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응답의 관계 속에서 사는 인간으로 파악되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웨슬리 신학에서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의 삶의 모양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가의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마다 사랑에 의해 지배해 나가는 실존적 결단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6년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세계 감리교회 대회에서는 "감리교인들은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 [우리는] 완전을 위한 성결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미치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같은 선언서에서 "감리교인들로서 … 성화의 문제는 단순히 숨겨지거나 묻혀져 있는 보물처럼 우리가 간직하려고 하는 우리의 유산의 일부일 수는 없으며, 우리가 매일 매일 먹는 … 삶을 위한 식량"이라고 하였다.

상기한 선언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웨슬리의 후예들의 인간관은 성결의 추구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감리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 훈련의 생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생활 즉, 성결로 나타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의 생활을 요구한다.

"웨슬리는 첫 창조의 인간을 완벽한 도덕적 순결의 대표자로 이해하였다. 도덕적 순결로서의 인간 이해는 웨슬리로 하여금 죄의 실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가능케 했다." 린드스트롬(H. Lindstrom)은 웨슬리의 죄관이 죄책관념에 집중되어 있으면서 언제나 죄를 선천적 타락으로 본다고 한다. 인간은 죄책에서 해방됨으로써 선천적 죄의 지배에서 벗어난다. 죄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에게 그 권세를 상실한다. 인간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성화될 수 있다.

웨슬리는 죄를 질병으로 보고 구원은 질병을 치유받는 것으로 본다. 웨슬리가 질병을 죄로 간주하는 경향은 질병이 서서히 치료되는 것과 같이 성화의 과정을 그 배경으로 한 죄의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다. 웨슬리는 원죄를 문둥병으로 다른 죄들은 원죄에서 기인하는 상처, 질병, 타락으로 묘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질병을 의식하기 전에 의원되시는 그리스도께 나올 수 없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본성의 타락에 대한 지식이 성화의 주관적 조건임과 동시에 구원과정의 첫단계이며 그 구원의 목적은 성화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 자신의 죄성과 죄책,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신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한 치유자요 의원이 되신다. 웨슬리가 죄를 질병으로 보며 구원은 그 질병을 치유하는 보는 것은 웨슬리가 인간을 성화의 길을 가는 존재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인간의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타락의 여러 양상들로 인해 사람들은 죄를 짓고 있다. 오늘날 아무리 죄를 질병이나 질환으로 이해하고 의학이나 정신의학적 처방으로 치료해 보려고 애쓰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치유책이 발견되기까지 죄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치유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치명적인 도덕적 병폐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이며, 지금까지도 유일한 치유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의 구원사역에 복종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본래 아담의 인격 속에 만들어 두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것이다.

 
3. 새로운 관계 속에 있는 희망의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면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다시 사랑의 관계로 회복된다. 웨슬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근거를 두고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함으로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그리스도인에게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가 다시 새로워 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복음이다. 우리는 웨슬리의 말에서 타락한 인간에게 완전한 절망을 느끼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상당부분을 다시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다시 획득하게 되든지 간에 우리는 이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 안에 이 보물을 아직도 갖고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을 등진 타락한 인간들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다고 여긴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웨슬리는 타락한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간의 철저한 타락은 믿지 않았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간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던 자연적이고 정치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 타락으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 회복의 사건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와 관계 -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속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관계 - 를 맺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생명과 행복을 다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사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그의 선행은총에 의하여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게 된다. 선재은총을 통하여 인간의 도덕적 형상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놓고 하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기를 요청하고 계시다. 이제 인간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데서 비로소 관계가 형성되어 진다. 이 관계는 곧 신앙의 관계인데, 이 신앙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생명과 행복을 희망할 수 있게 된다.

이 관계 회복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끝나지 않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까지 확장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은 자기와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도 살게 창조되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이듯이 인간이 타인과 자연에 대한 관계도 역시 사랑의 관계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사랑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하나님은 물론 형제와 이웃 그리고 인간 이하의 피조물을 사랑으로 다스려야 한다.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 형제와 이웃 그리고 자연에 대한 사랑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시에 원하셨던 본래적인 참 인간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간다. 인간은 태초에 인류가 저지른 잘못을 다시금 열심히 반복하고 있다. 매일 매일의 뉴스 속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도저히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죄악을 범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따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키고 있다. 하지만 웨슬리의 인간론에 따르면 그들도 하나님께서 흙으로 창조하신 인간이기에 그들 역시 보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웨슬리의 인간론은 타락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살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하나님은 실패와 변절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실하고 의로운 남은 자를 두시고, 그 신실한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와 그의 의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바 된 새로운 재창조의 인간으로서 곧 이해와 의지의 자유와 여러 능력들을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로서 "의로움과 참된 성스러움"(엡4:24)의 상으로 원 창조의 모습인 사랑이 가득 찬 흠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이 땅에 도래할 수 있도록 그 본래적인 모습을 다시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V. 나오는 말

웨슬리는 본래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 인간, 무죄한 인간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여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사망은 물론 의지의 자유까지 상실하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선행은총으로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새로운 인간을 말하였다. 이런 웨슬리의 인간론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인간론이다. 그의 인간론과 죄론에는 실존주의적 경향이 농후하다. 은총에 대한 지금 여기서(here and now)의 응답의 강조는 실존주의적이다. 인간은 주체적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로 서있는 동시에 인간은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성화의 길을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훌륭한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죄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미천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으면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웨슬리가 가르쳐 준바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과 인간이 그 은총에 적극적인 응답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은총 안에서 비관주의가 아닌 낙관주의 인간론을 표방하고 있다. 웨슬리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희망을 가진 인간론을 목적하고 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또한 영으로 하나님과 만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영적이고 윤리적이고 현세적인 목표들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인간을 보시고 너무도 좋아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미소를 외면하고 악마와 짐승의 형상을 입고 삶을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미소를 돌려드려야 한다. 우리가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날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 미소를 지으시며 좋아하실 것이다. 오늘의 웨슬리안들은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웃기셔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참된 길을 가는 희망의 인간이 됨으로서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웃기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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