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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 활동

존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 활동  
http://cafe.naver.com/modernth/598   
 
1. 병자와 가난한 자 구호
2. 교육활동
3. 교도소 개혁 활동
4. 여성의 지위 향상과 지도력 배양
5. 노예제도 반대 투쟁
 

 
1. 병자와 가난한 자 구호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 관해 구호 차원을 넘어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제거하는 것을 기독교의 참된 사명으로 강조하고 실행한 영국의 첫 번째 인물이며, 이를 통해 영국의 사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역에 관해 믹스(M. Douglas Meeks)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웨슬리의 사역은 가난한 자들을 먹여주고 입혀주며 거처할 곳을 제공해 주는 일,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 가난한 병든 자들과 수감되어 있는 자들을 방문하는 일, 곤궁에 처한 자들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건강교육을 고안해 전달해 주는 일, 가난한 자들에게 책을 배포해 주는 일, 그리고 가난을 낳는 경제문제에 대한 구조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일들을 포함했다. 그러나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행위는 단순히 가난한 자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한 삶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는 실제로 그들의 침상으로부터 병에 전염되기까지 하는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그들과 삶을 공유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 삶의 형태를 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참으로 웨슬리는 에드워즈의 말처럼, “가난한 자들을 발견했고…가난한 자들의 가장 중요한 친구였다.” 그는 일생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그는 1743년에 “만일 내가 내 뒤에 10 파운드를 남겨 둔다면 당신과 모든 사람들이 내가 강도와 도둑으로 살았다고 내게 대해 증거하라”고 했다.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그의 결심임을 1776년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뒷바침 해준다: “나는 런던과 브리스톨에 은수저 둘씩을 소지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금은제 식기류 전부이다. 나는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빵을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밤에, “86년 넘게 나는 정확하게 나의 셈을 해왔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저축했고, 될 수 있는 대로 내 가진 모든 것을 주었다고 확신 되기에 만족스럽다”라는 말로 그의 회계장부를 마감함으로써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그는 마지막 길도 가난한 자들과 동행하길 원했던 그의 뜻에 따라 “6명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무덤으로 운구 되었는데, 그는 그 몫으로 그들에게 각 1 파운드씩을 남겨 두었다. 이처럼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는 정신으로 살았고 또 그렇게 죽었다.

웨슬리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애정과 관심은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서 연유된 것이겠지만, 그들과의 밀접한 접촉을 통해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함으로 더 심화되고 활력화 되었다 하겠다. 그가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한 구호를 새롭게 시작한 1740년 후반부와 1741년 초의 저널과 일기에는 이러한 접촉에 대한 언급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그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벌레가 끼고 난방이 안되며 의류와 음식이 제대로 없는 지하실과 다락방에 거주하고 있고, 병이 들었으나 도움의 손길은 물론 의약품도 없이 지내는 비참을 체감했다.

이러한 곤궁에 처해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메도디스트들은 매주 모금을 했다. 그것이 메도디스트들이 구호활동을 위해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추수작황이 나쁘거나 혹독한 추위 또는 다른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어려움이 야기된 경우에는 구제를 위해 특별모금이 행해졌고, 때로는 웨슬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 모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은 이러한 협의적 의미의 자선만으로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적극적인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한 어떤 제도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모금을 통한 긴급구제에 덧붙여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적극적인 두 방법이 시도되었는데 하나는 실업자 고용 프로젝트이고 다른 하나는 대여금고(lending- stock)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계획의 진의에 대해 브레디는 “특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진취적인 기상과 독립심 표출에 자극을 주고, 특권층들에게는 사회적인 책임성 분출에 자극을 주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적합하게 해석했다. 웨슬리의 1740년 11월 25일자 저널에 보면 그 실업자 고용 프로젝트의 시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실업자들을 고용하기 위한 몇 몇 방안이 제안된 후에 우리 형제 몇이 추천한 것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그들을 가난과 나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가장 가난한 자 12명을 교사 1명의 지도 하에 봄이 오기까지 4달간 신도회의 방에서 목화 손질과 방적 일을 할 수 있도록 고용하기로 했다. 그 계획은 이루어져 그들은 고용되었고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 생산을 했다.

이러한 영역에서의 노력은 남자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여자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확대 되었다. 웨슬리는 1741년 5월 7일의 저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현재 일거리가 없으나 고용을 희망하는 여인들을 뜨개질하는 일에 모두 고용할 것을 그들(연합 신도회 회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들에게 처음에는 그들이 일한 것에 상응하는 품삯을 지불할 것이고 후에는 그들 생활의 필요에 따라 더 주도록 할 것이다.

이 일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써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웨슬리가 이 일을 시도한 주된 가치는 그 규모나 물질적 성공의 측면보다는 수반된 문제들에 접근해 간 그의 인도주의적인 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이 일로 인하여 공개적인 모욕과 의심을 감수해야 했다.

‘대여기금’(Benevolent Loan Fund) 프로젝트는 더 흥미롭다. 이 프로그램은 3개월간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긴급지원 제도로, 웨슬리가 1746년 6월에 30파운드의 기금으로 시작했다. 대출 한도는 처음에는 20실링이었는데, 기금이 1767년에 120파운드로 증가되면서 대출액도 5 파운드로 인상되었다. 이 대여기금으로 래킹톤(James Lackington) 같은 사람은 서적상으로 성공하여 유명한 인물이 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웨슬리는 가난한 병자들에 대해서도 기금을 통한 후원을 넘어 더 근본적인 도움을 주고자 다방면으로 인도주의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병자들을 방문하고 보살핀 것은 물론, 1746년 12월에 ‘무료 진료소’(dispensary)를 열고 이듬 해 6월에는 원시 의학(Primitive Physic)을 출판했다. 이는 진료도 받지 못한 채 황폐화 되어가는 많은 가난한 병자들에게 더 전문적인 도움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결심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국 최초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무료 진료소’를 통해 메도디스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의학적인 혜택을 입었다. 웨슬리의 원시 의학에 대해서는 여러 해 동안 비난과 조소가 있었으나, 영국의 공중보건 감시인인 의사 뉴맨(George Newman)은 이 책이 영국인들의 가정 위생, 개인의 청결, 가정의 건강법과 일반 건강에 현격한 공헌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위어마우스에 의하면 런던의 한 신문도 그 책의 처방전을 높이 추천했다고 한다. 이 책은 웨슬리의 생존 시에 23판이나 출판될 정도로 폭 넓게 순환되었고, 1828년에 마지막으로 32판이 출판되었다. 웨슬리의 이러한 가난한 병자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애정은 그가 1747년에 스미스(John Smith)에게 보낸 그의 의학에 대한 관심과 유의를 정당화하는 다음과 같은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정규 의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이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나는 당신을 치료할 길을 알고 있지만 나는 의과대학 출신이 아니니 당신은 미드(Mead) 박사에게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인가? 미드 박사가 그의 마차를 타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어 관속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의사가 도달 했다해도 사례비는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가?… 그러므로 합당한 치료대신 환자는 죽고 하나님은 그의 피 값을 내 손에서 찾으실 것이다!

이러한 것들과 연관되어 1785년 9월에 “메도디스트 고유의 독창적이라 할” ‘나그네 우호 신도회’(Strangers’ Friend Society)가 메도디즘 내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가난하고 병들고 친지가 없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봉사 센터로, 이후에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설립되는 곳마다 함께 세워졌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은 이처럼 가난한 자와 병든 자에 대해 다방면의 구체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도움의 손길을 폈다. 그리하여 그린은 이 메도디스트 운동에 관해 “가난한 자들의 죄, 무지, 육신적인 고통, 그리고 사회적인 퇴화를 치유해 주려는 한결 같은 시도가 그 부흥운동의 고귀한 결실이었다”고 했다. 참으로 웨슬리와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이러한 그의 운동은 영국의 무시당해 온 대중들에게는 희망과 포부 그리고 자기존중과 통제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은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그가 빈곤의 원인을 분석함으로 가난한 자들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에 대한 장기적인 개선을 방해하는 주요인들 중의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가난을 신적인 형벌의 징표 혹은 게으름이라는 자기책임의 결과로 보는 잘못된 견해였다. 이 때문에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대가 팽배하여 문제해결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 가난의 진정한 원인은 신의 형벌이나 가난한 자들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극복해야 할 불행이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은 가난은 그들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강하게 부정한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방문했다. 나는 지하의 작은 방에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에서 추위와 굶주림, 게다가 허약과 고통으로 반쯤은 기아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방 둘레를 기어 다닐 수 있는 실직자는 발견치 못했다.

나는 가난하고 병든 많은 사람들을 방문했다. 간신히 걸을 수 있는 몇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악의적이고 악마적인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더 나아가 그는 1772년에 작성된 현재의 생필품 부족에 대한 사고들(Thoughts upon the Present Scarcity of Provisions)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대중 경제적 지식과 스스로 체험한 목격에 근거하여 일반적인 빈곤의 원인들을 밝혀내려 노력했다. 마르크바르트의 말처럼, 이것은 웨슬리의 “뜨거운 항의”였다. 웨슬리는 그 글에서 일자리 부족의 문제, 밀을 술제조에 소비함으로 생기는 곡물부족의 문제, 상당량의 곡물들이 부자들의 말사육에 소요됨으로 생기는 곡물 결핍의 문제, 농장에 대한 소수 자본가들의 독점 문제, 과도한 세금부과의 문제들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는 그 글을 결론적으로 요약하길, “식량이 부족하여 전국에서 수 천명이 죽어가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지만 특히 양조, 세금 및 사치가 주요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웨슬리의 노력, 곧 전통적인 견해를 수정하며 사회적인 불의를 근본부터 찾아 내려는 웨슬리의 문제제기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변화시켰고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비로소 해결 가능한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중대한 영향력을 이룩했다.

이처럼 메도디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관해 처음에는 기금을 통한 구호로 출발했으나, 점차 새로운 제도를 통해 그들의 상황을 호전시키고 타개해 나가려는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차원을 높였고, 후기에 들어서는 가난을 만들어 내는 불의한 구조를 개선하려는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2. 교육활동

복음화 사업, 사회구호활동과 더불어 웨슬리와 그의 운동에 걸출한 특징을 이루는 것은 교육적인 활동과 공헌이다. 웨슬리와 그의 운동이 당시 영국의 상황에 기여한 교육적인 공헌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영국의 대중들에게 보편적인 교육의 기회를 증진시킨 개척자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교육의 질을 높였다는 점이다.

웨슬리 운동의 교육적인 업적은 당시의 교육적인 이상과 실천을 비교해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18세기 영국의 상황을 보면 교육은 특수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대중, 특히 가난한 자들은 교육적인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하나의 어떤 조직적인 정책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당시 유럽에는 교육을 소수의 계층에만 제한시켜야 한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소수 지배계층의 영속적인 특권화에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베이컨(Francis Bacon)이 교육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제한시키자는 견해를 표명한 후 이것이 교육적인 상황을 지배했다. 1714년에 맨데빌(Bernard de Mandeville)은 그의 악명 높은 자선과 자선학교들에 대한 소론(Essay on Charity and Charity Schools)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자녀들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치는 관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재능들은 경건심을 저하시키고 게으름과 악행을 촉진시키며 범죄율을 증가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지식 정도는 그들 직업의 테두리 내에 제한되어야 하며 그들 직업에 관련된 것 이상을 능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763년에 이르러 좀더 개혁적인 성향의 넬슨(James Nelson)이 어린이들의 관리에 관한 소론(An Essay on the Government of Children)에서 하층민들에게 읽기 교육을 시키면 그들이 머물고 있는 암흑과 무지를 제거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제안을 하면서 그러한 생각이 교육 개혁자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가난한 자들은 쓰기와 산수의 기초를 배울 수도 있다는 사상은 바람직한 정책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 소위 개혁적인 교육가로 유명한 한웨이(James Hanway)는 1786년에 그 당시 편만해 있던 견해를 표명했는데, “읽기는 사람들의 도덕에 도움이 되지만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당시 영국에는 가난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선학교들이나 기타 사설 기관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운영체계나 교육의 질적 내용에 있어서는 크게 평가할만한 정도가 못되었다. 바디(Alfred A. Body)는 “노동 계층들에게는 18세기 말까지는 교육이라는 개념조차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자선학교는 그 목표조차 노골적으로 공리주의적이었을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와 그가 중심을 이룬 부흥운동은 영국의 대중 교육사에 새롭고 중대한 전기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즈는 말하길, “조지 왕조 시대에 영국에서 누구도 대중교육의 성장을 그처럼 촉진시킨 자는 없었다”고 평했다. 브레디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교육이 인격을 확립시키고 삶을 고귀하고 유용하게 그리고 협동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분급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이면, 그런 측면에서 웨슬리는 당시대의 비할 바 없는 가장 위대한 교육자요 전 시대를 망라해 가장 훌륭한 교육자의 한 사람이었다.

웨슬리와 그의 설교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반(semi)미개인적인 상태에 있고 무지와 부도덕에 깊이 빠져 있으며, 더러움과 비참함 속에 내던져져 있음을 발견해 그 시대의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에 훌륭하게 대처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메도디스트 운동의 교육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웨슬리의 교육적 관심은 그의 옥스포드 신성클럽 시절에 가난한 자들과 수감자 자녀들을 위해 세웠던 학교들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웨슬리의 대중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공헌은 그가 1739년 6월에 설립을 추진한 브리스톨 킹스우드(Kingswood)의 광부들을 위한 학교로부터 출발한다. 웨슬리는 이 학교에 연이어 브리스톨(1739년), 런던(1739년), 뉴캐슬(Newcastle)과 다른 지역에도 영세민과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물론 이 학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18 세기 영국에는 자선학교들이 산재해 있었고 종교적인 기숙사 학교들도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가 설립한 이 학교들은 그가 기울인 교육적 노력을 통해 교육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교육에 있어서의 계층적인 편견을 제거하는데 중대한 기여를 하게 되는 기틀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학교들과는 구별이 된다. “이 학교들은 18 세기 말의 영국국교와 비교해 메도디즘을 영국 대중교육의 가장 중대한 힘이 되게 한 많은 주간 학교들(day schools)의 선구자였다”는 말드윈의 평가가 이를 뒷바침해 준다.

이 학교들은 어린이들은 물론이고 성인 교육에도 기여를 했다. 웨슬리는 킹스우드 첫 번째 학교를 설립한(1739) 후 이 학교의 본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평상적인 시간에는 주로 가난한 자의 자녀들에게 주로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가르치도록 계획되어 있다.… 어린이들과 한자리에서 교육시키기에 적합치 않은 나이든 사람들은(우리는 회색의 머리가 된 자를 포함한 모든 연령층의 학생들을 기대했다) 그들의 일에 지장을 받지 않게끔 이른 아침이나 밤 늦은 시간에 교육을 받게 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은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하위 계층 출신의 성인들이 분명하다. 특히 광산 노동자들과 서민들로서 유년기에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문맹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웨슬리는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한 삶과 새로운 자의식 및 더 분명한 자기고찰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바디는 이를 “최초의 정규 성인 야간학교”로 평한다.

웨슬리가 기숙사 학교제도로 1748년에 설립한 새로운 킹스우드 학교는 교과과정상의 괄목할만한 점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읽기, 쓰기, 셈하기는 물론 영어, 불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수사학, 역사, 작문, 지리, 대수, 물리, 원예, 음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서, “참된 교육의 목표에 대한 선각자로서의 웨슬리의 식견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할 것이다. 이 학교는 시설이나 수준 등 여러 면에서 훌륭했으나, 휴일도 없고 노는 행위도 금지된 채 아침 5시에서 오후 8시까지 엄중한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규율의 지나친 엄격성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웨슬리는 또한 대학을 설립하여 가난한 계층 출신들도 최고 지성의 자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기도 했다. 그는 6명의 메도디스트 학생들이 옥스포드 대학에서 붸겨나고 한 명이 입학 거부를 당했을 때, 이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킹스우드에 대학을 세웠다. 이 킹스우드 대학에서 학생들은 3년 동안에 대다수 옥스포드 학생들이 7년 동안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되었다. 교과과정은 신학분야와 고전어 뿐만 아니었고 고대 저술가들, 역사, 철학, 수학, 물리학, 지리학, 및 고전과 현대문학까지도 포괄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졸업하게 되면 상당한 학문적인 수준에 도달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가정 출신의 대다수에게 기초적인 학교 교육, 특히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없게 했던 계층간의 장벽을 극복하는 젊은이들이 나타날 수 있는 원칙적인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교육활동에 있어 더 중시해야 할 점은 어린이 교육과 양육에 대한 책임의식을 일깨우고 유지하려 했던 그의 넓고 깊은 의식의 측면이다. 웨슬리는 메도디스트 단체를 통해 어린이 교육에 대한 당시의 결핍된 자리를 보충하여 메꾸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웨슬리가 노력한 구체적인 부면들에 대해 마르크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그는 어린이 양육과 교육에 대하여 반복하여 설교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가 설립한 학교들을 정기적으로 점검했고, 어린이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스스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며, 독자적인 교과서를 저술했고, 수업과 교과과정을 구상했으며, 부모들과 교육문제에 대한 상담을 했고, 교사들을 찾아가서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어려운 점들을 해결해 나가곤 하였다. 학교의 운영은 처음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맡겨 졌으나 그렇다고 그의 학교에 대한 상급 감독권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설교자들은 정기적으로 교육문제를 그들의 설교 주제목록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의 모든 메도디스트 신도회들에서는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감 속에 어린이들의 교육 장소와 주의 깊은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 된다는 의식이 일깨워 졌다. 이로 인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거의 유일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던 소규모의 기초 학교들이 지역 공동체의 차원에서 수 없이 세워지게 되었던 사실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웨슬리는 주일학교와 문서 교육이라는 두 가지 다른 면을 통해서도 대중 교육에 기여 했다. 그 주일학교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개념이 다른 것으로 어린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교리 공부, 그리고 셈하기 등을 가르치는 일반 교육과 종교교육을 병합시킨 것이었다. 이 주일학교 활동은 다른 교육적인 조치들을 효과적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평일에 수업하는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돈벌이가 필요 없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했다면 주일학교는 평일의 돈벌이에 관계 없이 모든 어린이들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 주일학교는 대다수의 많은 어린이들에게 유일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웨슬리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메도디스트 신도회의 그러한 주일학교가 영국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물론 웨슬리가 이 주일학교를 창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그 길을 다졌고 메도디스트들이 그것을 발전시켰으며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것을 장려하였다. 메도디스트들은 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전역에 이 제도를 개척하도록 후원하였고, 그 주일학교들은 대중 교육에 많은 효력을 발휘했다.

웨슬리가 교육의 성장을 촉진시킨 또 다른 길은 대중들에게 읽고 지식을 얻을 문서들을 출판하고 또 그것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널리 배포시킨 것이었다. 그린(Richard Green)에 의하면 웨슬리 형제들은 생애 동안 453편의 작품을 출판하였는데 그 중 233개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저작이고 220편은 편집이나 발췌한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종교와 윤리로부터 과학, 의학, 역사, 그리고 영어 드라마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웨슬리가 1749-1755년 사이에 고전과 현대문헌을 망라해 50권으로 편집해 출판한 “기독교 총서”(Christian Library)였다. 이러한 그 자신의 저작들, 정기 간행물들, 그리고 50권으로 된 그의 기독교 총서는 대중들에게 유용한 문헌을 덧붙여 주었다. 낮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 책들이 선물로 주어지기도 했다.

이 책들과 독서를 통해 메도디스트 모임이 교육의 증진에 미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메도디스트 모임들은 웨슬리를 통해 교육의 장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웨슬리가 출판한 책들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가 행해졌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이들은 삶과 신앙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되었는데, 마르크바르트는 그로 인해 “이들의 종교적,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지식의 지평은 확대되었고 이로부터 영국 전체의 교육제도에 일련의 충격과 자극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

18세기의 영국의 사회적 상황에서 반추해 볼 때,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이 대중 교육에 남긴 이러한 자취들은 사막의 오아시스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도소 개혁 활동

교도소 방문과 수감자들에 대한 구호는 옥스포드의 신성크럽 시절부터 웨슬리의 사역에 있어 중요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교도소 사역은 복음적인 회심 이후 더욱 밀도 있게 실행되었다. 단순한 구호 차원을 넘어 교도소 개혁을 위한 노력에로까지 발전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복음주의 운동 속에서 웨슬리가 행한 교도소의 첫 번째 활동은 수감자들을 위한 설교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그의 설교는 사형선고를 받은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했고, 그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여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내적인 평화 속에서 단두대로 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봉사와 복음선포라는 웨슬리 운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이 교도소 설교 활동은 웨슬리에게 남다른 의미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38년 9월 이후 9개월 동안에만 런던, 브리스톨, 그리고 옥스포드에 있는 교도소에 67회 이상 방문 및 설교를 수행했고, 80세가 넘어서도 그 일을 지속했다. 그리고 1778년의 연회에서는 메도디스트 설교자들에게 교도소 방문을 의무로 규정했다.

‘모든 인간에게 무제한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의인’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는 수감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기도 했으나 거의 항상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수감자들은 그와 대화하길 원했고 설교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국가 관리들과 교구 목사들의 방해가 웨슬리로 하여금 수감자들의 바라는 바에 자유롭게 응할 수 없게 했다. 웨슬리가 자주 방문 금지를 당한 이유는 웨슬리가 대상자들을 “악하고 미치게 만든다”는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바르트는 웨슬리가 단순한 임석을 넘어 수감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심지어는 몇몇 수감자들의 사면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싫었고 또한 그의 다른 활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관리들과 교구 목사들이 웨슬리의 교도소 활동을 차단하려 했다고 더 설득력 있는 지적을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웨슬리 운동의 수감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이다. 웨슬리의 모범에 따라 수감자들에 대한 활동은 병들고 가난한 자에 대한 활동과 마찬가지로 메도디스트 내에 자동적인 활동이 되었다. 메도디스트들의 수감자들에 대한 활동은 설교와 위로 권면에만 머물지 않고 필요한 물품 전달, 병간호, 석방을 위한 탄원서 제출, 그리고 사형수들에 대한 형장까지의 동행과 보호 등을 수반했다. 이 일들은 물질적인 부담, 건강의 위협, 그리고 공개적인 조소를 감내할 헌신이 필요했는데, 피터스(Sarah Peters)와 톨드(Silas Told)는 그러한 수행과 헌신의 대표적인 실례였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의 이러한 활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리 낮은 처지에 있는 자라도 그의 영혼의 고귀성으로 인해 고귀한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게 했고, 빚진 자들이 더 이상 비속한 짐승이나 무도하고 헤픈 무뢰한으로 간주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이러한 간접적인 효과만으로 끝난 것은 아니라, 교도소 상태를 개선시킨 실질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메도디스트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데이지(Abel Dagge)라는 간수가 브리스톨의 뉴게이트 교도소를 개선케 되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데이지는 존슨(Samuel Johnson) 박사의 칭찬을 받았던 인물로 그의 교도소 개선사업은 웨슬리의 충심어린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61년에 [런던 신문](The London Chronicle)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 브리스톨의 뉴게이트에서 발생한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지옥의 가장 저주스러운 자리들 중에서 나는 (런던의) 뉴게이트와 동등하거나 능가하는 곳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그 곳을 능가하는 가공스러운 지역이 있었다면 바로 몇 년 전 브리스톨의 뉴게이트였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성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충격을 금치 못할 정도로 불결하고 악취가 진동하며 비참함과 사악함이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얼마나 크게 놀랐던지요! 1. 그 곳의 모든 부분들은…신사의 집처럼 청결하고… 2. 싸움질이나 소란스러움이 없으며… 3. 싸움의 일상적인 원인들이 제거되었고… 4. 술취함도 없고… 5. 매춘도 없어졌고… 6. 자신의 직업적인 일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분적으로는 그 간수가 합당한 이윤으로 빌려주는 신용대부에 의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최대한 공평하게 분배되는 의연금에 의해 연장과 재료가 제공되는 등 게으름을 방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배려가 취해집니다. 7. 주일날에는 그들은 일하거나 놀거나 하지 않고 최대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모두가 예배실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합니다…. 8. 영적인 문제나 세상적인 문제를 돕기 위해 주일과 목요일마다 설교가 행해집니다. 예배당 한편에는 수감자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큰 성경을 줄로 매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웨슬리는 그 메도디스트 간수에 대해 “누가 그의 모범을 따를 수 있겠는가?”라는 경탄의 말로 끝을 맺었다. 실로 데이지의 이러한 사역은 18세기의 부패하고 암울한 상태에 있는 영국의 교도소들이 닮아야 할 개선의 모델이었다. 벱은 데이지의 그러한 노력을 평하여, “하워드(John Howard)의 기념비적인 교도소 개혁운동 보다 15년 이상 앞선 것이었고 하워드 사상의 많은 부분을 예기한 것이었다”고 했는데 합당한 지적이라고 본다. 브레디는 “데이지의 사역이 하워드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었음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들의 인도주의적이고 개혁적인 교도소 활동은 동족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인 수감자들, 특히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꺼리는 영국의 적군들에게까지도 확대되었다. 웨슬리는 1759년 10월에 브리스톨 근방의 노울(Knowle)에 수감되어 있는 7년 전쟁의 프랑스 포로군 교도소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1,100여명의 프랑스 포로수들이 불결하고 얇은 넝마조각들만 걸친 채 밀짚 위에 누워 추위에 떨며 허약한 양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그는 브리스톨의 저녁집회에서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출 23:9)는 본문을 택해 학대를 비난하는 설교를 통해 전형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고 그것의 시정을 위해 대중들을 조직화 하였다. 그 결과 의복구입을 위해 24 파운드가 모금되었고, 브리스톨 시당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매트리스와 담요가 제공 되었으며, 런던과 영국 각지에서 기부금 모금이 이루어 졌다. 그는 1779년 8월에는 펨브로크(Pembroke)에 있는 미군 죄수들과, 1783년 10월에는 윈체스터(Winchester)의 독일군 죄수들도 방문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인도적 구호는 물론 포로 교도소의 개선을 위한 웨슬리의 관심과 노력의 일단을 보여 준다.

웨슬리의 교도소 개혁을 위한 더 강력한 노력은 불의한 상태에 대한 그의 공개적이며 분명한 항의제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워드가 1777년에 분노에 찬 영국과 웨일즈의 교도소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 이전에 이미 교도소의 상태들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교도소들을 방문하여 자세히 탐사한 바 있다. 그리하여 그는 불의한 면들을 공개적으로 널리 알리고, 시정되어야 할 상황개선을 위해 가능한 조치들을 강구하고 시행했던 것이다. 마르크바르트에 의하면 웨슬리가 여러 신문이나 단행본을 통해 발표한 항의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교도소 환경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오히려 악을 배우게 되는 교도소의 도덕적 자세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몇 달 혹은 몇 년씩 걸리는 긴 시민 재판과정에 관한 것이요, 넷째는 가난한 자와 부자에 관한 불공평한 처리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전쟁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관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항의들을 통해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의식을 일깨워 교도소의 상태를 개선시키려 노력했다.

이러한 여러 면에서 볼 때, 웨슬리는 교도소의 개선을 위해 아무런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타당하지 않다. 물론 웨슬리가 당시 교도소와 형법의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국회의 입법이나 왕과 각료들의 행정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의 개혁활동은 하워드를 중심으로 프라이(Elizabeth Fry), 그리고 그녀의 시동생인 박스톤(T. Fowell Buxton)에 의해 전개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웨슬리가 하워드의 그러한 눈부신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하워드 자신이 다음과 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나는 그(웨슬리)의 격려로 내 계획을 활기차게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사람이 열심과 인내심에 의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가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열심과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면 웨슬리 씨가 그의 삶에서 행한 것처럼 나의 길에서 많은 것을 나는 왜 행하지 못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전보다 더 민활하게 내 일을 수행할 결심을 했다.

브레디는 하워드를 가리켜 “웨슬리의 열성적인 제자”라고 까지 평한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의 교도소 개혁 사역은 하워드를 통해 결정적인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다. 하워드를 통해 이룩된 교도소 개혁활동과 그 결실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4. 여성의 지위 향상과 지도력 배양

웨슬리와 메도디즘은 여성들의 지위향상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런연은 주장하길, “여성들이 종교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취하는 것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장벽이 메도디즘에서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당시 영국 국교내의 여성은 그들의 남편과 목사와의 관계에 있어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고 교회 내에서 극소수의, 그것도 종속적인 것 외에는 거의 지도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그것이 통념이고 관례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초대 기독교의 선례를 모범으로 하여 그러한 관례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성들로 하여금 메도디즘 속에서 다양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여 여성들의 지위향상과 지도력 배양에 혁신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면에서 벱은 웨슬리를 “18세기에 가장 두드러진 페미니스트”로 평한다. 당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기회가 부여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도디즘에서 여성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 출발점은 조장과 속장의 역할을 통해서 였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여성들로 형성된 속회에서만 속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어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도 영적인 안내와 양육을 제공하는데 비범한 능력을 나타냈기에 여성이 남성에 대해서도 영적인 리더로 봉사하는데 대한 반대는 점차 극복되었다. 그 결과 메도디즘에서 여성 리더가 남성 리더보다 18세기 내내 항상 2배가 넘었다. 1742년의 파운더리 신도회(Foundery Society)를 보면 총 66명의 리더 중 여성이 47명 남성이 19명이었다. “교회 역사상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이래로 메도디즘보다 여성적 특색이 더 풍부했던 때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한 스티븐스(Abel Stevens)의 단언은 과장 만은 아니라 하겠다.

속회원들을 지도하며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하는 여성의 이러한 지도력은 설교라는 영역에로까지 여성들의 참여 폭을 증진시켰다. 당시 영국 국교의 전통에서는 설교는 오직 성직안수를 받은 남성만의 범접할 수 없는 권위였다. 평신도에게는 남성이라 해도 결코 설교자로서의 역할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관례였다. 그러기에 평신도 여성의 설교는 그야말로 당시 사회의 관례를 대혁신하는 것으로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웨슬리는 평신도 남성의 설교문제에 대해서는 어머니 수산나의 충고와 자신이 직접 그 설교의 열매들을 목격하여 1744년 연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여자들의 설교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고전 14:34)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하여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입장을 점차 철회하게 되어 1761년에 크로스비(Sarah Crosby)의 간증사역을 허용하였고, 1771년에는 보산큇(Mary Bosanquet)의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하므로 여성 설교의 특수소명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이 특별한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의 평신도 설교자들이 모두 그러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 각자의 설교를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있어 메도디즘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시여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계율 아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 메도디즘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바울 사도의 규율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경우,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 몇 가지 예외규정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교회가 부과한 경계표를 뛰어 넘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여성 리더들의 사역을 축복하셨고 그들의 효력이 의심의 여지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기에 점차 많은 수의 여성들에게 설교사역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런연은 모두 27명쯤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 대다수는 정식적인 임명을 받지는 않았으나 설교를 원하는 신도회들의 요청에 응했고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에까지도 활동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1787년 맨체스터(Manchester) 연회에서는 사라 말렛이 설교자로 다음과 같이 공식 승인되었다.

우리는 사라 말렛이 메도디스트 교리를 설교하고 규율에 순응하는 한, 그녀를 우리의 동역자로 삼으며 우리와 함께 설교하는데 대해 아무런 반대도 없습니다.

당시 영국의 모든 종교 단체 중에서 오직 퀘이커 교도들만이 이와 유사한 약속을 천명할 수 있었다.

메도디스트 여성들은 다른 리더십에도 참여 했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이끌고 또한 자선사업 단체도 창설하여 병원이나 교도소의 병든 여성들에 대한 구제활동도 전개하므로 여성들의 지도력을 확대하였고 여성들의 역할을 증대시켰다.

웨슬리의 남녀 평등의 관념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현저한 측면들이 있다. 그것은 용어를 통해 표현된 그의 의식이다. 두 가지의 예를 들 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성 메도디스트들에 대한 웨슬리의 ‘자매’라는 용어 사용이다. 잉글리쉬(John C. English)는 웨슬리가 그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남성은 물론 여성도 교회의 온전한 일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남녀 간의 사회적인 거리감도 좁히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당시에는 성직자와 여성 성도들 간의 영적인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와 딸’이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었는데, 그 용어는 어버이라는 남성의 능력을 강조하고 자녀라는 여성의 허약성을 단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웨슬리는 그 용어 대신 자매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18세기 영국은 형제와 자매가 동등하지 않고 남성으로서의 형제가 자매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거리감이 아버지와 딸 간의 것보다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는 웨슬리가 아메리카에서 사용하기 위해 39개조를 편집할 때, “크리스챤 멘” (Christian Men)이라는 용어를 “크리스챤”(Christian)으로 바꾸었고, 하나님께 간구할 때의 “아버지”(Father)라는 용어를 “거룩하신 어버이”(Divine Parent)로 대치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역시 여성 차별을 완화시키고 여성의 위치를 높이려는 웨슬리의 노력을 보여 준다 할 것이다.

웨슬리는 1788년에 “병자 방문에 대하여”(On Visiting the Sick)라는 설교에서 오늘날에도 급진적으로 들릴 정도의 그러한 급진적인 여성 해방론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여자는 남자처럼 이 명예로운 봉사의 일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여자들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구별이 없습니다.” “여성은 단지 눈요기일 뿐 귀기울여 들어줄 필요는 없는 존재다”라는 말이 실로 오랜 동안 많은 사람에게 격언으로 통해 왔습니다.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마음에 드는 노리개로 만들어졌을 뿐인 것처럼 양육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을 존중하는 일입니까? 혹은 그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푸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철저한 불친절이며, 무섭도록 잔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터키인처럼 야만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또한 나는 분별력 있고 정신이 올바른 여성이 어떻게 거기에 복종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권리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권리를 단호히 주장하십시오. 그 비열한 노예상태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남성들과 같은 이성적인 피조물입니다. 여러분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동등한 영생의 후보자들입니다.

웨슬리는 여성들에게 스스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그들이 속한 사회의 일원들에게 기여하도록 그들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능동적인 행위자가 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어마우스는 “여성해방이 웨슬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약간 과장된 느낌이 있다 할 것이지만, 웨슬리와 메도디즘이 18세기에 여성들의 지위를 향상시켰고 후세대에게 그 유산을 넘겨 주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5. 노예제도 반대 투쟁

18세기의 영국은 앞에서 본 바처럼 가난, 부족한 교육, 그리고 형법과 교도소 상태의 열악성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난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큰 난제는 18세기 최대의 스캔달이라할 노예제도 문제였다. 웨슬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비록 웨슬리가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것들 보다 늦게 대응하긴 했지만, 공격의 강도 면에서는 가장 강렬했다. 웨슬리는 1774년에 출판된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사고(Thoughts upon Slavery)라는 소책자를 통해 노예제도를 생생하게 비판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1770년대 이전에는 노예제도를 악으로 탄핵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단지 노예제도에 대한 그의 사적, 공적인 반감이 1770년 대에 전시체제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웨슬리의 노예제도에 대한 관심은 조지아 선교사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되었다. 1736년 7월말 남부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챨스톤(Charleston) 방문에서의 흑인 노예들과의 직면과 그 해 8월 20일의 흑인 옹호자(The Negro’s Advocate)라는 책자를 통한 노예제도의 잔인성에 대한 자각은 그에게 노예매매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흑인 노예들에게 목회적, 교육적인 접근을 체계적으로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촉발시켰고, 조지아에 노예제도를 금하는 오글레토프 장군의 정책을 강력히 지원케 했다.

웨슬리는 영국으로 되돌아 온 후 그의 부흥운동 전개 속에서 노예들에 대한 목회적이고 교육적인 사역의 열망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목회사역에서 흑인과 백인 그리고 자유자와 노예 사이의 구별을 철폐시켜 노예들에게도 세례를 베풀고, 흑인 노예들로 하여금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흑인 노예들의 교육에도 관심하여 그는 1740년 6월에 흑인학교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1755년에는 버지니아(Virginia)에서 노예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데이비스(Samuel Davies)를 후원하여 그들의 교육에 필요한 책들을 공급해주는 운동도 전개 했다. 이러한 일들은 소수의 퀘어커 교도들 이외에는 거의가 노예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시기에 참으로 빛나는 것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웨슬리와 메도디즘이 이 초기 단계에서는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저항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메도디즘의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은 웨슬리가 퀘이커교도인 베네제트(Anthony Benezet)의 기니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Some Historical Account of Guinea)이라는 책을 읽게 된 1772년을 기점으로 출발되었다 하겠다. 웨슬리가 그 책을 통해 얼마나 자극을 받게 되었는가는 1772년 2월 12일자 저널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잘 드러내 준다.

나는 한 정직한 퀘이커 교도가 일반적으로 노예매매라 불리는 가장 저주스러운 악행에 대해 출판한 아주 색다른 책을 읽었다. 나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이방세계 안에서도 그와 같은 것에 대해 읽어 보질 못했다. 그것은 야만성 면에서 마호멧 국가의 기독교인 노예들이 겪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분명히 능가하는 것이었다.

웨슬리가 노예매매에 대해 역사상 그렇게 나쁜 것은 없을 것이라고 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곧바로 베네제트에게 감사를 표하는, 그리고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아버지라 할 샤프(Granville Sharp)와 연합해 그 운동을 함께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 일에 동참한 2년 후인 1744년에 “사람들에게 노예 소유자의 비인간적인 모습과 무방비적인 노예들의 모습을 응시하게 해주고 그 가공할 불의에 더 이상 냉담할 수 없게 만든”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Thought upon Slavery)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 책이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서 점하는 가치는 샤프와 베네제트의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샤프는 베네제트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 책에 대해 말하길, “그는(웨슬리) 노예매매의 불법행위 전반에 관한 논의의 요점을 간결하게 잘 간추려 놓았다”고 했다. 베네제트는 웨슬리가 그에게 보낸 그 책자에 대한 답신에서 “시대의 정황이 저 비중 있는 주제(노예매매)에 대한 크지 않으면서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그 책을 대하게 되어 특히 더 기쁘다”라고 했다. 브레디나 워너 같은 후대의 학자들도 그 책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브레디는 이 책에 대해 “아마도 이제까지 노예제도에 반대해 쓰여진 것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일 것”이라 했고, 워너는 “노예제도 반대 문헌 중 하나의 가장 효력적인 작품”이라고 평했다.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를 통해 표현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웨슬리의 논증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는가?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노예제도의 불의성을 체계적으로 지적하며 설득력 있는 호소를 통해 노예매매 철폐를 요청하고 있다.

이 책 첫 단원에서 웨슬리는 노예제도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노예제도의 역사를 간략히 개괄한 다음, 두 번째 단원에서는 노예들이 붙잡혀 오는 나라의 상황과 관습, 그리고 그 사람들의 성품에 대해 당시 널리 퍼져있던 선입견들을 반박한다. “그 곳은 끔찍하고 메마르고 황량한 곳이며… 그들은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고, 우둔하고 게으르고, 사납고, 잔인하고, 불성실한 야만인”이라는 당시의 선입견들에 대해, 그는 아프리카 여행기 등의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 곳은 풍요롭고 유쾌한 곳이며… 그들은 분별력이 있고, 근면하고, 공정하고, 정의롭고 정직하고…사랑이 많으며, 온순하고, 우호적”이라고 반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원에서는 노예들의 포획과 수송과정, 그리고 그들이 농장주들로부터 받게 되는 대우의 잔인성과 비인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노예들에게 가해지는 그러한 잔인함과 비인간적인 행위들에 대한 웨슬리의 분개는 “조물주께서 세상의 가장 고귀한 피조물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도록 의도하셨는가?”라는 물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네 번째 단원에서는 웨슬리는 어느 정도 자연법적인 정의, 그리고 자비심을 토대로 하여 노예제도가 합법적인 상거래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부도덕한 상거래를 하느니 차라리 상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덕을 희생시켜서 부를 획득하는 것보다 부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같은 피조물인 인간 동료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피로 얻어지는 온갖 부보다 정직한 빈곤이 더 낫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원에서는 앞의 언급들을 노예선 선장들, 노예 상인들, 그리고 미국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 그는 그들에게 “영혼을 잃지 말고, 인간을 삼키는 늑대가 되지 말며, 더 이상 사자나 곰보다 야만적이 되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부수가 팔려 나갔고, 웨슬리의 책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월간 평론(The Monthly Review)으로 하여금 그 책에 대해 세 페이지나 할애해 호의적인 논평을 게재하게 했으며, 조지아의 노예들을 과도한 잔인성에서 법적으로 보호받게 했다. 이 책은 미국에서도 같은 해인 1774년에 출판되어 30년이 지나는 동안 13판 이상을 거듭하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이 책이 메도디스트들에게 미친 여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책은 1780년에 미국에서 열렸던 메도디스트 첫 연회의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 선언과, 모든 메도디스트들은 소유하고 있는 노예들을 해방시킨다는 1784년 총회의 결의를 이끌어 낸 초석이기도 했다.

웨슬리는 이 후에도 노예제도의 불행한 상황과 타락성을 상기시키는 책자들을 출판하여 노예제도 반대 운동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특히 미국혁명 전쟁의 격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1778년에 쓴 국가의 상태에 관해 영국 사람들에게 드리는 진지한 요청(A Serious Address to the People of England, With Regard to the State of the Nation)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노예매매에 대해 통렬히 탄식하며 탄핵하였다.

나는 흑인 노예매매가 더 이상 결코 발견되지 않게 되길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형제들을 짐승처럼 도둑질해 파는 일과 그들을 수천 수만 명씩 살해하는 일이 없게 되길 간구한다! 오 회교나 이교적인 것보다 더 악하고 혐오스러운 이 일이 우리에게서 영원히 제거될지어다! 영국이 설립된 이래 영국에 이와 같이 저주스러운 매매에 손을 대는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은 없었다.

웨슬리는 글을 통해서만 노예제도 탄핵 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그 운동을 지원했다. 그 중 1788년 3월 3일에 브리스톨에서 행한 설교가 가장 기억에 남고 담대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항구도시인 브리스톨은 왓슨(Watson)이 “노예매매자들의 음침한 소굴”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노예무역의 요충지였기에 적대감이 예상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노예제도에 관해 설교할 것임을 예고했고 그 집회장은 상류층, 하류층, 부자, 그리고 가난한 자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유일한 방해가 있었다면 그 집회를 일시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든 무시무시한 뇌우 뿐이었다. 다음날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노예들이 벗어날 길을 찾고 그들의 사슬이 분쇄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회를 열어 노예제도 폐지운동을 확산시켰다.

웨슬리는 이처럼 노예해방을 위해 다양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노예해방을 위해 남긴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큰 공헌은 그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입법적인 활동을 벌려 끝내 법적인 승리를 일궈낸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활동가들을 길러냈고, 또한 그들의 힘을 북돋우어 주었다는 점이다. 그 대표자라 할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브레디의 지적처럼 “웨슬리의 영적인 아들”이었다 할 것이다. 웨슬리는 세상을 떠나기 1주일이 채 못 되는 때에 쓴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윌버포스의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을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로 불러 세우지 않으셨다면, 종교와 영국, 그리고 인간성의 수치인 저 저주스러운 악행을 대적하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일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위해 당신을 불러 세우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사람들과 악마들의 반대에 의해 기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신다면 누가 당신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를 합친들 하나님보다 강하겠습니까? 선행을 행함에 있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전능하신 능력 안에서 계속해 나아 가십시요. 온 세계에서 가장 악한 미국의 노예제도마저도 사라져 없어지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윌버포스는 웨슬리의 이 편지에 대해 비망록에 “존 웨슬리, 그의 마지막 말들. 노예매매”라고 메모해 놓았는데, 이는 윌버포스에 대한 웨슬리의 영향력을 입증해 준다 할 것이다. 윌버포스는 그 두 달 후에 의회로부터 자신의 탄원에 대해 거부를 당했지만, 웨슬리의 격려대로 “사람들과 악마들의 반대에 의해 기진”하지 않고 1807년에 노예매매 금지 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행진을 지속했다. 이러한 긴 행진의 여정에 메도디스트들은 윌버포스의 든든한 동맹군이 되었고, 웨슬리의 노예제도에 관한 사고는 사람들에게게 지속적으로 도전을 던져 주었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 웨슬리와 그의 부흥운동이 18세기의 제반 사회적인 문제들 속에서 개혁을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고 또 큰 결실들을 이루었음을 볼 수 있다. 실로 웨슬리에게 있어 성결은 사회적인 성결이었고, 그의 종교적인 열정과 사회적인 열정은 궁극적으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확인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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