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현대신학자료1

신앙위인:요한 웨슬리(John Wesley)

신앙위인:요한 웨슬리(John Wesley)  
http://cafe.naver.com/modernth/596   
 
요한 웨슬리는 영국에서 지금부터 300년전인 1703년 6월 28일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목사였고 증조할아버지도 목사였습니다. 이런 뼈대있는 집안에서 19명의 자녀중에 15번째 아이요 아들로는 두번째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정은 급속도로 늘어나는 아이들로 인하여 항상 빈곤에시달렸습니다. 어느 해에는 통털어 6실링밖에 없는 판국에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태어난 영국은 당시 국교도 즉 지금의 성공회와 청교도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뒤숭숭하였고 게다가 산업혁명이 끼친 사회혼란등으로 술취함, 싸움질, 도박, 도적질, 자살등이 마치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도리어 미신처럼 여겨지고 각처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까지도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도리어 사람들에게서재물을 빼앗아다가 자기들 배를 채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시대는 희망이 안보이고 더욱 암울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진리를 전파할 시대의 등불로 요한 웨슬리를 예비하고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0살 때 런던에 있던 챠더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갑자기 엄격하게 다스리면서 가르쳐주셨던 부모님이 안 계시자 자연히 신앙생활이 게을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그의 생애중에 가장신앙적으로 잠들어 있던 시기였다고 그는 후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차터하우스에 들어갈때는 성자였으나 나올때는 시커먼 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1720년 초여름 챠터하우스 학교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들어갔을때에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뜻밖에 숨이막힐 지경으로 코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얼마후에는 목구멍에서 직접입으로 피를 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밤마다 계속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육신이 쇠약해진데다가 극심한 궁핍을 겪는동안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를 깨닫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가 되겠다는 그의 어릴적 기억을되살려 회개하고 목사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하루 2시간씩 구별하여 열심히 기도하였고 영적인 진보와 실천적인 삶을 위해 나름대로 20가지의규칙을 정해놓고 투쟁하였습니다. 22세의 나이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후 마침내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날 웨슬리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쏟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리의 설교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설교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후 잠시 아버지 사무엘목사를대신하여 고향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설교는 역시 신통치 못하여 신자들은 또졸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있던 동생 찰스웨슬리는 신앙이 뜨거워져 매주일 한번씩 몇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동생의 요청으로 요한 웨슬리가 이 모임을 주관하게 되었고 날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안에 쫙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대학교안에 불이 붙었다, 성경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그들이야말로 메도디스트들이다" 메도디스트(methodist)는 감리교도라는뜻으로 요한 웨슬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여 오늘의 감리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거룩한 클럽'이라 불리웠는데 한결같이 기도와 성경공부 그리고 구제에 헌신하였습니다.

얼마후 버튼박사의 추천으로 요한 웨슬리는 동생과 '거룩한 클럽'회원인 벤자민 잉헴과 함께 1735년 10월 18일 미국을 향하여 그레이브샌드 항구를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요한 웨슬리는 일생에 또 한번 큰 변화를 겪게 되는 사건을만나게 되었습니다. 시몬즈 호가 넓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앗, 태풍이닷!!" "쏴-- 꽈르릉 꽈당,꽝" 캄캄한 밤, 순식간에 배는 하늘이 터진 듯한 소낙비와 무서운 파도속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거센 파도소리를 뚫고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젠상어밥이 되는 구나" 웨슬리도 어느새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은은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이 찬송을 듣는 웨슬리는 너무나 놀랐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모라비안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삶속에서 주님의 구원을 믿지 못함을 깨닫고 후에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4개월만에 마침내 미국대륙에 도착하여목회를 시작하였지만 한 부도덕한 여인의 모함을 계기로 미국에서의 사역에 종지부를 찍고 2년만에 영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는 이 모든 사건을 통해 아주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는 모라비안교의 지도자 피터볼리로부터 도움을 받아 오직 믿음으로구원받는 진리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1738년 그는 '올더스게이트사건'이라 불리는 가슴이 타오르는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하고 이때부터무서운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처음 설교는 옥스퍼드대학생들 앞에서 하였습니다. "확실한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설교내용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가슴을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였습니다. 뉴게이트의 감옥에서도 '거저 주시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죄수앞에서 설교하였습니다. 웨슬리가 크게 믿음의 구원을 외치자 여기서도수많은 사람들이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그의 말은 칼날처럼 사람들의 가슴에박혀들고 많은 나무를 태우는 뜨거운 불길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목사들이 웨슬리에게 비웃으며 구원이 믿음으로만 된다면 교회제도나 성찬식은쓸데없는가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웨슬리를 비방하는 근본이유는실제 요한 웨슬리가 교회의 사치와 목사들의 타락을 사정없이 후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웨슬리의 모든 교회에서의 설교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 화이트필드의 도움으로 그는 킹스우드지방 광부들에게 교회대신 넓은 언덕에서 즉석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 그대로 불덩어리였습니다.

막혔던 화산이 터져오르듯이 그의 입에선 불덩어리가 뿜어나왔습니다. 처음 모인 사람들이 200명정도밖에 안되었는데 5번째 설교할때는 그곳에 1만명이 훨씬넘었고 다음엔 1만 8천명이 몰려왔습니다. 그때부터 말씀에 굼주린 사람들이설교를 사방에서 요청해 왔습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2만명이 넘는 숫자가 가득집회장을 메우기도 하였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1739년11월 11일 그는 낯선 두 신사의 기증으로 대포공장을 개조하여 훌륭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대포를 만드는 공장을 사람을 살리는 대포를만드는 공장으로 만들어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단이 성장하였습니다. 모이는사람이 점점 늘자 웨슬리는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볼 수 없어 구역마다 '속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일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이런 조직적인 체계를 이루자 그후에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도 빈틈없이 착착 모임이 커가게 되었고 이 무렵 비로소 '감리교도'라는 말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도를 이끌며 무엇보다도 신자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실천'을 가르치며 설교하였습니다. 모임이 더욱 커지자 국교회에서는 깡패를 동원하여 핍박을본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모임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웨슬리를 납치한 깡패들은 '이 자식! 너 말씀 전할래, 안 전할래'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말씀을 전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있더라도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채찍질하였습니다. 1753년 그는 직접 발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맨 먼저와이트 섬으로 가서 전도운동을 벌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어서 만섬과실리에 전도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아일랜드에 갔습니다. 국교파신자들이 모조리 나서서 난리를 치기도 하였지만 그의 설교는 아일랜드 전체를 복음의 물결로 뒤덥이게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 가서도 무뚝뚝하게 듣던 그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글래스고우와 아버딘, 그리고 더딘을 이어 웨슬리는 계속하여 웨일즈, 카아디프 그리고 리메리크까지 널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치밀한 계획가운데 미국의 복음역사를 시작하여 1769년 미국에 세 개의감리교 단체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안에 5명의 설교자가 활동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그는 외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들어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이상되는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틈에 2백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내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60년동안 한번도 걸러본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경이 만든 사람'이라고하였습니다. 정말 요한 웨슬리는 성경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80세가 되었을 무렵 그가 전도를 다닌 곳마다 어느새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에 자신을 핍박했던 아일랜드 콘웰에서 2만5천명이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년일지라도 자신에게남은 한순간 한순간을 쓸모없이 살아가지 않고자 촌음을 아껴서 복음 전파에힘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죽기 5일전까지도 그는 32km 떨어진 곳에가서 복음을 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때 두 개의 숟가락과하나의 찻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안타까와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몰려들었고 웨슬리는 평안한 가운데 멀고 먼 인생의 길을 다 마치고 천국의 영광의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웨슬리가 이땅을 떠날 당시, 영국에는 294명의설교자와 71668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선교부에는 19명의 선교사와 5300명의 회원이 있었고 미국에는 198명의 설교자와 43265명의 회원을 가질만큼 그의 인생은 큰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의 신학적 의미와 웨슬리의 견해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의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해왔으며 신약성경은 그러한 이해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첫째, 성찬식의 이름(Eucharist)이 뜻하듯이 성찬의 중심적인 의미는 감사드림이다. 성찬을 제정하는 성경 구절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4-22, 고전 11:23-26) 모두가 예수께서 하나님께 축사와 사례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감사는 기쁨 에 가득찬 것이었음을 사도행전(2:46,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성찬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에 대한 기억과 기념을 뜻한다.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 "나를 기념(anamnesis)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찬식을 거행하는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기념 또는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단순히 떠올린다 는 것이 아니라 '행하면서' 구체적 사건을 다시금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념하는 것은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특히 그리스도 사건--과 그리스도 의 다시 오심(고전 11:26)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성찬은 교제(communion)를 뜻한다. 바울 은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koinonia)이 아니며 우리가 떼 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라고 하며 성찬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덩어리의 떡은 공동체원들 모두가 하나인 것을 상징하며, 성찬에 참여하고 나눔으 로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이라고도 불리우는 Didache는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는 주님의 말씀을 상기 시켜 이웃과 불화가 있는 사람은 화해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함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바치 는 예물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넷째, 성찬이 갖고 있는 의미는 희생(sacrifice) 이다. 예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말씀하시며 희생의 모습을 보이셨다. 성찬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할지라도 말 1:11(깨끗한 제물, pure sacrifice), 히 9: 14(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요 1:29(하나님의 어린양) 등의 구절은 성찬의 희생적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다섯째, 성찬은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찬 제정사에서 예수께서는 떡을 그의 몸으로, 포도주를 새 언약을 위해 흘리는 피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요 6:51-58의 구절이 성찬과 관계된 구절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요 6:51("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에서 보듯 성찬 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여섯째, 성찬은 성령의 역사이다. 고전 12:13 의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세례에 관한 구절을 성찬의 의미를 주는 것으로 확대해 해석하기도 한다. 비록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많은 교부들과 신학자들이 성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깊게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눅 22:16("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와 고전 11:26("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 지")에서 언급되듯 성찬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여 누리게 될 축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 아적인 대망은 기념하여 행한다고 하는 성찬의 의미와 함께 강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 이다.
웨슬리는 성찬식에 대해 사변적이기 보다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면에서 접근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대로 일생을 통해 자주 그리고 계속적인 성찬식을 행했다. 그는 성찬식에 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참예하는 높은 특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실천적인 면과 함께 성찬식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1). 웨슬리는 성찬식을 은총의 한 수단(a Means of Grace)으로 여겼다. 성찬식이 내적 은총 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표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이 제공되는 방법이라고 했다. "은총의 수단(The Means of Grace)"이란 설교에서 웨슬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 밖으로 드러난 보이는 수단, 즉 그 수단에 의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들의 영혼에 모든 영 적 은총과 의로움, 평화 그리고 기쁨을 부어주시는 수단, 그리고 또한 한 번 부숴진 그리스 도의 몸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마련된 그런 수단이 아닌가?"라고 말 하고 있다.
 
2). 웨슬리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the real Presence of Christ)를 믿었다. 웨슬리 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나 오직 떡과 포도주 같은 요소에만 한 정되어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웨슬리가 이해한 성찬에서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영 광스러운 인간의 몸이 아니라 성찬식의 행위 가운데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 주어 지는 능력이었다. 그리스도가 실제 존재하나 그것은 제단에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라 언제나 인격적인 존재(a personal Presence)이다.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실제적으로 전달한다. 그 요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기관(organs)이며 실제적인 도구로 이 도구에 의해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은총이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살아계신 인격적인 그리스도에 의해 항상 행해지 고 있으며 성찬식에서 능력이 전달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믿었다.
 
3). 웨슬리 또한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기념(a Memorial)으로 보았다. 그 러나 이것은 단순하고 의미없는 기억이 아니고 현재 존재하는 구속적인 의미와 직접 연결되 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행위는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성 찬에 참여하는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비 록 웨슬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지식의 깊이를 보면 그가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과 함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기쁨이 넘치는 축하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4). 웨슬리는 성찬식을 하나의 상징(a Symbol)으로 보고 있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성례전 을 주신 것은 인간의 이익을 위함이며 인간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명백히 하면서 하 나님의 말씀과 은사들을 확증하시기 위해 상징으로 인간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결점, 그리고 천상적이고 영적인 것 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하나님께서 밖으로 드러나며 보이는 상징 (outward and visible sign)을 정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연약한 것들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임을 분명히 했으 며 그리스도인들이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을 통해서 영적인 영양의 상징들을 받아들인다고 하 였다. 즉 한 분이신 주님께서 성찬식을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양식으 로 주신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찬을 우리 영혼의 양식이라고 하였고, 상징으로서의 떡과 포도주가 단순한 상징 그 자체만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을 위한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의 담지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웨슬리는 성찬 요소들의 본질보다는 그들의 기능에 보다 관심을 기울였음에 틀림없다.
 
5). 웨슬리는 성찬식을 종말론(Eschatology)과 밀접하게 연관시켰다. 떡을 떼는 것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음,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주제들은 사도시대부터 종말론적인 구조에서 이해되어져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고 영원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화해의 완성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회는 기다려 왔다. 웨슬리가 지은 성찬 찬송들 중 기쁨에 찬 것으로 성찬식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상이 만나는 곳에 서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적지 않다.
 
6). 웨슬리는 성찬식을 성자들과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로 여겼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한 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에 존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체 군사들로 영 광 중에 살았던 모든 성자와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만나고, 시간과 영원이 교차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눌 수 없는 사랑의 한 교제로 엮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가 "모든 성자들의 날(All Saint's Day)"을 소중히 했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7). 웨슬리는 성찬식을 그리스도의 희생(a Sacrifice)으로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속과 성찬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고 하나님의 유월절 양, 흠없는 양이었으며 인류를 위해 희생적으로 죽으심이 성찬식에 드러나 있다고 웨슬리는 묘사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이 희생,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 의 계시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표현 이 두 가지를 가능케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인 동시에 희생적 제물이었다고 웨슬리는 설명한다.
 
8). 웨슬리는 성찬식을 또한 우리들의 희생(our Sacrifice)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우리 그리 스도인들이 할 수 있으며 또 해야만 하는 희생을 의미한다. 우리를 희생하는 것으로 성찬식 은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성찬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희생하 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림으로 그리스도 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드릴 수도 없고 감히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는 것이 다. 로마 카톨릭이 오용하거나 남용했던 것과는 달리, 웨슬리는 성찬식에 대한 희생적인 해 석 가운데에서 매우 가치있는 것을 찾아 발전시킨 것이다.
 
9). 웨슬리는 성찬 참여자들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로 죄에 대한 슬 픔, 용서함을 받고자 하는 간절함,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우리의 확신 으로 그것은 은총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하 다는 확신이라고 하였다. 아무도 성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 는 것으로 가치를 얻게 된다. 그렇다고 믿는 자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현존에 영향을 주지 는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제 존재하는 것이다.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서 갖고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성찬식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는 믿음 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는 성찬식을 믿음을 굳게해 주는 의식으로 뿐만 아니라 회심 을 위한 의식으로 여겨 모두에게 개방된 성찬식(Open Table)을 주장하였다. 완전한 기독교 신앙은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 오는 것이나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 어떤 필수요건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 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