죤 웨슬리 John Wesley
죤 웨슬리 John Wesley
http://cafe.naver.com/modernth/595
죤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소읍 에보트(Epworth)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이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Samuel Wesley)와 엄격하면서도 슬기로운 신앙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수산나(Sus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의 부모는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열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죤,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죤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죤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죤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죤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죤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 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죤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 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웨슬리는 16세에 챠터 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Oxford) 대학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옥스포드는 학교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수양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얻은 교훈, 챠터하우스에서 받은 수양을 그대로 계속 실행 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은 대부분 옥스포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조수로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영국교회의 안수를 받았다.
또한 여기서 유명한 옥스포드 구락부 곧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자기 자신과 그의 전도인들의 독특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성경클럽','엄격한 종교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로 가서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북미 선교 활동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2년 만에 웨슬리는 중생의 대 경험을 앞에 두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은 웨슬리 형제에게 중요한 해가 되었으니, 동생 챨스 웨슬리가 먼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죤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인 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 웨슬리는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도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 죄가 속량 되어지고 구원 받은 줄 확신하게 되었다.
1738년 엘더스게이트 경험으로 부터 1791년 임종 시 까지의 웨슬리의 생활은 항상 말 타고 여행하며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님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 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 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웨슬리는 찬송에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와같은 운동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감리교회가 조직 되었다. 이제 죤 웨슬리는 갔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확연한 존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챨스 웨슬리의 찬송가 영국 김동일 전도사 / 웨슬리및 영국사에 관한 자료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죤 웨슬리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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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소읍 에보트(Epworth)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이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Samuel Wesley)와 엄격하면서도 슬기로운 신앙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수산나(Sus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의 부모는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열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죤,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죤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죤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죤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죤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죤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죤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 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죤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 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웨슬리는 16세에 챠터 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Oxford) 대학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옥스포드는 학교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수양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얻은 교훈, 챠터하우스에서 받은 수양을 그대로 계속 실행 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은 대부분 옥스포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조수로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영국교회의 안수를 받았다.
또한 여기서 유명한 옥스포드 구락부 곧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자기 자신과 그의 전도인들의 독특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성경클럽','엄격한 종교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로 가서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북미 선교 활동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2년 만에 웨슬리는 중생의 대 경험을 앞에 두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은 웨슬리 형제에게 중요한 해가 되었으니, 동생 챨스 웨슬리가 먼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죤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인 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 웨슬리는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도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 죄가 속량 되어지고 구원 받은 줄 확신하게 되었다.
1738년 엘더스게이트 경험으로 부터 1791년 임종 시 까지의 웨슬리의 생활은 항상 말 타고 여행하며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님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 이래 50여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번 설교하며 3,4백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 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 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 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웨슬리는 찬송에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 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와같은 운동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감리교회가 조직 되었다. 이제 죤 웨슬리는 갔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확연한 존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챨스 웨슬리의 찬송가 영국 김동일 전도사 / 웨슬리및 영국사에 관한 자료
1738년 5월 24일 (수)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 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죤 웨슬리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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