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기독론
웨슬리의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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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8. 맺음말 -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머리말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가 누구였으며, 현재 누구이며, 미래에 누구일 것인가?, 그리고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현재는 무엇을 하며, 미래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중심이며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신학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이 되었다. 초대 교회의 신학은 대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의 문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가 주로 다루어졌다.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초대 교회 시대의 물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특히 오늘을 사는 감리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대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감리교인의 기독론적 물음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감리교인의 기독관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기독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연구함으로써 감리교인들의 기독관의 정체성을 밝힐 수가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오늘의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보다 돈독하게 함은 물론 우리의 구원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구원에 둔 웨슬리의 기독론에 대한 고찰은 우리 감리교인에게는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과 그 외에 구원을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대하고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기독론에 대한 논의를 조직신학적으로 다룬 저서를 남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다만 그의 '25개조 종교강령'과 그의 설교들("우리의 의이신 주님"(The Lord Our Righteousness),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 그리고 신약성서 주해 및 일기, 논문 등에 기독론적 진술이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런 진술조차도 웨슬리의 고유한 기독론적 진술이라기보다는 전통적 기독론을 에큐메니칼한 방향에서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고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 그리고 일반화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감리교 조직신학자들은 기독론에 있어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담습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추상적 또는 사변적 기독론이라기 보다는 구원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룬 현실적 기독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인간의 구원을 위한 관심은 불가분리적으로 기독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은 성서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전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연결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이트의 한 작은 집회에서 경험되어진다. 웨슬리는 구원은 도덕적인 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믿었으나 조지아주 선교를 통하여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접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경험 이전에 이미 지식을 통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경험 후에 구원을 위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무시하였고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된다고 확신하였다.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독론을 주장하여, 시종일관되게 기독론과 구원론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웨슬리는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을 하고 있다. 모든 기독론이 실제로 구원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듯이 웨슬리의 구원론적 신학은 기독론에서 출발한다. 웨슬리의 신학은 구원을 말하면서 성화를 강조한다. 구원과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웨슬리가 말하는 성화는 신자는 매 순간마다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시스(Forsyth)는 웨슬리의 완전사상은 기독론적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구원론과 성화론이 웨슬리 신학의 중심과제라면 기독론은 그 핵심이 된다.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성서적 구원에 대한 그의 해석과 그 자신의 구원의 경험에 따라 해석되었다. 성서와 경험에 따라 해석된 그의 기독론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며 신이어야 한다.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자격은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전통적인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완전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었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었으며 성서는 그의 경험을 지원하였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 주해"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것과 같이 '완전한 신'이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웨슬리는 예수는 그 자신이 선포한 자, 즉 신-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전통에 서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 간주하고 있는 공관복음서들의 주장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는 제4복음서와 일치하고 있다. 웨슬리는 칼게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웨슬리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아들로서 성령에 의하여 인간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니케아-칼케돈(Nicaea-Chalcedon)의 기독론을 절대적으로 수용하여,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했다. 예수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여서 그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여서 인간의 모든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한 이 두개의 완전한 본성은 하나의 품격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의 결합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은 1563년에 채택된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의 제2조를 미감리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말씀인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성으로부터 나왔으며, 진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이분은 축복을 받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런 결과로 두 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으나, 이들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분은 실제로 신이며, 실제로 인간이신,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진실로 고통을 당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죽어 장사되었고, 우리들과 그의 아버지를 화해시키며, 우리의 원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죄를 위하여 희생당하셨다.
제2조는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는 두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어,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표명하고 있다.
웨슬리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I and the Father are one) 라는 요한복음 10:30을 주해하면서 사벨리우스(Sabellius)나 아리우스(Arius)의 설을 반박하고 예수와 아버지는 의지의 일치만이 아니라 기능에 따라 합일된 본성으로서 예수는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일치하며(아리우스설 배격), 예수와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복수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사벨리우스 배격).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을 강조했느냐에 따라서 신학적 색깔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어느 쪽을 강조했을까? 일반적으로 웨슬리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인성보다는 신성의 역할을 더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웨슬리는 『신약성서 주해』에서 '주(主)', '우리의 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예수라는 명칭에 비하여 훨씬 많이 사용하였다. 웨슬리 자신도 "나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강하고 명백하게 언급하도록 나를 유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신성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네트도 웨슬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예수의 신성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고 분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는 조화와 균형이란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중보자로서 신성을 중요시하면 속죄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약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웨슬리의 기독론을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웨슬리가 인성을 덜 강조한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을 가현론적 기독론(Decetic Christology) 또는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완전한 신성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속성 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다. 아들이 취하는 인성은 고전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에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다. 보편적인 인간성을 아들이신 하나님이 취하셨기 때문에 그 보편적 인간성은 이런 의미에서 아들이신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웨슬리가 신성에 치중한다고 해서 그가 인성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속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성이 아무리 중요해도 예수의 인성이 배제되면 속죄도 구원도 성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여 인간의 모든 속성을 따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 받아들인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성화의 모델로서 강조되고 있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기독론과 관계가 있다. 그의 성화론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도덕생활의 모범자로 보도록 한다. 웨슬의 성화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 형 기독론이라기보다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안디옥 형이냐 또는 알렉산드리아 형이냐에 대한 논의로 일본의 웨슬리 전문 신학자 노로요시오의 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lus)보다는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더 가깝다고 본다. 노로요시오에 의하면 교리사 가운데서 모범자로서 예수를 가장 잘 부각시킨 사람은 웨슬리였다. 루터나 칼빈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신학적으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와 같이 사랑에 넘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를 주체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을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웨슬리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근접하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에서는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과 같은 교리가 발생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안디옥 형에 더 근접하고 있다는 주장을 웨슬리가 안디옥파 출신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사랑하고 존경했다는 점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크리스스톰의 설교는 교리적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기르는 일을 목적으로 했다. 웨슬리는 이런 점에서 같은 관심을 가졌던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한 것은 안디옥형의 기독론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형 보다는 안디옥 형에 더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도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실존의 세계 속에서 실존의 본질적인 모습을 지니고 끝까지 살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바람직한 자세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인간화의 길을 가는 것을 표방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하고 있음을 본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성격을 그 사역의 맥락에서도 탐구하였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신(神)이며 참으로 인간(人間)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믿는다. 다음에 논의되겠지만 예수의 동정녀의 탄생의 사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성육신의 자리가 된다. 부활사건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는 위대한 증거가 된다. 부활사건은 예수의 교훈이 신적인 교훈이었음을 확실히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한다. 웨슬리의 승천에 관한 교훈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신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간성을 가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전통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웨슬리에게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승천이라는 행위라기보다는 승천하신 후의 그리스도의 상태인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세상과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강조되어있다. 성육신으로 우리의 경험을 자기의 경험으로 삼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아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시는 지배자이심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이 가현설이나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웨슬리가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한 통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언제나 신성의 주도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사건은 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 하나님의 행위는 현재의 신자와의 교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하나님 보좌 오른 편에 좌정하셔서 오늘 신자들과의 교제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그의 기독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서 삼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구속의 업적을 성취하신 그 하나님이 현재 신자들과 마주 향해 계시면서 우리와 오늘도 교제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은 인간이 은혜 안에서 성화에까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의 독생자들 보내셔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해서 이루어야 할 유일한 과제를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하여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진술한다. 웨슬리에게 성육신은 종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전에 제물이 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육신은 육체를 취하는 신의 행위, 즉 신성이 나눌 수 없는 합일 안에서 인간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인간의 아들이 되시기 위해 동정녀의 태반을 택하셨지만 그는 이런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성육하셨다고 보았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 기본신앙이 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성육신의 장이 된다. 동정녀 탄생설의 의도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이 교리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주장하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위하여 성육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성육신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웨슬리는 예정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의향과 행위가 현실화 되기 전에 인간의 의향과 행위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예지론(豫知, foreknowledge)을 주장한다. 예지론은 인간의 구원의 유무는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예지론은 하나님은 아담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이 범죄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최종적으로 아담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하나님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를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당시의 상태보다 더 행복한 상황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생각하고 계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게 주어져 있었다. 웨슬리는 예지론에 의거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 인간을 보다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아담의 범죄를 저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장만해 놓은 계획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류의 시조를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값없이 베푸는 은혜를 받아 영원토록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더 행복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왜 웨슬리는 성육신이 온 인류를 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로요시오가 바르게 대답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됨으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알고 인간 본래적인 오만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이전의 아담보다 더 행복하고 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창조와 타락과 성육신을 결의하고 예지하고 허락하신 것이다.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와 화해를 위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하는 일에 참여한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 사건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주도하기 위해 내재하셨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기능을 완성하신 분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활동과 인격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 구원의 희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공하기 위한 최후, 최고, 궁극적 노력이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이 확정된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분노는 불순종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유래되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 진정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이었다.
속죄의 필요성
속죄론은 웨슬리의 구원 신학에서 중추적이며 필수적인 주제가 된다. 웨슬리는 속죄론은 기독교와 자연신교를 구별하는 표준이라고 말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인간의 죄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 웨슬리에 속죄론에 의하면, 첫째로,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속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속죄를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공로가 인간 구원에 필수불가결이다. 들째로 속죄의 동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서 속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 간주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이 구원(의인과 중생)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웨슬리의 속죄관과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속죄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로(Law)는 극기의 생활 또는 십자가지는 생활 통해서 속죄 관념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로의 속죄 관념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이 배제된 속죄 관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을 통한 속죄 관념만을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화해한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은총을 마련하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화해의 길을 마련하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다면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윌리암즈(Colin W. Williams)는 웨슬리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원죄론을 강조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희생적으로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속죄를 강조하였다고 말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에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능(The priestly office)은 속죄론의 중심이 된다. 전통적 구분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한 것은 수동적 복종과 적극적 복종이 있다. 수동적 복종은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형벌을 그리스도가 온 인류 대신하여 받는 그러한 복종이다. 적극적 복종은 온 인류로서는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의로운 행위를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행하셨다는 의미로서의 복종이다. 웨슬리가 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이지 적극적 복종이 아니다. 웨슬리는 온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는 다는 점에 집중시켜 이해한다. 웨슬리 속죄론의 중점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속죄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되어진다. 그런 까닭에 웨슬리의 속죄론은 철저한 아가페의 사랑의 동기로 관철되어진다.
웨슬리는 신자가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속죄론을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사귐을 형성함에 있어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을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은 괴로워하게 되는데 그 괴로움을 하나님 자신이 담당하게 된다는 일이 속죄론의 표현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고 또한 괴로움을 짊어지셨다는 사상이 웨슬리의 속죄론에 존재한다고 볼 때, 우리는 결코 그가 하나님의 본질에 관계되는 죽음이나 괴로움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가운데서 일어나는 사태가 아니고 시간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고뇌라든가 하는 것은 관계 개념이지 본질 개념이 아니다.
속죄의 보편성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은 모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었다. 웨슬리는 "이 속전은 … 온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는 저항이 가능한 은혜(resistible grace)였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속죄의 보편성은 존재하지만, 누구든지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설(Universal salva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의 보편성은 칼빈주의의 제한된 속죄 사상을 반대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충분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그 사람들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피를 십자가 위에서 흘리셨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공격한다. 이중 예정론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변경하거나 인간에게 구원을 선택할 자유의지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1740년 9월 25일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지 휫필드(Georgr Whitefeild)는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죄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인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 안에 내주하는 죄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은혜(irresistible grace)에 눌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최후까지 견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주장은 이중 예정론의 제한된 속죄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휫필드는 존 웨슬리의 설교 "자유로운 은총에 대답하는 서신에서" (free Letter to the Rev. Me. John Wesley: in answer to his sermon, entitled 'Free Grace, 1740년 12월 24일)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 가운데 계속 걸어가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남겨진 결과로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인 영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휫필드는 이중 예정론자였음이 틀림이 없다.
웨슬리는 1740년 브리스톨(Bristol)에서 행한 '자유로운 은혜'라는 설교에서 예정론의 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로, 예정론은 모든 설교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설교를 듣건 말건 선택된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설교와 함게 교회의 모든 사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둘째로, 예정론은 성화를 망쳐 놓을 경향이 있다. 예정론은 미래의 보상인 희망과 형벌을 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었기에 사람들은 성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 예정론 변호자들은 사람이 자기의 영원의 삶과 죽음 어느 편으로 결정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성화를 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예정론은 종교적인 위로와 기독교가 주는 행복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버림받을까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향을 갖게 된다. 넷째로, 예정론은 선행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사람들을 위로해도 소용히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선악을 행하기 이전에 영원히 멸망해 버린 자들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정론은 기독교의 계시의 불필요성을 조장한다.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다면 계시는 있으나 마나 하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예정론은 계시 그 자체가 모순된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정론자들이 선호하는 구절들 - 예를 들어,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도다."(롬 9:13)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엡 1:4) - 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란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란 말씀과 모순된다. 따라서 예정론자들은 성서를 모순 된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계시에 거는 기대를 감축시킨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예정론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선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서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이미 구원에서 제외되도록 결정된 자에게 이 말을 예수가 했다면 예수는 웃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이토록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고 공격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모두에게 관계된다는 속죄의 보편성을 믿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으로 이 피의 효과는 사람의 믿고 아니 믿음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지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들어 본적이 없는 유대인과 이교도에게 있어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간접적인 유효성 밖에는 없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태초부터 선행은총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 도덕성에 의해서 판단되는 이교도들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유대인 이교도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의 속죄론
웨슬리의 속죄론을 논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전통적 속죄론의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배상설 (The Ransom Theory)
이 속죄설은 이레네우스(Irenaeus), 어거스틴(Sgustine), 루터(M. Luther)가 주장한 속죄설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보상금의 지불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속죄를 위한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보상금(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설이다. 보상의 개념은 값의 지불을 의미한다. 이 값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에 보상적이며 공로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마귀로부터 석방시킬 때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마귀에게 값을 치루고 인류를 석방하는 방법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요구했고, 하나님만이 그 배상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써 배상이 주어져 인류가 마귀에게서 해방된다.
2) 만족설(The Satisfaction Theory)
안셀름(Anselm)에 의해서 주장된 학설로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는데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어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영예가 회복되고, 인간이 구원받고, 신이 민족하셨다는 설이다.
3) 도덕적 영향설(The Moral Influence Theory)
중세 신학자, 아벨라드(Abelard)에 의해 제기된 설이다. 안셀름에 반대하여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만족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감화를 주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의 크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감화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화해하게 한다. 이 설은 "인간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모범의 능력을 지니고"있다고 본다.
4)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해 주장된 통치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주 통치의 배상이라고 본다. 통치설은 신의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신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무너진 통치권을 회복하신다고 믿는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나 권위가 손상 입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손상된 권위는 회복되었고, 인간에게는 속박이 풀리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다.
5) 고전적 속죄설 (Classical Theory)
스웨덴의 학자, 아울렌(G. Aulen)에 의해서 제기된 학설로 십자가의 사건은 아벨라드 처럼 도덕적 감화를 주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귀의 세력과 신의 사랑의 투쟁에서 신의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는 사건으로 본다.
상술된 속죄론 가운데 웨슬리는 어떤 유형의 속죄론에 근접하여 있을까? 웨슬리의 속죄론이 어떤 유형에 속해있다고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교부시대의 속죄론은 하나님이 악마에게서 인간을 해방하였다는 점, 이를 위해 값을 치루었다는 점을 속죄론의 근거로 삼고있다. 그러나 웨슬리의 속죄론은 하나님과 악마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우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다는 사실, 즉 인간 구원을 속죄론의 근거로 본다. 웨슬리는 악마가 인간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성립되면 악마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본다.
웨슬리의 속죄론은 도덕감화설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속죄에 의한 죄의 용서는 성화의 제 일보이다. 인간의 성화도 인간이 하나님에 의하여 서서히 구원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직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의 속죄론 가운데 도덕감화설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감화설은 형벌 대상설을 입구로 하고 있다. 형벌 대상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인간의 형벌을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여 주셨다는 설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Abelard)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낸 모형이 되시는 분이다." 우리가 앞서가신 모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감화설은 웨슬리에게 기독자의 생활과 직결된다. 윌리암즈는 그 증거로 "웨슬리의 44편의 설교 중의 13편 정도가 산상설교에 대한 해설"로 되어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에게 주로 도덕적 감화력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속죄사건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영향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데 동의하지만 올더스게이트에서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신의 용서를 체험하였던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도덕선생으로 보는 이신론적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 이해는 대체로 안셀름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기독교회는 대체적으로 안셀름의 속죄설인 만족설( Satisfaction Theory)을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그리스도의 희생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손상된 영광이 회복되었고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만족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어떤 상급을 내리려했으나 그리스도는 그 상급이 필요치 않으므로 대신 인간에게 상급 즉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안셀름의 만족설의 논리이다. 만족설은 웨슬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에 대한 채무의 변제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라고 보았다.
아네트(Arnett)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역사상 저명한 몇개의 속죄론의 흐름을 혼합한 것과 같이 보여진다고 했다. 웨슬리는 골 1: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을 주석하면서 "우리의 주님이 스스로 자진하여 겪으신 고난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하여 용서를 얻도록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고 있던 악마의 지배와 그 힘이 파멸되었다"고 하였다. 안셀름의 '만족설'과 교부시대의 하나님과 악마와의 '투쟁설'의 반영을 보는 듯하다. 롬 3:25의 주해에서 웨슬리는 화목제물을 상처입은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1서 2:2("그리스도는 … 화목제물이니")의 주해에서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할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이라고 보아서 안셀름의 '만족설'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 27:46의 주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신자들이 구원을 얻게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렸다는 것은 '대상설'을 반영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며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히 만족할 만한 속전을 치루었다는 것이다(만족설).
노로요시오는 아네트의 웨슬리 연구결과를 들어 웨슬리는 속죄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강조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속죄의 사실(the fact of the atonement)을 주장했다고 하였으며, 속죄의 사실이 가지는 여러가지 측면을 어느 하나의 특정된 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희생되어버리는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네트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다양한 속죄론이 섞여있는 혼합한 속죄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형벌대상설 계열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그 중심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속죄론이 지니는 진리 계기를 주변에 배치해 둔 것이라고 보았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아네트가 말한대로 각종 속죄론에 관한 설명을 혼잡하게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우리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그의 기독론 만큼 그 주장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미 속죄의 보편성에서 논술되었듯이,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만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으며, 모든 이를 위해 대속하였다. 웨슬리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웨슬리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마는 누구든지 믿는 자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구속론은 소시니스파(Socinian)나 일위론자(Uniterianist)들이 주장하는 만인구원설(The Universalism)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 하나님의 예정에 그 답을 두고 있으나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개념의 아르미니우스(Arminan)적 선택관에 따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것이지마는 이의 수용이나 거부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속죄론이 다양하게 포함된 복합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정통 속죄관을 따르고 있다. 영국교회의 39개조 중 3조항에서 취급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통적인 안셀름의 만족설이 지배적이다. 웨슬리는 만족설의 변형인 칼빈의 형벌대속설에도 접근해 있고, 고전적인 속죄성인 교부들의 배상설과 아벨라드(Abelard)의 도덕적 감화설도 기독자의 삶의 모델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종합적인 속죄관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여러 전통적인 교리들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주면서 그 강조점은 칼빈의 형벌대속설에 두고있음은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다. 또한 후대의 웨슬리 신학자들(Watson, Miley)이 웨슬리가 거의 언급이 없는 통치설을 웨슬리주의의 대표적 속죄설로 주장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 방법론은 둘중에 하나((either /or)가 아닌 둘다(both/and)의 방법을 쓰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웨슬리의 속죄론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고, 이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강조하고, 오늘도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사장의 직분으로서의 직분은 구속과 중재(intercession)의 직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에 해당한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로 형벌을 받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희생과 고난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었지만 이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형벌로서는 수동적 순종이다.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행위는 인간을 위한 대리적 형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보상이 되는 희생을 하나님께 드렸다.
제사장의 직분은 대리적 형벌 외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십자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대한 웨슬리의 두 가지 강조점은 아버지께로 나가는 것과 모든 신령한 축복이다. 웨슬리는 대리 형벌의 개념을 안셀름(Anselm of Cantebery)의 충족설의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는 희생뿐만 아니라 그의 구원자들을 위한 계속적인 구원의 은혜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청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과 중개의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신다. 이 점이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기독교 신앙이다. 이 구속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 통해서 일어난다. 구속의 신앙은 죄를 시인하고, 성령의 선험적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고,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계약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에 대한 개인적인 결단을 하게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신의 특이한 가르침인 기독교인의 완전과 연결시킨다." 새로운 성서 연구를 통하여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것임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아 칭의의 근거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성화를 위한 규범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서적 약속의 성취로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신적인 스승임을 입증하였으며, 사탄과 죄를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원한 영광을 드러낸 사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부활은 칭의의 근거이며 우리의 신생의 기초이고, 성화와 칭의 근저에 놓여있다. 웨슬리의 부활 교리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의인과 성화에 관련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화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부활을 우리 안에 성취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의 현재적인 삶에 관계가 있는 실존적인 사건인 것이다. 웨슬리만이 아니라 칼빈과 루터도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도 함께하는 부활로 이해한다. 부활하신 예수의 육신은 돌아가시기 전의 그 육신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몸의 관계를 소유하고 새롭게 변이되신 육신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과 육으로 부활하신 인격적인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광스러운 아들로 변이된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신자들을 똑같은 부활로 안내하시고 초청하시는 분이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성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성결(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로 이어진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을 우리가 품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성결의 중심으로 보았다. "성결은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 전체가 내안에 있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하게 하는 상태이다." 성결의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이다. 성결의 유지도 기독론 중심적이다.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성결이 가능하다. 성결한 자라도,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순간 순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성결한 삶의 모델이요 목표가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으로 이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한다. 웨슬리의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기독론은 성결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숙고에서 웨슬리가 가장 중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결의 삶이었다. 사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person)보다는 사역(work)에 비중을 두어 그리스도의 인격론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속죄론의 각주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철학적 사변보다는 실제적 삶에 더 초점을 두는 웨슬리 신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웨슬리는 논쟁적 신학은 교화로 이끄는 힘이 적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신 분, 죄의 권세와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신 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케 채우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 인간존재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산성설교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하게 권위있게 해석하시는 위대한 선생이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동들을 반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이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이웃에 대하여 친절하고, 도와줄 자세가 되어 있으며 동정심이 가득차 있으며 관대하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거듭난 이후에야 가능하게 된다고 웨슬리는 확신했다. 웨슬리는 예수의 행위들을 뒤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자세를 갖고서 하는 행동을 중요시했다. 예수가 무제한적인 사랑,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천대받는 이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러한 이웃사랑을 선포하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웨슬리의 성결론과 구원론은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이기 때문에 웨슬리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삶이다. 구원과 성화의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또한 성결함을 받는다. 믿음은 성화를 얻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웨슬리는 그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으로 전개하였다. 성결의 유지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는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기독론은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계되고 그 구속적 핵심은 성결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다. 완전무결하게 죄가 없다. 따라서 속죄하실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보자가 필요하다. 인간은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의 필요로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서 인간들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아들을 믿기까지는 신의 진노가 계속된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영국교회의 전통보다 더 이상적인 기독론으로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강조하는 기독론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은 은총 안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것의 표준과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웨슬리의 기독론은 그의 성화론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화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임무는 제사장의 임무 외에도 예언자로서의 임무(The prophetic office)와 왕으로서의 임무(The kingly office)가 있다. 웨슬리에 있어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언적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오묘한 계시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예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에 있어서 성육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를 보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역사 안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가페로 넘치는 의지를 보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육신론은 속죄론에 우선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웨슬리는 예언자의 직분을 스승으로서의 직분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율법과 복음의 스승이라 하였다. 복음과 율법의 스승인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애와 죽음과 승차의 상태에서 각각 스승이 되신다. 그분의 생애가 신적인 스승 즉 완전한 스승의 예언자적 직분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스승이시고 그분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확인되었고, 교회와 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스승이심이 입증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입법자인 동시에 해석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명확한 형상이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양심의 법만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예언자의 직분을 성화에 관련짓는 것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스승에 연관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스도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개하신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의 역할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왕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혹은 권세와 능력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다스림을 뜻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장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결과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주님, 왕의 왕으로서 다시 온다. 그 때는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교회와 이 세상의 지배자이시며 이런 의미에서 왕이신 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령을 보내어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을 성화시켜 주신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악마와의 투쟁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악마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인간과 화해를 이루기 전이 아니라 화해된 이후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마의 역사를 인간과 화해한 후에 하나님이 멸하신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에 있어서는 악마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의 공의에 대하여 복수하는 실행자에 불과하다. 웨슬리가 과거의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성화라는 현장의 신자의 체험으로서 이해한 것은 웨슬리의 체험론적 신학태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한다. 성화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영광화된 인간성(glorified humanity)을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육신승천이 영광화된 인간성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로 하늘로 올라가셨다(눅 19:1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참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를 다스리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리스도는 신자들 속에서 승리의 통치를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심판을 위하여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의 삼직분에 대해서 웨슬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메시아이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시는 예언자이며, 그 자신을 죄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제사장이며, 죄인을 위하여 간청하시며,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시며, 모든 만물을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기까지 통치할 왕이심을 믿는다."
예수는 굴욕에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상태에 있게 된다. 영광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태는 그의 승천과 함께 그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 승천을 통해 주님은 진실로 영광받으시는 분임을 증거하였고 재림을 통해서 그가 왕들의 왕으로 주님들의 주로서 영광 가운데 통치할 것임을 증거할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직분과 칭의를 동일시하고 왕의 직분과 성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승차하신 그리스도(the exalted Christ)는 지상에서 받았던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계5:6).
8. 맺음말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체험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를 뜨겁게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회심체험에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거두어,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만나느냐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남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기독론이 무엇보다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웨슬리의 통찰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온 것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설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예수가 굴욕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는 굴욕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Descent into Hell)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영국국교회 종교강령 39개조에서 25개조 종교강령을 만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삭제하였고, 또한 사도신경에서도 이 고백을 삭제하였으며 1786년 미국 감리교 총회도 이를 따랐다. 왜 삭제했느냐? 아마도 사후 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연옥설 거부). 왜냐하면 때로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음부에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설'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 여부는 인간의 지상생활에 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의 교리에 대한 논쟁이 너무 치열하여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은 지옥 혹은 음부에 가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때까지 의인들의 영혼들이 죽지 않는 채로 남아있는 낙원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낙원행은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의인들, 또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칼케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기독론을 취급하는 웨슬리의 저작들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독론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모든 다른 교리 가운데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대한 웨슬리의 체험은 전통주의에 새로운 삶과 활력을 공급해 주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는 그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학문적인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기보다는 그가 미흡했던 점을 더욱 발전시키고 연구해 내는 일련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웨슬리는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으며, 단지 영국국교회의 종교강령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을 채택했을 뿐, 개인적인 깊은 기독론적 고백을 갖고 있지 않은 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웨슬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노로요시오는 말한다. 웨슬리는 고전적인 기독론을 내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감리교의 기독론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과 상황에 적절한 창조적인 작업 즉, 예수는 철저하게 현재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과 성결의 삶에 중점을 두었기에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인격보다 사역을 더 중요시하는 웨슬리의 자세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모든 철학적 사변을 피하고 실용적인 면에 그의 관심을 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업적은 인간적 의와 성결의 최고의 현현으로써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지상의 도덕적 및 영적 표본 - 구속과 화해의 본바탕 - 을 제시하여 준 점이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선택한 죄와 저주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치고 인간의 죄악을 걸머지셨다. 그리스도의 업적의 결과로 피조물의 구속과 회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 값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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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8. 맺음말 -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머리말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가 누구였으며, 현재 누구이며, 미래에 누구일 것인가?, 그리고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현재는 무엇을 하며, 미래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중심이며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신학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이 되었다. 초대 교회의 신학은 대부분 삼위일체 하나님의 문제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성과 인성에 대한 문제가 주로 다루어졌다. 그리스도에 대한 물음은 초대 교회 시대의 물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물리칠 수 없는 물음으로 남아 있다. 특히 오늘을 사는 감리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묻고 대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감리교인의 기독론적 물음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감리교인의 기독관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기독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웨슬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연구함으로써 감리교인들의 기독관의 정체성을 밝힐 수가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오늘의 시대에 우리의 신앙을 보다 돈독하게 함은 물론 우리의 구원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의 핵심을 인간의 구원에 둔 웨슬리의 기독론에 대한 고찰은 우리 감리교인에게는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과 그 외에 구원을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매우 중대하고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의 기독론에 대한 논의를 조직신학적으로 다룬 저서를 남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의 기독론을 연구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다만 그의 '25개조 종교강령'과 그의 설교들("우리의 의이신 주님"(The Lord Our Righteousness),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 그리고 신약성서 주해 및 일기, 논문 등에 기독론적 진술이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런 진술조차도 웨슬리의 고유한 기독론적 진술이라기보다는 전통적 기독론을 에큐메니칼한 방향에서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고대 기독교의 기독론과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 그리고 일반화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감리교 조직신학자들은 기독론에 있어서 개신교 정통주의 기독론을 담습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추상적 또는 사변적 기독론이라기 보다는 구원의 문제를 실제적으로 다룬 현실적 기독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관계
인간의 구원을 위한 관심은 불가분리적으로 기독론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연결은 성서는 물론 기독교 역사의 전통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기독론과 구원론과의 연결은 1738년 5월 24일 올더스케이트의 한 작은 집회에서 경험되어진다. 웨슬리는 구원은 도덕적인 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믿었으나 조지아주 선교를 통하여 그러한 믿음과 희망을 접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웨슬리는 올더스케이트 집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 경험 이전에 이미 지식을 통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웨슬리는 이 경험 후에 구원을 위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무시하였고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된다고 확신하였다.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독론을 주장하여, 시종일관되게 기독론과 구원론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이미 여러 곳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웨슬리는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을 하고 있다. 모든 기독론이 실제로 구원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듯이 웨슬리의 구원론적 신학은 기독론에서 출발한다. 웨슬리의 신학은 구원을 말하면서 성화를 강조한다. 구원과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웨슬리가 말하는 성화는 신자는 매 순간마다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성화는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시스(Forsyth)는 웨슬리의 완전사상은 기독론적 판단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구원론과 성화론이 웨슬리 신학의 중심과제라면 기독론은 그 핵심이 된다.
3.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예수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성서적 구원에 대한 그의 해석과 그 자신의 구원의 경험에 따라 해석되었다. 성서와 경험에 따라 해석된 그의 기독론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신(神)이며 인간(人間)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며 신이어야 한다.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자격은 그의 인간성과 신성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전통적인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완전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웨슬리의 관점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었다. 이것은 그의 경험이었으며 성서는 그의 경험을 지원하였다. "믿음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신약성서 주해"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것과 같이 '완전한 신'이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웨슬리는 예수는 그 자신이 선포한 자, 즉 신-인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전통에 서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서 간주하고 있는 공관복음서들의 주장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는 제4복음서와 일치하고 있다. 웨슬리는 칼게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웨슬리는 원래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아들로서 성령에 의하여 인간이 되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지셨다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니케아-칼케돈(Nicaea-Chalcedon)의 기독론을 절대적으로 수용하여,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했다. 예수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여서 그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여서 인간의 모든 속성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한 이 두개의 완전한 본성은 하나의 품격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의 결합에 대한 웨슬리의 입장은 1563년에 채택된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의 제2조를 미감리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말씀 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말씀인 아들은 아버지의 영원성으로부터 나왔으며, 진실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이분은 축복을 받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 그런 결과로 두 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으나, 이들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이분은 실제로 신이며, 실제로 인간이신, 한 분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진실로 고통을 당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죽어 장사되었고, 우리들과 그의 아버지를 화해시키며, 우리의 원죄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죄를 위하여 희생당하셨다.
제2조는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는 두개의 완전한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으로 결합되어 있어,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표명하고 있다.
웨슬리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I and the Father are one) 라는 요한복음 10:30을 주해하면서 사벨리우스(Sabellius)나 아리우스(Arius)의 설을 반박하고 예수와 아버지는 의지의 일치만이 아니라 기능에 따라 합일된 본성으로서 예수는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일치하며(아리우스설 배격), 예수와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복수성을 드러낸다고 보았다(사벨리우스 배격).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쪽을 강조했느냐에 따라서 신학적 색깔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어느 쪽을 강조했을까? 일반적으로 웨슬리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인성보다는 신성의 역할을 더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웨슬리는 『신약성서 주해』에서 '주(主)', '우리의 주',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예수라는 명칭에 비하여 훨씬 많이 사용하였다. 웨슬리 자신도 "나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하여 강하고 명백하게 언급하도록 나를 유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의 직무를 수행하셨을 때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신성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네트도 웨슬리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의 역할을 강조함으로 예수의 신성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고 분석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에 대한 웨슬리의 강조는 조화와 균형이란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중보자로서 신성을 중요시하면 속죄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약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웨슬리의 기독론을 말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웨슬리가 인성을 덜 강조한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을 가현론적 기독론(Decetic Christology) 또는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신 안에 완전한 신성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속성 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고 있다. 아들이 취하는 인성은 고전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웨슬리에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성이다. 보편적인 인간성을 아들이신 하나님이 취하셨기 때문에 그 보편적 인간성은 이런 의미에서 아들이신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웨슬리가 신성에 치중한다고 해서 그가 인성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속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성이 아무리 중요해도 예수의 인성이 배제되면 속죄도 구원도 성화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성을 소유하여 인간의 모든 속성을 따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 받아들인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성화의 모델로서 강조되고 있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기독론과 관계가 있다. 그의 성화론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도덕생활의 모범자로 보도록 한다. 웨슬의 성화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 형 기독론이라기보다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안디옥 형이냐 또는 알렉산드리아 형이냐에 대한 논의로 일본의 웨슬리 전문 신학자 노로요시오의 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Cyrillus)보다는 안디옥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 더 가깝다고 본다. 노로요시오에 의하면 교리사 가운데서 모범자로서 예수를 가장 잘 부각시킨 사람은 웨슬리였다. 루터나 칼빈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신학적으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에 의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와 같이 사랑에 넘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를 주체적인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 그리스도로부터 배운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을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교리와 관련시키면서 웨슬리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에 근접하여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에서는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과 같은 교리가 발생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안디옥 형에 더 근접하고 있다는 주장을 웨슬리가 안디옥파 출신인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Chrysostom)을 사랑하고 존경했다는 점에서 이끌어 내고 있다. 크리스스톰의 설교는 교리적이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기르는 일을 목적으로 했다. 웨슬리는 이런 점에서 같은 관심을 가졌던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크리스스톰을 사랑하고 존경한 것은 안디옥형의 기독론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보고, 웨슬리의 기독론은 알렉산드리아형 보다는 안디옥 형에 더 가깝다고 결론을 내린다. 또한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도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실존의 세계 속에서 실존의 본질적인 모습을 지니고 끝까지 살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바람직한 자세를 지니게 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인간화의 길을 가는 것을 표방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안디옥 형의 기독론을 지향하고 있음을 본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성격을 그 사역의 맥락에서도 탐구하였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신(神)이며 참으로 인간(人間)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믿는다. 다음에 논의되겠지만 예수의 동정녀의 탄생의 사건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하는 성육신의 자리가 된다. 부활사건 또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는 위대한 증거가 된다. 부활사건은 예수의 교훈이 신적인 교훈이었음을 확실히 증거한다. 뿐만 아니라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한다. 웨슬리의 승천에 관한 교훈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확신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간성을 가지고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전통적인 교리를 가르친다. 웨슬리에게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승천이라는 행위라기보다는 승천하신 후의 그리스도의 상태인 것이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세상과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강조되어있다. 성육신으로 우리의 경험을 자기의 경험으로 삼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하나님 보좌 오른쪽에 앉아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시면서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시는 지배자이심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웨슬리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의 기독론이 가현설이나 알렉산드리아형의 기독론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웨슬리가 인성보다 신성을 더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한 통일로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언제나 신성의 주도 아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복종하였기 때문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사건은 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 하나님의 행위는 현재의 신자와의 교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하나님 보좌 오른 편에 좌정하셔서 오늘 신자들과의 교제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그의 기독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경험을 자기의 것으로서 삼고 또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구속의 업적을 성취하신 그 하나님이 현재 신자들과 마주 향해 계시면서 우리와 오늘도 교제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4.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구원은 인간이 은혜 안에서 성화에까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의 독생자들 보내셔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해서 이루어야 할 유일한 과제를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사야 53장을 통하여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진술한다. 웨슬리에게 성육신은 종으로 오셔서 죄인들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전에 제물이 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육신은 육체를 취하는 신의 행위, 즉 신성이 나눌 수 없는 합일 안에서 인간성과 결합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은 인간의 아들이 되시기 위해 동정녀의 태반을 택하셨지만 그는 이런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성육하셨다고 보았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동정녀 탄생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인정하는 기본신앙이 된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의 교리는 성육신의 장이 된다. 동정녀 탄생설의 의도는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인정하는데 있다. 웨슬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이 교리가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과 신성을 주장하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위하여 성육신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성육신의 필연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웨슬리는 예정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의향과 행위가 현실화 되기 전에 인간의 의향과 행위를 미리 알고 계신다는 예지론(豫知, foreknowledge)을 주장한다. 예지론은 인간의 구원의 유무는 인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예지론은 하나님은 아담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이 범죄하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최종적으로 아담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하나님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를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당시의 상태보다 더 행복한 상황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생각하고 계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 이전에 이미 하나님에게 주어져 있었다. 웨슬리는 예지론에 의거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 인간을 보다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아담의 범죄를 저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장만해 놓은 계획에 따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류의 시조를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값없이 베푸는 은혜를 받아 영원토록 이전보다 더 깨끗하고, 더 행복하게 되게 하기 위함이다."
왜 웨슬리는 성육신이 온 인류를 보다 더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노로요시오가 바르게 대답한바와 같이 웨슬리는 그리스도 성육신의 방법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게 됨으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알고 인간 본래적인 오만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이전의 아담보다 더 행복하고 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하여 창조와 타락과 성육신을 결의하고 예지하고 허락하신 것이다.
5. 속죄와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역할을 완성한 그리스도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와 화해를 위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하는 일에 참여한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의 구속 사건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주도하기 위해 내재하셨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화해를 위한 제사장의 기능을 완성하신 분이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의 활동과 인격을 통하여 성취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 구원의 희망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공하기 위한 최후, 최고, 궁극적 노력이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의 구원이 확정된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정의로운 분노는 불순종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유래되어진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 진정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이었다.
속죄의 필요성
속죄론은 웨슬리의 구원 신학에서 중추적이며 필수적인 주제가 된다. 웨슬리는 속죄론은 기독교와 자연신교를 구별하는 표준이라고 말하였다. 아담으로부터 전가된 인간의 죄는 속죄를 필요로 한다. 웨슬리에 속죄론에 의하면, 첫째로,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속죄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속죄를 지불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중보적 공로가 인간 구원에 필수불가결이다. 들째로 속죄의 동기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에서 속죄가 출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근거로 간주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이 구원(의인과 중생)의 유일한 기초가 된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웨슬리의 속죄관과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속죄관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로(Law)는 극기의 생활 또는 십자가지는 생활 통해서 속죄 관념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로의 속죄 관념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이 배제된 속죄 관념으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희생을 통한 속죄 관념만을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화해한 구원받은 자의 대표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은총을 마련하셨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화해의 길을 마련하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다면 어떠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윌리암즈(Colin W. Williams)는 웨슬리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원죄론을 강조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희생적으로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속죄를 강조하였다고 말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에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능(The priestly office)은 속죄론의 중심이 된다. 전통적 구분에 따라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한 것은 수동적 복종과 적극적 복종이 있다. 수동적 복종은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형벌을 그리스도가 온 인류 대신하여 받는 그러한 복종이다. 적극적 복종은 온 인류로서는 할 수 없는 일, 곧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의로운 행위를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행하셨다는 의미로서의 복종이다. 웨슬리가 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복종이지 적극적 복종이 아니다. 웨슬리는 온 인류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는 다는 점에 집중시켜 이해한다. 웨슬리 속죄론의 중점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속죄의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되어진다. 그런 까닭에 웨슬리의 속죄론은 철저한 아가페의 사랑의 동기로 관철되어진다.
웨슬리는 신자가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그의 속죄론을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사귐을 형성함에 있어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을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은 괴로워하게 되는데 그 괴로움을 하나님 자신이 담당하게 된다는 일이 속죄론의 표현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고 또한 괴로움을 짊어지셨다는 사상이 웨슬리의 속죄론에 존재한다고 볼 때, 우리는 결코 그가 하나님의 본질에 관계되는 죽음이나 괴로움을 주장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본질가운데서 일어나는 사태가 아니고 시간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고뇌라든가 하는 것은 관계 개념이지 본질 개념이 아니다.
속죄의 보편성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은 모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었다. 웨슬리는 "이 속전은 … 온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구원의 가능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는 저항이 가능한 은혜(resistible grace)였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속죄의 보편성은 존재하지만, 누구든지 최종적으로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설(Universal salva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의 보편성은 칼빈주의의 제한된 속죄 사상을 반대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정한 수효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충분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그 사람들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피를 십자가 위에서 흘리셨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을 공격한다. 이중 예정론은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을 변경하거나 인간에게 구원을 선택할 자유의지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1740년 9월 25일 웨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지 휫필드(Georgr Whitefeild)는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죄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인간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간 안에 내주하는 죄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불가항력의 은혜(irresistible grace)에 눌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최후까지 견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휫필드의 주장은 이중 예정론의 제한된 속죄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휫필드는 존 웨슬리의 설교 "자유로운 은총에 대답하는 서신에서" (free Letter to the Rev. Me. John Wesley: in answer to his sermon, entitled 'Free Grace, 1740년 12월 24일)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택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 이후 죄 가운데 계속 걸어가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남겨진 결과로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인 영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휫필드는 이중 예정론자였음이 틀림이 없다.
웨슬리는 1740년 브리스톨(Bristol)에서 행한 '자유로운 은혜'라는 설교에서 예정론의 반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로, 예정론은 모든 설교들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설교를 듣건 말건 선택된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설교와 함게 교회의 모든 사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둘째로, 예정론은 성화를 망쳐 놓을 경향이 있다. 예정론은 미래의 보상인 희망과 형벌을 받을 자가 이미 결정되었기에 사람들은 성화를 위해 힘쓰지 않는다. 예정론 변호자들은 사람이 자기의 영원의 삶과 죽음 어느 편으로 결정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성화를 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로, 예정론은 종교적인 위로와 기독교가 주는 행복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리고 버림받을까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경향을 갖게 된다. 넷째로, 예정론은 선행을 위한 우리의 열심을 소멸할 경향이 있다. 사람들을 위로해도 소용히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은 선악을 행하기 이전에 영원히 멸망해 버린 자들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정론은 기독교의 계시의 불필요성을 조장한다. 이미 구원이 결정되었다면 계시는 있으나 마나 하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예정론은 계시 그 자체가 모순된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정론자들이 선호하는 구절들 - 예를 들어,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도다."(롬 9:13)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엡 1:4) - 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란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2)란 말씀과 모순된다. 따라서 예정론자들은 성서를 모순 된 것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계시에 거는 기대를 감축시킨다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예정론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선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서 여러 곳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이미 구원에서 제외되도록 결정된 자에게 이 말을 예수가 했다면 예수는 웃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웨슬리가 이토록 이중 예정론을 반대하고 공격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모두에게 관계된다는 속죄의 보편성을 믿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으로 이 피의 효과는 사람의 믿고 아니 믿음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지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들어 본적이 없는 유대인과 이교도에게 있어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간접적인 유효성 밖에는 없다. 하나님은 이교도들에게 태초부터 선행은총을 부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에 의하면 그 도덕성에 의해서 판단되는 이교도들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유대인 이교도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속죄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웨슬리의 속죄론
웨슬리의 속죄론을 논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전통적 속죄론의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배상설 (The Ransom Theory)
이 속죄설은 이레네우스(Irenaeus), 어거스틴(Sgustine), 루터(M. Luther)가 주장한 속죄설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을 보상금의 지불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속죄를 위한 지불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한 보상금(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설이다. 보상의 개념은 값의 지불을 의미한다. 이 값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업에 보상적이며 공로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마귀로부터 석방시킬 때 강제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마귀에게 값을 치루고 인류를 석방하는 방법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요구했고, 하나님만이 그 배상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으로써 배상이 주어져 인류가 마귀에게서 해방된다.
2) 만족설(The Satisfaction Theory)
안셀름(Anselm)에 의해서 주장된 학설로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는데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어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영예가 회복되고, 인간이 구원받고, 신이 민족하셨다는 설이다.
3) 도덕적 영향설(The Moral Influence Theory)
중세 신학자, 아벨라드(Abelard)에 의해 제기된 설이다. 안셀름에 반대하여 예수의 십자가는 신의 만족을 주기 위한 사건이 아니라 사람에 감화를 주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사랑의 크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생활을 하도록 감화를 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방법으로 인간과 화해하게 한다. 이 설은 "인간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모범의 능력을 지니고"있다고 본다.
4) 통치설(The Governmental Theory)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해 주장된 통치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주 통치의 배상이라고 본다. 통치설은 신의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신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무너진 통치권을 회복하신다고 믿는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나 권위가 손상 입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손상된 권위는 회복되었고, 인간에게는 속박이 풀리는 은총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다.
5) 고전적 속죄설 (Classical Theory)
스웨덴의 학자, 아울렌(G. Aulen)에 의해서 제기된 학설로 십자가의 사건은 아벨라드 처럼 도덕적 감화를 주기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마귀의 세력과 신의 사랑의 투쟁에서 신의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는 사건으로 본다.
상술된 속죄론 가운데 웨슬리는 어떤 유형의 속죄론에 근접하여 있을까? 웨슬리의 속죄론이 어떤 유형에 속해있다고 규정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교부시대의 속죄론은 하나님이 악마에게서 인간을 해방하였다는 점, 이를 위해 값을 치루었다는 점을 속죄론의 근거로 삼고있다. 그러나 웨슬리의 속죄론은 하나님과 악마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우선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다는 사실, 즉 인간 구원을 속죄론의 근거로 본다. 웨슬리는 악마가 인간에 대하여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님의 화해가 성립되면 악마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고 본다.
웨슬리의 속죄론은 도덕감화설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속죄에 의한 죄의 용서는 성화의 제 일보이다. 인간의 성화도 인간이 하나님에 의하여 서서히 구원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구속의 직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리의 속죄론 가운데 도덕감화설이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덕감화설은 형벌 대상설을 입구로 하고 있다. 형벌 대상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인간의 형벌을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여 주셨다는 설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Abelard)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보낸 모형이 되시는 분이다." 우리가 앞서가신 모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감화설은 웨슬리에게 기독자의 생활과 직결된다. 윌리암즈는 그 증거로 "웨슬리의 44편의 설교 중의 13편 정도가 산상설교에 대한 해설"로 되어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에게 주로 도덕적 감화력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속죄사건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영향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이다. 웨슬리는 아벨라드의 속죄론의 중심사상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데 동의하지만 올더스게이트에서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써 신의 용서를 체험하였던 웨슬리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도덕선생으로 보는 이신론적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웨슬리의 속죄 이해는 대체로 안셀름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기독교회는 대체적으로 안셀름의 속죄설인 만족설( Satisfaction Theory)을 정통신학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확립하고 인간의 죄를 벌하고 상처입은 영예를 회복하는 길을 택하셨다. 이 일은 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 그리스도의 희생 통하여 인간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손상된 영광이 회복되었고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만족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어떤 상급을 내리려했으나 그리스도는 그 상급이 필요치 않으므로 대신 인간에게 상급 즉 구원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안셀름의 만족설의 논리이다. 만족설은 웨슬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에 대한 채무의 변제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이라고 보았다.
아네트(Arnett)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역사상 저명한 몇개의 속죄론의 흐름을 혼합한 것과 같이 보여진다고 했다. 웨슬리는 골 1: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을 주석하면서 "우리의 주님이 스스로 자진하여 겪으신 고난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하여 용서를 얻도록 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고 있던 악마의 지배와 그 힘이 파멸되었다"고 하였다. 안셀름의 '만족설'과 교부시대의 하나님과 악마와의 '투쟁설'의 반영을 보는 듯하다. 롬 3:25의 주해에서 웨슬리는 화목제물을 상처입은 하나님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요1서 2:2("그리스도는 … 화목제물이니")의 주해에서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할 수 있는 희생의 제물이라고 보아서 안셀름의 '만족설'을 반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 27:46의 주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신자들이 구원을 얻게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렸다는 것은 '대상설'을 반영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노예가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며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히 만족할 만한 속전을 치루었다는 것이다(만족설).
노로요시오는 아네트의 웨슬리 연구결과를 들어 웨슬리는 속죄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강조하는데 연연하지 않고 속죄의 사실(the fact of the atonement)을 주장했다고 하였으며, 속죄의 사실이 가지는 여러가지 측면을 어느 하나의 특정된 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희생되어버리는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네트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다양한 속죄론이 섞여있는 혼합한 속죄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은 형벌대상설 계열에 속한 것으로서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그 중심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가지 다양한 속죄론이 지니는 진리 계기를 주변에 배치해 둔 것이라고 보았다.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아네트가 말한대로 각종 속죄론에 관한 설명을 혼잡하게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우리는 웨슬리의 속죄론이 그의 기독론 만큼 그 주장이 명확하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미 속죄의 보편성에서 논술되었듯이,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만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으며, 모든 이를 위해 대속하였다. 웨슬리가 속죄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웨슬리가 의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마는 누구든지 믿는 자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구속론은 소시니스파(Socinian)나 일위론자(Uniterianist)들이 주장하는 만인구원설(The Universalism)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 하나님의 예정에 그 답을 두고 있으나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개념의 아르미니우스(Arminan)적 선택관에 따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한 것이지마는 이의 수용이나 거부는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 맡겨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속죄론이 다양하게 포함된 복합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정통 속죄관을 따르고 있다. 영국교회의 39개조 중 3조항에서 취급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전통적인 안셀름의 만족설이 지배적이다. 웨슬리는 만족설의 변형인 칼빈의 형벌대속설에도 접근해 있고, 고전적인 속죄성인 교부들의 배상설과 아벨라드(Abelard)의 도덕적 감화설도 기독자의 삶의 모델로서 제시된다. 따라서 종합적인 속죄관이다. 웨슬리의 속죄관은 여러 전통적인 교리들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주면서 그 강조점은 칼빈의 형벌대속설에 두고있음은 매우 흥미있는 사실이다. 또한 후대의 웨슬리 신학자들(Watson, Miley)이 웨슬리가 거의 언급이 없는 통치설을 웨슬리주의의 대표적 속죄설로 주장하였다. 웨슬리의 속죄론 방법론은 둘중에 하나((either /or)가 아닌 둘다(both/and)의 방법을 쓰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웨슬리의 속죄론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고, 이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는가를 강조하고, 오늘도 예수를 통하여, 예수 안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사장의 직분으로서의 직분은 구속과 중재(intercession)의 직분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에 해당한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로 형벌을 받은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었다.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희생과 고난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었지만 이것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형벌로서는 수동적 순종이다.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행위는 인간을 위한 대리적 형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루기에 충분한 보상이 되는 희생을 하나님께 드렸다.
제사장의 직분은 대리적 형벌 외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십자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중재에 대한 웨슬리의 두 가지 강조점은 아버지께로 나가는 것과 모든 신령한 축복이다. 웨슬리는 대리 형벌의 개념을 안셀름(Anselm of Cantebery)의 충족설의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는 희생뿐만 아니라 그의 구원자들을 위한 계속적인 구원의 은혜를 부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청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희생과 중개의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신다. 이 점이 웨슬리의 기독론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6. 성화의 표준과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활동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기독교 신앙이다. 이 구속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사건 통해서 일어난다. 구속의 신앙은 죄를 시인하고, 성령의 선험적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고,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계약을 유지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에 대한 개인적인 결단을 하게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신의 특이한 가르침인 기독교인의 완전과 연결시킨다." 새로운 성서 연구를 통하여 웨슬리는 기독교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것임을 더욱 강하게 의식하였다. 웨슬리 신학에서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아 칭의의 근거를 제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성화를 위한 규범이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서적 약속의 성취로 이해되고, 그리스도가 신적인 스승임을 입증하였으며, 사탄과 죄를 정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원한 영광을 드러낸 사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부활은 칭의의 근거이며 우리의 신생의 기초이고, 성화와 칭의 근저에 놓여있다. 웨슬리의 부활 교리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의인과 성화에 관련시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신앙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화의 기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부활을 우리 안에 성취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의 현재적인 삶에 관계가 있는 실존적인 사건인 것이다. 웨슬리만이 아니라 칼빈과 루터도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만 아니라 영혼도 함께하는 부활로 이해한다. 부활하신 예수의 육신은 돌아가시기 전의 그 육신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과 몸의 관계를 소유하고 새롭게 변이되신 육신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과 육으로 부활하신 인격적인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광스러운 아들로 변이된 분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신자들을 똑같은 부활로 안내하시고 초청하시는 분이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성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특색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성결(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로 이어진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을 우리가 품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성결의 중심으로 보았다. "성결은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마음 전체가 내안에 있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행하신 대로 행하게 하는 상태이다." 성결의 조건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결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이다. 성결의 유지도 기독론 중심적이다.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성결이 가능하다. 성결한 자라도,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순간 순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대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성결한 삶의 모델이요 목표가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심으로 이 모든 삶을 가능하게 한다. 웨슬리의 성결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기독론은 성결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숙고에서 웨슬리가 가장 중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성결의 삶이었다. 사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인격(person)보다는 사역(work)에 비중을 두어 그리스도의 인격론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속죄론의 각주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은 철학적 사변보다는 실제적 삶에 더 초점을 두는 웨슬리 신학에서 나오는 것이다. 웨슬리는 논쟁적 신학은 교화로 이끄는 힘이 적다고 하였다.
웨슬리는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다주신 분, 죄의 권세와 죄책으로부터 구원하신 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을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케 채우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새 인간존재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산성설교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하게 권위있게 해석하시는 위대한 선생이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동들을 반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이 사랑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이웃에 대하여 친절하고, 도와줄 자세가 되어 있으며 동정심이 가득차 있으며 관대하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이렇게 되는 것은 거듭난 이후에야 가능하게 된다고 웨슬리는 확신했다. 웨슬리는 예수의 행위들을 뒤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자세를 갖고서 하는 행동을 중요시했다. 예수가 무제한적인 사랑,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천대받는 이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러한 이웃사랑을 선포하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웨슬리의 성결론과 구원론은 그리스도와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생활이기 때문에 웨슬리의 구원론과 성화론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삶이다. 구원과 성화의 조건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함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하심을 받으며,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또한 성결함을 받는다. 믿음은 성화를 얻는 오직 하나의 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결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중보자이시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웨슬리는 그의 성결론은 기독론 중심의 성결론으로 전개하였다. 성결의 유지도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이는 순간순간 주를 의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에서만 가능하다. 웨슬리의 성결은 순간 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기독론은 언제나 인간의 구속과 관계되고 그 구속적 핵심은 성결로 이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었다. 완전무결하게 죄가 없다. 따라서 속죄하실 수 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보자가 필요하다. 인간은 속죄가 필요하다. 속죄의 필요로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서 인간들과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아들을 믿기까지는 신의 진노가 계속된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영국교회의 전통보다 더 이상적인 기독론으로 기독교인의 완전에 대한 진정한 체험을 강조하는 기독론이라 볼 수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은 은총 안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고, 그것의 표준과 모형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웨슬리의 기독론은 그의 성화론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성화론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7. 예언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임무는 제사장의 임무 외에도 예언자로서의 임무(The prophetic office)와 왕으로서의 임무(The kingly office)가 있다. 웨슬리에 있어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사람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언적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오묘한 계시라고 웨슬리는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예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로요시오는 웨슬리에 있어서 성육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행위라고 본다. 우리가 예수를 보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역사 안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가페로 넘치는 의지를 보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육신론은 속죄론에 우선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웨슬리는 예언자의 직분을 스승으로서의 직분으로 보고 그리스도는 율법과 복음의 스승이라 하였다. 복음과 율법의 스승인 그리스도는 그분의 생애와 죽음과 승차의 상태에서 각각 스승이 되신다. 그분의 생애가 신적인 스승 즉 완전한 스승의 예언자적 직분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스승이시고 그분의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확인되었고, 교회와 신자들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스승이심이 입증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입법자인 동시에 해석자이다. 웨슬리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명확한 형상이다.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양심의 법만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한 그리스도의 예언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의미한다. 예언자의 직분을 성화에 관련짓는 것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스승에 연관시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달하신다. 그리스도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중개하신다.
그리스도는 예언자의 역할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왕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통치 혹은 권세와 능력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다스림을 뜻한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영광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라 현재와 장래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사탄과 죄와 죽음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키는 현재적인 것만이 아니라 종말론적 결과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주님, 왕의 왕으로서 다시 온다. 그 때는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분이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교회와 이 세상의 지배자이시며 이런 의미에서 왕이신 것이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령을 보내어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을 성화시켜 주신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악마와의 투쟁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악마와 싸우게 되는 것은 인간과 화해를 이루기 전이 아니라 화해된 이후이다. 인간 안에 있는 악마의 역사를 인간과 화해한 후에 하나님이 멸하신다.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이전에 있어서는 악마는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의 공의에 대하여 복수하는 실행자에 불과하다. 웨슬리가 과거의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마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일을 생각지 않고 오히려 악마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성화라는 현장의 신자의 체험으로서 이해한 것은 웨슬리의 체험론적 신학태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웨슬리의 기독론은 속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한다. 성화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영광화된 인간성(glorified humanity)을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육신승천이 영광화된 인간성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로 하늘로 올라가셨다(눅 19:1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참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주와 교회를 다스리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그리스도는 신자들 속에서 승리의 통치를 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심판을 위하여 영광중에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의 삼직분에 대해서 웨슬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이며,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되었던 메시아이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시는 예언자이며, 그 자신을 죄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제사장이며, 죄인을 위하여 간청하시며,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시며, 모든 만물을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기까지 통치할 왕이심을 믿는다."
예수는 굴욕에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영광의 상태에 있게 된다. 영광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태는 그의 승천과 함께 그의 재림을 통해 완성된다. 승천을 통해 주님은 진실로 영광받으시는 분임을 증거하였고 재림을 통해서 그가 왕들의 왕으로 주님들의 주로서 영광 가운데 통치할 것임을 증거할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직분과 칭의를 동일시하고 왕의 직분과 성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승차하신 그리스도(the exalted Christ)는 지상에서 받았던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계신다(계5:6).
8. 맺음말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체험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를 뜨겁게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회심체험에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거두어,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체험 속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를 만나느냐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남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공로에 대한 신뢰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기독론이 무엇보다도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웨슬리의 통찰은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그의 확신과 주장에서 온 것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설교에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神-人)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예수가 굴욕의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예수는 굴욕의 상태에 있을지라도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셨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Descent into Hell)을 거부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영국국교회 종교강령 39개조에서 25개조 종교강령을 만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을 삭제하였고, 또한 사도신경에서도 이 고백을 삭제하였으며 1786년 미국 감리교 총회도 이를 따랐다. 왜 삭제했느냐? 아마도 사후 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연옥설 거부). 왜냐하면 때로는 인간이 죽은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음부에서도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이 '그리스도의 음부 하강설'이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인간의 구원 여부는 인간의 지상생활에 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그리스도의 음부하강설의 교리에 대한 논쟁이 너무 치열하여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삭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동안 그리스도의 영은 지옥 혹은 음부에 가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때까지 의인들의 영혼들이 죽지 않는 채로 남아있는 낙원에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낙원행은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의인들, 또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웨슬리는 전통적인 기독론인 칼케돈 신조와 영국교회의 39개조 종교강령을 고수한다. 기독론을 취급하는 웨슬리의 저작들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독론은 그의 신학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모든 다른 교리 가운데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에 대한 웨슬리의 체험은 전통주의에 새로운 삶과 활력을 공급해 주는 데 있어서 아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는 그의 사상과 정신 그리고 학문적인 열정을 그대로 이어받기보다는 그가 미흡했던 점을 더욱 발전시키고 연구해 내는 일련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웨슬리는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한 일이 없으며, 단지 영국국교회의 종교강령에 나타나 있는 기독론을 채택했을 뿐, 개인적인 깊은 기독론적 고백을 갖고 있지 않은 신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웨슬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노로요시오는 말한다. 웨슬리는 고전적인 기독론을 내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감리교의 기독론을 연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과 상황에 적절한 창조적인 작업 즉, 예수는 철저하게 현재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과 성결의 삶에 중점을 두었기에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보다 큰 비중을 둔다. 인격보다 사역을 더 중요시하는 웨슬리의 자세는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모든 철학적 사변을 피하고 실용적인 면에 그의 관심을 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업적은 인간적 의와 성결의 최고의 현현으로써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지상의 도덕적 및 영적 표본 - 구속과 화해의 본바탕 - 을 제시하여 준 점이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선택한 죄와 저주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치고 인간의 죄악을 걸머지셨다. 그리스도의 업적의 결과로 피조물의 구속과 회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 값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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