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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되는 종말론

실현되는 종말론 
http://cafe.naver.com/modernth/504   
 
1. 웨슬리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하였는가?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천적 함의(含意)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와 사회개혁의 운동은 역사와 종말을 보는 견해와 밀접히 맞물려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대가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가 아니면 역사를 초월한 세계(피안이나 영혼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다른 말로하여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는가 아니면 낙관적으로 보는가, 혹은 종말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가 아니면 역사를 넘어서는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와 사회개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종말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웨슬리가 종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를 도외시하고서 그의 사회적 행동의 근거를 논할 수 없다.
 
1. 웨슬리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하였는가?
 
웨슬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관련하여 웨슬리가 과연 종말을 기대하였는지, 또 종말을 기대하였다면 어떤 형태로 기대하였는지를 자주 논해 왔다. 웨슬리가 ‘은총의 낙관주의’에 기초하여 이 땅에서도 이미 그리스도인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보았음을 고려할 때,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은 존재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이미 현세에 종말이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을 우리는 종종 본다.
먼저 슈네베르거(Vilem Schneeberger)의 견해에 주목하기로 하자. 그는 웨슬리의 종말론을 ‘현재화된 종말론’(Vergegenwaertigte Eschatologie)이라고 특징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종말론적인 효력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에게서 종말론적인 차원이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종말론에 대해 이해가 많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다. 이성주의는 초자연주의적인 것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곳 저곳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전도하였던 복음 전도자였고, 모든 다른 것은 이러한 것보다 중요시되지 않았다.

웨슬리의 종말론적인 구조를 그리스도교적인 완전함의 시각에서 연구한 레흐(D. Lerch)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종말론에 대한 다른 질문들에 대해 웨슬리는 무관심하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언급은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종말에 대한 큰 희망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사랑을 무엇보다도 이미 현실화된 종말론,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으로 본다. 이 세상에서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종말론적인 기대는 의미가 없다. 여기서 완성된 사랑과 영생의 개념이 제시된다.

쉠프(J. Schempp)도 역시 웨슬리 신학의 이러한 공백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웨슬리는 사랑을 희망으로부터 분리시켰으며, 사랑이 희망을 능가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은 이미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미래에 더 이상 다른 성취를 기대하지 않는다. 웨슬리는 이미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고자 했다. 이미 이 땅에 주어진 사랑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의 다른 성취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처럼 위의 학자들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종말론적 시각이 빠져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웨슬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완성과 절정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종말론적인 주제에 대해 언급하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웨슬리의 종말론적인 진술은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승리로 결말을 맺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미래적인 성취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단지 더 이상 죄가 없기를 기대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현실화된 종말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강조를 통해, 웨슬리는 미래적인 성취의 기대라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종말론적인 차원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가 미래의 기대를 현재화함으로써 종말론적 시각을 상실하였다는 판단은 성급하고 일방적인 것이다. 비록 그가 그 어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지금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완성될 수 있는 것에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희망이 완전히 탈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의 설명에서 웨슬리의 종말론적 특징이 약화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나긴 하지만, 데쉬너(J. Deschner)와 같은 학자는 웨슬리가 “그래도 무엇인가를 기대했다”고 언급한다. 웨슬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야 극복될 악한 자들의 권세에 대한 승리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가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분명히 미래적인 희망을 언급하고 있으며 미래적인 시제를 사용하고 있음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영위할 미래의 행복한 상태”이기도 하다. 웨슬리에 의하면, “성서의 어떤 곳에서는 그 술어가 특히 땅 위에서의 그것의 상태를 지적하고, 다른 곳에서는 영광의 상태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면서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것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 기원은 바로 전의 기원, 즉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받들어지도록 되게 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여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이 기원에는 또한 땅 위에 있는 은혜의 나라의 연속이요 완성인 영광스러운 하늘의 영원한 나라의 도래의 기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주실 최후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전망하였다.

다시는 죽음과 고통이나 질병이 없고 슬픔이나 친구와 이별이 없는 것과 같이 다시는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을 것이다. 아니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해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하며 끊임없는 결합이 있고,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교제가 있으며,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과 그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의 다함 없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웨슬레는 또한 일반적인 부활과 그 뒤에 올 심판도 역시 기대한다. 심판 날에 이 낡은 하늘과 땅은 파괴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인(義認)과 성화(聖化)의 삶이 위에서 주어진 새로운 은사인 것과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창조이다.

 
2.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천적 함의(含意)
 
비록 웨슬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처럼 다가올 미래의 영광을 열렬히 기대하였다고 하더라도, 종말이 지금 우리의 삶과 관계를 맺는 역동적인 면을 대단히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종말론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물론 웨슬리의 종말론이 시간과 관련하여 이중성을 띠고 있음도 드러난다. 즉 어떤 곳에서는 그가 현재 지금 주어져 있고 누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 그는 장차 미래에 누릴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웨슬리는 학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종말론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도록 하게 한데 책임이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웨슬리는 그 어느 신학자들보다 더 강하게 지금 이 땅 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역설하였다. 그런 점에서 학자들이 종종 그의 종말론을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불렀던 것은 일면 타당한 점을 지닌다. 웨슬리가 현재의 삶을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만 보지 않고,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된 순간인 듯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영혼 안에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사실에서 맺어진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펴서 우리 마음 속에 자기의 보좌를 정하는 순간, 그것은 즉각적으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넘치게 한다. 그것이 ‘하늘 나라’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영혼 속에서 열려진 하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험하는 자들은 누구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할 수 있다: “영원한 삶을 얻었으니 영광이 땅 위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가까이 왔다(막 1:15). 이 말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시고(딤전 3:16), 그 왕국을 사람들 속에 구축하시며 그 백성들의 마음에 통치하실 때(막 1:15)가 찼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가 이제 성취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은 세상 끝까지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있는”(막 1:15) 것이다. 그것은 당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 말씀인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 때에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목표는 아직도 미래에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땅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지금의 의미는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미리 ‘확보하는’ 것에 있다. 이것은 바로 인간 창조의 목표이기도 하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다른 것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땅 위에서 존속되는 것은 땅 위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며, 그를 영원히 기쁘시게 하는 이것 밖의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창조된 것은 다른 목적이 아니라 땅 위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추구하고 발견함으로써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마음 속에 다짐하기를, ‘나는 이것을 행한다’... ‘나는 목표를 항해 전진한다'’라고 하십시오. 나는 나의 존재의 목적인 하나님, 곧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 화해시키려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그는 영원히 나의 하나님이시요, 죽기까지 나의 인도자가 될 것입니다.

웨슬리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와 시간(Christus und Zeit)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통해 ‘구속사적인 종말론’(Heilsgeshcichtliche Eschatologie)을 대변하였던 오스카 쿨만(O. Cullmann)처럼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의 긴장을 견지하면서도,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창하였던 다드(C. H. Dodd)의 입장에 더욱 가까이 서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종말론의 시간성이 아니라 종말론의 사회적 혹은 실천적 함의(含意)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의 세상적 삶과 무슨 관계를 가지며, 이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사귐을 갖는 공동체에 의해 대표된다. 이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공동적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동체 안에 세워지고, 공동체를 통해 표현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로 이 땅 위에서 체험되는 상태인 반면, 그것은 신자들의 삶과 믿음의 공동체 내의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동체의 일원들에 의해 입증된다. 이러한 공동체적 원리는 분명히 정치적인 방식의 행동을 피할 수 없는 기반을 구축한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적인 능력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 체험되는 특성을 창출하며, 이러한 특성들은 교회 공동체의 행동과 반응을 결정하며, 또한 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라는 명령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 모든 궁극성 속에 속히 임하여 이 땅의 모든 나라들을 뒤덮게 되기를 바라는 웨슬리의 소망을 함께 공유한다면, 교회의 정치적 성격은 부정될 수 없다. 비록 웨슬리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의 목적과 목표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삶의 모든 활동 장소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고찰해 본 바와 같이 웨슬리의 사상 속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구체적인 신학적 토대가 함의되어 있다. 그의 선행은총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설명, 믿음의 목표라 할 사랑의 사회적인 성격에 대한 해석, 그리고 현재 여기에 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한 이해 등은 웨슬리의 사회적인 관심이 직감적이고 이론적인 근거도 없이 그저 그의 따뜻한 마음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단서를 제시해 준다.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은 이성에 의거했으며 분명한 논증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은 당 시대에만 국한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다음 장에서는 앞에서 본 역사적인 배경과 웨슬레의 신학적인 배경 속에서 웨슬 리의 부흥운동이 사회개혁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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