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죄 이해 6
존 웨슬리의 죄 이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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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치유의 영으로서의 은총과 죄의 치유
1. 거듭남의 은총과 죄의 치유
전형적인 영국 국교회의 신학자들인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와 란셀롯 엔드류(Lancelot Andrewes)와의 비교를 통해 웨슬리의 의인화에 대한 교리 연구를 학위 논문으로 쓴 발커(Walker)박사는 의인화를 용서와 참여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신앙 의인화'에, 관계적이며 치유적인 면과 주관적이며 법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발커 박사는 "믿음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말한 의인화의 결과 혹은 특징으로서 죄책에 대한 용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회복, 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죽은 영혼의 회복과 동시에 치유자로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상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에서 웨슬리의 의인화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있다. 웨슬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중에서도 의인화와 거듭남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위대한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이라는 설교에서 의인화와 거듭남의 관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칭의와 거듭남이 시점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둘은 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요, 대단히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단지 관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우리를 새로 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전자로 말미암아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관계를 변화시키고 그로 인하여 원수였던 우리가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깊은 속이 변화되어 그로 인하여 죄인이었던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호의에,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를 복귀시켜 줍니다. 전자는 죄책을 제거하는 일이요, 후자는 죄의 힘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점에서는 함께 결합되어 있지만 전연 별개의 성질의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를 처음으로 설교했던 1738년 직후에 웨슬리는 넓은 의미에서 의인화 속에 죄사함과 거듭남 그리고 성화를 다 포함시켰던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웨슬리는 의인화와 거듭남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칭의와 거듭남,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양자됨이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발생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칭의가 거듭남에 앞서며 칭의와 거듭남 후에 신자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 이것은 결국 한 사건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책을 용서받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죄책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adopted)되어 하나님의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다. 조종남 박사는 거듭남과 양자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reconciliation)의 측면으로서 의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의인화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우리를 위한(for us) 위대한 사역이며,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우리 안에서(in us)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본다면,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되지 않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순간, 역시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고의 순서로 본다면, 말의 표현에 있어서 칭의가 거듭남에 앞서는 것입니다.
의인화가 상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면,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외적 관계에서 죄책의 해결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원수 관계였던 것을 올바른 관계로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모든 덕의 열매들을 심어주심으로서 "은총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거듭남(New Birth)"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거듭남의 근거로서 "우리 본성의 완전한 타락"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히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거듭남을 필요로 한다. 의인화와 거듭남을 경험한 하나님의 양자된 기독자는 주님의 사랑의 빛을 보고, 주님의 목소리를 내적으로 들으며,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은총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위대한 변화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거듭남의 시점인 칭의의 순간에 모든 그리스도의 덕으로 씨앗이 영혼 속에 심겨지며 그때부터 신자는 점진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은총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즉 거듭남의 시점은 도덕적 형상 회복의 시점이기에 거듭남 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죽어있던 신자의 영적 감각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한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는 거듭남의 본질은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적인 변화이다. 거듭남이 전적인 변화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의 영이 전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전적인 변화는 성화의 완전성 즉, 거듭남에 완전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시작으로서의 철저함과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남이라는 초자연적인 변화는 바로 '성결과 성화의 입구이며 일부분'이다. 즉 거듭남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으로서의 성령의 점진적인 역사가 시작되며 이 거듭나게 하시는 영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내적 죄악성을 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결은 선재적인 은총이나 확신의 은총이 아닌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웨슬리는 거듭남을 내적 성결로 보았으며 그 특성을 순간적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거듭남 이후 성화의 외적인 성결의 측면 즉, 하나님의 지속적인 성화의 영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는 자비와 경건이라는 인간의 응답적인 행위를 포함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웨슬리의 구원론의 큰 특징을 알 수가 있다. 성화는 과정성과 순간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성화의 과정 속에 포함되어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성결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서 거듭남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듭남의 표징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것들 중에 거듭남의 표징으로서의 "믿음은 단지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믿음 혹은 동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해의 행위로서의 동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내적 경향(disposition)"을 말한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에는 열매가 있다. 그것은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타나심으로 오는 평안이다.
이 믿음의 즉각적이고도 항상 있어야하는 열매, 곧 믿음과 잠시라도 결코 나눠질 수 없는 열매는 바로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첫째로는 모든 외적인 죄를 이기는 힘인데, 모든 악한 말과 행실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히브리 9:14) 어디에서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내적인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믿음은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정(性情)으로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표징인 소망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오는 결과로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확신이다. 결국 이 소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확신의 교리와 동일한 것이다. 세 번째 표징인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능해진다. 사랑의 은총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명에 순응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은총은 하나님의 생명을 죽은 영에 불어 넣어주시는 은총이며, 병든 인간의 본성을 정화시키고 치유하시는 은총이다. 갱신과 관련된 이러한 성령의 권능은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을 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본성의 전적인 타락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향하게 했다면, 거듭남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과 성결을 향하게 한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은총을 통해서 거듭난 신자는 타락한 본성이 치유되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영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응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의 심령이 실질적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게 된다.
당신의 병을 아십시오! 그리고 이 병의 치료법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나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야 합니다. 날 때부터 당신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온전히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모두 죽었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죄 중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삶의 원리, 곧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주셨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병이 치료되고, 모든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을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의인과 거듭남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또한 심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회복되어져 마음의 습관적인 기질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마음의 습관적인 기질의 변화는 의도적인 죄와 외적인 죄를 짓지 않게 한다. 그러나 성서의 예를 보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임에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신자가 자범죄에 빠지는 이유는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비록 지배는 받지 않지만 내적 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도 모든 악의 씨앗인 생래적인 죄, 악의 경향성, 본성의 타락성이 남아 있기에 죄를 지을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된다. 거듭난 후의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어린이로서 비록 성화 되었을지라도 부분적으로 성화된 것이기에 온전한 성화를 향해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육, 세상, 악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갱신되어지고 깨끗해지며 정결해지고 성화 되었을지라도 동시에 우리는 아직 온전히 갱신되어지고 온전히 깨끗해지고 온전히 정결해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육과 악한 성질이(비록 정복은 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어 영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욱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모든 근면함을 사용합시다. 그 만큼 더욱 우리는 안에 있는 원수에 대항하여 깨어 기도하되 간절히 합시다.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우리가 혈과 육과 싸우고, 또한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울지라도 이 모든 것을 다 이룩하면서 이 악한 세대에서 견디어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십시다.
2. 성화의 은총과 죄의 치유
거듭남 후에 기독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회복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기에 성결의 과정이 필요하다. 거듭남은 지속적 성화라는 보다 큰 과정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성화는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회복 과정이다. 웨슬리는 감리교 역사에 있어서 성화의 교리를 감리교 교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그는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고,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요, 성화는 종교 자체(religion itself)라고까지 말한다. 치유와 정화의 성화 은총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한 회복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선재적 은총이 양심, 자유의지와 같은 인간 능력 회복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면 성화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Divine-human cooperation)을 요청하는 거부 가능한 은총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기에 여러분이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 둘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여러분도 일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고후 6:1)이 되어야만 합니다(이것이 사도 바울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그만 두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되 "무릇 있는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이미 있는 은총을 키우지 않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마태 25: 29)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이러한 교리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기울기를 좋아하였던 성 어거스틴은 심지어 Qui fecit nos sine salvabit nos sine nobis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인간 없이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는 인간 없이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협력을 중시했다. 그리고 성화의 은총 역시 하나님의 현재적 선물이기에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은총을 부어주시는 일을 중단하신다. 따라서 웨슬리는 "완전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성결이 유지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총이 크면 클수록 이 은총을 활용해야할 의무가 더욱더 커지게 되기 때문에 결코 머물러 쉴 수가 없게 된다. 성화란 타락한 피조물이 창조주와 교제 가능한 실존으로 회복되는 것이며 원창조시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결을 증가시킴으로서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더욱 더 강건하고 통전적으로 만들어 가는 삶이 성화이다.
칭의 후에 자범죄와 죄책에서 자유하게 되고, 거듭남의 순간 내적 죄악성이 파괴되기 시작함으로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내적 죄악성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이따금씩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분노, 탐심, 불신앙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내적 죄악성의 확신이 성령으로 하여금 신자의 마음에 도덕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구현을 시도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도덕법) 여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용법(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마음과 삶 속에 남아있는 죄를 확신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해서 그의 피가 우리를 매순간 정화시킵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우리의 지성(Head)으로부터 힘을 이끌어냅니다. 세 번째로 그것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의 약속들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은총 위에 은총을 수여 받는 것과 그것이 명령한 것이지만 아직 우리가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굳건히 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그림자인 성령과 도덕법을 통해서만이 신자들은 자신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을 볼 수 있고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 있는 내적 부패성 혹은 죄악성으로 인하여 믿음을 상실 할 수 있고, 타락의 경향성에 굴복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다른 사람처럼 자범죄를 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웨슬리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 우리의 품속에 누워 있는 드릴라에 대항하여,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신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악성으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위대한 의사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서 성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구원의 출발일 뿐 아니라 구원의 계속적인 성장에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로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완성된다. 따라서 온전한 성화를 죽기 전에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계속적인 회개와 믿음이 요청된다.
우리가 칭의 후에도 우리의 죄과(罪過, demerit)-어떤 의미에서는 죄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를 깊이 깨닫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대속하시는 보혈의 참 가치를 볼 수 있게 되며, 이 보혈은 우리가 전에 필요하였던 것과 같이 지금 의롭다 하심을 입은 후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이 언약의 보혈을 단지 하나의 보통 것이라고, 즉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는 도말된 것을 알고, 지금은 별로 필요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다면, 여기에는 우리와 순간순간 관계되어 마침내는 우리들로 하여금 순간순간 새로운 정죄를 받게끔 하는 어떤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칭의 후에도 필요한 지속적인 회개가 바로 복음적 회개로서의 신자의 회개이다. 복음적인 회개는 은총 안에서의 성장과 지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죄로부터 성결로의 마음의 변화인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칭의 후의 지속적인 회개는 남아 있는 죄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고집, 우상숭배, 불신앙이 남아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과 왕으로 삼아 동행하지 않을 때의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온전한 성화 이전에 필요한 회개(복음적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성화의 과정에 필요한 일종의 인간의 응답적 선행(good works)인 경건의 선행(all works of piety)과 자비의 선행(all works of mercy)이다. 먼저 경건의 선행은 은총의 수단들을 말하는 것으로 공적 기도(대중기도), 가족기도, 골방기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 성경 말씀을 듣고 읽으며 명상하면서 하는 성경 연구, 또는 몸의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하는 금식, 절제 등을 말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의 수단은 신자들에게 성화의 은총을 전달하는 공식적 매개체이었기에 그는 은총의 수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기독자의 훈련을 시켰다. 또한 진정한 기독자의 삶 즉,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걸으셨던 그 길을 그대로 걷도록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이것은 웨슬리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철저하게 목회적이며 실천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김진두 박사는 웨슬리의 은혜의 방편을 웨슬리 목회 자체로 보았으며 웨슬리가 교회를 이 은혜의 방편을 실행하는 거룩한 기구로 보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온전한 성화 이전에 필요한 회개의 두 번째 열매는 자비의 선행이다. 이 자비의 선행 역시 "경건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은총의 참된 수단"으로 죄인들의 일시적인 요구와 영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는 또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는 사랑의 종노릇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일들은 사람의 육과 영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옥에 갇힌 자나 병든 자나 여러 가지로 어려움 있는 자들을 찾아보는 일들입니다. 또한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어리석은 죄인을 각성시키며, 뜨뜻미지근한 자에게 활기를 주며, 흔들리는 자를 견고케 하며, 마음이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시험받는 자를 구조하는 것 혹은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방법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과 같은 것들에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온전한 구원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명하사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게 하시는 길입니다.
자비의 선행이라는 성화의 측면은 성화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면을 보여준다.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함께 1739년에 출판한『찬미와 성시집』(Hymns and Sacred Poems)의 머리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지 않은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라고 하였고 또 산상 수훈에 관한 설교에서는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며 단지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내적 성결에 함몰어버린 신비주의자들과 모라비안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사랑을 활동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으로 더불어 자신의 활동적인 관계성 안에서 대응하는 변화 없이는 '내면적인 사랑' 또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회적 성결, 즉 이웃 사랑의 실천을 중시했다는 예들은 그의 인쇄된 설교문 151편 중 13편이 산상수훈 강해 설교였고, 브리스톨에서 처음 옥외 설교할 때(1739) 예수님이 옥외 산상에서 설교하셨듯이 웨슬리도 옥외 탄광 지역에서 산상수훈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김홍기 박사는 루터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의 교과서가 로마서라면, 웨슬리에게는 산상수훈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때, 평신도 설교가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개혁하는 것(to reform the nation), 특별히 교회를 개혁하는 것, 그리고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을 널리 퍼트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런 성화의 사회적인 특성에 집중하여 구제 기금 조성과 구제 사업,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고아원과 구빈원(The Poor House) 설립 운영, 교도소 목회, 병자 간병인과 무료 진료소 설립 운영,『원시 의학』(Primitive physics)의 저술, 노예 해방 운동과 같은 박애 운동을 펼쳤으며,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움으로 교육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성화 신학이 구체적이며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특징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칭의 후에 회개(복음적 회개, 신자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다름 아닌 성결의 삶,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것들이 완전한 구원(full salvation)에 있어서 믿음과 같은 의미로 혹은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구분하고 있다. 복음적 회개와 그 열매가 우리의 성화를 위해 비록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화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단지 믿음뿐이다. 다소간의 회개를 통해서 그 회개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믿음으로 성화(온전한 성화)되는 것이다.
신자의 성결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성화의 은총을 통해 죄인을 치료하시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는 신자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내적 죄악성을 소멸시키시며 타락하고 병들어 있는 본성을 치유시키시고 손상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큰 의무가 발생하게 된다. 선재적 은총으로부터 확신의 은총, 의인화의 은총, 거듭남의 은총으로 점점 더 은총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부요하신 은총의 역사를 더욱 풍요하게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그릇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즉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의 내적 성결(하나님 사랑)과 사회적인 성화(이웃 사랑)을 증가 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병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병을 낫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병이 빨리 치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치유의 영이 우리의 본성을 치유하실 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응답적인 노력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온전한 성화(완전)의 은총과 죄의 치유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를 위해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완전을 이루는 것은 아님을 말했다.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온전한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단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전적으로 성결시킬 수 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랑 안에서 완전해 지는 우리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성화에 필요한 믿음은 성서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한 신적인 증거와 확신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할 수 있으며,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현재 이행하시고 있다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이다. 따라서 성화가 과정적이라면 온전한 성화 즉 완전의 체험은 순간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가 이해한 완전의 상태는 완전해진 완전(perfectio; perfected perfection), 즉 성취되어진 상태로서의 완전인 천사 같은 완전(angelic perfection)이 아니라 과정적인 완전(teleiotes; perfecting perfection)으로서 "모든 사랑의 충만을 위한 끝이 없는 열망"이다. 완전 경험은 순간적이지만 그 순간 전과 후는 점진적이다. 바로 이점이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반대자들과 심지어는 추종자들까지 웨슬리가 말하고 있는 완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웨슬리는 완전을 경험한 이들도 무지로 인해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고, 실수, 연약함과 유혹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땅에서의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으로 절대적인 완전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오히려 이러한 육체적 연약함, 아픔,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강해지고 완전해짐을 경험한다. 이러한 무지, 연약, 실수와 유혹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고, 무의식적인 죄에서도 성결함을 받는 것은 죽은 후 영화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완전 사랑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온전한 성화에 이른 성도도 의식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웨슬리의 목회 전 기간에 걸쳐서 그의 사상 중에 가장 일관된 단일한 주제는 '거룩한 생활' 즉 '완전'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완전은 성결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상태 속에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 사랑이며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이다. 그리고 웨슬리가 기독자의 완전을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아적인 기독자(babes in christ)'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의 기독자(adult christian)'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아적 기독자'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기에 죄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는 완전하다고 웨슬리는 그의 설교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서 말하고 있다.
웨슬리가 말하는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는 완전의 소극적인 의미로서 기독자를 타락(backsliding)하게 만드는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하지 못한 기질들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즉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란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완전을 경험한 사람은 성령의 온전한 성화의 은총의 현존을 통해 그의 생래적인 죄(inbred sin)로부터 정화되어진다. 그의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치유되어진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완전 경험을 한 성도의 죄의 뿌리까지 뽑히는 것을 뜻하며, 행위적인 죄들뿐 아니라 내적인 죄까지도 그에게서 근절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죄가 남아 있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 20) 이 말씀은 외적인 죄와 함께 내적인 죄에도 구원받은 것을 명백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소극적으로도 표현되었고 또한 적극적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의 악한 성질 곧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과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도록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정결하여질 것입니다. 이는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기"(요한 일 3: 3)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겸손하였기에 그는 교만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뜻과 욕망으로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그의 사업을 이루시는데 전심하려 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냄(분노)으로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시고 점잖으시며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 허물에 대하여는 노하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셨으나 허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는 연민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완전한 이들이여! 가서 이와 같이 행하십시오. 분노하더라도 범죄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는 분노를 느낄지라도 거역하는 사람만은 사랑하고 따뜻하게 동정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외적인 죄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죄로부터도 구원하십니다. 악한 생각으로부터 그리고 악한 성품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완전을 경험한 사람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아무런 제약도 거리낌도 없게 되고 그의 영혼에 이러한 사랑과 반대되는 어떤 나쁜 기질도 남아있지 않게 됨으로 그의 모든 생각들과 언어들, 그리고 행동들은 온전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완전의 적극적인 의미인 완전 사랑이다.
이런 상대적인 완전이 지상에서 가능한 것은 아르미니우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그 크신 은총으로 가능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온전한 성화의 상태도 역시 정착된 상태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상태이다. 내적인 죄까지도 사함 받는 것이 완전이지만, 웨슬리는 완전을 경험한 성도도 다시 죄 중에 빠질 수 있음을 그의 목회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유지하는 것이 그것을 얻는 것보다 더욱 어려우며, 세 명중에 하나도 이것을 하기 힘들며 이것은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 은총의 상실의 가능성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신자라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마음의 순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여전히 완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도 필요한데 이것은 단지 생래적 죄와 실제적 죄가 그들에게 다시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만, 단점, 판단과 실행에 있어서의 실수, 여러 가지 모양의 결점들을 위한 속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웨슬리는 혹여 은총의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교만, 열광주의, 율법폐기론, 태만, 분열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모든 일에 남의 모범이 될 것을 충고하고 있다. 특히 웨슬리는 결국 생래적 죄와 외적 죄의 재출현 가능성과 유혹, 혹은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 등으로 온전한 성화 은총 상실의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속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웨슬리가 죄없는 완전이라는 구절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사랑의 완전한 이중 계명의 어떠한 위반으로부터도 자유하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을 죄로부터의 구원의 의미에서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완전이 가능한 것은 웨슬리가 이해한 죄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가능하다. 그것은 웨슬리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죄로 보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4. 영화의 은총과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mortification)
웨슬리는 죄의 치유적 강조점과 일관해서 기독자들이 죄의 본질로부터의 자유의 그 궁극적 상태인 영화 되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는 마음과 삶의 성결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웨슬리가 죽음 이전에 전적으로 성화되었던 이들의 최종 의인화(Final Justification)를 제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은총 안에서 신실하게 장성한 자들 모두가 어느 정도 종말(eschaton) 이전에 기독자의 완전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의 반영이다. 콜린스는 구속의 순서에서 웨슬리가 목적한 것은 완전이라기 보다는 구원의 영원한 목적 즉,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온전한 성화를 넘어서서 영원으로의 구속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흥미로운 주장 중에 하나는 완전히 적합치 못한 이들은 그들이 최종적인 종말을 기다리는 동안 낙원에서 '원숙의 과정(ripen)'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현재 아브라함의 품에, 낙원에 있는 이들-태초부터 지금까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진 모든 거룩한 영혼들은 세상의 근본으로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그 왕국을 받기 전에 끊임없이 하늘에 적합하도록 원숙되어지고 있고, 영속적으로 더욱더 거룩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으로서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전통은 이 낙원을 새 하늘과 새 땅의 궁극적 상태를 단지 기다리는 축복된 휴식을 의미한 반면 웨슬리는 그곳을 은총 속에서의 성장의 장소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 웨슬리는 완전이란 낙원의 상태를 뛰어넘어 은총 속에서 영원으로의 성장을 의미하였다.
지상에서 경험되어지는 완전은 상대적이지만, 천상에서 경험되는 영화는 절대적 완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영화라는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종말론적인 의미와 연관이 있다. 그런데 의인화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성화는 죄의 본질로부터 구원이라면 영화는 다름 아닌 죄의 현실성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는 그가 의롭게 한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들을 빛의 성도들의 상속자들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적합하게 한 그는 그들에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위해 준비되었던 그 왕국을 주십니다.
당신은 마지막 날에 누구의 의로 서실 것입니까? - 누구의 공덕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덕택이라고 대답합니다. 단지 그의 공덕만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책으로부터 구원받는 의롭게 됨, 죄의 본질로부터 구원받는 성화됨, 그리고 하늘로 들리어 올리는 영화됨.
영화는 의지적인 죄뿐 아니라 무의지적인 죄까지도 사함 받는 상태이다. 또한 무지, 실수, 연약함, 유혹에서마저도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병드는 몸이 병들지 아니하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다시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다.
실수, 고통, 그리고 모든 육체적인 연약함이 중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죽음에 의해서 파괴되어집니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적' 죽음 자체는 부활에 의해서 파괴되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는 그 순간 '성서의 예언이 완성되어 질 것입니다. 죽음은 승리에 삼킨 바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패한 육체는 썩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죽을 몸은 영원함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구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악마의 마지막 이 일(인간성에 기인한 연약성)을 파괴합니다.
웨슬리는 영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어떠한 영혼이라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더불어서 웨슬리는 개인적인 성결 역시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 없이 우리는 영화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성결 없이 우리는 영화에 적합할 수 없다." 영화를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성결에 대한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다. 웨슬리는 그의 생애 마지막 설교 중 하나인 "믿음에 관하여(On Faith)"에서 믿음을 영적 세계와 관련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낙원의 구원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강조한 구원의 현재적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구원의 미래적 초월적 성격을 강조한다.
Ⅵ. 결론
A. 요약
웨슬리는 평생에 걸쳐서 자신이 추구하였던 '참 기독교'를 위협하는 많은 요소들과 논쟁했다. 그 요소들은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적 경향, 자신의 신도회 내의 극단적 열광주의와 당시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던 이신론적 경향들이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말년에 웨슬리는 낭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의 인간 이성의 극대화에 대한 경향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극단들과의 논쟁 속에서 웨슬리가 항상 근거를 두고 힘을 얻었던 신학의 근원은 성서, 특히 신약성서였다. 웨슬리는 그 자신이 신약 학자로서 성서에 계시되어진, 특별히 신약 성서에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경향들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에서 고찰한 죄 이해의 문제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지며 다음과 같은 변천 과정을 가진다.
전형적인 영국 국교회의 아들이었던 초기의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경향은 로마 카톨릭과 신비주의, 영국의 경건주의 그리고 초대 교부들의 저작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타락에 기인한 인간의 현 상황을 철저하게 질병 가운데서 파악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병들어 있는 본성의 치유와 부패한 기질의 정화였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심각한 질병의 치료약은 믿음이다.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덕인 믿음, 사랑, 겸손, 소망을 회복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 또한 인간을 건강과 자유로 회복시키시는 것에 있다. 따라서 초기의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치유자로서의 사역에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자비와 헌신의 활동들로 특징지어지는 훈련된 삶의 방법들을 활용하고 중시하였다. 이점은 당시의 웨슬리가 치유의 과정으로서 '거룩한 삶'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초기 웨슬리에게 나타나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 한계는 비단 웨슬리 자신만의 것이 아닌 당시 영국 국교회의 한계였다. 당시에 영국 국교회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적인 측면보다는 이성주의의 영향 속에서 인간 자신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웨슬리의 죄 이해에 있어서 속죄의 법정적인 측면의 결여와 속죄의 치유적인 측면의 강조가 이 시기의 특징이다.
구원의 확증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기 웨슬리는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하나의 커다란 충격적 체험을 하게 된다. 신대륙의 조지아 선교 후에 모라비안과의 보다 긴밀한 접촉을 통해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 만남으로 웨슬리는 종교 개혁적 전통과 접촉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서 웨슬리는 자신이 고민했던 구원의 확증이 결국은 용서의 확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교 개혁전통과의 만남의 충격 속에 있었던 중기 웨슬리는 속죄의 법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올더스케잇 체험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관심과 죄책에 대한 용서가 올더스케잇 체험 바로 후의 설교들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웨슬리는 구원의 유일한 필수 조건인 믿음이 동의(assentia)에다 심정적인 신뢰(fiducia)를 수반함을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라비안의 정숙주의와 신앙제일주의에 기인한 율법폐기론적 경향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한다. 이점으로 인하여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도 논쟁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동의한 웨슬리는 한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인 죄악성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결책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데 이것은 죄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신자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차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 구원받은 인간은 실질적으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책임을 물으시지 않으시고 자신의 진노를 거두신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인간에게는 가차없이 책임을 물으시고 그를 분노 중에 놓으신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전통적 견해는 웨슬리 평생의 관심사인 '마음과 삶의 성결'의 배양과 상충되는 것으로 정숙주의와 율법폐기론적 경향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으며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팽배했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은총조차도 인간의 실질적 문제인 인간 본성의 타락성을 현실에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고민 중에 있던 웨슬리는 또한 당시의 이신론자인 테일러 박사와의 논쟁 때문에 확고한 원죄론을 펼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전통적인 견해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에 있어서는 종교 개혁적 전통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웨슬리는 보편적 구속(universal redemption)을 믿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의 공로가 만인에게 미치기에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해방되었다. 그러하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범죄의 죄책의 문제와 아담의 죄로부터 기인한 유전되어진 본성의 부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단어보다는 '생래적 죄(inbred sin)', '내재적 죄(inbeing sin)', '타락한 죄악된 본성(corrupt sinful nature)', '육욕의 사람(carnal mind)', '내적 죄(inner sin)', '태생적 죄(birth sin)'등과 같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중기 웨슬리가 씨름하였던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인간 본성의 부패성인 '생래적 죄(inbred sin)'의 문제였다. 또한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적인 목회에 있어서 죄와 관련하여 속죄의 법정적인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이 긴장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 또한 죄의 남음의 문제였다.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성서에 근거해서 죄에 대한 구분을 세밀하게 시도한다. 웨슬리는 죄에 대하여 내적죄와 외적죄,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 죄책과 죄의 힘 그리고 죄의 현실성 등으로 구분하여 논의한다. 이러한 죄의 구분은 모두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과 웨슬리 자신의 신도회 내부의 극단적 열광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모두 웨슬리가 평생을 통해 강조하였던 완전 사랑의 온전한 성화의 현실성을 거부하거나 혹은 오도하여 완전 경험 후에는 중보자 없이 자기 자신의 의(righteousness)만으로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중기 웨슬리는 종교 개혁적 전통의 죄와 속죄에 대한 법정적 이해의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으로 기인한 죄와 속죄의 치유적 특성과 법정적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처한다.
죄와 관련하여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있었던 웨슬리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찰력 있는 은총 이해를 통하여 죄와 속죄의 특성간에 긴장 관계를 해소시킨다. 루터식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적 경향, 극단적 열광주의적 경향들과 지속적으로 논쟁하였던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인 '거룩한 삶'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웨슬리는 1765년부터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인 죄의 문제와 그에 따른 은총 이해와 관련하여 심도 깊은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웨슬리는 은총이 단지 용서만의 의미, 혹은 치유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은총은 타락한 본성 치유의 도구가 된다고 본다. 결국에는 이 은총 안에서 인류는 아담 안에서 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잃은 것 이상의 것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기본적 은총 이해를 가지고 웨슬리는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 속에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아무 가능성도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부어주시는 선재적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속으로 말미암아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졌고 선재적 은총으로 인한 본성적 형상과 정치적인 형상의 부분적인 치유는 형이하학적으로 밖에 될 수 없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확신케 하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부어주기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영적 자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칭의와 신생 이전의 회개인 율법적 회개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확신의 은총 속에 있는 인간은 단지 자범죄의 죄책과 죄악성만을 인식했을 뿐이지 죄책을 용서받은 것도 아니고 타락하고 손상된 본성을 치유받은 것도 아니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의 권능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의 죄책과 죄악성을 인식한 인간은 의인화의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 구원받게 되고 그와 동시에 거듭남의 은총에 의해서 병들어 있는 자신의 본성이 치유되기 시작됨으로 죄의 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 안에는 여전히 내적 죄악성 즉, 죄의 현실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내적 죄악성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경향성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게 된다. 즉 거듭남 후의 기독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내적 죄악성이 치유되어지기 시작하지만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아니기에 성화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환자가 의사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때 그 병의 치유가 더 빠르고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부어주시는 은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온전한 성화를 지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신인 협력(Divine-human cooperation)이 필요한 것이다. 죄의 뿌리인 남아 있는 내적 죄악성의 치유를 위해서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지속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인간에게 부어주셔서 인간의 내적인 죄악성을 온전히 치유하신다. 이 경험이 완전한 사랑의 경험인 온전한 성화의 경험이다. 완전 경험 후의 신자는 그의 심중이 하나님의 성결한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며 기독자를 타락하게 만드는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하지 못한 기질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웨슬리가 말하는 지상에서의 완전은 완전해진 상태로서의 완전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완전이라는 점이다. 영원 속에서 하나님을 향유해가는 과정의 하나로서의 완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완전 사랑을 경험한 신자도 그 자신의 육체적 연약성과 유혹으로 인하여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상실할 수도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보혈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점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토마스 맥스필드와 조지 벨과 같은 극단적 열광주의자들이었다.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경험한 기독자들도 그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성에 기인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의지적인 위반을 하게 된다. 즉 소위 말하는 무의지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 이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벗어나 죄의 현실성 자체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이런 구원의 과정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속죄의 보혈과 의의 덧임혀짐과 심겨짐이다. 우리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과 의와 믿음은 선재적 은총부터 영화까지의 전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B. 종합 분석
우리가 흔히 웨슬리를 연구할 때 당연히 여기지만 동시에 간과하고 넘어가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웨슬리가 부흥운동가이며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동시에 신약학자였다라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일평생 성서, 특히 신약성서 속에서 그가 추구하였던 '참 기독교'를 찾고자 했으며 그가 걸어갔던 '참 기독교'에 대한 여정을 방해하였던 많은 오류들에 대해 성서가 증언하는 참 진리 가운데서 해결점을 찾고자 했다. 웨슬리의 죄 이해 또한 이러한 기본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의 죄 이해는 철저하게 성서에 근거해 있으며 그의 은총 이해와 관련된 구원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그가 한 평생 '참 기독교'의 지표로 삼았던 성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자의 완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그 방법(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천국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는 한 책에 그 사실을 쓰셨습니다. 오 그 책을 저에게 주십시오! 어떤 값으로 제가 그 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를 위한 풍부한 지식이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게 하십시오. 저는 여기서(성서 속에서) 인간의 분주한 방법과 멀어집니다. 저는 홀로 앉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임재 속에서 저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성서를 열어 읽습니다.
이것은(기독자의 완전) 제가 1725년부터 줄곧 목표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성경 외에는 비교적 아무 책도 중요시하지 않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고자 했던 1730년부터는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역사적인 고찰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진 웨슬리의 죄 이해에 대한 종합 분석 및 전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웨슬리의 죄 이해는 철저하게 성서의 죄 이해, 특히 신약의 죄 이해에 근거해 있다. 신약성서의 죄 이해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보다는 죄의 특성으로서의 법정적인 면과 치유적인 면의 극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죄를 의미하는 어근이 여덟 개나 신약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웨슬리도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데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목회적인 상황 속에서 유동적인 죄의 특성과 구분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신과 자신의 감리교 운동이 직면한 위험요소들에 대한 대응과 관련이 있다. 즉 웨슬리는 자신의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상황에 따라서 죄 이해를 하고 있다.
초기의 웨슬리는 속죄의 법정적인 면에는 거의 무지하였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속죄의 치유적 특성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모라비안들의 순간적인 회심과 연관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충격은 웨슬리로 하여금 속죄의 법정적 특성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극단적 강조는 '거룩한 삶'이라는 놓칠 수 없는 주제를 간과하게 하며 종교개혁의 전통적 해결책은 '신자의 남은 죄'에 대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못하기에 중기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이라는 기독교 신학과 삶의 두 가지 축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조화의 노력 속에서 죄에 대한 복잡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미묘한 구분과 설명, 그리고 그에 따른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총의 역할들을 숙고한다. 따라서, 중기 웨슬리의 죄 이해는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1765년 이후의 보다 세분화되어지고 명확해진 은총 이해는 웨슬리로 하여금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게 한다. 이 시기의 웨슬리는 용서로서의 은총 이해를 치유의 권능이라는 보다 큰 주제에 통합시킨다. 선재적 은총은 용서와 치유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확신케하는 은총은 영적 자각, 의인화의 은총은 용서, 거듭남과 과정적 성화, 온전한 성화 그리고 영화의 은총은 치유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죄와 은총의 관계 이해의 역동성은 서방교회의 전통과 동방교회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의 죄 이해가 우선적으로 성서를 근간으로 형성되어졌음을 보여준다.
둘째, 웨슬리는 악의 원인과 인간 타락의 원인을 의지의 자유의 오용으로 보고 있다. 악의 원인을 초월적인 존재의 자유에 대한 오용으로 본 점은 서방교회 전통과 다른 동방 교회적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첫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로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연적 인간(natural human)'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는 웨슬리의 주장은 종교 개혁의 주장과 전적으로 동일한 주장이다. 반면에 이점은 동방 교회의 전통과는 다른 인간 이해이다.
셋째, 원죄의 유전 문제에 있어서 웨슬리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초기의 웨슬리는 생물학적 전이론의 입장을, 중기의 웨슬리는 영혼 창조론적 입장을, 후기의 웨슬리는 영혼 유전 전이설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리차드 톰슨이 웨슬리에게 원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면 죄에서 완전히 자유해진 양친으로부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원죄의 유전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전이론은 그의 완전 교리와 상충되는 점을 노출시켰다. 그리고 중기의 웨슬리가 염두에 두었던 영혼 창조론적인 입장은 '죄된 육체'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혼 창조론적인 입장은 죄의 자리를 육체에 두었기에 이 입장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후기의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 문제에 있어서 '죄악된 육체'의 개념과 무관하며 죄의 가능성을 영혼에 두는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이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은 웨슬리가 일관되게 주장한 지상에서의 상대적인 완전 가능성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입장이었다.
넷째, 죄와 관련된 웨슬리의 은총 이해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의 우선성이 특징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재적 은총으로 아무 능력이 없었던 자연적 인간에게 가능성이 생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속(universal redemption)으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기인한 원죄의 죄책이 사해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적 인간(natural man)'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논리적인 추상이며 인간에게 남아 있는 실질적인 문제는 자범죄에 대한 죄책과 인간 본성의 타락과 부패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용어보다는 '생래적 죄(inbred sin)'와 '내재적 죄(inbeing sin)'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생래적 죄'와 자범죄의 죄책에 대해서 인간 자체만의 노력으로서는 철저하게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은총(free grace)에 힘입을 때에만 인간에게 가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의지에 자유의 회복이라든가 성화의 과정 속에서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회복은 모두 은총에 의한 것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조차도 모두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웨슬리는 죄의 자리를 육체에 두지 않고 영혼에 둔다. 웨슬리는 바울의 몸에 대한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연약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몸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연약성 자체가 악이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전통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 지상에서의 완전이 불가능하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기 이전에는 죄에 눌려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보았다. 반면에 웨슬리는 그와는 반대되는 개념, 즉 인간의 육체적인 연약성은 악이나 죄가 아니고 단지 악과 죄에 책임이 있는 것은 영혼이라는 사실을 성서 속에서 찾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풍성한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이 보다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현실에서의 구원의 여정에 참여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사실이 웨슬리로 하여금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으로서의 완전이 지상에서 가능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게 하였다. 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믿음에 의해 가능한 현실의 삶 속에서 약속되어진 특권이다.
여섯째, 웨슬리의 죄의 구분과 정의는 종교 개혁의 구원 이해보다 더욱 세밀한 구원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웨슬리는 죄책(guilt), 죄의 힘(power of sin), 죄의 현실성(being of sin)으로 죄를 나누어 설명함으로서 행위로서의 죄와 상태로서의 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내적 죄와 외적 죄,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를 말하고 있다. 특히 죄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웨슬리는 의지적인 죄를 적절한 의미의 죄,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을 소위 부적절한 의미의 죄로 설명한다. 종교 개혁의 죄 이해는 죄책과 관련해서 인간의 연약성에 기인한 죄, 즉 무의지적인 죄를 의지적인 죄와 동일한 견지에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죄에 눌려 살 수 밖에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신자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 우울에 빠지게 하였다. 반면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미묘한 구분은 신자로 하여금 보다 긍정적으로 구원의 순례에 대한 과정을 지향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웨슬리의 죄 이해의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속죄의 보혈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신자는 진정한 의미의 성도가 되며 지상에서 주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무의지적인 죄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서 보자면 빗나간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며,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도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상실 할 수 있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걸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초대교부, 경건주의와 신비 영성가들의 영향으로 평생을 죄와 유혹과 싸움하는 자기 검증의 삶을 살았다. 하이젠레이터가 지적한 것처럼 옥스퍼드 시절의 웨슬리에게 있어서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의 영신수련과 같은 자기 검증의 영적 분투가 그의 삶에 중심이었다. 이런 영적인 분투가 비단 초기 웨슬리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웨슬리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목회와 삶의 지표로 삼았던 '참 기독교'를 찾는 여정에서 자기 검증적인 영성 생활의 중요함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서의 적용을 통해 실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웨슬리는 자신의 감리교 운동에서 은총의 수단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이점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갑작스런 양적 증가와 더불어 질적인 하락의 현실에 처해 있으며 아직까지 내세적이며 동시에 현실에서의 기복적 신앙 강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풍사건, 옷로비 의혹 사건, 근래의 일련의 신용금고 사건들의 중심에는 항상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알려준다. 현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검증 없이 단지 내세적이고 기복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기 검증 가운데서 내적 죄악성 및 외적 유혹과의 싸움을 중시하는 초대 교회의 수도 운동과 중세의 신비 영성, 종교 개혁 후의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준 수도주의(semi-monastic)와 같은 교회 전통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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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치유의 영으로서의 은총과 죄의 치유
1. 거듭남의 은총과 죄의 치유
전형적인 영국 국교회의 신학자들인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와 란셀롯 엔드류(Lancelot Andrewes)와의 비교를 통해 웨슬리의 의인화에 대한 교리 연구를 학위 논문으로 쓴 발커(Walker)박사는 의인화를 용서와 참여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신앙 의인화'에, 관계적이며 치유적인 면과 주관적이며 법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발커 박사는 "믿음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라는 설교에서 말한 의인화의 결과 혹은 특징으로서 죄책에 대한 용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회복, 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죽은 영혼의 회복과 동시에 치유자로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상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에서 웨슬리의 의인화에 관한 교리를 이해하고 있다. 웨슬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중에서도 의인화와 거듭남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웨슬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위대한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이라는 설교에서 의인화와 거듭남의 관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칭의와 거듭남이 시점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둘은 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요, 대단히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단지 관계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우리를 새로 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전자로 말미암아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관계를 변화시키고 그로 인하여 원수였던 우리가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의 깊은 속이 변화되어 그로 인하여 죄인이었던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호의에,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우리를 복귀시켜 줍니다. 전자는 죄책을 제거하는 일이요, 후자는 죄의 힘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점에서는 함께 결합되어 있지만 전연 별개의 성질의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를 처음으로 설교했던 1738년 직후에 웨슬리는 넓은 의미에서 의인화 속에 죄사함과 거듭남 그리고 성화를 다 포함시켰던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웨슬리는 의인화와 거듭남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칭의와 거듭남, 그리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양자됨이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발생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칭의가 거듭남에 앞서며 칭의와 거듭남 후에 신자는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 이것은 결국 한 사건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죄책을 용서받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죄책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adopted)되어 하나님의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다. 조종남 박사는 거듭남과 양자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reconciliation)의 측면으로서 의인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의인화는 우리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우리를 위한(for us) 위대한 사역이며, 거듭남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우리 안에서(in us)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시간적인 순서로 본다면,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우선되지 않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순간, 역시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고의 순서로 본다면, 말의 표현에 있어서 칭의가 거듭남에 앞서는 것입니다.
의인화가 상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면,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외적 관계에서 죄책의 해결을 통하여 지금까지의 원수 관계였던 것을 올바른 관계로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모든 덕의 열매들을 심어주심으로서 "은총 속에서 자라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거듭남(New Birth)"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거듭남의 근거로서 "우리 본성의 완전한 타락"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완전히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거듭남을 필요로 한다. 의인화와 거듭남을 경험한 하나님의 양자된 기독자는 주님의 사랑의 빛을 보고, 주님의 목소리를 내적으로 들으며,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은총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위대한 변화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거듭남의 시점인 칭의의 순간에 모든 그리스도의 덕으로 씨앗이 영혼 속에 심겨지며 그때부터 신자는 점진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은총 속에서 성장하게 된다. 즉 거듭남의 시점은 도덕적 형상 회복의 시점이기에 거듭남 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죽어있던 신자의 영적 감각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한 영적 감각을 살아나게 하는 거듭남의 본질은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적인 변화이다. 거듭남이 전적인 변화이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의 영이 전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전적인 변화는 성화의 완전성 즉, 거듭남에 완전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시작으로서의 철저함과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남이라는 초자연적인 변화는 바로 '성결과 성화의 입구이며 일부분'이다. 즉 거듭남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으로서의 성령의 점진적인 역사가 시작되며 이 거듭나게 하시는 영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내적 죄악성을 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결은 선재적인 은총이나 확신의 은총이 아닌 거듭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웨슬리는 거듭남을 내적 성결로 보았으며 그 특성을 순간적이고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거듭남 이후 성화의 외적인 성결의 측면 즉, 하나님의 지속적인 성화의 영을 받기에 합당하게 하는 자비와 경건이라는 인간의 응답적인 행위를 포함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웨슬리의 구원론의 큰 특징을 알 수가 있다. 성화는 과정성과 순간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성화의 과정 속에 포함되어지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성결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서 거듭남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듭남의 표징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것들 중에 거듭남의 표징으로서의 "믿음은 단지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믿음 혹은 동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 이해의 행위로서의 동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내적 경향(disposition)"을 말한다. 이러한 내적 변화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에는 열매가 있다. 그것은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타나심으로 오는 평안이다.
이 믿음의 즉각적이고도 항상 있어야하는 열매, 곧 믿음과 잠시라도 결코 나눠질 수 없는 열매는 바로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첫째로는 모든 외적인 죄를 이기는 힘인데, 모든 악한 말과 행실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도록"(히브리 9:14) 어디에서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내적인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믿음은 모든 불경건한 정욕과 성정(性情)으로부터 마음을 정결케 하기 때문입니다. ... 너희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표징인 소망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오는 결과로서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확신이다. 결국 이 소망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확신의 교리와 동일한 것이다. 세 번째 표징인 사랑은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능해진다. 사랑의 은총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의지와 계명에 순응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은총은 하나님의 생명을 죽은 영에 불어 넣어주시는 은총이며, 병든 인간의 본성을 정화시키고 치유하시는 은총이다. 갱신과 관련된 이러한 성령의 권능은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을 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본성의 전적인 타락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향하게 했다면, 거듭남의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순종과 성결을 향하게 한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은총을 통해서 거듭난 신자는 타락한 본성이 치유되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영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응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의 심령이 실질적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 있게 된다.
당신의 병을 아십시오! 그리고 이 병의 치료법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나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야 합니다. 날 때부터 당신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온전히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모두 죽었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죄 중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삶의 원리, 곧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주셨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병이 치료되고, 모든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을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의인과 거듭남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또한 심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회복되어져 마음의 습관적인 기질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러한 마음의 습관적인 기질의 변화는 의도적인 죄와 외적인 죄를 짓지 않게 한다. 그러나 성서의 예를 보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임에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신자가 자범죄에 빠지는 이유는 거듭난 자의 마음속에 비록 지배는 받지 않지만 내적 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도 모든 악의 씨앗인 생래적인 죄, 악의 경향성, 본성의 타락성이 남아 있기에 죄를 지을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된다. 거듭난 후의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어린이로서 비록 성화 되었을지라도 부분적으로 성화된 것이기에 온전한 성화를 향해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육, 세상, 악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갱신되어지고 깨끗해지며 정결해지고 성화 되었을지라도 동시에 우리는 아직 온전히 갱신되어지고 온전히 깨끗해지고 온전히 정결해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육과 악한 성질이(비록 정복은 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어 영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욱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움에 있어서 모든 근면함을 사용합시다. 그 만큼 더욱 우리는 안에 있는 원수에 대항하여 깨어 기도하되 간절히 합시다.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우리가 혈과 육과 싸우고, 또한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울지라도 이 모든 것을 다 이룩하면서 이 악한 세대에서 견디어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십시다.
2. 성화의 은총과 죄의 치유
거듭남 후에 기독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회복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기에 성결의 과정이 필요하다. 거듭남은 지속적 성화라는 보다 큰 과정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성화는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회복 과정이다. 웨슬리는 감리교 역사에 있어서 성화의 교리를 감리교 교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그래서 그는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고,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요, 성화는 종교 자체(religion itself)라고까지 말한다. 치유와 정화의 성화 은총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한 회복을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선재적 은총이 양심, 자유의지와 같은 인간 능력 회복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면 성화의 은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Divine-human cooperation)을 요청하는 거부 가능한 은총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기에 여러분이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아니하면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이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 둘째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일하시니 그러므로 여러분도 일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고후 6:1)이 되어야만 합니다(이것이 사도 바울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그만 두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되 "무릇 있는 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이미 있는 은총을 키우지 않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깁니다."(마태 25: 29)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칙입니다. 이러한 교리와는 반대되는 쪽으로 기울기를 좋아하였던 성 어거스틴은 심지어 Qui fecit nos sine salvabit nos sine nobis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인간 없이 인간을 만드신 분께서는 인간 없이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적 협력을 중시했다. 그리고 성화의 은총 역시 하나님의 현재적 선물이기에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은총을 부어주시는 일을 중단하신다. 따라서 웨슬리는 "완전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성결이 유지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총이 크면 클수록 이 은총을 활용해야할 의무가 더욱더 커지게 되기 때문에 결코 머물러 쉴 수가 없게 된다. 성화란 타락한 피조물이 창조주와 교제 가능한 실존으로 회복되는 것이며 원창조시의 청지기로서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결을 증가시킴으로서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더욱 더 강건하고 통전적으로 만들어 가는 삶이 성화이다.
칭의 후에 자범죄와 죄책에서 자유하게 되고, 거듭남의 순간 내적 죄악성이 파괴되기 시작함으로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내적 죄악성이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들 자신이 이따금씩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분노, 탐심, 불신앙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이런 내적 죄악성의 확신이 성령으로 하여금 신자의 마음에 도덕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구현을 시도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도덕법) 여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용법(이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마음과 삶 속에 남아있는 죄를 확신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해서 그의 피가 우리를 매순간 정화시킵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우리의 지성(Head)으로부터 힘을 이끌어냅니다. 세 번째로 그것은 우리가 그(그리스도)의 약속들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은총 위에 은총을 수여 받는 것과 그것이 명령한 것이지만 아직 우리가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굳건히 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그림자인 성령과 도덕법을 통해서만이 신자들은 자신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을 볼 수 있고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남아 있는 내적 부패성 혹은 죄악성으로 인하여 믿음을 상실 할 수 있고, 타락의 경향성에 굴복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다른 사람처럼 자범죄를 범할 수도 있다. 따라서, 웨슬리는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 우리의 품속에 누워 있는 드릴라에 대항하여, 악한 본성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신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모든 죄악성으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된다. 우리 영혼을 사랑하시는 위대한 의사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서 성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구원의 출발일 뿐 아니라 구원의 계속적인 성장에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로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완성된다. 따라서 온전한 성화를 죽기 전에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계속적인 회개와 믿음이 요청된다.
우리가 칭의 후에도 우리의 죄과(罪過, demerit)-어떤 의미에서는 죄책이라 할 수 있겠지만-를 깊이 깨닫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대속하시는 보혈의 참 가치를 볼 수 있게 되며, 이 보혈은 우리가 전에 필요하였던 것과 같이 지금 의롭다 하심을 입은 후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는 이 언약의 보혈을 단지 하나의 보통 것이라고, 즉 우리의 과거의 모든 죄는 도말된 것을 알고, 지금은 별로 필요치 않은 어떤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과 생활이 이와 같이 깨끗하지 않다면, 여기에는 우리와 순간순간 관계되어 마침내는 우리들로 하여금 순간순간 새로운 정죄를 받게끔 하는 어떤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칭의 후에도 필요한 지속적인 회개가 바로 복음적 회개로서의 신자의 회개이다. 복음적인 회개는 은총 안에서의 성장과 지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죄로부터 성결로의 마음의 변화인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칭의 후의 지속적인 회개는 남아 있는 죄에 대하여 깨닫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고집, 우상숭배, 불신앙이 남아 있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제사장과 왕으로 삼아 동행하지 않을 때의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온전한 성화 이전에 필요한 회개(복음적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성화의 과정에 필요한 일종의 인간의 응답적 선행(good works)인 경건의 선행(all works of piety)과 자비의 선행(all works of mercy)이다. 먼저 경건의 선행은 은총의 수단들을 말하는 것으로 공적 기도(대중기도), 가족기도, 골방기도, 주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 성경 말씀을 듣고 읽으며 명상하면서 하는 성경 연구, 또는 몸의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하는 금식, 절제 등을 말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은총의 수단은 신자들에게 성화의 은총을 전달하는 공식적 매개체이었기에 그는 은총의 수단을 통해 그를 따르는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기독자의 훈련을 시켰다. 또한 진정한 기독자의 삶 즉,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가 걸으셨던 그 길을 그대로 걷도록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이것은 웨슬리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철저하게 목회적이며 실천적인 면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김진두 박사는 웨슬리의 은혜의 방편을 웨슬리 목회 자체로 보았으며 웨슬리가 교회를 이 은혜의 방편을 실행하는 거룩한 기구로 보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온전한 성화 이전에 필요한 회개의 두 번째 열매는 자비의 선행이다. 이 자비의 선행 역시 "경건의 열매와 마찬가지로 은총의 참된 수단"으로 죄인들의 일시적인 요구와 영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웨슬리는 또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는 사랑의 종노릇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방문하고,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며,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일들은 사람의 육과 영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나그네를 대접하며, 감옥에 갇힌 자나 병든 자나 여러 가지로 어려움 있는 자들을 찾아보는 일들입니다. 또한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어리석은 죄인을 각성시키며, 뜨뜻미지근한 자에게 활기를 주며, 흔들리는 자를 견고케 하며, 마음이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시험받는 자를 구조하는 것 혹은 죽어 가는 영혼들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방법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과 같은 것들에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며, 온전한 구원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명하사 완전한 구원을 기다리게 하시는 길입니다.
자비의 선행이라는 성화의 측면은 성화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면을 보여준다.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함께 1739년에 출판한『찬미와 성시집』(Hymns and Sacred Poems)의 머리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지 않은 종교를 모른다. 사회적 성결 아닌 성결을 모른다"라고 하였고 또 산상 수훈에 관한 설교에서는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며 단지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내적 성결에 함몰어버린 신비주의자들과 모라비안들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사랑을 활동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으로 더불어 자신의 활동적인 관계성 안에서 대응하는 변화 없이는 '내면적인 사랑' 또한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사회적 성결, 즉 이웃 사랑의 실천을 중시했다는 예들은 그의 인쇄된 설교문 151편 중 13편이 산상수훈 강해 설교였고, 브리스톨에서 처음 옥외 설교할 때(1739) 예수님이 옥외 산상에서 설교하셨듯이 웨슬리도 옥외 탄광 지역에서 산상수훈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김홍기 박사는 루터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의 교과서가 로마서라면, 웨슬리에게는 산상수훈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때, 평신도 설교가들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개혁하는 것(to reform the nation), 특별히 교회를 개혁하는 것, 그리고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을 널리 퍼트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런 성화의 사회적인 특성에 집중하여 구제 기금 조성과 구제 사업,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고아원과 구빈원(The Poor House) 설립 운영, 교도소 목회, 병자 간병인과 무료 진료소 설립 운영,『원시 의학』(Primitive physics)의 저술, 노예 해방 운동과 같은 박애 운동을 펼쳤으며, 킹스우드에 학교를 세움으로 교육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성화 신학이 구체적이며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특징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칭의 후에 회개(복음적 회개, 신자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다름 아닌 성결의 삶,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것들이 완전한 구원(full salvation)에 있어서 믿음과 같은 의미로 혹은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구분하고 있다. 복음적 회개와 그 열매가 우리의 성화를 위해 비록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화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단지 믿음뿐이다. 다소간의 회개를 통해서 그 회개의 열매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믿음으로 성화(온전한 성화)되는 것이다.
신자의 성결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점진적인 성화의 은총을 통해 죄인을 치료하시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는 신자의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내적 죄악성을 소멸시키시며 타락하고 병들어 있는 본성을 치유시키시고 손상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큰 의무가 발생하게 된다. 선재적 은총으로부터 확신의 은총, 의인화의 은총, 거듭남의 은총으로 점점 더 은총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부요하신 은총의 역사를 더욱 풍요하게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더 많은 은총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수 있는 우리 자신의 그릇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즉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의 내적 성결(하나님 사랑)과 사회적인 성화(이웃 사랑)을 증가 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병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병을 낫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병이 빨리 치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치유의 영이 우리의 본성을 치유하실 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응답적인 노력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의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온전한 성화(완전)의 은총과 죄의 치유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를 위해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완전을 이루는 것은 아님을 말했다.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온전한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단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전적으로 성결시킬 수 있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사랑 안에서 완전해 지는 우리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 필요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성화에 필요한 믿음은 성서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대한 신적인 증거와 확신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할 수 있으며, 이 약속을 하나님께서 현재 이행하시고 있다는 신적인 증거와 확신이다. 따라서 성화가 과정적이라면 온전한 성화 즉 완전의 체험은 순간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가 이해한 완전의 상태는 완전해진 완전(perfectio; perfected perfection), 즉 성취되어진 상태로서의 완전인 천사 같은 완전(angelic perfection)이 아니라 과정적인 완전(teleiotes; perfecting perfection)으로서 "모든 사랑의 충만을 위한 끝이 없는 열망"이다. 완전 경험은 순간적이지만 그 순간 전과 후는 점진적이다. 바로 이점이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반대자들과 심지어는 추종자들까지 웨슬리가 말하고 있는 완전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웨슬리는 완전을 경험한 이들도 무지로 인해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고, 실수, 연약함과 유혹에 있어서 자유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땅에서의 완전은 상대적인 완전으로 절대적인 완전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오히려 이러한 육체적 연약함, 아픔,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강해지고 완전해짐을 경험한다. 이러한 무지, 연약, 실수와 유혹으로부터도 자유함을 얻고, 무의식적인 죄에서도 성결함을 받는 것은 죽은 후 영화의 단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완전 사랑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온전한 성화에 이른 성도도 의식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웨슬리의 목회 전 기간에 걸쳐서 그의 사상 중에 가장 일관된 단일한 주제는 '거룩한 생활' 즉 '완전'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완전은 성결한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상태 속에서의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 사랑이며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이다. 그리고 웨슬리가 기독자의 완전을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아적인 기독자(babes in christ)'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의 기독자(adult christian)'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아적 기독자'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기에 죄를 범하지 않을 정도로는 완전하다고 웨슬리는 그의 설교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에서 말하고 있다.
웨슬리가 말하는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는 완전의 소극적인 의미로서 기독자를 타락(backsliding)하게 만드는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하지 못한 기질들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즉 죄 없음의 완전 성결 상태란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며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완전을 경험한 사람은 성령의 온전한 성화의 은총의 현존을 통해 그의 생래적인 죄(inbred sin)로부터 정화되어진다. 그의 타락한 본성이 완전히 치유되어진 상태에 있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완전 경험을 한 성도의 죄의 뿌리까지 뽑히는 것을 뜻하며, 행위적인 죄들뿐 아니라 내적인 죄까지도 그에게서 근절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죄의 지배를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죄가 남아 있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 20) 이 말씀은 외적인 죄와 함께 내적인 죄에도 구원받은 것을 명백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소극적으로도 표현되었고 또한 적극적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는 나의 악한 성질 곧 죄의 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과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분리시킬 수 없도록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정결하여질 것입니다. 이는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신 사람은 그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케 하기"(요한 일 3: 3)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겸손하였기에 그는 교만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뜻과 욕망으로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그의 사업을 이루시는데 전심하려 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냄(분노)으로부터 깨끗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시고 점잖으시며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 허물에 대하여는 노하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셨으나 허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는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 일에 대하여는 연민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완전한 이들이여! 가서 이와 같이 행하십시오. 분노하더라도 범죄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는 분노를 느낄지라도 거역하는 사람만은 사랑하고 따뜻하게 동정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외적인 죄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죄로부터도 구원하십니다. 악한 생각으로부터 그리고 악한 성품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완전을 경험한 사람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아무런 제약도 거리낌도 없게 되고 그의 영혼에 이러한 사랑과 반대되는 어떤 나쁜 기질도 남아있지 않게 됨으로 그의 모든 생각들과 언어들, 그리고 행동들은 온전한 사랑에 의해 지배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완전의 적극적인 의미인 완전 사랑이다.
이런 상대적인 완전이 지상에서 가능한 것은 아르미니우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은총의 낙관주의(optimism of grace)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그 크신 은총으로 가능하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온전한 성화의 상태도 역시 정착된 상태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상태이다. 내적인 죄까지도 사함 받는 것이 완전이지만, 웨슬리는 완전을 경험한 성도도 다시 죄 중에 빠질 수 있음을 그의 목회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유지하는 것이 그것을 얻는 것보다 더욱 어려우며, 세 명중에 하나도 이것을 하기 힘들며 이것은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 은총의 상실의 가능성 때문에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신자라도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마음의 순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여전히 완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도 필요한데 이것은 단지 생래적 죄와 실제적 죄가 그들에게 다시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만, 단점, 판단과 실행에 있어서의 실수, 여러 가지 모양의 결점들을 위한 속죄"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웨슬리는 혹여 은총의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교만, 열광주의, 율법폐기론, 태만, 분열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모든 일에 남의 모범이 될 것을 충고하고 있다. 특히 웨슬리는 결국 생래적 죄와 외적 죄의 재출현 가능성과 유혹, 혹은 인간의 연약성으로 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 등으로 온전한 성화 은총 상실의 가능성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지속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웨슬리가 죄없는 완전이라는 구절을 사용했을 때, 그것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간에 사랑의 완전한 이중 계명의 어떠한 위반으로부터도 자유하다는 의미에서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완전을 죄로부터의 구원의 의미에서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완전이 가능한 것은 웨슬리가 이해한 죄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가능하다. 그것은 웨슬리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죄로 보기에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4. 영화의 은총과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mortification)
웨슬리는 죄의 치유적 강조점과 일관해서 기독자들이 죄의 본질로부터의 자유의 그 궁극적 상태인 영화 되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는 마음과 삶의 성결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웨슬리가 죽음 이전에 전적으로 성화되었던 이들의 최종 의인화(Final Justification)를 제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은총 안에서 신실하게 장성한 자들 모두가 어느 정도 종말(eschaton) 이전에 기독자의 완전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의 반영이다. 콜린스는 구속의 순서에서 웨슬리가 목적한 것은 완전이라기 보다는 구원의 영원한 목적 즉,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거쳐 온전한 성화를 넘어서서 영원으로의 구속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흥미로운 주장 중에 하나는 완전히 적합치 못한 이들은 그들이 최종적인 종말을 기다리는 동안 낙원에서 '원숙의 과정(ripen)'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현재 아브라함의 품에, 낙원에 있는 이들-태초부터 지금까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진 모든 거룩한 영혼들은 세상의 근본으로부터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그 왕국을 받기 전에 끊임없이 하늘에 적합하도록 원숙되어지고 있고, 영속적으로 더욱더 거룩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으로서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 전통은 이 낙원을 새 하늘과 새 땅의 궁극적 상태를 단지 기다리는 축복된 휴식을 의미한 반면 웨슬리는 그곳을 은총 속에서의 성장의 장소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 웨슬리는 완전이란 낙원의 상태를 뛰어넘어 은총 속에서 영원으로의 성장을 의미하였다.
지상에서 경험되어지는 완전은 상대적이지만, 천상에서 경험되는 영화는 절대적 완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영화라는 구원의 마지막 단계는 종말론적인 의미와 연관이 있다. 그런데 의인화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성화는 죄의 본질로부터 구원이라면 영화는 다름 아닌 죄의 현실성으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는 그가 의롭게 한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들을 빛의 성도들의 상속자들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적합하게 한 그는 그들에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위해 준비되었던 그 왕국을 주십니다.
당신은 마지막 날에 누구의 의로 서실 것입니까? - 누구의 공덕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 덕택이라고 대답합니다. 단지 그의 공덕만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즉 죄책으로부터 구원받는 의롭게 됨, 죄의 본질로부터 구원받는 성화됨, 그리고 하늘로 들리어 올리는 영화됨.
영화는 의지적인 죄뿐 아니라 무의지적인 죄까지도 사함 받는 상태이다. 또한 무지, 실수, 연약함, 유혹에서마저도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병드는 몸이 병들지 아니하는 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처럼 다시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이다.
실수, 고통, 그리고 모든 육체적인 연약함이 중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죽음에 의해서 파괴되어집니다. 그리고 인간의 '최후의 적' 죽음 자체는 부활에 의해서 파괴되어 질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는 그 순간 '성서의 예언이 완성되어 질 것입니다. 죽음은 승리에 삼킨 바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패한 육체는 썩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죽을 몸은 영원함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의 구름 속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악마의 마지막 이 일(인간성에 기인한 연약성)을 파괴합니다.
웨슬리는 영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어떠한 영혼이라도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더불어서 웨슬리는 개인적인 성결 역시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 없이 우리는 영화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성결 없이 우리는 영화에 적합할 수 없다." 영화를 위해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성결에 대한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다. 웨슬리는 그의 생애 마지막 설교 중 하나인 "믿음에 관하여(On Faith)"에서 믿음을 영적 세계와 관련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낙원의 구원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에서 강조한 구원의 현재적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구원의 미래적 초월적 성격을 강조한다.
Ⅵ. 결론
A. 요약
웨슬리는 평생에 걸쳐서 자신이 추구하였던 '참 기독교'를 위협하는 많은 요소들과 논쟁했다. 그 요소들은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적 경향, 자신의 신도회 내의 극단적 열광주의와 당시 영국 사회 전반에 걸쳐 퍼져있던 이신론적 경향들이었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말년에 웨슬리는 낭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의 인간 이성의 극대화에 대한 경향을 경계하였다. 이러한 극단들과의 논쟁 속에서 웨슬리가 항상 근거를 두고 힘을 얻었던 신학의 근원은 성서, 특히 신약성서였다. 웨슬리는 그 자신이 신약 학자로서 성서에 계시되어진, 특별히 신약 성서에서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경향들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에서 고찰한 죄 이해의 문제도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지며 다음과 같은 변천 과정을 가진다.
전형적인 영국 국교회의 아들이었던 초기의 웨슬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경향은 로마 카톨릭과 신비주의, 영국의 경건주의 그리고 초대 교부들의 저작들이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타락에 기인한 인간의 현 상황을 철저하게 질병 가운데서 파악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병들어 있는 본성의 치유와 부패한 기질의 정화였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심각한 질병의 치료약은 믿음이다. 인간은 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덕인 믿음, 사랑, 겸손, 소망을 회복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 또한 인간을 건강과 자유로 회복시키시는 것에 있다. 따라서 초기의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치유자로서의 사역에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자비와 헌신의 활동들로 특징지어지는 훈련된 삶의 방법들을 활용하고 중시하였다. 이점은 당시의 웨슬리가 치유의 과정으로서 '거룩한 삶'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초기 웨슬리에게 나타나는 한계를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 한계는 비단 웨슬리 자신만의 것이 아닌 당시 영국 국교회의 한계였다. 당시에 영국 국교회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적인 측면보다는 이성주의의 영향 속에서 인간 자신의 실질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웨슬리의 죄 이해에 있어서 속죄의 법정적인 측면의 결여와 속죄의 치유적인 측면의 강조가 이 시기의 특징이다.
구원의 확증의 문제로 고민하던 중기 웨슬리는 올더스케잇 거리에서 하나의 커다란 충격적 체험을 하게 된다. 신대륙의 조지아 선교 후에 모라비안과의 보다 긴밀한 접촉을 통해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다. 이 만남으로 웨슬리는 종교 개혁적 전통과 접촉하게 된다. 그들을 통해서 웨슬리는 자신이 고민했던 구원의 확증이 결국은 용서의 확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종교 개혁전통과의 만남의 충격 속에 있었던 중기 웨슬리는 속죄의 법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올더스케잇 체험 이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관심과 죄책에 대한 용서가 올더스케잇 체험 바로 후의 설교들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웨슬리는 구원의 유일한 필수 조건인 믿음이 동의(assentia)에다 심정적인 신뢰(fiducia)를 수반함을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라비안의 정숙주의와 신앙제일주의에 기인한 율법폐기론적 경향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게 한다. 이점으로 인하여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도 논쟁하게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동의한 웨슬리는 한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인 죄악성의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결책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데 이것은 죄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신자나 불신자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차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 있다. 구원받은 인간은 실질적으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책임을 물으시지 않으시고 자신의 진노를 거두신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인간에게는 가차없이 책임을 물으시고 그를 분노 중에 놓으신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전통적 견해는 웨슬리 평생의 관심사인 '마음과 삶의 성결'의 배양과 상충되는 것으로 정숙주의와 율법폐기론적 경향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으며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팽배했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은총조차도 인간의 실질적 문제인 인간 본성의 타락성을 현실에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심한다.
이러한 고민 중에 있던 웨슬리는 또한 당시의 이신론자인 테일러 박사와의 논쟁 때문에 확고한 원죄론을 펼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전통적인 견해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에 있어서는 종교 개혁적 전통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웨슬리는 보편적 구속(universal redemption)을 믿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의 공로가 만인에게 미치기에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해방되었다. 그러하기에 인간에게 있어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범죄의 죄책의 문제와 아담의 죄로부터 기인한 유전되어진 본성의 부패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단어보다는 '생래적 죄(inbred sin)', '내재적 죄(inbeing sin)', '타락한 죄악된 본성(corrupt sinful nature)', '육욕의 사람(carnal mind)', '내적 죄(inner sin)', '태생적 죄(birth sin)'등과 같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중기 웨슬리가 씨름하였던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인간 본성의 부패성인 '생래적 죄(inbred sin)'의 문제였다. 또한 웨슬리의 신학과 실천적인 목회에 있어서 죄와 관련하여 속죄의 법정적인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이 긴장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실 또한 죄의 남음의 문제였다.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성서에 근거해서 죄에 대한 구분을 세밀하게 시도한다. 웨슬리는 죄에 대하여 내적죄와 외적죄,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 죄책과 죄의 힘 그리고 죄의 현실성 등으로 구분하여 논의한다. 이러한 죄의 구분은 모두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과 웨슬리 자신의 신도회 내부의 극단적 열광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모두 웨슬리가 평생을 통해 강조하였던 완전 사랑의 온전한 성화의 현실성을 거부하거나 혹은 오도하여 완전 경험 후에는 중보자 없이 자기 자신의 의(righteousness)만으로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중기 웨슬리는 종교 개혁적 전통의 죄와 속죄에 대한 법정적 이해의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으로 기인한 죄와 속죄의 치유적 특성과 법정적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처한다.
죄와 관련하여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있었던 웨슬리는 후기에 들어서면서 통찰력 있는 은총 이해를 통하여 죄와 속죄의 특성간에 긴장 관계를 해소시킨다. 루터식 모라비안의 정숙주의, 극단적 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적 경향, 극단적 열광주의적 경향들과 지속적으로 논쟁하였던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인 '거룩한 삶'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웨슬리는 1765년부터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인 죄의 문제와 그에 따른 은총 이해와 관련하여 심도 깊은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을 정립하기 시작한다. 웨슬리는 은총이 단지 용서만의 의미, 혹은 치유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의 은총은 타락한 본성 치유의 도구가 된다고 본다. 결국에는 이 은총 안에서 인류는 아담 안에서 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잃은 것 이상의 것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기본적 은총 이해를 가지고 웨슬리는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 속에서 구원의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아무 가능성도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부어주시는 선재적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속으로 말미암아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인간은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어졌고 선재적 은총으로 인한 본성적 형상과 정치적인 형상의 부분적인 치유는 형이하학적으로 밖에 될 수 없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확신케 하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부어주기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영적 자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칭의와 신생 이전의 회개인 율법적 회개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확신의 은총 속에 있는 인간은 단지 자범죄의 죄책과 죄악성만을 인식했을 뿐이지 죄책을 용서받은 것도 아니고 타락하고 손상된 본성을 치유받은 것도 아니기에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의 권능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의 죄책과 죄악성을 인식한 인간은 의인화의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자범죄의 죄책으로부터 구원받게 되고 그와 동시에 거듭남의 은총에 의해서 병들어 있는 자신의 본성이 치유되기 시작됨으로 죄의 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 안에는 여전히 내적 죄악성 즉, 죄의 현실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내적 죄악성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경향성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게 된다. 즉 거듭남 후의 기독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내적 죄악성이 치유되어지기 시작하지만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아니기에 성화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환자가 의사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때 그 병의 치유가 더 빠르고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부어주시는 은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온전한 성화를 지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 신인 협력(Divine-human cooperation)이 필요한 것이다. 죄의 뿌리인 남아 있는 내적 죄악성의 치유를 위해서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을 지속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인간에게 부어주셔서 인간의 내적인 죄악성을 온전히 치유하신다. 이 경험이 완전한 사랑의 경험인 온전한 성화의 경험이다. 완전 경험 후의 신자는 그의 심중이 하나님의 성결한 사랑으로 가득차게 되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없게 되며 기독자를 타락하게 만드는 자만, 고집, 이 세상에 대한 사랑 등과 같은 거룩하지 못한 기질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웨슬리가 말하는 지상에서의 완전은 완전해진 상태로서의 완전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완전이라는 점이다. 영원 속에서 하나님을 향유해가는 과정의 하나로서의 완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완전 사랑을 경험한 신자도 그 자신의 육체적 연약성과 유혹으로 인하여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상실할 수도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보혈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점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토마스 맥스필드와 조지 벨과 같은 극단적 열광주의자들이었다.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경험한 기독자들도 그 자신의 육체적인 연약성에 기인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무의지적인 위반을 하게 된다. 즉 소위 말하는 무의지적인 죄를 범하게 된다. 이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으로부터 벗어나 죄의 현실성 자체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 바로 영화이다. 이런 구원의 과정에서 강조되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속죄의 보혈과 의의 덧임혀짐과 심겨짐이다. 우리의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과 의와 믿음은 선재적 은총부터 영화까지의 전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다.
B. 종합 분석
우리가 흔히 웨슬리를 연구할 때 당연히 여기지만 동시에 간과하고 넘어가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웨슬리가 부흥운동가이며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동시에 신약학자였다라는 사실이다. 웨슬리는 일평생 성서, 특히 신약성서 속에서 그가 추구하였던 '참 기독교'를 찾고자 했으며 그가 걸어갔던 '참 기독교'에 대한 여정을 방해하였던 많은 오류들에 대해 성서가 증언하는 참 진리 가운데서 해결점을 찾고자 했다. 웨슬리의 죄 이해 또한 이러한 기본적인 틀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의 죄 이해는 철저하게 성서에 근거해 있으며 그의 은총 이해와 관련된 구원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그가 한 평생 '참 기독교'의 지표로 삼았던 성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자의 완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손수 그 방법(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천국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는 한 책에 그 사실을 쓰셨습니다. 오 그 책을 저에게 주십시오! 어떤 값으로 제가 그 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저를 위한 풍부한 지식이 있습니다. 저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게 하십시오. 저는 여기서(성서 속에서) 인간의 분주한 방법과 멀어집니다. 저는 홀로 앉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임재 속에서 저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 성서를 열어 읽습니다.
이것은(기독자의 완전) 제가 1725년부터 줄곧 목표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성경 외에는 비교적 아무 책도 중요시하지 않는 한 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 되고자 했던 1730년부터는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역사적인 고찰을 중심으로 수행되어진 웨슬리의 죄 이해에 대한 종합 분석 및 전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웨슬리의 죄 이해는 철저하게 성서의 죄 이해, 특히 신약의 죄 이해에 근거해 있다. 신약성서의 죄 이해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보다는 죄의 특성으로서의 법정적인 면과 치유적인 면의 극복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죄를 의미하는 어근이 여덟 개나 신약성서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웨슬리도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데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목회적인 상황 속에서 유동적인 죄의 특성과 구분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신과 자신의 감리교 운동이 직면한 위험요소들에 대한 대응과 관련이 있다. 즉 웨슬리는 자신의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상황에 따라서 죄 이해를 하고 있다.
초기의 웨슬리는 속죄의 법정적인 면에는 거의 무지하였던 것처럼 보일 정도로 속죄의 치유적 특성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모라비안들의 순간적인 회심과 연관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거대한 충격은 웨슬리로 하여금 속죄의 법정적 특성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극단적 강조는 '거룩한 삶'이라는 놓칠 수 없는 주제를 간과하게 하며 종교개혁의 전통적 해결책은 '신자의 남은 죄'에 대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못하기에 중기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이라는 기독교 신학과 삶의 두 가지 축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웨슬리는 이러한 조화의 노력 속에서 죄에 대한 복잡하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미묘한 구분과 설명, 그리고 그에 따른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은총의 역할들을 숙고한다. 따라서, 중기 웨슬리의 죄 이해는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1765년 이후의 보다 세분화되어지고 명확해진 은총 이해는 웨슬리로 하여금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인 특성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게 한다. 이 시기의 웨슬리는 용서로서의 은총 이해를 치유의 권능이라는 보다 큰 주제에 통합시킨다. 선재적 은총은 용서와 치유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확신케하는 은총은 영적 자각, 의인화의 은총은 용서, 거듭남과 과정적 성화, 온전한 성화 그리고 영화의 은총은 치유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죄와 은총의 관계 이해의 역동성은 서방교회의 전통과 동방교회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의 죄 이해가 우선적으로 성서를 근간으로 형성되어졌음을 보여준다.
둘째, 웨슬리는 악의 원인과 인간 타락의 원인을 의지의 자유의 오용으로 보고 있다. 악의 원인을 초월적인 존재의 자유에 대한 오용으로 본 점은 서방교회 전통과 다른 동방 교회적인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첫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로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연적 인간(natural human)'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향할 수 없다는 웨슬리의 주장은 종교 개혁의 주장과 전적으로 동일한 주장이다. 반면에 이점은 동방 교회의 전통과는 다른 인간 이해이다.
셋째, 원죄의 유전 문제에 있어서 웨슬리의 관점은 시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초기의 웨슬리는 생물학적 전이론의 입장을, 중기의 웨슬리는 영혼 창조론적 입장을, 후기의 웨슬리는 영혼 유전 전이설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리차드 톰슨이 웨슬리에게 원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면 죄에서 완전히 자유해진 양친으로부터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부패한 본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원죄의 유전에 있어서 생물학적인 전이론은 그의 완전 교리와 상충되는 점을 노출시켰다. 그리고 중기의 웨슬리가 염두에 두었던 영혼 창조론적인 입장은 '죄된 육체'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혼 창조론적인 입장은 죄의 자리를 육체에 두었기에 이 입장에서는 지상에서의 완전이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후기의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 문제에 있어서 '죄악된 육체'의 개념과 무관하며 죄의 가능성을 영혼에 두는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을 피력한다. 이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은 웨슬리가 일관되게 주장한 지상에서의 상대적인 완전 가능성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입장이었다.
넷째, 죄와 관련된 웨슬리의 은총 이해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의 우선성이 특징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재적 은총으로 아무 능력이 없었던 자연적 인간에게 가능성이 생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속(universal redemption)으로 아담의 불순종으로 기인한 원죄의 죄책이 사해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적 인간(natural man)'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논리적인 추상이며 인간에게 남아 있는 실질적인 문제는 자범죄에 대한 죄책과 인간 본성의 타락과 부패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용어보다는 '생래적 죄(inbred sin)'와 '내재적 죄(inbeing sin)'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생래적 죄'와 자범죄의 죄책에 대해서 인간 자체만의 노력으로서는 철저하게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은총(free grace)에 힘입을 때에만 인간에게 가능성이 발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의지에 자유의 회복이라든가 성화의 과정 속에서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는 가능성의 회복은 모두 은총에 의한 것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것조차도 모두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웨슬리는 죄의 자리를 육체에 두지 않고 영혼에 둔다. 웨슬리는 바울의 몸에 대한 관점을 그대로 수용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연약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몸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연약성 자체가 악이나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전통은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 지상에서의 완전이 불가능하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기 이전에는 죄에 눌려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보았다. 반면에 웨슬리는 그와는 반대되는 개념, 즉 인간의 육체적인 연약성은 악이나 죄가 아니고 단지 악과 죄에 책임이 있는 것은 영혼이라는 사실을 성서 속에서 찾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풍성한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이 보다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현실에서의 구원의 여정에 참여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사실이 웨슬리로 하여금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으로서의 완전이 지상에서 가능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게 하였다. 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죄로부터의 구원이란 믿음에 의해 가능한 현실의 삶 속에서 약속되어진 특권이다.
여섯째, 웨슬리의 죄의 구분과 정의는 종교 개혁의 구원 이해보다 더욱 세밀한 구원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웨슬리는 죄책(guilt), 죄의 힘(power of sin), 죄의 현실성(being of sin)으로 죄를 나누어 설명함으로서 행위로서의 죄와 상태로서의 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내적 죄와 외적 죄,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를 말하고 있다. 특히 죄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웨슬리는 의지적인 죄를 적절한 의미의 죄, 무의지적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을 소위 부적절한 의미의 죄로 설명한다. 종교 개혁의 죄 이해는 죄책과 관련해서 인간의 연약성에 기인한 죄, 즉 무의지적인 죄를 의지적인 죄와 동일한 견지에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죄에 눌려 살 수 밖에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신자로 하여금 쉽게 종교적 우울에 빠지게 하였다. 반면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미묘한 구분은 신자로 하여금 보다 긍정적으로 구원의 순례에 대한 과정을 지향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웨슬리의 죄 이해의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속죄의 보혈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신자는 진정한 의미의 성도가 되며 지상에서 주님의 참된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무의지적인 죄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서 보자면 빗나간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며,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도 온전한 성화의 은총을 상실 할 수 있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걸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웨슬리는 초대교부, 경건주의와 신비 영성가들의 영향으로 평생을 죄와 유혹과 싸움하는 자기 검증의 삶을 살았다. 하이젠레이터가 지적한 것처럼 옥스퍼드 시절의 웨슬리에게 있어서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의 영신수련과 같은 자기 검증의 영적 분투가 그의 삶에 중심이었다. 이런 영적인 분투가 비단 초기 웨슬리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웨슬리는 평생을 통해 자신의 목회와 삶의 지표로 삼았던 '참 기독교'를 찾는 여정에서 자기 검증적인 영성 생활의 중요함을 주장하였고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서의 적용을 통해 실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웨슬리는 자신의 감리교 운동에서 은총의 수단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이점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크다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갑작스런 양적 증가와 더불어 질적인 하락의 현실에 처해 있으며 아직까지 내세적이며 동시에 현실에서의 기복적 신앙 강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풍사건, 옷로비 의혹 사건, 근래의 일련의 신용금고 사건들의 중심에는 항상 소위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의 영적 상태를 알려준다. 현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검증 없이 단지 내세적이고 기복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기 검증 가운데서 내적 죄악성 및 외적 유혹과의 싸움을 중시하는 초대 교회의 수도 운동과 중세의 신비 영성, 종교 개혁 후의 경건주의 운동 그리고 웨슬리의 준 수도주의(semi-monastic)와 같은 교회 전통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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