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죄 이해 4
존 웨슬리의 죄 이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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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기 웨슬리의 죄 이해
죄의 법정적 의미와 치유적 의미의 긴장관계로 의미되는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에게 남은 죄에 대한 문제가 웨슬리에게서 해소되는 전조가 보인다. 그 전조는 웨슬리가 보다 명확한 은총에 대한 이해 속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과 '거룩한 삶'을 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에서 기독자의 모든 삶 속에서 선재적 은총, 의인화의 은총, 동반의 은총, 성화의 은총을 강조한다.
참 종교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현재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적 양심(natural sin)'으로 불리는 선재적인 은총(preventing grace)에서 시작된다. 선재적 은총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로 인간의 마음속에 형이상학적인 지향점을 가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 즉 아담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준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사실상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역을 잊어버리든지 부인하게 된다. 또한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다음에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원인 칭의와 성화를 위치시킴으로서 그의 구원론의 완성되어져가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칭의(또는 義認)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획득되는 값은(일반으로 말하는 우리의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義)입니다. ...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평강",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베드로 전 1: 8)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성화(sanctification)가 시작됩니다. 그 찰나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납니다. 성령으로 납니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갱신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에게 세상과 향락, 안위, 명예, 돈에 대한 사랑을, 우리 속에 있는 자만, 분노, 고집이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악한 성질과 함께 내쫓으며,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즉 한 마디로 말씀드려 이는 우리의 땅에 속한 감정적이요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 즉 단지 죄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이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죄가 전에는 단지 기절하였던 것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슬리는 육성(肉性)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힘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을 느끼지만, 저들은 아직도 속에서 느껴지는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이 자기 안에 있음을 부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까닭(시편 118: 13 참조)입니다. ... 그러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다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 속에 죄가 없노라고 긍정하는 정도로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예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드디어 저들이 그런 죄에서는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속에서 올라오는 부패성은 새로이 일어나서 거의 불붙는 상태에 들어가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삽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또 흠 없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한 대로 온전한 성화 즉 우리들의 모든 죄-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에서 완전한 자리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그 영혼의 모든 능력을 취하여 그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칭의, 거듭남, 성화, 완전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총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강조는 그의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고민, 즉 모라비안적인 정숙주의와 칼빈주의와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의 율법폐기주의의 단점인 '믿음에 의한 구원'의 극단적인 강조로 인해서 '거룩한 삶'의 왜곡된 측면을 바로 잡고자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총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에 대한 확신, 즉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게 한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게 되며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된다. 칭의의 순간에 자신이 과거에 범한 자범죄의 죄책이 사해진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이 아닌 간접적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다. 여기서 칭의에 합당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요 확신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 제사장, 또한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성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유일한 조건도 믿음이다. 어떤 사람도 믿음 없이는 성화될 수 없다. 성화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지만 성화의 시작인 거듭남이 신자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기독자의 최종적인 목표가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전 또한 과정으로서의 완전이기에 현실에서 기독자는 항상 과정 속에 있게 된다.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죄의 남음의 문제가 바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할 일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함께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야 한다. 즉 믿음의 열매로서의 '성결된 삶(holy living)'이 필요한 것이다. 성결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은 은총에 의해 심겨지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은총에 의해 심겨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신자들은 성령과 함께 걸으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그리스도가) 의를 덧입힌 모든 사람들에게 의를 심어주시는 것(implant)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할뿐만이 아니라 성화하게 만드신 다는 것을 혹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 모두를 의롭게 할뿐만 아니라 성화케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의로와 지고 의와 참 성결 안에서 피조되어진 하나님과의 유사성인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되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독자의 여정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자리잡고 있다. 웨슬리는 이 은총을 용서의 권능으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의미에서)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각할 수 있는 대상들이 지각되어지는 것처럼 (그 은총이 확신시키고, 새롭게하고, 정화시키며,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그 은총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은총 이해는 웨슬리가 끊임없이 죄와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와 씨름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악의 기원과 악에 대한 선택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현실과 관련 있다.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오용함으로 하나님을 떠난다. 인간은 불순종을 택하였다. 이러한 불순종은 인간 자신이 값을 수 없는 죄책을 인간에게 가지고 왔으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영이 병들어 죽게되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상태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갚아야 할 법적인 채무 관계 속에 처하게 되었고 그 자신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치료를 받아야할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만의 힘으로서는 이 모든 현실을 해결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은총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요 3:16) 여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치료책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범한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 우리의 본성의 타락(부패)을 위한 치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고'(살전 4:8) 우리를 지식과 그의 근원적인 모습 안에서 새롭게 하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한 우리의 명철과 밝히 볼 수 있는 눈을 모든 지식들과 함께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도덕적인 모습들 즉 의로움과 진실한 성스러움 안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행해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 8:28)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경험을 통해서 모든 자연적인 죄악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선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슬픔, 아픔, 고통은 우리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치료하기 위한 모든 약품들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유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익이 되어 우리를 보다 충분한 그의 거룩함의 참예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남아 있는 동안에 ,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왕관에 많은 별들을 더해 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의 이해가 웨슬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로서의 '거룩한 삶'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은총에 의해서 신자가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 가능해진다. 성령과 동행하는 신자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 은총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을 치유하고 죽이는 과정의 동참에 대한 가능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신자의 남은 죄의 문제로 인한 죄의 해결에 있어서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의 긴장관계가 해소된다. 결국에 칭의와 거듭남 후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지속적인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병을 알아야 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칭의와 거듭남 후에도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자만, 자기 의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악한 부끄러움, 탐심등)을 깨달아야 치유가 가능해진다.
곧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육에 속한 마음이(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너희는 육에 속하였다" 하였듯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타락의 경향에 있는 마음, 아직 계속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마음입니다. 또는 자만, 고집, 분노, 복수심, 세상사랑 또는 갖은 악을 사랑하는 그런 성벽인 것입니다. 환언하여, 순간이라도 굴레를 벗기면 곧 솟아오르려는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패성은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밝은 빛 없이는 알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런 모든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입니다. 죄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이 죄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남아있는 죄악성으로 인하여 칭의와 거듭남 이전의 가장 악한 죄를 부끄러워했던 것보다 더욱 자신의 최선의 의무를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신자가 자신의 죄책과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적 회개로 인해 신자는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권능을 받음으로 마음이 정결해지고 우리의 손이 깨끗해진다. 또한 복음적인 회개 속에 있는 신자는 자신을 향한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의사이며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 본성의 온전한 치유 과정이 가능해진다. 신자가 이런 복음적 회개 속에서 성령과 함께 걸으면서 다시 타락의 순간에 빠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인 육의 본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축복'을 받은 신자에게는 더 이상 생래적인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억제하며 안과 밖의 죄를 대항하고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 매일 약화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마는,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내어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받은 은총을 가지고는 우리들은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그저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다 하여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전적으로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해져라!"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만 그 악의 뿌리, 육의 본성이 멸절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야 이 생래의 죄는 생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단지 죄책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힘과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에게 구원의 과정, 기독자의 순례의 과정 속에서의 죄와 은총의 관계는 중요한 목회적, 신학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우선 그의 피의 속죄를 통해 죄책으로부터, 다음은 당신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뿌리로부터"
Ⅳ. 웨슬리의 죄 이해
A. 악의 기원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
기독교 역사상 신학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하나는 바로 악의 문제로서 사랑과 선, 그리고 정의의 하나님과 현실의 악의 현존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이다. 웨슬리 또한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오래 동안 흥미를 가졌다. 악이 어디로부터 왔고 왜 왔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를 살피기 위해서는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하나는 심미적인 측면으로서 하나님의 선함과 창조의 선함, 존재의 사슬(chain),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와 같은 주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주제로써 웨슬리가 악을 어떻게 묘사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의 문제이다.
1. 악의 기원에 대한 웨슬리의 심미적 고찰
심미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견지하면서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정의와 선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적용함으로서 시작한다.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단지 선한 피조물을 창조할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창조의 선하심의 전제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다. 웨슬리는 타락 이전의 피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의 일반적 체계로 구성되었을 때에 모든 피조물은 그것의 원래의 상태에서는 선했었기에 '보라. 그들은 매우 선했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매우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의 '매우 선한' 창조 속에서 웨슬리는 모든 피조물이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악의 혼재 또한 없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완벽한 질서나 조화에 대한 웨슬리의 묘사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경험주의나 지적 관찰에 의해서가 아닌 현재의 세상에 악이나 죄가 없다면 이라는 상상에 의해 도달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상상한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는 재앙, 결점, 부패, 혹은 파괴적 경향이 없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의 근거는 웨슬리가 비록 타락했지만 현 세계의 관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실존과 속성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 있다.
웨슬리의 '피조물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라는 교리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주요한 개념과 구조는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혹은 '충만의 원칙(principle of plenitude)'이다.
모든 부분은 정확히 다른 부분들에 적합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선함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관"으로부터 나온 '황금 사슬(a golden chain)'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일련의 존재들, 지고부터 가장 낮은 것까지 관련이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그의 창조자를 알고 사랑하고 향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존재의 사슬'은 낙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으로부터 하등한 피조물까지 전달해 주었다. 주의할 점은 '존재의 사슬' 속에서 인간보다도 높은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의 실재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의 천사에 대한 개념을 성서의 계시와 희랍 철학, 그리고 많은 부분을 밀턴(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가지고 왔다.
피조된 존재로서 천사들 또한 유한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심지어 가장 지고의 천사들인 케루빔(Cherubim-지품 천사로 9품 천사 중에 제 2위인 지식의 천사)과 세라핌(seraphim-천사의 9품중 1위인 치품 천사로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세 쌍의 날개를 갖춘 천사, 이사야 6:2,6)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도 유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해와 지식과 지혜와 성결과 힘은 우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적 심층부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도덕법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 도덕법에 의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기꺼이 완벽하고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을 가졌고 이것으로 자유한 의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 섬김은 그 자체로 보상이었고 그들의 은혜로운 주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점에 있어서 천사들이 죄지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겼으며 결국에는 이 자유가 하늘의 반역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그의 자연적 형상뿐만 아니라 도덕적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을 지와 의와 참 성결로 창조하셨습니다. 그의 이해력은 흠 없고 완전했던 것처럼 그의 모든 감정도 흠 없고 완전했었습니다. ... 그러나 인간이 악을 선으로 오해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무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unde malum?" 즉 "세상에 악이 어떻게 왔는가?"의 광대한 물음에 전적인 어려움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침의 아들, 루시퍼"로부터 왔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악마는 처음부터 죄지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가 우주의 최초의 죄인이었으며, 악의 주인이고, 그의 자유를 오용했기에 피조 세계에 악을 처음으로 소개한 첫 존재였습니다. "첫 천사장이 아니었던 최초의 그"는 그 자신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유혹을 받았고 그는 그의 자유 의지로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자유의 오용으로 인한 루시퍼의 자기 의지가 악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루시퍼가 타락했을 때 그는 단지 자기 혼자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세력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그들의 영광과 행복을 잃어버렸으며 이전의 거주지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이 가지지 못한 많은 특권들을 천사들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자기 의지, 자만, 그리고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인해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 악이 오게되었다. 그 결과 최상위의 존재의 사슬은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나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선한 천사는 인간을 위해서 섭리하였고, 악한 천사들과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싸움은 아담에 대한 유혹과 타락 이전에 있었던 것이었다.
웨슬리의 악의 기원에 대한 심미적인 고찰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진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피조물의 선함, 다른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피조물 내의 존재의 사슬, 존재의 사슬의 정점으로서의 천사, 그리고 우주적인 이원론에 기인한 존재의 사슬을 나누고 세상에 악을 가지고 온 천사의 타락이 그것이다.
2. 악의 기원에 관한 웨슬리의 도덕적 고찰
사실 위에서 살펴본 웨슬리의 악의 기원에 대한 심미적인 고찰은 악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결점 없는 창조의 교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악의 발생은 전적으로 "선이나 악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힘"인 자유 의지의 오용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서 어거스틴 전통의 낙관주의자들인 킹(William King)과 예닝스(Soame Jenyns)는 창조의 불완전으로부터 자연적 악을 설명했다. 그들은 악을 자유 의지의 오용이라기보다는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문제는 이들이 악이 존재를 구성하는 실존적인 수단으로 필수 불가결하게 이 세상에 왔다고 주장한 데에 있었다. 결국 자칫 잘못 하면 이들의 주장은 악이 창조의 시점에 있었던 것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가 되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는 그들의 신정론(theodicy)을 거부한 것이다. "악은 사물의 기원적인 본성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영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악이 창조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왔는가? 웨슬리에게 있어서 악은 단지 의지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악이 세상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셨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다. 웨슬리는 이에 대해서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영원한 더 큰 지복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지혜와 정의와 자비에 대한 완전한 확증의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아담이 죄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지도 부활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해 어거스틴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닌 완전한 선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선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기인한 선의 타락이다. 그 결점은 물질이 아닌 의지에 있다.
결국 웨슬리는 피조물의 결함 가능성은 정확하게 천상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의지의 오류가능성과 불완전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의지는 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결점은 창조의 방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자리잡고 있는 의지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웨슬리에게 있어서 창조 안에 있던 결점은 심미적인 것이 아닌 도덕적인 문제였다. 여기에서부터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한 전체적인 물음을 풀어나간다.
모든 악은 자연적, 도덕적 혹은 형벌적인 것입니다. 즉 자연적 악 혹은 고통은 뒤따르는 기쁨이 그것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은 전혀 악이 아닙니다. 그 도덕적 악 혹은 죄는 그것을 선택한 사람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용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벌적 악 혹은 형벌은 그들이 죄를 선택함으로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점에 있어서)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이 선이나 악을 선택할 자유를 그의 피조물에게 주는 것, 그들 자신의 손에 행복과 불행을 놓아주는 것,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선택권을 남겨두는 것에 전혀 모순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악의 선택)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의 혹은 선하심의 모든 덧입혀짐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는 자연적 악, 도덕적 악, 형벌적 악을 구분한다. 도덕적 악과 형벌적인 악은 자유의지를 전적인 조건으로 한다. 웨슬리는 물질 세계가 어느 정도 비물질 세계 안의 의지의 결점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믿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자연적인 악 또한 악에 대한 아담의 선택의 결과라고 보았다. '존재의 사슬(The chain of being)'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그 기능에 장애가 발생했다. 아담이 결함적 창조의 결과로서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가 아담의 결함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 속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으로 악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새창조(New Creation)는 자연적 악으로부터의 해방도 포함한다. 즉 존재들 사이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주로 도덕적인 측면에서 악과 죄에 대한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죄 많은 육체'에 대한 정의를 부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죄 많은 육체에 거한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 성서에서 권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육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적으로 비성서적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육체 혹은 물질도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영만이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단지 영혼만이 죄의 거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결단과 자유의지의 근원인 영혼만이 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과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웨슬리의 관점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닌 선의 타락이며 육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이점이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의 전적 회복의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와 거룩한 삶의 가능성에 근거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B. 인간의 타락과 생래적 죄(원죄)
1.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 존재가 지닌 어떤 재능 혹은 능력과 동일하다고 여겨왔다. 웨슬리 시대의 이신론자들은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시켰고, 웨슬리 이후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 이들은 이성과 양심을 본래 내재적인 것으로 본 반면에 웨슬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이것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적인 면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로까지 반사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창조된 인간이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 도덕적 형상(moral image),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에서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첫째 웨슬리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그를 만드신 분을 닮았기 때문에 이전에 존재하는 사실과 현재의 비교로부터 더 심오한 진리를 추론해 낼 수 있었으며,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었다. 웨슬리는 인간 이해력의 의로움(just), 분명함(clear), 신속함(swift), 위대함(greatness)을 주장한다. 두 번째 인간의 본성적 형상은 의지(will)이다. 웨슬리는 정의롭고, 명료하고, 신속하고, 포괄적인 이해력과 같은 것들은 인간이 원래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두 번째 자질인 완전한 의지(will)를 말한다. 그는 이 속성이야말로 실로 더욱 위대하고 더욱 고귀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력은 그러한 이해력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감정(affection)에 대해서 말한다면, 인간의 손상되지 않은 감정은 합리적(rational)이고, 공평(even)하였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love) 그 자체였다. 사랑이 그의 영혼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의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곧 사랑으로서 이 사랑이 바로 그의 생동감 있는 열기였다. 사랑은 그의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따듯한 온기였다. 사랑의 불꽃은 그가 나온 하나님께로 타오르게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오히려 감정(affection)을 의미한다. 세 번째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은 인간이 본래 즐겼던 자유(liberty)이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지 않은 의지(uncorrupted will)와 완전한 자유(perfect freedom)를 누릴 수 있었다.
정치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이란 용어는 웨슬리가 아이작 왓츠(Isaac Watts)로부터 빌려 왔다. 웨슬리는 창 1:28과 시 8:6-8에 나오는 우주의 지배자의 개념을 정치적 형상으로 표현한다.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을 뜻한다. 인간의 정치적 형상이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요, 왕자 같은 정치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창조주와 그의 피조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채널의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피조물들도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self-motion), 이해력(understanding), 의지와 감정(will, passion), 그리고 선택의 자유(liberty, power of choice)를 갖고 있다.
도덕적 형상이란 본성적 형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성적 형상은 영의 이해와 감정과 결단의 기능이라면, 도덕적 형상은 영적 기능에 의해 형성되는 영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적 형상은 피조된 인간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곧 의로움(righteousness)과 참 거룩함(true holiness)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을 부분적으로 상실하였다.
2. 인간의 타락
웨슬리는 인간이 피조되었으며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그는 인간 자신의 실존과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이야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의를 통하여. 여기에 우리의 축복과 하나님의 부요하시고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근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은총의 원인은 인간의 공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 혹은 효과는 단지 용서만이 아닌 생명, 영광으로 이끄는 신적인 생명이다.
오늘날 바로 우리의 생명,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것도 역시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가지거나 행하기에 아무 가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은 모두 그의 자비의 표적들입니다. 사람 안에 어떤 의가 있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것으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으로서 창조를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모든 시대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라는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진리를 확고하게 보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근원인 하나님과 아주 유사하다고(likeness)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에게서 여전히 신적 부모(Divine Parent)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웨슬리는 이어서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얼룩지게 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무수한 불완전함은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하고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언급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어거스틴처럼 마니교적 선과 악의 이원론적 창조를 공격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곧 일원론적 창조를 주장한다. 또한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고 선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롭고, 미덕을 지니고, 행복한 피조물이 어떻게 이러한 완전성을 박탈당했는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가? 웨슬리는 쉽게 대답한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인간은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인간은 실패하고 죄를 짓게 된다.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롭고 선한 본성을 스스로의 의지로 상실하고 타락하고 부패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죄는 인간이 자유를 남용함으로 인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죄의 첫 번째 결과는 인간의 육체에 나타났다. 이 불멸의 존재(육체)가 멸망을 옷 입게 되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육체의 동료인 영혼에 두 번째 충격이 가해졌다고 해석한다. 영혼은 그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육체와 비슷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성과 부패한 의지의 노예가 된 결과, 인간이 완전할 때 인간으로부터 흘러나오던 행복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세월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간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게다가 인간의 능력은 쇠약해져 갔으며 세상에는 고통이 쏟아졌으며 하늘의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어리석고, 악으로 가득 찬 노예 상태가 된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왔다. 타락한 인간이 전적으로 상실한 부분은 바로 도덕적 형상이었으며, 은총으로 구원받은 인간이 회복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도 도덕적 형상이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본성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잃어버렸다가 은총으로 구원받았을 때 부분적으로 다시 회복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는 강조하지 않은 이 도덕적 형상을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이라는 설교에서 본성적 형상과 비교하면서 본성적 형상과 함께 도덕적 형상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였음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라는 설교에서 이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인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덕적 형상이 완전히 상실하였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거룩하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으며 죄책 의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로 전적으로 상실된 도덕적 형상과 부분적으로 상실된 본성적 형상이 회복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결에의 참여자(partakers of His holiness)'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웨슬리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은총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렇게 새롭게 회복된 상태는 아담의 타락 이전보다 더 훨씬 높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을 상태 보다 훨씬 더 높은 거룩함과 영광의 상태로 회복된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 시킴으로 훨씬 더 나은 구원의 상태로 회복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웨슬리가 은총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때는 본성적, 정치적, 도덕적 형상 중에 대부분 도덕적 형상을 의미한다. "거듭남(The New Birth)"이라는 설교에서 보면 웨슬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웨슬리가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 중에 도덕적인 형상을 집중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도덕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시키는 참 의와 참 성결(real righteousness and real holines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짐승들과 달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응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간들은 영에 있어서 최고의 선에 예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사랑의 거룩한 기질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죄의 상황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형상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이 왜 있는가?"라는 물음에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죄의 가능성을 특별히 지, 정, 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본성적인 형상과 연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시한 것은 도덕적인 형상을 정형화하는 요소인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하는 결정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다. 다른 말로 도덕적인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죄의 유해한 효과 때문에 왜곡되어지고 방해받을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도덕적 형상은 인간의 영화 혹은 타락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 점이 웨슬리가 도덕적인 형상을 주요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이유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은 도덕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은 단지 영원히 지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부패하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피조되어진 근원적이고 자연적인 본성의 표현이다. 즉 도덕법은 의와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점이 하나님의 본성과 피조되어진 근원적 인간의 본성 사이에 유사성을 드러낸다.
3. 생래적 죄(원죄)
1) 원죄론 확립의 역사적 배경
웨슬리에게 있어서 원죄에 대한 교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였기에 1756년에 웨슬리는 방대한 양의 논문『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를 저술한다. 이 논문은 비국교도 목사인 테일러(John Taylor)박사의 원죄 교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저술되어진 것이다. 웨슬리는 테일러 박사를 마호멧과 비견될 정도로 기독교에 위험을 주는 인물로 경계하고 있다.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테일러 박사의 논문은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서 원죄 교리의 타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고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는 원죄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이다. 그 논문의 첫 번째 장은 테일러의 원죄 교리에 대한 응답이고, 그 나머지 장들은 헤브덴(Samuel Hebden)과 예닝스(David Jennings), 왓츠(Isaac Watts), 보스톤(Thomas Boston)에게 대부분 빚진 것들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는 너무 방대했기에 몇 년 후에 웨슬리는 이 교리를 요약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설교로 출판한다.
웨슬리는 테일러와 그 시대의 이신론자들, 즉 톨란드(John Toland)와 틴달(Matthew Tindal)등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원죄(Original Sin,1759)"라는 설교 속에서 이 핵심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여전히 이교도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또한 같은 설교에서 "본성적으로 인간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이교도로부터 성서적인 기독교를 구별하는 척도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다른 칭호를 붙이든지 간에 기독교와 이교간의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자는 이교도임이 분명하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많은 악덕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될 현명함과 덕스러움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하게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선하게도 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창조되었을 때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덕스럽거나 현명하였다'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사실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까? 사람에게는 모든 선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된 것입니까? 사람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된 것입니까? 혹은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입니까?' 이 사실들을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되고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가 집중했던 관심은 바로 구원에 관한 문제였기에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에 반대했던 것처럼 테일러의 원죄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론에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특징인 하나님의 은총의 우선성에 큰 위협을 주는 펠라기안적인 인간이해, 특히 원죄를 부정하는 견해를 웨슬리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원죄(Original Sin)를 대신하는 생래적 죄(Inbred Sin)
원죄라는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웨슬리는 주로 원죄라는 용어를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과의 대화시에 사용하였다. 특히, 테일러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원죄라는 용어에 대한 모호성이『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와 "원죄(Original Sin)"라는 설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의 죄악성의 실체를 강조하고자 할 때, 원죄(original sin)보다는 오히려 '생래적 죄(inbred sin)', '내재적 죄(inbeing sin)', '타락한 죄악된 본성(corrupt sinful nature)', '육욕의 사람(carnal mind)', '태생적 죄(birth sin)', '내적 죄(inner sin)'등과 같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의 평신도 설교가들에게 설교 44번 "원죄(Original Sin)"을 이야기할 때, 그 제목을 항상 "내재적 죄(Inbeing Sin)" 혹은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원죄(original sin)라는 용어를 피하고자 한 이유는 웨슬리의 관심의 문제였다. 그는 물론 전가된 죄책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각각의 인간을 책임적으로 치리하고 계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기독자의 응답 가능한 삶에 더욱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하기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관심은 인간 본성 안에 죄의 현재적인 오염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으로 인해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벗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는 아담의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타락과 손상의 문제만으로 국한된다. 웨슬리는 특히 원죄의 죄책이 실질적으로 없어졌음을 어린아이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어떤 어린아이라도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으로 인하여 지옥에 갔거나 갈 어린아이는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아담의 죄책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가 일종의 인류의 죄(racial sin)에 대해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어린아이조차도 죄인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즉 웨슬리는 원죄의 죄책과 그 결과로서의 인간 본성의 부패가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를 전가된 죄책(imputed guilt)과 유전된 부패(inherited depravity)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 때부터 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적인 죄의 과정으로서 나중에 저지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과정 이전에 "진노의 자녀들"이기에, 어느 정도 진노와 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의 분명한 의미 속에서 취해진, 명백한 본문으로부터 우리는 신적인 용어인 전가된 원죄와 유전된 원죄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아담의 죄인데,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 들어 있는 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후자는 본래적 의로움의 결핍이며 본성의 타락인데, 그것이 유년기 때부터 우리가 선한 것을 싫어하고 악한 것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는 이 구절에서 웨슬리는 분명히 이 교리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성 어거스틴과 그 시대의 다른 기독교 저술가들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담의 범죄함으로 기인한 죄책(guilt)과 부패(depravity)가 어떻게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되는가의 문제를 드러낸다.
3) 생래적 죄(Inbred Sin; Original Sin)의 유전성 문제
서방 기독교는 원죄의 전가에 대한 문제를 영혼 창조설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이해를 해왔다. 그런데 웨슬리가 과연 원죄의 죄책에 대한 전가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참으로 흥미 있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그의 원죄의 죄책에 대한 전가 문제의 이해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원죄의 유전성 문제에 있어서 올더스케잇 체험 이전에 웨슬리는 현재 인간의 타락이 생물학적인 전이의 영향이라는 측면으로 기울어 있었다. 1730년에 설교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먹었기에 그들의 피를 혼탁하게 하는 요소들을 함유하는 체액을 가지게 되어서 결국 그들은 죽게 되고 육체적으로 무질서해지고, 그들의 능력이 손상되어지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본다.
죄의 첫 번째 결과는 그의 육체에 나타났습니다. 이전에는 불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체 안에는 타락의 씨앗이 없었으며 밖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육체의 본래적 입자들은 부패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을 위해서 추가된 입자들은 본래의 입자들의 본성(native substance)과 결합할 수 없었으며, 본래의 입자들은 보충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추가된 입자들은 본래적 입자들의 어느 부분과도 결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섞여진 두 본질들은 섞이기 전과 똑같은 성분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 본질들을 담고 있는 그릇들은 섞이기 전과 똑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깨끗하고 열려져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금지하는 명령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담의 죽음에 대한 오래된 논제'를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가 담겨있다. 루터는 "아담이 순종했었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 그가 창조된 상태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육체적인 생명이 요구하는 다른 일을 행했을 것이며, 마침내 그는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웨슬리는 새로운 생리학(Harvey, Cheyne, Weemes등)이 이러한 전통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즉 인간 유기체는 해독한 물질에 의해 타락되지 않았다면 무한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후손에게 본성의 부패의 중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전적 성화(완전)에 대해 반대하는 옛 동료 톰슨(Richard Tompson)으로부터 1755년에 받은 편지와 테일러의『원죄에 관한 성서적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에서 대두된 물음이 그로 하여금 원죄의 전이에 관한 생물학적인 관점을 차츰 포기하게 만든다. 즉, 어떻게 죄에서 완전히 자유한 부모로부터 부패한 본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웨슬리로 하여금 원죄의 생물학적인 전이론을 포기하게 한다. 이후에 웨슬리는 종교개혁가들의 원죄 교리에 포함되어진 '전가되어진 타락(imputed depravity)'과 '죄된 육체(sinful body)'로 표현되어지는 영혼 창조설적 입장에 대한 옹호를 시작함으로서 그의 원죄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웨슬리는 원죄 혹은 생래적인 죄가 어떻게 전이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1762년까지는 약간은 모호한 태도를 가졌다. 웨슬리는 "성서에 의해서, 경험에 의해서, 나는 그 사실을 안다. 나는 그것이 전이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떻게 전이되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762년 아마도 웨슬리는 울노어(Henry Woolnor)의 『영혼의 참 기원(The True Original of the Soule)』을 접하고 영혼 창조설적 관점에서 영혼 유전 전이설에 대한 관점으로 선회를 한 것으로 보인다. 웨슬리는 출생시에 아담의 자손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인류의 첫 부모에게 속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책과 그 결과들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된다고 본다. 즉 인류는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타락하였기에 출산시에 타락한 영혼이 전이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웨슬리는 1762년 그의 『신약 성서 주해』를 영혼 유전 전이설적인 입장에서 개정한다. 그는 히브리서 12장 9절의 주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이 세상이 시작될 때에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개정의 요점은 우리의 영혼이 아담의 사슬에 있고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우리가 출생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혼의 유전 전이설적 인간론을 1782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 해 아르미니안 메거진(Arminian Magazine) 5월 호에서 울노어의 책에 많은 영향을 받은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the Soul)"라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입장에서 1782년에 그의 초기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의 창조와 타락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라는 설교로 피력한다.
4) 원죄의 결과
아담의 죄책으로 인한 결과는 웨슬리의 설교 "원죄(Original Sin)"에 잘 나타나 있다. 원죄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드러난다.
먼저 인간은 무신론자로 세상에 태어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를 알지 못한다. 즉, 은총을 받기 이전의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력(understanding)은 우리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이끌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 지식을 갖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고립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들을 삶의 수단의 중심에 놓음으로서 일종의 우상숭배에 열중하게 된다. 마땅히 하나님께 집중해야할 경외를 우리 자신에게 향하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숭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일부가 잘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옳은 길을 목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간에 그들은 자기 자아를 벗어나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 행합니다. 그들의 자연적,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 행위들은 그것들이 어떤 것에 기인하건 간에 모두다 죽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죽음의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무신론과 우상 숭배는 자만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자기 영광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죄와 기만의 힘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것들을 깨뜨릴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왜곡으로서의 죄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는 루터와 어거스틴의 죄의 이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
세 번째, 아담의 유산은 자기 의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교만만이 우리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허물이 되는 유일한 종류의 우상숭배는 아닙니다. 사탄은 역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기 의지라고 하는 그의 형상을 색인해 놓았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기 전에 '나는 북방으로 가서 내 창조자의 뜻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의지와 기쁨을 누리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을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네 번째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탄의 형상을 지니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사탄을 떼어놓게 됩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사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원죄의 네 번째 특성은 다음과 같은 구성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소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등이다.
결국 불신앙, 자만, 자기 의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은 인간이 아담과 이브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은 완전히 잃어버렸고 자연적, 정치적인 형상은 크게 손상되었기에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가되어지는 유산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있는 인간의 현재적인 영적 상태는 어두움과 처절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철저히 종교 개혁전통에 서서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를 전적 타락의 상태로 보았으며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은총 외에는 없음을 끊임없이 여러 편의 설교들 속에서 주장해 왔다.
당신은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에 있어서 타락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전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물론 존재되는 원천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인간 마음 안에 생각의 모든 상상은 악합니다. 오로지 악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식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쏟아 나오는 불의와 부정의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 속에 너무도 깊고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기에 권능의 은총 외에는 그것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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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기 웨슬리의 죄 이해
죄의 법정적 의미와 치유적 의미의 긴장관계로 의미되는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에게 남은 죄에 대한 문제가 웨슬리에게서 해소되는 전조가 보인다. 그 전조는 웨슬리가 보다 명확한 은총에 대한 이해 속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과 '거룩한 삶'을 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에서 기독자의 모든 삶 속에서 선재적 은총, 의인화의 은총, 동반의 은총, 성화의 은총을 강조한다.
참 종교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현재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적 양심(natural sin)'으로 불리는 선재적인 은총(preventing grace)에서 시작된다. 선재적 은총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로 인간의 마음속에 형이상학적인 지향점을 가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 즉 아담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준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사실상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역을 잊어버리든지 부인하게 된다. 또한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다음에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원인 칭의와 성화를 위치시킴으로서 그의 구원론의 완성되어져가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칭의(또는 義認)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획득되는 값은(일반으로 말하는 우리의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義)입니다. ...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평강",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베드로 전 1: 8)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성화(sanctification)가 시작됩니다. 그 찰나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납니다. 성령으로 납니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갱신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에게 세상과 향락, 안위, 명예, 돈에 대한 사랑을, 우리 속에 있는 자만, 분노, 고집이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악한 성질과 함께 내쫓으며,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즉 한 마디로 말씀드려 이는 우리의 땅에 속한 감정적이요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 즉 단지 죄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이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죄가 전에는 단지 기절하였던 것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슬리는 육성(肉性)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힘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을 느끼지만, 저들은 아직도 속에서 느껴지는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이 자기 안에 있음을 부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까닭(시편 118: 13 참조)입니다. ... 그러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다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 속에 죄가 없노라고 긍정하는 정도로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예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드디어 저들이 그런 죄에서는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속에서 올라오는 부패성은 새로이 일어나서 거의 불붙는 상태에 들어가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삽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또 흠 없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한 대로 온전한 성화 즉 우리들의 모든 죄-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에서 완전한 자리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그 영혼의 모든 능력을 취하여 그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칭의, 거듭남, 성화, 완전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총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강조는 그의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고민, 즉 모라비안적인 정숙주의와 칼빈주의와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의 율법폐기주의의 단점인 '믿음에 의한 구원'의 극단적인 강조로 인해서 '거룩한 삶'의 왜곡된 측면을 바로 잡고자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총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에 대한 확신, 즉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게 한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게 되며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된다. 칭의의 순간에 자신이 과거에 범한 자범죄의 죄책이 사해진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이 아닌 간접적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다. 여기서 칭의에 합당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요 확신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 제사장, 또한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성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유일한 조건도 믿음이다. 어떤 사람도 믿음 없이는 성화될 수 없다. 성화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지만 성화의 시작인 거듭남이 신자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기독자의 최종적인 목표가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전 또한 과정으로서의 완전이기에 현실에서 기독자는 항상 과정 속에 있게 된다.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죄의 남음의 문제가 바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할 일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함께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야 한다. 즉 믿음의 열매로서의 '성결된 삶(holy living)'이 필요한 것이다. 성결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은 은총에 의해 심겨지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은총에 의해 심겨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신자들은 성령과 함께 걸으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그리스도가) 의를 덧입힌 모든 사람들에게 의를 심어주시는 것(implant)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할뿐만이 아니라 성화하게 만드신 다는 것을 혹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 모두를 의롭게 할뿐만 아니라 성화케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의로와 지고 의와 참 성결 안에서 피조되어진 하나님과의 유사성인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되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독자의 여정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자리잡고 있다. 웨슬리는 이 은총을 용서의 권능으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의미에서)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각할 수 있는 대상들이 지각되어지는 것처럼 (그 은총이 확신시키고, 새롭게하고, 정화시키며,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그 은총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은총 이해는 웨슬리가 끊임없이 죄와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와 씨름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악의 기원과 악에 대한 선택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현실과 관련 있다.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오용함으로 하나님을 떠난다. 인간은 불순종을 택하였다. 이러한 불순종은 인간 자신이 값을 수 없는 죄책을 인간에게 가지고 왔으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영이 병들어 죽게되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상태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갚아야 할 법적인 채무 관계 속에 처하게 되었고 그 자신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치료를 받아야할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만의 힘으로서는 이 모든 현실을 해결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은총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요 3:16) 여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치료책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범한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 우리의 본성의 타락(부패)을 위한 치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고'(살전 4:8) 우리를 지식과 그의 근원적인 모습 안에서 새롭게 하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한 우리의 명철과 밝히 볼 수 있는 눈을 모든 지식들과 함께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도덕적인 모습들 즉 의로움과 진실한 성스러움 안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행해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 8:28)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경험을 통해서 모든 자연적인 죄악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선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슬픔, 아픔, 고통은 우리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치료하기 위한 모든 약품들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유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익이 되어 우리를 보다 충분한 그의 거룩함의 참예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남아 있는 동안에 ,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왕관에 많은 별들을 더해 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의 이해가 웨슬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로서의 '거룩한 삶'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은총에 의해서 신자가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 가능해진다. 성령과 동행하는 신자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 은총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을 치유하고 죽이는 과정의 동참에 대한 가능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신자의 남은 죄의 문제로 인한 죄의 해결에 있어서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의 긴장관계가 해소된다. 결국에 칭의와 거듭남 후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지속적인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병을 알아야 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칭의와 거듭남 후에도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자만, 자기 의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악한 부끄러움, 탐심등)을 깨달아야 치유가 가능해진다.
곧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육에 속한 마음이(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너희는 육에 속하였다" 하였듯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타락의 경향에 있는 마음, 아직 계속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마음입니다. 또는 자만, 고집, 분노, 복수심, 세상사랑 또는 갖은 악을 사랑하는 그런 성벽인 것입니다. 환언하여, 순간이라도 굴레를 벗기면 곧 솟아오르려는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패성은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밝은 빛 없이는 알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런 모든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입니다. 죄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이 죄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남아있는 죄악성으로 인하여 칭의와 거듭남 이전의 가장 악한 죄를 부끄러워했던 것보다 더욱 자신의 최선의 의무를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신자가 자신의 죄책과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적 회개로 인해 신자는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권능을 받음으로 마음이 정결해지고 우리의 손이 깨끗해진다. 또한 복음적인 회개 속에 있는 신자는 자신을 향한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의사이며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 본성의 온전한 치유 과정이 가능해진다. 신자가 이런 복음적 회개 속에서 성령과 함께 걸으면서 다시 타락의 순간에 빠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인 육의 본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축복'을 받은 신자에게는 더 이상 생래적인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억제하며 안과 밖의 죄를 대항하고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 매일 약화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마는,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내어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받은 은총을 가지고는 우리들은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그저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다 하여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전적으로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해져라!"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만 그 악의 뿌리, 육의 본성이 멸절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야 이 생래의 죄는 생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단지 죄책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힘과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에게 구원의 과정, 기독자의 순례의 과정 속에서의 죄와 은총의 관계는 중요한 목회적, 신학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우선 그의 피의 속죄를 통해 죄책으로부터, 다음은 당신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뿌리로부터"
Ⅳ. 웨슬리의 죄 이해
A. 악의 기원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
기독교 역사상 신학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하나는 바로 악의 문제로서 사랑과 선, 그리고 정의의 하나님과 현실의 악의 현존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이다. 웨슬리 또한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오래 동안 흥미를 가졌다. 악이 어디로부터 왔고 왜 왔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를 살피기 위해서는 주제를 두 부분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하나는 심미적인 측면으로서 하나님의 선함과 창조의 선함, 존재의 사슬(chain),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와 같은 주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덕적인 주제로써 웨슬리가 악을 어떻게 묘사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의 문제이다.
1. 악의 기원에 대한 웨슬리의 심미적 고찰
심미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전능과 전지를 견지하면서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정의와 선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적용함으로서 시작한다.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단지 선한 피조물을 창조할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은 창조의 선하심의 전제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선할 수밖에 없다. 웨슬리는 타락 이전의 피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의 일반적 체계로 구성되었을 때에 모든 피조물은 그것의 원래의 상태에서는 선했었기에 '보라. 그들은 매우 선했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매우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의 '매우 선한' 창조 속에서 웨슬리는 모든 피조물이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악의 혼재 또한 없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완벽한 질서나 조화에 대한 웨슬리의 묘사는 그 당시에 유행했던 경험주의나 지적 관찰에 의해서가 아닌 현재의 세상에 악이나 죄가 없다면 이라는 상상에 의해 도달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그가 상상한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는 재앙, 결점, 부패, 혹은 파괴적 경향이 없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의 근거는 웨슬리가 비록 타락했지만 현 세계의 관찰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실존과 속성을 알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 있다.
웨슬리의 '피조물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라는 교리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주요한 개념과 구조는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혹은 '충만의 원칙(principle of plenitude)'이다.
모든 부분은 정확히 다른 부분들에 적합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선함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왕관"으로부터 나온 '황금 사슬(a golden chain)'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일련의 존재들, 지고부터 가장 낮은 것까지 관련이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그의 창조자를 알고 사랑하고 향유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존재의 사슬'은 낙원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으로부터 하등한 피조물까지 전달해 주었다. 주의할 점은 '존재의 사슬' 속에서 인간보다도 높은 천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의 실재는 감각의 세계를 초월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의 천사에 대한 개념을 성서의 계시와 희랍 철학, 그리고 많은 부분을 밀턴(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서 가지고 왔다.
피조된 존재로서 천사들 또한 유한한 존재들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심지어 가장 지고의 천사들인 케루빔(Cherubim-지품 천사로 9품 천사 중에 제 2위인 지식의 천사)과 세라핌(seraphim-천사의 9품중 1위인 치품 천사로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세 쌍의 날개를 갖춘 천사, 이사야 6:2,6)과 같은 영적인 존재들도 유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해와 지식과 지혜와 성결과 힘은 우리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적 심층부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도덕법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 도덕법에 의해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지를 알 수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기꺼이 완벽하고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 능력을 가졌고 이것으로 자유한 의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 섬김은 그 자체로 보상이었고 그들의 은혜로운 주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이점에 있어서 천사들이 죄지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여겼으며 결국에는 이 자유가 하늘의 반역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그의 자연적 형상뿐만 아니라 도덕적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을 지와 의와 참 성결로 창조하셨습니다. 그의 이해력은 흠 없고 완전했던 것처럼 그의 모든 감정도 흠 없고 완전했었습니다. ... 그러나 인간이 악을 선으로 오해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무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unde malum?" 즉 "세상에 악이 어떻게 왔는가?"의 광대한 물음에 전적인 어려움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침의 아들, 루시퍼"로부터 왔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악마는 처음부터 죄지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가 우주의 최초의 죄인이었으며, 악의 주인이고, 그의 자유를 오용했기에 피조 세계에 악을 처음으로 소개한 첫 존재였습니다. "첫 천사장이 아니었던 최초의 그"는 그 자신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유혹을 받았고 그는 그의 자유 의지로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자유의 오용으로 인한 루시퍼의 자기 의지가 악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루시퍼가 타락했을 때 그는 단지 자기 혼자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세력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그들은 그들의 영광과 행복을 잃어버렸으며 이전의 거주지로부터 추방당하였다. 웨슬리에 의하면 인간이 가지지 못한 많은 특권들을 천사들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자기 의지, 자만, 그리고 자유 의지의 오용으로 인해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에 악이 오게되었다. 그 결과 최상위의 존재의 사슬은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로 나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선한 천사는 인간을 위해서 섭리하였고, 악한 천사들과 사탄은 하나님에게 대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싸움은 아담에 대한 유혹과 타락 이전에 있었던 것이었다.
웨슬리의 악의 기원에 대한 심미적인 고찰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진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피조물의 선함, 다른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피조물 내의 존재의 사슬, 존재의 사슬의 정점으로서의 천사, 그리고 우주적인 이원론에 기인한 존재의 사슬을 나누고 세상에 악을 가지고 온 천사의 타락이 그것이다.
2. 악의 기원에 관한 웨슬리의 도덕적 고찰
사실 위에서 살펴본 웨슬리의 악의 기원에 대한 심미적인 고찰은 악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결점 없는 창조의 교리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악의 발생은 전적으로 "선이나 악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힘"인 자유 의지의 오용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반해서 어거스틴 전통의 낙관주의자들인 킹(William King)과 예닝스(Soame Jenyns)는 창조의 불완전으로부터 자연적 악을 설명했다. 그들은 악을 자유 의지의 오용이라기보다는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문제는 이들이 악이 존재를 구성하는 실존적인 수단으로 필수 불가결하게 이 세상에 왔다고 주장한 데에 있었다. 결국 자칫 잘못 하면 이들의 주장은 악이 창조의 시점에 있었던 것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 악의 창조자가 되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는 그들의 신정론(theodicy)을 거부한 것이다. "악은 사물의 기원적인 본성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영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악이 창조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왔는가? 웨슬리에게 있어서 악은 단지 의지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악이 세상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셨는가?라는 물음이 대두된다. 웨슬리는 이에 대해서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영원한 더 큰 지복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지혜와 정의와 자비에 대한 완전한 확증의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아담이 죄 짓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지도 부활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해 어거스틴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게 된다.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닌 완전한 선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선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기인한 선의 타락이다. 그 결점은 물질이 아닌 의지에 있다.
결국 웨슬리는 피조물의 결함 가능성은 정확하게 천상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의지의 오류가능성과 불완전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의지는 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결점은 창조의 방법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자리잡고 있는 의지에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웨슬리에게 있어서 창조 안에 있던 결점은 심미적인 것이 아닌 도덕적인 문제였다. 여기에서부터 웨슬리는 악의 기원에 대한 전체적인 물음을 풀어나간다.
모든 악은 자연적, 도덕적 혹은 형벌적인 것입니다. 즉 자연적 악 혹은 고통은 뒤따르는 기쁨이 그것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은 전혀 악이 아닙니다. 그 도덕적 악 혹은 죄는 그것을 선택한 사람이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용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형벌적 악 혹은 형벌은 그들이 죄를 선택함으로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타락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점에 있어서)하나님의 정의와 선하심이 선이나 악을 선택할 자유를 그의 피조물에게 주는 것, 그들 자신의 손에 행복과 불행을 놓아주는 것,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선택권을 남겨두는 것에 전혀 모순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악의 선택)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의 혹은 선하심의 모든 덧입혀짐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웨슬리는 자연적 악, 도덕적 악, 형벌적 악을 구분한다. 도덕적 악과 형벌적인 악은 자유의지를 전적인 조건으로 한다. 웨슬리는 물질 세계가 어느 정도 비물질 세계 안의 의지의 결점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믿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자연적인 악 또한 악에 대한 아담의 선택의 결과라고 보았다. '존재의 사슬(The chain of being)'은 아담의 죄로 인해서 그 기능에 장애가 발생했다. 아담이 결함적 창조의 결과로서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가 아담의 결함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 속에 결함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으로 악과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새창조(New Creation)는 자연적 악으로부터의 해방도 포함한다. 즉 존재들 사이의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주로 도덕적인 측면에서 악과 죄에 대한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죄 많은 육체'에 대한 정의를 부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죄 많은 육체에 거한다면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 성서에서 권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죄 많은 육체'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적으로 비성서적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육체 혹은 물질도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영만이 죄에 대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단지 영혼만이 죄의 거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결단과 자유의지의 근원인 영혼만이 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과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웨슬리의 관점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 아닌 선의 타락이며 육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이점이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의 전적 회복의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와 거룩한 삶의 가능성에 근거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B. 인간의 타락과 생래적 죄(원죄)
1. 인간 안에 하나님의 형상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 존재가 지닌 어떤 재능 혹은 능력과 동일하다고 여겨왔다. 웨슬리 시대의 이신론자들은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시켰고, 웨슬리 이후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양심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 이들은 이성과 양심을 본래 내재적인 것으로 본 반면에 웨슬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이것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적인 면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로까지 반사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창조된 인간이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 도덕적 형상(moral image),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석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에서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첫째 웨슬리는 인간의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주장한다. 인간은 그를 만드신 분을 닮았기 때문에 이전에 존재하는 사실과 현재의 비교로부터 더 심오한 진리를 추론해 낼 수 있었으며,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었다. 웨슬리는 인간 이해력의 의로움(just), 분명함(clear), 신속함(swift), 위대함(greatness)을 주장한다. 두 번째 인간의 본성적 형상은 의지(will)이다. 웨슬리는 정의롭고, 명료하고, 신속하고, 포괄적인 이해력과 같은 것들은 인간이 원래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다고 하면서, 인간의 두 번째 자질인 완전한 의지(will)를 말한다. 그는 이 속성이야말로 실로 더욱 위대하고 더욱 고귀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력은 그러한 이해력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감정(affection)에 대해서 말한다면, 인간의 손상되지 않은 감정은 합리적(rational)이고, 공평(even)하였다. 타락 이전의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love) 그 자체였다. 사랑이 그의 영혼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의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곧 사랑으로서 이 사랑이 바로 그의 생동감 있는 열기였다. 사랑은 그의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따듯한 온기였다. 사랑의 불꽃은 그가 나온 하나님께로 타오르게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오히려 감정(affection)을 의미한다. 세 번째 인간이 가진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은 인간이 본래 즐겼던 자유(liberty)이다. 인간의 본성은 부패하지 않은 의지(uncorrupted will)와 완전한 자유(perfect freedom)를 누릴 수 있었다.
정치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이란 용어는 웨슬리가 아이작 왓츠(Isaac Watts)로부터 빌려 왔다. 웨슬리는 창 1:28과 시 8:6-8에 나오는 우주의 지배자의 개념을 정치적 형상으로 표현한다. 우주와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인간의 정치적 능력을 뜻한다. 인간의 정치적 형상이란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요, 왕자 같은 정치력을 부여받은 자로서 창조주와 그의 피조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채널의 역할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배와 통치를 받는 피조물들도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본성적 형상(natural image)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self-motion), 이해력(understanding), 의지와 감정(will, passion), 그리고 선택의 자유(liberty, power of choice)를 갖고 있다.
도덕적 형상이란 본성적 형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성적 형상은 영의 이해와 감정과 결단의 기능이라면, 도덕적 형상은 영적 기능에 의해 형성되는 영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도덕적 형상은 피조된 인간 속에 있는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곧 의로움(righteousness)과 참 거룩함(true holiness)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의 순간에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하나님의 본성적 형상과 도덕적 형상을 부분적으로 상실하였다.
2. 인간의 타락
웨슬리는 인간이 피조되었으며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기본적인 확신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그는 인간 자신의 실존과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이야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의를 통하여. 여기에 우리의 축복과 하나님의 부요하시고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근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은총의 원인은 인간의 공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 혹은 효과는 단지 용서만이 아닌 생명, 영광으로 이끄는 신적인 생명이다.
오늘날 바로 우리의 생명,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것도 역시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우리는 그것을 가지거나 행하기에 아무 가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은 모두 그의 자비의 표적들입니다. 사람 안에 어떤 의가 있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것으로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든지 간에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으로서 창조를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 다음과 같이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
모든 시대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라는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 진리를 확고하게 보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의 근원인 하나님과 아주 유사하다고(likeness) 주장했습니다. 즉, 인간에게서 여전히 신적 부모(Divine Parent)의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웨슬리는 이어서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성을 얼룩지게 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무수한 불완전함은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하고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언급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어거스틴처럼 마니교적 선과 악의 이원론적 창조를 공격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곧 일원론적 창조를 주장한다. 또한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름답고 선하게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혜롭고, 미덕을 지니고, 행복한 피조물이 어떻게 이러한 완전성을 박탈당했는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가? 웨슬리는 쉽게 대답한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인간은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인간은 실패하고 죄를 짓게 된다. 즉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유롭고 선한 본성을 스스로의 의지로 상실하고 타락하고 부패시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죄는 인간이 자유를 남용함으로 인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죄의 첫 번째 결과는 인간의 육체에 나타났다. 이 불멸의 존재(육체)가 멸망을 옷 입게 되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육체의 동료인 영혼에 두 번째 충격이 가해졌다고 해석한다. 영혼은 그가 죽을 수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육체와 비슷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한 이성과 부패한 의지의 노예가 된 결과, 인간이 완전할 때 인간으로부터 흘러나오던 행복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세월은 얼마 되지 않지만 인간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게다가 인간의 능력은 쇠약해져 갔으며 세상에는 고통이 쏟아졌으며 하늘의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어리석고, 악으로 가득 찬 노예 상태가 된 인간에게 고통이 찾아왔다. 타락한 인간이 전적으로 상실한 부분은 바로 도덕적 형상이었으며, 은총으로 구원받은 인간이 회복할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도 도덕적 형상이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본성적 형상은 부분적으로 잃어버렸다가 은총으로 구원받았을 때 부분적으로 다시 회복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는 강조하지 않은 이 도덕적 형상을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The End of Christ's Coming)"이라는 설교에서 본성적 형상과 비교하면서 본성적 형상과 함께 도덕적 형상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였음을 강조한다.
웨슬리는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라는 설교에서 이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인간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도덕적 형상이 완전히 상실하였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거룩하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으며 죄책 의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로 전적으로 상실된 도덕적 형상과 부분적으로 상실된 본성적 형상이 회복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성결에의 참여자(partakers of His holiness)'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에서 웨슬리의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은총의 개념이 나타난다. 이렇게 새롭게 회복된 상태는 아담의 타락 이전보다 더 훨씬 높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을 상태 보다 훨씬 더 높은 거룩함과 영광의 상태로 회복된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를 사하시고 구속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 시킴으로 훨씬 더 나은 구원의 상태로 회복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웨슬리가 은총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할 때는 본성적, 정치적, 도덕적 형상 중에 대부분 도덕적 형상을 의미한다. "거듭남(The New Birth)"이라는 설교에서 보면 웨슬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주로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웨슬리가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 중에 도덕적인 형상을 집중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도덕적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시키는 참 의와 참 성결(real righteousness and real holiness)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짐승들과 달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응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간들은 영에 있어서 최고의 선에 예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사랑의 거룩한 기질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죄의 상황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도덕적인 형상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이 왜 있는가?"라는 물음에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웨슬리는 죄의 가능성을 특별히 지, 정, 의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본성적인 형상과 연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시한 것은 도덕적인 형상을 정형화하는 요소인 선과 악을 선택하게 하는 결정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다. 다른 말로 도덕적인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죄의 유해한 효과 때문에 왜곡되어지고 방해받을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도덕적 형상은 인간의 영화 혹은 타락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이 점이 웨슬리가 도덕적인 형상을 주요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이유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은 도덕법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법은 단지 영원히 지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부패하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피조되어진 근원적이고 자연적인 본성의 표현이다. 즉 도덕법은 의와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거울의 역할을 한다. 이점이 하나님의 본성과 피조되어진 근원적 인간의 본성 사이에 유사성을 드러낸다.
3. 생래적 죄(원죄)
1) 원죄론 확립의 역사적 배경
웨슬리에게 있어서 원죄에 대한 교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였기에 1756년에 웨슬리는 방대한 양의 논문『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를 저술한다. 이 논문은 비국교도 목사인 테일러(John Taylor)박사의 원죄 교리에 대한 대응으로서 저술되어진 것이다. 웨슬리는 테일러 박사를 마호멧과 비견될 정도로 기독교에 위험을 주는 인물로 경계하고 있다.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테일러 박사의 논문은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서 원죄 교리의 타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고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웨슬리는 원죄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이다. 그 논문의 첫 번째 장은 테일러의 원죄 교리에 대한 응답이고, 그 나머지 장들은 헤브덴(Samuel Hebden)과 예닝스(David Jennings), 왓츠(Isaac Watts), 보스톤(Thomas Boston)에게 대부분 빚진 것들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는 너무 방대했기에 몇 년 후에 웨슬리는 이 교리를 요약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설교로 출판한다.
웨슬리는 테일러와 그 시대의 이신론자들, 즉 톨란드(John Toland)와 틴달(Matthew Tindal)등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원죄(Original Sin,1759)"라는 설교 속에서 이 핵심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여전히 이교도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또한 같은 설교에서 "본성적으로 인간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이교도로부터 성서적인 기독교를 구별하는 척도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다른 칭호를 붙이든지 간에 기독교와 이교간의 차이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는 자는 이교도임이 분명하다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많은 악덕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될 현명함과 덕스러움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하게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선하게도 될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창조되었을 때의 아담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덕스럽거나 현명하였다'고 노골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이 사실을 검토해 볼 수 있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까? 사람에게는 모든 선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된 것입니까? 사람의 영혼은 전적으로 부패된 것입니까? 혹은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할 뿐입니까?' 이 사실들을 그렇다고 긍정한다면 당신은 그만큼 기독교인이 되고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아직까지도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가 집중했던 관심은 바로 구원에 관한 문제였기에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에 반대했던 것처럼 테일러의 원죄에 대한 교리를 반대하게 된 것이다. 웨슬리의 구원론에 있어서 일관되게 흐르는 특징인 하나님의 은총의 우선성에 큰 위협을 주는 펠라기안적인 인간이해, 특히 원죄를 부정하는 견해를 웨슬리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원죄(Original Sin)를 대신하는 생래적 죄(Inbred Sin)
원죄라는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웨슬리는 주로 원죄라는 용어를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과의 대화시에 사용하였다. 특히, 테일러에게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원죄라는 용어에 대한 모호성이『원죄에 대한 교리: 성서, 이성 그리고 경험에 의해서』와 "원죄(Original Sin)"라는 설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인간의 죄악성의 실체를 강조하고자 할 때, 원죄(original sin)보다는 오히려 '생래적 죄(inbred sin)', '내재적 죄(inbeing sin)', '타락한 죄악된 본성(corrupt sinful nature)', '육욕의 사람(carnal mind)', '태생적 죄(birth sin)', '내적 죄(inner sin)'등과 같은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그의 평신도 설교가들에게 설교 44번 "원죄(Original Sin)"을 이야기할 때, 그 제목을 항상 "내재적 죄(Inbeing Sin)" 혹은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로 부르고 있다.
이렇게 원죄(original sin)라는 용어를 피하고자 한 이유는 웨슬리의 관심의 문제였다. 그는 물론 전가된 죄책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이 각각의 인간을 책임적으로 치리하고 계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기독자의 응답 가능한 삶에 더욱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하기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관심은 인간 본성 안에 죄의 현재적인 오염에 더욱 집중하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 은총으로 인해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벗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실질적인 문제는 아담의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타락과 손상의 문제만으로 국한된다. 웨슬리는 특히 원죄의 죄책이 실질적으로 없어졌음을 어린아이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어떤 어린아이라도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으로 인하여 지옥에 갔거나 갈 어린아이는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아담의 죄책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가 일종의 인류의 죄(racial sin)에 대해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는 어린아이조차도 죄인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즉 웨슬리는 원죄의 죄책과 그 결과로서의 인간 본성의 부패가 모든 인류에게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의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를 전가된 죄책(imputed guilt)과 유전된 부패(inherited depravity)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 때부터 죄가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적인 죄의 과정으로서 나중에 저지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과정 이전에 "진노의 자녀들"이기에, 어느 정도 진노와 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의 분명한 의미 속에서 취해진, 명백한 본문으로부터 우리는 신적인 용어인 전가된 원죄와 유전된 원죄에 대하여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아담의 죄인데,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 들어 있는 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후자는 본래적 의로움의 결핍이며 본성의 타락인데, 그것이 유년기 때부터 우리가 선한 것을 싫어하고 악한 것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여기서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는 이 구절에서 웨슬리는 분명히 이 교리를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성 어거스틴과 그 시대의 다른 기독교 저술가들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담의 범죄함으로 기인한 죄책(guilt)과 부패(depravity)가 어떻게 아담의 후손에게 전가되는가의 문제를 드러낸다.
3) 생래적 죄(Inbred Sin; Original Sin)의 유전성 문제
서방 기독교는 원죄의 전가에 대한 문제를 영혼 창조설적인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이해를 해왔다. 그런데 웨슬리가 과연 원죄의 죄책에 대한 전가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는 참으로 흥미 있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그의 원죄의 죄책에 대한 전가 문제의 이해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원죄의 유전성 문제에 있어서 올더스케잇 체험 이전에 웨슬리는 현재 인간의 타락이 생물학적인 전이의 영향이라는 측면으로 기울어 있었다. 1730년에 설교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먹었기에 그들의 피를 혼탁하게 하는 요소들을 함유하는 체액을 가지게 되어서 결국 그들은 죽게 되고 육체적으로 무질서해지고, 그들의 능력이 손상되어지는 결과가 발생했다고 본다.
죄의 첫 번째 결과는 그의 육체에 나타났습니다. 이전에는 불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체 안에는 타락의 씨앗이 없었으며 밖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육체의 본래적 입자들은 부패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을 위해서 추가된 입자들은 본래의 입자들의 본성(native substance)과 결합할 수 없었으며, 본래의 입자들은 보충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추가된 입자들은 본래적 입자들의 어느 부분과도 결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섞여진 두 본질들은 섞이기 전과 똑같은 성분을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으며 이 본질들을 담고 있는 그릇들은 섞이기 전과 똑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여전히 깨끗하고 열려져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금지하는 명령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담의 죽음에 대한 오래된 논제'를 갱신하고자 하는 시도가 담겨있다. 루터는 "아담이 순종했었더라면 그는 결코 죽지 않았을 것이다. ... 그가 창조된 상태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육체적인 생명이 요구하는 다른 일을 행했을 것이며, 마침내 그는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웨슬리는 새로운 생리학(Harvey, Cheyne, Weemes등)이 이러한 전통을 확인해 준다고 믿었다. 즉 인간 유기체는 해독한 물질에 의해 타락되지 않았다면 무한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후손에게 본성의 부패의 중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웨슬리의 전적 성화(완전)에 대해 반대하는 옛 동료 톰슨(Richard Tompson)으로부터 1755년에 받은 편지와 테일러의『원죄에 관한 성서적 교리(The Scripture 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에서 대두된 물음이 그로 하여금 원죄의 전이에 관한 생물학적인 관점을 차츰 포기하게 만든다. 즉, 어떻게 죄에서 완전히 자유한 부모로부터 부패한 본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 웨슬리로 하여금 원죄의 생물학적인 전이론을 포기하게 한다. 이후에 웨슬리는 종교개혁가들의 원죄 교리에 포함되어진 '전가되어진 타락(imputed depravity)'과 '죄된 육체(sinful body)'로 표현되어지는 영혼 창조설적 입장에 대한 옹호를 시작함으로서 그의 원죄에 대한 교리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웨슬리는 원죄 혹은 생래적인 죄가 어떻게 전이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1762년까지는 약간은 모호한 태도를 가졌다. 웨슬리는 "성서에 의해서, 경험에 의해서, 나는 그 사실을 안다. 나는 그것이 전이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어떻게 전이되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알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1762년 아마도 웨슬리는 울노어(Henry Woolnor)의 『영혼의 참 기원(The True Original of the Soule)』을 접하고 영혼 창조설적 관점에서 영혼 유전 전이설에 대한 관점으로 선회를 한 것으로 보인다. 웨슬리는 출생시에 아담의 자손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인류의 첫 부모에게 속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책과 그 결과들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된다고 본다. 즉 인류는 아담 안에서, 아담과 함께 타락하였기에 출산시에 타락한 영혼이 전이되는 결과가 발생한다. 웨슬리는 1762년 그의 『신약 성서 주해』를 영혼 유전 전이설적인 입장에서 개정한다. 그는 히브리서 12장 9절의 주해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이 세상이 시작될 때에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개정의 요점은 우리의 영혼이 아담의 사슬에 있고 우리의 부모를 통해서 우리가 출생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영혼의 유전 전이설적 인간론을 1782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다. 웨슬리는 그 해 아르미니안 메거진(Arminian Magazine) 5월 호에서 울노어의 책에 많은 영향을 받은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the Soul)"라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입장에서 1782년에 그의 초기 설교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의 창조와 타락이라는 주제를 다시 한번 "인간의 타락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라는 설교로 피력한다.
4) 원죄의 결과
아담의 죄책으로 인한 결과는 웨슬리의 설교 "원죄(Original Sin)"에 잘 나타나 있다. 원죄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드러난다.
먼저 인간은 무신론자로 세상에 태어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를 알지 못한다. 즉, 은총을 받기 이전의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력(understanding)은 우리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이끌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 지식을 갖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고립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들을 삶의 수단의 중심에 놓음으로서 일종의 우상숭배에 열중하게 된다. 마땅히 하나님께 집중해야할 경외를 우리 자신에게 향하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숭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일부가 잘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옳은 길을 목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간에 그들은 자기 자아를 벗어나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위해 행합니다. 그들의 자연적,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 행위들은 그것들이 어떤 것에 기인하건 간에 모두다 죽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죽음의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무신론과 우상 숭배는 자만에 근거한다. 그것들은 자기 영광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죄와 기만의 힘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그것들을 깨뜨릴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왜곡으로서의 죄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는 루터와 어거스틴의 죄의 이해와 그 맥을 같이한다.
세 번째, 아담의 유산은 자기 의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교만만이 우리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허물이 되는 유일한 종류의 우상숭배는 아닙니다. 사탄은 역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기 의지라고 하는 그의 형상을 색인해 놓았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기 전에 '나는 북방으로 가서 내 창조자의 뜻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의지와 기쁨을 누리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을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네 번째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탄의 형상을 지니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사탄을 떼어놓게 됩니다. 우리가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 사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원죄의 네 번째 특성은 다음과 같은 구성요소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소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등이다.
결국 불신앙, 자만, 자기 의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은 인간이 아담과 이브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은 완전히 잃어버렸고 자연적, 정치적인 형상은 크게 손상되었기에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전가되어지는 유산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있는 인간의 현재적인 영적 상태는 어두움과 처절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웨슬리는 철저히 종교 개혁전통에 서서 인간의 자연적인 상태를 전적 타락의 상태로 보았으며 이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은총 외에는 없음을 끊임없이 여러 편의 설교들 속에서 주장해 왔다.
당신은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에 있어서 타락해 있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전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물론 존재되는 원천에 있어서도 말입니다.
인간 마음 안에 생각의 모든 상상은 악합니다. 오로지 악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식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쏟아 나오는 불의와 부정의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 속에 너무도 깊고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기에 권능의 은총 외에는 그것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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