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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죄 이해 3

존 웨슬리의 죄 이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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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중기(1738∼65, 속죄의 법정적 특성의 유입)
1. 역사적 배경
영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배 안에서의 경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확증의 문제에 더욱 빠져들게 하였다. 믿음의 증거는 불신앙의 증거와 같은 방식, 즉 내적 감정의 문제였다. 이것은 이전에 가졌던 인식을 근거로 하는 확증에 대한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1738년 2월 7일 웨슬리는 피터 뵐러(Peter B hler)와의 만남을 통해 참 믿음은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뵐러와의 만남을 통해 구원을 위해서는 단지 믿음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이 지금 불신앙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한다. 자신이 불신앙의 상태에 있다고 확신한 웨슬리는 1738년 3월 4일에 뵐러를 만나 설교단을 떠날 결심을 말했을 때, 뵐러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설교하시오. 그러다 보면 믿음을 갖게 될 것이고, 그 때부터는 믿음을 설교하게 될 것이요"라고 권면한다. 조지아에서 모라비안의 원시 기독교적 모습에 감명을 받은 웨슬리는 이제 뵐러를 통해서 그들의 신학적 명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죄와 두려움과 의심을 없애는 확신에 대한 경험의 부족 때문에 웨슬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의 상태에 있다고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뵐러는 웨슬리가 자신의 신앙상태를 적절하게 깨닫고 인식하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웨슬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단지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assentia)이었다. 하나님께 전 존재를 걸고 신뢰하는 믿음(fiducia)이 체험되지 못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뵐러는 웨슬리에게 순간적인 회심(instantaneous conversion)이 성서적이라는 믿음을 주었고, 웨슬리는 증거를 찾으려고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웨슬리는 뵐러와 대화를 하면서 확신을 추구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선결조건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의 확신이 부족했기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 찰스 웨슬리의 회심 경험은 그로 하여금 확신의 모라비안적인 경험(순간적 구원의 확신)이 자신에게도 멀지 않은 미래에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그러하기에 1738년 5월 34일 저녁의 올더스케잇 체험은 자연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대가 충족되어진 시간이었다. 이 체험을 통해서 웨슬리는 믿음에 정도(a degree of faith)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의 정도에 대한 개념은 웨슬리로 하여금 그가 초기에 신비 영성가들에게 영향받았고 두려움 속에서 확증(assurance)을 추구하게 만들었던 신앙과 불신앙(belief and unbelief)의 이원론을 극복하게 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 웨슬리는 6월 18일 옥스퍼드의 성 메어리 성당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라는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이 설교가 나중에 출판된 그의 설교집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The Salvation of Faith)"이라는 제목으로 첫 장에 편집되었다. 웨슬리는 그 설교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형의 그릇된 믿음, 즉 이교도의 믿음, 악마의 믿음, 심지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도들이 가졌던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최근에 있었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확신 있게 언급하면서, 죄와 두려움과 죄의 구속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참 믿음을 현실에서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설교를 끝맺었다. 이러한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1746년에 출판된 설교들 중 이 시기부터 설교되어졌던 5편의 설교들은 모라비안으로부터 배운 루터의 신앙의인화 복음을 본질적인 중심 내용으로 하고있다.
1738년 6월 4일 웨슬리는 독일의 마린보른(Marienborn)과 헤른후트(Herrnhut)에 있는 모라비안공동체(Moravian communities)를 방문했다. 웨슬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후에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조직유형 중 밴드(band)등을 감리교 조직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1738년 9월 17일 새로운 확신을 얻고 영국으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곧바로 웨슬리는 성화를 의인화 안에 함몰시키며 동시에 죄의 용서를 죄에서부터의 자유에 의미로까지 확장시킴으로서 발생할 수 있는 모라비안들의 정숙주의(quietism)와 신앙제일주의를 비판한다. 1739년 가을에 웨슬리는 몰더와 논쟁하였다. 몰더는 페터레인 신도회 내에 참 종교가 없다고 말하면서 모든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그만 두어야 하고, 모든 경건의 선행도 그만 두고 대신 시 46:10 말씀에 따라 주님 앞에서 조용히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질 때까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런 은총의 수단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주장이 신자들로 하여금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에 빠지게 만든다고 공격하였다. 악행을 피하는 것, 선행을 실천하는 것, 은총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삼중적으로 성도의 영성생활에 필요한 것임을 웨슬리는 힘주어 강조하였다. 이점은 모라비안뿐만 아니라 칼빈주의자들과의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1739년에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의 예정에 관한 교리로 인해 그를 야외 설교단으로 인도했던 옥스퍼드 시절의 제자 휫필드와 논쟁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휫필드의 부흥 운동 공동체에 퍼져 있던 예정에 대한 교리와 그 교리를 공개적으로 설교해줄 것을 요청하는 분위기는 웨슬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 자신을 보상으로 주셨다는 것을 선언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1739년 4월 28일 "값없이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라는 설교를 쓴다. 이 설교는 부분적으로 거의 치유되지 않았던 웨슬리와 휫필드 사이의 개인적 불화로 표시되는 영국 부흥운동의 주요 분열의 표징이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칼빈주의자들의 관점에 있는 예정에 관한 교리, 특히 유기의 교리(doctrine of reprobation)에 대해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또한 그 해 11월에 쓰여져서 설교되어진 기독자의 완전 성결에 대한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웨슬리 형제의『찬미와 성시집』(Hymns and Sacred Songs)의 출판은 휫필드로 하여금 웨슬리에게 유감을 표하게 한다.
1740년에는 웨슬리는 두 종류의 논쟁 속에 처하게 된다. 하나는 정숙주의와 관련한 모라비안과의 논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1739년에 시작된 예정론에 대한 논쟁이었다. 특히 표준 설교 중에 "은총의 수단들(The Means of Grace,1746)"과 "종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of Adoption,1746)"은 모라비안을 향해 있다. 결국 1740년 7월 18일 웨슬리는 그의 지지자 75명과 함께 페터레인 신도회를 떠남으로서 모라비안과 결별하게 된다.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방법이 성서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하는 방법으로 신비주의자들의 이론을 적용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예정론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1740년에 아주 특기할 만한 사항이 발견되다. 지속적으로 그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개념이 왓츠(Isaac Watts)의 작품을 확장해 발췌한『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관한 일련의 고찰들』(Serious Considerations of the Doctrines of Election and Reprobation)이라는 웨슬리의 논문 속에 발견된다. 그는 여기서 무조건적인 유기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소명을 경청하게 하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 그리고 그 구원을 받도록 하는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권능의 내적 충족함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1741년에 웨슬리는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설교 속에서 구원은 우리 안에 있는 손상되어진 하나님의 형상의 전적인 회복이고 그 완전함은 죄를 짓지 않는 우리의 소극적인 힘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힘의 회복이라는 것을 피력한다. 이런 예정의 교리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1741년에 당시 영국의 부흥운동 진영을 분열시킨다. 
여기 첫 번째 분열이 있었다. 그 분열 중에 우리는(warm men)는 휫필드씨로 하여금 단지 의견의 차이임을 설득하고자 했다. 사실 보편적 구속을 믿었던 이들은 전혀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한된 구속을 믿었던 이들은 그런 치명적인 오류 속에 있는 이들과는 결코 친분을 맺을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인해 어떤 화해에도 귀를 기울이지 안았다. 그래서 현재 두 종류의 메소디스트가 있는 것이다.
1740년부터 1741년 사이에 있었던 예정론 논쟁은 웨슬리에게 예정론을 '본질적' 교리의 측면 속에 놓게 했지만, 신학적 사유가 더욱 성숙되어진 1770년대에 그는 예정론을 하나의 '의견'으로 분류한다.
사실 웨슬리의 주요 관심사는 신자 안의 '마음과 삶의 성결'의 배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에 반대를 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런 성결의 삶을 위해 야외 설교, 성서주해, 속회 조직, 은총의 수단들을 활용하였다. 이런 그에게 성결의 삶에 큰 방해물인 칼빈주의의 율법폐기론적 경향과의 논쟁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1746년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faith alone)'에 관한 설교들을 중심으로 편집한 설교집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강조한 "성령의 첫 번째 열매(The First Fruits of the Spirit)"에서는 죄의 법정적인 측면과 치유적인 측면의 조화의 노력이 시작된다. 이 노력은 그의 평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신자의 죄의 문제에 관한 중기 웨슬리의 견해는 1761년에 쓰여진 "기독자의 완전에 대한 더 깊은 고찰들(Father Thoughts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1762년의 "방황하는 생각들(Wandering Thoughts)", 1763년에 쓰여진 "신자 안에 죄(Sin in Believers)"라는 설교들 속에서 알 수 있다. 또한, 1767년에 쓰여진 "신자의 회개(The Repentance of Believers)"에서는 원숙되어진 웨슬리의 견해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웨슬리는 과정으로서의 완전과 관련되어진 신자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방황하는 생각들(Wandering Thoughts,1762)"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방황하는 생각들(Wandering Thoughts)'이 소위 적절한 죄의 종류에 포함되어져서는 안되다고 밝히고 있으며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를 구분한다.
1748년에 두 번째로 출판되어진 설교들에서는 본격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faith alone)'과 '거룩한 삶(holy living)'이라는 웨슬리 신학의 두 축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한다. 이 설교들 중에 "거듭남의 표징들(The Marks of The New Birth)",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에서는 거듭남과 의인화를 구분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례에 어떤 은총적 힘이 항상 작용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더스케잇 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듭남이 의인과 확증에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에서 마음의 변화를 세례와 연관지었지만, 여기서는 복음적 회심과 연관시킨다. 또한 1748년과 1750년에 출판되어진 그의 열세편의 산상 수훈 설교들은 신앙 의인화의 열매로서 기독자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목적은 의인화의 믿음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이의 균형과 통합에 있었다.
1750년에 세 번째로 출판된 웨슬리 설교문들 중에 세 편은 도덕법, 다른 세 편은 영국 국교회와의 관련 속에서 형성되어진 것들이다. '내재적인 의(inherent righteousness)' 때문에 '믿음에 의한 구원'과 '거룩한 삶'에 대한 웨슬리의 미묘한 균형잡기는 가장 큰 잠재적인 위험을 발생시켰다. 그 위험은 바로 도덕주의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율법의 기원, 본질, 특성들, 그리고 용법(The Original, Nature, Properties, and Use of the Law)", "믿음에 의해 세워지는 율법, 논의 1,2(The law Established Through Faith, Discourse Ⅰ&Ⅱ)"라는 설교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역동적인 상호 의존을 다루고 있다. 
1740년 여름부터 웨슬리의 저술을 도운 토마스 리차즈(Thomas Richards)와 토마스 웨스톨(Thomas Westall)은 사실 웨슬리가 요구할 때 어디에나 가서 설교하는 전임 평신도 설교가였다. 이러한 평신도 설교가들이 1745년에 이르러서는 무려 오십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1749년 연회 후 순회설교제도를 만들면서 협동 설교가들의 임무가 정해졌다. 감리교 운동이 점차적으로 평신도 운동의 형태를 띄어 감에 따라 영국 국교회는 이전에 있었던 종교적 갈등이 다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의 시각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영국 국교회의 이러한 우려와 관련해 웨슬리는 "열광주의의 본질(The Nature of Enthusiasm, 1750)"이라는 설교에서는 감리교 운동이 광신주의(fanaticism)와 동일한 의미의 열광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이고자 했으며, "편협한 신앙에 대한 주의(A caution against Bigotry,1750)"에서는 당시 국교회에서 발생했던 평신도 설교가들을 세움으로서 또 다시 종교적인 분열이 일어날까 걱정하는 경향에 대하여 그 걱정이 기우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보편 정신(Catholic Spirit,1750)"에서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이 영국 국교회의 신학방법론인 비교리적인 신학방법론의 전형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핵심교리'와 '의견'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칼빈주의자들과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그의 말년에 쓰여진 설교인 "신적 존재의 통일성(The Unity of the Divine Being,1789)"에서는 핵심 교리와 의견의 사이의 구분이 그리 엄격하게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의 말년에 칼빈주의자들과 화해의 노력과 관련 있다.
18세기 예정에 관한 논쟁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 중에 하나는 옥스퍼드 시절에 그의 학생이었던 허비(James Hervey)와의 저술 교환이었다. 이 저술 교환은 웨슬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교리를 확립하게 한다. 허비의 주요 작품은『테론과 아스파지오』(Theron and Aspasio)로서 세 권으로 되어 있다. 주로 성서에 관한 교리들, 원죄, 속죄,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의 덧입혀지는 의(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에 관해 다루고 있다. 사실 웨슬리는 허비의『테론과 아스파지오』의 많은 부분을 긍적적으로 보았고 높이 평가했다. 테일러 박사(Dr. John Talyer)의 잘못된 관점에 반대하여 1756년에『원죄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를 출판했을 때, 웨슬리는 "허비씨의 대화들 속에는 이 주제에 대한 매우 탁월한 언급들이 있다."고 쓰기도 했다. 또한 익명의 저자로부터 허비가 공격받을 때에도 웨슬리는 그를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허비의 '그리스도의 덧힙혀진 의'의 특수한 구절의 사용에 강하게 반대한다. 왜냐하면 허비의 의와 의인화에 대한 견해는 비성서적고 성화와 성결을 취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웨슬리는 허비의 율법폐기적인 경향을 경계했던 것이다. 웨슬리의 논적이었던 허비(James Hervey)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래 어떤 성도도 율법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이러한 율법폐기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죄 짓게 만드는 분)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힙혀지는 동시에 내재적인 측면에서 살피게 된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이 갱신되어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완전한 기독자는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이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는 말했다. "당신의 완전한 본성의 파트너로 나를 당신 안에 있게 하소서, 새로운 죄 없는 피조물로."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를 확신시켜 준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의 의는 덧입혀졌을(imputed) 뿐만 아니라 내재적이(inherent)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재적인 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근거가 아니라 덧입혀지는 의의 열매이며 결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의를 심어(implant)주신다. 이것이 신자의 실제적인 변화로서의 성화와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원죄에 대한 교리는 지극히 중대한 문제였기에 1756년에 비국교도 목사인 테일러 박사의 원죄 교리에 대응하여 방대한 양의 논문『원죄에 관한 교리』(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을 저술한다.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테일러 박사의 논문은 계몽주의 시대에 있어서 이 교리의 타당성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고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낙관주의를 피력하였다. 이런 이유로 웨슬리는 원죄에 관한 논문을 쓴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원죄에 관한 논문은 너무도 방대했기에 몇 년 후에 이 교리를 요약하여 독자들이 읽기 쉽게 "원죄(Original Sin,1759)"라는 설교를 출판한다. 그는 이 설교 속에서 원죄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한다.
웨슬리는 "원죄(Original Sin)"라는 설교 이후로 칭의와 거듭남 이후의 신자의 죄에 관해서 다시 집중하고 있다. 1760년부터 1763년까지 작성하고 출판한 설교들 중의 상당수가 더욱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긴장 관계를 조화시키고자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의 설교 "거듭남(The New Birth,,1760)"은 초기 웨슬리의 견해였던 전통적인 영국 국교회 구원론에서 원죄에 대한 일반적인 치료약이 항상 교회에 있고 세례의 성례전에 있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거듭남을 복음적인 회심과 연관시키고 있다. "황야의 상태(The Wilderness State,1760)"에서는 기독자의 영적인 순례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어려움과 확증 추구에 있어서 일어나는 종교적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황야의 상태'는 회심전의 거듭나기 이전의 상태이다. "많은 유혹들로 인한 영적 무거움(Heaviness through Manifold Temptations,1760)"에서는 영적 어둠(실제적인 믿음의 상실과 기쁨의 전적인 상실, 신앙에서 불신앙으로의 퇴보)과 영적 무거움(종교적인 의기소침)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신자가 종교적 우울로부터 영적인 어둠, 즉 죄악된 절망으로 빠지는 것을 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기 부인(Self Denial,1760)"과 "악한 말에 대한 치유(The Cure of Evil-Speaking,1760)"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신자가 신앙에서 불신앙으로의 퇴보를 막기 위한 기독자의 삶 속에서의 프로그램적 요소들을 다루고 있다.
1750년대 말부터 1760년대 초에 웨슬리는 부흥 운동에서 발생하는 완전 경험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그의 신도회에 있는 많은 이들이 완전 경험을 증언하고 있음을 기록했다. 그런데 이런 현실 세계에서의 완전 경험을 극단적으로 끌고나간 열광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조지 벨(George Bell)과 토마스 멕스필드(Thomas Maxfield)였다. 그들은 신도회 내부의 인물들로서 의인화와 자기 검증, 개인기도 등을 평가 절하했다. 또한 이성과 지식, 지혜를 가볍게 여긴 반면에 감정과 내적 인상, 그리고 상상 등을 과대 평가함으로서 열광주의와 율법폐기주의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과의 논쟁이 정점에 다른 것은 1763년이었다. 조지 벨과 토마스 맥스필드에 의한 혼란은 많은 설교자들로부터 웨슬리에게 완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고 또한 웨슬리로 하여금 칼빈주의자들로부터 대단한 비난과 공격을 감수하게 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것이 "이 땅에 완전의 교리를 몰아내려는 악마의 계략"이라고 하면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완전 교리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는 설교자들에게 이 교리를 담대하게 설교하라고 촉구했고 만약 이 교리를 반대하거나 설교하지 않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를 면직시켜야한다고 선언했다. 웨슬리의 설교 "성령의 증거 담화 1, 2(The Witness of the Spirit Discourses Ⅰ&Ⅱ,1746, 1767)"가 이런 열광주의적 경향의 경계를 목적하고 있다. 이 논쟁을 통해서 완전을 지향점으로 하는 그의 구원관이 확고하게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다. 모라비안과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중심에는 완전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 완전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야기했던 아주 중요한 요소들 중에 하나가 죄 이해의 차이였다.
 

2. 중기 웨슬리의 죄 이해
초기의 웨슬리는 제레미 테일러와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고 윌리암 로 같은 신비영성가들에 의한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 중에 치유자로서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죄를 치유적인 면에서 보아 인간의 현실을 치료받아야 될 것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웨슬리에게 모라비안과의 만남, 특히 피터 뵐러와의 만남은 그의 신학과 삶의 한 전기를 마련해 준다. 웨슬리는 피터 뵐러로부터 '순간적인 회심에 의한 구원'과 확증에 대한 갈망이 용서의 확증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 확증의 결과로 죄, 의심,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여 평화와 기쁨과 신뢰로 가득 차게되는 경험을 원하였고 결국에는 올더스케잇의 체험이 그의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게 되었다. 결국 웨슬리는 모라비안을 통한 루터 신학과의 만남으로 속죄의 법정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38년 이전의 설교에서는 속죄에 대한 법정적인 관심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올더스케잇 체험이후의 설교들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관심과 그 결과로서의 죄책으로부터의 용서가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웨슬리의 믿음에 대한 이해가 바뀌게 되는데 초기의 웨슬리가 당시에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단지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에 대한 동의로서 이해했다면 1738년 이후의 웨슬리는 기독자의 믿음을 동의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정적인 신뢰를 수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즉 예수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또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우리들의 대속이시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화해되었다는 확실한 자신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성결과 구속',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구원이신 그에게 가까이 하여 결국 접붙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 웨슬리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법정적인 측면의 속죄에 대한 관점의 출현은 그의 구원에 대한 여정에 있어서 신앙 의인화(Justification  by Faith)의 종교 개혁적 전통에 대한 수용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초기 웨슬리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의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측면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웨슬리가 윌리암 로우와 같은 신비 영성가들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결국 올더스케잇 체험 이후의 구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된다. 그 구원은 현재적인 구원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든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죄책과 죄의 힘, 즉 아담의 원죄의 죄책과 자신의 행위의 죄책, 과거와 현재의 죄로부터 구원받는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이는 현세에서도 얻을 수 있는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과 그 죄의 결과에서의 구원을 일컬어 종종 칭의(Justification)란 말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광의(廣義)로 취할 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지금 그를 믿는 죄인에게 이뤄지는 죄책과 형벌에서의 해방을 뜻하며 또한 그 신자의 맘속에 형성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전체)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죄에서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 범위가 전체라는 것은 그들의 외적인 죄 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과 악한 기질을 포함한 그들의 심정의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 시기에 웨슬리는 칭의에 성화의 개념까지 포함하였다. 이것은 속죄의 법정적인 개념과 치유적인 개념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함을 반증하는 사실이다.
죄와 속죄의 법정적인 개념을 루터식 모라비안의 신학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받아들였던 웨슬리는 1740년대의 믿음의 정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모라비안이 구원에 있어서 오로지 칭의적 개념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인식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옥스퍼드 시절의 성결의 삶에 대한 성화적인 측면을 다시금 강조하게 된다. 웨슬리는 구원의 길(via salutis)에 구별적인 단계로서 의인화와 성화를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자의 경험의 범위 내에 유아기로부터 성숙기로까지의 성장이 있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감히 어떤 사람들이(모라비안)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구원이 즉시 주어진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순간적일뿐만 아니라 점진적이다."
비록 웨슬리는 1740년대 초에 '90퍼센트 기독교인(Almost Christian)'과 '온전한 기독교인(Altogether Christian)'을 매우 날카롭게 구별했지만 1745년 연회에서 그는 그 설교가 완전히 적절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감리교 설교가들에게 충만한 성화의 상태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의인화를 평가절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때부터 웨슬리는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힘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구별은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인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능케 한다.
구원에 있어서의 칭의적인 면과 성화적인 면의 혼동은 웨슬리의 죄와 속죄의 이해에 있어서 법정적인 면과 치유적인 면의 긴장관계를 가지고 온다. 이것은 올더스케잇 체험 이전에는 죄의 치유적인 면만을 강조하다가 모라비안의 만남과 올더스케잇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통한 죄의 법정적인 용서에 대해 강조를 하게 하지만 결국 거룩한 삶이라는 포기 할 수 없는 기독교 전통의 한 축으로 이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죄의 무거운 짐을 견디기 어렵게 느끼는 병든 사람들이 의사를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죄 있는 자들이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사상, 말, 행위에서의 그들 자신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에게만이 아니요 그들 자신의 양심에 의해서도 무수한 증인들에 의해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유죄로 선고받고 있는 자들이 큰 소리로 예수 안에서의 속량을 통하여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부르짖어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여전히 속죄의 법정적인 면의 우선성이다. 죄책으로부터의 용서에 대한 강한 강조가 우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기 이전에는 인간 본성의 치유와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썩어 있을 때는 열매도 썩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그 가운데 부어지기 전에는 필연적인 마음의 본질적 죄악성 때문에 병의 회복에 합당한 표징이 나타날 수 없다.
믿음에 의한 구원이 모든 죄에 대한 구원이라는 웨슬리의 동의는 한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 속에 남아 있는 죄의 문제였다. 즉, 의인과 거듭남 후에도 실재하는 신자 안의 죄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이미 소유하였지만 그들의 죄책의 기억이 남아 있고, 여전히 끊임없는 단점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였다. 즉 의지적 죄와 무의지적인 죄 그리고 행위의 죄와 내적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의 실질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웨슬리가 루터적인 해결 즉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개신교의 전통적인 해결방법에 동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웨슬리는 단지 신앙 의인화의 용서라는 속죄의 법정적 측면의 해결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루터의 신자 안의 죄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는 웨슬리 신학의 또 다른 한 축인 '거룩한 삶(holy-living)'과 상충되는 것으로 지상의 완전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게 하여 율법폐기주의적인 경향에 빠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기존의 두 극단과는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따금 신자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그의 판단(sight)을 잃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따금 어떤 어둠이 그로 하여금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속죄의 보혈 속에 있다는 것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내적으로 책망 받아 다시 죽음의 선고를 받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해진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자비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빛이 영혼을 비춘다는 의미에서 빛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누군가 이 빛을 잃어버리는 한 그는 그 순간 믿음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결코 그리스도 안에 참 신자는 믿음의 이 빛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믿음)을 잃어버리는 한 그 순간 그는 다시 유죄 판결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의 이름을 믿고 있는 이들의 경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령을 믿고 따라가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혹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정죄하시지는 않습니다.
웨슬리는 여기서 성도 견인의 견해로 인한 율법폐기주의적 경향과 과도하게 양심에 의존하는 경향들에 반대하여 제 3의 단초를 제안한다. 제 3의 단초라는 것은 믿음의 빛으로서의 확신(assurance) 은총이었다. 이 은총은 잃어버릴 수도 있고 되찾을 수도 있다. 중요한 구별점은 의지적인 죄들과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의 신자들은 죄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내적 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과 함께 걸어야하고 불완전한 순종을 통해 그들의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만 한다. 즉 기독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어 죄를 회개하면 항상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성령의 은총이 함께한다는 확신 속에서 성령과 함께 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죄의 남음(remains of sin)'을 회개하지 않으면 바로 다시 타락하는 의지적인 죄들이 그에게 발생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항상 깨어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faith alone)'과 '거룩한 삶(holy living)'의 긴장 관계의 해소를 그의 신학과 설교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은 바로 신자의 남은 죄(죄악성)에 대한 문제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748년 웨슬리는 신자의 남은 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해결의 단초를 제공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의 위대한 특권(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이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관계적 변화로서의 의인화와 실질적인 변화로서의 거듭남을 구분하면서 '소위 적절한 죄'와 '다른 결점' 사이에 대한, 즉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에 대한 조심스러운 구별을 시작한다. 그리고 외적 죄와 내적 죄에 대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다윗, 바나바, 베드로의 예를 들면서 신자가 외적인 죄에 빠지는 논리적인 순서를 설명한다. 내적 죄와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믿음을 상실하면 결국에 신자는 외적 죄를 짓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와 거듭남 후에 믿음의 열매로서 이해되어지는 기독자의 삶은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그리고 칭의의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께 법정적으로 죄 사함을 받은 신자에게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의 치유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따라서 웨슬리는 13편의 "산상 수훈 설교(Upon Our Lord's Sermon on the Mount 1-13)"에서 의인화의 믿음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이의 균형과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에 대한 웨슬리의 미묘한 균형 잡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한 심기워진 내재적인 의(inherent righteousness) 때문에 도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역동적인 상호의존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율법의 기원을 하나님 형상을 소유한 인간이 타고나는 도덕적 감각으로 보고, 율법에 기독론적인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율법의 특성은 성결과 의와 선이며 이 율법이 신자를 확신시키고, 회심시키고, 유지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방법은 설교자가 율법을 설교하지 않는 것이며,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믿음은 성결과 상관없는 것인 양 삶을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율법을 세우는 방법은 완전한 범위에서 우리의 교리(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의한 성서적 교리)를 설교함으로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 하셨던 것처럼 율법을 설명하고 강화시키는 것이며, 성결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믿음에 의한 구원'을 설교하는 것이고, 기독자의 심령과 삶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율법을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웨슬리에게 있어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결과이다.
신자의 죄의 남음의 문제는 원죄의 결과인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기인한다. 원죄의 결과로서 '전적 타락'이라는 부분은 종교 개혁가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지만 원죄의 죄책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으로 인해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벗어났다. 따라서 원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남아있는 실질적 문제는 아담의 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타락과 손상의 문제뿐이다. "어떤 어린아이라도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으로 인하여 지옥에 갔거나 갈 어린아이는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에 왔을 때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아담의 죄책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벌로서의 영원한 죽음은 원죄의 죄책에 기인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이다. 결국 기만, 탐욕, 정욕과 같은 행위의 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발생하지만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 덕택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따른다면 악으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은총에 의해서 우리는 이 경향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것을 선택해서 결국에는 행위의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본성의 죄악된 타락성과 행위의 죄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 가능성에 대한 전제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올더스케잇 체험 어간에 죄책의 문제, 즉 법정적인 속죄의 관점에 집중하였던 것이 이제는 그 중심 주제가 속죄의 치유적인 관점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병자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치유자로, 죄를 병으로 보는 관점에서 치유적인 죄의 특성을 더욱 강조하는 관점으로 무게 중심이 서서히 전이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종교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종교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 사실을 통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본질은               , 즉 병든 영혼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영혼의 위대한 의사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또한 모든 기능 전체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약품을 제공하십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일들을 믿는 신앙을 주심으로써 그 병을 고치십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한 마음을 통하여 교만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치료됩니다. 아집이라는 치명적인 병은 하나님의 뜻을 온유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용기로서 달성된 단념으로 인해 치료받게 됩니다. 병의 줄기가 되는 모든 종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최상의 치료제입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바로 참된 종교입니다. 사랑은 진정으로, 온유한 겸손 가운데에서 작용하며, 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뜻과 말씀을 사랑과 감사에 넘쳐 순종하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 당신은 종교의 위대한 목적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조상들의 죄로 인해서 완전하게 상실되었던 참된 거룩함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 당신의 병을 아십시오! 그리고 이 병의 치료법을 아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나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야 합니다. 날 때부터 당신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온전히 새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당신은 모두 죽었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아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죄 중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삶의 원리, 곧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주셨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병이 치료되었고, '모든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온전히 품을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칭의와 거듭남의 순간에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치유의 시작으로서의 거듭남은 회심과 관련 있다. 거듭난 후에 신자는 완전히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은 아니기에 그에게는 지속적인 영적 순례의 과정이 필요하다. 회심 이전의 '황야의 상태(The Wilderness)'에서 확신 경험 후의 칭의와 거듭난 자는 자신의 생래적 죄, 즉 본성의 전적인 부패에 대해 더욱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이런 부패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신자에게 종교적인 의기소침인 영적 무거움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이 영적 무거움이 영적 어둠, 즉 실제적인 믿음의 상실과 기쁨의 전적인 상실로 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영적 무거움이라는 유혹을 그의 자녀들에게 허락하는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자라나는 믿음에 비례해서 성장해 가는 소망과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결국에는 내적인 성결을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거듭남의 은총의 역사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의 은총의 역사 후에도 신자에게는 여전히 죄악성이 남아 있기에 두 개의 상반되는 세력 곧 '자연과 은총', 사도 바울의 용어를 따르면 '육과 영'이 공존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이들이 거룩하여졌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영적인 성장과 치유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그 순간 새로워졌고 깨끗해졌고 정결해졌고 성별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아직 온전히 새로워지고 온전히 깨끗해지고 온전히 정결해지지는 못한 것입니다. 육과 악한 성질이(비록 정복은 되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어 영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더욱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함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성실을 사용합시다. 그만큼 더욱 우리는 안에 있는 원수에 대항하여 깨어 기도하되 간절히 합시다. 그럴수록 더욱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우리가 혈과 육과 싸우고, 또한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싸울지라도 이 모든 것을 다 이룩하면서 이 악한 세대에서 견디어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십시다. 
결국 중기 웨슬리의 대부분의 설교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조화에 역점을 두었다. 즉 초기에는 죄의 치유적 관점에서의 '거룩한 삶' 중심적인 신학과 목회적 초점을 두었지만 올더스케잇 체험으로 인해 웨슬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종교 개혁의 모토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나 웨슬리는 곧바로 극단적인 신앙제일주의가 정숙주의나 율법폐기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여 알게 된다. 이런 까닭에 웨슬리는 초기에 지향했던 '거룩한 삶'의 비전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비전을 조화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지 법정적인 면만 혹은 치유나 회복적인 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법정적이며 동시에 치유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D. 후기(1765∼91, 죄와 속죄의 치유적인 특성과 법정적 특성의 조화)
1.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정숙주의자들과의 논쟁, 예정론자들과의 논쟁,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의 신학을 성숙시켜 나갔다. 또한 1760년대 중·후반부터 그의 신학의 핵심인 구원의 길(via salutis)이 보다 명확하게 정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저작들을 쓰고 출판해낸다. 이 시기에 쓰여진 웨슬리의 중요한 설교와 교리적 에세이는 "구원의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1765)", "기독자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1766)", "성령의 증거, 담화 2(The Witness of the Spirit, Discourse Ⅱ,1767)", "신자의 회개(The Repentance of Believers,1767)"등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신학의 두 축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성숙한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의 인간 상황의 변화와 책임성을 조리 있게 이끌어내고 있다. 특히 "구원의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 1765)"는 웨슬리의 이정표적인 설교들이다. 이 설교들에서 웨슬리는 구원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을 조화롭게 연결시키고 그 연결의 고리로서 주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ord)가 우리에게 덧입혀지고 심겨짐을 말하고 있다.
1760년대 말에 웨슬리는 토플레디(Augustus Montague Toplady)라는 당시의 영국 국교회 복음 성가 작사자와 예정론에 관한 문서 논쟁에 휩싸인다.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안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은 이 논쟁으로 인해서 감리교 운동 진영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1760년대에는 보다 넓은 범위인 영국 국교회까지 퍼지게 되었다. 웨슬리와 토플레디는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하였다. 특히 1770년에 웨슬리는 가장 극단적이고 매력 없는 형태로 칼빈주의의 관점을 소개하면서 서론과 결론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의견을 첨가한 토플레디의『절대적인 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을 요약 출판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0명중에 1명이 선택되고 20명중에 19명이 유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선택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더라도 유기된 자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이것을 믿습니까 혹은 지옥에 있겠습니까. 저를 보십시오. A--- T---.
토플레디의 예정론적인 경향에 대해서 웨슬리가 반대한 이유는 토플레디의 견해가 지나치게 인간의 응답 가능성을 무시하여 결국에는 율법폐기주의적인 경향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정에 관한 가장 파괴적인 마지막 논쟁이 1770년대에 발생했다. 이 논쟁은 그의 설교자들과 함께한 웨슬리의 1770년 연회록과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1770년 연회의 "그것(신도회)이 침체되어 가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28번 물음에 대한 대답의 6번 항목인 "당신의 교리에 주의하라"였다. 그는 여기서 신도회의 쇠퇴의 원인을 과도한 칼빈주의적인 경향으로 보았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응답적인 행위의 측면인 행함과 보상의 문제를 강조하였고 행위와 현재의 내적 기질이나 외적 기질에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거나 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신실함과 행함에 힘쓸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일단의 칼빈주의자들은 웨슬리가 '행위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works)'의 교리를 퍼뜨리고 있다고 오해했다.
사실 이 논쟁의 중심은 헌팅턴 백작부인(the Countess of Huntingdon)과 존 플래처(John Fletcher) 목사였다. 헌팅턴 백작 부인은 1770년 연회에서 지적한 성화의 과정 속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행함에 대한 웨슬리의 교리적인 이해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웨슬리의 목사들을 자신의 교회에서 배제시켰으며, 그의 삼촌 월터 셜리(Walter Shirly)의 충고에 따라서, 기독자의 완전을 주장한 자신의 학교 선생인 벤슨(Joseph Benson)을 해고했다. 그러자 당시 그 학교의 학장이었던 플레쳐는 쟁점이 되었던 웨슬리의 1770년 연회록이 율법폐기주의를 향해 있기에 율법주의자의 위험한 오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변증적인 어조와 완곡한 표현으로 웨슬리의 교리적 견해를 지지하는 12페이지의 소논문을 쓰면서 학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와 칼빈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을 화해시키고자한 플레쳐의 노력으로 1771년 연회에서 웨슬리와 칼빈주의자들은 타협점을 찾게 된다. 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53명이 "1770년 8월 7일 런던에서 작성되었던 연회 회의록은 교리적 논점이 행함에 의한 의인화를 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현재 그 연회에 참석했던 웨슬리 목사와 다른 참석자들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행함에 의한 의인화의 교리를 혐오하고 있으며. ... 행함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처음과 나중의 구원의 공로가 되지 않는다"라는 요지에 선언에 동의를 한다. 헌팅턴의 삼촌 월터 셜리가 이 결과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리챠드 힐(Richard Hill)은 1771년 6월에 파리에서 마틴 메던(Martin Madan)과 발쉬(Father Walsh)신부를 만나서 1770년의 감리교 연회록을 보았을 때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이 너무 펠라기안적이다라고 공격한다. 1772년에 펴낸『웨슬리 목사에 의해 가르쳐진 모든 교리들에 대한 개관』(A Review of all the Doctrines taught by the Rev. John Wesley)에서 힐은 웨슬리 목사와 플레처 목사가 전적으로 트렌트 공의회적인 관점 속에서 행위에 의한 두 번째 의인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의 완전에 대한 입장은 펠라기안과 아나벱티스트, 그리고 진젠돌프처럼 '죄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이라고 분류하며 공격하였다. 그리고 1773년 겨울 힐은 Logica Wesleiensits, or Farrago Double-Distilled를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이전의 웨슬리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힐의 공격에 웨슬리는 이전의 온건한 대응에서 급선회를 하게 된다. 힐의 공격에 웨슬리는 1772년 9월 9일에는『힐 씨의 '존 웨슬리에 의해 가르쳐진 모든 교리에 관한 개관'에 관한 언급들』(Some Remarks on Mr. Hill's 'Review of All The Doctrines Taught by Mr. John Wesley)를 1773년 3월 14일에『힐 씨의 'Farrago Double-Distilled'에 관한 언급들』(Some Remarks on Mr. Hill's 'Farrago Double-Distilled')을 출판한다. 웨슬리는 이 두 작품에서 완전에 대한 교리를 변호함으로서 기독자의 성결에 대한 그의 입장을 강화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율법에 대한 의지적인 위반들로서의 죄와 의지적인 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완전법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연약성들'을 구별한다. 그는 장성한 신자는 전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지적이면 죄가 되고 무의지적이면 죄가 되지 않는 분류하기 어려운 '놀람의 죄들(sins of surprise)'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완전을 다름 아닌 성 요한이 말한 완전 사랑 즉 우리 주 하나님을 온 마음과 지성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해 진 이들이 구원으로 견인됨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10년 전부터는 완전을 경험한 이들도 다시 타락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웨슬리는 같은 해 여름에 "예정에 관하여(On Predestination,1773)"라는 설교를 출판하였다.
 1774년에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옹호로서『필연에 관한 고찰』(Thoughts Upon Necessity)을 출판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대적자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그가 보았을 때 잠재적인 율법폐기론적 경향이 있는 칼빈주의로부터 인간의 응답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함에 있었다. 웨슬리는 모든 필연주의자의 관점이 하나님을 죄의 주인으로 만드는 논리적 귀결로 연결되어지며 또한 "그것은(필연의 교리)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 인간 행동의 모든 도덕성을 파괴하기"에 칼빈주의의 결정주의적인 관점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는 이 교리적 에세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의 힘을 주시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점은 분명하게 그의 선재적인 은총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관점이다.
1776년 연회에서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의 성도의 최종 견인의 교리를 하나님 사역의 지대한 방해물로 지적했다. 그리고 웨슬리는 설교가들에게 자신과 플레쳐(Fletcher), 샐론(Sellon)의 작품들을 읽고 보편적 구속(universal redemption)을 지속적으로 설교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그 연회록 마지막에 웨슬리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역병(칼빈주의적 예정론)을 중단시킬켜 달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라는 권면하였다. 그러나 1777년에 출판된『하나님 주권에 관한 고찰』(Thoughts Upon God's Sovereignty)에서 웨슬리는 보다 온건한 어조로 칼빈주의와 화해를 시도한다. "한 훌륭한 사람에게, 저는 전체 문제가 단 한가지의 요점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자로서 그 분은 단지 그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십니다. 그러나 통치자로서 그는 단지 주권으로만이 아닌 의와 자비에 따라서 행동하십니다." 영국 국교회와 39개조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웨슬리는 예정의 교리를 '핵심 교리(essence)'가 아닌 하나의 '의견(opinion)'의 범주에 위치시킴으로 칼빈주의자들과 화해를 시도하였지만 1770년대 이후 칼빈주의자들과의 보다 밀접한 협력의 모든 희망은 사라져갔다. 카피지는 이 사실을 감리교도들과 영국 국교회와의 보다 넓은 분열의 한 요소로 해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리교 신도회 내부의 사람들 중에는 이전의 가난으로부터 중산층으로의 경제적인 지위가 향상되어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공동체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1760)"의 앞의 두 규칙은 잘 받아들였지만 세 번째 규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부가 죄의 치명적인 입구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Nations,1776)의 증대해 가는 영향력에 힘을 얻었기에 그들은 더욱 자신들의 부를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려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웨슬리는 "부의 위험성(The Danger of Riches,1781)", "부에 관하여(On Riches,1788)", "세상적인 어리석음에 관하여(On Worldly Folly,1790)","증대해 가는 부의 위험성(The Danger of Increasing Riches,1790)"의 설교들 속에서 잘못된 목적의 잉여물 축적이 죄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나눔이 없는 잉여물의 축적은 웨슬리의 실천적인 시각에 있어서 죄의 항목에 들어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원에 대한 기독자의 소유와 희망에 심각하고 긴급한 위험이 된다. 따라서, 웨슬리는 기독교의 무능의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를 잘못된 목적으로 축적된 부로 보기도 한다.
기독교, 성서적인 기독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신을 손상시키고 파괴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입니까? 왜냐하면 참 기독교는 그 자신이 퍼지는 곳마다 근면과 검소의 원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 부를 당연히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부는 자만심,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를 파괴하는 모든 기질들을 잉태했습니다."
1780년대 초의 설교들인 "보편적 구원(The General Deliverance, 1781)", "타락한 인간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 1782)",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God's Love to Fallen Man, 1782)", "그의 작품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God's Approbation of His Works,1782)"에서 웨슬리는 악과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784년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 해에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에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로 웨슬리는 1784년 2월 28일에 포고령(Deed of Declaration)을 선포하여 '100명의 법적 위원회(Legal hundred)'를 세웠다. 이것으로 감리교 운동은 사실상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신도회들은 행정체계와 교리적 지침, 연합조직과 규율, 사역, 예전 양식을 모두 갖춘 단체로서의 독립된 교회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된다. 두 번째 사건은 성직 안수였다. 웨슬리는 1784년 9월에 미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코크(Coke)에게는 연합 감리사(Joint Superintendents) 안수를 주어 프랜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와 함께 미국 감리교 운동을 주도하게 하였고, 왓코트(Whatcoat), 베지(Vasey)에게는 장로 안수를 주어 이들을 돕게 했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 운동은 1784년 볼티모어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애즈베리가 감독(bishop)의 명칭을 취하면서 새로운 자율적인 교단인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세운다. 세 번째 사건은 같은 해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을 개정해『다른 특별 예배에 따른, 북아메리카 감리교도들의 주일예배』(The Sunday Service of the Methodists in North America, with other occasional service)를 출판하여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항을 25개조로 축소해서 미국 감리교 운동에 개인편지와 함께 코크의 손에 들려서 보낸 사건이었다. 베이커의 말대로 이 사건들은 모두 영국 국교회와의 분열의 전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 자신은 결코 영국 국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누차 밝히고 있다. "저는 공개적으로 그날 저녁에 제가 40년 전보다도 지금 현재 더욱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선언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웨슬리는 "목사에게 순종함에 관하여(On Obedience to Pastors,1785)",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 1785)", "분파에 관하여(On Schism,1786)", "예언자들과 제사장들(Prophets and Priests,1789)"의 설교들 속에서 영국 국교회와의 분리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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