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의 죄 이해 2
존 웨슬리의 죄 이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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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종교 개혁의 죄 이해
원죄에 관해서 칼빈은 전적으로 루터를 따르고 있다. 즉 그는 "성서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불리어진 모든 일들을 우리 속에 낳게 하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바울과 같이 그것을 '죄'로 불렀고 그것이 노출된 것을 '죄의 열매'라고 불렀다. 아담의 죄는 불순종에 있었다. 죄의 속성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까지 유전되었다. 타락한 뿌리에서 타락한 가지들이 나온 것이다. 칼빈은 아담의 죄가 그 후손의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칼빈은 정욕이라는 말을 이해력과 의지, 영혼과 육체 등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이 더렵혀진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죄의 교리에 관해서 칼빈이 루터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최초의 성공적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인간과 죄 이해는 일단의 종교 개혁가들의 죄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의 죄 이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중세의 인간 이해와는 다른 인간이해를 토대로 죄의 교리에서도 중세의 왜곡되어져 가는 방향에 수정을 가한다. 루터는 당시의 스콜라 신학이 관심을 가진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철학적인 인간론이 아닌 성서적 인간론, 즉 전인의 단초를 소개한다. 그는 1536년에 "인간에 관한 논제"를 발표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킨다. 루터는 기독교 인간론의 중심의 자리에 영혼의 능력 대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바울이 피력하는 영과 육의 관계로서 인간론의 정의를 하였다. 그는 인간을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로부터 진술을 시도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역사 즉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완성 등은 전인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준다. 이러한 루터의 시각으로부터 전인의 관점을 세 가지로 조망할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원래의 상태(status originalis)이다. 이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육체와 생령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부터 죄 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손을 번식하며 모든 것들에 대해 다스릴 것과 결코 죽지 않게 규정받도록 지음 받았다. 이때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되고 하나님의 대화상대자로 부름 받은 "전인이며 완전인"이었다. 전인이며 동시에 완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의 단절 없는 교제 안에 있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 없던 교제가 깨져버렸다. 인간은 영생을 약속 받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탈락하여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로 떨어졌다. 이로서 인간은 이제 완전인이 아니다. 전인은 이제 사탄의 다스림 속에 갇혀졌다.
두 번째는 궁극의 상태(status finalis)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목표는 당연히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교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만일 그를 믿으면) 벗어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선물 받게 된다'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교제가 가능한 것은 바로 기독론적인 종말론적 관계에 힘입어서 가능한 것이다. 이런 궁극의 전인의 상태는 인간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서 완전인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다.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내는 하나의 변증법적 존재 방식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그 신학적인 의도를 파악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판단이다. 이 개념은 바울의 영과 육의 구분과 동일한 방법으로 관련시켜 이해되야 한다. 바울에 있어서의 육과 영은 전인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로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는 전인의 삶의 방식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전인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자아 자체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 이해를 기초로 하여 루터는 당시의 로마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원죄에 대한 어거스틴적 개념을 옹호하였다. 성서에서의 죄는 육신의 외적인 행위를 뜻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모든 활동들도 뜻한다. 이성이 강한 스콜라 신학자들은 원죄를 정의하기를 '의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원죄란 인간의 의지 속에 들어있는 내적인 질(質)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성에 있어서 내적인 빛이나 기억력의 결여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인간전체(내적인 인간, 외적인 인간, 몸과 영혼 전체까지)에 있어서 공정하고 성실한 자세가 결여된 것을 말하며, 그 전체 인간의 기능을 올바로 발휘할 능력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인간에 관한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전제로 원죄를 정욕과 불신앙으로 보았다.
첫째, 루터는 원죄를 정욕(concupiscentia)으로 본다. 정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기주의를 말한다. 이것은 선을 행하려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의지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와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기주의이다. 따라서 루터는 정욕을 자기추구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욕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것을 지니고 있다.
둘째, 루터는 원죄를 불신앙으로 본다. 성서는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모든 죄의 뿌리와 원천을 가려낸다. 그것은 가장 깊은 내심에 있는 불신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요 16:8-9에서 불신앙을 유일한 죄라고 부르신다. 원죄가 이기적인 자기 추구일 때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위배되게 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돌리지 않는 면으로서도 나타난다. 루터는 '불신앙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자기애, 자기 기쁨, 자기 신뢰, 자기 의에의 의존과 연결된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고, 이런 선물들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한다.
그들은 감사하지 않고 허영심으로 눈이 멀게 되어 아주 구제 불능의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가 하는 일이 최고로 잘하는 일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고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엉뚱한 다른 하나님을 구상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본래 참 하나님에 대한 것보다 더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이 구상한 헛된 우상을 예배하데 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육욕적인 생각과 부패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것은 다만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이 허영심은 사람을 미혹케 하며 그 결과로 우상 숭배로 떨어지게 하며 그래서 악의 소용동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하는 것이다.
루터는 원죄의 특성으로 원죄의 보편성과 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고 원죄의 심각성을 주장하였다. 원죄의 보편성에 있어서 비록 원죄가 인간 각자가 스스로 지은 실제적인 죄가 아닐지라도 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롬 9:11-13을 주석 하면서 "어떤 사람이 야곱은 모태로부터 성결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다 원죄로 인해 더러워졌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태어나서 하루 밖에 안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원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하여 루터는 "가령 우리 양친이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해도 죄성이 그대로 유전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애초부터 불의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
루터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영향을 받은 중세 스콜라 신학은 원죄를 단지 의의 결핍으로만 생각했다. 따라서 의의 결핍으로 인한 잘못된 부분만 제거하면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스콜라주의 신학은 "회개의 귀중성을 약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고 대신 교만과 인간적인 악한 성질을 다시 심어주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즉 루터는 원죄를 단순히 부분적인 약점이나 죄로 보지 않았고, 전인의 완전한 타락으로 보았다. 루터는 시편 51:5을 통하여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잉태될 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의를 상실하였다. 나는 일찍이 아담에 의해 의를 상실하였고 따라서 의롭지 않게 잉태되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된 것이다."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시 90:8을 주석하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알 수 없다고 선언해야 옳다. 특히 자신의 원죄가 얼마나 막중한가 살펴보게 되면 이점이 더욱 명백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루터에 있어서 원죄의 심각성이란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는 인간의 원죄의 거대성을 보아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결국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상은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인으로 남아있다. 세례가 원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원죄는 그 본질에 관한 한 죽을 때까지 남아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씻어 버려야 하며, 날마다 선한 일에 자라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살아야 한다. 무덤에 들어갈 때 비로소 원죄는 완전히 제거된다.
"웨슬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전적으로 의가 결핍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 아래 있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칼빈과 루터와 어거스틴과 모든 길을 함께 하고 있다."라는 윌리암 캐논(William Cannon)의 말처럼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이 말한 원죄로 인한 모든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부분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은총 이해의 미묘한 차이와 죄의 정의에 대한 차이가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에 차이를 야기한다.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과는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보편적인 은총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신학적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전된 죄악성과 자기 자신의 자범죄의 죄책에 대한 문제이다.
웨슬리는 죄의 구분을 행위로서의 죄와 상태로서의 죄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은 이러한 구분을 엄격하게 하고 있지 않는다. 루터의 관점에 의하면 기독자는 항상 죄 속에 있으며, 또 항상 칭의 속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항상 죄인이지만 항상 회개하고 그럼으로써 항상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는 이야기이다. 즉 죄에 관해서는 신자나 불신자나 별반 차이가 없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는 실질적으로는 죄인이지만 죄인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의견에 명백한 반대를 한다. "칭의가 율법에 의하여 우리에게 가져온 고발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도 또한 성서의 명백한 증언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가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는 아들의 피로 인하여 된 화목의 제물 때문에 가능한 사면이요 죄의 용서이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신자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이러한 개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다. 칼빈은 의지적 죄와 필연적인 죄를 구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연적 죄 또한 의지적 죄와 같은 죄책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무지의 죄'와 '의지적인 죄'의 구분을 시도했지만 웨슬리처럼 명확한 구분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웨슬리는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 그리고 죄책과 죄의 힘, 죄의 현실성을 복잡하게 구분하였다. 종교 개혁가들이 무의지적인 죄와 의지적인 죄 모두가 하나님께 정죄함을 받고 죄책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웨슬리는 단지 의지적인 죄만이 하나님께 정죄함을 받는다고 보았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가 말하는 죄로 보았다. 무의지적인 죄는 엄격한 의미의 죄로 보지 않고 부적절한 의미의 죄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내적 죄악성, 죄의 현실성을 엄밀한 의미에서 죄책이 있는 죄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한 경향성일 뿐이다. 이 경향성에의 의지적인 동의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죄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의지적인 죄는 영원한 죽음을 가지고 오는 유일한 죄로서 은총의 거부를 포함하는 개인적인 죄이다. 따라서 죄와 관련하여 웨슬리의 관점에서 성결이란 은총에 의한 믿음과 그 믿음의 열매들을 통해서 내적인 경향성을 죽임으로서 죄의 뿌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 죄의 현실성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거함으로 의지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 안에는 이 죄의 경향성, 죄의 남음이 있다. 이 죄의 남음 자체는 죄책이 있는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든 신자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할 여지를 열어 놓는다. 이점은 트렌트 종교 회의가 세례 후 신자에게 남아 있는 정욕, 죄의 연료를 전혀 죄로 보지 안았던 점과 웨스트민스터 고백에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본성의 타락은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벗을 수 없는 굴레로 선언했던 점에 대한 웨슬리의 중도적인 대안이다.
종교 개혁가들과는 구별되는 죄와 은총 이해로 인해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이 어쩔 수 없이 걸어갔던 선택과 예정, 그리고 성도 견인의 은총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웨슬리는 자신의 구별되는 죄와 은총 이해를 통해 당시에 나타났던 칼빈주의적 율법폐기론과 모라비안적 정숙주의의 오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열매이자 결과인 '거룩한 삶'을 잘 조화시킬 수 있었다.
E.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열정적인 영국 국교회 사제였고 또 자신을 "열렬한 국교도"라고 불렀다. 사실 웨슬리 생전에 영국 감리교 운동은 영국 국교회와 분열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분열의 움직임을 막고자 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영국 감리교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초기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전통이 바로 영국 국교회의 전통이다. 그는 당시 영국 국교회의 사제를 배출하였던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의 많은 교리적 조항을 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39개 조항을 그의 신학적인 관심에 따라 24개 조항으로 축소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국 국교의 신학의 정립에 큰 공헌을 한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의 죄 이해와 39개조의 원죄(Original Sin)조항인 제9조를 웨슬리가 어떻게 생략, 변형 시켰는지를 살펴봄으로서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가 웨슬리 죄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겠다.
후커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은 결코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과 의지를 사용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커는 인간의 완전 이성 소유의 불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결코 절대 선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절대 선보다는 못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선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선택한 선 속에는 여전히 악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후커에 의하면 죄는 자유의지와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죄는 적극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적절한 이성의 결여라는 것이 바로 후커의 견해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문주의자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커는 당시의 로마 천주교의 행위 의인화(work-righteousness)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또한 개혁 교회의 신앙 제일주의에도 강한 거부를 하였다. 그는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명하게 나타나는 먼저 주시고(initiative)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 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개인적인 죄책의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변화의 은총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이 변화의 은총으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응답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이 받아들임은 단지 인간의 내적 정신적 활동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스타일의 변화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이다. 결국 성화의 삶을 중시했다. 그러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는 그 제도적인 수단을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성례전은 은총의 효과적인 표징이며 은총의 참된 수단이다. 그렇기에 세례는 단지 고백의 표현이 아닌 기독자와 비기독자와의 구별의 표시이고 거듭남 혹은 신생의 표징이 되는 것이며 죄의 용서와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양자됨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예전 중심적인 신학 이해의 한계를 그의 경험에 의해서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영국 국교회에서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경험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대중들에 대한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세례와 거듭남이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며 영국 국교회처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웨슬리는 세례의 성례전을 외적인 행위로서 하나의 표징으로 보았으며, 거듭남은 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거듭남과 세례가 서로를 동반할 수도 있으며 서로 연합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고 유아 세례에 있어서 세례는 거듭남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동반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영국 성공회로부터 받은 죄 이해에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항을 축약한 25개조 중에 원죄에 관한 항목을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에 맞추어 변형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설교 13번 "신자 안의 죄(Sin in Believers,1763)"의 도입부에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제 9항을 본문에 삽입하였는데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학적인 이해에 따라서 생략하여 소개하고 있다.
원죄는 [아담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아담의 후손에게 유전되어지는] 모든 사람의 본성의 [결점과] 부패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원의(original righteousness)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그 본성에 있어 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육이 영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적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와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본성의 부패성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지혜로, 어떤 이들은 감각으로, 어떤 이들은 감정으로, 어떤 이들은 육의 소욕으로 해석하는] 헬라어로 프로네마 싸르코스( )라고 부르는 이 육의 정욕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례 받고]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기는 하지만 이 정욕은 그 자체가 죄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조항에서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의 문제를 생략했다.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의 문제에 있어서 초기에는 생물학적인 유전 전이설에 영향을 받았다가 중기에는 영혼 창조설적인 입장에 기울어져 있었으며 후기에는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설교를 작성했던 영혼 창조설적 경향에 기울어져 있었던 중기에 웨슬리는 원죄의 전이의 방법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점으로 미루어보아 생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한 죄책으로부터 벗어나 실질적으로 소위 원죄의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의 손상되고 타락한 본성뿐이기에 웨슬리는 원죄의 죄책의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구절의 세례를 생략한 것은 세례를 단지 외적인 표징으로 보고 있으며, 의인화의 유일한 조건은 바로 믿음뿐이라는 종교 개혁의 모토에 강한 영향을 받은 후이기에 세례를 통한 정죄함의 구절을 생략한 것이다. 이렇듯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를 자신의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경험과 신학에 맞추어 변형시켰다.
Ⅲ. 웨슬리의 죄 이해의 변화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
A. 죄 이해 변화에 대한 시기 구분의 근거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은 성장과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하이트젠레이터(Heitzenrater)가 지적한대로 웨슬리의 사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의 사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의 사상이 어떠한 성장과 변화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웨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시기를 구분하여 그의 사상을 고찰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경향은 1738년 5월24일의 올더스케잇 체험을 기점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경향은 이러한 전통적인 경향을 수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은 웨슬리의 영적 성장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이 핵심적 사건의 실제적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웨슬리는 올더스케잇 체험을 그의 후예들을 위한 회심 모델로 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간이 지난 후에는 신학과 설교에서도 점차적으로 회심경험에 대한 강조와 언급이 없어졌다. 그는 한 비판가에게 "저는 회심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올더스케잇 체험이 회심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간다. 웨슬리가 이 질문을 언제 했으며 회심이라는 경험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웨슬리의 증언에 근거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회심이었다'일 수도 있고 '회심이 아니었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이 올더스케잇 체험 속에 있다. 그 경험의 순간은 웨슬리가 당시에 고민했던 확증의 문제와 확증과 회심의 직접적인 관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해 경험 후의 웨슬리가 경험전과 완전하게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의 연장선상에서 올더스케잇 체험을 바라보아야 하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속되어져야만 한다.
현대의 웨슬리 학자들은 웨슬리의 생애를 2기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경향을 수정하고 있다. 먼저 터틀(Tuttle)은 신학적인 관점의 무게중심의 변이에 따라 올더스케잇 체험 이후를 3기로 구분하고 있다. 콜린스(Collins) 역시 단순히 2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에 관해서는 올더스케잇 체험이후 3기(1738-1747: 1748-1770: 1771-1791)로 구분했으며, 또한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 포인트로서 참 기독교(Real Christianity)에 대한 모티브를 중심으로 3기로 나누고 있다.또한 카피지(Coppedge)는 예정론 논쟁을 중심으로 4기로 구분을 한다.
현대 웨슬리 연구가들인 아우틀러(Outler), 하이트젠레이터(Heitzenrater), 매덕스(Maddox)는 시기 구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신학적인 연구는 "초기 웨슬리: 1725-1738", "중기 웨슬리: 1738-1765", "후기 웨슬리: 1765-1791"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와 중기의 구분은 전형적인 도덕적 정직의 중요성 혹은 하나님과의 유사성에 대한 일치의 강조로부터 그의 신학에 최초의 긴장감을 형성시키는 은총에 의한 구원에 관한 보다 깊은 개신교적인 접근으로의 전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기와 후기의 구분은 기독자의 성결에 관한 웨슬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은총의 우선성과 인간의 노력과의 성숙한 통합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즉,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1738년의 올더스케잇 체험으로 종교 개혁의 신앙 의인화에 의한 강한 충격의 시간이고, 중기와 후기의 구분점은 예정론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어진 보다 성숙한 구원론의 정립 시기인 1765년이다. 웨슬리는 1765년에 저술한 그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과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체계적으로 구원의 길(via salutis)을 정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에 저술한 에세이 "감리교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Methodism)"에서는 그 때까지의 감리교 운동의 형성과정을 개괄하고 있다. 파울러(James W. Fowler)는 자신의 신앙 발달 이론에 맞추어서 웨슬리의 신앙과 자기 인식의 성장과 발달 단계를 연구하였는데 흥미롭게도 그 역시 3기의 시기 구분과 유사한 구분을 하고 있다.
이러한 3기의 구분에 있어서 초기와 후기의 웨슬리의 신학의 유사점이 중기와 후기의 웨슬리 신학의 유사점보다도 크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점은 웨슬리가 1770년에 출판한 표준 설교집에서 후기 설교들 중에 초기 설교를 아홉편을 결합시킨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유기적으로 시기를 구분한 일단의 학자들(Outler, Heitzenrater, Maddox, Fowler)을 기반으로 구원 이해의 필요조건인 죄 이해의 변화를 3기("초기 웨슬리: 1725-1738", "중기 웨슬리: 1738-1765", "후기 웨슬리: 1765-1791")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별히 아우틀러와 하이트젠레이터가 경계하는 일반화의 위험성에 주의를 하며 고찰하도록 하겠다. 즉, 전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웨슬리 자신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언급을 일반화하하는 위험성을 피하겠다. 가령 그의 저널을 보면 같은 사건을 시기별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1725년에 웨슬리가 기독자였는가라는 물음에 1740년대의 그에게는 기독자가 아니라는 답이 나오고, 1770년대의 그에게는 그 당시에도 실질적으로 기독자였다는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중기의 자기 인식과 후기의 자기 인식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의 상황 속에서 특정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점은 신학적인 면에서도 똑같은 특성을 가진다.
특히 죄에 대한 그의 법정적인 관심과 치유적인 관심의 통합으로부터 발생하는 긴장 관계들을 고려하면서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그의 죄의 이해가 시기별로 어떠한 변화와 성장과 성숙을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B. 초기(1725∼38, 속죄의 치유적 특성)
1.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1720년 입학한 크라이스트 쳐치에서 1724년에 학사학위를 받은 뒤 석사 학위를 위한 공부를 위해서 옥스퍼드에 남는다. 그리고 1725년에 사제(Deacon) 안수를 받는다.
이 당시에 읽었던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 및 훈련』(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은 그로 하여금 동기의 순수성의 중요함을 가르쳤고, 중간적인 입장이란 없으므로 일부분이 아닌 모든 삶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마귀에게 바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곧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또한 같은 해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Christian's Pattern)에서 웨슬리는 '의도의 단순함과 감정의 순수성(Simplicity of intention and Purity of affection)'이 '영혼의 두 날개(the wings of soul)'로서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산에 결코 오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향으로 웨슬리는 영적 자아의 죽음,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과 같은 신비주의적 영성에 심취하게 된다. 특히 1731년 가을에 크라이스트 쳐치 교회에서 행한 설교인 "승리하는 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Winning Souls)"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설교의 주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동기와 목적인 거룩한 삶의 복음적 권능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은총과 의무로서의 거룩한 삶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가 목사들에게 한 훈계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그들(너희들)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는 아 켐피스의 Fac quod in te est(너의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 혹은 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너의 선한 의도를 아실 것이다.)를 생각나게 한다.
부모님의 권고와 제레미 테일러의 영향으로 1725년 사순절 기간에 영적 일기(diary) 쓰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거룩한 삶과 구원의 확증에 대한 희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일기는 순전히 그가 분투했던 그의 죄와 단점들에 대한 자기 검증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웨슬리 일기의 목차는 그의 경건 생활이 '명상적인 경건(meditative piety)'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명상적인 경건(meditative piety)'은 그의 어머니 수산나에 의해 영향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 명상은 감리교도(Methodist)들이 거룩한 삶의 원천인 덕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영적 훈련의 진수였다. 명상의 중요한 목적은 자기 인식이었고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자기 검증이었다. 하이트젠레이터는 웨슬리가 사용한 방법이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Ignatius of Loyola)의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방법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충고인 "성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을 마스터하라"를 받아들인다. 베버리지(W. Beveridge)는 고대 동방 교회 문헌을 정리 수집한 Pandectae를 편집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편집을 통하여 크리소스톰을 소개받는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일기에서 크리소스톰을 1726년 초에 읽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의 충고로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였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소스톰의 제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통해 구원의 신인협조설적 질서(Divine-human cooperation), 즉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구원의 질서를 배웠다. 인간의 책임성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다. 은혜가 먼저 역사 하면, 자유의지는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다(엡 2:8). 이 점이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다른 점이다.
1727년에 접한 윌리암 로우(William Law)의『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중대한 소명』(Serious Call)에서 내적 성결의 필요성을 강하게 확신한 웨슬리는 내적 성결을 위해서 영혼의 적절한 기질이 필요하고 그 기질을 위해서 모든 기회에서 은총의 수단을 활용해야 하며, 선행 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이 모든 것은 내적 성결, 즉 신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90퍼센트 신자(Almost Christian, Half Christian)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1729년 늦가을에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강의를 하기 위해 엡워드를 떠나 옥스퍼드로 되돌아 왔다. 이때 동생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학문과 경건을 위하여 소수의 학생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는 챨스의 요청으로 이 소그룹을 지도하게 된다. 웨슬리는 소그룹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지도하지 않았다. 소그룹의 회원들이 일방적으로 웨슬리를 따라갔던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영적 나눔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소그룹 운동에 붙여진 명칭 중에 의미가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메도디스트(Methodist-규칙쟁이)'라는 명칭이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메도디즘(Methodism)'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왔다. 이 명칭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에게 붙여진 것은 1732년부터였다. 그런데 이 명칭이 웨슬리의 옥스퍼드 그룹에 처음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17세기에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s)'라는 일단의 신앙적 경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명칭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에 적용되어진 첫 번째 기록은 윌리암 모간(William Morgan)이 죽고 존 클레이톤(John Clayton)이 그 운동에 참여한 시기인 1732년이다. 그런데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용어가 웨슬리안 그룹에 처음으로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17세기에 영국과 유럽에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라는 명칭으로 불려진 사람들이 붙여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적인 경향을 가진 비국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신앙의인화에 의해 인간의 가능성을 극소화시킨 당시의 개혁교회들에 반대하여 구원의 과정 속에서 신적인 은총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응답(신실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규칙과 방법에 의한 삶, 즉 경건한 규칙적인 일상 생활"을 주장했다. 이들은 예정보다는 보편적 속죄관에 기인한 인간의 의지와 책임성, 새계약 아래서 '율법'을 완성코자하는 신실한 순종, 성결 혹은 성화를 재촉하는 선행, 이중의 의인화 혹은 은총의 결과적 사역에 기인하는 내재적인 의를 강조하였다. 이점은 그들의 신학적 주장과 초기 웨슬리의 신학 사이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보여준다. 1732년에 웨슬리의 신학은 분명히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이 '아르미니안주의'라고 부르는 신학적인 경향에 근거하고 있다. 아우틀러는 웨슬리의 초기 설교가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해서 급진적일 정도로 기울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이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모든 삶과 신학에 있어서 신실한 순종(sincere obedience)의 비전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성결로 명칭되어지는 영혼의 거룩한 습관적 기질을 통해서 죄로부터의 정화, 영과 육의 오염으로부터의 정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덕을 받은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존재가 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의 의라기보다는 영혼의 내적 경향성을 초래하는 성령의 사역에 있었다.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1733)"를 비롯해서 1730년대 초기의 웨슬리의 설교들은 동일한 신학적인 관점과 관심을 가진다. 우선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께 용납되어진 상태에 있는 존재로 그 표징은 외적 할례, 세례 혹은 어떤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올바른 상태의 영혼에 있다. 중요한 점은 완전함이라기보다는 신실함이며 잘하는 것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완전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함으로서 사랑의 율법이 충족되어짐으로 성취되어진다. 17세기의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s)'의 신앙적 경향과 '옥스퍼드 메도디스트(Oxford Methodists)'들의 신학과 신앙의 유사함이 이점에 있다.
이 시기에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사조들은 우선적으로 성서의 우선성이고, 그리고 초대 교부들과 중세와 영국의 경건주의자들, 대륙의 신비가들과 자유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이 사실은 잉함의 일기(diary)를 통해서 간접 증명된다. 결과적으로 웨슬리는 그들의 영향으로 성결과 성화의 구원을 정적이고 고착되어진 것이 아니라 발전과 변화가 지속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한 의도(single intention)'를 가지고 삶 속에서 지속적이고 변화하는 성결을 추구하는 구원관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웨슬리는 '명상적 경건(meditative piety)', 즉 생활을 위한 기도(공적 기도, 사적 기도), 성경 읽기, 금식과 새벽에 기상하기, 모든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죄수와 병자를 방문하였으며, 고아와 과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732년에 윌리암 로우와의 직접적인 만남과 버리그논(Bourignon), 기욘(Guyon), 페넬론 추기경(Cardinal Fenelon), 피어 포이렛(Pierre Poiret), 몬스의 드 랑테(Mons de Renty)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 있어서 규칙들에 대한 커져가는 강박관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에 힘을 실어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사랑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주의의 영향은 웨슬리로 하여금 그가 오랫동안 채택했던 훈련과 규칙의 삶과 신비가들이 강하게 옹호하였던 모든 책무로부터의 면제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이것이 웨슬리를 곤경에 빠지게 했고 그는 이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께 합당하지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이트젠레이터는 웨슬리가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져왔던 확실성의 문제 즉 확증의 문제가 더욱 그를 곤란에 빠뜨렸다고 분석한다.
구원의 확증에 대한 확실한 근거나 증거가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 웨슬리는 1735년 10월에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안 선교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했다. 혼란이 구원의 불확실함을 야기했고, 의심이 믿음에 도전을 가했다. 그는 구원에의 확신이 없었기에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인 1736년 1월 25일에 만난 폭풍우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이때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이 예배드리는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모라비안들이었다. 이것이 모라비안의 경건에 대한 존 웨슬리의 첫 번째 경험이었고, 훗날 '확신(assurance)'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웨슬리의 일기를 편집했던 느헤미야 커르낙(Nehemiah Curnock)은 그 폭풍이 초기 감리교에 있어서 결정적 사건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고 잉함이(Ingham) 감리교도에서 모라비안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1736년 조지아주 사바나 촌에 도착한 웨슬리는 다음날 독일 교회 목사인 스팡겐베르그(August Gottlie Spangenberg)를 만나서 믿음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을 듣고 스팡겐베르그는 "당신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불충분합니다"라고 응답한다.
1737년 12월부터 1738년 1월에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다시금 1736년 1월 25일의 상황을 맞게 된다. 거의 영국에 다 왔을 때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맛보는 풍랑 속에서 구원의 확신 없이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인디안들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누가 나를 회심시킬 것인가? 이 악한 불신앙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할 그 분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맑게 갠 여름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위험이 가까이 없는 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의 영혼은 고통을 당한다. 나는 죽은 것이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두려워하는 죄를 갖고 있다. 내가 나의 마지막 방적 실을 잣을 때 나는 해변에서 멸망할 것이다.'
웨슬리는 1738년 1월29일 신대륙에서의 경험을 철저하게 뒤돌아보게 된다. 이 때 기록한 일기는 훗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뒤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전반적인 회심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조지아에 있는 인디안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국을 떠난 지 어느덧 2년 4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배웠던가?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려고 미국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마저 전적으로 하나님께 회심하지 않았으면서(적어도 약간의 의심이 있는 것)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러 미국에 갔단 말인가? '내가 이상해 진 것이 아니다. 제정신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그 동안 많은 이들이 나를 위로하였듯이), 나는 '악마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정도를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약속의 계약을 아직 맛보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번째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을 때', 제자들도 그를 믿었을 지는 몰라도 '세상을 이길만한 확신'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다. 내가 원하는 믿음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나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확실한 믿음과 자신감을 하나님 안에서 소유하는 것이다. ...'
지금까지 웨슬리가 1725년부터 1738년까지 어떤 신학적인 여정을 걸었는지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웨슬리의 죄 이해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주로 그의 설교이다. 따라서, 그의 죄 이해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설교가 주 자료가 되어야 한다. 200주년 기념판에 있는 아우틀러가 편집한 웨슬리 설교 중에 이 시기의 설교들은 총 스무편이 있다. 19세기 중반에 웨슬리의 작품들을 모아 편집한 토마스 잭슨(Thomas Jackson)의 전집(Works)에는 이 시기의 설교들이 단지 여섯편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웨슬리 자신이 초기의 설교들을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본들의 진정성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설교들은 사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웨슬리 자신이 십여개의 설교와 몇 개의 단편들을 남겼고, 동생 찰스 웨슬리 또한 그의 형으로부터 받은 사본을 복사해서 남긴 것이 일곱편이 있다. 이 200주년 기념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잭슨판(Jackson)의 141편의 설교가 웨슬리의 설교 중에 현재까지 전해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프랑크 베이커(Frank Baker)와 하이트젠레이터의 연구 결과로 사본으로 존재하는 설교까지 포함해서 웨슬리의 설교가 총151편임이 밝혀졌다.
비록 웨슬리 당시에는 출판되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본으로 남겨진 초기의 설교들은 웨슬리 신학의 태동과 일련의 발달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설교들은 젊은 목사로서, 옥스퍼드의 교수로서, 그리고 시골 교구의 아버지의 부제로서 기독자의 신앙과 삶에 대한 초기 웨슬리의 관점들이 얼마나 전형적으로 영국 국교회적인가를 보여준다.
2. 초기 웨슬리의 죄 이해
초기 웨슬리의 설교들 중에서 당시의 그의 구원관과 관련된 신학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설교들은 1730년 11월 1일에 옥스퍼드의 올 세인트(All Saints)에서 처음 설교되어진 "이해력에 관한 전망(The Promise of Understanding)"이후의 것들이다. 그 설교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참 기독자로서의 내적 성결과 거룩한 삶이었다. 참 기독자로서의 확실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기독자로서의 확실성의 확인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방법의 사용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겸손으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인간의 현 상태에 있어서 웨슬리는 창조의 완전성과 타락의 병약성을 비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아담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올바로 향유함으로서 지복(Happiness)의 상태에 있었고 그에게 있어서 실수나 의심은 낯선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피조된 인간은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성은 완전하고 신적이며 천상적인 것이었다. 창조의 완전성 속에 있던 인간은 그의 자유를 시험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서 타락하게 된다. 즉, 의지의 오용으로 인한 불순종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다. 타락의 결과는 먼저 육체적 죽음을 불러왔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다. 또한 인간의 이해력에 혼돈과 우둔함이 나타났고, 인간의 의지는 악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유는 악으로 가득찬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손상된 자연적 인간은 세상을 향하여서는 살아있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죽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웨슬리는 인간의 현 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진 상태를 병들어 있는 상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특히 원죄를 본성의 생래적 부패(inbred corruption of his nature)로 이해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을 병적인 요인으로 보았다.
악한 감정들은 엄청난 사슬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질병이다. 우리의 본성은 병들어 있고 노예상태에 있다. 따라서, 지성은 희미해지고, 마음은 병들게 되었다.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은 가장 치명적인 병으로 감염되어, 퍼졌고,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질병들, 상처들, 그리고 정화되어야할 종기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모든 동물적인 갈망과 악마적 기질, 모든 종류의 정욕, 자만, 이기심은 우리를 죽음에 몰고 갈 상처들이며, 기분 나쁜 종기들의 하나이고 완전한 부패이며 부정함이다.
인간의 본성은 병들어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한 기질 또한 정화되어져야 할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치료되어져야 할 존재이고 약과 의사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병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치료를 거부하게 된다면 인간은 소망 없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제까지 말하여진 것으로부터 살펴보건대, 내적인 질병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 질병의 유일한 치료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몹쓸 병마가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합니다.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졌습니다. 무지와 실수의 구름이 그들의 눈을 가립니다. ... 만일 인간이 자연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질병을 전제로 해서 나온 치료법과 마찬가지로 이 사실에 근거를 둔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이다. 이 '마음의 할례'는 영혼의 습관적 기질인 성결이다. 성결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워진 영혼의 올바른 상태이다. 직접적으로 죄와 영과 육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덕(이 덕은 겸손, 믿음, 소망, 사랑이다.)의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마5:48)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율법인 마음의 할례는 마음의 살아있는 희생으로 거룩한 사랑의 불꽃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봉헌되어져야 할 것이다. 즉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며, 마음의 순수한 의도이고, 소명으로 눈을 고정시켜 그 소명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웨슬리가 본질적으로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가 아닌 내적 종교(inward religion)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하나님께 용인된 상태에 있는 자의 표징은 외적 할례나 세례 혹은 어떤 외적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되어진 올바른 영혼의 상태이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겸손, 바로 자기 인식이다. 그리고 겸손으로 인해 회복된 인간의 이해력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의 의지를 회복하게 한다. 회복된 자기 인식을 통해 우리 모두가 어리석고 악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관련 있다. 이 믿음이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주어진 단 하나의 약이다. 죄된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 주어진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죽음의 문으로부터 온전한 건강함으로 회복되어지며, 우리의 병이 치유되고, 우리의 상처가 회복되고 우리의 불결함이 정화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믿음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고후 10:24)이다. 즉 웨슬리는 믿음은 강한 무기여야 한다는 사실 속에 믿음에 다양한 정도가 있다는 것을 내포시켰기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한 믿음이 있어야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어진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세상으로부터 난 자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누구인가를 구분 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겸손으로 할례를 받은 자, 믿음으로 할례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참 종교의 진정한 열매 혹은 증거인 덕(예수 그리스도의 덕으로 특히 사랑)의 활동과 영혼의 내적 경향의 외적 증거를 검증할만한 수단들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며 마음의 할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 뿐만이 아니라 겸손, 소망,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형상과 영광스런 자유, 그리고 완전한 건강함의 회복은 우리에게 단하나 필요한 것으로 이들의 향유가 인간 창조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오로지 우리의 성화 즉, 악한 속박으로부터의 우리의 회복, 이웃 사랑과 우리의 창조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하나님 섭리의 목적도 이것에 있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사역은 우리의 건강과 자유와 성결을 회복케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강건과 자유와 성결은 우리 본성의 내적 질병과, 자기에 대한 사랑, 이생에 대한 사랑을 치유하는데 목적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외적 기질에 매일의 양식을 준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아 우리의 영혼의 건강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행복을 완전하게 하는 유일한 필요 조건이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의 영광의 광채이며 완전한 자유이다. 사랑은 영혼의 건강이며 영혼의 모든 힘의 완전한 발현이며, 그 능력의 온전함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의 향유가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 그리고 사랑의 회복이 인간에게 단 하나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점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구속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건강과 자유로 회복시키시는 것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목적을 위해 우리 본성의 모든 영적인 병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본성을 갱신시키신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 중에 치유자로서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치유되어가고 있는 기독자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제레미 테일러와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고 윌리암 로우와 같은 신비 영성가들에 의해서 영향받은 것이다.
우리의 본성의 갱신을 위해 단순한 생각, 순수한 의도에 우리를 고정시켜야합니다. ... 우리는 많은 수단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신적인 본성에의 참여자가 되고, 사랑에 의해 작용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한 영이 되게 하는 그 신앙에 합당한 지고의 척도를 다시 획득하는 것을 우리의 유일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인간의 회복과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피를 흘리셨고 성령께서 인간을 돌보신다.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높은 소명의 상급의 표징 즉, 죄의 사슬과 병과 죽음에서 자유와 건강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의 참여자이며 파트너가 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당시에 엄격한 규칙과 방법을 세우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웨슬리 초기 설교를 통해 구원론 형성의 필요 조건인 죄의 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을 살펴보았다. 웨슬리는 '참 기독교란 무엇인가?'와 '자신이 참 기독교인인가'라는 물음 아래 '은총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형성해 갔다. 이 시기에 그의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자비와 헌신의 활동들로 특징지어지는 훈련된 삶의 방법들을 활용하게 하였다 할지라도 강조점은 항상 내적 성결이었다. 행위들은 명상적 실천들을 통해 자라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덕들에 대한 증거들이었다. 이 당시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창조시의 인간의 원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영적 건강과 영적 자유와 관련 있다.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과의 관계회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의 구속적 사역의 목적이었다. 이런 회복은 단지 신자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을 가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회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한층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현 상황이 부패하고 병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죄는 바로 인간의 병들고 부패한 본성이다. 따라서, 전에 잃었던 사랑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덕들을 자라나게 함으로써 죄된 경향성을 정화하고 치유해야만 한다. 따라서, 신앙이 가득한 기독자의 삶은 은총으로 충만한 삶이어야 하며, 그는 명상의 실천과 자기 검증, 그리고 기도 등으로 그 덕들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그 덕들의 표징으로서의 헌신과 자비의 활동을 내용으로 하는 규칙적인 삶으로 확증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와 초대 교부, 자비의 활동과 헌신적인 묵상, 윤리적인 책임성과 은총의 신학, 규율적인 헌신, 방법론적인 명상, 그리고 웨슬리 자신만의 독특한 기독자의 생각과 삶의 형태를 형성시킨 실천적 경건을 강조한다. 이점이 초기 웨슬리의 신학과 목회의 특징들을 창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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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종교 개혁의 죄 이해
원죄에 관해서 칼빈은 전적으로 루터를 따르고 있다. 즉 그는 "성서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불리어진 모든 일들을 우리 속에 낳게 하는 인간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바울과 같이 그것을 '죄'로 불렀고 그것이 노출된 것을 '죄의 열매'라고 불렀다. 아담의 죄는 불순종에 있었다. 죄의 속성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까지 유전되었다. 타락한 뿌리에서 타락한 가지들이 나온 것이다. 칼빈은 아담의 죄가 그 후손의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칼빈은 정욕이라는 말을 이해력과 의지, 영혼과 육체 등 인간에게 있는 모든 것이 더렵혀진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죄의 교리에 관해서 칼빈이 루터를 전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최초의 성공적 종교개혁자인 루터의 인간과 죄 이해는 일단의 종교 개혁가들의 죄 이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보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의 죄 이해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중세의 인간 이해와는 다른 인간이해를 토대로 죄의 교리에서도 중세의 왜곡되어져 가는 방향에 수정을 가한다. 루터는 당시의 스콜라 신학이 관심을 가진 인간의 구성요소에 대한 철학적인 인간론이 아닌 성서적 인간론, 즉 전인의 단초를 소개한다. 그는 1536년에 "인간에 관한 논제"를 발표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킨다. 루터는 기독교 인간론의 중심의 자리에 영혼의 능력 대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바울이 피력하는 영과 육의 관계로서 인간론의 정의를 하였다. 그는 인간을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의 역사로부터 진술을 시도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역사 즉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완성 등은 전인이 무엇인지를 나타내 준다. 이러한 루터의 시각으로부터 전인의 관점을 세 가지로 조망할 수 있다. 첫 번째 관점은 원래의 상태(status originalis)이다. 이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육체와 생령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부터 죄 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손을 번식하며 모든 것들에 대해 다스릴 것과 결코 죽지 않게 규정받도록 지음 받았다. 이때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피조되고 하나님의 대화상대자로 부름 받은 "전인이며 완전인"이었다. 전인이며 동시에 완전인인 인간은 하나님과의 단절 없는 교제 안에 있는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 없던 교제가 깨져버렸다. 인간은 영생을 약속 받았던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탈락하여 사탄과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로 떨어졌다. 이로서 인간은 이제 완전인이 아니다. 전인은 이제 사탄의 다스림 속에 갇혀졌다.
두 번째는 궁극의 상태(status finalis)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의 목표는 당연히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교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만일 그를 믿으면) 벗어날 수 있게 되며 영생을 선물 받게 된다' 하나님과의 종말론적 교제가 가능한 것은 바로 기독론적인 종말론적 관계에 힘입어서 가능한 것이다. 이런 궁극의 전인의 상태는 인간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서 완전인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다. 루터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나타내는 하나의 변증법적 존재 방식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 그 신학적인 의도를 파악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판단이다. 이 개념은 바울의 영과 육의 구분과 동일한 방법으로 관련시켜 이해되야 한다. 바울에 있어서의 육과 영은 전인의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신학적 용어로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는 전인의 삶의 방식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인 전인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자아 자체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간 이해를 기초로 하여 루터는 당시의 로마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에 반대하여 원죄에 대한 어거스틴적 개념을 옹호하였다. 성서에서의 죄는 육신의 외적인 행위를 뜻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를 하도록 하는 모든 활동들도 뜻한다. 이성이 강한 스콜라 신학자들은 원죄를 정의하기를 '의가 부족하거나 결핍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루터는 "원죄란 인간의 의지 속에 들어있는 내적인 질(質)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지성에 있어서 내적인 빛이나 기억력의 결여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일어나는 인간전체(내적인 인간, 외적인 인간, 몸과 영혼 전체까지)에 있어서 공정하고 성실한 자세가 결여된 것을 말하며, 그 전체 인간의 기능을 올바로 발휘할 능력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루터는 인간에 관한 이런 기본적인 개념을 전제로 원죄를 정욕과 불신앙으로 보았다.
첫째, 루터는 원죄를 정욕(concupiscentia)으로 본다. 정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이기주의를 말한다. 이것은 선을 행하려는 인간의 가장 고상한 의지 속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을 말하며,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도와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기주의이다. 따라서 루터는 정욕을 자기추구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힘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욕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것을 지니고 있다.
둘째, 루터는 원죄를 불신앙으로 본다. 성서는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모든 죄의 뿌리와 원천을 가려낸다. 그것은 가장 깊은 내심에 있는 불신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요 16:8-9에서 불신앙을 유일한 죄라고 부르신다. 원죄가 이기적인 자기 추구일 때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위배되게 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그 결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돌리지 않는 면으로서도 나타난다. 루터는 '불신앙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자기애, 자기 기쁨, 자기 신뢰, 자기 의에의 의존과 연결된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지 않고, 이런 선물들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생각한다.
그들은 감사하지 않고 허영심으로 눈이 멀게 되어 아주 구제 불능의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가 하는 일이 최고로 잘하는 일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고 다른 생각을 할 여지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엉뚱한 다른 하나님을 구상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본래 참 하나님에 대한 것보다 더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이 구상한 헛된 우상을 예배하데 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육욕적인 생각과 부패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것은 다만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이 허영심은 사람을 미혹케 하며 그 결과로 우상 숭배로 떨어지게 하며 그래서 악의 소용동이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하는 것이다.
루터는 원죄의 특성으로 원죄의 보편성과 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고 원죄의 심각성을 주장하였다. 원죄의 보편성에 있어서 비록 원죄가 인간 각자가 스스로 지은 실제적인 죄가 아닐지라도 원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루터는 롬 9:11-13을 주석 하면서 "어떤 사람이 야곱은 모태로부터 성결함을 받았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그들은 모두 다 원죄로 인해 더러워졌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태어나서 하루 밖에 안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원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리하여 루터는 "가령 우리 양친이 죄를 범한 일이 없다고 해도 죄성이 그대로 유전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애초부터 불의의 자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
루터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영향을 받은 중세 스콜라 신학은 원죄를 단지 의의 결핍으로만 생각했다. 따라서 의의 결핍으로 인한 잘못된 부분만 제거하면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스콜라주의 신학은 "회개의 귀중성을 약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고 대신 교만과 인간적인 악한 성질을 다시 심어주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 즉 루터는 원죄를 단순히 부분적인 약점이나 죄로 보지 않았고, 전인의 완전한 타락으로 보았다. 루터는 시편 51:5을 통하여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잉태될 때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의를 상실하였다. 나는 일찍이 아담에 의해 의를 상실하였고 따라서 의롭지 않게 잉태되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된 것이다."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시 90:8을 주석하면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알 수 없다고 선언해야 옳다. 특히 자신의 원죄가 얼마나 막중한가 살펴보게 되면 이점이 더욱 명백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루터에 있어서 원죄의 심각성이란 그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는 인간의 원죄의 거대성을 보아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인간도 결국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상은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죄인으로 남아있다. 세례가 원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원죄는 그 본질에 관한 한 죽을 때까지 남아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씻어 버려야 하며, 날마다 선한 일에 자라야 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살아야 한다. 무덤에 들어갈 때 비로소 원죄는 완전히 제거된다.
"웨슬리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전적으로 의가 결핍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 아래 있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칼빈과 루터와 어거스틴과 모든 길을 함께 하고 있다."라는 윌리암 캐논(William Cannon)의 말처럼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이 말한 원죄로 인한 모든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부분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은총 이해의 미묘한 차이와 죄의 정의에 대한 차이가 구원의 길에 대한 이해에 차이를 야기한다.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과는 은총의 보편성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보편적인 은총의 선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신학적 입장에 서 있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유전된 죄악성과 자기 자신의 자범죄의 죄책에 대한 문제이다.
웨슬리는 죄의 구분을 행위로서의 죄와 상태로서의 죄로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 개혁가들은 이러한 구분을 엄격하게 하고 있지 않는다. 루터의 관점에 의하면 기독자는 항상 죄 속에 있으며, 또 항상 칭의 속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항상 죄인이지만 항상 회개하고 그럼으로써 항상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라는 이야기이다. 즉 죄에 관해서는 신자나 불신자나 별반 차이가 없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신자는 실질적으로는 죄인이지만 죄인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의견에 명백한 반대를 한다. "칭의가 율법에 의하여 우리에게 가져온 고발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도 또한 성서의 명백한 증언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단순한 가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칭의는 아들의 피로 인하여 된 화목의 제물 때문에 가능한 사면이요 죄의 용서이다. 신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신자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이러한 개념이 가능한 것은 바로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다. 칼빈은 의지적 죄와 필연적인 죄를 구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연적 죄 또한 의지적 죄와 같은 죄책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무지의 죄'와 '의지적인 죄'의 구분을 시도했지만 웨슬리처럼 명확한 구분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웨슬리는 의지적인 죄와 무의지적인 죄, 그리고 죄책과 죄의 힘, 죄의 현실성을 복잡하게 구분하였다. 종교 개혁가들이 무의지적인 죄와 의지적인 죄 모두가 하나님께 정죄함을 받고 죄책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웨슬리는 단지 의지적인 죄만이 하나님께 정죄함을 받는다고 보았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가 말하는 죄로 보았다. 무의지적인 죄는 엄격한 의미의 죄로 보지 않고 부적절한 의미의 죄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는 내적 죄악성, 죄의 현실성을 엄밀한 의미에서 죄책이 있는 죄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한 경향성일 뿐이다. 이 경향성에의 의지적인 동의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죄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의지적인 죄는 영원한 죽음을 가지고 오는 유일한 죄로서 은총의 거부를 포함하는 개인적인 죄이다. 따라서 죄와 관련하여 웨슬리의 관점에서 성결이란 은총에 의한 믿음과 그 믿음의 열매들을 통해서 내적인 경향성을 죽임으로서 죄의 뿌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 죄의 현실성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거함으로 의지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신자 안에는 이 죄의 경향성, 죄의 남음이 있다. 이 죄의 남음 자체는 죄책이 있는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든 신자가 의지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할 여지를 열어 놓는다. 이점은 트렌트 종교 회의가 세례 후 신자에게 남아 있는 정욕, 죄의 연료를 전혀 죄로 보지 안았던 점과 웨스트민스터 고백에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본성의 타락은 신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벗을 수 없는 굴레로 선언했던 점에 대한 웨슬리의 중도적인 대안이다.
종교 개혁가들과는 구별되는 죄와 은총 이해로 인해 웨슬리는 종교 개혁가들이 어쩔 수 없이 걸어갔던 선택과 예정, 그리고 성도 견인의 은총이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웨슬리는 자신의 구별되는 죄와 은총 이해를 통해 당시에 나타났던 칼빈주의적 율법폐기론과 모라비안적 정숙주의의 오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열매이자 결과인 '거룩한 삶'을 잘 조화시킬 수 있었다.
E.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열정적인 영국 국교회 사제였고 또 자신을 "열렬한 국교도"라고 불렀다. 사실 웨슬리 생전에 영국 감리교 운동은 영국 국교회와 분열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분열의 움직임을 막고자 했으며 결국 그의 사후에야 영국 감리교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가 초기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전통이 바로 영국 국교회의 전통이다. 그는 당시 영국 국교회의 사제를 배출하였던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의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 국교회의 39개조의 많은 교리적 조항을 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39개 조항을 그의 신학적인 관심에 따라 24개 조항으로 축소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국 국교의 신학의 정립에 큰 공헌을 한 리챠드 후커(Richard Hooker)의 죄 이해와 39개조의 원죄(Original Sin)조항인 제9조를 웨슬리가 어떻게 생략, 변형 시켰는지를 살펴봄으로서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가 웨슬리 죄 이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보겠다.
후커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은 결코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성과 의지를 사용하여 선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커는 인간의 완전 이성 소유의 불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결코 절대 선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 때문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절대 선보다는 못한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선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선택한 선 속에는 여전히 악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후커에 의하면 죄는 자유의지와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기인한다. 결과적으로 죄는 적극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적절한 이성의 결여라는 것이 바로 후커의 견해이다. 그러나 기독교 인문주의자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커는 당시의 로마 천주교의 행위 의인화(work-righteousness)를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리고 또한 개혁 교회의 신앙 제일주의에도 강한 거부를 하였다. 그는 인류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명하게 나타나는 먼저 주시고(initiative)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 은총을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개인적인 죄책의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변화의 은총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이 변화의 은총으로 인해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응답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총을 인간이 받아들임은 단지 인간의 내적 정신적 활동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스타일의 변화 가운데 눈에 보이는 것이다. 결국 성화의 삶을 중시했다. 그러나, 성화의 삶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는 그 제도적인 수단을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성례전은 은총의 효과적인 표징이며 은총의 참된 수단이다. 그렇기에 세례는 단지 고백의 표현이 아닌 기독자와 비기독자와의 구별의 표시이고 거듭남 혹은 신생의 표징이 되는 것이며 죄의 용서와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양자됨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예전 중심적인 신학 이해의 한계를 그의 경험에 의해서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이 영국 국교회에서는 가지고 있지 못한 경험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당시의 대중들에 대한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세례와 거듭남이 서로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며 영국 국교회처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웨슬리는 세례의 성례전을 외적인 행위로서 하나의 표징으로 보았으며, 거듭남은 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거듭남과 세례가 서로를 동반할 수도 있으며 서로 연합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고 유아 세례에 있어서 세례는 거듭남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거듭남을 동반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영국 성공회로부터 받은 죄 이해에도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항을 축약한 25개조 중에 원죄에 관한 항목을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에 맞추어 변형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설교 13번 "신자 안의 죄(Sin in Believers,1763)"의 도입부에 영국 국교회의 39개조 제 9항을 본문에 삽입하였는데 이때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학적인 이해에 따라서 생략하여 소개하고 있다.
원죄는 [아담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아담의 후손에게 유전되어지는] 모든 사람의 본성의 [결점과] 부패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원의(original righteousness)에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그 본성에 있어 악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육이 영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적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이 세계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분노와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본성의 부패성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들은 지혜로, 어떤 이들은 감각으로, 어떤 이들은 감정으로, 어떤 이들은 육의 소욕으로 해석하는] 헬라어로 프로네마 싸르코스( )라고 부르는 이 육의 정욕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례 받고]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기는 하지만 이 정욕은 그 자체가 죄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조항에서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의 문제를 생략했다. 웨슬리는 원죄의 유전의 문제에 있어서 초기에는 생물학적인 유전 전이설에 영향을 받았다가 중기에는 영혼 창조설적인 입장에 기울어져 있었으며 후기에는 영혼 전이론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설교를 작성했던 영혼 창조설적 경향에 기울어져 있었던 중기에 웨슬리는 원죄의 전이의 방법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점으로 미루어보아 생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속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한 죄책으로부터 벗어나 실질적으로 소위 원죄의 결과로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의 손상되고 타락한 본성뿐이기에 웨슬리는 원죄의 죄책의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구절의 세례를 생략한 것은 세례를 단지 외적인 표징으로 보고 있으며, 의인화의 유일한 조건은 바로 믿음뿐이라는 종교 개혁의 모토에 강한 영향을 받은 후이기에 세례를 통한 정죄함의 구절을 생략한 것이다. 이렇듯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를 자신의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경험과 신학에 맞추어 변형시켰다.
Ⅲ. 웨슬리의 죄 이해의 변화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
A. 죄 이해 변화에 대한 시기 구분의 근거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은 성장과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하이트젠레이터(Heitzenrater)가 지적한대로 웨슬리의 사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의 사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그의 사상이 어떠한 성장과 변화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웨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시기를 구분하여 그의 사상을 고찰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경향은 1738년 5월24일의 올더스케잇 체험을 기점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경향은 이러한 전통적인 경향을 수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통적인 구분은 웨슬리의 영적 성장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이 핵심적 사건의 실제적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웨슬리는 올더스케잇 체험을 그의 후예들을 위한 회심 모델로 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간이 지난 후에는 신학과 설교에서도 점차적으로 회심경험에 대한 강조와 언급이 없어졌다. 그는 한 비판가에게 "저는 회심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올더스케잇 체험이 회심이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간다. 웨슬리가 이 질문을 언제 했으며 회심이라는 경험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살펴본다면 웨슬리의 증언에 근거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회심이었다'일 수도 있고 '회심이 아니었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이 올더스케잇 체험 속에 있다. 그 경험의 순간은 웨슬리가 당시에 고민했던 확증의 문제와 확증과 회심의 직접적인 관련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해 경험 후의 웨슬리가 경험전과 완전하게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의 연장선상에서 올더스케잇 체험을 바라보아야 하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속되어져야만 한다.
현대의 웨슬리 학자들은 웨슬리의 생애를 2기로 구분하는 전통적인 경향을 수정하고 있다. 먼저 터틀(Tuttle)은 신학적인 관점의 무게중심의 변이에 따라 올더스케잇 체험 이후를 3기로 구분하고 있다. 콜린스(Collins) 역시 단순히 2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에 관해서는 올더스케잇 체험이후 3기(1738-1747: 1748-1770: 1771-1791)로 구분했으며, 또한 웨슬리의 구원론의 핵심 포인트로서 참 기독교(Real Christianity)에 대한 모티브를 중심으로 3기로 나누고 있다.또한 카피지(Coppedge)는 예정론 논쟁을 중심으로 4기로 구분을 한다.
현대 웨슬리 연구가들인 아우틀러(Outler), 하이트젠레이터(Heitzenrater), 매덕스(Maddox)는 시기 구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신학적인 연구는 "초기 웨슬리: 1725-1738", "중기 웨슬리: 1738-1765", "후기 웨슬리: 1765-1791"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와 중기의 구분은 전형적인 도덕적 정직의 중요성 혹은 하나님과의 유사성에 대한 일치의 강조로부터 그의 신학에 최초의 긴장감을 형성시키는 은총에 의한 구원에 관한 보다 깊은 개신교적인 접근으로의 전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기와 후기의 구분은 기독자의 성결에 관한 웨슬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은총의 우선성과 인간의 노력과의 성숙한 통합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즉, 초기와 중기의 분기점은 1738년의 올더스케잇 체험으로 종교 개혁의 신앙 의인화에 의한 강한 충격의 시간이고, 중기와 후기의 구분점은 예정론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어진 보다 성숙한 구원론의 정립 시기인 1765년이다. 웨슬리는 1765년에 저술한 그의 설교 "구원에 이르는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과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에서 체계적으로 구원의 길(via salutis)을 정립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에 저술한 에세이 "감리교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Methodism)"에서는 그 때까지의 감리교 운동의 형성과정을 개괄하고 있다. 파울러(James W. Fowler)는 자신의 신앙 발달 이론에 맞추어서 웨슬리의 신앙과 자기 인식의 성장과 발달 단계를 연구하였는데 흥미롭게도 그 역시 3기의 시기 구분과 유사한 구분을 하고 있다.
이러한 3기의 구분에 있어서 초기와 후기의 웨슬리의 신학의 유사점이 중기와 후기의 웨슬리 신학의 유사점보다도 크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점은 웨슬리가 1770년에 출판한 표준 설교집에서 후기 설교들 중에 초기 설교를 아홉편을 결합시킨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유기적으로 시기를 구분한 일단의 학자들(Outler, Heitzenrater, Maddox, Fowler)을 기반으로 구원 이해의 필요조건인 죄 이해의 변화를 3기("초기 웨슬리: 1725-1738", "중기 웨슬리: 1738-1765", "후기 웨슬리: 1765-1791")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특별히 아우틀러와 하이트젠레이터가 경계하는 일반화의 위험성에 주의를 하며 고찰하도록 하겠다. 즉, 전체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웨슬리 자신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언급을 일반화하하는 위험성을 피하겠다. 가령 그의 저널을 보면 같은 사건을 시기별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1725년에 웨슬리가 기독자였는가라는 물음에 1740년대의 그에게는 기독자가 아니라는 답이 나오고, 1770년대의 그에게는 그 당시에도 실질적으로 기독자였다는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중기의 자기 인식과 후기의 자기 인식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의 상황 속에서 특정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선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점은 신학적인 면에서도 똑같은 특성을 가진다.
특히 죄에 대한 그의 법정적인 관심과 치유적인 관심의 통합으로부터 발생하는 긴장 관계들을 고려하면서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그의 죄의 이해가 시기별로 어떠한 변화와 성장과 성숙을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B. 초기(1725∼38, 속죄의 치유적 특성)
1.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1720년 입학한 크라이스트 쳐치에서 1724년에 학사학위를 받은 뒤 석사 학위를 위한 공부를 위해서 옥스퍼드에 남는다. 그리고 1725년에 사제(Deacon) 안수를 받는다.
이 당시에 읽었던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 및 훈련』(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은 그로 하여금 동기의 순수성의 중요함을 가르쳤고, 중간적인 입장이란 없으므로 일부분이 아닌 모든 삶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마귀에게 바쳐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웨슬리는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곧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또한 같은 해에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Christian's Pattern)에서 웨슬리는 '의도의 단순함과 감정의 순수성(Simplicity of intention and Purity of affection)'이 '영혼의 두 날개(the wings of soul)'로서 그것 없이는 하나님의 산에 결코 오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향으로 웨슬리는 영적 자아의 죽음,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과 같은 신비주의적 영성에 심취하게 된다. 특히 1731년 가을에 크라이스트 쳐치 교회에서 행한 설교인 "승리하는 자들의 지혜(The Wisdom of Winning Souls)"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영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설교의 주제는 진정한 복음주의의 동기와 목적인 거룩한 삶의 복음적 권능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은총과 의무로서의 거룩한 삶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웨슬리가 목사들에게 한 훈계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그들(너희들)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는 아 켐피스의 Fac quod in te est(너의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 혹은 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너의 선한 의도를 아실 것이다.)를 생각나게 한다.
부모님의 권고와 제레미 테일러의 영향으로 1725년 사순절 기간에 영적 일기(diary) 쓰기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거룩한 삶과 구원의 확증에 대한 희망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일기는 순전히 그가 분투했던 그의 죄와 단점들에 대한 자기 검증들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웨슬리 일기의 목차는 그의 경건 생활이 '명상적인 경건(meditative piety)'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명상적인 경건(meditative piety)'은 그의 어머니 수산나에 의해 영향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 명상은 감리교도(Methodist)들이 거룩한 삶의 원천인 덕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영적 훈련의 진수였다. 명상의 중요한 목적은 자기 인식이었고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자기 검증이었다. 하이트젠레이터는 웨슬리가 사용한 방법이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Ignatius of Loyola)의 영신 수련(Spiritual Exercises)의 방법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웨슬리는 아버지의 충고인 "성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을 마스터하라"를 받아들인다. 베버리지(W. Beveridge)는 고대 동방 교회 문헌을 정리 수집한 Pandectae를 편집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편집을 통하여 크리소스톰을 소개받는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일기에서 크리소스톰을 1726년 초에 읽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웨슬리는 아버지 사무엘의 충고로 크리소스톰을 마스터하였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크리소스톰의 제1차 자료를 직접 인용하고 있다. 그는 크리소스톰을 통해 구원의 신인협조설적 질서(Divine-human cooperation), 즉 하나님의 은총의 주도권과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구원의 질서를 배웠다. 인간의 책임성은 회개와 믿음으로 구성된다.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뒤 양면과 같다. 은혜가 먼저 역사 하면, 자유의지는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개만이 인간의 책임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이다(엡 2:8). 이 점이 웨슬리와 크리소스톰의 다른 점이다.
1727년에 접한 윌리암 로우(William Law)의『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중대한 소명』(Serious Call)에서 내적 성결의 필요성을 강하게 확신한 웨슬리는 내적 성결을 위해서 영혼의 적절한 기질이 필요하고 그 기질을 위해서 모든 기회에서 은총의 수단을 활용해야 하며, 선행 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배웠다. 이 모든 것은 내적 성결, 즉 신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90퍼센트 신자(Almost Christian, Half Christian)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모든 소유와 전 존재를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한다.
1729년 늦가을에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강의를 하기 위해 엡워드를 떠나 옥스퍼드로 되돌아 왔다. 이때 동생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학문과 경건을 위하여 소수의 학생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는 챨스의 요청으로 이 소그룹을 지도하게 된다. 웨슬리는 소그룹을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지도하지 않았다. 소그룹의 회원들이 일방적으로 웨슬리를 따라갔던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영적 나눔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소그룹 운동에 붙여진 명칭 중에 의미가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메도디스트(Methodist-규칙쟁이)'라는 명칭이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메도디즘(Methodism)'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져왔다. 이 명칭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에게 붙여진 것은 1732년부터였다. 그런데 이 명칭이 웨슬리의 옥스퍼드 그룹에 처음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17세기에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s)'라는 일단의 신앙적 경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역사적 사실을 통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명칭이 옥스퍼드의 웨슬리안 그룹에 적용되어진 첫 번째 기록은 윌리암 모간(William Morgan)이 죽고 존 클레이톤(John Clayton)이 그 운동에 참여한 시기인 1732년이다. 그런데 '메도디스트(Methodist)'라는 용어가 웨슬리안 그룹에 처음으로 사용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17세기에 영국과 유럽에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라는 명칭으로 불려진 사람들이 붙여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적인 경향을 가진 비국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신앙의인화에 의해 인간의 가능성을 극소화시킨 당시의 개혁교회들에 반대하여 구원의 과정 속에서 신적인 은총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응답(신실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규칙과 방법에 의한 삶, 즉 경건한 규칙적인 일상 생활"을 주장했다. 이들은 예정보다는 보편적 속죄관에 기인한 인간의 의지와 책임성, 새계약 아래서 '율법'을 완성코자하는 신실한 순종, 성결 혹은 성화를 재촉하는 선행, 이중의 의인화 혹은 은총의 결과적 사역에 기인하는 내재적인 의를 강조하였다. 이점은 그들의 신학적 주장과 초기 웨슬리의 신학 사이에 대한 어떤 관계성을 보여준다. 1732년에 웨슬리의 신학은 분명히 당시의 칼빈주의자들이 '아르미니안주의'라고 부르는 신학적인 경향에 근거하고 있다. 아우틀러는 웨슬리의 초기 설교가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해서 급진적일 정도로 기울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이 당시에 웨슬리는 그의 모든 삶과 신학에 있어서 신실한 순종(sincere obedience)의 비전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성결로 명칭되어지는 영혼의 거룩한 습관적 기질을 통해서 죄로부터의 정화, 영과 육의 오염으로부터의 정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덕을 받은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존재가 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외적 행위의 의라기보다는 영혼의 내적 경향성을 초래하는 성령의 사역에 있었다.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1733)"를 비롯해서 1730년대 초기의 웨슬리의 설교들은 동일한 신학적인 관점과 관심을 가진다. 우선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하나님께 용납되어진 상태에 있는 존재로 그 표징은 외적 할례, 세례 혹은 어떤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올바른 상태의 영혼에 있다. 중요한 점은 완전함이라기보다는 신실함이며 잘하는 것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완전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함으로서 사랑의 율법이 충족되어짐으로 성취되어진다. 17세기의 '뉴 메도디스트(New Methodists)'의 신앙적 경향과 '옥스퍼드 메도디스트(Oxford Methodists)'들의 신학과 신앙의 유사함이 이점에 있다.
이 시기에 웨슬리에게 영향을 준 사조들은 우선적으로 성서의 우선성이고, 그리고 초대 교부들과 중세와 영국의 경건주의자들, 대륙의 신비가들과 자유주의자들이었다. 특히 이 사실은 잉함의 일기(diary)를 통해서 간접 증명된다. 결과적으로 웨슬리는 그들의 영향으로 성결과 성화의 구원을 정적이고 고착되어진 것이 아니라 발전과 변화가 지속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한 의도(single intention)'를 가지고 삶 속에서 지속적이고 변화하는 성결을 추구하는 구원관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웨슬리는 '명상적 경건(meditative piety)', 즉 생활을 위한 기도(공적 기도, 사적 기도), 성경 읽기, 금식과 새벽에 기상하기, 모든 공적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서 죄수와 병자를 방문하였으며, 고아와 과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732년에 윌리암 로우와의 직접적인 만남과 버리그논(Bourignon), 기욘(Guyon), 페넬론 추기경(Cardinal Fenelon), 피어 포이렛(Pierre Poiret), 몬스의 드 랑테(Mons de Renty)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은 웨슬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에 있어서 규칙들에 대한 커져가는 강박관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에 힘을 실어준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사랑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주의의 영향은 웨슬리로 하여금 그가 오랫동안 채택했던 훈련과 규칙의 삶과 신비가들이 강하게 옹호하였던 모든 책무로부터의 면제 사이의 긴장을 초래하였다. 이것이 웨슬리를 곤경에 빠지게 했고 그는 이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께 합당하지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이트젠레이터는 웨슬리가 지속적으로 물음을 던져왔던 확실성의 문제 즉 확증의 문제가 더욱 그를 곤란에 빠뜨렸다고 분석한다.
구원의 확증에 대한 확실한 근거나 증거가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 웨슬리는 1735년 10월에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인디안 선교를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했다. 혼란이 구원의 불확실함을 야기했고, 의심이 믿음에 도전을 가했다. 그는 구원에의 확신이 없었기에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 전인 1736년 1월 25일에 만난 폭풍우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다. 이때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이 예배드리는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모라비안들이었다. 이것이 모라비안의 경건에 대한 존 웨슬리의 첫 번째 경험이었고, 훗날 '확신(assurance)'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웨슬리의 일기를 편집했던 느헤미야 커르낙(Nehemiah Curnock)은 그 폭풍이 초기 감리교에 있어서 결정적 사건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고 잉함이(Ingham) 감리교도에서 모라비안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하였다.
1736년 조지아주 사바나 촌에 도착한 웨슬리는 다음날 독일 교회 목사인 스팡겐베르그(August Gottlie Spangenberg)를 만나서 믿음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웨슬리는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을 듣고 스팡겐베르그는 "당신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불충분합니다"라고 응답한다.
1737년 12월부터 1738년 1월에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다시금 1736년 1월 25일의 상황을 맞게 된다. 거의 영국에 다 왔을 때 다시 한번 죽음의 위기를 맛보는 풍랑 속에서 구원의 확신 없이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인디안들을 회심시키기 위해서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오 누가 나를 회심시킬 것인가? 이 악한 불신앙의 마음으로부터 나를 구원할 그 분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는 맑게 갠 여름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위험이 가까이 없는 한 나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 나의 영혼은 고통을 당한다. 나는 죽은 것이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두려워하는 죄를 갖고 있다. 내가 나의 마지막 방적 실을 잣을 때 나는 해변에서 멸망할 것이다.'
웨슬리는 1738년 1월29일 신대륙에서의 경험을 철저하게 뒤돌아보게 된다. 이 때 기록한 일기는 훗날 자신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뒤돌아보면서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의 전반적인 회심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조지아에 있는 인디안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국을 떠난 지 어느덧 2년 4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배웠던가?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려고 미국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마저 전적으로 하나님께 회심하지 않았으면서(적어도 약간의 의심이 있는 것)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러 미국에 갔단 말인가? '내가 이상해 진 것이 아니다. 제정신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그 동안 많은 이들이 나를 위로하였듯이), 나는 '악마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 정도를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약속의 계약을 아직 맛보지 못한 상태일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번째로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을 때', 제자들도 그를 믿었을 지는 몰라도 '세상을 이길만한 확신'을 갖고 있지는 못하였다. 내가 원하는 믿음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나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확실한 믿음과 자신감을 하나님 안에서 소유하는 것이다. ...'
지금까지 웨슬리가 1725년부터 1738년까지 어떤 신학적인 여정을 걸었는지 살펴보았다. 이 시기의 웨슬리의 죄 이해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주로 그의 설교이다. 따라서, 그의 죄 이해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 시기의 설교가 주 자료가 되어야 한다. 200주년 기념판에 있는 아우틀러가 편집한 웨슬리 설교 중에 이 시기의 설교들은 총 스무편이 있다. 19세기 중반에 웨슬리의 작품들을 모아 편집한 토마스 잭슨(Thomas Jackson)의 전집(Works)에는 이 시기의 설교들이 단지 여섯편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웨슬리 자신이 초기의 설교들을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본들의 진정성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설교들은 사본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웨슬리 자신이 십여개의 설교와 몇 개의 단편들을 남겼고, 동생 찰스 웨슬리 또한 그의 형으로부터 받은 사본을 복사해서 남긴 것이 일곱편이 있다. 이 200주년 기념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잭슨판(Jackson)의 141편의 설교가 웨슬리의 설교 중에 현재까지 전해진 것으로 여겨졌지만, 프랑크 베이커(Frank Baker)와 하이트젠레이터의 연구 결과로 사본으로 존재하는 설교까지 포함해서 웨슬리의 설교가 총151편임이 밝혀졌다.
비록 웨슬리 당시에는 출판되어지지는 않았지만 사본으로 남겨진 초기의 설교들은 웨슬리 신학의 태동과 일련의 발달 과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설교들은 젊은 목사로서, 옥스퍼드의 교수로서, 그리고 시골 교구의 아버지의 부제로서 기독자의 신앙과 삶에 대한 초기 웨슬리의 관점들이 얼마나 전형적으로 영국 국교회적인가를 보여준다.
2. 초기 웨슬리의 죄 이해
초기 웨슬리의 설교들 중에서 당시의 그의 구원관과 관련된 신학적 측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설교들은 1730년 11월 1일에 옥스퍼드의 올 세인트(All Saints)에서 처음 설교되어진 "이해력에 관한 전망(The Promise of Understanding)"이후의 것들이다. 그 설교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참 기독자로서의 내적 성결과 거룩한 삶이었다. 참 기독자로서의 확실성에 대한 물음이었다. 기독자로서의 확실성의 확인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방법의 사용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겸손으로 인도하여 믿음으로 걸어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인간의 현 상태에 있어서 웨슬리는 창조의 완전성과 타락의 병약성을 비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아담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올바로 향유함으로서 지복(Happiness)의 상태에 있었고 그에게 있어서 실수나 의심은 낯선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피조된 인간은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성은 완전하고 신적이며 천상적인 것이었다. 창조의 완전성 속에 있던 인간은 그의 자유를 시험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서 타락하게 된다. 즉, 의지의 오용으로 인한 불순종때문에 타락하게 된 것이다. 타락의 결과는 먼저 육체적 죽음을 불러왔으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다. 또한 인간의 이해력에 혼돈과 우둔함이 나타났고, 인간의 의지는 악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인간의 자유는 악으로 가득찬 노예의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손상된 자연적 인간은 세상을 향하여서는 살아있고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죽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웨슬리는 인간의 현 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진 상태를 병들어 있는 상태로 이해한다. 그리고 특히 원죄를 본성의 생래적 부패(inbred corruption of his nature)로 이해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있는 죄성을 병적인 요인으로 보았다.
악한 감정들은 엄청난 사슬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질병이다. 우리의 본성은 병들어 있고 노예상태에 있다. 따라서, 지성은 희미해지고, 마음은 병들게 되었다.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은 가장 치명적인 병으로 감염되어, 퍼졌고,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질병들, 상처들, 그리고 정화되어야할 종기들로 가득차 있다. 우리의 모든 동물적인 갈망과 악마적 기질, 모든 종류의 정욕, 자만, 이기심은 우리를 죽음에 몰고 갈 상처들이며, 기분 나쁜 종기들의 하나이고 완전한 부패이며 부정함이다.
인간의 본성은 병들어 있고 그 본성으로 인한 기질 또한 정화되어져야 할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치료되어져야 할 존재이고 약과 의사가 필요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병적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치료를 거부하게 된다면 인간은 소망 없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이제까지 말하여진 것으로부터 살펴보건대, 내적인 질병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 질병의 유일한 치료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몹쓸 병마가 그들을 사로잡았으며,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합니다.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졌습니다. 무지와 실수의 구름이 그들의 눈을 가립니다. ... 만일 인간이 자연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질병을 전제로 해서 나온 치료법과 마찬가지로 이 사실에 근거를 둔 유대교나 기독교와 같은 종교는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의 할례(the circumcision of the heart)'이다. 이 '마음의 할례'는 영혼의 습관적 기질인 성결이다. 성결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워진 영혼의 올바른 상태이다. 직접적으로 죄와 영과 육의 모든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덕(이 덕은 겸손, 믿음, 소망, 사랑이다.)의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마5:48)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율법인 마음의 할례는 마음의 살아있는 희생으로 거룩한 사랑의 불꽃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봉헌되어져야 할 것이다. 즉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며, 마음의 순수한 의도이고, 소명으로 눈을 고정시켜 그 소명에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웨슬리가 본질적으로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가 아닌 내적 종교(inward religion)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하나님께 용인된 상태에 있는 자의 표징은 외적 할례나 세례 혹은 어떤 외적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되어진 올바른 영혼의 상태이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한 첫걸음은 겸손, 바로 자기 인식이다. 그리고 겸손으로 인해 회복된 인간의 이해력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힘입어서 우리의 의지를 회복하게 한다. 회복된 자기 인식을 통해 우리 모두가 어리석고 악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관련 있다. 이 믿음이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주어진 단 하나의 약이다. 죄된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 주어진 믿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죽음의 문으로부터 온전한 건강함으로 회복되어지며, 우리의 병이 치유되고, 우리의 상처가 회복되고 우리의 불결함이 정화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웨슬리가 말하는 믿음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고후 10:24)이다. 즉 웨슬리는 믿음은 강한 무기여야 한다는 사실 속에 믿음에 다양한 정도가 있다는 것을 내포시켰기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한 믿음이 있어야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어진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세상으로부터 난 자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가 누구인가를 구분 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겸손으로 할례를 받은 자, 믿음으로 할례를 받은 자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참 종교의 진정한 열매 혹은 증거인 덕(예수 그리스도의 덕으로 특히 사랑)의 활동과 영혼의 내적 경향의 외적 증거를 검증할만한 수단들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며 마음의 할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 뿐만이 아니라 겸손, 소망, 사랑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형상과 영광스런 자유, 그리고 완전한 건강함의 회복은 우리에게 단하나 필요한 것으로 이들의 향유가 인간 창조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오로지 우리의 성화 즉, 악한 속박으로부터의 우리의 회복, 이웃 사랑과 우리의 창조자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하나님 섭리의 목적도 이것에 있다. 따라서 성령의 모든 사역은 우리의 건강과 자유와 성결을 회복케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강건과 자유와 성결은 우리 본성의 내적 질병과, 자기에 대한 사랑, 이생에 대한 사랑을 치유하는데 목적되어져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외적 기질에 매일의 양식을 준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아 우리의 영혼의 건강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행복을 완전하게 하는 유일한 필요 조건이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의 영광의 광채이며 완전한 자유이다. 사랑은 영혼의 건강이며 영혼의 모든 힘의 완전한 발현이며, 그 능력의 온전함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의 향유가 인간 창조의 목적이다 그리고 사랑의 회복이 인간에게 단 하나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는 이점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구속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건강과 자유로 회복시키시는 것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목적을 위해 우리 본성의 모든 영적인 병을 치유하시고 우리의 본성을 갱신시키신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성 중에 치유자로서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치유되어가고 있는 기독자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제레미 테일러와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고 윌리암 로우와 같은 신비 영성가들에 의해서 영향받은 것이다.
우리의 본성의 갱신을 위해 단순한 생각, 순수한 의도에 우리를 고정시켜야합니다. ... 우리는 많은 수단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신적인 본성에의 참여자가 되고, 사랑에 의해 작용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한 영이 되게 하는 그 신앙에 합당한 지고의 척도를 다시 획득하는 것을 우리의 유일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인간의 회복과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피를 흘리셨고 성령께서 인간을 돌보신다. 따라서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높은 소명의 상급의 표징 즉, 죄의 사슬과 병과 죽음에서 자유와 건강과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의 참여자이며 파트너가 되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당시에 엄격한 규칙과 방법을 세우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지금까지 웨슬리 초기 설교를 통해 구원론 형성의 필요 조건인 죄의 이해를 중심으로 그의 신학을 살펴보았다. 웨슬리는 '참 기독교란 무엇인가?'와 '자신이 참 기독교인인가'라는 물음 아래 '은총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형성해 갔다. 이 시기에 그의 신학적 입장은 그로 하여금 자비와 헌신의 활동들로 특징지어지는 훈련된 삶의 방법들을 활용하게 하였다 할지라도 강조점은 항상 내적 성결이었다. 행위들은 명상적 실천들을 통해 자라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덕들에 대한 증거들이었다. 이 당시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창조시의 인간의 원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진 영적 건강과 영적 자유와 관련 있다.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과의 관계회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총의 구속적 사역의 목적이었다. 이런 회복은 단지 신자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믿음을 가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믿음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회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한층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와 함께 동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현 상황이 부패하고 병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죄는 바로 인간의 병들고 부패한 본성이다. 따라서, 전에 잃었던 사랑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덕들을 자라나게 함으로써 죄된 경향성을 정화하고 치유해야만 한다. 따라서, 신앙이 가득한 기독자의 삶은 은총으로 충만한 삶이어야 하며, 그는 명상의 실천과 자기 검증, 그리고 기도 등으로 그 덕들을 자라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그 덕들의 표징으로서의 헌신과 자비의 활동을 내용으로 하는 규칙적인 삶으로 확증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웨슬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성서와 초대 교부, 자비의 활동과 헌신적인 묵상, 윤리적인 책임성과 은총의 신학, 규율적인 헌신, 방법론적인 명상, 그리고 웨슬리 자신만의 독특한 기독자의 생각과 삶의 형태를 형성시킨 실천적 경건을 강조한다. 이점이 초기 웨슬리의 신학과 목회의 특징들을 창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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