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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죄 이해 1

존 웨슬리의 죄 이해 1
http://cafe.naver.com/modernth/397  
 
존 웨슬리의 죄 이해
- 죄 이해 변화과정의 역사적 고찰을 중심으로(John Wesley's Doctrine of Sin)
김민석
감사의 글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논문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이라는 아쉬움은 모든 논문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음으로 양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논문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신학 대학을 입학하기 바로 전에 평범하지만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제가 존경하는 이순복 권사님께서 제 손에 쥐어주신 한 분의 추도 예배 순서지입니다.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신 목사님이고 그 분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배웠다면서 저에게 그 분과 같은 목회자가 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 목사님은 바로 변홍규 감독님이셨습니다. 대학원에 와서야 변홍규 감독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권사님, 하늘나라에서도 부족한 제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그리고 제 2의 변홍규 감독님과 같은 참된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과 피와 땀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장남에게 요구할 것도 많으실 터인데, 그 많은 것들을 가슴에 묻어두시고 늘 희생하시고 기도하시며 사셨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장손으로서 할머님께 해야될 일이 많음에도, 하지 못하고 있는 못난 손자를 위해 늘 무릎으로 기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버님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으로 인해 지금에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못 이룬 꿈을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보라야! 오빠가 오빠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미안하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앞길을 개척하는 너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김홍기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대학원 생활 자체를 이끌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처음 저를 이끌고 역사학회로 직접 인도해주셨고 학문함의 방법론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을 지도해주셨으며, 직접 전화 주셔서 조교로 써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의 책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심 감사드립니다. 또한 논문을 지도해 주심에 있어서 바쁘신 와중에도 논문을 빨리 쓰도록 재촉하시고 쓴 부분을 미리 읽고 세심하게 지도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김진두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학부 때부터 귀중한 자료들을 볼 수 있도록 배려 해주셨고 논문을 지도하심에 있어서 제 논문의 부족한 점들을 정확하게 집어주시고 보완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임승안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학부 마지막 학년에 발제를 위해 밤을 세워가며 교수님의 학위논문을 읽고 연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의 학위논문을 접함으로서 제 학위논문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홍기 교수님, 임승안 교수님, 김진두 교수님! 교수님들의 자상하신 지도가 없었다면 결코 이 논문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선한용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학부에서 많은 강의를 교수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목회하셨는지 수업시간을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 수업시간들은 저에게 참 공부였습니다. 학문함에 있어서 모델이 되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오래 사셔서 후학들에게 산 체험과 지혜를 전해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최이우 목사님, 황인득 사모님 감사합니다. 항상 자상하게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사역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심지어 식사는 제 때 했는지 물어보시며 세심하게 돌보아 주셨습니다. 새로운 사역지와 환경 속에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상하게 살펴주셨습니다. 또한 목회의 모델이 되어주시고 스승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혜진 전도사님, 전재희 장로님 두 분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저희 가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최조영 목사님, 박명희 사모님 자주 찾아 뵙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식처럼 아껴주시고 늘 기도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전치호 목사님, 정기순 사모님 감사드립니다. 항상 관심 가져주시고 아껴주시며 많은 사랑 주심 감사드립니다. 받은 사랑 전하며 살겠습니다. 김영헌 목사님, 나영옥 사모님 감사드립니다. 제가 가장 방황하고 있었던 시기에 목회에 대한 비전에 대해 어렴풋이라도 깨닫도록 해 주셨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작년에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신 모습을 보았을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사님!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힘있는 목회를 하셔서 후배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이은재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을 알게 된지 일년 육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항상 친형처럼 친구처럼 여러 가지 일들을 세심하게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올 해 초부터 같이 사역을 하게 되어 저에게 많은 위안과 힘이 되었습니다. 저도 후배들에게 본을 보이고 사랑을 나누어주는 선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 한해 동고 동락한 교육부 식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웅식이형, 경희 선배, 정민이와 영석이! 논문 쓴답시고 같이 하는 일들에 대해 소홀했던 적이 있었지만 불평 한마디 안하고 참고 견디어 주었습니다.
감신에 와서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심은수, 결혼 축하한다. 설마 결혼했다고 우리의 우정이 변하지는 않겠지! 노혜민 왜 성공회 대학원으로 갔냐? 너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던지 너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에 하나야! 이외에도 감사해야할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은석이형, 지겸이형, 경호형, 은표형, 재명이형, 철이형, 영래형, 대흥이형, 승래형, 창원이형, 기문이형, 애성이 누나, 기연이를 비롯한 역사신학회 회원들, 진기, 충근, 호석이를 비롯한 사랑하는 93학번 동기들, 늘 위해서 기도해 주셨던 대한 수도원의 가양제단 식구들, 바쁜 중에도 논문 교정을 해준 명은이 그리고 논문을 쓰느라 집에 가지 못했을 때 처소를 제공해 주었던 기숙사 207호 식구들 특히 운이, 성진이, 선진이. 저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감사한 사람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통해 저의 삶 속에서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신 하나님! 당신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제가 어찌 다 갚아야 할는지요. 당신의 크신 사랑이 있어 저는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2000년 12월 어느 날 이른 새벽에  김 민 석
목       차
 
 
 
 
 
 
 
 
 

Abbreviation

.Ⅰ. 서론
 
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을 향해 있다. 따라서, 본질상 이 복된 소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 특히 인간의 실존적인 현실에 대한 이해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현실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견해는 인간의 자연적 상황을 하나님과 분리되어 악과 타락의 상황 가운데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구원받지 못한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전통은 이러한 현 상태를 끈질기게 '죄'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만큼 인간의 현 상황을 비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은 드물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죄와 악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 교리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포함된 구원론에 비해서 죄에 대한 교리는 긍정적으로 언급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론은 인간의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악과 죄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포함한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구원론과 죄의 개념 사이에는 조직적인 관계가 있다. 따라서 어느 개념도 다른 개념과 완전히 분리되어 공식화 될 수 없다. 구원론과 악과 죄의 문제는 빛과 어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구원론의 차이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과언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 이해에 있어서 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죄와 악의 문제가 성서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는 악과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죄에 대한 정의보다는 죄의 극복과 치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과 죄의 문제에 있어서 그것들이 가지는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상실이자 신성한 형상에 대한 모독으로서의 본질적 특성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어거스틴과 종교 개혁가들을 위시한 서방 전통의 신학은 인간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는데,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간의 타락이 오고 자기 결정의 손실이 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원죄의 죄책이 유전된다고 보았다. 타락의 상태는 보편적이기에 서방 전통의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과 분리되어진 죄책과 타락한 인간의 무능력함을 강조하면서 기본적으로 타락에 근거한 인간이해를 하고 있다. 인간이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으로서 죄를 지었다. 인간은 법정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범죄했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범죄에 대한 용서이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는 이 점만을 너무 강조하였기에 서방 신학적인 전통에서 구원은 칭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서방 전통의 신학과는 다르게 동방 신학적 전통의 인간학은 인간의 원창조의 상태를 불완전하지만 순결하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운명지어졌다고 보았다. 타락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결과에 기인했다고 보는 점에 있어서 동방 신학적 전통은 서방 신학적 전통과 그 견해를 같이하지만, 타락의 결과는 다르게 이해했다. 그들은 죄의 유전성을 거부했다. 그리고 타락의 우선적 결과가 죽음과 인간 삶의 타락이지만, 타락 후에도 인간에게 응답 가능성이 자연적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죄와 타락의 결과를 일종의 치유되어야할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동방 신학 전통의 죄 이해의 경향의 원인은 원창조시의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며, 동방 신학적 전통의 관심은 은총이나 죄보다는 창조와 기독론에 더욱 치중하여 자신들의 인간 이해를 전개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죄의 치유와 신화(Likeness of God)의 추구였다. 이렇게 서방과 동방의 인간과 죄에 대한 다른 이해는 구원론의 논의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야기했다.
현대에 와서 죄와 속죄에 대한 논의는 법정적인 개념과 치유적인 개념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법정적인 개념을 강조한 서방 기독교 신학적 전통과 치유적인 개념을 강조한 동방 기독교적인 전통에 대한 통찰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단지 한 측면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법정적인 면만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후 인간 실존의 문제인 인간의 죄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치유적인 면만을 강조한다면,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해결책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많은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죄와 속죄의 법정적인 면과 치유적인 면의 조화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웨슬리는 죄와 속죄의 법정적 특성과 치유적 특성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인간 본성과 인간 문제에서 동방 신학의 전통의 치유적인 관심사에 우선성을 두고, 근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서방의 법정적인 이해를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가능했던 이유는 웨슬리가 신학과 삶, 목회에 있어서 끊임없이 은총과 기독자의 삶의 문제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 현실이해인 죄에 대한 이해와 죄의 문제의 해결은 그가 평생을 걸쳐 고민했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보다 세밀한 구원론의 형성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웨슬리의 죄 이해를 자신의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연구했을 뿐이며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단지 브라이언트(Barry E. Bryant)만이 자신의 학위논문으로 죄의 문제에 집중하여『죄에 대한 웨슬리의 교리』(John Wesley's Doctrine of Sin)를 썼다. 그러나 그의 책은 출판되지 않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까지의 웨슬리의 죄 이해에 관한 연구의 결과물들은 거의 모두가 한 책의 소주제였다. 그리고 그들의 연구 결과물 대부분은 웨슬리의 삶과 신학의 여정 속에서 고찰되어 진 것들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시대의 특정한 작품 속에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증빙자료서 첨부하였다. 와일리와 컬버슨(Wiley & Culbertson)은『기독교 신학 입문』(Introduction to Christian Theology)에서 유전의 방법에 있어서 웨슬리가 생물학적인 전이에 의한 '유전학적 모드(Genetic Mode)'를 따르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깊은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원죄가 어떻게 유전되는가?에 대한 웨슬리의 견해가 시기에 따라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원죄의 유전 방법에 있어서 웨슬리는 생물학적 유전설에서 영혼 창조설적인 견해로 그리고 말년에는 영혼 전이론적인 견해로 바뀌어 가고 있다. 생스터(W. E. Sangster)가『완전에 이르는 길』(The Path to Perfection)에서 웨슬리의 완전 개념을 설명하기 전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웨슬리의 1차 자료에 대한 깊은 조사 없이 너무 피상적으로 웨슬리의 죄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웨슬리가 죄악성에 대한 규정을 하지 않고 단지 자발적인 위반으로서의 죄에 대한 정의만을 시도하였다고 본 점과 웨슬리가 무의식적인 죄(unconscious sin)를 거부하고 있다고 본 사실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웨슬리는 분명히 죄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한다. 당시 웨슬리가 이러한 죄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한 이유는 그의 부흥운동을 위협하였던 칼빈주의적인 율법폐기론자들과 웨슬리의 신도회 내의 인물이었던 토마스 멕스필드(Thomas Maxfield)와 조지 벨(George Bell)의 극단적인 열광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웨슬리는 무의식적인 죄(unconscious sin)인 무의지적 죄(unvoluntary sin)조차도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콕스(Leo G. Cox)는『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개념』(John Wesley's Concept of Perfection)에서 비교적 웨슬리의 죄 이해를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지만 그 역시 역사적인 상황과의 대화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카터(Charles W. Carter)는 자신이 편집한『현대 웨슬리 신학Ⅰ』(A Contemporary Wesleyan Theology, volⅠ)에서 죄론을 썼다. 그는 웨슬리의 상황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없이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웨슬리의 죄론에서 원죄에 대한 이해는 다루었지만 웨슬리가 이해한 죄의 특성과 죄의 종류 및 구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매덕스(Maddox) 또한『응답 가능한 은총』(Responsible Grace)에서 웨슬리의 죄 이해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연구성과는 아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필자는 철저한 역사적 상황과의 대화를 통해서 웨슬리의 죄 이해가 어떠한 변화를 겪고 있는지를 살핀 후에 웨슬리의 복잡하고 세밀한 죄 이해에 대한 분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웨슬리가 어떠한 인간 이해의 바탕 속에서 그의 구원론을 이끌어 냈는지에 대한 고찰을 수행할 것이다. 이 작업은 구원 이해의 필수조건인 죄 이해를 웨슬리가 어떠한 과정 속에서 정립하였는지를 고찰함으로서 보다 분명한 웨슬리의 구원론의 특징, 즉 은총과 죄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알게 할 것이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및 구조
웨슬리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이들과 과거 일부의 학자들은 '웨슬리는 신학자가 아니라 설교가이며 부흥운동가이다'라는 견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과거에 웨슬리를 연구하던 일부의 학자들은 '그는 참(real) 신학자가 아니었기에 그렇다'라는 변증적인 논조로 그의 신학적 개념들을 연구하곤 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분명 당대에 신학에 있어서 가장 잘 훈련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는 옥스퍼드의 장학생이었고, 오늘날에 신학 석사(Master of Divinity) 학위에 해당하는 신학 학사 학위(Bachelor of Divinity degree)를 받았으며, 약관 24세의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링컨 대학의 연구원(Fellow)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웨슬리는 평생을 정숙주의 경향의 모라비안, 율법폐기론적 경향의 칼빈주의자들과 극단적 열광주의자들과 논쟁을 했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만 한다. 확고한 신학적 기초가 없었더라면 웨슬리는 이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웨슬리는 현장과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충실한 신학자요 복음전도자였다. 따라서, 웨슬리의 신학이 엄청난 역동성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개인의 신학적인 사유는 일종의 성장하는 유기체와 같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는지가 그 유기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듯이, 한 개인의 신학적인 사유를 온전하게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 신학적 사유의 성립의 동인이 무엇인가? 라는 역사적인 고찰이 동시에 수행되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인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결과물인 작품(Text)을 통해 보다 쉽게 그 인물과 그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한 보다 정확하고 분명한 접근은 지금의 현 상황에 그 연구 결과물의 적용을 용이하게 한다. 따라서, 이런 기본적인 입장에서 필자는 웨슬리의 죄에 대한 논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대한 웨슬리의 논의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에 그의 일차자료를 통한 죄 문제에 대한 접근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에 주의를 하면서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 논의가 웨슬리의 신학적인 발전 과정의 어떠한 시기에 대두되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 번째는 논의의 근거를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속죄에 대한 그의 법정적인 관심과 치유적인 관심의 통합으로부터 발생하는 긴장 관계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전제들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죄 이해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전통적인 죄 이해들을 분석할 것이다. 다음으로 웨슬리가 그에게 영향을 준 전통들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종합했으며 성서를 해석하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했는지를 역사적 상황과 그의 작품들의 상관관계를 통해서 고찰할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의 수행을 위해 전통적인 죄 이해들을 살펴보고, 각 시기별로 웨슬리의 설교와 논문, 편지, 에세이 그리고 성서주해를 역사적인 상황과 함께 비교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 후에 웨슬리의 죄에 대한 최종적인 이해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물을 가지고 웨슬리의 죄 이해가 그의 신학에서 점하는 위치로서 죄로부터의 승리를 위해 어떠한 논의와 목회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끝으로, 웨슬리의 인간 현실과 문제에 대한 논의가 그의 신학과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숙고함으로서 본 논문을 마칠 것이다.
이러한 목적 하에서 본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웨슬리의 죄 이해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앞부분에서 한 역사적 고찰을 근거로 웨슬리의 죄에 대한 논의와 죄라는 인간 현실문제를 그가 어떠한 구원이해로 풀어가고 있는지 살펴 볼 것이다.
첫 번째 역사적 고찰에 해당하는 부분은 Ⅱ장과 Ⅲ장이다. Ⅱ장은 전통적인 죄 이해가 논의될 것이다.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사제이자 신약학자였다. 따라서 당시 웨슬리의 삶의 자리였던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신약성서의 죄 이해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성서의 죄 이해와 영국 국교회의 죄 이해가 웨슬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전통들, 즉 동방 교부, 서방 교부, 로마 카톨릭, 종교 개혁의 죄 이해에 대한 고찰 후에 각각의 전통들과 웨슬리의 죄 이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 보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웨슬리의 죄 이해의 변화과정에 대하여 역사적인 고찰을 할 것이다. 웨슬리는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평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인 '거룩한 삶'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죄 이해 변화에 대한 3기의 시기 구분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고찰한 후에 '거룩한 삶' 중심의 초기 웨슬리의 죄 이해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루터 전통의 모라비안과의 만남을 통해 접하게 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강한 충격 속에 있었던 중기 웨슬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긴장관계인 신자 안에 남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가를 살펴 볼 것이다. 신자 안에 남은 죄의 문제는 중기 웨슬리가 모라비안의 정숙주의와 칼빈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적 경향, 그리고 웨슬리 신도회 내부의 극단적 열광주의자들과 어떻게 논쟁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후기의 웨슬리는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인 죄의 문제를 통찰력 깊은 은총 이해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고찰할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Ⅳ장과 Ⅴ장으로서 일종의 조직신학적인 접근이다. 앞 부분에서 논의되어진 역사적 고찰을 근거로 Ⅳ장에서는 먼저 웨슬리가 죄의 문제를 논의할 때 악의 기원에 대해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원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강조하였고 원죄 이해에 있어서 그 만의 독특성이 무엇인지 살펴 볼 것이다. 두 번째로는 웨슬리가 자신의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상황 속에서 죄 이해와 죄에 대한 구분을 어떻게 시도했는지 살펴 볼 것이다. 웨슬리는 상당히 복잡하고 중첩되는 죄 이해를 했다. 그리고 그의 죄의 구분은 독특한 부분으로서 죄의 구분에 있어서 웨슬리와 종교 개혁의 죄 이해와의 차이는 현실 세상에서의 완전에 대한 논의에 대한 서로 다른 결론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죄와 자유의지, 그리고 은총이 어떠한 역동적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Ⅴ장은 웨슬리의 죄 이해를 기반으로 그의 독특한 구원 이해를 살펴 볼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반드시 인간 현실의 제반 문제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웨슬리의 구원론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본 장에서는 그의 죄와 은총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선재적 은총, 확신케 하는 은총, 의인화의 은총, 거듭남의 은총, 성화의 은총, 온전한 성화의 은총, 그리고 영화의 은총이 어떻게 인간 현실에서 작용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즉 웨슬리가 인간 현실로서의 죄 이해와 그와 관련된 은총 이해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보다 세밀한 구원 이해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Ⅱ. 전통적인 죄 이해
 
A. 성서의 죄 이해
악과 죄의 문제는 성서에서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다루어진다. 성서는 악 일반과 도덕적인 악과 같은 죄에 대해서 분명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다. 성서는 죄에 대한 정의보다 죄의 극복과 치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 성서 속에서 죄에 대한 개념은 발전과정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성서로부터 발전한 죄의 개념이 신약성서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확정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성서의 죄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죄 이해의 발전 단계는 다음과 같다. 우선 구약성서에서 죄는 내적인 형태가 아닌 외적인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왔다.(불순종; 창 3장) 즉 하나의 행동으로 취급되었다. 우리의 첫 부모의 죄가 확실히 외적이 되기 전에 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행위가 공개 될 때까지 벌을 받지는 않았다. 확실히 죄는 법이나 행동 강령을 어기는 것으로 보여졌다. 히브리적 개념은 우선적으로 죄를 잘못의 공개 행위로 규정한다. 이것은 특히 죄를 의미하는 단어 "P scha(반항)"와 죄를 의미하는 다른 빈번한 개념들인 "Chet(위반, 형식적인 죄, 계율 위반)"와 "Avon(범죄, 특히 옳지 않은 마음가짐에서부터 생기는 벌받을 죄)"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하나의 행위로서 죄의 객관적인 관점은 레위기 법전 속에서도 보여진다. 무지의 죄들조차 율법과 대치되는 행동인 한에서는 죄(레 4:13,14)가 되었다. 비록 그것들이 무지의 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죄악이며, 용서를 필요로 한다. 특히 레 5장 17절에서 드러나는 죄의 개념은 죄의 윤리적인 개념이 결여되어 지극히 법률적이고 형식적이다. 여기의 중심 개념은 자유 의지가 아닌 하나의 법률이다.
두 번째로 신명기 법전은 외적인 행위들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죄들의 개념이 매우 서서히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명기 법전은 단지 자기의 의지로 살인을 한 자만이 죄책을 지게 하였다. 의지에 대한 강조로 동기는 행동과 분리되었다. 그리고 내적 죄의 개념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이다. 십계명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적 죄에 대한 개념을 통해서 마음의 타락을 역설했던 예레미아와 에스겔과 같은 사람들의 증언들(렘 17:9)의 토대를 가르치셨고 마련하셨다.
세 번째의 죄의 발전 단계로서의 계약의 개념은 죄의 개념의 또 다른 발전이었다. 하나님과의 계약적 약속들은 모두 인간의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민 5:30-31) 계약의 개념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율법에 있다기보다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속에 있고 죄는 계약의 파기이다. 하나님 혹은 계약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 범한 죄는 모두 윤리적으로 책임져야 할만한 행동들이다. 사회적 죄와 종교적인 죄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다. 한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계약에 근거한 것이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 이상의 것으로 그 법을 수여한 분으로부터 떨어져나감을 의미한다. 또한 죄의 윤리적인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지배적이다.(잠 4:23) 개인적 책임성과 마음의 동기가 강조되었기에 외적으로는 율법을 지킬 때에조차도 죄를 지을 수 있다.
네 번째의 발전 단계로 죄악된 본성의 개념들로서의 죄가 구약성서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편기자는 "실로,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시 51편 5절)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외적 죄를 야기하는 내적 원칙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창조 시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상실 혹은 손상과 관련이 있다.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죄의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죄는 보편적이다. 두 번째 특징으로 죄는 항상 하나님과의 연합을 파괴한다. 세 번째로 죄는 희망이 없는 상태로 인간을 몰고 간다. 네 번째 특징으로 죄는 인간의 인간성(humanity)과 육체에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이 죄는 아니다. 구약의 죄의 개념은 비록 꾸준하지는 않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신약성서는 구약의 죄의 개념들을 보완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죄는 불순종으로 파악되었다.(롬 5,9) 이러한 불순종은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에 대적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에게 직접 대적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죄에 대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하마르티아(       )와 아노미아(      )이다. 하마르티아(       )는 신약성서 특히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 서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단어가 신약 성서에서 사용되어지는 몇 가지 용법 가운데 하나는 "행위로서의 죄가 아닌 죄의 특성으로 고려되어지는 죄"로서의 악의 원칙이다. 아노미아는 죄악행위(iniquity)를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아노미아는 의지적이든 무지로부터 기인했던지 간에 무법(lawlessness)을 의미한다. 롬 6장 19절에서 아노미아는 "의(          )"와 "성결(        )"의 반대어이다. 이 두 단어들(하마르티아와 아노미아)로부터 죄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이 나온다. 하나는 죄에 대해 웨슬리가 선호하는 정의인 "알려진 율법에 대한 의지적인 위반"(      )이고 다른 하나는 칼빈이 선호하는 "하나님의 완전 법에 비추어 보았을 때의 결점"(       )으로서의 죄 이해이다. 신약성서의 다양성으로 인해서 실제적으로 신약성서에서의 이 용어들은 그리 엄격하게 사용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 사용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이다.
예수는 마음의 태도를 강조했다.(마5:8) 그는 바리새인보다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마21:31) 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죄에 대한 법적 개념의 확실성이 구약성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면, 신약은 그것들을 복음의 정신에서 해석한다. 요한 복음 4장 17절에서 태만의 죄는 악한 의도가 없으면 악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요한 복음 9장 41절에서도 바리세인의 죄는 그들의 자랑과 비례하여 선언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책임성이 없는 죄는 없다. 그런 까닭에 하마르티아에서 기인한 무지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의지적인 태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히 2:3) 이러한 까닭에 결점과 거리가 먼 생각조차도 정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완전이 결점으로부터의 자유와 지식의 흠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그와 같은 기독자의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의지와 책임성과 동떨어진 죄악된 행위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특별히 바울의 저작에는 죄의 구체적인 행동들뿐만 아니라 죄의 원칙으로서의 죄악성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이러한 죄의 보편화는 바울 서신에서 특별히 '육욕의 사람(the carnal mind)', '옛 사람(old man)', '죄의 육체(body of sin)'라고 표현된다. 그리고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유전된 부패성(inherited depravity)'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바울의 언어는 죄와 육체를 동일하게 보며 성결을 본질적으로 육체의 정욕에 대한 정복이라고 보는 관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신자의 삶 속에서의 죄에 대한 물음은 로마서에서 가장 잘 분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로마서는 성화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다. 1장부터 5장까지 바울은 신앙 의인화를 이야기한다. 6장부터 12장에서 바울은 신자의 성화를 이야기한다. 그 논의는 율법 폐기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롬 6장1절). 6장과 8장에서 바울은 외적인 죄에 대한 승리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적인 죄에 대한 승리는 기독자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기보다는 그 삶에 있어서 가장 작은 부분이다. 세례 예식에 의해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지고 죄에 대하여 죽게 된다. 그는 믿음으로 영적인 부활이 실현되어 육체적인 부활에 참여하여 살게 된다.(골 3장 1절) 이것은 바울이 기독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을 의미하지도 세례가 죄악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신자들은 죄를 지속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죄를 지속해서도 안되며 할 필요도 없다.(롬6장 2,3,9,11,14,18)
'죄악된 육'의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개념의 허용은 지상에서의 완전의 가능성을 무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것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주 롬 7장 18절을 언급한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어 있지 안다는 것을 압니다." 악이 육체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면 그것은 단지 억눌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구별적이고 분리되어 진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죄로부터의 구원은 가능한 것이다. 바울의 몸에 대한 입장은 중립적이다. 왜냐하면 몸은 선하지는 않지만 필연적으로 악을 따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의해 죄를 알 수 있다고 했다.(롬 3:20; 5:20; 7:7) 이것은 율법 이전에 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악성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을 통해서 인식되어진다. 그러므로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함에 부족하기 때문에 죄책을 가진다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주장이며 인간이기에 인간의 모든 행위가 죄악 되다고 말하는 것은 죄의 성서적 개념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연약성들은 죄가 아니고 성령이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신다.(롬 8:26) 따라서, 인간성을 죄악이 넘치는 것 자체로 말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바울은 육(    )을 이따금씩 몸(    )과 동의어로 쓰지만 일반적으로 바울이 몸을 물리적인 의미보다 도덕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였다는 것에 주의한다면 이 세상에서 죄로부터의 정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은 하나님 영을 거스르는 것으로 표현되어 질 때 윤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갈 5장19-23에서 '육체의 일'은 '성령의 열매'와 반대되는 것이고 물리적인 것보다도 "증오, 시기, 분노, 내분, 분열, 이단, 시기"등과 같은 순전히 도덕적인 몇 가지 범주를 포함한다. '다툼과 시기'는 단념해야할 육체의 일들이다.(롬 13:13, 14) 고전 3장 3절에서 바울은 그의 편지의 수신인들을 그들의 '시기와 다툼' 때문에 '육적(carnal)'이라고 부른다. 고후 1장 12절에서 세상의 지혜(                )는 '하나님의 성결과 신실하심'에 대한 반대어이다. 바울의 어휘 사용의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죄를 몸과 불가분하게 결합시켰다는 관점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의미한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육(    )을 마음(    )과 대조하고 8장에서는 성령과 대조한다. 그러므로 육(    )은 마음과 성령의 적이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임을 바울의 강조와 더불어 몸은 본능적으로 죄악된 것이 아니라는 부가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이점은 6장에 있는 바울의 갈망에 근거해 있다. 이 갈망은 몸의 각 지체가 죄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의의 도구로서 하나님께 복종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점은 롬 12장 1절과 2절에 있는 전인이 살아있는 희생제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권고에서 알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몸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세력, 즉 '육의 법'과 '성령의 법'에 주체가 되는 것으로 중립적인 특성을 가진다.(갈 5:16-25) 다른 한편으로 육(    )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이며 악의 자리로서 성령을 거스르는 일종의 힘이고 동시에 거듭나지 못한 자의 본성을 의미한다. '육의 마음'은 기독자의 삶과 양립되는 것이다.(롬 8: 7, 8) 또한 바울은 죄를 자연적인 몸과 결부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바울의 죄에 대한 개념은 이 세상에서의 죄로부터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바울의 영육의 이원론은 헬레니즘적이기보다는 히브리적이다. 육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육을 준 인격적(quasi-personal)힘인 악에의 경향성으로 본 유대적인 개념과 유사하다. 이 육은 인간이 끊임없이 싸워야할 '필요악'이다. 단지 다른 것이라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이 육이 극복되어질 수 있다고 본 점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에게 있어서 '육'은 죄가 아니라 죄의 통로이다. 이 죄의 문제의 해결은 '자기 초월'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로의 도약으로 가능해진다.(엡 2장 8절)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강조함으로서 바울은 속죄를 통한 정화와 회개를 주장한다. 은총에 의해 기독자가 자만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다. 승리는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부터 온다.
죄의 본질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질 수 있다. 첫째, 죄는 낯설고 분리되어질 수 있는 요소로 육에 거한다. 둘째, 이 내적 죄는 의인화되어진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이 내적 죄는 성령이 거주함으로서 인간 본성으로부터 분리되어질 수 있고 분리되어져야 한다.
롬 6장 6절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하여서"라는 어구에서 과연 죄는 파괴되어지고 극복되어지는가? 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어진다. 여기에서 카타르게오(        )라는 동사와 '죄의 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쓰인 카타르게테(        )의 시제는 3인칭 단수 수동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죄의 몸을 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여기서 '죄의 몸'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닌 비유적 의미이다. 즉 개별적인 행동으로서가 아닌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죄들이 용서되어질 뿐만 아니라 죄악성이 파괴되어진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죄책으로부터의 법정적인 구원과 죄의 힘으로부터의 주관적 구원의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이 준 인격적(quasi-personal)힘인 악에의 경향성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혀지고 파괴되어져서 기독자는 그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게 될 수 있다. 바울은 개혁과 궁극적인 변화가 없는 용서를 소망하지는 않았다. 성화는 율법폐기주의에 대한 그의 보호장치였다. 죄의 지배력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자의 삶 속에서 소멸되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죄의 몸'과 관련되어 성화의 과정은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동사의 시제에 의해서, 전체 단락의 의미에서, 승리는 단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죄에 대한 인류적이고 일원론적인 사회적 연대성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유사하게 요한 1서에서는 죄에 대한 원칙과 실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생물학적인 용어로 죄는 요한 1서 3장 9절과 요한복음 8장 39-44절에서 암시되어진다. 여기에서 죄는 선천적인 악의 원칙으로 묘사되어진다. 죄는 무해한 단점이나 단순한 연약성은 아니다. 죄는 불순종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죄를 멸하려 오셨기 때문에(요 1서 3:5, 마 1:21)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는 그의 본성과 대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서 2:29, 2:6) 이것은 요한 1서가 '죄없는 완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 1서에서 빛 속에서 거한다는 것의 의미는 죄의 부정이라기 보다는 죄의 인식과 죄로부터의 정화이다.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죄에 대한 가능성이 정화되어진 사람들조차도 '우리는 죄가 없습니다.'(요 1서 1:8,10)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요한 1서는 '정결(cleansing)'과 '정화(purification)'가 '완전 사랑(perfect love)'를 앞선다고 가르친다.(4:12, 18)
성서의 죄 이해는 결코 자의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죄의 성서적 개념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이다.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생각, 행동, 혹은 기질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죄이다. 하나님과의 이런 왜곡된 관계는 자의적 범죄의 결과이기도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은총 속에서의 지속적 성장의 실패의 결과이기도 하다. 바울과 요한과 같은 신약성서의 저자는 죄의 행위와 구별되는 죄악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 죄악성은 신자 안에 남는다. 그리고 죄악성의 개념이 온전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며 필요하게 한다. 의인화가 죄의 결과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성화는 죄의 근원 즉 인간 본성의 오염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본성의 죄악성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광대하기에 이 세상에서 온전히 성화를 통해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온전히 회복되어 질 수 있다.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특별히 바울에게 있어서 관심은 인간의 본성을 관통하고 있는 죄의 뿌리 깊음과 동시에 은총이 제공하는 죄의 치료약에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성서에서 말하는 죄에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있다. 첫 번째 개념은 하나님의 알려진 의지에 대한 자의적인 위반으로서의 죄의 개념으로 종종 죄의 윤리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는 객관적이고 법정적인 특성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의 결여 혹은 손상을 강조하는 죄의 주관적이고 치유적인 특성의 개념이다. 이 두 개념 다 성서적인 개념으로써, 진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의 관점은 긴장관계 속에 있기에 한쪽 면만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면 오류에 빠지기 쉽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이다. 서방 교부 전통과 종교 개혁가들은 속죄에 있어서 법정적인 면만을 강조하였고, 동방 교부 전통과 일부 중세 카톨릭의 신학자들은 속죄에 있어서 치유적인 면만을 강조한 반면에 웨슬리는 성서가 말하는 죄의 개념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을 적절히 통합시키고자 노력을 하였으며 이점은 그의 성서 이해의 탁월성을 반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B. 동방 교부의 죄 이해
초기의 동방 교부들은 대체적으로 아담과 이브를 어린아이로 묘사했다. 특히 이레니우스가 이러한 주장의 대표주자였다. 그는 아담과 하와를 생각이 순진하고 어린이와 같았고 완전하지 않았으며 단지 완전으로 의도되었다고 보았다. 아담에게는 자유 선택의 능력이 있었지만 은혜에 대한 응답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복종이라는 긴 과정을 거쳐야만 창조주께 한층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이 의도는 처음부터 좌절되었다. 인간은 분별력의 부족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타락하게 된다. 그 결과 이레니우스는 인간이 신적인 '형상(image)과 모습(likeness)'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마귀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첫 사람의 불순종이 일반적인 죄된 상태와 인류의 죽음을 초래하였고, 그 결과 인류는 악마의 노예상태가 되었다고 보았다. 아다나시우스는 타락이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에 의해 촉진되었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이런 자기 중심성으로의 타락은 무로의 타락이다. 인간은 무로부터 창조되어진 존재이기에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은 비존재로 돌아가게 된다.
오리겐은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 클레멘트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던 창세기에 기록된 이야기를 우주적인 신화로 변형시키고 인간적인 죄의 상태의 근원을 초월적인 면으로 고양시킨다. 그리고 그는 우주 이전의 타락설을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세대 이전에 마귀든지 영혼이든지 천사든지 간에 모두 순수한 지성들(    )이었다. 그들 중에 하나인 악마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 항거하기로 선택하였는데. ... 각자는 자기 죄에 해당되는 운명을 받았다. 영혼들은 그대로 남았다. 이 영혼들은 마귀가 될 만큼 그다지 통탄할 정도로 죄지은 것도 아니고 천사가 될 만큼 용서받을 정도의 사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상을 만드시고 그 영혼을 육체에다 벌로 속박해 놓으셨다. ... 그는 명백하게 각 영혼을 그 죄에 알맞게 징벌하셨으니 어떤 것은 마귀가 되었고 어떤 것은 영혼이 되었고 어떤 것은 천사장이 되었다.
  
오리겐에게 우주 이전의 타락설은 인간의 상태가 보편적으로 죄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인생의 다양한 재난과 비극을 설명해 주고 영혼들이 이전의 죄에 대하여 죄책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이론이었다. 그런데 우주 이전의 타락설은 악이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 자신들의 선택의 결과이지 어느 첫 사람의 불순종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다만 오리겐에게 아담의 타락 이야기는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어질 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에 주목하여 그 때를 육체의 덧입음에 대한 시점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오리겐에게 있어서 아담의 죄책에 대한 연대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체를 악의 원리라고 정죄하는 자들을 반대하고 악은 오직 의지 속에만 있다고 가르친다. 
카파도키아 학파의 교부들 중에 닛사의 그레고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를 "세상에 가장 경이로운 일" 혹은 "우리에게 알려진 어떤 것보다 큰 것"이라고 하며 기독교 인간학의 중요성을 주장한 동방 교부였다. 그는 낙원 상태의 인간을 천사적 본성과 같게 되는 이상적인 상태로 변형될 수 있거나 짐승 같은 본성의 상태와 같은 타락한 상태로 손상되어질 수 있었던 잠정적인 상태로 보았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낙원에서의 인간 본성의 복합성 혹은 잠재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러한 단어들(남자와 여자)에 의해서 성서는 우리에게 위대하고 숭고한 교리를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 두 본성(신적인 즉 합리적이고 영적인 본성과 짐승의 비합리적인 본성)은 양극으로서 서로 분리되어진다." 그런데 짐승의 본성 자체를 닛사의 그레고리는 악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본성들은 악도 될 수 있고 선도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이성과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었다. 여기에서 인간 타락의 원인을 짚어 볼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되어진 첫 인간의 타락의 원인은 바로 악마의 시기로 인해 초래되어진 첫 인간(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의 오용에 기인한 것이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악의 기원을 사탄에 의한 것으로 보았고 첫 인간의 타락이 악으로의 중단 없는 경향성의 원인으로 보았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어둠이란 단지 빛의 부재의 소극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탄이 고의로 선을 추방하고 의도적으로 악을 끊임없이 선택했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악의 선택에 대한 능동적이며 반역적인 어떤 것이 발견되어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실(privation)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결국 닛사의 그레고리는 악의 기원을 하나님이 아닌 첫 인간의 의지의 오용 속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타락의 가능성을 남겨 놓으셨는가의 물음이 대두되는데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 자유의지가 하나님 형상의 한 측면으로서 인간에게서 자유의지의 박탈은 바로 하나님 형상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창조목적, 즉 그의 선하심에 인간을 참여시키고자하는 그의 목적을 말소하는 것이다. 결국 닛사의 그레고리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이다.
결국 인간 타락의 결과는 신적인 '형상(image)과 모습(likeness)'의 왜곡과 상실이었다. 첫 번째 결과로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 낙원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죽음이 인간에게 다가왔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이런 육체적인 죽음을 신적 은총의 과잉의 표징이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의 은총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떤 감각적 만족을 통한 자유의지에 의한 악과의 연대성과 모순되는 타락한 인간의 독특한 치유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육체에 죽음이 왔을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불멸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병들게 되었고 그 결과 치유 받아야만 될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인간 타락의 두 번째 결과는 합리성에 대한 비합리성의 지배를 초래였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신적인 본성과 짐승의 본성의 중간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합리적인 본성이 비합리적인 본성을 규제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역전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치 죄의 경향성이 무거워지고 더욱더 죄를 향하게 된 것처럼 (비합리적 짐승적 본성의) 또 다른 영향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는 요소가 지성에 의해서 고양되어지는 그 무거운 요소보다 더욱 비합리적인 본성의 무게에 의해서 하강하게 되어지는 요소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타락으로 인한 인간 본성의 세 번째 결과는 자유의지의 경향성이 악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여전히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죄가 때때로 신약성서에서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동방교부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력히 주장하며, 동시에 인간이 선과 악의 중간에 균형잡고 있어서 양쪽 어느 것이나 선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사변적인 경향이 강했기에 관심이 주로 삼위일체의 교리와 기독론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레니우스는 원죄에 대한 그의 관념을 표명한바 있으며, 닛사의 그레고리도 그와 비슷한 진술을 행한 바 있다. 그러나 일관된 원죄의 교리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와 동시에 아다나시우스는 많은 성인이 모든 죄에게 깨끗하고, 시릴은 심지어 인간은 죄 없이 출생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리고 닛사의 그레고리,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과 같은 사람들에 있어서도 분명히 원죄에 대한 부정을 암시하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방교부들이 모든 죄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웨슬리의 원죄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전적 타락이라는 부분은 동방교부 전통의 죄 이해와 전혀 다른 견해이다. 동방 기독교의 전통은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의 본래적인 의가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우선성이 인간에게 있게되는 위험성이 있다. 반면에 웨슬리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주장하여 원죄의 전가된 죄책과 유전된 부패성을 주장하였으며 동시에 선재적인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의 측면이 모든 사람이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 가능성을 형성시켰다고 보았다. 이점에 있어서 동방 교회의 오해 가능한 신인 협력적인 질서에 비해서 웨슬리의 신인 협력적인 구원의 특성은 오해의 소지를 줄인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분명히 인간의 응답 가능성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결국 그의 신학과 신앙과 삶의 정점은 크고도 넓으신 하나님의 은총의 광대함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에 있어서 동방교부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진다. 악과 죄의 원인을 의지의 오용으로 본 점과 타락의 결과 인간에게 영적이고 육적인 죽음이 왔으며 인간의 본래적 본성이 병들어 치유를 요하는 상태에 처해있다고 본 점은 동일하다. 
C. 서방 교부와 로마 카톨릭의 죄 이해
원죄의 개념을 최초로 만든 교부가 바로 터툴리안이었다. 그는 원죄의 영혼 유전설을 강조하여 개개의 영혼이 인간적 본질로 되어 있으며 대대로 내려오는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출생을 통하여 육체와 함께 존재하게 된다고 믿었다. 영혼의 죄된 상태의 결과는 아담과의 관계에서 생긴 결과이다. 인류는 아담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인간의 자연적 요소, 제 2의 본성, 영혼의 악, 발생의 악인 죄로 물들어 있다.
서방 교부 중에 서방 교회의 신학적인 틀을 잡았던 어거스틴은 서방 교부의 대표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죄 이해는 바로 서방 교부의 죄 이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초기 마니교와의 논쟁기에 마니교의 숙명론적 인간이해와 이원론적 창조와 역사이해에 강하게 도전하였다. 마니교의 결정론이나 숙명론은 악의 근인(近因)은 인간의 의지요, 원인(原因)은 하나님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진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결코 악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고 다만 선만을 창조하셨다고 강조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인간은 본래 선하게 지음 받아 이미 완성되어진 채로 선한 창조인 천국에 자리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악은 선의 상실과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오며, 그 원인은 인간의 자유의지다. 즉 악의 원인은 하나님이 아니고 선의 결핍과 타락이며 죄를 범하는 것은 자유의지에 기인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악한 본성을 비존재며 비본성으로 보았고 모든 본성과 존재는 선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본성과 존재들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악한 본성의 원인이 아님을 주장한다. 결국 어거스틴에 의하면 악은 본성이 아닌 오히려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인간의 죄악행위는 욕망 특히 성적인 욕망(concupiscentia)에서 나오는 데, 그 욕망에 영혼이 끌려감으로 죄악행위가 나타난다. 영혼이 욕망에 끌려 다니는 것은 영혼 속에 있는 자유의지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죄는 선의 박탈, 교만, 자기 사랑, 그리고 정욕이다. 어거스틴은 "죄짓는 것은 악의 훈련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죄는 의지가 자유롭지 않을 때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불의를 원할 때 범하는 것으로 정의가 금하는 것을 유지하려는 의지 혹은 얻으려는 의지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칭찬 받을 만한 행복한 삶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고 수치스럽고 불행한 삶을 사는 것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인간은 "죄짓지 않을 수 있었지만(posse non peccare)" 타락 이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non posse non peccare)"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한 인간이 다시 선을 행하려면 오로지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어거스틴은 강조한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본성적 자유의지의 요소도 있으면서도, 은총에 의해 세워지고 회복되며 움직여지는 자유의지의 요소도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자유의지 자체가 그것이 빠져있는 죄악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그 악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인간은 결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없다"고 해석하며 은총의 중요성을 자유의지에서도 강조한다. 은총이 먼저 선재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자유의지는 제대로 선을 실천할 수 없다. 여기서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어거스틴의 선재적 은총 개념을 자신의 사상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그의 설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에서 어거스틴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다. "우리 없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Qui fecit nos sine nobis, non salvabit nos sine nobis.) 그러므로 웨슬리의 선재적 은총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세례를 통해 원죄가 제거된다고 보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총은 율법이 행할 수 없었던 일, 즉 정욕을 이기는 일을 행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웨슬리처럼 죽기 전의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고, 완전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이것은 루터와 웨슬리가 유전죄를 본질적으로 불신앙으로 본데 반해서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정욕(concupiscentia)으로 보았고 이 정욕이 죽는 날까지 계속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웨슬리와 어거스틴의 육체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정욕을 육체적인 면으로 보았기에 그에게는 죄악된 육체라는 개념이 적용이 된다. 그러나 웨슬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죄의 자리는 영혼이지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죄악된 육체'의 개념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육체의 부패성에 동의를 하고 있고 이러한 육체의 부패성으로 인한 유혹의 가능성에도 동의를 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완전은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고 죽음 이후 천국에서나 죄 짓지 않는 완전 자유가 가능한 것이다. 마5:48에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기에 완전의 가능성은 믿었으나 현실성은 믿지 않았다.
12세기부터 13세기의 중세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죄의 개념에 관해서 어거스틴주의적인 유산을 이어받았다. 원죄는 본래적 의의 결핍이며 부가적인 은사의 상실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 원죄가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자연적 타락을 적극적인 의미로 보기도 했다. 그것은 정욕이요 죄된 성질과 형벌을 내포한 것이며, 그 정욕은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고 출생에 의해서 대대로 전하여진다고 생각하였다.
원죄는 실제의 죄를 통해서 실체화된다. 그 주된 근원은 교만, 탐욕, 색정, 분노, 탐식, 질투, 나태 등 일곱 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 죄(peccata capotalia)이다. 그것은 다시 중대한 죄(peccata mortalia)와 가벼운 죄(peccata venialia)로 나뉜다.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죄이다. 가벼운 죄는 단지 의사(意思)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충분한 반성이나 혹은 적극적인 의지의 작용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벼운 죄는 현세의 형벌에 의해서 속량될 수 있다. 범죄의 단순한 자연적 가능성은 만물의 제일 원인이 되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지만, 행위의 타락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한다. 이점은 신자의 죄에 관해서 웨슬리가 죄를 구분할 때 무의지적 죄(involuntary sin)와 의지적 죄(voluntary sin)로 구분한 것과 유사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범죄의 단순한 자연적 가능성을 하나님에게 둔 반면에 웨슬리는 범죄의 단순한 자연적 가능성의 원인 또한 인간에게 속한 것으로 본다. 인간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과 육체의 부패성이 유입되었으며 또한 세상에 불완전성이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죄의 개념에 있어서는 어거스틴과 일치하며, 죄를 통하여 인간이 무지, 육욕 및 죽음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연적 능력들은 죄에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단지 상처를 입고 일그러졌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견해도 비어거스틴적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14-15세기의 중세 교회는 점차 인간의 자연적 의지의 고결성, 즉 의지의 자유가 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대죄를 통하여 영혼을 부패시키거나 파멸시킬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이 원죄에 대한 어거스틴적 교리와 더불어 종교 개혁가 더 나아가서는 웨슬리와도 화해할 수 없는 골을 만들게 하였다.
웨슬리는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죄의 원인을 인간 의지의 자유로 보았다. 그러나 악의 기원과 정의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인다. 어거스틴이 악을 선의 부재로 본 반면에 웨슬리는 악을 선의 타락으로 보았다. 따라서 악의 기원에 있어서 웨슬리는 보다 천상적인 기원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선재적인 은총으로 회복되어진 의지의 자유에 있어서도 어거스틴은 여전히 악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장하지만 웨슬리는 보편적인 은총의 단비 속에 있는 인간에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고 보았다. 또한 어거스틴은 본질적으로 유전되어진 죄를 정욕으로 본 것에 비해서 웨슬리는 불신앙으로 보았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육체를 죄와 동일하게 보았으며 성결을 본질적으로 육체의 정욕에 대한 정복이라고 보았던 반면에 웨슬리는 육체를 죄와 동일하게 보지 않았고 죄의 자리를 단지 영혼에만 두었기에 어거스틴에게 불가능한 이 땅에서의 기독자의 완전이 웨슬리에게는 가능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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