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레신학
웨슬레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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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교회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리스도인들을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어지러워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데 그 책임을 돌린다하더라도 결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의 교회를 살펴보면 양적인 성장에 치우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모습을 또한 쉽게 볼 수 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어지고 성경의 권위가 점차 땅에 떨어져가며 각종 이단사상의 침투와 세속적 풍조의 유입으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켜 새롭게 만드는 영적 각성으로서 18세기 영국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았던 웨슬레의 영적 혁명이 지금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웨슬레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며, 그의핵심은 성화이고 또한 그 성화의 본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완전이다. 그러므로 이런 웨슬레 성화론에 대한 연구는 우리시대에 가장 시급하고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이런 시점에서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인식의 부족으로 무분별한 행동주의, 광신주의, 맹목적인 성령주의가 뿌리박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복음의 중심이 되는 성화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절실한 신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중 본인은 조종남, 한영태 교수님의 성결론 세미나를 듣게 되었고 또한 요한 웨슬레의 성결론과 관계된 여러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성화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발전되어 졸업 논문으로 요한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글을 쓸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해서 살펴보되 성서의 중심사상이며 초대교회 이래로 면면히 이러내려온 성화의 은총을 단계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되 성화의 단계를 중심으로 하여 본 논문을 구성함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자신이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가를 발견하여 자신의 신앙수준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더 나아가 이 성화의 은총이 누구나 다 체험할 수 있는 성경적이고도 경건한 복음임을 드러내어 오늘날 침체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상태를 보다 높고 새로운 차원에까지 도달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헌신적이고도 풍요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또한 이 성화론이 현대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오늘날의 혼탁하고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임을 드런내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웨슬레의 저술들과 성화와 관련된 여러 저술들을 중심으로 해서 성화의 단계를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그것에 대한 의의를 밝히는 연구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데 I 장 부분은 서론부분으로 이 글의 쓰게된 동기로싸의 문제제기 및 목적과 전개방법이 다루어지고 있다.
II 장에서는 웨슬레 신학의 개요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웨슬레 신학의 기본적인 점들을 몇가지 고찰한 후 웨슬레 신학이 지니고 있는 특색을 알아보고 그런 웨슬레 신학에서의 성화론의 위치를 살펴봄으로 II 장을 정리하려고 한다.
III 장에서는 웨슬레 성화론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전개하면서 성화의 단계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초기성화와 점진적 성화의 단계까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IV 장에서는 웨슬레 성화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완전성화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다루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완전이란 단어의 개념과 그 본질을 분명히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웨슬레가 이런 완전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들을 찿아보고 완전의 성취 및 그 유지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부분들도 조금이나마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IV 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웨슬레의 완전론이 지니는 독특한 특징을 살펴봄으로 IV 장을 마치려 한다.
V 장에서는 웨슬레의 성화론이 지니는 의의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크게 3 부분으로 나누어 선교신학적 측면과 현대 신학적 측면, 그리고 사회 윤리적 측면으로 구분해서 각자의 측면에서 성화론이 지니는 의의를 찿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VI 장에서는 이글의 총 요약과 평가를 기록함으로서 이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I. 웨슬레 신학의 개요
웨슬레는 18세기 영국 사회를 구원한 대 부흥사요, 감리회의 조직자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웨슬레를 단순히 부흥사나 조직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정도로만 여길 뿐 신학을 가지지 못한 인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재발견된 웨슬레를 통해서 볼때 웨슬레는 루터나 칼빈 못지않은 훌륭한 신학자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러한 웨슬레 신학의 개괄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웨슬레 신학의 기본적 고찰
1. 웨슬레의 생애
웨슬레는 1703년에 3대에 걸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88년 후 그가 죽을 시점에 이르렀을때 그는 그의 동료 영국인들의 상당수, 특히 하층 계급 출신 영국인들의 상당수가 종교적 신앙과 실천을 그들의 생활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하나의 종교운동을 형성해 놓았다.
그는 비록 이 시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이신론적인 정신과 맞서려는 계획에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성공적으로 실시된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충만케 하려는" (to spread Scriptual holiness over the land) 그의 계획은 앞서의 철학들이 조성해 놓은 종교적 무차별의 정신에 대한 18세기의 가장 효과적인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웨슬레의 생애는 크게 3번의 중요한 단계를 거쳤는데 그 단계들을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첫번째 시기 - 옥스포드대학에 있던 시기
웨슬레의 생애에서 주목할 세단계 중 그 첫번째 단계는 웨슬레가 옥스포드에 머물렀던 시기로서 이 시기는 개인적 완전 (personal perfection)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특징지어 졌다. 웨슬레의 이런 노력은 1725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1729년부터 옥스코드에서 동생 챨스와 신성클럽 (Holy Club)을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이 성결클럽에서는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교회출석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찿는데 온힘을 다하였다. 이들 모두는 완전을 추구하는 이와같은 노력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성클럽은 이러한 종교의식과 생활을 아주 엄격하고 규칙있게 영위했다. 이데 "메소디스트" 라고 이름이 웨슬레의 그룹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완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생활을 택하였는데 기도와 독서, 매주일 여러차례의 금식,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자신들이 읽은 내용을 서로 토론하는 것이 이들의 생활 계획이었다. 이런 생활계획에다 이들은 구체적인 자선행위를 추가하였다. 자선, 옥중에 있는 사람들 방문,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이에 속하였다. 후년에가서 웨슬리가 온 영국땅을 누비며 설교를 시작하였을때 그의 메시지를 듣고 기독교적 생활을 위한 그의 자세한 프로그램을 따랐던 사람들이 메소디스트 (Methodist)라 불리운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b. 두번째 시기 - 조지아의 선교활동 시기 (1735-1738)
웨슬레의 생애의 두번째 단계에서 핵심적인 경험은 조지아 (Georgia)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수년간의 기간이다. 그의 생애의 이 단계에서 그를 형성하는데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는 미국을 건너는 위험스러운 항해 기간에 모라비안 (Moravians)과 접축하게 된 것이 웨슬레가 모라비안들의 신앙의 깊이와 견고성을 일생동안 찬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웨슬레는 이들의 뜨거운 신앙과 비교해 볼때 자신의 신앙은 보다 이지적인 것임을, 모라비안들의 신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뜨거움이 전혀 배제된 지적인 확신임을 발견하였다.
또한 웨슬레에게서 작용한 두번째 요인은 점차 강렬해지는 실패감이었다. 미대륙에서의 긍의 선교활동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는 불행한 것이었다. 웨슬레는 자신감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해 놓으신 일이 무었인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다. 귀국하는 배를 타면서 써놓았던 웨슬레의 일기는 그가 느낀 불안감과 실패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9월 월요일 (1738년 1월의)과 그 당음 몇날동안 난는 헛된 욕망에 관하여 많은 반성을 하였다. 이 헛된 욕망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고독하게 보낸 수많은 세월동안 나를 따라 다녔다. 나는 이제 고독은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모델이시라면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24일 화요일...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아 ! 나는 누구가 개종시켜 (회심) 줄 것인가 ? 나를 불신앙의 이 악한 마음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누군가, 어떤 분인가 ?
c. 세번째 시기 - 올더스케이트의 체험 이후
웨슬레의 생애의 세번째 단계는 올더스케이트가 (Aldersgate Street)에서 모인 집회에서 겪은 웨슬레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겪은 그의 경험의 영향은 그의 생애의 나머지 기간동안 내내 존속할 정도로 컸다. 1738년 5월 24일 그는 거의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한 예배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던 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이상하게 뜨러운 확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날저녁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가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전 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자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서술한 부분을 읽을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죄, 나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웨슬레는 자신의 필생의 할일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그의 행정의 재능과 더불어 구원의 확신을 평생의 기독교적 삶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을 체계화시키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2. 그의 체계 (Method)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성결의 욕망을 갖게하고 성결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이용케 하려는 것이 웨슬레의 활동의 주요한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되어진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 몇가지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로 설교를 들 수있는데 그는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들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대다수의 강단이 그에게 길을 막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의 셜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을 수용하기 위한 편리함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루에 몇번씩 설교하였으며 일하러 나가는 시간 전에 노동자들을 붙잡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고 늦은 오후와 저녁 시간에 노동자들에게 다시 접근하였다. 웨슬레는 또한 감독의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설교할 권한을 주었다. 즉 평신도 설교자 (lay preacher)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런것들이 당시의 영국교회 제도와 법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나 웨슬레는 그대로 밀고 나가 영국교회를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웨슬레의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음을 느끼는 체험을 낳고 강화시켜 주려는데에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신도회 (society)의 조직이었다. 웨슬레는 설교의 효율성에 크게 의존을 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이것을 시작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전도한 곳에 신도회를 조직하여 후속조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 전도활동에 착수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신도회 내에서는 속회 (class)가 신도들의 발전을 위한 기초 집단이 되었다. 정상적인 경우 속회는 한 평신도 지도자를 가진 11명의 신도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매주마다 모임을 갖고 교제와 신앙성장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이루고자 노력했는데 이 속회보다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만들어진 것이 밴드 (band)였다. 여기 속한 사람들은 속회보다 수자가 적었으며 성결을 한층 더 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세번째로는 애찬식 (lovee feast)의 도입이었다. 신약성서의 아가페 (the New Testament Agape)를 모방한 애찬식이 도입되었는데 참석한 모든 회원은 빵 한조각과 물 한컵을 함께 나누었다. 원래 초대교회에서는 성만찬식과 애찬식이 같이 있었으나 참여자의 수자가 많아짐에 따라 애찬이 성만찬에서 분리되었으며 점차 소홀히 여겨 사라졌던 것을 웨슬레는 이 애찬을 회복시켜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런 활동들 외에도 매일의 기도와 매주 일회의 금식이 권장되었으며 모든 신도들을 심방하는 일이 웨슬레와 그의 동역자들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격없는 회원들은 회원 명단에서 계속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특이할만한 점은 찬송으로서 찬송가는 메소디스트 모임의 특징이었다.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회심의 정서적 경험과 기독교 생활의 철저한 실천을 추구하게끔 감동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찬송은 이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는길을 열어주었다. 찬송가는 강렬한 체험을 겪는 종교생활의 정상적인 표현이 되었다.
3. 웨슬레의 교리적 강조점
웨슬레는 방대한 신학서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학자로서의 명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신학에 있어서의 깊은 연구력"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ㄴ 그 당시의 일반적인 흐름이 사색적인 경향에서 과학적 탐구의 방향으로 급격히 그 방향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신학과 교리의 설명은 언제나 신도들에게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이런 확신이 기독교 생활에 평생 몸담게 하는 힘이 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제공해 주는 실천적 목표에 종속하였다. 그의 식학은 생활에 중점을 두고 발전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 내용이 기본적으로 단순하였다.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주요한 교리들은 회개와 믿음과 성결이다. 이들 가운데 첫째는 (회개를 가리킴) 말하자면 종교의 현관이고 둘째는 방문 (믿음을 가리킴)이고, 세째는 종교 그 자체 (성결을 가리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소디즘은 몇가지 특징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특징적인 주제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역사적 신경들 속에 표현되어진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교리들의 수용. 여기에는 신앙과 생활속에서 입증되고 실천적 자선으로 나타나지 않는 교리는 무가치 하다는 확신이 뒷받침 되어 있다.
②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인간속에 살아계셔서 인간의 성품을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③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의 교리, 성령이 없이는 주님의 게명의 성취도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생활은 막연한 꿈에 불과하게 된다.
④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 (life in Christ)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성결"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진지하고도 끈질긴 노력, 그리고 이와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를 격려하고 바로 잡아주고, 가르치고 교화하고 뒷받침 해줄 열성적인 신앙인들의 작은 집단들을 조직하는 일.
⑤ 복음과 그 무엇보다도 가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가능한 한 가장 설득력 있는 말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지역에 알리려는 열의.
⑥ 보잘것 없는 사람들 (the underprivileged)의 영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물질적 행복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심을 가짐.
⑦ 평신도가 다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동등한 기능을 갖고서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교회질서의 발전, 평신도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인들을 돌보고 교회의 일들을 처리한다.
이처럼 웨슬레 자신도 일련의 교리적 강조점들을 갖고 있었는데 웨슬레의 교리적 강조점들은 기독교의 의미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를 성격지어주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웨슬레 자신은 영국교회에서 서품을 받은 목회자였기 때문에 모든 메소디스트들은 영국교회의 실천적인 회원들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메소디스트들은 영국 교회의 신성한 예배에 참석하고 영국교회의 성사에 참여하고, 성공회의 예배가 거행되는 동안에 자체 모임을 금하였다. 또한 메소디즘은 [39개 신조]와 [공도문]을 받아들였다. 메소디스트들은 또한 성서의 지상권위, 구원신앙의 필요성, 구원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성에 관한 기본적인 종교 개혁적 입장들도 철저히 신봉하였다. 메소디스트의 설교와 교육의 특징은 교리의 새로움 (novelty)에 있기보다 메소디스트의 강조점에 있었다.
B. 웨슬레 신학의 특색
1. 구원의 신학
무엇보다도 웨슬레 신학의 특색은 '구원의 신학'이라고 하는 점일 것이다. 웨슬레의 신학이 '구원의 신학'이었다는 증거는 그가 일생을 전도자로서 구령사업에 헌신했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를 들 수 있으나 그의 신학의 핵심이 '성화론'즉 '기독자 완전'을 가장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관념의 중요성은 그가 세상을떠나기 전해에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거대한 위탁물이며 이것을 보급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 같다"고 하였던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웨슬레의 관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와진 영으로서 현실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에 있었다. 웨슬레의 성화 및 완전개념이 루터나 칼빈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웨슬레의 현재적 구원에 대한 열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구원을 향한 웨슬레의 열정은 실존적 (existential)이라는 평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말에 대한 웨슬레의 역점은 언제나 우리가 현재 여기서 (now and here)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웨슬레 신학의 특징은 은총의 역사를 미래에 남겨놓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맡겨놓고 체념하는 듯한 종교개혁자들에 반하여 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재 여기 (now and here)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였다는데에 있다. 이러한 현재적 관심으로 웨슬레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영 속에서 새로와진 하나님의 형상 자체'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웨슬레가 현재적 구원에 궁극적 관심을 보이고 있음에서 실존적인 성형을 보여준다는 사실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또한 실제적인 (pratical) 신학이라는 점이다.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서의 믿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웨슬레는 믿음이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명없는 차디 찬 동의나 이론과 같은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인 것이며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동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적인 믿음의 개념을 말하였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며 교회의 갱신을 가져보고자하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또한 웨슬레와 그의 동역자들의 관심은 '의'였고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의 곧 '성결'이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구원은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웨슬레는 계속하여 그의 동역자들에게 권하였다. "여러분이 할일은 한가지 입니다.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2. 체험의 신학
웨슬레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 (A Theology of Experience)이다. 다시 말하면 웨슬레 신학이 성서에서 교리를 연역하여 신학하는데 크게 역활한 것은 그의 신앙 체험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체험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체험이다. 그렇다고 이 체험이 성서의 권위를 우위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웨슬레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성령의 조명아래 체험을 통하여 설교의 현장에서 그 교리에 대한 실제적 설명을 함으로 신약성서의 신앙을 참되게 표현하려고 힘썼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러한 체험에 대한 강조는 역시 현재적 구원에 관한 그의 관심으로부터 연유되며 그의 구원관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기독자완전의 성화개념에 밀착되어 있다.
루터가 '십자가'와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에 그리고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바라보므로 '이중 예정'에 촛점을 두었던 바와 같이 웨슬레는 현세에서의 구원에 관심하므로써 '성화' 곧 '기독자 완전'에 그의 강조점을 두었다. 루터의 급격한 회심이 '믿음으로 의로와 진다'는 의미의 새로운 국면을 쩐적으로 그에게 심어 주었듯이 웨슬레 역시 그가 회심한 1738년 5월 24일의 회심 경험을 통하여 그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그의 신학을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때에 이 올더스케잇의 회심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성서를 읽었다. ..... 그러나 믿지 못하였다. ...... 그러던 중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하여 이성을 초월하여 성서에 순종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 는 웨슬레 자신의 고백이 이 점을 증거하고 있다.
웨슬레 신학은 그때부터 새로운 입장에서 전개되어 나갔음을 본다. 즉 말로만 듣던 은총의 신학이 그의 신앙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긍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웨슬레는 늘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의 체험과 연관시켜 또한 논리를 생활과, 그리고 교회를 사회와 연관시키면서 실제적인 산 신학 (living theology)을 수립하였다. 그뿐 아니라 웨슬레의 신학이 '체험의 신학'으로 불리어질 수 있는 타당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생활속에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깊이 가질 것이다. 즉 웨슬레의 신학, 곧 체험의 신학은 그의 생활 자체였으며, 그의 전생애는 전도자의 생활로서 현실에서의 구원에 관심했던 그의 신학적 노력과 완전한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창의적 종합 신학
웨슬레 신학의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학자가 말하듯이 그가 성서에 있는 교리를 끌어내서 신학화함에 있어서 희랍의 신학, 라틴신학, 중세기의 신학, 모라비안의 신학,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등, 모든 신학의 방법론과 강조점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빼서 창의적으로 체계있게 종합했다는데 있다. 이런면에서 웨슬레 신학은 전 기독교의 신학에 친근감을 준다. 웨슬레의 신학은 종합이라는 구조안에 용해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Christ for us)와 경건주의자들이 말하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 (Christ in us)를 종합하고 있으며 성결의 개념을 로마 카톨릭의 강조에서 가져왔고 그리고 그는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으로'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를 채택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때 성화의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선행으로서 거룩한 삶을 강조했고 성자로서 공을 쌓기 위하여 수도원 생활, 고행등을 할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마치 구원은 선행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웨슬레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거룩의 개념과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믿음만으로라는 주장을 통합시켰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생활까지 미치는 깊이와 동시에 거룩한 삶을 강조함으로 "믿음만이요"와 "거룩한 삶"의 두가지를 양극화 시키지 않고 둘을 은총의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시킨 것이다. 이또한 웨슬레의 최고의 강조로 보여지는 성결론의 구조속에서도 성결이 주어지는 동시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두 요소가 함께 발견 되어진다. 또 점진적인 발전과 순간적인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종말론에 있어서도 우리의 현재적 삶에 관계하는 동적인 면과 함께 이 현세의 모습은 지나가 버린다는 점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웨슬레는 성서의 어떤 곳에서는 그 술어가 특히 지상에서의 상태를 지적하며 다른 곳에서는 영광의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여 종합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웨슬레의 신학은 둘중의 하나 (either - or)가 아닌 양쪽 다 (both - and)를 취하면서 양쪽의 강점을 충분히 섭렵하고 있는 창의적인 종합 (creative synthesis)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웨슬레의 신학은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존적인 성화의 신학이다. 또한 웨슬레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이며 창의적 종합의 신학이며 더 나아가 성서 자체를 완전히 조명하고자 하는 성서적 신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언급은 아무리 강조 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단편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웨슬레의 신학은 균형에 촛점을 두고 유기적으로 말해질 때에만 올바른 평가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 웨슬레 신학의 특색속에 담겨있는 중요한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성화의 사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만큼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론은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웨슬레 신학은 18세기 영국의 타락상 속에서 솟아 난 구원의 진리였으며 현실에서의 변화와 성장을 추구한 성화에 그 촛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의 성화론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며 웨슬레 신학에서 하나의 맥을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II. 요한 웨슬레의 성화론
전장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론은 매우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 특히 웨슬레 신학의 재발견으로 오늘날 새로운 관심과 촛점을 모으고 있는 웨슬레 신학의 중심점은 성결 즉 성화론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사상은 가장 오해되고 비판된 교리였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교리의 동기와 그의 신학사상을 연구해보면 이 성화론의 교리야말로 가장 성서적이며 전통적이며 경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III장에서는 요한 웨슬레의 가장 뛰어난 신학으로서의 성화론에 대해 살펴보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이전 단계까지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죄성
웨슬레의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펴보면 인간의 죄성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는 성서적 근거로부터 기원되었다. 원죄는 먼저 아담의 자범죄인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를 말하며 이것이 최초의 죄이다. 이러한 원죄로 인해서 개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죄성을 지니게 되었고 집단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타락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인류전체가 지은 것이고 그의 부패는 인류의 부패인 것이다 (롬 5:12). 이러한 아담의 타락은 인간 본래의 완전성을 유실하였으며 인간본성의 완전타락을 가져왔다. 그 결과 아담의 후예는 생태로부터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아담에게 있었던 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의 상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원시적인 완전성 (primitive peerfection)이 변화되었고,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하였다. 예외없이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다 타고난 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에서 근원된다. 곧 웨슬레는 아담의 죄가 인류 타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744년의 의사록에서 웨슬레는, '어떻게 아담의 죄가 전체 인류에게 유전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담안에서 인간은 죽었다. 즉 첫째로 우리의 육신이 그때에 죽을 수 밖에 없었고, 둘째로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떨어져 나갔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적이며 악마적인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넷째, 따라서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식이며 영원한 죽음을 받을 수 밖에 없이 되었다.
이러한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웨슬레가 St. Paul과 St. Augustine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웨슬레 신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웨슬레의 이러한 심각한 죄관은 종교개혁자들과 후에 나타나는 정통주의자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은총밖에 있는 인간 (자연인)의 상태는 완전 타락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웨슬레의 깊은 통찰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담의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는 이 세상에 고통이 생겼다고 하는 사실이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은 인류에게 영원한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원죄로부터 자범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비교해 보면 원죄는 죄의 모체이고 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줄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자범죄이다. 자범죄는 또한 의지적인 자범죄와 무의지적 자범죄롤 나눌 수가 있다. 의지적인 죄는 외부나 내적 유혹에 대해서 의지가 결정을 내진 죄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망과 고통이 따르는 죄이다. 이 의지적인 죄는 마음에 있는 내적인 죄와 행동으로 보여진 외적인 죄가 있다. 무의지적인 죄는 비고의적인 실수나, 판단착오, 기억력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타락은 아담이 그의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인간은 이로인하여 자유를 상실했다. 그의 자유의지는 이제 전적으로 속박되어 버렸고 다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에서만 자유롭다. 타락이후로 선한 어떤 것을 어느것 한가지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고 죄책을 가질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사망으로 정죄되었다. 즉 그는 그의 운명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킬 만한 곳으로 한 걸음도 내 디딜수 없는 속박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2. 선행적 은총과 복음적 신인 협동설
넓은 의미에 있어서 성화는 인간이 소유한 선재 은혜의 작용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을 찿으려는 욕망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등을 표시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빛의 첫 서광이요,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확신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은혜의 역사는 곧 삶에의 경향, 어느정도의 구원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선행적 은총은 웨슬레의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한편으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있는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며, 하나님을 용납 또는 배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웨슬레는 이 두가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는 불가능성과 하나님께 응답하는 자유를 그의 원죄와 선행적 은총에 대한 두 교리로써 조화를 이룬다. 그에 의하면 이 선행은총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에도 아담과 하와로부터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역사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의 타락을 인하여 하나남과 인간사이에 완전한 간격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값없이 모든 인간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예비적으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있는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데 이 선행은총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응답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바로 선행은총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인간 편에서 응답하는 기초가 된다.
이와같은 주장에 있어서 칼빈의 견해와의 차이를 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은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제한적인 은총임에 반해서 웨슬레에게는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선물이다. 이와같이 칼빈의 제한적 은총관에 대조하여 웨슬레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경우에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보편적인 은총의 교리를 제창하게 된것이다. 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 모든 사람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만인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은총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에 인간에게 은총이 없는 칙임은 그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에게는 있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실때 이를 받아 드릴 수도 있고, 거절 할 수 있다는 데에, 웨슬레의 은총관에 있어 특징적인 점이 있기도 한것이다. 러한 선행적 은총은 회개와 신앙과 의인과 성화에로 인간을 이끌고 있는 바탕이 된다. 또한 이 선행적 은총의 근원과 수단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에 의하면 타락이후에 자연적인 그대로서의 상태 (state of mere nature)로 머물러 있는 인간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atonement)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그 대속의 첫번째 결과로써 하나님께서는 선행적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이다. 이 결과로 타락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이나마 어느 수준까지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양심이라 불리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심에 있어서 인간의 양심에 나타난 선행은총이 이난을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전환시키는데는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의 길로 발을 디디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생활속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선행은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찿을 수 있으며 이 선해은총의 역사가 있기때문에 죄를 회개할 가능성과 능력이 있따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연적으로 대두된 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는 능력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말하였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살펴보면 사람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가 말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은 반 펠라기우스 주의나 중세기의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연인이 하나님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근거로 하는 협동이나, 인간이 절반, 하나님이 절반 나누어 맡는 식의 협동이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은총의 역활과 인간의 역사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는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의 관점이 아닌 둘다 (both - and)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이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하나님의 은총에 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선재은총과 인간의 수동적 협력으로 성화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B. 성화의 과정
웨슬레에게는 기독교는 구원이요, 구원은 곧 성결을 뜻하였다. 따라서 성결은 여러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결의 단계가 서로 다른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는 더욱 거룩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레의 성화의 각 단계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관계적 성화 (Positional Sanctification)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믿음으로 전에 원수 되었던 사이가 부자 관계로 회복된다. 이때에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 관계적 성결이란 이와같은 관계의 변화를 본 것이다. 이는 주관적 변화라기 보다는 객관적 변화이며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관계의 변화이다. 신학적으로 의인 (칭의) (justification)이 바로 이 단게에 속한다. 의인이란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의 용서를 뜻한다. 의인은 곧 죄첵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용서 받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그에게 뒤집어 씌워졌다는 뜻에서 전가된 의 (imputed Righteousness)라고 한다. 웨슬레는 그가 후년에 하였던 설교에서 의인을 정의하길,
"의인이란 용서를 의미하는 또 하나의 명사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가납이 포합되어 있다. 우리를 위하여 지불된 값은 그리스도의 의와 보배로운 피이다. 좀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영혼을 주기까지 그가 받은 바의 모든 고난과 행하신 모든 공로이다. 의인의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평화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중의 즐거움이다."
라고 하였다.
죄인은 선행은총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웨슬레는 그것을 설명하길 죄책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죄의 용서와 같은 말이며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수납되는데 필요하다 고 보았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지금 그를 믿는 죄인에게 이뤄지는 죄책과 형벌에서의 해방이요 그의 마음속에 형성된 그리스도로 인해 죄 전체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함을 인해 자기 영혼을 다 쏟도록 행하시고 고통 당하신 모든 것이며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화해하시고 죽음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회복시켜 주신 은혜이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거듭나서 흑암에서 광명한 빛으로, 잔악한 마귀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악마적 생각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마음으로 내적 변화가 일어나 그 결과 외적인 죄의 지배에서 구원되고 내적인 힘도 깨어져 신자가 더 이상 죄를 따를 필요가 없다.
또한 웨슬레는 의인되는 순간 성결이 시작되며 거듭나 위로부터 성령으로 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적 새로와짐과 보내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하여 칭의의 다른 측면으로 동시적 사건인 중생을 말하고 있다. 린드스트롬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단계는 의인부터이며 의인과 중생은 순간적으로 온다고 한다. 의인은 상대적 변화이고 신생은 참된 변화이다. 캐논은 이 의인교리가 웨슬레 신학의 기본교리인 것으로 이해하며 의인의 교리를 중시하여 의인 다음에 부수적으로 오는 것으로서의 중생을 언급한다. 그 외에도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죄인이 실제 의로와지기 시작하는 중생과 구분한다.
웨슬레는 의인이 실제 죄없는 사람이 된것이 아니고 그것은 성결 (성화)에서 이뤄지며, 의인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하여 행하신 것이요, 성결은 하나님이 그 영을 우리 속에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칭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라지게 한다. 웨슬레는 의인의 조건은 믿음이며 그것으로 죄인이 하나님과관계개선은 되지만 실제 죄인이 성화된 것은 아님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관계적 성화는 의식적 성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의식적 성결은 구약적 의미의 성결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인물이나 물체, 혹은 장소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접촉할 수 없는 분리의 뜻을 지닌 성결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의 성화는 참된 내적인 변화라고 하기보다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면에서의 성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진정한 변화와 하나님을 닮아감에 있어서는 이 단계에서 더욱 나아가야 한다. 믿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어진 그리스도인은 이제 내적이고도 실제적인 변화를 받아야 만 하는 것이다.
2. 초기 성화 (Initial Sanctification)
사람이 거듭날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웨슬레의 견해인데 이를 흔히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그런데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는 사건으로 웨슬레는 중생과 양자 (adoption)됨을 말한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나 그 한사건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는 것이다. 의인은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객과적이고도 외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에 반하여 중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때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이다.
이와같이 의인과 중생은 동전의 앞됫면과 같아서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의인과 중생을 구분한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후에야 거둡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볍적인 무죄선언일 뿐이다. 실제로 의로워지는 내적, 영적변화는 중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순간 죄인 자신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의인이 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동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중생은 생명의 탄생이란 점에서는 하나의 완전하고 독립된 사건이지만 성결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단계,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의로워지고 거듭나게 되며 초기의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죄에서 용서받으며 죄의 세력이 깨어지면 성결, 또는 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초기의 성화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중생은 성결의 시작이다. 새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된자의 속에는 성결의 싹이 돋아오므로 거룩하게 될 요소는 가졌으나 속으로 새롭게 되어 가는데는 이제부터 시작한 것 뿐이고 아직 완성은 먼 거리에 있다. 이 점만은 모든 교히가 신앙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중생은 아직 사람의 속에 있는 더러움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내부에서 마음을 사주하여 범죄하게하던 부패를 막을 힘을 기를 뿐이다.
웨슬레는 중생 이전과 이후를 어린아이의 출생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되어 해산을 기다리는 아이와 그후 막 태어난 아이는 외모에서는 차이가 없다. 눈, 귀, 코, 입은 해산 전후가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중생도 마찬가지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보게 된다.
웨슬레는 의인 사건과 동시적 사건인 논리적 순서로 보아 의인뒤에 온다고 본다.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죄를 사해 주시는 역사이고 중생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이다. 이 중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때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때 저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이다. 이러한 중생의 체험은 성결을 위해 영원한 구원과 이 세상 및 장차 올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 이와같은 중생은 성화의 일부분이며 성화의 문, 통로이다. 갓난아이가 성장 해야하듯 중생을 체험하면 그후부터 내적, 외적인 성화가 시작된다.
웨슬레는 이와같은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영고 육이 같이 죽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본 것이다. 그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 대신 마귀의 형상을 본받아 교만과 자기 중심주의로 생활하게 되었다는 서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중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중생을 정의하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생명으로 도입하실 때에 영혼속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영혼을 죄의 사망으로 부터 의의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에 의해서 영혼 전면에서 되어지는 변화이며, 그때에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와 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중생의 성질을 하나님이 한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큰 변화라고 해석했는데 새로 거듭난 사람의 성질은 사랑, 겸손, 온유,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변하여 영과 육이 아울러 하나님께 계속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는 힘이 생기며 변화된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중생하지 못한 자는 이세상에서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질투, 시기, 복수심, 그리고 원망으로 가득차 있어서 행복할 수 없으며 또한 기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중싱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현갑씨는 그의 책에서 이와같은 중생의 특징적 성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중생은 성령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도덕적 변화이
다.
② 중생의 근본적 변화는 성령의 효력있는 작용에 의해서 되어진다.
③ 중생은 완벽한 역사로 그때문에 종류에 있어서도 완전한 것이다.
④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⑤ 중생은 성결과 관련 되어진다.
⑥ 중생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관한 개인적 지식을 간능케 해준다.
⑦ 중생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생명적 관계에 놓여 있
다.
⑧ 중생은 성령의 유능케 하시는 힘과 관련하고 있다.
웨슬레는 또한 중생이 영원한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동시에 성결의 필수 조건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은 사람이 처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처음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단계는 계속해서 성장과정을 통하여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은 성결의 필수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전진적 성화
루터는 역설하기를 기독교인은 의이인 동시에 되인 이므로 그의 사람을 지속적인 참회와 그의 외래적 의인 그리스도에게로 날마다 돌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용서의 선물에 의해서만 자기의 소유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독교인은 칭의전에 회개가 있듯이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있으며 이 회개를 등한히 하면 성결을 기대할 수도 없고 은혜안에서의 성장도 할 수 없다. 의인, 중생에서 온전한 성화까지의 과정을 점진적 성화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하여 성화에 이르지 못한 신자의 상태를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이 섞여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로는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신자의 회개는 하나의 내적 변화 곧 죄에서 거룩하여지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생 전의 회개와 다른 올바른 회개로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것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성령의 역사로 우리속에 남아있는 죄를 깨다든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신이 죄에 대해 책임이 있고 무능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교회신조 제 9조에서 원죄를 언급하면서 이 본성의 부패성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남아있으며 이 신자의 죄는 내적인 죄, 죄된 성질, 의욕, 감정이라 한다. 신자는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부터 내, 외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나 육욕, 악한 성질이 성령을 거스리고 있으므로 서로 대적하는 두 세력이 신자안에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회개는 중생한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육에 속한 마음, 악에로의 경향성, 타락하기 쉬운 마음 즉 성령을 거스리는 육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는 자기가 의인인 동시에 죄인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그 인식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삶을 구세주에게 더욱 개방하여 그리스도와의 파손되지 않는 관계의 선물로서 외적 죄를 말소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의 빛으로서 내적 죄가 점차적으로 감소되며 그의 은총의 능력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와같이 구원은 선행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시키는 깨닫는 은총에서 신앙의 단계 즉 확신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된다.
웨슬레는 초기의 성화에 만족하지 말고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온전한 성화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인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 회개는 의인에 선행하는 회개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신자의 회개"라고도 하며 "올바르게 이해된 회개"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고집, 무신사상, 우상숭배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이며 악에로의 성벽, 타락하기 쉬운 마음, 아직 머물러 있어 성령에 거슬리는 육의 경향성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즉 인간이 성화의 길을 걸으려고할 것 같으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은 후에도 죄는 계속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한 회개가 있을 수 없으며 회개가 없는 한 인간은 완전히 성화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웨슬레는 "신자의 회개"란 설교에서 이 회개를 자만, 고집, 세상에 대한 사랑, 탐심, 태만과같은 "쓴 뿌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으며 또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성화에 이를 수 없고 전적으로 주님께서만 할 수 있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같이 신자는 거듭난때부터 성결의 점진적 역사를 시작하며, 점진적 개념에 순간적 요소가 결합되어 종말론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은총중에 성장하는 일에 관해서 J. A. Wood목사는 다음가 같이 말하였는데 "기독교인의 완전은 은총에 있어서의 성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다른 무엇보다 빨리 성장한다. 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진보를 배제하는 은총의 상태가 있다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사실인즉 영원히 가속도적으로 성장하기를 우리는 기대하는 바이다. 그것은 단지 중생한 심령 뿐만 아니라 온전히 성화된 심령에서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고와 소유한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불가불 전진해야 한다. 중생자나 성결한 자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이점에서 실패해 온 것이다. 죄 깊은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신앙생활에서 정지상태란 은 없다. 전진이 아니면 후퇴이다. 만일 사람에게 주신 빛과 의무를 따라 생활하고 있다면 은혜상태 여하를 막론하고 또 얼마나 많이 성령에 참예한바 있더라도 성장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의무를 등한히 한다면 지나간 날 얻은 은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후퇴도상에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Wood목사는 말하길 "성결은 은혜 중에서 성장함이 없으면 보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생명 중에서 착실히 전진하므로써만 유지되어 질 수 있다. 성결을 획득하는 조건과 그것을 보존하는 조건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을 얻고 보존하는 조건은 영혼을 자라게 하며 성결을 원숙화하는 조건도 된다. 따라서 성결한 가운데 전진하며 장성하는 조건을 범하는 일은 곧 성결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라고 하며 계속해서 성장해야 됨을 강도하고 있다.
이와같이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장의 과정이다. 이 기간에 신자는 영적인 싸움을 무수히 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를 교대로 겪게 될때가 많다.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읮가 중요하며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잠 3:23)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적 신앙의 외적 증거요 열매로서 선행의 필수성과 중요성이 이때에 나타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으며 그가 죄에 대해 죽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향해 살게된다. 악의 모든 모양도 버리며 힘껏 사람들에게 선행하기를 열심하며 은혜로 나아간다. 또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며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향략을 외면하면서 은혜에 계속 나간다. 그런 식으로 신자는 온전한 성결, 즉 모든 죄에서 완전한 자리로 진행하는 것이다.
V. 그리스도인의 완전(전적 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하는 문제만큼 예리하게 논쟁되어 온 것도 없으며 아마 그만큼 그릇되게 전달되며 오해되어 온것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 자체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 있는한 완전해 질 수는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것은 기독자의 완전의 특징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주장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자가 완전의 특징이 바로 설명되고 이해 되어진다면 이런 오해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개념과 그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말이 웨슬레가 처음 시도했던 말인가의 여부 및 그리스도인의의 완전의 성취와 그 유지, 그리고 그러한 완전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A. 완전의 개념과 본질
1. 완전에 대한 표현
완전은 구원의 주제이며 완성이다. 또한 구원론의 중심적 진리이다.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완전 혹은 성결을 의미하는 용어들은 실로 다양하다. 온전한 성화, 제 2의 축복, 완전, 순수한 사랑, 사랑, 완전한 사랑, 온유한 구원, 두번째의 변화, 기 자의 전체적인 구원 등이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표현하였던지 간에 이 역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구원, 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전함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들이다.
그들은 각기 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① 기독자 완전 (Christian perfection) :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전함과 영적인 여러가지 은총에 대한 소유를 강조한다.
② 온전한 성화 (Perfect Sanctification) : 육의 마음, 또는 내주하는 죄를 포함하는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함 (cleansing)을 강조한다.
③ 온전한 구원 (Full Salvation)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 문제의 전부에 대하여 충분한 개결을 준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④ 온전한 사랑 (Perfect Love) : 전적으로 성화 (Sanctified)된 사람들의 도덕 생활에 대한 정신과 기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아중심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 및 모든 사람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을 내포한다.
⑤ 성령세례 (the Baptism with the H. S.) : 마음이 죄로부터 정결케 (purge)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되어지는 은혜로운 수단을 강조한다.
⑥ 제 2의 은혜 (Second Blessing) : 성결이 중생에 따라오는 제 2의 명확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요한 웨슬레에 의해서 쓰여진 말이다.
⑦ 성결 (Holiness) : 성결된 사람의 상태, 또는 상황에 특별히 관련되는 것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 혹은 모든 죄가 제거 되어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소유하고 있는 영혼의 완전한 건강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결은 "그리스도교 체계의 중심적 이념이며, 인간품성의 최고의 달성"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있어 성결 교리만큼 의견상 치이를 가진 주제는 없을 것이다.
2. 완전 (성결)의 정의
성결의 정의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자기의 신학사상과 그들의 교리에 따라서 여러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교파와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라서 성결의 개념이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웨슬레는 완전에 대한 개념을 여러가지 다른 말로 표현했다. 다시 만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 완전한 구별, 완전 성화, 완전 구원, 제한되 완전, 성경적 완전, 완전한 사랑, 제 2의 변화, 제 2의 축복 그리고 거룩히라고 말한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말은 성결이라는 말에 대한 다른 용어이며 개념적으로는 두말이 꼭 같은 뜻을 지닌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본는 성결에 대한 견해는 완전한 자는 성결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신자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음속의 거룩이 곧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심령 상태이며 거룩하지 못한자는 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때 완전에 대한 표준이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높은 표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상대적 완전인 것이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은 아니다.
웨슬레는 이 완전을 절대적 완전이나 천사적 완전과는 분명히 구분을 하면서 실수하거나 범죄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완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토마스 쿡은 말하길 완전은 기독교인의 경험을 말하는 단일 용어로서 성경에는 완전이라는 말을 138번이나 했으며 그 중 50이상은 은총의 역사로 인간의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1738년 전후에 내린 웨슬레의 완전의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께 항복하는것과 복종하는 것이 완전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것은 마음의 내적인 복종이요, 말과 행동의 외적인 복종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동기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하는 사실이 그 특징이다. 완전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죄에서 정화되어 영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며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정의를 결정지은 세가지 견해는 아켐피스와 테일러와 로오에게 나타나는 견해에서 잘 표시된다. 아켈피스와 같이 테일러와 로오에게서도 카톨릭전통을 강조하는 경향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이상과 지향하려는 이상에서 특히 강한 경향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웨슬레에게 있어서의 완전은 의지의 순수, 그리스도의 모방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된다.
3. 완전의 본질
웨슬레는 완전의 본질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사랑을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랑의 완전이다 -
웨슬레는 완전의 본질을 온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응답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랑을 주제로 하며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에 신자의 기질과 말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문답을 살펴보면,
문 :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
답 : 나는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그완는 정반대적인 말을 해온 것이다. ...... 사람은 순전한 사랑으로 충만하면서도 여전히 과오를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 그러나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나올때 그런 과오는 엄밀히 말해서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오도 하나님의 엄격한 헤아림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속죄의 보혈이 필요하다.
이와같이 온전한 성화는 바로 온전한 사랑, 또는 순수한 사랑이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칼빈의 강조점은 믿음에서의 완전에 있었다. 그러나 웨슬레는 온전한 구원은 사랑과 순종의 완전이라고 가르친다. 칼빈은 정적이며 웨슬레는 역동적이다. 사랑이 충만하면 그것을 방해할 것도 마음을 괴롭힐 것도 없고 오직 영원한 기쁨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 같은 공포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채워질 때까지 지혜와 거룩과 행복속에서 계속적인 성장을 하면서 중단없는 깨달음, 사랑, 기쁨을 누리게 된다.
웨슬레는 성화의 본질인 사랑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자연인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태어나야 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계시된 것이다.
② 이 위에서부터 온 사랑 (그리스도 사건)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 속에 증거되며 우리는 외롭게 하는 신앙 (Justifying faith)의 열매로 이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③ 구속 (Atonement)과 의인 (Justification)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법 (The law of Love)을 성취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④ 기독교인의 자유도 부정적, 소극적 의미에서는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 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나 적극적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한 자유가 된다. 또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마음의 태도, 즉 순수한 목적이어야 하므로 모든 기독교인의 자유는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⑤ 웨슬레는 사랑의 에큐메니칼적 성격을 강조한다. 사람을 향하신 하 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인 만큼 기독교인은 한 형제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⑥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을 주장한다. 웨슬레가 보편적 사랑을 말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정도의 치이가 있는 3동심원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의 진수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구원의 목적을 지향한 이와같은 발전에 적응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은 또한 최고의 가치이다. 교회의식, 외적인 행위, 내적인 성품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간 열정의 지상의 목적인 이 사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전가될 뿐 아니라 분여되는 것이다. 성화를 초래하는 신앙에 의해서 신자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을 경험한다 (롬 5:5 참조). 또 그 일로 인해서 마음이 정결해진다 (행 15:8-9 참조).
결론적으로 웨슬레는 전적 성화는 순수한 사랑 - 죄를 물리치면서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사랑 - 그 이상도 아니며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설교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것은 죄를 추방하는 사랑이다. 마음을 채우며 영혼의 전체 기능을 지배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마음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을때 그 마음에 죄가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성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하게 되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에 관한 웨슬레의 교리의 정수이다.
B. 완전의 근거
1. 성 서
웨슬레는 완전의 근거의 제 1차적 요소로서 성서를 들고 있다. 한 책의 사람이라고 말했던 웨슬레는 그의 성화론이 철저하게 성서적이라고 고백한다. "내가 언제 어디서 이 교리를 발견하였는지 될 수 있는대로 간단히 말하겠다. 나는 어떤 편견이나 욕망도 없이 신,구약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 그것을 발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성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의 시대적 사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철저하게 성서적이기 때문이다. 1764년 웨슬레는 그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교리를 검토하면서 다음과 간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의미로 볼때 거룩한 자는 완전한 자이다. 완전한 성화를 위한 기도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요 17:23-26 ; 엡 3:14 이하 ; 살전 5:23). 만일 온전한 성화가 없다면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희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성화가 죽기전에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명령은 본질상 죽은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자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는 그의 신학의 근거를 성서의 권위에 두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도 권위있는 것이 되었다.
웨슬레는 그의 기독자 완전의 교리의 형성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① 내가 기독자 완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725년이었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인 시기는 1730년 이었는데 그때에 내가 한 책의 사람이 되기 시작한 해였으며 비교적 성경외엔 어떤 책도 중시하지 않았던 때였다.
② 지금 내가 믿고 가르치는 교리가 그때의 그 교리와 똑같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적 혹은 외적 성결에 대하여 조금도 첨가시키지 말고 나는 38년전의 그것을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38년전에 가르쳐떤 내용을 수정없이 그대로 가르친다는 웨슬레의 강조점은 무엇인가 ? 그것은 그의 기독자 완전이 교리가 철저하게 성서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38년의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고치지 않고 가감없이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대로 증거하였고 성서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그에게 있는 것이 지적된다면 어떤 희생을 무릅 쓰고라도 성서대로 순종할 준비를 갖고 있었다.
웨슬레의 이같은 자세는 이신론이 성행하던 당시의 풍조를 뛰어넘어 그가 개혁자들의 성서관과 같은 맥락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모든 권위에 앞서는 성서의 권위르 고수하였고 이와같은 그의 자세는 그의 일기, 편지, 신학, 또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2. 전 통
성결에 대한 관심은 성서와 교회사 속에서 찿아볼 수 있는데, 성결은 성경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결의 관심이 들어있지 않은 계시는 없다고 볼 수 있는데 구약 (출 3:4-5 ; 레 19:1-2 ; 시 98:3 ; 사 6:3 ; 겔 36:25 참조)에서나 신약 (마 5:8 ; 롬 6:6-11 ; 고전 13 ; 살전 5:23 ; 요일 4:17-18 참조)에서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이 계신곳은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자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일관해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약속이 그리스도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는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분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자가 스스로의 내적 사실을 보유할 수 있는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사도들이 성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힘과 능력과 힘과 능력과 기쁨에 충만하여 모든 박해와 조소를 이기고 요원의 불처럼 그 당시의 세계를 정복해 나갔다.
교회 교부시대를 살펴보면 교부들의 편지와 기도의 제목등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7C 후반부에 일어났던 교부학 부흥에서 산출된 새로운 번역판들을 통해 고대 기독교의 문헌들을 연구하던중 웨슬레는 초대교회의 사상과 경건 속에서 고전적 사고 유형과 특징있는 사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애굽인 마카리우스와 에브라엠 시러스였다. 이들은 웨슬레에게 이생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목표가 완전이며 헌신은 그 목표 달성의 방법임을 가르쳤다.
이들의 완전 개념은 상태라기 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완전을 말하는 것으로서 웨슬레에게 당대의 로마 카톨릭의 영적 신학에 나타난 정태적 완전주의와 그가 신비 저술가들이라고 개탄했던 저 개신교도들 및 카톨릭 교도들의 정태적 정숙주의와는 전혀 다른 영적 비젼을 제공했다. 이런 교부들의 관심뿐 아니라 후대에 내려오면서 수도원을 통해서,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을 통해 명맥을 이어오며 왜곡되고 변질되어 가기도 했으나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처음의 순수한 신앙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되찿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성결에 대한 관심을 갖고 구원의 문제, 완전의 문제 등을 다루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교리적 정리가 되어있지 못했다. 그러나 성결이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이 체험을 계기로해서 믿는 이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웨슬레를 비롯하여 초대 감리교의 교역자들이 힘써 가르친 바이며 사도시대의 교회에서 체험한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 의인의 도리가 루터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듯이 성화의 도리도 웨슬레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성서에 기록되어 잇으며 초대교회에 이어 전통교회에 있던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알맹이였다.
3. 체 험
웨슬레는 흔히 체험의 신학자라고 불리운다. 1746년 웨슬레는 '어린이를 위한 가르침'의 서문에서 어린이에게 성경읽기를 가르칠때 어린이들이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체험에 유의하라고 권고한다. 얼마나 많이 읽느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얼마나 잘 읽느냐에 관심을 두라...... 그들이 단지 읽는 것으로 끝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내면적으로 소화시키도록 하라. 웨슬레의 이 진술은 그가 단지 성경을 읽는다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성경이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체험되어 지느냐에 관심을 둔것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웨슬레에게 있어서 체험은 그의 삶과 사상을 변화시킨 귀한 계기가 되었다. 웨슬레의 생애의 전환기였던 1738년의 올더스케이트의 체험은 웨슬레의 생애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이 체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폴. 훈은 웨슬레 신학의 경험적 성격을 특징 지으면서 "종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체험되어질때 참 종교다" (Religion is Real when God is experienced in a Saving Way)라고 하였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웨슬레는 체험을 통하여 비로서 그 말씀대로 살아있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체험되기 이전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말씀이었지만 체험한 후 그 말씀은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레에게 있어서 체험은 특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체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가 아니었고 구속적 체험이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종교적 체험은 천박한 감상적 체험주의가 아니라 고차원의 초월적 체험주의미며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직접으로 증거하시는 것을 기초로 한 체험주의이다.
웨슬레 신학은 그때부터 새로운 입장에서 전개되어 나갔음을 본다. 즉 말로만 듣던 은총의 신학이 그의 신앙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긍정하게 뙨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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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교회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그리스도인들을 접촉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점점 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어지러워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데 그 책임을 돌린다하더라도 결코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대의 교회를 살펴보면 양적인 성장에 치우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모습을 또한 쉽게 볼 수 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어지고 성경의 권위가 점차 땅에 떨어져가며 각종 이단사상의 침투와 세속적 풍조의 유입으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치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은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켜 새롭게 만드는 영적 각성으로서 18세기 영국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았던 웨슬레의 영적 혁명이 지금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웨슬레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이며, 그의핵심은 성화이고 또한 그 성화의 본질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완전이다. 그러므로 이런 웨슬레 성화론에 대한 연구는 우리시대에 가장 시급하고도 필요로 하는 분야로서 이런 시점에서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믿음과 행함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인식의 부족으로 무분별한 행동주의, 광신주의, 맹목적인 성령주의가 뿌리박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 복음의 중심이 되는 성화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절실한 신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중 본인은 조종남, 한영태 교수님의 성결론 세미나를 듣게 되었고 또한 요한 웨슬레의 성결론과 관계된 여러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성화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발전되어 졸업 논문으로 요한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글을 쓸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해서 살펴보되 성서의 중심사상이며 초대교회 이래로 면면히 이러내려온 성화의 은총을 단계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되 성화의 단계를 중심으로 하여 본 논문을 구성함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자신이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가를 발견하여 자신의 신앙수준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더 나아가 이 성화의 은총이 누구나 다 체험할 수 있는 성경적이고도 경건한 복음임을 드러내어 오늘날 침체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상태를 보다 높고 새로운 차원에까지 도달 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헌신적이고도 풍요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으며, 또한 이 성화론이 현대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살펴봄으로 오늘날의 혼탁하고 어지러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임을 드런내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웨슬레의 저술들과 성화와 관련된 여러 저술들을 중심으로 해서 성화의 단계를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그것에 대한 의의를 밝히는 연구방법을 택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데 I 장 부분은 서론부분으로 이 글의 쓰게된 동기로싸의 문제제기 및 목적과 전개방법이 다루어지고 있다.
II 장에서는 웨슬레 신학의 개요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웨슬레 신학의 기본적인 점들을 몇가지 고찰한 후 웨슬레 신학이 지니고 있는 특색을 알아보고 그런 웨슬레 신학에서의 성화론의 위치를 살펴봄으로 II 장을 정리하려고 한다.
III 장에서는 웨슬레 성화론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전개하면서 성화의 단계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초기성화와 점진적 성화의 단계까지를 정리하려고 한다.
IV 장에서는 웨슬레 성화론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완전성화 즉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다루려고 하는데 여기서는 완전이란 단어의 개념과 그 본질을 분명히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웨슬레가 이런 완전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들을 찿아보고 완전의 성취 및 그 유지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부분들도 조금이나마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IV 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웨슬레의 완전론이 지니는 독특한 특징을 살펴봄으로 IV 장을 마치려 한다.
V 장에서는 웨슬레의 성화론이 지니는 의의를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크게 3 부분으로 나누어 선교신학적 측면과 현대 신학적 측면, 그리고 사회 윤리적 측면으로 구분해서 각자의 측면에서 성화론이 지니는 의의를 찿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VI 장에서는 이글의 총 요약과 평가를 기록함으로서 이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I. 웨슬레 신학의 개요
웨슬레는 18세기 영국 사회를 구원한 대 부흥사요, 감리회의 조직자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웨슬레를 단순히 부흥사나 조직에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 정도로만 여길 뿐 신학을 가지지 못한 인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재발견된 웨슬레를 통해서 볼때 웨슬레는 루터나 칼빈 못지않은 훌륭한 신학자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이러한 웨슬레 신학의 개괄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A. 웨슬레 신학의 기본적 고찰
1. 웨슬레의 생애
웨슬레는 1703년에 3대에 걸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88년 후 그가 죽을 시점에 이르렀을때 그는 그의 동료 영국인들의 상당수, 특히 하층 계급 출신 영국인들의 상당수가 종교적 신앙과 실천을 그들의 생활의 중심으로 삼을 만큼 영향력이 있는 하나의 종교운동을 형성해 놓았다.
그는 비록 이 시대의 합리주의적이고 이신론적인 정신과 맞서려는 계획에서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성공적으로 실시된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충만케 하려는" (to spread Scriptual holiness over the land) 그의 계획은 앞서의 철학들이 조성해 놓은 종교적 무차별의 정신에 대한 18세기의 가장 효과적인 대답을 제공해 주었다.
웨슬레의 생애는 크게 3번의 중요한 단계를 거쳤는데 그 단계들을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a. 첫번째 시기 - 옥스포드대학에 있던 시기
웨슬레의 생애에서 주목할 세단계 중 그 첫번째 단계는 웨슬레가 옥스포드에 머물렀던 시기로서 이 시기는 개인적 완전 (personal perfection)에 도달하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특징지어 졌다. 웨슬레의 이런 노력은 1725년 목사안수를 받은 뒤 1729년부터 옥스코드에서 동생 챨스와 신성클럽 (Holy Club)을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이 성결클럽에서는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교회출석을 충실히 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찿는데 온힘을 다하였다. 이들 모두는 완전을 추구하는 이와같은 노력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성클럽은 이러한 종교의식과 생활을 아주 엄격하고 규칙있게 영위했다. 이데 "메소디스트" 라고 이름이 웨슬레의 그룹에게 주어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완전을 추구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생활을 택하였는데 기도와 독서, 매주일 여러차례의 금식, 매일 저녁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자신들이 읽은 내용을 서로 토론하는 것이 이들의 생활 계획이었다. 이런 생활계획에다 이들은 구체적인 자선행위를 추가하였다. 자선, 옥중에 있는 사람들 방문, 가난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이에 속하였다. 후년에가서 웨슬리가 온 영국땅을 누비며 설교를 시작하였을때 그의 메시지를 듣고 기독교적 생활을 위한 그의 자세한 프로그램을 따랐던 사람들이 메소디스트 (Methodist)라 불리운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b. 두번째 시기 - 조지아의 선교활동 시기 (1735-1738)
웨슬레의 생애의 두번째 단계에서 핵심적인 경험은 조지아 (Georgia)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수년간의 기간이다. 그의 생애의 이 단계에서 그를 형성하는데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는 미국을 건너는 위험스러운 항해 기간에 모라비안 (Moravians)과 접축하게 된 것이 웨슬레가 모라비안들의 신앙의 깊이와 견고성을 일생동안 찬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웨슬레는 이들의 뜨거운 신앙과 비교해 볼때 자신의 신앙은 보다 이지적인 것임을, 모라비안들의 신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뜨거움이 전혀 배제된 지적인 확신임을 발견하였다.
또한 웨슬레에게서 작용한 두번째 요인은 점차 강렬해지는 실패감이었다. 미대륙에서의 긍의 선교활동은 결코 만족을 줄 수 없는 불행한 것이었다. 웨슬레는 자신감을 잃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해 놓으신 일이 무었인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였다. 귀국하는 배를 타면서 써놓았던 웨슬레의 일기는 그가 느낀 불안감과 실패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9월 월요일 (1738년 1월의)과 그 당음 몇날동안 난는 헛된 욕망에 관하여 많은 반성을 하였다. 이 헛된 욕망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고독하게 보낸 수많은 세월동안 나를 따라 다녔다. 나는 이제 고독은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기독교인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독교의 모델이시라면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24일 화요일...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아 ! 나는 누구가 개종시켜 (회심) 줄 것인가 ? 나를 불신앙의 이 악한 마음으로부터 구해줄 사람은 누군가, 어떤 분인가 ?
c. 세번째 시기 - 올더스케이트의 체험 이후
웨슬레의 생애의 세번째 단계는 올더스케이트가 (Aldersgate Street)에서 모인 집회에서 겪은 웨슬레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겪은 그의 경험의 영향은 그의 생애의 나머지 기간동안 내내 존속할 정도로 컸다. 1738년 5월 24일 그는 거의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한 예배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그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소리를 듣던 중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신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이상하게 뜨러운 확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날저녁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케이트가의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전 쯤 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자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서술한 부분을 읽을때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죄, 나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이제 웨슬레는 자신의 필생의 할일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체험은 그의 행정의 재능과 더불어 구원의 확신을 평생의 기독교적 삶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을 체계화시키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2. 그의 체계 (Method)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성결의 욕망을 갖게하고 성결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이용케 하려는 것이 웨슬레의 활동의 주요한 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활용되어진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 몇가지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로 설교를 들 수있는데 그는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들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대다수의 강단이 그에게 길을 막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의 셜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드는 무리들을 수용하기 위한 편리함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루에 몇번씩 설교하였으며 일하러 나가는 시간 전에 노동자들을 붙잡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고 늦은 오후와 저녁 시간에 노동자들에게 다시 접근하였다. 웨슬레는 또한 감독의 안수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설교할 권한을 주었다. 즉 평신도 설교자 (lay preacher)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런것들이 당시의 영국교회 제도와 법에 어긋난다고 하였으나 웨슬레는 그대로 밀고 나가 영국교회를 떠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웨슬레의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았음을 느끼는 체험을 낳고 강화시켜 주려는데에 그 일차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는 신도회 (society)의 조직이었다. 웨슬레는 설교의 효율성에 크게 의존을 하였지만 그는 언제나 이것을 시작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가 전도한 곳에 신도회를 조직하여 후속조치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경우 전도활동에 착수하지 않으려 했다. 이러한 신도회 내에서는 속회 (class)가 신도들의 발전을 위한 기초 집단이 되었다. 정상적인 경우 속회는 한 평신도 지도자를 가진 11명의 신도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매주마다 모임을 갖고 교제와 신앙성장의 여러가지 측면들을 이루고자 노력했는데 이 속회보다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만들어진 것이 밴드 (band)였다. 여기 속한 사람들은 속회보다 수자가 적었으며 성결을 한층 더 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세번째로는 애찬식 (lovee feast)의 도입이었다. 신약성서의 아가페 (the New Testament Agape)를 모방한 애찬식이 도입되었는데 참석한 모든 회원은 빵 한조각과 물 한컵을 함께 나누었다. 원래 초대교회에서는 성만찬식과 애찬식이 같이 있었으나 참여자의 수자가 많아짐에 따라 애찬이 성만찬에서 분리되었으며 점차 소홀히 여겨 사라졌던 것을 웨슬레는 이 애찬을 회복시켜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이런 활동들 외에도 매일의 기도와 매주 일회의 금식이 권장되었으며 모든 신도들을 심방하는 일이 웨슬레와 그의 동역자들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자격없는 회원들은 회원 명단에서 계속 제거되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특이할만한 점은 찬송으로서 찬송가는 메소디스트 모임의 특징이었다. 소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회심의 정서적 경험과 기독교 생활의 철저한 실천을 추구하게끔 감동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찬송은 이들에게 기쁨과 평화와 희망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는길을 열어주었다. 찬송가는 강렬한 체험을 겪는 종교생활의 정상적인 표현이 되었다.
3. 웨슬레의 교리적 강조점
웨슬레는 방대한 신학서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학자로서의 명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신학에 있어서의 깊은 연구력"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ㄴ 그 당시의 일반적인 흐름이 사색적인 경향에서 과학적 탐구의 방향으로 급격히 그 방향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신학과 교리의 설명은 언제나 신도들에게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이런 확신이 기독교 생활에 평생 몸담게 하는 힘이 되도록 하는데 필요한 수단들을 제공해 주는 실천적 목표에 종속하였다. 그의 식학은 생활에 중점을 두고 발전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 내용이 기본적으로 단순하였다.
나머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리의 주요한 교리들은 회개와 믿음과 성결이다. 이들 가운데 첫째는 (회개를 가리킴) 말하자면 종교의 현관이고 둘째는 방문 (믿음을 가리킴)이고, 세째는 종교 그 자체 (성결을 가리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소디즘은 몇가지 특징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특징적인 주제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역사적 신경들 속에 표현되어진 기독교 신앙의 주요한 교리들의 수용. 여기에는 신앙과 생활속에서 입증되고 실천적 자선으로 나타나지 않는 교리는 무가치 하다는 확신이 뒷받침 되어 있다.
②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있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으며, 인간속에 살아계셔서 인간의 성품을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③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의 교리, 성령이 없이는 주님의 게명의 성취도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생활은 막연한 꿈에 불과하게 된다.
④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 (life in Christ)을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성결"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진지하고도 끈질긴 노력, 그리고 이와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를 격려하고 바로 잡아주고, 가르치고 교화하고 뒷받침 해줄 열성적인 신앙인들의 작은 집단들을 조직하는 일.
⑤ 복음과 그 무엇보다도 가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을 가능한 한 가장 설득력 있는 말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지역에 알리려는 열의.
⑥ 보잘것 없는 사람들 (the underprivileged)의 영적인 행복뿐만 아니라 물질적 행복에 대해서도 폭넓은 관심을 가짐.
⑦ 평신도가 다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동등한 기능을 갖고서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교회질서의 발전, 평신도는 목회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인들을 돌보고 교회의 일들을 처리한다.
이처럼 웨슬레 자신도 일련의 교리적 강조점들을 갖고 있었는데 웨슬레의 교리적 강조점들은 기독교의 의미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를 성격지어주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웨슬레 자신은 영국교회에서 서품을 받은 목회자였기 때문에 모든 메소디스트들은 영국교회의 실천적인 회원들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였다. 메소디스트들은 영국 교회의 신성한 예배에 참석하고 영국교회의 성사에 참여하고, 성공회의 예배가 거행되는 동안에 자체 모임을 금하였다. 또한 메소디즘은 [39개 신조]와 [공도문]을 받아들였다. 메소디스트들은 또한 성서의 지상권위, 구원신앙의 필요성, 구원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성에 관한 기본적인 종교 개혁적 입장들도 철저히 신봉하였다. 메소디스트의 설교와 교육의 특징은 교리의 새로움 (novelty)에 있기보다 메소디스트의 강조점에 있었다.
B. 웨슬레 신학의 특색
1. 구원의 신학
무엇보다도 웨슬레 신학의 특색은 '구원의 신학'이라고 하는 점일 것이다. 웨슬레의 신학이 '구원의 신학'이었다는 증거는 그가 일생을 전도자로서 구령사업에 헌신했다는 점 외에도 여러가지를 들 수 있으나 그의 신학의 핵심이 '성화론'즉 '기독자 완전'을 가장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관념의 중요성은 그가 세상을떠나기 전해에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메소디스트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에게 맡기신 거대한 위탁물이며 이것을 보급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 같다"고 하였던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웨슬레의 관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새로와진 영으로서 현실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에 있었다. 웨슬레의 성화 및 완전개념이 루터나 칼빈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은 웨슬레의 현재적 구원에 대한 열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구원을 향한 웨슬레의 열정은 실존적 (existential)이라는 평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말에 대한 웨슬레의 역점은 언제나 우리가 현재 여기서 (now and here)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웨슬레 신학의 특징은 은총의 역사를 미래에 남겨놓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맡겨놓고 체념하는 듯한 종교개혁자들에 반하여 보다 실존적인 관점에서 현재 여기 (now and here)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였다는데에 있다. 이러한 현재적 관심으로 웨슬레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의 영 속에서 새로와진 하나님의 형상 자체'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웨슬레가 현재적 구원에 궁극적 관심을 보이고 있음에서 실존적인 성형을 보여준다는 사실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또한 실제적인 (pratical) 신학이라는 점이다.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서의 믿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웨슬레는 믿음이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생명없는 차디 찬 동의나 이론과 같은 사변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인 것이며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동의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적인 믿음의 개념을 말하였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며 교회의 갱신을 가져보고자하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꼈다. 또한 웨슬레와 그의 동역자들의 관심은 '의'였고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의 곧 '성결'이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구원은 웨슬레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웨슬레는 계속하여 그의 동역자들에게 권하였다. "여러분이 할일은 한가지 입니다. 곧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2. 체험의 신학
웨슬레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 (A Theology of Experience)이다. 다시 말하면 웨슬레 신학이 성서에서 교리를 연역하여 신학하는데 크게 역활한 것은 그의 신앙 체험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체험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호응하는 것으로서의 체험이다. 그렇다고 이 체험이 성서의 권위를 우위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웨슬레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성령의 조명아래 체험을 통하여 설교의 현장에서 그 교리에 대한 실제적 설명을 함으로 신약성서의 신앙을 참되게 표현하려고 힘썼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러한 체험에 대한 강조는 역시 현재적 구원에 관한 그의 관심으로부터 연유되며 그의 구원관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기독자완전의 성화개념에 밀착되어 있다.
루터가 '십자가'와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에 그리고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바라보므로 '이중 예정'에 촛점을 두었던 바와 같이 웨슬레는 현세에서의 구원에 관심하므로써 '성화' 곧 '기독자 완전'에 그의 강조점을 두었다. 루터의 급격한 회심이 '믿음으로 의로와 진다'는 의미의 새로운 국면을 쩐적으로 그에게 심어 주었듯이 웨슬레 역시 그가 회심한 1738년 5월 24일의 회심 경험을 통하여 그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그의 신학을 체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 때에 이 올더스케잇의 회심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로써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성서를 읽었다. ..... 그러나 믿지 못하였다. ...... 그러던 중 올더스케잇 체험을 통하여 이성을 초월하여 성서에 순종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 는 웨슬레 자신의 고백이 이 점을 증거하고 있다.
웨슬레 신학은 그때부터 새로운 입장에서 전개되어 나갔음을 본다. 즉 말로만 듣던 은총의 신학이 그의 신앙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긍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웨슬레는 늘 하나님의 은총을 사람의 체험과 연관시켜 또한 논리를 생활과, 그리고 교회를 사회와 연관시키면서 실제적인 산 신학 (living theology)을 수립하였다. 그뿐 아니라 웨슬레의 신학이 '체험의 신학'으로 불리어질 수 있는 타당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생활속에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 깊이 가질 것이다. 즉 웨슬레의 신학, 곧 체험의 신학은 그의 생활 자체였으며, 그의 전생애는 전도자의 생활로서 현실에서의 구원에 관심했던 그의 신학적 노력과 완전한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창의적 종합 신학
웨슬레 신학의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학자가 말하듯이 그가 성서에 있는 교리를 끌어내서 신학화함에 있어서 희랍의 신학, 라틴신학, 중세기의 신학, 모라비안의 신학,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 등, 모든 신학의 방법론과 강조점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빼서 창의적으로 체계있게 종합했다는데 있다. 이런면에서 웨슬레 신학은 전 기독교의 신학에 친근감을 준다. 웨슬레의 신학은 종합이라는 구조안에 용해되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Christ for us)와 경건주의자들이 말하는 우리 안의 그리스도 (Christ in us)를 종합하고 있으며 성결의 개념을 로마 카톨릭의 강조에서 가져왔고 그리고 그는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으로'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를 채택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때 성화의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선행으로서 거룩한 삶을 강조했고 성자로서 공을 쌓기 위하여 수도원 생활, 고행등을 할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마치 구원은 선행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웨슬레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거룩의 개념과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믿음만으로라는 주장을 통합시켰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생활까지 미치는 깊이와 동시에 거룩한 삶을 강조함으로 "믿음만이요"와 "거룩한 삶"의 두가지를 양극화 시키지 않고 둘을 은총의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종합시킨 것이다. 이또한 웨슬레의 최고의 강조로 보여지는 성결론의 구조속에서도 성결이 주어지는 동시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두 요소가 함께 발견 되어진다. 또 점진적인 발전과 순간적인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종말론에 있어서도 우리의 현재적 삶에 관계하는 동적인 면과 함께 이 현세의 모습은 지나가 버린다는 점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웨슬레는 성서의 어떤 곳에서는 그 술어가 특히 지상에서의 상태를 지적하며 다른 곳에서는 영광의 상태를 의미한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여 종합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웨슬레의 신학은 둘중의 하나 (either - or)가 아닌 양쪽 다 (both - and)를 취하면서 양쪽의 강점을 충분히 섭렵하고 있는 창의적인 종합 (creative synthesis)이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웨슬레의 신학은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며, 실존적인 성화의 신학이다. 또한 웨슬레의 신학은 체험의 신학이며 창의적 종합의 신학이며 더 나아가 성서 자체를 완전히 조명하고자 하는 성서적 신학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언급은 아무리 강조 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단편적인 성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웨슬레의 신학은 균형에 촛점을 두고 유기적으로 말해질 때에만 올바른 평가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 웨슬레 신학의 특색속에 담겨있는 중요한 하나의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성화의 사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만큼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론은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웨슬레 신학은 18세기 영국의 타락상 속에서 솟아 난 구원의 진리였으며 현실에서의 변화와 성장을 추구한 성화에 그 촛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웨슬레 신학에 있어서의 성화론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며 웨슬레 신학에서 하나의 맥을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II. 요한 웨슬레의 성화론
전장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론은 매우 큰 비중을 지니고 있다. 특히 웨슬레 신학의 재발견으로 오늘날 새로운 관심과 촛점을 모으고 있는 웨슬레 신학의 중심점은 성결 즉 성화론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웨슬레의 성화론에 대한 사상은 가장 오해되고 비판된 교리였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교리의 동기와 그의 신학사상을 연구해보면 이 성화론의 교리야말로 가장 성서적이며 전통적이며 경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III장에서는 요한 웨슬레의 가장 뛰어난 신학으로서의 성화론에 대해 살펴보되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이전 단계까지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A.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죄성
웨슬레의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펴보면 인간의 죄성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는 성서적 근거로부터 기원되었다. 원죄는 먼저 아담의 자범죄인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를 말하며 이것이 최초의 죄이다. 이러한 원죄로 인해서 개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죄성을 지니게 되었고 집단적으로는 인류 전체가 타락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인류전체가 지은 것이고 그의 부패는 인류의 부패인 것이다 (롬 5:12). 이러한 아담의 타락은 인간 본래의 완전성을 유실하였으며 인간본성의 완전타락을 가져왔다. 그 결과 아담의 후예는 생태로부터 영적으로 죽어있으며 아담에게 있었던 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의 상태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원시적인 완전성 (primitive peerfection)이 변화되었고,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타락하였다. 예외없이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다 타고난 죄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에서 근원된다. 곧 웨슬레는 아담의 죄가 인류 타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744년의 의사록에서 웨슬레는, '어떻게 아담의 죄가 전체 인류에게 유전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담안에서 인간은 죽었다. 즉 첫째로 우리의 육신이 그때에 죽을 수 밖에 없었고, 둘째로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떨어져 나갔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적이며 악마적인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넷째, 따라서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식이며 영원한 죽음을 받을 수 밖에 없이 되었다.
이러한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웨슬레가 St. Paul과 St. Augustine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웨슬레 신학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뿐만 아니라, 웨슬레의 이러한 심각한 죄관은 종교개혁자들과 후에 나타나는 정통주의자들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은총밖에 있는 인간 (자연인)의 상태는 완전 타락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웨슬레의 깊은 통찰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담의 타락의 직접적인 결과는 이 세상에 고통이 생겼다고 하는 사실이다. 인간의 고통과 슬픔은 인류에게 영원한 짐이 되었다. 왜냐하면 원죄로부터 자범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원죄와 자범죄를 비교해 보면 원죄는 죄의 모체이고 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줄기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자범죄이다. 자범죄는 또한 의지적인 자범죄와 무의지적 자범죄롤 나눌 수가 있다. 의지적인 죄는 외부나 내적 유혹에 대해서 의지가 결정을 내진 죄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망과 고통이 따르는 죄이다. 이 의지적인 죄는 마음에 있는 내적인 죄와 행동으로 보여진 외적인 죄가 있다. 무의지적인 죄는 비고의적인 실수나, 판단착오, 기억력 상실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죄책이 따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타락은 아담이 그의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이며 인간은 이로인하여 자유를 상실했다. 그의 자유의지는 이제 전적으로 속박되어 버렸고 다만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에서만 자유롭다. 타락이후로 선한 어떤 것을 어느것 한가지라도 선택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도움을 받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인간은 완전히 부패하고 죄책을 가질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사망으로 정죄되었다. 즉 그는 그의 운명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킬 만한 곳으로 한 걸음도 내 디딜수 없는 속박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2. 선행적 은총과 복음적 신인 협동설
넓은 의미에 있어서 성화는 인간이 소유한 선재 은혜의 작용으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을 찿으려는 욕망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등을 표시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빛의 첫 서광이요, 하나님께 범죄하였다는 확신을 의미한다. 이와같은 은혜의 역사는 곧 삶에의 경향, 어느정도의 구원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상태에서 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선행적 은총은 웨슬레의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한편으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있는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이며, 하나님을 용납 또는 배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웨슬레는 이 두가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는 불가능성과 하나님께 응답하는 자유를 그의 원죄와 선행적 은총에 대한 두 교리로써 조화를 이룬다. 그에 의하면 이 선행은총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에도 아담과 하와로부터 타락한 모든 인류에게 역사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의 타락을 인하여 하나남과 인간사이에 완전한 간격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 먼저 값없이 모든 인간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예비적으로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지향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있는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데 이 선행은총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응답할 수도 배격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바로 선행은총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총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인간 편에서 응답하는 기초가 된다.
이와같은 주장에 있어서 칼빈의 견해와의 차이를 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은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제한적인 은총임에 반해서 웨슬레에게는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선물이다. 이와같이 칼빈의 제한적 은총관에 대조하여 웨슬레는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경우에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역사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보편적인 은총의 교리를 제창하게 된것이다. 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 모든 사람안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만인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은총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에 인간에게 은총이 없는 칙임은 그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에게는 있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실때 이를 받아 드릴 수도 있고, 거절 할 수 있다는 데에, 웨슬레의 은총관에 있어 특징적인 점이 있기도 한것이다. 러한 선행적 은총은 회개와 신앙과 의인과 성화에로 인간을 이끌고 있는 바탕이 된다. 또한 이 선행적 은총의 근원과 수단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에 의하면 타락이후에 자연적인 그대로서의 상태 (state of mere nature)로 머물러 있는 인간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atonement)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그 대속의 첫번째 결과로써 하나님께서는 선행적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이다. 이 결과로 타락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이나마 어느 수준까지 회복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양심이라 불리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양심에 있어서 인간의 양심에 나타난 선행은총이 이난을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전환시키는데는 충분하지 않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의 길로 발을 디디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생활속에 직접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선행은총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찿을 수 있으며 이 선해은총의 역사가 있기때문에 죄를 회개할 가능성과 능력이 있따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연적으로 대두된 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는 능력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말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말하였다.
웨슬레가 주장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살펴보면 사람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면서도 그 안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호응하며 함께 일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가 말하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은 반 펠라기우스 주의나 중세기의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자연인이 하나님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근거로 하는 협동이나, 인간이 절반, 하나님이 절반 나누어 맡는 식의 협동이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은총의 역활과 인간의 역사 (자유의지) 사이의 관계는 이것이다, 혹은 저것이다의 관점이 아닌 둘다 (both - and)를 택하고 창의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이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하나님의 은총에 둔, 복음적 신인 협동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선재은총과 인간의 수동적 협력으로 성화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B. 성화의 과정
웨슬레에게는 기독교는 구원이요, 구원은 곧 성결을 뜻하였다. 따라서 성결은 여러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결의 단계가 서로 다른 종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는 더욱 거룩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레의 성화의 각 단계들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관계적 성화 (Positional Sanctification)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믿음으로 전에 원수 되었던 사이가 부자 관계로 회복된다. 이때에 죄인이 하나님의 백성 즉 거룩한 백성이 된다. 관계적 성결이란 이와같은 관계의 변화를 본 것이다. 이는 주관적 변화라기 보다는 객관적 변화이며 내적 변화가 아닌 외적 관계의 변화이다. 신학적으로 의인 (칭의) (justification)이 바로 이 단게에 속한다. 의인이란 죄인이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의 용서를 뜻한다. 의인은 곧 죄첵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용서 받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그에게 뒤집어 씌워졌다는 뜻에서 전가된 의 (imputed Righteousness)라고 한다. 웨슬레는 그가 후년에 하였던 설교에서 의인을 정의하길,
"의인이란 용서를 의미하는 또 하나의 명사이다. 즉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은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가납이 포합되어 있다. 우리를 위하여 지불된 값은 그리스도의 의와 보배로운 피이다. 좀더 자세히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그의 영혼을 주기까지 그가 받은 바의 모든 고난과 행하신 모든 공로이다. 의인의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지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평화와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으로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중의 즐거움이다."
라고 하였다.
죄인은 선행은총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한 후에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선물인 믿음으로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웨슬레는 그것을 설명하길 죄책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죄의 용서와 같은 말이며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께 수납되는데 필요하다 고 보았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지금 그를 믿는 죄인에게 이뤄지는 죄책과 형벌에서의 해방이요 그의 마음속에 형성된 그리스도로 인해 죄 전체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범죄함을 인해 자기 영혼을 다 쏟도록 행하시고 고통 당하신 모든 것이며 하나님이 아담 안에서 타락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화해하시고 죽음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회복시켜 주신 은혜이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거듭나서 흑암에서 광명한 빛으로, 잔악한 마귀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악마적 생각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마음으로 내적 변화가 일어나 그 결과 외적인 죄의 지배에서 구원되고 내적인 힘도 깨어져 신자가 더 이상 죄를 따를 필요가 없다.
또한 웨슬레는 의인되는 순간 성결이 시작되며 거듭나 위로부터 성령으로 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적 새로와짐과 보내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고 하여 칭의의 다른 측면으로 동시적 사건인 중생을 말하고 있다. 린드스트롬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단계는 의인부터이며 의인과 중생은 순간적으로 온다고 한다. 의인은 상대적 변화이고 신생은 참된 변화이다. 캐논은 이 의인교리가 웨슬레 신학의 기본교리인 것으로 이해하며 의인의 교리를 중시하여 의인 다음에 부수적으로 오는 것으로서의 중생을 언급한다. 그 외에도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죄인이 실제 의로와지기 시작하는 중생과 구분한다.
웨슬레는 의인이 실제 죄없는 사람이 된것이 아니고 그것은 성결 (성화)에서 이뤄지며, 의인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통하여 행하신 것이요, 성결은 하나님이 그 영을 우리 속에서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칭의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라지게 한다. 웨슬레는 의인의 조건은 믿음이며 그것으로 죄인이 하나님과관계개선은 되지만 실제 죄인이 성화된 것은 아님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관계적 성화는 의식적 성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의식적 성결은 구약적 의미의 성결로서 하나님께 바쳐진 인물이나 물체, 혹은 장소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접촉할 수 없는 분리의 뜻을 지닌 성결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의 성화는 참된 내적인 변화라고 하기보다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면에서의 성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진정한 변화와 하나님을 닮아감에 있어서는 이 단계에서 더욱 나아가야 한다. 믿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어진 그리스도인은 이제 내적이고도 실제적인 변화를 받아야 만 하는 것이다.
2. 초기 성화 (Initial Sanctification)
사람이 거듭날때 성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웨슬레의 견해인데 이를 흔히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그런데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는 사건으로 웨슬레는 중생과 양자 (adoption)됨을 말한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나 그 한사건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는 것이다. 의인은 단지 죄인을 의롭다고 객과적이고도 외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에 반하여 중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때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이다.
이와같이 의인과 중생은 동전의 앞됫면과 같아서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의인과 중생을 구분한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후에야 거둡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인은 죄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볍적인 무죄선언일 뿐이다. 실제로 의로워지는 내적, 영적변화는 중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순간 죄인 자신에게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는 의인이 앞서지만 시간적으로는 구분할 수 없고 동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중생은 생명의 탄생이란 점에서는 하나의 완전하고 독립된 사건이지만 성결의 관점에서는 시작이다. 웨슬레는 중생은 성화의 시작이요, 문이라고 했다. 중생은 성화의 첫단계,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초기의 성화라고 한다.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의로워지고 거듭나게 되며 초기의 성화를 경험하게 된다. 즉 죄에서 용서받으며 죄의 세력이 깨어지면 성결, 또는 완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초기의 성화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중생은 성결의 시작이다. 새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된자의 속에는 성결의 싹이 돋아오므로 거룩하게 될 요소는 가졌으나 속으로 새롭게 되어 가는데는 이제부터 시작한 것 뿐이고 아직 완성은 먼 거리에 있다. 이 점만은 모든 교히가 신앙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중생은 아직 사람의 속에 있는 더러움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내부에서 마음을 사주하여 범죄하게하던 부패를 막을 힘을 기를 뿐이다.
웨슬레는 중생 이전과 이후를 어린아이의 출생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열달이 되어 해산을 기다리는 아이와 그후 막 태어난 아이는 외모에서는 차이가 없다. 눈, 귀, 코, 입은 해산 전후가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다. 영적인 중생도 마찬가지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 듣고, 맛보게 된다.
웨슬레는 의인 사건과 동시적 사건인 논리적 순서로 보아 의인뒤에 온다고 본다.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죄를 사해 주시는 역사이고 중생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이다. 이 중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실때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때 저능하신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이다. 이러한 중생의 체험은 성결을 위해 영원한 구원과 이 세상 및 장차 올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 이와같은 중생은 성화의 일부분이며 성화의 문, 통로이다. 갓난아이가 성장 해야하듯 중생을 체험하면 그후부터 내적, 외적인 성화가 시작된다.
웨슬레는 이와같은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타락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영고 육이 같이 죽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본 것이다. 그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 대신 마귀의 형상을 본받아 교만과 자기 중심주의로 생활하게 되었다는 서이다. 그리하여 타락한 인간은 반드시 중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중생을 정의하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생명으로 도입하실 때에 영혼속에서 역사하시는 위대한 변화이다. 그때에 하나님은 영혼을 죄의 사망으로 부터 의의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영에 의해서 영혼 전면에서 되어지는 변화이며, 그때에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며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와 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중생의 성질을 하나님이 한 영혼에서 역사하시는 큰 변화라고 해석했는데 새로 거듭난 사람의 성질은 사랑, 겸손, 온유,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변하여 영과 육이 아울러 하나님께 계속적인 헌신을 드릴 수 있는 힘이 생기며 변화된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중생하지 못한 자는 이세상에서도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질투, 시기, 복수심, 그리고 원망으로 가득차 있어서 행복할 수 없으며 또한 기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중싱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현갑씨는 그의 책에서 이와같은 중생의 특징적 성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중생은 성령에 의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도덕적 변화이
다.
② 중생의 근본적 변화는 성령의 효력있는 작용에 의해서 되어진다.
③ 중생은 완벽한 역사로 그때문에 종류에 있어서도 완전한 것이다.
④ 중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⑤ 중생은 성결과 관련 되어진다.
⑥ 중생은 인간에게 하나님에 관한 개인적 지식을 간능케 해준다.
⑦ 중생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생명적 관계에 놓여 있
다.
⑧ 중생은 성령의 유능케 하시는 힘과 관련하고 있다.
웨슬레는 또한 중생이 영원한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며 동시에 성결의 필수 조건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은 사람이 처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처음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단계는 계속해서 성장과정을 통하여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중생은 성결의 필수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전진적 성화
루터는 역설하기를 기독교인은 의이인 동시에 되인 이므로 그의 사람을 지속적인 참회와 그의 외래적 의인 그리스도에게로 날마다 돌아가는 것을 특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용서의 선물에 의해서만 자기의 소유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기독교인은 칭의전에 회개가 있듯이 칭의 후에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있으며 이 회개를 등한히 하면 성결을 기대할 수도 없고 은혜안에서의 성장도 할 수 없다. 의인, 중생에서 온전한 성화까지의 과정을 점진적 성화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하여 성화에 이르지 못한 신자의 상태를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겸손하나 온전히 겸손하지 못하며 그의 겸손은 자만이 섞여 있다. 그는 온유하나 때로는 분노가 그의 온유를 부숴버린다......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신자의 회개는 하나의 내적 변화 곧 죄에서 거룩하여지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중생 전의 회개와 다른 올바른 회개로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것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성령의 역사로 우리속에 남아있는 죄를 깨다든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신이 죄에 대해 책임이 있고 무능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교회신조 제 9조에서 원죄를 언급하면서 이 본성의 부패성은 거듭난 사람에게도 남아있으며 이 신자의 죄는 내적인 죄, 죄된 성질, 의욕, 감정이라 한다. 신자는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부터 내, 외적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나 육욕, 악한 성질이 성령을 거스리고 있으므로 서로 대적하는 두 세력이 신자안에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의 회개는 중생한 사람들 속에 남아있는 육에 속한 마음, 악에로의 경향성, 타락하기 쉬운 마음 즉 성령을 거스리는 육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는 자기가 의인인 동시에 죄인임을 안다. 그러나 그는 그 인식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삶을 구세주에게 더욱 개방하여 그리스도와의 파손되지 않는 관계의 선물로서 외적 죄를 말소하고 그리스도의 현존의 빛으로서 내적 죄가 점차적으로 감소되며 그의 은총의 능력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와같이 구원은 선행은총에서 시작하여 회개시키는 깨닫는 은총에서 신앙의 단계 즉 확신의 은총으로 나아가게 된다.
웨슬레는 초기의 성화에 만족하지 말고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 온전한 성화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인 전에 회개가 있는 것과 같이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도 회개가 필연적으로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 회개는 의인에 선행하는 회개와 아주 다르기 때문에 "신자의 회개"라고도 하며 "올바르게 이해된 회개"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고집, 무신사상, 우상숭배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이며 악에로의 성벽, 타락하기 쉬운 마음, 아직 머물러 있어 성령에 거슬리는 육의 경향성에 대한 깨달음인 것이다. 즉 인간이 성화의 길을 걸으려고할 것 같으면 그는 의롭다함을 얻은 후에도 죄는 계속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한 회개가 있을 수 없으며 회개가 없는 한 인간은 완전히 성화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웨슬레는 "신자의 회개"란 설교에서 이 회개를 자만, 고집, 세상에 대한 사랑, 탐심, 태만과같은 "쓴 뿌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으며 또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성화에 이를 수 없고 전적으로 주님께서만 할 수 있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와같이 신자는 거듭난때부터 성결의 점진적 역사를 시작하며, 점진적 개념에 순간적 요소가 결합되어 종말론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은총중에 성장하는 일에 관해서 J. A. Wood목사는 다음가 같이 말하였는데 "기독교인의 완전은 은총에 있어서의 성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다른 무엇보다 빨리 성장한다. 이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진보를 배제하는 은총의 상태가 있다고 우리는 믿지 않는다. 사실인즉 영원히 가속도적으로 성장하기를 우리는 기대하는 바이다. 그것은 단지 중생한 심령 뿐만 아니라 온전히 성화된 심령에서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고와 소유한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불가불 전진해야 한다. 중생자나 성결한 자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이점에서 실패해 온 것이다. 죄 깊은 생활에서도 그렇지만 신앙생활에서 정지상태란 은 없다. 전진이 아니면 후퇴이다. 만일 사람에게 주신 빛과 의무를 따라 생활하고 있다면 은혜상태 여하를 막론하고 또 얼마나 많이 성령에 참예한바 있더라도 성장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의무를 등한히 한다면 지나간 날 얻은 은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후퇴도상에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Wood목사는 말하길 "성결은 은혜 중에서 성장함이 없으면 보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적인 생명 중에서 착실히 전진하므로써만 유지되어 질 수 있다. 성결을 획득하는 조건과 그것을 보존하는 조건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을 얻고 보존하는 조건은 영혼을 자라게 하며 성결을 원숙화하는 조건도 된다. 따라서 성결한 가운데 전진하며 장성하는 조건을 범하는 일은 곧 성결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라고 하며 계속해서 성장해야 됨을 강도하고 있다.
이와같이 점진적 성화의 과정은 신자의 성장의 과정이다. 이 기간에 신자는 영적인 싸움을 무수히 겪게 되며 승리와 패배를 교대로 겪게 될때가 많다. 유혹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의읮가 중요하며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잠 3:23)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적 신앙의 외적 증거요 열매로서 선행의 필수성과 중요성이 이때에 나타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성령으로 인해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으며 그가 죄에 대해 죽을수록 더욱 하나님을 향해 살게된다. 악의 모든 모양도 버리며 힘껏 사람들에게 선행하기를 열심하며 은혜로 나아간다. 또 책망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며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향략을 외면하면서 은혜에 계속 나간다. 그런 식으로 신자는 온전한 성결, 즉 모든 죄에서 완전한 자리로 진행하는 것이다.
V. 그리스도인의 완전(전적 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하는 문제만큼 예리하게 논쟁되어 온 것도 없으며 아마 그만큼 그릇되게 전달되며 오해되어 온것도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용어 자체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 있는한 완전해 질 수는 없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것은 기독자의 완전의 특징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주장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자가 완전의 특징이 바로 설명되고 이해 되어진다면 이런 오해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개념과 그 본질을 명확히 규정하며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말이 웨슬레가 처음 시도했던 말인가의 여부 및 그리스도인의의 완전의 성취와 그 유지, 그리고 그러한 완전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A. 완전의 개념과 본질
1. 완전에 대한 표현
완전은 구원의 주제이며 완성이다. 또한 구원론의 중심적 진리이다.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완전 혹은 성결을 의미하는 용어들은 실로 다양하다. 온전한 성화, 제 2의 축복, 완전, 순수한 사랑, 사랑, 완전한 사랑, 온유한 구원, 두번째의 변화, 기 자의 전체적인 구원 등이다.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표현하였던지 간에 이 역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구원, 혹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완전함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들이다.
그들은 각기 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① 기독자 완전 (Christian perfection) :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전함과 영적인 여러가지 은총에 대한 소유를 강조한다.
② 온전한 성화 (Perfect Sanctification) : 육의 마음, 또는 내주하는 죄를 포함하는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함 (cleansing)을 강조한다.
③ 온전한 구원 (Full Salvation)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 문제의 전부에 대하여 충분한 개결을 준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④ 온전한 사랑 (Perfect Love) : 전적으로 성화 (Sanctified)된 사람들의 도덕 생활에 대한 정신과 기질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아중심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헌신 및 모든 사람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을 내포한다.
⑤ 성령세례 (the Baptism with the H. S.) : 마음이 죄로부터 정결케 (purge)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케 되어지는 은혜로운 수단을 강조한다.
⑥ 제 2의 은혜 (Second Blessing) : 성결이 중생에 따라오는 제 2의 명확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는 요한 웨슬레에 의해서 쓰여진 말이다.
⑦ 성결 (Holiness) : 성결된 사람의 상태, 또는 상황에 특별히 관련되는 것으로 도덕적 영적으로 순결한 상태 혹은 모든 죄가 제거 되어지고 하나님의 형상과 영을 소유하고 있는 영혼의 완전한 건강상태를 강조하는 것이다. 성결은 "그리스도교 체계의 중심적 이념이며, 인간품성의 최고의 달성"으로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있어 성결 교리만큼 의견상 치이를 가진 주제는 없을 것이다.
2. 완전 (성결)의 정의
성결의 정의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자기의 신학사상과 그들의 교리에 따라서 여러가지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교파와 신학자들의 주장에 따라서 성결의 개념이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웨슬레는 완전에 대한 개념을 여러가지 다른 말로 표현했다. 다시 만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 완전한 구별, 완전 성화, 완전 구원, 제한되 완전, 성경적 완전, 완전한 사랑, 제 2의 변화, 제 2의 축복 그리고 거룩히라고 말한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말은 성결이라는 말에 대한 다른 용어이며 개념적으로는 두말이 꼭 같은 뜻을 지닌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본는 성결에 대한 견해는 완전한 자는 성결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신자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그는 마음속의 거룩이 곧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심령 상태이며 거룩하지 못한자는 주를 볼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할때 완전에 대한 표준이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높은 표준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상대적 완전인 것이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완전은 아니다.
웨슬레는 이 완전을 절대적 완전이나 천사적 완전과는 분명히 구분을 하면서 실수하거나 범죄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완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토마스 쿡은 말하길 완전은 기독교인의 경험을 말하는 단일 용어로서 성경에는 완전이라는 말을 138번이나 했으며 그 중 50이상은 은총의 역사로 인간의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1738년 전후에 내린 웨슬레의 완전의 정의는 인간이 하나님께 항복하는것과 복종하는 것이 완전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것은 마음의 내적인 복종이요, 말과 행동의 외적인 복종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동기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하는 사실이 그 특징이다. 완전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죄에서 정화되어 영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며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정의를 결정지은 세가지 견해는 아켐피스와 테일러와 로오에게 나타나는 견해에서 잘 표시된다. 아켈피스와 같이 테일러와 로오에게서도 카톨릭전통을 강조하는 경향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이상과 지향하려는 이상에서 특히 강한 경향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웨슬레에게 있어서의 완전은 의지의 순수, 그리스도의 모방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된다.
3. 완전의 본질
웨슬레는 완전의 본질을 여러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사랑을 들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랑의 완전이다 -
웨슬레는 완전의 본질을 온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응답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이유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랑을 주제로 하며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순수한 사랑이기 때문에 신자의 기질과 말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와같은 완전에 대한 웨슬레의 문답을 살펴보면,
문 :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 ?
답 : 나는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그완는 정반대적인 말을 해온 것이다. ...... 사람은 순전한 사랑으로 충만하면서도 여전히 과오를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 그러나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나올때 그런 과오는 엄밀히 말해서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오도 하나님의 엄격한 헤아림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속죄의 보혈이 필요하다.
이와같이 온전한 성화는 바로 온전한 사랑, 또는 순수한 사랑이며 이 사랑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칼빈의 강조점은 믿음에서의 완전에 있었다. 그러나 웨슬레는 온전한 구원은 사랑과 순종의 완전이라고 가르친다. 칼빈은 정적이며 웨슬레는 역동적이다. 사랑이 충만하면 그것을 방해할 것도 마음을 괴롭힐 것도 없고 오직 영원한 기쁨으로 모든 일에 감사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 같은 공포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채워질 때까지 지혜와 거룩과 행복속에서 계속적인 성장을 하면서 중단없는 깨달음, 사랑, 기쁨을 누리게 된다.
웨슬레는 성화의 본질인 사랑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자연인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태어나야 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계시된 것이다.
② 이 위에서부터 온 사랑 (그리스도 사건)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 속에 증거되며 우리는 외롭게 하는 신앙 (Justifying faith)의 열매로 이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③ 구속 (Atonement)과 의인 (Justification)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사랑의 법 (The law of Love)을 성취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④ 기독교인의 자유도 부정적, 소극적 의미에서는 죄책과 죄의 세력으로 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나 적극적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위한 자유가 된다. 또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마음의 태도, 즉 순수한 목적이어야 하므로 모든 기독교인의 자유는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⑤ 웨슬레는 사랑의 에큐메니칼적 성격을 강조한다. 사람을 향하신 하 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인 만큼 기독교인은 한 형제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⑥ 공동체적 사랑의 실천을 주장한다. 웨슬레가 보편적 사랑을 말하고 있음은 사실이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정도의 치이가 있는 3동심원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화의 진수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구원의 목적을 지향한 이와같은 발전에 적응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은 또한 최고의 가치이다. 교회의식, 외적인 행위, 내적인 성품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간 열정의 지상의 목적인 이 사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완전은 전가될 뿐 아니라 분여되는 것이다. 성화를 초래하는 신앙에 의해서 신자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을 경험한다 (롬 5:5 참조). 또 그 일로 인해서 마음이 정결해진다 (행 15:8-9 참조).
결론적으로 웨슬레는 전적 성화는 순수한 사랑 - 죄를 물리치면서 마음과 생활을 지배하는 사랑 - 그 이상도 아니며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설교중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것은 죄를 추방하는 사랑이다. 마음을 채우며 영혼의 전체 기능을 지배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마음의 전부를 지배하고 있을때 그 마음에 죄가 발붙일 곳이 있겠는가" 성 충만에 의한 사랑으로 온전하게 되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에 관한 웨슬레의 교리의 정수이다.
B. 완전의 근거
1. 성 서
웨슬레는 완전의 근거의 제 1차적 요소로서 성서를 들고 있다. 한 책의 사람이라고 말했던 웨슬레는 그의 성화론이 철저하게 성서적이라고 고백한다. "내가 언제 어디서 이 교리를 발견하였는지 될 수 있는대로 간단히 말하겠다. 나는 어떤 편견이나 욕망도 없이 신,구약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 그것을 발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의 신학은 철저하게 성서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시의 시대적 사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철저하게 성서적이기 때문이다. 1764년 웨슬레는 그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교리를 검토하면서 다음과 간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의미로 볼때 거룩한 자는 완전한 자이다. 완전한 성화를 위한 기도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요 17:23-26 ; 엡 3:14 이하 ; 살전 5:23). 만일 온전한 성화가 없다면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희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성화가 죽기전에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명령은 본질상 죽은자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자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는 그의 신학의 근거를 성서의 권위에 두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도 권위있는 것이 되었다.
웨슬레는 그의 기독자 완전의 교리의 형성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① 내가 기독자 완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725년이었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인 시기는 1730년 이었는데 그때에 내가 한 책의 사람이 되기 시작한 해였으며 비교적 성경외엔 어떤 책도 중시하지 않았던 때였다.
② 지금 내가 믿고 가르치는 교리가 그때의 그 교리와 똑같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적 혹은 외적 성결에 대하여 조금도 첨가시키지 말고 나는 38년전의 그것을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38년전에 가르쳐떤 내용을 수정없이 그대로 가르친다는 웨슬레의 강조점은 무엇인가 ? 그것은 그의 기독자 완전이 교리가 철저하게 성서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38년의 긴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고치지 않고 가감없이 가르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성서대로 증거하였고 성서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그에게 있는 것이 지적된다면 어떤 희생을 무릅 쓰고라도 성서대로 순종할 준비를 갖고 있었다.
웨슬레의 이같은 자세는 이신론이 성행하던 당시의 풍조를 뛰어넘어 그가 개혁자들의 성서관과 같은 맥락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평생 모든 권위에 앞서는 성서의 권위르 고수하였고 이와같은 그의 자세는 그의 일기, 편지, 신학, 또 그의 삶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2. 전 통
성결에 대한 관심은 성서와 교회사 속에서 찿아볼 수 있는데, 성결은 성경과 더불어 시작된다. 성결의 관심이 들어있지 않은 계시는 없다고 볼 수 있는데 구약 (출 3:4-5 ; 레 19:1-2 ; 시 98:3 ; 사 6:3 ; 겔 36:25 참조)에서나 신약 (마 5:8 ; 롬 6:6-11 ; 고전 13 ; 살전 5:23 ; 요일 4:17-18 참조)에서나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이 계신곳은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자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일관해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약속이 그리스도 승천 후 성령이 강림한 다음에는 이념적으로 사상적으로 분명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자가 스스로의 내적 사실을 보유할 수 있는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사도들이 성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힘과 능력과 힘과 능력과 기쁨에 충만하여 모든 박해와 조소를 이기고 요원의 불처럼 그 당시의 세계를 정복해 나갔다.
교회 교부시대를 살펴보면 교부들의 편지와 기도의 제목등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7C 후반부에 일어났던 교부학 부흥에서 산출된 새로운 번역판들을 통해 고대 기독교의 문헌들을 연구하던중 웨슬레는 초대교회의 사상과 경건 속에서 고전적 사고 유형과 특징있는 사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애굽인 마카리우스와 에브라엠 시러스였다. 이들은 웨슬레에게 이생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목표가 완전이며 헌신은 그 목표 달성의 방법임을 가르쳤다.
이들의 완전 개념은 상태라기 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완전을 말하는 것으로서 웨슬레에게 당대의 로마 카톨릭의 영적 신학에 나타난 정태적 완전주의와 그가 신비 저술가들이라고 개탄했던 저 개신교도들 및 카톨릭 교도들의 정태적 정숙주의와는 전혀 다른 영적 비젼을 제공했다. 이런 교부들의 관심뿐 아니라 후대에 내려오면서 수도원을 통해서,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을 통해 명맥을 이어오며 왜곡되고 변질되어 가기도 했으나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처음의 순수한 신앙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되찿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성결에 대한 관심을 갖고 구원의 문제, 완전의 문제 등을 다루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교리적 정리가 되어있지 못했다. 그러나 성결이 역사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이 체험을 계기로해서 믿는 이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웨슬레를 비롯하여 초대 감리교의 교역자들이 힘써 가르친 바이며 사도시대의 교회에서 체험한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 의인의 도리가 루터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듯이 성화의 도리도 웨슬레가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성서에 기록되어 잇으며 초대교회에 이어 전통교회에 있던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알맹이였다.
3. 체 험
웨슬레는 흔히 체험의 신학자라고 불리운다. 1746년 웨슬레는 '어린이를 위한 가르침'의 서문에서 어린이에게 성경읽기를 가르칠때 어린이들이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체험에 유의하라고 권고한다. 얼마나 많이 읽느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얼마나 잘 읽느냐에 관심을 두라...... 그들이 단지 읽는 것으로 끝난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내면적으로 소화시키도록 하라. 웨슬레의 이 진술은 그가 단지 성경을 읽는다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히려 성경이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체험되어 지느냐에 관심을 둔것을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웨슬레에게 있어서 체험은 그의 삶과 사상을 변화시킨 귀한 계기가 되었다. 웨슬레의 생애의 전환기였던 1738년의 올더스케이트의 체험은 웨슬레의 생애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이 체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폴. 훈은 웨슬레 신학의 경험적 성격을 특징 지으면서 "종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체험되어질때 참 종교다" (Religion is Real when God is experienced in a Saving Way)라고 하였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웨슬레는 체험을 통하여 비로서 그 말씀대로 살아있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체험되기 이전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말씀이었지만 체험한 후 그 말씀은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레에게 있어서 체험은 특별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체험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가 아니었고 구속적 체험이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종교적 체험은 천박한 감상적 체험주의가 아니라 고차원의 초월적 체험주의미며 성령이 인간의 마음속에 직접으로 증거하시는 것을 기초로 한 체험주의이다.
웨슬레 신학은 그때부터 새로운 입장에서 전개되어 나갔음을 본다. 즉 말로만 듣던 은총의 신학이 그의 신앙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긍정하게 뙨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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