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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자료1

웨슬레의 구원관이 현대선교에 끼친 영향1

웨슬레의 구원관이 현대선교에 끼친 영향  
http://cafe.naver.com/modernth/391  
이   동   명  
 
 목 차
 
I. 서   론  ..................................................  1
  A. 연구 목적   .............................................  1
  B. 연구 범위 및 방법   .....................................  3
  C. 중요 용어   .............................................  5
II. 양대 선교개념의 이해   ...................................  7
  A.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이해   ..............................  9
  B.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의 이해   ............................ 14
  C. 기독교와 타종교의 접촉점(Point of Contact)과 대화(Dialogue)
     에 관한 논의   .......................................... 18
III. 웨슬레(John Wesley)의 구원론의 구조   ................... 22
  A. 하나님의 은총    ........................................ 26
  B. 의인(Justification)   ................................... 30
  C. 성화(Sanctification)   .................................. 32
      1. 의인과 성화의 관계성   .............................. 34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 36
IV. 웨슬레의 구원론의 현대 선교전략적 의의   ................. 41
  A. 웨슬레 은총관의 현대 선교신학적 의의   .................. 42
  B. 웨슬레의 의인관의 현대 선교신학적 의의   ................ 47
  C. 웨슬레 성화관의 현대 선교신학적 의의   .................. 49
V. 결   론  .................................................. 55
*  참  고  문  헌  ........................................... 61
  . 서   론

A. 연구 목적
기독교 선교의 기원은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기원에까지 소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본격적인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았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은 선교의 사명이며, 동시에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다.  그러나 선교(mission)라는 단어는 성서적 용어가 아니다.  단지 성서는 하나님자신과 기독교회가 선교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교는 성서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확실히 이 세상은 불타고 있는 건물과 같다.   시간이 늦기전에 구조작업을 해야한다.    이 일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후 그의 재림의때까지 일어나는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교회의 일로서의 선교이다.  오순절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는 복음전파를 위한 기회와 도전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전래없는 선교의 위기를 당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주의, 보편주의, 세속주의등의 시대사상과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철학의 발흥 그리고 과거 기독교 선교의 부정적 측면과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 및 민족종교의 부활, 혹은 타종교의  적극적인 선교의 영향 때문이다.  이로인해 선교개념과 목적, 선교방법과 그 타당성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어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선교에 대한 열정을 상실케 하였고, 그 역동성을 상실케 하였다.
그러나 선교는 여전히 기독교인의 삶의 근본적 실체이며, 교회가 세계에 대하여 갖는 관계성에 대한 성서적, 전통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선교의 열정과 그 역동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에 대한 성서의 원초적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서재가 아닌 현장속에서 적극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또한 정당한 선교신학이 수립되어야 한다.
B. 연구 범위 및 방법
현대 선교신학의 혼란은 웨슬레의 신학에서 안정을 찾고 있다.
한편 웨슬레(John Wesley)는 선교적인 사람이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선교를 위해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사용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기독교인과 기독교회가 선교적 열정과 역동성을 상실하는 것을 경고했다.
나는 메쏘디스트(Methodist)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없는 종교의 형태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 남아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특히 웨슬레는 현대선교의 대표적 고민인 "신앙과 실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정당하게 결합하고 있다.
고독한 종교는 찾아볼 수 없다.   '거룩한 간부(姦婦)'라는 말이 복음과 양립할 수 없듯이 '거룩한 은자'라는 말도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 못한다.
웨슬레의 이러한 신앙과 실천의 종합이 정당한 이유는 그가 성서를 사랑했고, 성서적으로 살았으며, 성서적 신학을 지닌 '한책의 사람'(Homo Unius Libri)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확실한 체험으로부터 모든 선교사역을 스스로 실천한 선교사요, 설교자이었다.
특히 '선행은총(prevenient Grace), 의인(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로 정의되고, 구성되는 웨슬레의 구원관은 현대 선교에 있어서 구원의 '총체성'(Totality)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을 갖게 한다.
웨슬레의 선교적 의의에 대해 조종남교수는 "둘째, 최근에 이르러 웨슬레에 대한 관심과 그에따른 연구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가고 있다.   둘째 지난 1974년 7월 로쟌 세계 복음과대회의 발제 강연자의 대부분이 칼빈주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그 공동의 선언문은 웨슬레적 신학이었다.   셋째, 웨슬레의 선교운동이 이룩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그 영향이 너무나 놀랍게 혁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웨슬레는 그 자신의 회심 체험에서 시작하여 그 시대의 모든 영역에 걸쳐 선교운동을 실천하였고, 변화와 갱신운동을 성서의 권위아래서 일으킨 선교사였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의 책임의 영역을 강조하였으나, 하나님의 은총과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은총의 신학자였다.   인간의 무능을 통감하였으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회복된 인간성의 가치를 존중하였던 인간적인 신앙인이었으며, 여전히 모든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적 배경을 극복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따라서 웨슬레는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오직 성경만으로'(Lola Scriptura)의 개혁작들의 전통에 철저했던 복음 주의자이었다.
필자는 현대선교의 혼란이 '무엇이 선교인가?'에 대한 개념정립의 혼란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선교의 본질적 영역인 '복음화'(Evangelization)와 '인간화'(Humanization)의 그 '우선성'(priority)의 논쟁에 있다고 이해한다.   동시에 웨슬레의 구원론의 구조와 그의 신학속에 이러한 혼란을 진정시킬 해결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II 장 양대 선교개념의 비판에서는 반드시 그렇치는 않치만 현대 선교신학을 '복음주의 선교신학'(Evangelical Missiology)과 '에큐메니칼 선교신학'(Eccumenical Missiology)으로 양분하고, 그 특징과 그에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며, III 장 웨슬레의 구원의 구조에서는 웨슬레의 구원론의 중요이론인 '하나님의 은총, 복음적 신인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 의인(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의 교리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 IV 장 웨슬레의 구원관의 선교적 의의에 대해 고찰하고 자 한다.
C. 중요 용어
웨슬레의 인간이해에 나타나는 인간화(Humanization)의 가능성에 대해 : 웨슬레의 인간이해는 철저하게 "은총아래의 존재"로 파악된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레의 "인간화의 가능성"은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근거한 혹은 합리주의적 이성에 의한 인간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능성을 지닌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을 향한 낙관이다.
  I. 양대 선교개념 비판

예수의 위임명령을 수행하려는 열심은 원시 기독교회로 하여금 '왜'(Why) 혹은 '어떻게'(How)를 선교에 있어서 문제시 하지않게 했다.  세계내에서 자신과 교회의 존재자체를 선교적으로 이해하였고,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Proclamation)하며, 이방인을 설득(Persuasion)하여 교회 구성원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이 오순절이후 기독교를 세계적으로 확장케 하였다.  중세기에는 로마교회를 확장시키는 일을 선교의 최대의 목적으로 삼았으며,  종교개혁기에는 타락한 신자의 영성회복운동을 선교와 동일시하였다.  산업혁명이후에는 식민주의와 함께 자기교회이식운동이 곧 선교이었고, 1 세기에는 이교정복운동의 성격을 띠고 선교사업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19세기는 그 어느때보다도 기독교 선교활동이 활성화되었고, 수없이 많은 선교회들이 조직되었다.   현대 선교의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파를 타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회는 초교파적 각종 선교대회를 개최하였고, 연합된 힘으로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ion)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선교신학을 수립하고자하는 노력이 경주되었고, 이로인해 전통적 선교관이 비판되고 연구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보쉬(David J. Bosch)는 "19세기가 선교의 위대한 세기였다면 20세기는 초교파적인 세기이다"라고고 평가한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비 기독교적인 여러종교의 부흥이 있었고,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의 변화는 교회로 하여금 감히 손댈 수없는 선교과업을 갖게 하였다.   특히 주 선교대상지였던 제 3세계의 성황은 선교의 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비인간화, 세속화, 다원화'의 시대상황과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은 서구 선교사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러한 20세기 후반의 세계상황은 고전적 선교의 모든 영역에 대한 비판과 아울어 현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의 정립을 요청하게 하였다.   이 세계적, 신학적, 선교적 상황은 다양한 형태로 교회의 특징을 표현케 하였다.   전통적 선교신학에 좀더 집중하려는 자들과 모든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부류와 양자를 성서적으로 비판하고 종합하려는 부류로 그 모습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급변하는 세계속에서 무엇이 '진정한 의미의 선교' 인지를 밝히고자하는 노력이었다.
필자는 교회선교의 여러운동을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과 '에큐메니칼주의자들'(Eccumenicals)로 양분하고자한다.   저자는 고전적 선교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않고 단지 그 신학적 오류와 선교사업의 모순전등을 반성, 비판, 수정, 보완 하고자 하며, 후자는 모든 전통적 신학체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정립하고, 그에따른 선교사업을 실천하고자 한다.   본장에서 필자는 그 양진영의 선교신학을 소개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A. 복음주의 선교신학 비판
복음주의자들은 보에티우스(Voetius)가 제시한 '이방인의 회심, 교회의 설립, 하나님의 영광'을 기독교 선교의 삼중목적으로 삼는다.   강조점은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에 있다.   따라서 복음은 "삶의 길이 아니라, 신앙의 주제"이다.  죄란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그 죄가 인간의 가장 심한 고통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이 고통에서 벗어나 내세의 생명과 영광을 얻는 것이다.   수직적, 영적,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 강조된다.
전통적으로 구원의 의미가 축소되어 나타났다.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이  관심이었다.   따라서 선교의 범위가 축소되었다.   복음의 사회성과 구원의 총체성이 등한히 여겨졌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와 사회행동은 이단시되거나, 수단화되었다.   때로는 선택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의 전인성(全人性)은 경시되었고, 언제나 '영성'(spirituality)에 종속되어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복음주의자들의 이원론(Dualism)을 반영한다.   영혼과 육체,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개인적인것과 사회적인것, 성(聖)과 속(俗)을 분리하여, 언제나 후자는 전자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세계와 육체를 경멸하며, 세계의 갱신보다는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원한다.   신자의 거룩성이란 세속적인 모든 것으로 부터의 분리와 도피를 의미하였다.   또한 어떠한 형태의 현재적 치유와 갱신보다는 미래적 회복에 관심을 두고, 인간의 전인적(全人的) 온전성과 그가 살고있는 사회의 성결과 변화는 언제나 제 2차적인 중요성을 가질뿐이다.
결국 교회란 세상에서 격리된 신자의 요새와 방파제로서 인정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의 근원이며, 구원의 방법을 가르치고 분배하는 곳이며, 진리의 소유자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장적 기능만을 강조하게 되었고, 세례, 학습, 기도회, 예배등이 교회의 일차적인 활동이 되었다.   이로인해 교회는 점점 세계속에서 그 '신뢰성'을 상실하였다.   복음의 '실천'보다는 '방어'에 치중함으로서 그 가치를 '값싸게'하였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의미없는 종교적 몸짓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로인해 교회는 '기관화'되고, 그 존재의 '역동성'을 상실했다.   또한 19세기를 '선교의 위대한 세기'로 부르면서도 '제국주의적 문화침략', 혹은 '서구 문화의 이식활동'으로 선교가 전락하였다는 비판을 듣게된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전도와 교육을 통해 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 쓸어버리려 했고, 모든 사람을 교회의 울타리로 끌어들어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사'(救援史)를 신성시한다.   '교회사'(敎會史)는 곧 '선교사'(宣敎史)와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세계사'(世界史)는 '구원사'(救援史)와 분리되며, 양자는 언제나 평행선을 긋고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성향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라는 시간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오직 '종말'이라는 미래적 시간이 현재를 흡수하여 존재케된다.   이로인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現在性)은 부정되거나,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약화된다.   그러나 창조주와 구속주는 동일한 존재이다.  양자는 동일한 존재의 이 세계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구분되어 나타나는 두가지 특징이다.   구속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세계사속에서 동일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선교는 창세부터 시작되어 종말을 지향하고 있으며, 구원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런데 시작과 종말사이의 현재속에서 기독교 선교는 수행되고 있고, 이 현재는 미래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또한 미래와 종말은 현재의 인간경험에서 경험되는 것이어야 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실현된 종말'과 '실현될 종말' 사이의 긴장이며, 이 양자의 경계선에 기독교회는 서있다.
따라서 교회역시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와 '장차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실체이다.   이 말은 교회가 '현재'에 참여하는 동시에 '미래'를 지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구속사에 참여하는 동시에 세계사에 참여해야 한다.   세계사 속에서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본보기로 존재하며, 이런의미에서 교회존재의 의미는 '선교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종합은 이루어진다.   즉 교회는 항상 그리고 동시에 세계로부터 나오라고 부름을 받으며, 또 세계속으로 가라고 보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와 성례전'을 통해 선교를 수행케하며, 선교는 예배와 공동체를 인도해 주게된다.   또한 교회는 세계내에서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리할때 교회는 '제사장직'과 '예언자직'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교회가 종말과 현재의 긴장을 유지해야하는 당위성속에 그리스도인 개개인과 인간의 삶의 총체성을 보게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동시에 '장래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한 개인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의 경계선에 살고있다.   결코 개인의 현재성이 미래에 흡수되거나 제거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현존은 선교적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는그의 종말적 참여와 함께 긍정 되어야 하며 권장되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부름에 책임있게 응답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부름은 복음(Good News)을 통한 부름이다.   이 복음은 결국 한 인간을 현재와 미래속으로 동시에 참여케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구원의 의미이다.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롬 1:16)은 증거(Martyria)되어야 한다.  그런대 이 증거(Martyria)는 성도의 교제(Koinonia)를 축으로 하여 복음의 선포(Kerygma)와 세계를 향한 봉사(Diakonia)로 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증거(Martyria)는 교제(Koinonia), 선포(Kerygma), 봉사(Diakonia)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wholistic) 것이다.   비록 이 셋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 분리될 수없는 것이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면서 그 독자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것이든 다른것보다 우등(Superior)하지도, 열등(Inferior)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선교의 어떤 한 측면, 또는 다른측면을, 그것이 해방이건 개발, 인간화, 복음화이건 영구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다.   이 모든 부분이 우리에게 맡겨진 선교에 없어서는 안되는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서로를 대립한다면, 그 진상을보이는 것은 비웃음을 사지않고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신앙의 대상인 동시에 신앙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계속에 흡수되지 않으면서 세계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독점하지 않으면서 세계와의 정당한 관계를 상실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가 유일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지녔듯이 현대 세계속의 그리스도인도 세계와는 구별되되 분리되지는 않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의식적 사회참여를 동시에 수행하는 '선교의 포괄성'이다.   만일 기독교 선교가 이러한 포괄성을 상실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계속에서 그 신뢰성과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며, 이로인해 무신론적 과학기술과 사회혁명이 기독교 선교의 영역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B.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비판
복음주의자들 - 엄밀한 의미에서 고전적 선교신학자들 - 에 이원론적 세계관과 비역사적 현실관등에 대한 반발과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선교신학을 요구하였다.   또한 비슷한 입장의 학자들과 교회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연합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재개념과 운동'의 선두에는 '세계교회 협의회'를 필두로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 있다.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낙관주의가 배경이 되어, 양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가치와 뜻보다 우위에 놓던지, 혹은 신률(神律)을 인률(人律)과 자연법(自然法)에 대하여 상대화(相對化)시킨다.  따라서 인간의 인간답게 사는 사회의 건설과 인간본유의 권리를 함향케 하는 "인간화"(Humanization)가 선교의 근본적인 목적이된다.  다시말하면 "정의롭고, 승인할 수 있는, 참여하는 사회"를 건설하기위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세계질서를 일으키고, 확립하는 모든 행위가 곧 선교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되었다.  또한 "새로운 인간성"(Nw Humanity)을 구현하기 위해 모든 인간의 문제, 즉 모든 압제, 착취, 소외, 가난, 질병, 무지등을 제거하는 행위가 선교의 목적이 되었다.  따라서 복음이란 "신앙의 주제가 아닌 삶의 길"로서만 그 의미를 갖게 되었고, 죄의 의미는 '인간과 사회구조자체'로부터 파생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원이란 "착취로부터 경제적 정의로, 정치적 압제에서 인간 존업성으로, 소외에서 단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를 뜻하였고, 이구원을 이루기 위한 모든 혁명과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이 사회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구현하기위한 모든 행위와 그 의미가 '수평적으로 재 개념화' 되었다.
모든 변화의 수단이 인간의 손안에 있고, 따라서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자가 되어 사회혁명에 참여해야만 한다.   이제 "성서적 신앙의 범주들은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옷을 벗어버리게"되었다.  복음주의자들과 성서의 주장인 복음화는 정치적 활동으로 흡수되며, 구원은 사회정의로 통합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 스스로의 택함과 결단인 '회심'(Conversion)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인류의 한 식구가 이미된 모든 인류로 하여금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일"이 교회의 임무가 되었다.  이것이 에큐메니칼 신학의 구원론으로서 "만인 구원설"(Universalism)이다.   이러므로 "세계는 아직도 화해해야 할 세계로 보고 그 세계안에서 아직도 선교활동을 수행하려고 하는" 교회와 선교는 세계에서 고립되었다.   교회가 세계속에 흡수된 것이다.   동시에 '구원사'가 '세계사'속에 흡수된 것이다.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화하여 '장차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제거하였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은 실존적 인간의 '한계성'과 불완전성을 무시하고 이 땅위에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무신론적 유토피아 건설'의 환상을 지닌 '인본주의 신학'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하나님의 개념속에 '심판주'하나님이 흡수되어 성서적 하나님의 전체성을 축소시켰다.   성서가 말하는 '미래적 종말'이 '현재'속으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선교의 의미란 실현된 종말속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뜻하게 되었다.   와그너(Peter Wagner)교수는 현대 선교신학의 에큐메니칼 신학적 흐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 요약하고 성서적인 조명을 통해 재정립될 필요성을 강조했다.
  ① 권위론 - 성경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② 인간론 - 인간의 죄를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한다.
  ③ 기독론 - 다른 종교에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의 상대적인 표현으로, 그 특수성을 갖지 못한다.
  ④ 구원론 - 구속을 사회, 문화적 발전으로 이해하며, 과도한 은혜에 근거한 '만인 구원설'(Universalism)이 강조된다.
  ⑤ 화해론 - 수평적 화해가 강조된다.
  ⑥ 교회론 - 교회는 세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⑦ 선교론 - 교회가 하는 모든일이 선교가 된다.
  ⑧ 전도론 - 기독자 현존(presence)과 사회봉사가 전도이며 개인구원 보다는 사회구원을 선교의 목적으로 삼게되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신학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주장과 복음주의 신학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본래의 연합목적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야 고유의 선교적 대 명제인 세계복음화를 달성할 수 있다.   그 관심을 세계에서 교회로,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바꾸어야하며, 양자의 균형을 잃치 않아야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선교는 "하나님의 일"(Missio Dei)이기 때문이다.
C. 기독교와  타종교의  접촉점(Point of Contact) 및 대화(Dialogue)에
   관한 논의
본 논문의 전체적인 흐름의 일관성을 위해 이제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제인 기독교와 타종교간의 접촉과 대화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대의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적 상황하에서 언제나 타종교와의 만남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 선교는 그 '유일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선교의 '효율성'의 증대를 위해 '대화'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선교는 언제나 타문화권 속에서 수행된다.   그런데 그 문화의 중심에는 그들 고유의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는 언제나 타종교와 접촉한다.   이때 던져지는 질문은 "타종교와 기독교의 접촉가능성은 있는가 "라는 것이며, 있다면 "그 한계와 범위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하여 첫째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절대적인 태도로서 타종교를 거짓것으로 거부해 버림으로서 어떠한 대화의 가능성도 배제된다.   초대교회부터 19세기까지 서구 기독교회는 이와같이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해왔다.  바르트(K. Barth)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일반은총 아래있는 인류는 적어도 최소한의 접촉점을 지니고 있다.   사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는 비성서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 우월주의에서 나온 사고이다.
둘째 기독교회는 타종교에 대하여 절충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온 부류가 있다.   타종교를 배척하지는 않으나 기독교보다는 열등하게 보고, 또한 기독교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 종교이다.   타종교는 여전히 기독교의 정복의 대상이다.   이 입장은 '배타주의'보다는 부드러워 보이나 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언제나 '배타주의'로 회귀한다.
셋째 상대주의적 자세를 취해왔다.   즉 모든 종교의 궁극적 실재와 목적은 동일하나 신앙방법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절대적 상대주의'적 입장이다.   아무리 모든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한다 하여도 그것은 복음의 유일성을 포기하지않는 "상대적 상대주의"이지, 기독교의 본질을 포기하는 "절대적 상대주의"는 결코 아니다.
네째 복음주의자들의 견해로서 "대화적 자세"를 기독교회는 견지해왔다.  이는 복음의 유일성을 포기하지 않은채 타종교와의 접촉의 가능성과 대화의 가능성을 인전하는 "상대적 상대주의"의 입장이다.   대화의 내용을 그리스도로 삼고 타종교인을 그리스도에게로 복종시키기 위해 그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야 보다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종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복적으로하는 대화는 없을 수는 없지만 전도 그 자체는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로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개인적으로와서 하나님과 화목함을  얻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타종교의 신자를 단지 비 그리스도인으로 보지않고,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거나, 전도의 의미를 "비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이니 되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종교에 있어서 충실한 종교인이 되게하는 것"으로왜곡하는 어떠한 혼합주의적 사고도 배척되어야 한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그 타당성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신의식', '화', '간의 필요'(needs), 인간의 공통관심'(Common Interests)등을그 대화를 위한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 삼아 궁극적으로 복음을 통해 개종시키는 것이 대화의 의미이다.   즉 접촉점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은 없다.   오직 복음만이 그 능력을 소유한다.   또한 대화를 위한 대화가 아닌 비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키고, 그 개종의 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화가 긍정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어느정도의 지식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이것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또한 여하한 형태의 혼합주의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념을 통해서든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뜻에서 진행되는 대화(Dialogue)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거부한다.
타종교안에 기독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접촉점은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과의 대화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이 접촉점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접촉점과 대화자체가 복음이 되거나, 구원의 능력이 되지는 못한다.   언제나 복음의 유일성과 보편성,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은 균형있게,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II. 웨슬레(John Wesley)의
         구원론의 구조

웨슬레시대는 근대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의 발생에 의해 물질생활이 전례없이 풍요하였다.   정치혁명, 신대륙의 발견, 중상주의의 영향으로 급진적, 비판적, 실험적 사고가 발달하였고, 이로인해 기존의 전통사고는 도전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물질적, 도덕적으로 진보한다는 신념이 싹텄고, 이로인해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상대주의적 사고가 발달하였다.   또한 주지주의, 도덕주의, 신비주의등을 시대적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18세기의 영국교회는 칼빈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계몽정신은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책임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하였다.   이신론(Deism)은 창조주와 심판주를 분리하게 하였고, 어떠한 초월적인 힘이나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   캐논(W. Cannon)은 웨슬레 당시의 이신론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7세기와 18세기 종교가들은 ①계시와 이성을 조화하기 시작했다.   ②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가능성과 전통적 초자연주의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며, ③ 마침내 신앙을 이성에 예속시키는 일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영국교회는 교인을 지도함에 있어서 성례전을 강조하였다.   성례전을 구원의 중요한 선행으로 여겨졌다.  교회의 성직매매와 교역자의 윤리적 타락이 교회의 세계에 대한 신뢰성을 상실케 하였다.   일반대중의 무지와 빈곤은 부도덕한 사회를 만들고 있었고, 노예매매, 음란, 혹세, 창기, 폭행등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웨슬레는 성장했기 때문에 초기의 그의 신앙과 신학은 공교회적인 경향이 강했으나, 1738년도의 올더스게잇 회심이후 복음주의적 신앙과 신학을 지니게 되었다.   웨슬레 신학의 특징은 그가 이신론자들에게 던진 세가지 질문과 명제속에 잘 나타나 있다.
  ①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
  ② 참되고 순수한 기독교란 무엇인가 ?
  ③ 기독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가장 확실하고, 알기쉬운 증거는 무엇인가 ?
이러한 명제는 역사적 기독교의 진리성을 순수이성에 의해 결정하려는 이신론자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체험에 의해 확인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던 웨슬레의 신학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의 신앙체험은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회의 구심적 영역안에서 일어나는 한 개별적 사실로서의 종교경험이며, 이 종교경험을 웨슬레가 신학의 자료로 사용함으로써 그는 사색적, 철학적, 인본주의적 종교를 극복하였다.
웨슬레신학의 또다른 특징은 '신앙과 실천'의 종합이다.  웨슬레는 신앙의 본질을 실천적인 삶속에서 찾으려했다.   또한 실천의 동기와 원리를 하나님을 향한 신앙속에 두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말과 행동, 이성과 실천, 성서와 체험등을 하나로 연결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웨슬레신학의 특징은 그의 찬송시집의 서문에 잘 나타난다.
고독한 종교는 찾아볼 수 없다.   '거룩한 간부'라는 말이 복음과 양립할 수 없듯이 '거룩한 은자'라는 말도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 못한다.   사회적 성결이외에 다른 거룩함은 없다.
따라서 웨슬레의 '성결'사상은 복음의 현재적 실천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복음과 구원의 현재성, 객관성이 그 미래성 주관성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윤리적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레 신학의 최대의 강점은, 또한 웨슬레 자신의 삶의 특징은 '선교적'이라는데 있다.   자신의 회심체험을 기반으로하여 그는 복음과 실천을 창의적으로 종합하였고, 그 복음의 진리됨을 힘을 다해 전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일도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죄인을  데려와  회게하게 하는 일에 자신이 쓰여질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했다.   또한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잃어버린 "꼅데기 뿐인 교회"를 경계하였다.  이러한 웨슬레 신학의 선교적 의의에 대해 조종남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첫째, 최근에 이르러 웨슬레에 대한 관심과 그에따른 연구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가고있다.
둘째, 지난 1974년 7월 스위스 로쟌에서 있었던 세계복음화대회의 신학적 성격이, 참석자들과 발제자들의 신학적 배경과는 달리 웨슬레 신학적 성격을 띄었다.
세째, 웨슬레의 선교운동이 이룩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 자체가 너무도 놀랍게도 혁명적인 것이었다.
웨슬레 신학은 현대에 있어서, 특히 현대 선교에 있어서 재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웨슬레신학은 위에서 밝힌 몇가지 특징만으로도 현대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웨슬레 신학의 이러한 특징은 특별히 그의 구원론속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장에서는 그의 구원론의 여러 중요신학을 기술하고자 한다.
A. 하나님의 은총
웨슬레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에 의해 창조된 죄없는 존재였음을 긍정한다.  그래서 원초적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 곧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다 어느 피조물 보다도 뛰어난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림으로서 본래 지녔던 원의(原義)를 상실하였다.   이로인해 인간은 "많은 악덕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후의 모든 실존적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악덕을 지닌 타락한 존재이며, 죄책과 형벌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지녔던 자유의지까지 상실한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구원에 이를만한 어떠한 가능성도 다 상실하였고, 위로부터의 도움 곧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웨슬레는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하나님의 은총"(Grace)이라는 개혁자들의 전통위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이모든 실존적 인간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전 삶에 역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은총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구원의 과정전체에 나타난다.   의인(Justification)이전의 모든 실존적 인간에게 역사하는 "선행은총"(Prevenient Grace), 실존적 인간의 죄책을 제거하는 "의인은총"(Justifying Grace), 의인된 그리스도인의 부패성을 이기게하는 "성화은총"(Sanctifying Grace), 그리고 인간의 모든 허약성과 제약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영화은총"(Glorifying Grace)은 웨슬레의 은총개념의 구조가 인간의 전생애와 관련되어 있고, 특히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도 긴밀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웨슬레의 은총관의 특징은 선행은총에 있다.   타락한 인류전체에게 공통으로 역사하고 있는 은총, 즉 의인(Justification)이전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받고 있는 은총이 선행은총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연적 인간으로하여금 그 원죄의 죄책에서 벗어나게하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다.   인간은 이 선행은총에 의해 상실했던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부분적(部分的)으로 회복되었다.   따라서 실존적 인간은 모든 하나님의 선행은총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고,(We can Work) 또한 응답해야만 하는(We must Work) 책임적 존재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의 초청에 응답할 수 있기 때문에 회개하며, 믿어야만 한다.   결국 인간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지 않기때문이다.  웨슬레의 구원론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주도되나,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선한 기쁨에 의해 그대 안에서 뜻하시고(will) 행하시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대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그대는 역사해야만 한다 (빌 2:12-13)
이러한 웨슬레의 은총관은 복음에 있어서 신.인 교호작용의 신비를 해결한다.   '은총과 자유의지', '율법과 복음', '신앙과 신천'등이 이 선행은총의 교리안에서 종합되고 발전되고 있다.   이에대해 스타키(L. M. Starkey)는  "복음적 신인 협동설"(Evangelical Synergism)이라고  불렀다.
한편 이 선행은총은 예수의 구속사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모든 실존인간의 오성과 자유 의지의 힘을 다시 새롭게 하였고, 이로인해 인간 경험속의 도덕생활과 그 윤리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웨슬레의 선행은총론은 인간의 심리적, 도덕적 행동을 가능케하며, 하나님을 예비적으로 발견함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되게한다.   이렇게볼때 웨슬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이란 어떠헌 법적인 선언 이상의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전인구원(全人救援)의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역사는 온 세계안에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하여금 지금 여기서 자진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갖기를 원하신다는 그 사실은 기독자의 실존적 책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영적, 윤리적 삶의 갱신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힌슨(Leon O. Hynson)은 "웨슬레는 세계를 긍정하고 있으며, 인간화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웨슬레의 윤리는 법의 구조에 있어서 ...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며, 우주안에서 갖는 자유와 책임의 특징을 지닌 약속의 윤리"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웨슬레의 세계와 인간에 대한 긍정과 낙관은 양자의 본래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양자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한다.   따라서 세계자체에 목적을 부여하고, 그것이 본래부터 구원의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자연신론은 웨슬레에 의해 배격된다.  동시에 인간 자체의 능력을 낙관하는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역시 배격된다.   웨슬레의 세계와 인간의 낙관주의는 본질적으로 은총의 낙관주의이다.   특별히 인간의 책임성의 강조와 하나님과의 상호작용의 가능성 및 당위성은 모든 정적주의나 신비주의를 극복한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능력이 회복되어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며, 부분적인 것이기때문에 인한 것이며,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선행은총외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또다른 은총을 요구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의롭게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B. 의 인 (Justification)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에 의해 부분적이지만 하나님을 발견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아직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구원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불충분한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이 구원에 충분히 이르도록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깨닫게 하는 은총'(Convincing Grace)이며, '의인케하는 은총'(Justifying Grace)이다.   이 은총에 응답하는 자만이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 받아 들여진다.   이때 '의인'(Justification)이란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을 의미한다.  웨슬레는 이 의인(義人)의 조건으로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를 믿는 참되고도 산 믿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선행적으로 받아 원죄의 모든 죄책에서 벗어나게된 실존적 인간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총'(Convincing Grace)에 의해 자신의 죄와 죄인됨을 깨닫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를 하게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과 능력을 확신하고 자신을 그에게 맞기도록 신뢰성을 갖게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행은총에 의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고, 행한다 하여도 그 선행은 결국 인간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이... 행위에 의해 의인될 수 없으며...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의는) 향유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의인의 필수조건 입니다... (롬 3:28)
이러한 '오직 믿음'만으로의 구원은 1738년의 올더스케잍 사건이후에 형성된 교리이다.   올더스케잍 회심체험 이전에 그의 구원관은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보는 카톨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모든 봉사와 사역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의무감과 자아탐구의 관심이 그의 행위의 동기였다.   그러나 회심체험 이후 그의 봉사와 선행의 동기는 변했다.   구원을 받기위한 자의식적 행위가 아닌, 구원을 받은 존재의 감사와 사랑의 자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사랑을 낳았고, 이 믿음에서 성숙한 사랑이 선행을 하게 되었다.   즉 선행이 구원에 이르는 조건은 될 수는 없지만, 믿음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사랑과 선행'의 삶이다.
이러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웨슬레 구원관의 현재적 최종목적이다.   사랑에 의한 선행은 의인속에 통합되며, 의인도 그것이 출발시켜놓은 모든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존립하지 않는다.  의롭게하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내가 책임질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레의 의인관 속에는 '믿음'과 '선행'의 창조적 긴장이 있다.   양자가 분리되지도, 흡수.통합되지도 않고 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믿음에 의한 의인을 설교하는 이보다 더 나아가 믿음의 온갖 열매와 보편적인 거룩함을 역설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선포하지 않는 사람이며 결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아니다.
결국 웨슬레의 의인관에서는 "첫째, 객관적 은총(forensic Grace)만을 강조하여 내세를 바라보는 모라비안 교도의 정적 주의와 루터교적 신비주의가 극복되며, 둘째, 실제로 공동체와 은총의 수단을 등한히 하고 인간의 내적인 빛만을 바라보는 그의 스승 로우(William Law)의 '합리주의적 신비주의'가 극복된다".  따라서 웨슬레의 의인관은 복음의 총체성(Totality)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의 의인관은 기독교의 전체 범주속에서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현대의 사변화된 신학과 기관화된 교회속에서 그 생명력과 사회적 신뢰성을 회복시켜주는 통찰있는 지식이 될 것이다.
C. 성 화 (Sanctification)
웨슬레의 구원은 '현재적 구원'과 '미래적 구원'으로 구분된다.   의인과 성화는 현재적 구원이며, 영화(Glorification)는 미래적 구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구원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동시에 강조되며, 또한 양자가 서로에게 통합되지 않고 그 적절한 관계를 유기적으로 맺어가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사건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해 완성될 뿐이다.   의인과 성화의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이 응답해야 할 것이 요청된 영역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 응답한 기독교인과 기독교회는 의인과 성화의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현재적 구원에 있어서 의인과 성화는 서로를 배척하거나 어느 하나로 흡수되지 않는다.   자기의 영역을 지키면서 서로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또한 현재라는 시간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양자는 충분히 구별된다.
그들 (영국교회 성직자들)은 의인을 성화와 동일한 것, 또는 의인을 성화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한다.   나는(웨슬레 자신) 의인은 성화와 완전히 구별되는 것으로 믿으며, 또 성화  의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믿는다.
웨슬레는 불(Bull)감독이 그의 저서 [사도적 조화] (Harmonica Apostolica)에서 "최초의의인과 최종적 의인을 구별하고서, 내적.외적인 선행이 전자의 조건은 되지않으나 후자의 조건은 된다."는 진술에 동의한다.  그러므로 웨슬레에게 있어서 의인과 성화는 충분히 구분(Distinction)되나 양자가 분리(Separation)되지는 않는다.   양자는 정당한 자리에 놓여져야 하며, 동시에 양자의 정당한 관계가 긍정되어야 한다.  본장은 웨슬레의 성화를 의인과 관계하여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1. 의인(Justification)과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성
의인과 동시사건으로서 신생(New Born)의 교리는 웨슬레의 의인과 성화간의 차이설명을 위해 중요하다.   의인의 사건이 법률적 의미를 지니는 반면, 신생은 윤리적 의미를 지니며, 의인이 자범죄의 죄책에서 해방되는 것인 반면, 신생은 자범죄의 부패성을 이기는 것이다.   따라서 신생은 성화의 단계에 있어서 초기에 속한다.   특히 신생의 표적인 "믿음, 사랑, 소망"은 웨슬레의 구원신화의 확대된 의미를 보게한다.   즉 웨슬레의 구원의 구조가 법률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며,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내면적인 동시에 외면적이라는 이중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인과 성화는 구분된다.   의인이 우리를 위해(for)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반면에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한 의인의 사건은 순간적이지만, 성화는 의인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과정에 걸쳐 계속된다.   이러한 양자간의 차이에 대해 린드스트롬 (Lindstr m)은 "의인은 본질적으로 객관적인 변화이며, 죄로부터의 구원을 포함하지만, 성화는 주관적인 변화요, 인간 자신의 현실적인 변화이며, 죄의 권세와 그 뿌리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비교한다.
웨슬레의 구원의 구조는 확실하게 분화되어 나타난다.   또한 구원의 의미가 총체적인 동시에 일련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점진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대해 러넌(D. Luynyo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웨슬레가 '최종적 의인'이라는 말을 사용할때는 처음의인과 다른 기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는 성화의 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위한 유일한 근거로 남는다.   새로운 점은 의인의 본래적인 목표, 혹은 목적(Telos)의 수정이다.   의인은 더이상 일차적으로 천국(내세)을 지향하지 않는다.   방향이 역전된 것이다.   천국은 이땅에로 끌어 내려지는데, 유토피아적 이거나 휴머니즘(Humanism)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의인이 성화를 통해 이 세상의 삶의 재생을 위한 하부조직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끌어내려 진다.   따라서 책임의 문제가 의인으로 끝날 수는 없다.   그이상 책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의인을 종말과 동등시하는 것이며, 역사를 전락시켜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은 역사를 정화하는 것으로서 마지막날에 설 수 없는 사회나 개인적인 삶의 요소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의인은 의인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것속에 흡수되고 통합되는 것이다.   의인은 그것이 출발시켜 놓은 역사가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 웨슬레의 의인과 성화의 관계성을 설명한다.   결국 의인은 성화의 근본적인 기초이며, 성화를 이루는 힘의 근원이다.   성화는 의인의 목적이며, 의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Life Style)이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이란 영적인 동시에 육체적, 정신적인 것이며,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웨슬레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
   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의인의 조건으로 회개와 믿음을 웨슬레는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믿음은 성화의 조건이기도 한다.
나는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난 우리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것과 같이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계속증거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성화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이 유일한 조건이며, 또 성화를 위해  충분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믿으믄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을 통해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실제적인 힘을 지닌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따라서 성화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 사랑은 완전한 사랑을 향해 성화를 이루어가며, 동시에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웨슬레의 성화론의 절정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있다.   그것은 종교자체이며 복음의 목적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의인에 그 뿌리를 둔다.   언제나 이웃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전제로 할때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웨슬레의 성화론이 관게의 수평성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수직적 관계를 상실하지 않고 종합되고 있다.
믿음은 ... 거룩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수단이다.   본래 인간은 거룩한 사랑속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비록 믿음 그 자체는 가치가 없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의 법을 다시 새롭게 수립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만든다.
이렇게 볼때 웨슬레에게 있어서 '믿음, 사랑, 성결'은 하나이다.   "성결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범위는 단순히 영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좀더 포괄적으로 규정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통해 구체적으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믿음자체, 곧 그리스도인의 믿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자의 믿음, 하나님을 믿는 활동적인 믿음만이 여전히 사랑의 시녀이다... 그렇다.   믿음의 영광이 거기에서 나와 사랑하게 만든다.  믿음은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위대한 잠정적 수단이다.
이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다.   분주하게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   믿음은 끊임없이 선행을 하지않을 수 없다.   이 믿음에 의해 사랑을 증진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인도된다.
믿음은 한가지 힘과 작용을 갖는다.   행함은 또 다른 작용을 갖는다.   믿음의 힘과 작용은 행함 전에 있다.   그리고 믿음은 행함과 함께 역사한다.   행함은 믿음에 생명을 주지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행함을 낳는다.   그리고 믿음은 행함에 의해 온전케된다.   믿음은 행함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케 된다.
믿음으로인해 생겨나는 선행은 경건의 일이다.   그 속에는 기도, 성만찬, 성서읽기, 금식이 포함되어 있다.   이 경건은 개인적, 내면적 경건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경건은 자비의 일이다.   감옥에 있거나, 병들었거나, 외롭거나, 헐벗었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영혼과 몸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이요 외면적 경건이다.  성결은 내적인 사랑과 외적인 사랑으로 이해하는 웨슬레는 선행을 경건과 자비의 일로 이해하였다.   즉 의미있는 선행은 양자를 모두 동시에 충족시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회적이 아닌 종교를 알지못한다.   또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없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최고이다.
웨슬레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개인적 성결과 사회적 성결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결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이 성결의 상태는 지속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의 '거룩케하는 은총'에 의해 순간적으로 끌어올려지는 차원이 있다 할지라도 성화는 언제나 점진적인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순간부터 은혜안에서 성장하는 점진적인 성화가 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거기에는 또한 순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무엇이 있는 마지막 순간과 무엇이 없는 처음순간이 있어야만 한다.
성화의 윤리에 있어서 문제는 완전성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이미 도달했다'는 느낌을 갖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위험이다.   과도한 영적 심리화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상실케한다.  따라서 가장 거룩한 성인일지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번에 성결의 보따리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순간순간 성결을 공급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거룩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웨슬레는 도덕폐기론(Antinominism)과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를 극복할 수 있었다.   웨슬레의 성화교리는 한 그리스도인과 기독교회의 신뢰성을 회복케한다.   기독교 복음의 생명력을 이 세계속에 불어넣는 힘이된다.
그대들 다른 종파들이여, '보라,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 말하는 그대들이여 그대들보다 강한 입증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내게 보여주시오.   그들은 주장한다.   슬프도다 !   그대들은 입증할 수 없다.   그대들은 사랑의 순수한 표를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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