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레의 목회훈련개발에 관한 연구 1
존 웨슬레의 목회훈련개발에 관한 연구 1
http://cafe.naver.com/modernth/388
존 웨슬레의 목회훈련개발에 관한 연구
노 흥 호
목 차
I. 서 론 .................................................. 1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 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 3
I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 ....................... 6
A. 웨슬레의 생애 .......................................... 6
B. 시대적 상황 ............................................ 11
1.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 ............................. 11
2. 종교적 상황 ......................................... 13
C. 웨슬레의 교회관 ....................................... 14
1. 교회의 본질 ......................................... 14
2. 교회의 표적 ......................................... 16
D. 웨슬레의 목회 훈련관 .................................... 17
1. 목회의 계승 ......................................... 17
2. 교직제도 ............................................ 20
II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조직과 내용 ................... 26
A. 목회훈련의 조직 ........................................ 27
1. 연합신도회 ......................................... 27
2. 속 회 ............................................ 31
3. 반 회 ............................................ 37
4. 선발신도회 ......................................... 42
5. 참회자반 ........................................... 44
6. 연 회 ............................................ 45
B. 목회훈련의 내용 ....................................... 47
1. 하나님 말씀 ....................................... 48
2. 성 례 전 .......................................... 58
IV.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방법과 그 실천적 적용 .......... 70
A. 목회 훈련의 방법 ....................................... 70
1. 헌신 훈련 ......................................... 71
2. 경건 훈련 ......................................... 75
3. 성경 탐구 훈련 .................................... 78
4. 설교 훈련 ......................................... 81
5. 지도자 훈련 ....................................... 86
B. 성결교회와 목회 훈련의 실천적 적용 .................... 100
1.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 ............................ 100
2. 목회 훈련의 방법 .................................. 109
V. 결 론 .................................................. 132
A. 요 약 ............................................... 132
B. 제 언 ................................................ 140
* 참 고 문 헌 ........................................... 145
. 서 론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웨슬레는 18세기에 부패한 영국 사회를 구원한 전도자요 개혁자로 교회제도를 새롭게 조직함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단지 하나의 전도부흥사나 조직자로 보고 그에게는 신학이 없다는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본다. 그러나 오늘날 웨슬레를 정확히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분명히 늘어나고 있다. 스케빙톤 우드 (A. Skevington Wood)는 고찰하기를 "너무나 오랫동안 메소디즘의 창시자는 주로 행동가요 최소한의 의미에서만 건설적인 사상가였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급격히 웨슬레의 신학적 역할을 재평가하는 것을 본다. 오히려 그가 강조한 교리의 특징적인 성격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보았다.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18세기의 영국 교회의 상황에서 재천명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설교의 도장에서, 성서의 빛 아래서, 성도들의 체험에 비추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시정하였다.
웨슬레는 교리의 본체 (substance)와 교리에 대한 상세한 내용 (circumstance)을 구분하였다. 웨슬레는 전자 (substance)를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후자 (circumstance) 곧 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법, 시간,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체험되는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성서의 빛 아래서, 또는 체험을 통한 경험으로 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천명된 성서적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골자 (substance)를 재강조하면서 그 교리를 당시 선교 상황과 신앙 체험에 적응성을 지닌 산 신학 (a living theology)으로 형성한 것이다. 와인쿠프 박사는 "웨슬레의 공헌은 그가 신학에다 살과 피 (flesh and blood)를 덧붙였다는데 있다"라고말했다. 웨슬레는 위대한 실천가이며 신학자이다. 왜냐하면 웨슬레에게 있어서 신학과 실제는 진정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웨슬레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로도 소홀히 다루어진 부분이 있다. 그것은 웨슬레의 목회관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웨슬레를 목회자로 보는 것에 대하여 주저한다. 왜냐하면 현재 드류신학대학에서 목회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토마스 오덴에 의하면 전통적인 목회자라 함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받아 안수식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 노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하였다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레에게는 교구가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복음 전도자이지 목회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웨슬레가 교구를 갖지 못한 이유는 영국 국교회가 교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는 나의 교구이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정신을 가지고 웨슬레는 진정한 목회를 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그동안 너무나 등한시 되어왔던 웨슬레의 목회에 대하여 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로 인하여 현대교회에 필요한 목회훈련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은 웨슬레의 생애 전반이나 그의 신학 사상 전체를 다루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다만 목회자로서, 목회훈련자로서의 그의 모습과 신학사상, 그리고 그의 목회활동을 찾아 그의 목회 훈련을 정립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광범위한 제목하에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갖고 기술된다.
이 논문을 기술함에 있어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는 존 웨슬레의 목회관에 대하여 발표된 것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본 논문을 위해 웨슬레가 직접 저술한 [Thomas Jackson (ed.), The Works of John Wesley (14 Vols., 3rd edition, Ohio, 1977-79)], [John Telford (ed.),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8Vols., London, 1931)], [Edward H, Sudgen (ed.), Wesley's Standard Sermons (2Vols., London, 1951)]과 한국어 번역판인 [존웨슬레 총서] 제 1권 - 10권 (서울 : 유니온 출판사, 1983)을 일차자료로 사용하였고, 그밖에 웨슬레에 관한 도서, 연구 되어진 논문, 목회학에 관한 도서 그리고 정기 간행물을 이차 자료로 활용하여 논문을 기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I 장은 서론으로 본 논문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연구의 방법과 범위를 다루었다.
제 II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생애, 목회 훈련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 웨슬레의 교회관과 그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III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조직과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목회 훈련의 조직으로는 역사적인 고찰을 따라 연합신도회, 속회, 반회, 선발신도회, 참회자반 그리고 연회를 다룸으로써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고, 목회훈련의 내용으로는 하나님 말씀 (성경, 설교)과 성례전 (세례, 성만찬)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 IV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방법과 그 실천적 적용을 살펴보겠다. 목회 훈련의 방법으로는 헌신훈련, 경건훈련, 성경탐구훈련, 설교훈련 그리고 지도자훈련을 살펴보고, 그 실천적 적용으로는 성결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 V 장은 결론으로 지금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요약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오늘의 한국 성결교회 목회 훈련 개발을 위하여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
A. 웨슬레의 생애
웨슬레는 (1703 - 1791) 18세기의 대부분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한 위대한 목회자요 유력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손꼽을 만한 대부흥사요 감리회를 조직한 조직자이다.
웨슬레는 1703년 링컨주 엡워드 교구의 주임 사제관에서 목사인 사무엘 웨슬레 (Sammuel Wesley)와 부인 수산나 웨슬레 사이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3대에 걸친 선교적인 혈통이 말해주고 있듯이 신앙생활은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레는 어린 자녀들이 말을 하게 되면 일어날 때와 잠을 잘때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였고 가정 예배시에는 항상 정숙하게 하였으며, 식사 시간에는 기도를 하게끔 하였다.
1709년 2월 9일 목사관의 화재는 웨슬레의 뇌리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다. 이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노년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밑에다가 '이는 불꽃에서 끌어낸 타다 남은 나무 조각이 아닌가?' 하고 적어 넣었다. 불타는 집은 멸망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웨슬레의 사상에 있어서 각 사람의 영혼은 불에 둘러싸인 어린애와 같이 회개하지 않은 죄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길에 에워싸인 것이다. 한밤중에 불타는 집에서 구출된 그는 더 무서운 불길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멸망에 대한 기억이 죽는 날까지 그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1711년 버킹검 (Buckingham) 공작의 추천으로 챠터하우스 (Charter - house)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경건 생활과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를 배웠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1720년 옥스포드 (Oxford)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Christ - church) 대학에 입학하여 히브리어, 라틴어, 윤리학, 철학, 신학등을 공부하였다. 이후로 부터 학문적인 면에 꾸준한 발전이 계속 되었다.
이 시기에 웨슬레가 접한 책들 가운데서 토마스 아 켐퍼스 (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를 읽고 (1726) 내적 종교의 본질과 범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다짐했고, 제레미 테일러 (Jeremy Taylor)의 [거룩하게 사는 그리고 거룩하게 죽는 규율과 연습] (The Rule and Exercise Holy Living and The Rule and Exercise of Holy Dying)을 읽은 후에(1725년) 의도의 순수성이 중요함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실하게 자각하여 헌신을 결단하였고, 윌리암 로 (William Law)의 [완전한 그리스도인] (Law's Practical Treatise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로의 부름]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을 읽었던 바 (1728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을 결단하였다.
이외에도 웨슬레가 전 생애를 통하여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음을 그의 일기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하여 간접적인 경험을 쌓아나가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갔으며, 내적인 면을 늘 새롭게 발전시켜 나아갔다. 지식 그리고 실천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행동으로 일치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웨슬레는 그동안 축적한 모든 경험들을 행동화 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펴 나갔다.
1725년에 영국교회 (성공회)에서 신부 (Deacon 서열로), 1728년에는 사제 서열로 안수를 받으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옥스포드 링컨 대학의 강사로 피택이 되었고, 이곳에서 신성모임 (Holy Club)을 조직하여 멀지않는 훗날 영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시작되었다. 웨슬레는 신성모임에서 엄격한 원칙을 창안해 나갔다. 그래서 웨슬레와 그의 동료들은 엄격주의자(Methodists), 성찬주의자 (Sacramentaians), 열광주의자 (Enthusiasts), 성경벌레 (Bible Moths), 개혁모임 (Reforming Club) 그리고 적선하는 자 (Supererogation Men) 등으로 불렸다. 신성모임은 1735년 10월에 웨슬레 형제가 미국 죠지아주로 선교를 위하여 떠나면서 해체되고 말았으나, 훗날 웨슬레의 목회훈련에 있어서 교회조직과 방법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으니 그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 하겠다.
1735년 10월 미국 죠지아주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되어 항해 도중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신앙을 보게 되었다. 그는 죠지아주에 도착하여 토착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웨슬레는 이들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었다. 왜냐하면 이들 인디언들은 순수해서 복음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접촉하면 할수록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점점 멀어짐을 느꼈다. 웨슬레 신학을 연구한 케논 (William R. Cannon)박사는 웨슬레 자신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신성모임 운동을 하고 미국 죠지아주 선교를 하였던 그때까지의 자기는 아들의 신앙이 아니라 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즉 1738년 회심이전의 웨슬레의 신앙과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비신앙적이었다. 그는 죠지아주 선교에 실패를 하고 다시금 영국으로 돌아왔다. 철저한 회심이 없는 상태에서 올바로 목회사역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죠지아주 선교에 실패를 하고 돌아온 웨슬레에게 결정적인 신앙의 변화가 찾아왔다. 웨슬레는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가 (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었다. 9시 15분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 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 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어서 1739년 1월 1일 (월요일) 새벽 3시경에 페터 레인 모임에서 웨슬레는 홀 (Hall)씨와 킨췬, 잉햄, 화이트필드, 동생 찰스등 60여명의 신앙동지들과 통성기도시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새벽 3시 경 계속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벅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땅바닥에 넘어졌다. 그분의 위엄이 임재하는 가운데 두려움과 감탄속에 조금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소리로 우리는 외쳤다. 오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 이십니다.
이러한 양 사건은 그의 목회사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 설교의 내용과 종교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당시 영적 파산 상태에 처한 영국교회를 구원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을 체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1739년에 처음으로 감리교 예배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후 1751년에는 바질리 (Vazille) 부인과 결혼하였고, 1790년 10월 6일에는 최후로 야외 설교를 하였으며, 향년 88세로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런던 씨크로드 주택에서 서거하였다.
B. 시대적 상황
18세기를 크게 특징 지운다면 첫째는 현저한 과학적 발전의 시대였다. 둘째는 파국적인 정치적 변화의 시대였다. 세째는 문학과 철학적 성취의 시대였다. 네째는 정신의 힘이 가장 심각하게 종교에 적용된 시기였다. 그러면 영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
이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은 의회정치와 왕정 복고의 변혁기를 맞이하여 혼돈, 무질서, 소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청교도들이 (Puritans) 일어나 스튜잇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찰스 1세를 (Charles I, 1600-1649) 사형에 처하고 공화국을 건설하여 약 10년간 통치를 했다. 이당시 청교도들이 너무나 지나치게 엄격하여 아무 해도 없는 오락과 취미까지도 억제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왕정이 복고되자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왕의 자리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시기가 없었다. 그 원인은 첫째가 왕실의 타락이요, 둘째는 청교도들의 지나친 엄격주의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극단의 향락주의가 만연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영국 사회의 사회적, 도덕적 상황을 보면 극장에서 상영되는 각본들은 저속하고 음탕한 내용들로써 관람객의 풍기를 문란케 했는데, 이것은 가정 불화의 요인이 되었고 이혼을 조장하는 등 영국 사회를 부패케하는 원인이 되었다. 상류가정의 한가한 부인들은 소설읽는 품팔이를 고용하여 음탕한 소설을 들으면서 소일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박장이 되어서 가산을 탕진하고, 도둑질, 자살, 가정불화, 가정파탄의 진원지가 되었다. 특히 군왕이나 대정치가들이 도박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음주 문제는 거리의 집들 가운데 1/4이 술집일 정도여서 그 피해는 악정과 전쟁의 피해 못지 않게 컸다. 국가의 도덕적 타락은 잔인하고 모욕적인 각종 경기로 나타났는데 닭 싸움, 거위타기, 개교미, 소 싸움, 소 놀리기 등... 그런데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사소한 일로 격투와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불량 청년들이 횡행하여 통행인들을 괴롭히고 금품을 강탈하며 부녀자를 농락하곤 하였다. 웨슬레가 영국 사회를 "오늘의 영국 사회의 특징은 불경건이다" 라고 하였고, 역사가 해롤드 니콜슨 (Harold Nicolson)도 18세기 영국 상황을 평가하길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시기였다"라고 평가하였다.
2. 종교적 상황
영국 사회의 종교적 상황으로는 이성을 존중하는 이신론 (Deism) 사상이 종교에 지배적이어서 기독교를 인간의 이성으로 부터 시작하는 종교로 변화시켰다. 이신론의 대표적인 매튜 틴달 (Matthew Tindal)은 인간에게는 이성이 긍극적 기준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이 곧 계시의 기초요, 신앙의 표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도 인간 사상의 또 하나의 집대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이처럼 17,18세기의 종교가들은 계시와 이성의 조화로 시도하며,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가능성과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여 마침내 신앙을 이성에 예속시키는 일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신은 우주를 창조할 때 자연법칙을 세웠고 인간에게는 양심과 이성과 자유를 주어 자연이 법칙을 따라 운행하듯이 인간도 양심을 따라 도덕률을 준수함으로 완전해 진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은 영력을 잃어갔고 형식주의로 기울어 갔으며 지도자들은 아무런 종교적 열정이나 영감, 죄인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구령열이 없었다. 나아가 상류사회는 종교에 대한 무용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정치인들은 타락하였다. 종교인들 조차도 세속화되어 설교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경전을 사문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생명적 기독교가 희귀하게 되었다. 대중은 기독교의 타당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레키 (W. E. H. Lecky)가 논평한대로 종교적 권태가 영국을 뒤덮었던 것이다.
웨슬레는 이시대의 무력감에 대하여 "누가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가 ? 누가 그들이 은총으로 성장할 것을 생각하는가 ? 누가 때때로 그들을 권고하고 칭찬하는가 ? 누가 그들이 필요할 때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했는가 ? ... 그러나 보라 !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 동서남북을 돌아보고 어느 교구의 이름을 대보라 !" 하면서 한탄하였다. 웨슬레는 자기 시대의 악과 종교적 무기력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18세기의 지적인 성격을 특징짓는 합리주의적이고 이신론적 철학에 직면한 기독교를 소생시키고, 그당시 영국에 있어서 현저하게 성행했던 부도덕과 타락에 대한 정화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철저한 목회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C. 웨슬레의 교회관
1. 교회의 본질
웨슬레는 신약성서주해에서 사도행전 5장 11절을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교회라는 말이 사도행전에 처음 나온다. 여기에 신약성서의 교회 원형을 비로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그들은 다 복음으로 부름을 받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았다. 여러 계급 사람들이 통일 되었고 사랑으로 생동하는 단체가 되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즉음으로 엄격한 신도 신앙 생활의 지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교회에 관하여" (Of the Church)라는 그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교회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염려하면서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같이, 교회는 두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는 교회는 제도나 의식이나 교권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인 회중이라하여,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숫자에 관계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가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시기에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때 그의 집안에 있는 교회(몬 2) 라고 언급하였듯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족이라도 교회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전체 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함께 연합된 회중이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우주적이다. 웨슬레는 "우주적 교회(the Catholic Universal Church)를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입게 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서, 이들은 한 몸이며 한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고 한 믿음과 한 소망 그리고 한 세례를 가지며 만민의 아버지 되시는 한 하나님을 소유하여 결합된 하나님의 몸이다"라고하였다. 이처럼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란 본질적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임 (Communion of Saints)인 것이다.
2. 교회의 표적 (The Marks of the Church)
웨슬레는 영국 교회의 39개조 종교신조를 개정함에 있어서 교회에 관한 조항 19조를 그대로 두었고, 19항을 13항으로 줄였을 뿐이다.
보이는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서, 거기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적절하게 집행된다.
이 신조 자체는 종교 개혁 또는 고전적 개신교 전통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예를 들면 교회에 대한 정의에는 목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이신조는 분명히 다양한 주장에 대하여 관용적이다. 콜린 윌리암즈 박사는 이 종교신조가 의미하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지적하였다.
보이는 교회는 본질적인 것이다. 첫째 되는 것은 산신앙 (Living Faith)인데, 사실상 이것 없이는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이를 청취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때 그 신앙은 쇠잔해지고 죽어 버린다. 세째는 성례의 합당한 집행, - 하나님의 신앙을 더하게 하시는 정상적 수단이다.
웨슬레의 주장은 말씀과 성례에 기존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관련된 객관적 신성성이 신자들 속에 산 응답의 객관적 신성성을 초래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세가지의 강조가 교회의 존재와 선교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함께 견지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수다한 교회관과 모이는 교회관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 경건성을 초래 고 산신앙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례와 설교에 관련될 것이다. 웨슬레의 해답은 교회속의 작은 교회 (ecclesiolae in ecclesia)의 개념, 곧 말씀 아래 살고 있고 세례를 받은 전체 회중 가운데서 규칙적 생활을 따라 거룩함의 누룩이 되고자 하는 신자들의 임의적 소집단들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교회의 표적은 목회훈련의 근거로써 중요하다. 산신앙은 목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순수한 말씀과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은 산신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목회훈련의 내용인 것이다.
D. 웨슬레의 목회 훈련관
1. 목회의 계승
웨슬레는 1744년 실시한 제 1회 연회에서 목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대하여 "하나님이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 이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목회를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웨슬레에게도 전통적인 목회의 개념이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웨슬레는 목회의 계승을 정의함에 있어서 카톨릭의 수평적 견해와는 달리하고 있다. 그는 1761년 런던 {크로니클}지에 보낸 편지에서 개혁 교회의 목회에 분명한 연속적 계승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개혁 교회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지원하시는 목사들과 교사들의 영구적인 계승 (a perpetual succession)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또한 지원하시는 목사들과 교사들의 계승이 중단되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개종시키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임명하시고 지원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명칭이 그들에게 적합하다. 이 교사들은 처음 성자들에게 주어진 신앙 (the faith once delivered to the saints)을 모든 세대를 걸쳐서 전달하는 특유한 계승자들이고, 그 회원들은 참 신자들이 모인 '하나의 거룩한 집회' (the only society of true believers)와 더불어 진정한 정신적 교제를 나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 (the Whole people of God)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백성은 무시할 수 없는 일부분이다.
여기서 목회의 계승은 말씀과 관련되어 정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목회의 당위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레가 목회자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그는 단순히 복음전도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 주장의 기본 개념은 그는 교구를 갖지 못했고, 구체적인 목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웨슬레가 교구를 갖지 못했음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날더러 다른 교구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말은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는 현재로 내자신의 교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 ...
이제 괴로운 마음으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온 세상을 교구로 생각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내가 이세상의 어느 구석에 있더라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합당하고 정당하며 그것을 나의 본분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부르셨으며, 이 일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웨슬레는 분명히 목회자였다. 그는 목사를 여전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도구로 보았으며, 목사의 역할에 대하여 '목사에 대한 순종' (On Obedience to Pastors) 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목사들은 양 무리에 앞서가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동양 목자들의 습관입니다), 모든 진리와 성결의 길로 그들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며, 순전한 말씀의 젖으로 그들을 먹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교리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에게 그 안에 감추어진 모든 본질적인 교리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책망을 위하여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쳤다면, 그들을 경고해야 합니다. 바르게 하는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에게 그릇된 것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하며, 평화의 길로 되돌아오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의로 교육하기 위하여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외적인 성결을 성취할 때까지 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웨슬레는 목사의 역할에 목회훈련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사실 목사는 훈련되어진 사람이어야 하고, 또한 훈련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목사가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그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목사는 훈련시키는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훈련이란 신자의 삶을 말씀과 성례전으로 기인하는 능력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 까지 미쳐 모든 진리와 성결의 길로 인도하도록 책먕, 경고, 지도, 감독, 권면, 징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회훈련은 초대교회에서 부터 존재하였다(갈 2:14 ; 고전 5:11-13). 린지(Lindsay, Thomas Martin 1843-1914)는 말하기를 "목회훈련은 초대교회의 신경(Nerve)이었으며 교제와 수찬금지는 목회훈련의 신경과 같았다"라고하였다.
2. 교직제도 (Ministry)
교직제도에 있어서 웨슬레는 처음에 감독제도를 성경적이요, 사도적이라고 믿었으나, 스틸링플리트 (Stillingfleet)의 평화제의(Irenicon)와 성경 (Lord King)의 '초대교회에 관한 이해'(Account of the Primitive Church)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직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가 전도 사역을 위하여 동생 찰스 (Charles Wesley)와 자신을 돕는 보조자를 뽑기 시작했을 때 부터 였다. 웨슬레가 임명한 평신도 설교자 (Lay Preacher)들은 대부분 안수도 받지 않았는데 교회제도상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 하는 문제였다. 또 미국에 감리교회가 생기게 되자 그곳에 감독과 목사를 임명하고 안수하여 전도의 장으로 파송하였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일련의 행동은 당시 영국 교회안에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웨슬레는 성경과 초대교회에서의 예를 들어 나름대로 설명을 하였다. 그는 두 종류의 교직자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설교하거나 전도하는 책임이 있는 교직자이고, 둘째는 교회를 다스리고 성례전과 안수례를 집행하는 교직자이다. 전자는 특별한 전도자로서 제도적인 통로가 아닌 좀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세워졌다고 보았으며, 후자는 목사 - 사제 (Pastors - Priests)로서 교회의 정상적이고도 기존화된 제도적인 목회자로 보았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영국교회의 사제들은 목회나 성례전 그리고 안수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갖는 교직자이고, 메소디스트의 전도자 - 설교자들은 설교와 전도의 책임을 가진 교직자로 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웨슬레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정규 목사들의 목회에 계속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반면에, 평신도 보조자들은 참된 말씀을 조직함으로써 수직적인것과 수평적인 것을 함께 견지하도록 하였다.
웨슬레는 교역자의 서열에 있어서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셋은 감독(Bishop)과 장로(Presbyters or Priests), 그리고 집사(Deacons)이다. 그러나 감독과 장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본질에 있어서는 두 서열로 보았다. 즉 성례전과 안수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교역자 (감독과 장로)와 그아래 서열의 교역자 (집사)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웨슬레는 교직제도는 모든 시대를 위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오히려 여러 다른 교직제도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어온 것이 틀림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성경에서는 교직제도에 있어 어떠한 획일성이 없다고 하였다.
교직제도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한 웨슬레는 교직이 교회 또는 교파에 따라 다종 다양할 것임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직책에 따라 그 수임자도 시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그의 '교직자의 직무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가 항상 메소디스트들을 사제 (Priests)로서가 아니라 예언자 (Prophets)로 임명했으며, "우리는 그들이 성례전을 집행하지 않고 단지 설교만 하도록 용납했다." 라 했다.
웨슬레는 어떤 댓가를 지불하든지 이 구분 만큼은 분명하게 하여 영구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그는 일생 끝까지 메소디스트가 영국 교회와 분리된 한 종파로서가 아니라 영국교회내 성결의 누룩 (a leaven of holiness),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 (ecclesiolae in ecclesia)로 여전히 남아있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교회의 제도 및 교직에 대하여 상대적이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레는 교직제도의 타당성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사로서 안수할 수 있는 이론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세가지 교직제도 서열로써 문제에 대해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가시적 연속성을 참으로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자신이 목사나 감독을 안수한 것에 대해서 두가지 근거를 들어 나름대로 정당화 시켰다. 첫째, 성서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므로 자기도 안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며, 둘째는 불가피한 필요성에 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교회의 제도나 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고 이해한 웨슬레는 자신의 안수를 성서나 초대교회의 전통이나 또는 영국 교회의 교리에도 일치될 수 있다고 하여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가 복음을 널리 자유롭게 전파하는 것을 최상의 사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 순종하는 뜻에서 이를 정당화한 것이다. 웨슬레는 미국을 위한 자기의 안수가 '정당하나 변칙적'(valid but irregular)이라는 상징으로서 '감독' (Bishop)을 '감리사' (Superintendent)로, '장로' (Presbyter)를 '장로'(Elder)로 직함을 바꾸었던 것이다.
웨슬레에 있어서 안수의 중요성을 콜린 윌리암즈박사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① 웨슬레는 기계적 계승설을 용납하지 않는 반면에, 교회의 유기적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② 웨슬레는 목회를 안수의 연속성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③ 웨슬레는 가시적 연속성 뿐만 아니라, 말씀과 교회의 선교의 연속성에도 관심을 두었다.
④ 웨슬레가 확신한 것은 신약성서에는 제시된 '제도'가 없으므로 개혁교회는 일개의 합법적 교회 (교회 전체가 아니라) 이지만 목회의 세가지 질서는 정상적인 것이었다는 것과, 연속성과 일치를 위하여 가급적이면 그것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웨슬레는 교역자의 서열에 있어서는 셋으로 구분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서열로 이해하였다. 즉, 성례전과 안수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교역자 (감독과 장로)와 그 아래 서열의 교역자 (집사) 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듯이 교직의 직분도 시대를 따라 다르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는 성서에는 어떤 결정적인 교회 정치제도를 주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일정한 형태를 주신것도 없다고 하였다. 1836년에야 비로소 안수가 재개되었고, 그 세기 말엽에 가서 감리교는 자체를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웨슬레는 18세기의 대부분을 산 사람으로 감리교를 조직한 조직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의 집안에서 철저하게 교육 받았으며 그것이 훗날 목회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1738년 5월 24일 중생의 체험과 1739년 1월 1일 성결의 체험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웨슬레가 처해 있었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과 무질서, 사회.도덕적으로 불경건 시대였고, 종교적으로 이신론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로 이로 인하여 신앙은 영력을 잃어갔고, 형식주의로 기울어졌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런 종교적 열정이나 죄인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구령열이 없었으니 실로 새로운 갱신이 요청되는 시대였다.
웨슬레는 목회훈련의 장으로 교회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있어 교회란 본질적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임이며 교회의 표적은 산신앙, 순수한 말씀,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 집행이다.
웨슬레는 목회의 임무를 '하나님의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으로 보았고, 개혁교회에 분명한 목회의 연속적 계승이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는 목사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도구로 보았으며 목사의 임무에 훈련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직자의 서열을 셋 (감독, 장로, 집사)으로 보았으나 본질적으로는 두 서열(감독과 장로, 집사)로 이해함으로써 목회훈련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상으로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이해를 살펴보았고, 제 III 장에서는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존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
웨슬레가 우룻에서 부목사 직에 있을 때 어떤 신도 한 사람이 그에게 "당신이 ... 천국에 가려면 동지를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은둔적 신앙을 장려한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웨슬레의 머리 속에는 이 말이 언제나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웨슬레는 실제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완전이라는 높은 수준도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초기 메소디즘의 체험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메소디스트 운동이 점차로 확장되고 신도가 증가됨에 따라 웨슬레는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던 신도회 (Society) 제도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사용하던 반회 제도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웨슬레는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이었으며 일생을 설교로 살았고, 성례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본 장에서는 웨슬레의 전도 (목회) 활동으로 형성된 연합신도회, 속회, 반회, 선발신도회, 참회자반, 그리고 연회의 조직과 성격을 살펴봄으로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조직을 살펴보고, 목회훈련의 내용으로는 하나님 말씀과 성례전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A. 목회 훈련의 조직
1. 연합신도회 (The United Societies)
웨슬레는 영국사회의 성직자로 일생을 살기를 원했고, 또한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영국사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새로운 교회나 교단을 만들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다. 그의 목회활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교구의 영국 국교회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원을 갈망하여 장래에 임할 진노를 피하고 진실한 믿음을 간직하려는 이를 위하여 신도회 (Society)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웨슬레는 신도회의 기원을 서술함에 있어서 "형식을 갖추고 성결한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고 권면의 말씀을 들으며 서로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다."라고하였다.
사실 웨슬레가 1739년 6월 11일 (월)자 일기에서 그의 확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의 원칙은 이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어디라도 가야한다고 판단될 때 그곳에 가야한다는 확신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어디든지 부르시는 대로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나의 확신입니다.
이와같은 확신과 신앙으로 그는 신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신도회에 가입하는 유일한 조건은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고 그들의 죄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To free from the wrath to came, to be saved from their sins)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영혼에 진실로 몰두되어야 하며 그 결실에 의해서 보여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회원은 계속해서 간구해야 하고 그들의 구원의 갈망을 계속 증거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웨슬레는 1743년 5월 1일 선포한 신도회 규칙에서 이의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1739년말 8-10명이 런던으로 나를 찾아와, 진노에서 면하는 방법에 대한 권고를 위해 몇시간을 같이 보내자고 요청하여 왔고,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모일 것을 정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모임은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그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칙 (The Only Rule)과 충분한 규칙 (The Sufficient Rule)으로 삼고 신도회의 총칙을 실행하도록 훈련시켰다. 또 이 총칙을 습관적으로 범했을 경우 잘못을 타일렀고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출회시켰다. 이 총칙은 그들의 일상생활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 조목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악을 행하지 말 것
실례로서, 웨슬레는 불경건한 말, 술취함, 밀수, 사치스런 옷, 불 필요한 낭비, 방종, 탐욕을 금하도록 하였다.
② 선을 행하라
특히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족한 자를 돌보아 주고, 믿음의 식구들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가르침과 권고와 책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모든 규례에 참여하는 것
신도회에 속한 자들은 교회의 예전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전체 회중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설교가 교회에서 저조함을 목격하고, 회원들은 신도회에서 말씀의 선교에 참여하고 거기서 기도하고 상호 격려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웨슬레는 복음 선전의 최선의 방법으로 신도회를 활용하였다. "런던과 브리스톨과, 성 아이브스와 슈유카슬과, 그밖에 신도회가 있는 곳에서부터 점차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 전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적은 누룩이 소리없이 점차로 큰 세력으로 퍼져나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하였다. 그는 신도회를 복음전파의 기지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신도회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도회는 회심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모임이었지, 다른 이유 즉 교회나 교단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으니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 복음 선전의 최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영혼을 돌보고 격려하며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또한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진실한 믿음이 있음을 나타내어 사랑을 실천하며 선교를 돕고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교구 교회가 예배중인 시간에는 신도회 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도회 회원들이 교구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것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만일 신도회에 가입한 신도들이 교회의 예배 시간에 따로 모이면 그들과는 다시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 조직이 방대해지자 회심자를 속회와 개개인의 신앙 생활을 독려하는 신앙 고백반인 반회로 나누었다. 속회가 연합신도회의 신앙 훈련적인 모임이라면 반회는 신앙 고백적인 모임이다. 속회가 연합신도회의핵심 조직이라면 반회는 속회의 핵심 조직이다. 이것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1)
(도표 1) +--------------------+
| 연 합 신 도 회 |
+---------+----------+
+-------------------+-------------------+
+--------+-------+ +---------+-------+
| 신앙 훈련 모임 | | 신앙 고백적 모임|
+--------+-------+ +---------+-------+
| |
| |
속 회 +--------------------+ 반 회
| | 목 회 자 | |
| | | |
| | 순 회 설 교 자 | |
철 야 기 도 회 | | 애 찬 식
| | 평 신 도 보조자 | |
| | | |
회 심 자 회 | 속 장 | 선 발 신 도 회
(새신자회) | | |
| | 집 사 | |
| | | |
회 원 포 교 부 | 병 자 심 방 인 | 참 회 자 반
(3개월 마다) | | |
| | 교 사 | |
| | | |
지도자의인도 | 회 원 | 개개인 스스로
+--------------------+
2. 속 회 (Class Meeting)
웨슬레에게 있어서 속회의 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을 속으로 나누어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돌보게 하는 길밖에는 더 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런던에서는 감리교의 속회의 기원이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드릴 수 있는 길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 이 제도가 말할 수 없이 유용하다고 하는 것은 그 후로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명백해졌다.
속회는 1742년 2월 15일 (월) 브리스톨 에서와 동년 3월 25일 (목) 런던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으며, 조직은 12명씩이 되었고, 한 주 한번씩 목요일에 모이도록 하였다. 1746에는 전 지역에서 메소디스트의 전형 (Patterns)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속회에는 전 감리회원이 조직되었으며 대거지역를 중심으로 지역과 회원들의 인접관계를 참고로 하여 조직 되었다. 웨슬레는 이 속회가 감리회 전제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속회는 감리회 조직의 핵심일 뿐 아니라 새로 개종한 자를 위한 교회의 조직으로서 이상적인 것이었으며 신앙훈련의 모임이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작은 교회 (ecclesiolae)로 견지할 의도로 예언자적 직능과 제사적 직능을 구별하도록 호소하였다.
웨슬레는 속회가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한 이유를 "①속장의 시간 허비 ②찾아오는 것 싫어 하는 일 (집주인, 친척) ③속장이 만나도 자유롭게 권면, 책망, 위로, 격려할 기회가 없음 ④찬반 의견을 한 데 모을 수 없음 ⑤친척과 이웃 사이에 오해가 발생하므로 이를 풀기 위해 서로 대면이 필
요하므로 한곳에 모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속회원은 매주 한번 한 시간 정도로 저녁에 모여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특별한 필요나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받거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 운영을 보면 "필요한 때는 조언이나 책망을 받게 되었고 다투었던 일을 화해하였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를 한 두 시간 하고 나서 기도와 감사로 결론을 맺었다"라고하였다. 또한 속회원들은 일주일에 1페니, 세달에 1실링을 내도록 되어 있었고 이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순회 전도자들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웨슬레는 속회 회원들에게 조그만 티켓을 발행해 주었는데, 그 카드엔 그 사람의 이름과 날짜, 웨슬레나 메소디스트 설교자 한 사람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속회 회원증으로 이것을 가진 자는 애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신실치 못한 회원들은 그 다음 기회에 티켓을 새로 발급 받지 못하고 결국은 애찬식에서 제외되었다.
속회의 회원이 되려는 사람의 자격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남녀노소 구별없이 다 가능하였으나 신도회에 가입이 허락될 때 증서가 발급되며 3개월의 예비 기간 후 마지막에 속장이 완전한 속회원의 자격을 자문했다. 가입된 속회원은 속회에 규칙적인 출석을 이행해야 하였고, 만일 세 번 이상 연속 결석하면 자동으로 속회에서 추방되었다. 웨슬레는 속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은 연합신도회 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미국의 속회 연구가인 데이빗 왓슨 박사 (David Lowes Watson)는 속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속회는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역사의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할당한 특별한 사역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게하는 신통한 은혜의 수단이었다.
이와같이 속회는 그 신학적인 의미로 볼때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역할이 되었으며 동시에 이 은혜의 수단인 속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회심시키기도 하였다.
목회훈련적 측면에서 웨슬레가 속회 회원과 그 지도자들에게 부여한 지침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회원 : 일주에 목요일 한번 모임
1. 가난한 자들의 생활을 보살피기 위하여
2.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3. 그들을 위로하고 충고하고 격려해 주기 위하여
(나) 속회지도자 (Leader) : 매주 한번씩 모임
1. 속회내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영적 성장을 조사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충고하고 견책하고 위로하고 권고한다. 그들이 바치는 헌금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
2. 신도회에 교역자나 구역장을 만나서 병든 자나 생활이 흐트러진 자, 견책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해 교역자에게 보고하고 전 주에 여러 속회에서 받은 헌금을 전달한다.
(다) 구원받기 위한 행동 지침
1.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악한 생각을 피한다.
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다.
나. 안식일에 사고 팔며 일하여 성일을 더럽히지 않는다.
다. 독한 술을 팔고 사지 않으며 마시지 않는다.
라. 말다툼을 피하고 법정에 고소하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마. 부정한 물품을 사고 팔지 않는다.
바. 고리로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
사. 불경건한 농담을 하지 않는다.
2. 선한일을 행한다.
가.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되 특히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환자나 죄수를 찾아가서 도와준다.
나. 성결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도록 한다.
다. 이같은 일을 오래 참음과 꾸준한 노력으로 계속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같이 진다.
3.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가. 공예배에 참석한다.
나. 설교를 들으며
다. 주의 만찬 (성만찬)에 참여 하며
라. 은밀히 기도하며
마. 성경을 보고 연구하며
바. 금식한다.
(라) 경건 생활 지침
1. 기 도
가. 회개와 화해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가 ?
나.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개인 기도를 하는가 ?
다. 매일 아침 5시에 새벽 기도회를 드리는가 ?
2. 성서연구
가. 매일 일정한 분량을 계속적으로 읽는가 ?
나. 성경을 보기 전에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는가 ?
다. 성경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 하는가 ?
라. 성경 연구를 치밀하게 하는가 ?
마.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연구 하는가 ?
3. 성 만 찬
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만찬에 참여 하는가 ?
나. 참석 전에 엄숙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가 ?
다. 참여하면서 자기 몸을 바쳐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가 ?
4. 금 식 : 매주 금요일 마다 성경대로 금식하는가 ?
웨슬레가 속회 회원들을 철저히 훈련시키고자 하였음을 이와같은 지침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웨슬레는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각자 주일마다 방문하는 교인들의 생활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여 보고해 줄 것을 당부하였고, 그들은 지시대로 이행하였다. 그로인해 옳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이 밝혀 졌다. 그 중 얼마는 가던 길에서 돌아서 회개했고 또 얼마는 우리에게서 아주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웨슬레는 런던과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방법을 실시하였다. 악한 자들이 색출되고 훈계받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죄의 길을 끊어버린다면 다시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러나 계속 그 길을 버리지 못하면 공개적으로 이름을 밝혔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며 기도하였다. 이와같이 웨슬레는 속회의 조직과 운영을 통하여 목회 훈련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http://cafe.naver.com/modernth/388
존 웨슬레의 목회훈련개발에 관한 연구
노 흥 호
목 차
I. 서 론 .................................................. 1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 1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 3
I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 ....................... 6
A. 웨슬레의 생애 .......................................... 6
B. 시대적 상황 ............................................ 11
1.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 ............................. 11
2. 종교적 상황 ......................................... 13
C. 웨슬레의 교회관 ....................................... 14
1. 교회의 본질 ......................................... 14
2. 교회의 표적 ......................................... 16
D. 웨슬레의 목회 훈련관 .................................... 17
1. 목회의 계승 ......................................... 17
2. 교직제도 ............................................ 20
II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조직과 내용 ................... 26
A. 목회훈련의 조직 ........................................ 27
1. 연합신도회 ......................................... 27
2. 속 회 ............................................ 31
3. 반 회 ............................................ 37
4. 선발신도회 ......................................... 42
5. 참회자반 ........................................... 44
6. 연 회 ............................................ 45
B. 목회훈련의 내용 ....................................... 47
1. 하나님 말씀 ....................................... 48
2. 성 례 전 .......................................... 58
IV.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방법과 그 실천적 적용 .......... 70
A. 목회 훈련의 방법 ....................................... 70
1. 헌신 훈련 ......................................... 71
2. 경건 훈련 ......................................... 75
3. 성경 탐구 훈련 .................................... 78
4. 설교 훈련 ......................................... 81
5. 지도자 훈련 ....................................... 86
B. 성결교회와 목회 훈련의 실천적 적용 .................... 100
1.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 ............................ 100
2. 목회 훈련의 방법 .................................. 109
V. 결 론 .................................................. 132
A. 요 약 ............................................... 132
B. 제 언 ................................................ 140
* 참 고 문 헌 ........................................... 145
. 서 론
A.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웨슬레는 18세기에 부패한 영국 사회를 구원한 전도자요 개혁자로 교회제도를 새롭게 조직함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단지 하나의 전도부흥사나 조직자로 보고 그에게는 신학이 없다는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본다. 그러나 오늘날 웨슬레를 정확히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분명히 늘어나고 있다. 스케빙톤 우드 (A. Skevington Wood)는 고찰하기를 "너무나 오랫동안 메소디즘의 창시자는 주로 행동가요 최소한의 의미에서만 건설적인 사상가였다고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급격히 웨슬레의 신학적 역할을 재평가하는 것을 본다. 오히려 그가 강조한 교리의 특징적인 성격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보았다.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18세기의 영국 교회의 상황에서 재천명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설교의 도장에서, 성서의 빛 아래서, 성도들의 체험에 비추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시정하였다.
웨슬레는 교리의 본체 (substance)와 교리에 대한 상세한 내용 (circumstance)을 구분하였다. 웨슬레는 전자 (substance)를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후자 (circumstance) 곧 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방법, 시간,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에게 체험되는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성서의 빛 아래서, 또는 체험을 통한 경험으로 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웨슬레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천명된 성서적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골자 (substance)를 재강조하면서 그 교리를 당시 선교 상황과 신앙 체험에 적응성을 지닌 산 신학 (a living theology)으로 형성한 것이다. 와인쿠프 박사는 "웨슬레의 공헌은 그가 신학에다 살과 피 (flesh and blood)를 덧붙였다는데 있다"라고말했다. 웨슬레는 위대한 실천가이며 신학자이다. 왜냐하면 웨슬레에게 있어서 신학과 실제는 진정 하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웨슬레에 대하여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로도 소홀히 다루어진 부분이 있다. 그것은 웨슬레의 목회관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웨슬레를 목회자로 보는 것에 대하여 주저한다. 왜냐하면 현재 드류신학대학에서 목회신학을 강의하고 있는 토마스 오덴에 의하면 전통적인 목회자라 함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받아 안수식을 통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 노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하였다 때문이다. 그러나 웨슬레에게는 교구가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복음 전도자이지 목회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웨슬레가 교구를 갖지 못한 이유는 영국 국교회가 교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는 나의 교구이다"(The World is my Parish)라는정신을 가지고 웨슬레는 진정한 목회를 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그동안 너무나 등한시 되어왔던 웨슬레의 목회에 대하여 보다 더 잘 이해하고 그로 인하여 현대교회에 필요한 목회훈련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데 있다.
B.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은 웨슬레의 생애 전반이나 그의 신학 사상 전체를 다루려고 의도하지 않는다. 다만 목회자로서, 목회훈련자로서의 그의 모습과 신학사상, 그리고 그의 목회활동을 찾아 그의 목회 훈련을 정립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광범위한 제목하에 많은 제약과 한계를 갖고 기술된다.
이 논문을 기술함에 있어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는 존 웨슬레의 목회관에 대하여 발표된 것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본 논문을 위해 웨슬레가 직접 저술한 [Thomas Jackson (ed.), The Works of John Wesley (14 Vols., 3rd edition, Ohio, 1977-79)], [John Telford (ed.),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8Vols., London, 1931)], [Edward H, Sudgen (ed.), Wesley's Standard Sermons (2Vols., London, 1951)]과 한국어 번역판인 [존웨슬레 총서] 제 1권 - 10권 (서울 : 유니온 출판사, 1983)을 일차자료로 사용하였고, 그밖에 웨슬레에 관한 도서, 연구 되어진 논문, 목회학에 관한 도서 그리고 정기 간행물을 이차 자료로 활용하여 논문을 기술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 I 장은 서론으로 본 논문 문제의 제기 및 연구의 목적, 연구의 방법과 범위를 다루었다.
제 II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 위하여, 그의 생애, 목회 훈련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 웨슬레의 교회관과 그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III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조직과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목회 훈련의 조직으로는 역사적인 고찰을 따라 연합신도회, 속회, 반회, 선발신도회, 참회자반 그리고 연회를 다룸으로써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역사적 근거를 밝히고, 목회훈련의 내용으로는 하나님 말씀 (성경, 설교)과 성례전 (세례, 성만찬)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 IV 장에서는 웨슬레의 목회 훈련의 방법과 그 실천적 적용을 살펴보겠다. 목회 훈련의 방법으로는 헌신훈련, 경건훈련, 성경탐구훈련, 설교훈련 그리고 지도자훈련을 살펴보고, 그 실천적 적용으로는 성결교회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제 V 장은 결론으로 지금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요약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오늘의 한국 성결교회 목회 훈련 개발을 위하여 몇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I. 존 웨슬레의 목회 훈련에
대한 이해
A. 웨슬레의 생애
웨슬레는 (1703 - 1791) 18세기의 대부분을 살면서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한 위대한 목회자요 유력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손꼽을 만한 대부흥사요 감리회를 조직한 조직자이다.
웨슬레는 1703년 링컨주 엡워드 교구의 주임 사제관에서 목사인 사무엘 웨슬레 (Sammuel Wesley)와 부인 수산나 웨슬레 사이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제3대에 걸친 선교적인 혈통이 말해주고 있듯이 신앙생활은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 수산나 웨슬레는 어린 자녀들이 말을 하게 되면 일어날 때와 잠을 잘때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였고 가정 예배시에는 항상 정숙하게 하였으며, 식사 시간에는 기도를 하게끔 하였다.
1709년 2월 9일 목사관의 화재는 웨슬레의 뇌리에서 평생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었다. 이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노년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밑에다가 '이는 불꽃에서 끌어낸 타다 남은 나무 조각이 아닌가?' 하고 적어 넣었다. 불타는 집은 멸망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웨슬레의 사상에 있어서 각 사람의 영혼은 불에 둘러싸인 어린애와 같이 회개하지 않은 죄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불길에 에워싸인 것이다. 한밤중에 불타는 집에서 구출된 그는 더 무서운 불길에서 사람들을 건져내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멸망에 대한 기억이 죽는 날까지 그의 생각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1711년 버킹검 (Buckingham) 공작의 추천으로 챠터하우스 (Charter - house)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경건 생활과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를 배웠다. 이 학교를 졸업한 후 1720년 옥스포드 (Oxford) 대학 크라이스트 처치 (Christ - church) 대학에 입학하여 히브리어, 라틴어, 윤리학, 철학, 신학등을 공부하였다. 이후로 부터 학문적인 면에 꾸준한 발전이 계속 되었다.
이 시기에 웨슬레가 접한 책들 가운데서 토마스 아 켐퍼스 (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를 읽고 (1726) 내적 종교의 본질과 범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을 다짐했고, 제레미 테일러 (Jeremy Taylor)의 [거룩하게 사는 그리고 거룩하게 죽는 규율과 연습] (The Rule and Exercise Holy Living and The Rule and Exercise of Holy Dying)을 읽은 후에(1725년) 의도의 순수성이 중요함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실하게 자각하여 헌신을 결단하였고, 윌리암 로 (William Law)의 [완전한 그리스도인] (Law's Practical Treatise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로의 부름]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을 읽었던 바 (1728년)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을 결단하였다.
이외에도 웨슬레가 전 생애를 통하여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음을 그의 일기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책을 통하여 간접적인 경험을 쌓아나가 신앙생활을 풍성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갔으며, 내적인 면을 늘 새롭게 발전시켜 나아갔다. 지식 그리고 실천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행동으로 일치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웨슬레는 그동안 축적한 모든 경험들을 행동화 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펴 나갔다.
1725년에 영국교회 (성공회)에서 신부 (Deacon 서열로), 1728년에는 사제 서열로 안수를 받으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26년에는 옥스포드 링컨 대학의 강사로 피택이 되었고, 이곳에서 신성모임 (Holy Club)을 조직하여 멀지않는 훗날 영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교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줄 운동이 시작되었다. 웨슬레는 신성모임에서 엄격한 원칙을 창안해 나갔다. 그래서 웨슬레와 그의 동료들은 엄격주의자(Methodists), 성찬주의자 (Sacramentaians), 열광주의자 (Enthusiasts), 성경벌레 (Bible Moths), 개혁모임 (Reforming Club) 그리고 적선하는 자 (Supererogation Men) 등으로 불렸다. 신성모임은 1735년 10월에 웨슬레 형제가 미국 죠지아주로 선교를 위하여 떠나면서 해체되고 말았으나, 훗날 웨슬레의 목회훈련에 있어서 교회조직과 방법에서 그 영향을 볼 수 있으니 그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히 크다 하겠다.
1735년 10월 미국 죠지아주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되어 항해 도중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서 그들의 신앙을 보게 되었다. 그는 죠지아주에 도착하여 토착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웨슬레는 이들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었다. 왜냐하면 이들 인디언들은 순수해서 복음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과 접촉하면 할수록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점점 멀어짐을 느꼈다. 웨슬레 신학을 연구한 케논 (William R. Cannon)박사는 웨슬레 자신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신성모임 운동을 하고 미국 죠지아주 선교를 하였던 그때까지의 자기는 아들의 신앙이 아니라 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즉 1738년 회심이전의 웨슬레의 신앙과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비신앙적이었다. 그는 죠지아주 선교에 실패를 하고 다시금 영국으로 돌아왔다. 철저한 회심이 없는 상태에서 올바로 목회사역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죠지아주 선교에 실패를 하고 돌아온 웨슬레에게 결정적인 신앙의 변화가 찾아왔다. 웨슬레는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가 (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었다. 9시 15분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 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 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어서 1739년 1월 1일 (월요일) 새벽 3시경에 페터 레인 모임에서 웨슬레는 홀 (Hall)씨와 킨췬, 잉햄, 화이트필드, 동생 찰스등 60여명의 신앙동지들과 통성기도시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새벽 3시 경 계속 기도에 전념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벅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땅바닥에 넘어졌다. 그분의 위엄이 임재하는 가운데 두려움과 감탄속에 조금 정신을 차리자마자 한 소리로 우리는 외쳤다. 오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주 이십니다.
이러한 양 사건은 그의 목회사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 설교의 내용과 종교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당시 영적 파산 상태에 처한 영국교회를 구원할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원천을 체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1739년에 처음으로 감리교 예배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후 1751년에는 바질리 (Vazille) 부인과 결혼하였고, 1790년 10월 6일에는 최후로 야외 설교를 하였으며, 향년 88세로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 런던 씨크로드 주택에서 서거하였다.
B. 시대적 상황
18세기를 크게 특징 지운다면 첫째는 현저한 과학적 발전의 시대였다. 둘째는 파국적인 정치적 변화의 시대였다. 세째는 문학과 철학적 성취의 시대였다. 네째는 정신의 힘이 가장 심각하게 종교에 적용된 시기였다. 그러면 영국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정치, 사회, 도덕적 상황
이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은 의회정치와 왕정 복고의 변혁기를 맞이하여 혼돈, 무질서, 소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청교도들이 (Puritans) 일어나 스튜잇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찰스 1세를 (Charles I, 1600-1649) 사형에 처하고 공화국을 건설하여 약 10년간 통치를 했다. 이당시 청교도들이 너무나 지나치게 엄격하여 아무 해도 없는 오락과 취미까지도 억제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왕정이 복고되자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왕의 자리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처럼 타락하고 부패한 시기가 없었다. 그 원인은 첫째가 왕실의 타락이요, 둘째는 청교도들의 지나친 엄격주의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다. 그 결과로 극단의 향락주의가 만연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영국 사회의 사회적, 도덕적 상황을 보면 극장에서 상영되는 각본들은 저속하고 음탕한 내용들로써 관람객의 풍기를 문란케 했는데, 이것은 가정 불화의 요인이 되었고 이혼을 조장하는 등 영국 사회를 부패케하는 원인이 되었다. 상류가정의 한가한 부인들은 소설읽는 품팔이를 고용하여 음탕한 소설을 들으면서 소일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도박장이 되어서 가산을 탕진하고, 도둑질, 자살, 가정불화, 가정파탄의 진원지가 되었다. 특히 군왕이나 대정치가들이 도박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음주 문제는 거리의 집들 가운데 1/4이 술집일 정도여서 그 피해는 악정과 전쟁의 피해 못지 않게 컸다. 국가의 도덕적 타락은 잔인하고 모욕적인 각종 경기로 나타났는데 닭 싸움, 거위타기, 개교미, 소 싸움, 소 놀리기 등... 그런데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사소한 일로 격투와 폭행을 일삼는가 하면, 불량 청년들이 횡행하여 통행인들을 괴롭히고 금품을 강탈하며 부녀자를 농락하곤 하였다. 웨슬레가 영국 사회를 "오늘의 영국 사회의 특징은 불경건이다" 라고 하였고, 역사가 해롤드 니콜슨 (Harold Nicolson)도 18세기 영국 상황을 평가하길 "도덕적으로 무질서한 시기였다"라고 평가하였다.
2. 종교적 상황
영국 사회의 종교적 상황으로는 이성을 존중하는 이신론 (Deism) 사상이 종교에 지배적이어서 기독교를 인간의 이성으로 부터 시작하는 종교로 변화시켰다. 이신론의 대표적인 매튜 틴달 (Matthew Tindal)은 인간에게는 이성이 긍극적 기준이다. 그러므로 이 이성이 곧 계시의 기초요, 신앙의 표준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도 인간 사상의 또 하나의 집대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이처럼 17,18세기의 종교가들은 계시와 이성의 조화로 시도하며, 위로부터 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가능성과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여 마침내 신앙을 이성에 예속시키는 일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신은 우주를 창조할 때 자연법칙을 세웠고 인간에게는 양심과 이성과 자유를 주어 자연이 법칙을 따라 운행하듯이 인간도 양심을 따라 도덕률을 준수함으로 완전해 진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신앙은 영력을 잃어갔고 형식주의로 기울어 갔으며 지도자들은 아무런 종교적 열정이나 영감, 죄인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구령열이 없었다. 나아가 상류사회는 종교에 대한 무용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정치인들은 타락하였다. 종교인들 조차도 세속화되어 설교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경전을 사문화시켰다. 이로 인하여 생명적 기독교가 희귀하게 되었다. 대중은 기독교의 타당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레키 (W. E. H. Lecky)가 논평한대로 종교적 권태가 영국을 뒤덮었던 것이다.
웨슬레는 이시대의 무력감에 대하여 "누가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는가 ? 누가 그들이 은총으로 성장할 것을 생각하는가 ? 누가 때때로 그들을 권고하고 칭찬하는가 ? 누가 그들이 필요할 때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했는가 ? ... 그러나 보라 !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 동서남북을 돌아보고 어느 교구의 이름을 대보라 !" 하면서 한탄하였다. 웨슬레는 자기 시대의 악과 종교적 무기력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18세기의 지적인 성격을 특징짓는 합리주의적이고 이신론적 철학에 직면한 기독교를 소생시키고, 그당시 영국에 있어서 현저하게 성행했던 부도덕과 타락에 대한 정화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철저한 목회 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C. 웨슬레의 교회관
1. 교회의 본질
웨슬레는 신약성서주해에서 사도행전 5장 11절을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교회라는 말이 사도행전에 처음 나온다. 여기에 신약성서의 교회 원형을 비로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그들은 다 복음으로 부름을 받아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았다. 여러 계급 사람들이 통일 되었고 사랑으로 생동하는 단체가 되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즉음으로 엄격한 신도 신앙 생활의 지침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교회에 관하여" (Of the Church)라는 그의 설교에서 말하기를 교회라는 단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염려하면서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같이, 교회는 두세 신자가 함께 모이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는 교회는 제도나 의식이나 교권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인 회중이라하여,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교회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숫자에 관계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성도가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시기에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쓸때 그의 집안에 있는 교회(몬 2) 라고 언급하였듯이 한 그리스도인의 가족이라도 교회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전체 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함께 연합된 회중이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우주적이다. 웨슬레는 "우주적 교회(the Catholic Universal Church)를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입게 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서, 이들은 한 몸이며 한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고 한 믿음과 한 소망 그리고 한 세례를 가지며 만민의 아버지 되시는 한 하나님을 소유하여 결합된 하나님의 몸이다"라고하였다. 이처럼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회란 본질적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임 (Communion of Saints)인 것이다.
2. 교회의 표적 (The Marks of the Church)
웨슬레는 영국 교회의 39개조 종교신조를 개정함에 있어서 교회에 관한 조항 19조를 그대로 두었고, 19항을 13항으로 줄였을 뿐이다.
보이는 교회는 믿는 자들의 모임으로서, 거기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적절하게 집행된다.
이 신조 자체는 종교 개혁 또는 고전적 개신교 전통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예를 들면 교회에 대한 정의에는 목회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이신조는 분명히 다양한 주장에 대하여 관용적이다. 콜린 윌리암즈 박사는 이 종교신조가 의미하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지적하였다.
보이는 교회는 본질적인 것이다. 첫째 되는 것은 산신앙 (Living Faith)인데, 사실상 이것 없이는 보이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결과적으로 이를 청취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할때 그 신앙은 쇠잔해지고 죽어 버린다. 세째는 성례의 합당한 집행, - 하나님의 신앙을 더하게 하시는 정상적 수단이다.
웨슬레의 주장은 말씀과 성례에 기존하는 그리스도의 현존과 관련된 객관적 신성성이 신자들 속에 산 응답의 객관적 신성성을 초래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세가지의 강조가 교회의 존재와 선교에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함께 견지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수다한 교회관과 모이는 교회관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 경건성을 초래 고 산신앙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례와 설교에 관련될 것이다. 웨슬레의 해답은 교회속의 작은 교회 (ecclesiolae in ecclesia)의 개념, 곧 말씀 아래 살고 있고 세례를 받은 전체 회중 가운데서 규칙적 생활을 따라 거룩함의 누룩이 되고자 하는 신자들의 임의적 소집단들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교회의 표적은 목회훈련의 근거로써 중요하다. 산신앙은 목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순수한 말씀과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은 산신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목회훈련의 내용인 것이다.
D. 웨슬레의 목회 훈련관
1. 목회의 계승
웨슬레는 1744년 실시한 제 1회 연회에서 목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대하여 "하나님이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 이라고 하였다. 웨슬레는 목회를 하나님께서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웨슬레에게도 전통적인 목회의 개념이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웨슬레는 목회의 계승을 정의함에 있어서 카톨릭의 수평적 견해와는 달리하고 있다. 그는 1761년 런던 {크로니클}지에 보낸 편지에서 개혁 교회의 목회에 분명한 연속적 계승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개혁 교회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지원하시는 목사들과 교사들의 영구적인 계승 (a perpetual succession)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에는 하나님이 임명하시고 또한 지원하시는 목사들과 교사들의 계승이 중단되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개종시키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임명하시고 지원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명칭이 그들에게 적합하다. 이 교사들은 처음 성자들에게 주어진 신앙 (the faith once delivered to the saints)을 모든 세대를 걸쳐서 전달하는 특유한 계승자들이고, 그 회원들은 참 신자들이 모인 '하나의 거룩한 집회' (the only society of true believers)와 더불어 진정한 정신적 교제를 나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 (the Whole people of God)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의 백성은 무시할 수 없는 일부분이다.
여기서 목회의 계승은 말씀과 관련되어 정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목회의 당위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레가 목회자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그는 단순히 복음전도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 주장의 기본 개념은 그는 교구를 갖지 못했고, 구체적인 목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웨슬레가 교구를 갖지 못했음은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날더러 다른 교구에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말은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는 현재로 내자신의 교구를 갖고 있지 않으며,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 ...
이제 괴로운 마음으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온 세상을 교구로 생각합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내가 이세상의 어느 구석에 있더라도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합당하고 정당하며 그것을 나의 본분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나를 부르셨으며, 이 일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웨슬레는 분명히 목회자였다. 그는 목사를 여전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도구로 보았으며, 목사의 역할에 대하여 '목사에 대한 순종' (On Obedience to Pastors) 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목사들은 양 무리에 앞서가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동양 목자들의 습관입니다), 모든 진리와 성결의 길로 그들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을 양육하며, 순전한 말씀의 젖으로 그들을 먹여야 합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교리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에게 그 안에 감추어진 모든 본질적인 교리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책망을 위하여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쳤다면, 그들을 경고해야 합니다. 바르게 하는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에게 그릇된 것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어야 하며, 평화의 길로 되돌아오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의로 교육하기 위하여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 외적인 성결을 성취할 때까지 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웨슬레는 목사의 역할에 목회훈련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사실 목사는 훈련되어진 사람이어야 하고, 또한 훈련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목사가 훈련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그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목사는 훈련시키는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훈련이란 신자의 삶을 말씀과 성례전으로 기인하는 능력이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에 까지 미쳐 모든 진리와 성결의 길로 인도하도록 책먕, 경고, 지도, 감독, 권면, 징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회훈련은 초대교회에서 부터 존재하였다(갈 2:14 ; 고전 5:11-13). 린지(Lindsay, Thomas Martin 1843-1914)는 말하기를 "목회훈련은 초대교회의 신경(Nerve)이었으며 교제와 수찬금지는 목회훈련의 신경과 같았다"라고하였다.
2. 교직제도 (Ministry)
교직제도에 있어서 웨슬레는 처음에 감독제도를 성경적이요, 사도적이라고 믿었으나, 스틸링플리트 (Stillingfleet)의 평화제의(Irenicon)와 성경 (Lord King)의 '초대교회에 관한 이해'(Account of the Primitive Church)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부끄럽게 여겨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교직에 관한 문제가 대두된 것은 그가 전도 사역을 위하여 동생 찰스 (Charles Wesley)와 자신을 돕는 보조자를 뽑기 시작했을 때 부터 였다. 웨슬레가 임명한 평신도 설교자 (Lay Preacher)들은 대부분 안수도 받지 않았는데 교회제도상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 하는 문제였다. 또 미국에 감리교회가 생기게 되자 그곳에 감독과 목사를 임명하고 안수하여 전도의 장으로 파송하였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일련의 행동은 당시 영국 교회안에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해 웨슬레는 성경과 초대교회에서의 예를 들어 나름대로 설명을 하였다. 그는 두 종류의 교직자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설교하거나 전도하는 책임이 있는 교직자이고, 둘째는 교회를 다스리고 성례전과 안수례를 집행하는 교직자이다. 전자는 특별한 전도자로서 제도적인 통로가 아닌 좀더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세워졌다고 보았으며, 후자는 목사 - 사제 (Pastors - Priests)로서 교회의 정상적이고도 기존화된 제도적인 목회자로 보았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영국교회의 사제들은 목회나 성례전 그리고 안수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갖는 교직자이고, 메소디스트의 전도자 - 설교자들은 설교와 전도의 책임을 가진 교직자로 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웨슬레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정규 목사들의 목회에 계속적으로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반면에, 평신도 보조자들은 참된 말씀을 조직함으로써 수직적인것과 수평적인 것을 함께 견지하도록 하였다.
웨슬레는 교역자의 서열에 있어서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그 셋은 감독(Bishop)과 장로(Presbyters or Priests), 그리고 집사(Deacons)이다. 그러나 감독과 장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본질에 있어서는 두 서열로 보았다. 즉 성례전과 안수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교역자 (감독과 장로)와 그아래 서열의 교역자 (집사)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웨슬레는 교직제도는 모든 시대를 위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으며, 오히려 여러 다른 교직제도에 있어서 수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어온 것이 틀림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성경에서는 교직제도에 있어 어떠한 획일성이 없다고 하였다.
교직제도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한 웨슬레는 교직이 교회 또는 교파에 따라 다종 다양할 것임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직책에 따라 그 수임자도 시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그의 '교직자의 직무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가 항상 메소디스트들을 사제 (Priests)로서가 아니라 예언자 (Prophets)로 임명했으며, "우리는 그들이 성례전을 집행하지 않고 단지 설교만 하도록 용납했다." 라 했다.
웨슬레는 어떤 댓가를 지불하든지 이 구분 만큼은 분명하게 하여 영구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그는 일생 끝까지 메소디스트가 영국 교회와 분리된 한 종파로서가 아니라 영국교회내 성결의 누룩 (a leaven of holiness),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 (ecclesiolae in ecclesia)로 여전히 남아있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교회의 제도 및 교직에 대하여 상대적이며 실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웨슬레는 교직제도의 타당성을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사로서 안수할 수 있는 이론적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세가지 교직제도 서열로써 문제에 대해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가시적 연속성을 참으로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자신이 목사나 감독을 안수한 것에 대해서 두가지 근거를 들어 나름대로 정당화 시켰다. 첫째, 성서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므로 자기도 안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며, 둘째는 불가피한 필요성에 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즉, 교회의 제도나 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고 이해한 웨슬레는 자신의 안수를 성서나 초대교회의 전통이나 또는 영국 교회의 교리에도 일치될 수 있다고 하여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가 복음을 널리 자유롭게 전파하는 것을 최상의 사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 순종하는 뜻에서 이를 정당화한 것이다. 웨슬레는 미국을 위한 자기의 안수가 '정당하나 변칙적'(valid but irregular)이라는 상징으로서 '감독' (Bishop)을 '감리사' (Superintendent)로, '장로' (Presbyter)를 '장로'(Elder)로 직함을 바꾸었던 것이다.
웨슬레에 있어서 안수의 중요성을 콜린 윌리암즈박사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① 웨슬레는 기계적 계승설을 용납하지 않는 반면에, 교회의 유기적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② 웨슬레는 목회를 안수의 연속성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③ 웨슬레는 가시적 연속성 뿐만 아니라, 말씀과 교회의 선교의 연속성에도 관심을 두었다.
④ 웨슬레가 확신한 것은 신약성서에는 제시된 '제도'가 없으므로 개혁교회는 일개의 합법적 교회 (교회 전체가 아니라) 이지만 목회의 세가지 질서는 정상적인 것이었다는 것과, 연속성과 일치를 위하여 가급적이면 그것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웨슬레는 교역자의 서열에 있어서는 셋으로 구분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서열로 이해하였다. 즉, 성례전과 안수례를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교역자 (감독과 장로)와 그 아래 서열의 교역자 (집사) 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듯이 교직의 직분도 시대를 따라 다르게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는 성서에는 어떤 결정적인 교회 정치제도를 주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일정한 형태를 주신것도 없다고 하였다. 1836년에야 비로소 안수가 재개되었고, 그 세기 말엽에 가서 감리교는 자체를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웨슬레는 18세기의 대부분을 산 사람으로 감리교를 조직한 조직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의 집안에서 철저하게 교육 받았으며 그것이 훗날 목회훈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1738년 5월 24일 중생의 체험과 1739년 1월 1일 성결의 체험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웨슬레가 처해 있었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과 무질서, 사회.도덕적으로 불경건 시대였고, 종교적으로 이신론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로 이로 인하여 신앙은 영력을 잃어갔고, 형식주의로 기울어졌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런 종교적 열정이나 죄인을 구원하려는 뜨거운 구령열이 없었으니 실로 새로운 갱신이 요청되는 시대였다.
웨슬레는 목회훈련의 장으로 교회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에게 있어 교회란 본질적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임이며 교회의 표적은 산신앙, 순수한 말씀,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 집행이다.
웨슬레는 목회의 임무를 '하나님의 위탁하신 영혼을 돌보는 것'으로 보았고, 개혁교회에 분명한 목회의 연속적 계승이 있음을 피력하였다. 그는 목사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도구로 보았으며 목사의 임무에 훈련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직자의 서열을 셋 (감독, 장로, 집사)으로 보았으나 본질적으로는 두 서열(감독과 장로, 집사)로 이해함으로써 목회훈련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상으로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이해를 살펴보았고, 제 III 장에서는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존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조직과 내용
웨슬레가 우룻에서 부목사 직에 있을 때 어떤 신도 한 사람이 그에게 "당신이 ... 천국에 가려면 동지를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은둔적 신앙을 장려한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웨슬레의 머리 속에는 이 말이 언제나 떠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웨슬레는 실제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기독교인의 완전이라는 높은 수준도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초기 메소디즘의 체험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제 메소디스트 운동이 점차로 확장되고 신도가 증가됨에 따라 웨슬레는 영국교회에서 사용하던 신도회 (Society) 제도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사용하던 반회 제도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웨슬레는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이었으며 일생을 설교로 살았고, 성례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본 장에서는 웨슬레의 전도 (목회) 활동으로 형성된 연합신도회, 속회, 반회, 선발신도회, 참회자반, 그리고 연회의 조직과 성격을 살펴봄으로 웨슬레의 목회훈련의 조직을 살펴보고, 목회훈련의 내용으로는 하나님 말씀과 성례전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A. 목회 훈련의 조직
1. 연합신도회 (The United Societies)
웨슬레는 영국사회의 성직자로 일생을 살기를 원했고, 또한 그렇게 살았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영국사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새로운 교회나 교단을 만들 생각을 전혀 갖지 않았다. 그의 목회활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자신들이 살고 있는 교구의 영국 국교회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원을 갈망하여 장래에 임할 진노를 피하고 진실한 믿음을 간직하려는 이를 위하여 신도회 (Society)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웨슬레는 신도회의 기원을 서술함에 있어서 "형식을 갖추고 성결한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이고 권면의 말씀을 들으며 서로 사랑으로 돌봄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다."라고하였다.
사실 웨슬레가 1739년 6월 11일 (월)자 일기에서 그의 확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의 원칙은 이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렇게 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판단 되어지는 것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으며,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면 어디라도 가야한다고 판단될 때 그곳에 가야한다는 확신입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어디든지 부르시는 대로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나의 확신입니다.
이와같은 확신과 신앙으로 그는 신도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신도회에 가입하는 유일한 조건은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고 그들의 죄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To free from the wrath to came, to be saved from their sins)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영혼에 진실로 몰두되어야 하며 그 결실에 의해서 보여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회원은 계속해서 간구해야 하고 그들의 구원의 갈망을 계속 증거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웨슬레는 1743년 5월 1일 선포한 신도회 규칙에서 이의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으니, "1739년말 8-10명이 런던으로 나를 찾아와, 진노에서 면하는 방법에 대한 권고를 위해 몇시간을 같이 보내자고 요청하여 왔고,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에 모일 것을 정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모임은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었고 그 수가 날마다 증가하였던 것이다.
웨슬레는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규칙 (The Only Rule)과 충분한 규칙 (The Sufficient Rule)으로 삼고 신도회의 총칙을 실행하도록 훈련시켰다. 또 이 총칙을 습관적으로 범했을 경우 잘못을 타일렀고 그래도 회개치 않으면 출회시켰다. 이 총칙은 그들의 일상생활의 구체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 조목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악을 행하지 말 것
실례로서, 웨슬레는 불경건한 말, 술취함, 밀수, 사치스런 옷, 불 필요한 낭비, 방종, 탐욕을 금하도록 하였다.
② 선을 행하라
특히 가난한 자, 병든 자, 실족한 자를 돌보아 주고, 믿음의 식구들에 대하여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가르침과 권고와 책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모든 규례에 참여하는 것
신도회에 속한 자들은 교회의 예전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전체 회중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설교가 교회에서 저조함을 목격하고, 회원들은 신도회에서 말씀의 선교에 참여하고 거기서 기도하고 상호 격려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웨슬레는 복음 선전의 최선의 방법으로 신도회를 활용하였다. "런던과 브리스톨과, 성 아이브스와 슈유카슬과, 그밖에 신도회가 있는 곳에서부터 점차로 조금씩 범위를 넓혀 전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적은 누룩이 소리없이 점차로 큰 세력으로 퍼져나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늘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하였다. 그는 신도회를 복음전파의 기지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신도회에서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도회는 회심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모임이었지, 다른 이유 즉 교회나 교단을 만들 생각은 아니었으니 교회안에 있는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로 복음 선전의 최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영혼을 돌보고 격려하며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모인 것이다. 또한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진실한 믿음이 있음을 나타내어 사랑을 실천하며 선교를 돕고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교구 교회가 예배중인 시간에는 신도회 모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도회 회원들이 교구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것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만일 신도회에 가입한 신도들이 교회의 예배 시간에 따로 모이면 그들과는 다시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는 이 조직이 방대해지자 회심자를 속회와 개개인의 신앙 생활을 독려하는 신앙 고백반인 반회로 나누었다. 속회가 연합신도회의 신앙 훈련적인 모임이라면 반회는 신앙 고백적인 모임이다. 속회가 연합신도회의핵심 조직이라면 반회는 속회의 핵심 조직이다. 이것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1)
(도표 1) +--------------------+
| 연 합 신 도 회 |
+---------+----------+
+-------------------+-------------------+
+--------+-------+ +---------+-------+
| 신앙 훈련 모임 | | 신앙 고백적 모임|
+--------+-------+ +---------+-------+
| |
| |
속 회 +--------------------+ 반 회
| | 목 회 자 | |
| | | |
| | 순 회 설 교 자 | |
철 야 기 도 회 | | 애 찬 식
| | 평 신 도 보조자 | |
| | | |
회 심 자 회 | 속 장 | 선 발 신 도 회
(새신자회) | | |
| | 집 사 | |
| | | |
회 원 포 교 부 | 병 자 심 방 인 | 참 회 자 반
(3개월 마다) | | |
| | 교 사 | |
| | | |
지도자의인도 | 회 원 | 개개인 스스로
+--------------------+
2. 속 회 (Class Meeting)
웨슬레에게 있어서 속회의 기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을 속으로 나누어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돌보게 하는 길밖에는 더 좋은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런던에서는 감리교의 속회의 기원이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 충분히 감사드릴 수 있는 길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다. 이 제도가 말할 수 없이 유용하다고 하는 것은 그 후로 시간이 갈 수록 더욱 명백해졌다.
속회는 1742년 2월 15일 (월) 브리스톨 에서와 동년 3월 25일 (목) 런던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으며, 조직은 12명씩이 되었고, 한 주 한번씩 목요일에 모이도록 하였다. 1746에는 전 지역에서 메소디스트의 전형 (Patterns)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속회에는 전 감리회원이 조직되었으며 대거지역를 중심으로 지역과 회원들의 인접관계를 참고로 하여 조직 되었다. 웨슬레는 이 속회가 감리회 전제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속회는 감리회 조직의 핵심일 뿐 아니라 새로 개종한 자를 위한 교회의 조직으로서 이상적인 것이었으며 신앙훈련의 모임이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작은 교회 (ecclesiolae)로 견지할 의도로 예언자적 직능과 제사적 직능을 구별하도록 호소하였다.
웨슬레는 속회가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한 이유를 "①속장의 시간 허비 ②찾아오는 것 싫어 하는 일 (집주인, 친척) ③속장이 만나도 자유롭게 권면, 책망, 위로, 격려할 기회가 없음 ④찬반 의견을 한 데 모을 수 없음 ⑤친척과 이웃 사이에 오해가 발생하므로 이를 풀기 위해 서로 대면이 필
요하므로 한곳에 모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속회원은 매주 한번 한 시간 정도로 저녁에 모여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특별한 필요나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받거나 도움을 받았다. 또한 그 운영을 보면 "필요한 때는 조언이나 책망을 받게 되었고 다투었던 일을 화해하였다. 이러한 사랑의 수고를 한 두 시간 하고 나서 기도와 감사로 결론을 맺었다"라고하였다. 또한 속회원들은 일주일에 1페니, 세달에 1실링을 내도록 되어 있었고 이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순회 전도자들을 지원하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웨슬레는 속회 회원들에게 조그만 티켓을 발행해 주었는데, 그 카드엔 그 사람의 이름과 날짜, 웨슬레나 메소디스트 설교자 한 사람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속회 회원증으로 이것을 가진 자는 애찬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신실치 못한 회원들은 그 다음 기회에 티켓을 새로 발급 받지 못하고 결국은 애찬식에서 제외되었다.
속회의 회원이 되려는 사람의 자격은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남녀노소 구별없이 다 가능하였으나 신도회에 가입이 허락될 때 증서가 발급되며 3개월의 예비 기간 후 마지막에 속장이 완전한 속회원의 자격을 자문했다. 가입된 속회원은 속회에 규칙적인 출석을 이행해야 하였고, 만일 세 번 이상 연속 결석하면 자동으로 속회에서 추방되었다. 웨슬레는 속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은 연합신도회 회원이 지켜야 할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미국의 속회 연구가인 데이빗 왓슨 박사 (David Lowes Watson)는 속회의 신학적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속회는 세상을 향해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역사의 특정한 시기와 장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할당한 특별한 사역들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게하는 신통한 은혜의 수단이었다.
이와같이 속회는 그 신학적인 의미로 볼때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역할이 되었으며 동시에 이 은혜의 수단인 속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회심시키기도 하였다.
목회훈련적 측면에서 웨슬레가 속회 회원과 그 지도자들에게 부여한 지침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회원 : 일주에 목요일 한번 모임
1. 가난한 자들의 생활을 보살피기 위하여
2.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3. 그들을 위로하고 충고하고 격려해 주기 위하여
(나) 속회지도자 (Leader) : 매주 한번씩 모임
1. 속회내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영적 성장을 조사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충고하고 견책하고 위로하고 권고한다. 그들이 바치는 헌금을 모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다.
2. 신도회에 교역자나 구역장을 만나서 병든 자나 생활이 흐트러진 자, 견책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해 교역자에게 보고하고 전 주에 여러 속회에서 받은 헌금을 전달한다.
(다) 구원받기 위한 행동 지침
1.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악한 생각을 피한다.
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다.
나. 안식일에 사고 팔며 일하여 성일을 더럽히지 않는다.
다. 독한 술을 팔고 사지 않으며 마시지 않는다.
라. 말다툼을 피하고 법정에 고소하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마. 부정한 물품을 사고 팔지 않는다.
바. 고리로 돈을 빌려 주지 않는다.
사. 불경건한 농담을 하지 않는다.
2. 선한일을 행한다.
가. 기회가 있는대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되 특히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환자나 죄수를 찾아가서 도와준다.
나. 성결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도록 한다.
다. 이같은 일을 오래 참음과 꾸준한 노력으로 계속하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같이 진다.
3. 하나님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가. 공예배에 참석한다.
나. 설교를 들으며
다. 주의 만찬 (성만찬)에 참여 하며
라. 은밀히 기도하며
마. 성경을 보고 연구하며
바. 금식한다.
(라) 경건 생활 지침
1. 기 도
가. 회개와 화해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가 ?
나.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개인 기도를 하는가 ?
다. 매일 아침 5시에 새벽 기도회를 드리는가 ?
2. 성서연구
가. 매일 일정한 분량을 계속적으로 읽는가 ?
나. 성경을 보기 전에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는가 ?
다. 성경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 하는가 ?
라. 성경 연구를 치밀하게 하는가 ?
마.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성경을 연구 하는가 ?
3. 성 만 찬
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만찬에 참여 하는가 ?
나. 참석 전에 엄숙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리는가 ?
다. 참여하면서 자기 몸을 바쳐 헌신할 것을 다짐하는가 ?
4. 금 식 : 매주 금요일 마다 성경대로 금식하는가 ?
웨슬레가 속회 회원들을 철저히 훈련시키고자 하였음을 이와같은 지침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웨슬레는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각자 주일마다 방문하는 교인들의 생활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여 보고해 줄 것을 당부하였고, 그들은 지시대로 이행하였다. 그로인해 옳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의 이름이 밝혀 졌다. 그 중 얼마는 가던 길에서 돌아서 회개했고 또 얼마는 우리에게서 아주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웨슬레는 런던과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방법을 실시하였다. 악한 자들이 색출되고 훈계받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죄의 길을 끊어버린다면 다시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러나 계속 그 길을 버리지 못하면 공개적으로 이름을 밝혔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며 기도하였다. 이와같이 웨슬레는 속회의 조직과 운영을 통하여 목회 훈련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