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현대신학자료1

모라비안 교회를 섬긴 백작 Zinzendorp

교회를 섬긴 백작 Zinzendorp(1700-1760, Zinzendorp)   
http://cafe.naver.com/modernth/451   윤진희(MIR)
 
진젠도르프의 성장기
+ 어린시절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는 개신교적 신앙 때문에 망명한 남부 오스트리아의 귀족 집안의 후예이다. 스페너의 열렬한 후원자인 경건한 할머니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는 성장하였다. 스페너는 자주 진젠도르프 집을 방문하여 영적인 교훈과 감화를 어린 진젠도르프에게 끼쳤기 때문에 진젠도르프는 어릴적부터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고, 1710년부터 1716년까지 6년 동안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식 기독교 교육이 엄격히 준행되는 할례에 있는 프랑케 페디고기옴에서 교육을 받았다. 유아시절의 좋은 신앙 가정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 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된 학창시절
그는 그의 일기장에 '나에게는 단 한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9살 때에 서인도에 관한 선교보고서를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자기 생애의 목적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귀국한 선교사들과 접할 기회가 많이 있었으며. 선교사들의 해외 선교 강연에 큰 감명을 받고,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자 결단하게 되었다. 이 계획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다섯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이라는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구성원들이 기도로 하나되어 신앙 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비슷한 기도 모임을 7개나 더 만들었다.
+ 선교의 확고한 결심
진젠도르프는 세상 명예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법학 공부대신 몰래 신학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던 중 19살 졸업 여행하는 도중에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게 되었는데 그 그림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의 아랫단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이곳에서 예수님께 일생을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결심을 확고하게 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과의 만남
모라비안 교회가 발생한 모라비아·보헤미아 왕국에는 9세기에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그런데 로마 교황은 이 왕국에게 로마 카톨릭식으로 예배를 드리기를 강요하였고, 이에 반대하여 개혁가 죤 후스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하였다. 그는 교회의 머리가 교황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며,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복음주의자였다. 교황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1415년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 핍박을 피해 1457년 일단의 무리가 한 성에 숨어들어가 신약성경을 모델로 하는 복음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모라비안 교회의 전신인 형제회였다.
+ 피박받는 모라비안
카톨릭은 자신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이 형제회를 맹렬하게 핍박했다. 형제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엄동설한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들판에 쫓겨나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굶어죽었갔다.
그들은 잔인한 핍박을 받아 생명과 재산과 지위를 잃어버리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결코 포기치 않았다. 핍박을 통해서 더욱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정금과 같이 순수해져만 갔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간 것이다.
또한 그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그 나라 최상의 학문은 그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던 중 1558년에 모라비안 교회에 대해 호의적인 왕들이 등장함에 따라 60년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갖게되었다. 그러나 핍박을 받을 때에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순수 복음신앙을 버림으로 영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카톨릭과 모라비안 교회간에 30년 동안의 전쟁이 치뤄졌고, 1620년 모라비안 교회가 패배한 이후 핍박을 받게되었다. 오랜 핍박으로 모라비안 교회는 거의 전멸하게 되었으나, 1722년 남은 자들이 진젠도르프의 땅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이미 이들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그곳에서 거주하고 생활하도록 많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재능과 재산을 쓰셔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또 이를 통해 더욱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고 이 부르심을 영접하였다. 그는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있던 모라비안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뭉쳤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 하에 신앙 훈련을 시켰다. 이러한 엄격한 훈련과 간섭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어디든지 준비된 일꾼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 모라비안의 선교활동
1731년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크리스챤 Ⅳ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서인도에서 온 한 흑인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두 선교사를 보내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요청에 깊은 감명을 받은 진젠도르프는 돌아와서 사람들앞에서 그 문제를 놓고 호소하였습니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으며 대단히 열정적이었습니다. 그 계기로 모라비안의 선교사들이 세계선교를 품고 나갔으며 그곳에서 낮에는 흑인들과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개신교 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 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선교의 확산은 계속되었으며 1930년까지 세계 14나라에 3,000여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 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 진젠도르프의 끊임없는 선교의 열정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시기와 비난으로 그는 1736년에 고향인 작센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오히려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계 각 곳에 흩어져있던 선교사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으로 확신하였다.
진젠도르프 영향을 받은 형제회 모라비안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 흩어짐은 곧 세계 선교를 의미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안의 선교 사역을 통해 변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감리 교회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 죤 웨슬리(John Wesley)와 모라비안의 만남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모라비안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 구원의 확신, 그리고 믿음에 근거한 분명한 신앙 간증을 통해 웨슬리는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그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세계 각 곳을 쉴새 없이 다니며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직접 전도하여 모라비안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전 세계에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진젠도르프는 만년에 일체의 오해에서 벗어나서 마음껏 일을 하다가 1760년 60세 때 쉴새 없이 활동을 하던 중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