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II) :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경건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II) :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http://cafe.naver.com/modernth/1086
스페너는 1686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드레스덴의 궁중 수석 설교자로 청빙받았던 것이다. 드레스덴은 작센주의 선제후 요한 게우르그 3세가 거주하는 도시, 곧 작센주의 수도였다. 당시의 독일 루터교 조직에서 작센주는 선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덴 궁의 수석 설교자 자리는 루터교의 목사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영전'하여 가면서도 스페너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경건주의 운동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페너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상태가 자신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던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회에서 갈라져나간 분파주의였다.
스페너와 함께 1670년에 경건의 모임을 시작한 사람 가운데 요한 야콥쉬츠는 스페너와 함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이 쉬츠가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1670년대 후반에 기성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1683년부터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경건의 모임, 왜 중단했는가
평생 목회를 한 '교회의 사람'이었던 스페너에게 분리주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1675년에 '경건한 요청'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불타올랐던 경건주의 운동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곧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1670년대 말기부터 스페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스페너의 마음에 가장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은 바로 스페너 그룹에서 일기 시작한 분파주의였다. 분파주의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1670년에 시작된 경건의 모임을 공격한 가장 큰 이유도 분리의 위험 때문이었다. 경건의 모임은 '경건한 요청'에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분리주의로 인해 스페너의 교회갱신론이 벽에 부딪혔다고 볼 수 있다.
스페너 자신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했던 고별설교에서 스페너는 자신이 20년 동안 일했던 프랑크푸르트 시절을 정리하였다. 경건의 모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경건의 모임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지만, 이 모임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음을 시인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다음부터 스페너 자신은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경건한 요청'에서 스페너가 교회갱신의 방법으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었는데, 경건의 모임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스페너가 작은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본래의 구도를 포기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었다. 경건의 모임과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결론부터 말하며, 교회를 갱신하려는 스페너의 본디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스페너의 근본 구도는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체(대중교회)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즈음의 정통주의가 '제도적인 방법(교회 치리)을 통하여 일시에 대중 교회를 갱신하려고 한 것'과 뚜렷이 구분된다. 경건의 모임은 스페너의 이런 갱신론을 관철시키는 핵심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나타내는 스페너의 표현 가운데 '경건의 모임'말고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고 표현이 있다. 흔히 스페너의 공동체 사상을 나타내는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돼왔다. 그러나 두 개념은 서로 다르다. 스페너가 교회갱신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면,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살피기 전에 두 사상이 스페너의 목회사역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사에서 스페너가 처음 쓴 말이다. 스페너가 1675년 7월 23일에 사무엘 베네딕트 가르프쪼프(Samuel Benedikt Carpzov)에게 보낸 편지에 이 표현이 처음 나온다. 이후 스페너는 1675년 9월 8일자로 쓴 [경건한 요청]의 서문에서 이 사상이 교회 갱신론의 심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옮겨 목회하면서 스페너는 죽을 때까지 이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만년에 쓴 편지, 1701년 1월 25일자 편지에서 스페너는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모으는 것'을 통하여 교회를 갱신하는 방법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는 자신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경건의 모임에 대해서는 상황이 반대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스페너는 드레스덴에서의 취임 설교와 고별 설교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취임 설교에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취임과 고별 설교들에서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사상을 계속하여 자신의 사역 원리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페너는 그의 편지에서 경건의 모임은 여건이 되는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그 한계를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와 경건의 모임은 어떻게 다른가?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원리라면 경건의 모임은 이 원리에서 끌어낸 구체적인 한 가지 방법이다. 앞의 것은 상위 개념이며 뒤의 것은 종속 개념인 셈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바뀌어도 원리가 않으면 본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경건의 모임은 당시의 교회제도 안에서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으며, 그 충돌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드레스덴으로 가면서 근본 원리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교리문답교육(Katechismus)이 그것이었다. 대안적 교리문답교육
교리문답교육은 당시의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된 모임이었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에서 교리문답교육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에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교리문답교육은 아직 그의 시야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건의 모임이 갱신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벽에 부딪히자 교리문답교육이 스페너에게 그 대체 방법으로 다가왔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원리에 근거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교리문답교육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스페너는 전통적인 교리문답교육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바꾸었다. 곧 교리문답책에 나오는 항목을 단순히 암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로 교육 대상이던 것을 어른들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교리문답책의 내용을 언제나 성경과 연관시켜서 가르쳤다. 교리문답교육에 성경을 가져오게 하여 교리문답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찾아보게 하였고 암기가 필요할 때는 교리문답 내용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암송하게 하였다.
교회갱신은 하나님 말씀이 살아움직일 때만 가능하며 하나님 말씀이 살아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마당으로써 경건의 모임을 생각했던 스페너가 이제 교리문답교육을 그 마당으로 택하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교리문답교육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교리문답 말고도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에 개혁교에서는 심방이 루터교에 비해서 많이 발달해 있었고 목회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스페너는 심방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가정예배가 교회사에서 신앙훈련의 중요한 장으로 등장한 것은 경건주의에서이다. 가정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은 전형적인 경건주의적 모습이다. 스페너는 가정예배도 교리문답 교육과 같은 부류로 보았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추천하고 제안하기는 했지만 특정한 방법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대중 교회 안에서 작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노력
스페너는 '교회의 사람'이었다. 교회갱신을 위해 애쓰면서 스페너는 두 쪽에서 공격을 받았고, 또 그 둘과 싸웠다. 한 쪽으로는 정통주의였으며 다른 한 쪽으로는 탈교회적 급진주의였다. 기존 교회가 철저하게 병들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근본적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페너는 정통주의와 충돌했다.
그런 한편 스페너는, 교회에는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음으로써 탈교회적 급진주의를 반대했다. 기존 교회는 벌써 개혁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바벨론이며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서 떨어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탈교회적 급진주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스페너는 이 둘 사이의 길을 걸었다. 스페너 자신은 이 길을 '중용의 길', 또는 '황금같은 중용의 길'이라고 불렸다 그 길은 기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도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믿는 길이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제도권 교회밖에 있던 원리(작은 교회. ecclesiola)를 교회에 정착시키려고(교회화) 애썼던 길이었다.
순수한 성도들만 모이자는 작은 교회 사상은 교회 역사에서 아주 초기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소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끼친 공헌은 이러한 작은 교회 사상을 대중 교회 안에(in ecclesia)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작은 교회' 사상은 스페너가 개혁교회의 탈교회적 경건주의자인 라바디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스페너는 이 사상에 '교회 안에'란 말을 더 붙였다. 이것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라는 말이 덧붙음으로써 '작은 교회'란 말은 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탈교회적이며 소종파적이며 분리주의적인 '작은 교회'가 '교회 안에'를 통하여 세례받음으로써 교회화(Verkirchlichung)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스페너의 사상을 역사적인 상황에서 분석하였다. 이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성경 기독교-교리분답 기독교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 경건주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독교에서 교리문답은 신자들에게 교파적 정체성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 교재였다. 개혁자들이 성경을 쉬운 모국어로 번역하였으나 '성경은 평범한 모든 성도들이 늘 읽어야 할 책'이라는 전반적 인식은 아직 없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이것이 관철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으로부터 정통주의까지, 곧 경건주의가 시작되기전까지의 기독교를 '교리문답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성경은 기독교 신앙을 위한 가장 일상적인 책이 되었다. 스페너는 모든 사람이 성경의 모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인간의 책(신앙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를 향하는 마당이었다.
2. 정통 실천 - 정통 교리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통주의가 정통-교리(Ortho-doxie)를 강조한 데 반해서 경건주의는 강조점을 정통-실천(Ortho-praxis)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이었다.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지키는 것보다 앞서게 되었다.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과 초기의 경건주의는 정통교리와 정통실천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았다. 결코 교리가 필요없다고 보지 않았다. 강조점은 삶의 변화에 두었던 것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지적 훈련의 마당이 아니었다. 기독교적인 정보를 나누고 모으는 모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살아 움직임으로써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있던 마당이었다.
3. 인격적 만남과 훈련 - 제도 순응
중세적 신앙은 거대한 제도인 교회에 순응하고 소속하는 것에 그 중심이 있다. 구원이란 성례적 구조를 가진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며,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의심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그러하다고 인정된 것을 개인은 그저 동의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사상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나 개인이 어떻게 느끼고 체험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르네상스 운동이 이러한 사상전환의 원인이었다. 계몽주의에 와서 이러한 것이 아주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신앙이 제도 중심적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인격적인 만남의 신앙이다. 중세의 신앙이 자각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순응의 신앙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나의 깊은 자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훈련의 신앙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공간은 이런 인격적 만남과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4. 교회화 - 탈교회적 분리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안의 작은 교회의 주소가 '교회 안'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라는 말은 좁게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직접 일하시기도 하지만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가장 중심적으로 이시며, 현실 교회에 여러 가지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교회에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신앙적 확신이 '교회 안에'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스페너는 작은 모임이 어느 식으로든 목회적 관리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목회적 관리에서 벗어날 때의 위험성을 스페너는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목회적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교회 안에'라는 말은 '교회 옆에'도 될 수 있다. 혹은 교회의 목회적 지도와 연결되어 '세상 한 가운데서의 작은 교회 모임'도 될 수 있다. 오늘날 사회 안의 여러 가지 기독교적 모임이 경건주의의 공동체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경건주의 안에 나타난 '경건의 모임'과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제자훈련의 교회사적 근거를 찾아보았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이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이를 통하여 분명해졌다. 이것에 근거를 두고 오늘의 한국교회 현장을 살펴보며,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계속되는 토론을 위한 재료로써 제자훈련과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해본다.
1. 영성훈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영성', '영성훈련', '영성신학'은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런 말을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국교회는 바야흐로 영성신학의 시대로 돌입한 것인가? 교회는 그 목회적 생명을 영성훈련에 걸었는가?
그러나 영성신학이 정착되어가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성과 관련하여 출판된 많은 책들은 다만 이전에 '신앙'이란 단어를 쓰던 자리에 영성이란 말을 넣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전에 쓰던 '경건'이란 말을 이데 한껏 '유행하는' 영성이란 말로 바꾼 것 같기도 하다. 교회사에 경건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글을 신학적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무조건 '00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반사다.
신학이 크게 인문과학의 테두리에 있다고 본다면, 개념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각각 다른 발전 단계와 다른 상황속에서 생긴 '경건'과 '영성'을 무조건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최근에 발전해온 영성신학을 종교개혁에 근거를 둔 개신교에서 거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영성신학이 현장에서 너무도 유행하기 때문에 신학적인 비판이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질문은 끝이없다.
2. 제자훈련 시대는 끝나가는가
한국사람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심성이 강하다.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에 깊이 접맥된 것은 이런 종교적 심성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에서는 신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제의나 제의를 통한 종교적 감성이 우선적이다. 불교의 경전이 있지만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경전의 내용은 평범한 사람의 종교적 심성을 달래주는 주문이 되기도 한 것은 그 좋은 보기일 것이다.
80년대 한국교회에 강한 목회적 도전과 선교적 열의를 일으켰던 제자훈련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이다. 말씀만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의 제도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표현을 빌리자면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과 의사를 소통하는가? 종교개혁의 대답은 '말씀만으로'이다. 80년대의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성경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의 자리를 이만한 강도로, 이만큼 넓은 목회현장에서 굳혀놓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요즈음, 제자훈련의 한계를 말하는 일이 잦아진 듯하다. 제자훈련의 한계를 '성령의 능력'으로써 극복하려는 분위기가 퍼지는 것 같다.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서 그 사명을 다했는가?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의 끝무렵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훈련을 '넘어서', 곧 지금까지의 제자훈련이 가지고 있던 단점을 보완하여 더 완숙한 형태의 또 다른 제자훈련을 찾아가는 중인가?
3. 성령충만은 아직도?
한국의 진보적인 교계에서 영성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고 있을 때, 보수적인 쪽에서는 성령충만을 말하고 있었다. 70년대는 오순절적인 성령충만이 한국교회에 강하게 퍼져가던 때였다. 더불어 부흥회는 이 때에 한국교회의 양적팽창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오늘날 제자훈련이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다시 '성령충만'이란 주제로 돌아가는 것인가? 영성이 유행하는 시대에 성령충만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기독교 상담학과 상담심리 치료가 유행하면서 만사해결의 구호였던 성령충만은 뒤로 처진 듯하다. 오늘의 목회자는 상담에 대하여, 가정사역에 대하여, 부부문제에 대하여 미국풍의 임상 의사처럼 행동해야 할 부담을 받기도 한다. 목회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단어로서 성령충만은 아직도 유효한가?
전망-21세기의 한국교회와 열린 경건
1. 유행을 넘어서!
우리의 할아버지대에 목회했던 선배들에게도 제자훈련은 이미 있었다. 한 성도의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마치 부모가 자녀를 기르듯 노심초사했던 선배들의 목양은 곧 제자훈련이 아니었던가. 세속적인 야망과 자기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기로 헌신했던 그 선배님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영성의 핵심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행(시대사조)을 비판하는 능력이 적다는 것이다. 매스컴이 주도하는 방향, 경제발전과 함께 국가가 추구해온 방향에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순응한 편이었다. 유행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비판하는 훈련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교회현장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목회 프로그램이 한때 유행하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유행하는 기간을 다르고 현장에서 적용되는 정도는 달라도 '유행하고 지나가는' 것에서는 비슷하다. 유행을 넘어서야 한다.
2. 삶 전체로!
기독교의 신앙 인식과정은 전인격적이어야 한다. 지성, 감성, 의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하여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디 전인격적인 역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교회에서는 어느 한 쪽만이 지나치게 강조돼왔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적 신앙에서 의지쪽을 강조하였다면, 성령충만을 외치는 신앙에서는 감성을 강조하였고, 제자훈련형의 신앙에서는 지적인 인식과정에 큰 비중을 두었다. 기독교의 삶이란 이 모두를 묶은 옹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옹근 삶과 관련되어 있다.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성령님은 전체의 삶을 변화시키신다.
3. 열린 경건으로!
경건주의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이었다. '경건'과 '경건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열린 경건'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것이다. 열린 경건은 근본적으로 말씀으로써 옹근 삶이 변하는 것에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은 17세기에 시작된 경건주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지, 정, 의를 통합한 신앙인식, 그로부터 일어나는 총체적인 삶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함축성을 가지고 기독교 현자에 영향을 끼친 제자훈련을 비로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가 삶을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기독교가 참으로 부흥하기 위해서는 열린 경건 안에서 제자훈련의 새로운 전망을 보아야 한다.
스페너는 1686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났다. 드레스덴의 궁중 수석 설교자로 청빙받았던 것이다. 드레스덴은 작센주의 선제후 요한 게우르그 3세가 거주하는 도시, 곧 작센주의 수도였다. 당시의 독일 루터교 조직에서 작센주는 선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덴 궁의 수석 설교자 자리는 루터교의 목사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영전'하여 가면서도 스페너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경건주의 운동이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페너가 생각하기에 최악의 상태가 자신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했던 바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발생하였다. 그것은 교회에서 갈라져나간 분파주의였다.
스페너와 함께 1670년에 경건의 모임을 시작한 사람 가운데 요한 야콥쉬츠는 스페너와 함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이 쉬츠가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1670년대 후반에 기성 교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1683년부터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경건의 모임, 왜 중단했는가
평생 목회를 한 '교회의 사람'이었던 스페너에게 분리주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다. 1675년에 '경건한 요청'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불타올랐던 경건주의 운동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곧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1670년대 말기부터 스페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는데, 스페너의 마음에 가장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은 바로 스페너 그룹에서 일기 시작한 분파주의였다. 분파주의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1670년에 시작된 경건의 모임을 공격한 가장 큰 이유도 분리의 위험 때문이었다. 경건의 모임은 '경건한 요청'에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가장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분리주의로 인해 스페너의 교회갱신론이 벽에 부딪혔다고 볼 수 있다.
스페너 자신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했던 고별설교에서 스페너는 자신이 20년 동안 일했던 프랑크푸르트 시절을 정리하였다. 경건의 모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는 경건의 모임이 좋은 결과도 가져왔지만, 이 모임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음을 시인했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다음부터 스페너 자신은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경건한 요청'에서 스페너가 교회갱신의 방법으로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경건의 모임이었는데, 경건의 모임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스페너가 작은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본래의 구도를 포기했다는 것인가? 지금까지의 경건주의 연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었다. 경건의 모임과 교회 안의 작은 교회
결론부터 말하며, 교회를 갱신하려는 스페너의 본디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스페너의 근본 구도는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체(대중교회)를 갱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즈음의 정통주의가 '제도적인 방법(교회 치리)을 통하여 일시에 대중 교회를 갱신하려고 한 것'과 뚜렷이 구분된다. 경건의 모임은 스페너의 이런 갱신론을 관철시키는 핵심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제도적인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나타내는 스페너의 표현 가운데 '경건의 모임'말고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고 표현이 있다. 흔히 스페너의 공동체 사상을 나타내는 이 두 가지 표현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돼왔다. 그러나 두 개념은 서로 다르다. 스페너가 교회갱신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면,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차이를 살피기 전에 두 사상이 스페너의 목회사역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자.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표현은 교회사에서 스페너가 처음 쓴 말이다. 스페너가 1675년 7월 23일에 사무엘 베네딕트 가르프쪼프(Samuel Benedikt Carpzov)에게 보낸 편지에 이 표현이 처음 나온다. 이후 스페너는 1675년 9월 8일자로 쓴 [경건한 요청]의 서문에서 이 사상이 교회 갱신론의 심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으로 옮겨 목회하면서 스페너는 죽을 때까지 이 사상을 버리지 않았다. 만년에 쓴 편지, 1701년 1월 25일자 편지에서 스페너는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모으는 것'을 통하여 교회를 갱신하는 방법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는 자신의 '원리'라고 말하고 있다.
경건의 모임에 대해서는 상황이 반대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스페너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면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걸맞게 스페너는 드레스덴에서의 취임 설교와 고별 설교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취임 설교에서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취임과 고별 설교들에서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사상을 계속하여 자신의 사역 원리로 드러내고 있었다. 스페너는 그의 편지에서 경건의 모임은 여건이 되는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그 한계를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와 경건의 모임은 어떻게 다른가?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원리라면 경건의 모임은 이 원리에서 끌어낸 구체적인 한 가지 방법이다. 앞의 것은 상위 개념이며 뒤의 것은 종속 개념인 셈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바뀌어도 원리가 않으면 본디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경건의 모임은 당시의 교회제도 안에서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으며, 그 충돌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드레스덴으로 가면서 근본 원리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교리문답교육(Katechismus)이 그것이었다. 대안적 교리문답교육
교리문답교육은 당시의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된 모임이었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에서 교리문답교육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에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교리문답교육은 아직 그의 시야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건의 모임이 갱신의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벽에 부딪히자 교리문답교육이 스페너에게 그 대체 방법으로 다가왔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원리에 근거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서 교리문답교육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스페너는 전통적인 교리문답교육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바꾸었다. 곧 교리문답책에 나오는 항목을 단순히 암기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로 교육 대상이던 것을 어른들까지 포함시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교리문답책의 내용을 언제나 성경과 연관시켜서 가르쳤다. 교리문답교육에 성경을 가져오게 하여 교리문답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찾아보게 하였고 암기가 필요할 때는 교리문답 내용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암송하게 하였다.
교회갱신은 하나님 말씀이 살아움직일 때만 가능하며 하나님 말씀이 살아움직일 수 있는 구체적인 마당으로써 경건의 모임을 생각했던 스페너가 이제 교리문답교육을 그 마당으로 택하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하게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교리문답교육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교리문답 말고도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당시에 개혁교에서는 심방이 루터교에 비해서 많이 발달해 있었고 목회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스페너는 심방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보았다.
가정예배가 교회사에서 신앙훈련의 중요한 장으로 등장한 것은 경건주의에서이다. 가정에서 찬송 소리가 들리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은 전형적인 경건주의적 모습이다. 스페너는 가정예배도 교리문답 교육과 같은 부류로 보았다. 스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추천하고 제안하기는 했지만 특정한 방법을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대중 교회 안에서 작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노력
스페너는 '교회의 사람'이었다. 교회갱신을 위해 애쓰면서 스페너는 두 쪽에서 공격을 받았고, 또 그 둘과 싸웠다. 한 쪽으로는 정통주의였으며 다른 한 쪽으로는 탈교회적 급진주의였다. 기존 교회가 철저하게 병들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근본적으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스페너는 정통주의와 충돌했다.
그런 한편 스페너는, 교회에는 새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음으로써 탈교회적 급진주의를 반대했다. 기존 교회는 벌써 개혁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바벨론이며 그러므로 기존 교회에서 떨어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탈교회적 급진주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스페너는 이 둘 사이의 길을 걸었다. 스페너 자신은 이 길을 '중용의 길', 또는 '황금같은 중용의 길'이라고 불렸다 그 길은 기존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도 교회에 소망이 있다고 믿는 길이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하여 제도권 교회밖에 있던 원리(작은 교회. ecclesiola)를 교회에 정착시키려고(교회화) 애썼던 길이었다.
순수한 성도들만 모이자는 작은 교회 사상은 교회 역사에서 아주 초기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모임은 대부분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소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스페너의 경건주의가 끼친 공헌은 이러한 작은 교회 사상을 대중 교회 안에(in ecclesia)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작은 교회' 사상은 스페너가 개혁교회의 탈교회적 경건주의자인 라바디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다. 스페너는 이 사상에 '교회 안에'란 말을 더 붙였다. 이것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다. '교회 안에'라는 말이 덧붙음으로써 '작은 교회'란 말은 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탈교회적이며 소종파적이며 분리주의적인 '작은 교회'가 '교회 안에'를 통하여 세례받음으로써 교회화(Verkirchlichung)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스페너의 사상을 역사적인 상황에서 분석하였다. 이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1. 성경 기독교-교리분답 기독교
종교개혁이 일어난 다음 경건주의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독교에서 교리문답은 신자들에게 교파적 정체성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신앙교육 교재였다. 개혁자들이 성경을 쉬운 모국어로 번역하였으나 '성경은 평범한 모든 성도들이 늘 읽어야 할 책'이라는 전반적 인식은 아직 없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이것이 관철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으로부터 정통주의까지, 곧 경건주의가 시작되기전까지의 기독교를 '교리문답 기독교'라고 부를 수 있다.
경건주의에 와서야 성경은 기독교 신앙을 위한 가장 일상적인 책이 되었다. 스페너는 모든 사람이 성경의 모든 책을 읽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인간의 책(신앙 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를 향하는 마당이었다.
2. 정통 실천 - 정통 교리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정통주의가 정통-교리(Ortho-doxie)를 강조한 데 반해서 경건주의는 강조점을 정통-실천(Ortho-praxis)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실천이었다. 경건의 실천(Praxis pietatis)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지키는 것보다 앞서게 되었다. 경건주의의 주된 흐름과 초기의 경건주의는 정통교리와 정통실천 가운데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았다. 결코 교리가 필요없다고 보지 않았다. 강조점은 삶의 변화에 두었던 것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지적 훈련의 마당이 아니었다. 기독교적인 정보를 나누고 모으는 모임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살아 움직임으로써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가 있던 마당이었다.
3. 인격적 만남과 훈련 - 제도 순응
중세적 신앙은 거대한 제도인 교회에 순응하고 소속하는 것에 그 중심이 있다. 구원이란 성례적 구조를 가진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며,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의심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내가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그러하다고 인정된 것을 개인은 그저 동의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사상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었다. 나 개인이 어떻게 느끼고 체험하느냐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르네상스 운동이 이러한 사상전환의 원인이었다. 계몽주의에 와서 이러한 것이 아주 뚜렷해졌다. 이러한 변화를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중세의 신앙이 제도 중심적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인격적인 만남의 신앙이다. 중세의 신앙이 자각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순응의 신앙이라면 근세의 신앙은 나의 깊은 자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훈련의 신앙이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는 공간은 이런 인격적 만남과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4. 교회화 - 탈교회적 분리주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회안의 작은 교회의 주소가 '교회 안'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라는 말은 좁게 물리적인 위치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직접 일하시기도 하지만 여전히 교회를 통하여 가장 중심적으로 이시며, 현실 교회에 여러 가지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교회에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신앙적 확신이 '교회 안에'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스페너는 작은 모임이 어느 식으로든 목회적 관리와 지도 아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목회적 관리에서 벗어날 때의 위험성을 스페너는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목회적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교회 안에'라는 말은 '교회 옆에'도 될 수 있다. 혹은 교회의 목회적 지도와 연결되어 '세상 한 가운데서의 작은 교회 모임'도 될 수 있다. 오늘날 사회 안의 여러 가지 기독교적 모임이 경건주의의 공동체 사상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경건주의 안에 나타난 '경건의 모임'과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제자훈련의 교회사적 근거를 찾아보았다.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이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이를 통하여 분명해졌다. 이것에 근거를 두고 오늘의 한국교회 현장을 살펴보며,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계속되는 토론을 위한 재료로써 제자훈련과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질문의 형태로 제시해본다.
1. 영성훈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인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영성', '영성훈련', '영성신학'은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런 말을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국교회는 바야흐로 영성신학의 시대로 돌입한 것인가? 교회는 그 목회적 생명을 영성훈련에 걸었는가?
그러나 영성신학이 정착되어가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성과 관련하여 출판된 많은 책들은 다만 이전에 '신앙'이란 단어를 쓰던 자리에 영성이란 말을 넣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전에 쓰던 '경건'이란 말을 이데 한껏 '유행하는' 영성이란 말로 바꾼 것 같기도 하다. 교회사에 경건이란 단어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글을 신학적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무조건 '00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반사다.
신학이 크게 인문과학의 테두리에 있다고 본다면, 개념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각각 다른 발전 단계와 다른 상황속에서 생긴 '경건'과 '영성'을 무조건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최근에 발전해온 영성신학을 종교개혁에 근거를 둔 개신교에서 거르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영성신학이 현장에서 너무도 유행하기 때문에 신학적인 비판이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질문은 끝이없다.
2. 제자훈련 시대는 끝나가는가
한국사람은 전통적으로 종교적 심성이 강하다. 기독교가 들어와 한국에 깊이 접맥된 것은 이런 종교적 심성때문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종교적 심성에서는 신과의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제의나 제의를 통한 종교적 감성이 우선적이다. 불교의 경전이 있지만 불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경전의 내용은 평범한 사람의 종교적 심성을 달래주는 주문이 되기도 한 것은 그 좋은 보기일 것이다.
80년대 한국교회에 강한 목회적 도전과 선교적 열의를 일으켰던 제자훈련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이다. 말씀만을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의 제도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언어표현을 빌리자면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과 의사를 소통하는가? 종교개혁의 대답은 '말씀만으로'이다. 80년대의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성경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성경의 자리를 이만한 강도로, 이만큼 넓은 목회현장에서 굳혀놓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요즈음, 제자훈련의 한계를 말하는 일이 잦아진 듯하다. 제자훈련의 한계를 '성령의 능력'으로써 극복하려는 분위기가 퍼지는 것 같다. 제자훈련은 한국교회에서 그 사명을 다했는가?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의 끝무렵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훈련을 '넘어서', 곧 지금까지의 제자훈련이 가지고 있던 단점을 보완하여 더 완숙한 형태의 또 다른 제자훈련을 찾아가는 중인가?
3. 성령충만은 아직도?
한국의 진보적인 교계에서 영성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고 있을 때, 보수적인 쪽에서는 성령충만을 말하고 있었다. 70년대는 오순절적인 성령충만이 한국교회에 강하게 퍼져가던 때였다. 더불어 부흥회는 이 때에 한국교회의 양적팽창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오늘날 제자훈련이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면서 다시 '성령충만'이란 주제로 돌아가는 것인가? 영성이 유행하는 시대에 성령충만은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기독교 상담학과 상담심리 치료가 유행하면서 만사해결의 구호였던 성령충만은 뒤로 처진 듯하다. 오늘의 목회자는 상담에 대하여, 가정사역에 대하여, 부부문제에 대하여 미국풍의 임상 의사처럼 행동해야 할 부담을 받기도 한다. 목회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단어로서 성령충만은 아직도 유효한가?
전망-21세기의 한국교회와 열린 경건
1. 유행을 넘어서!
우리의 할아버지대에 목회했던 선배들에게도 제자훈련은 이미 있었다. 한 성도의 신앙을 키우기 위하여 마치 부모가 자녀를 기르듯 노심초사했던 선배들의 목양은 곧 제자훈련이 아니었던가. 세속적인 야망과 자기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기로 헌신했던 그 선배님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영성의 핵심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지금 한국의 기독교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행(시대사조)을 비판하는 능력이 적다는 것이다. 매스컴이 주도하는 방향, 경제발전과 함께 국가가 추구해온 방향에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순응한 편이었다. 유행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비판하는 훈련이 충분하지 못한 것은 교회현장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목회 프로그램이 한때 유행하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그것이다. 유행하는 기간을 다르고 현장에서 적용되는 정도는 달라도 '유행하고 지나가는' 것에서는 비슷하다. 유행을 넘어서야 한다.
2. 삶 전체로!
기독교의 신앙 인식과정은 전인격적이어야 한다. 지성, 감성, 의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하여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디 전인격적인 역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한국교회에서는 어느 한 쪽만이 지나치게 강조돼왔다.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적 신앙에서 의지쪽을 강조하였다면, 성령충만을 외치는 신앙에서는 감성을 강조하였고, 제자훈련형의 신앙에서는 지적인 인식과정에 큰 비중을 두었다. 기독교의 삶이란 이 모두를 묶은 옹근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옹근 삶과 관련되어 있다.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성령님은 전체의 삶을 변화시키신다.
3. 열린 경건으로!
경건주의는 성령을 통하여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변화시키려는 운동이었다. '경건'과 '경건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열린 경건'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것이다. 열린 경건은 근본적으로 말씀으로써 옹근 삶이 변하는 것에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제자훈련은 17세기에 시작된 경건주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지, 정, 의를 통합한 신앙인식, 그로부터 일어나는 총체적인 삶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함축성을 가지고 기독교 현자에 영향을 끼친 제자훈련을 비로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잔치가 삶을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기독교가 참으로 부흥하기 위해서는 열린 경건 안에서 제자훈련의 새로운 전망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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