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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I) :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경건의 위기와 소그룹을 통한 교회 갱신(I) : 야곱 스페너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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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이란 말은 일반적인 단어가 되었다. 가장 넓은 뜻에서 보면 제자훈련은 모든 문화권의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는 주님의 지상명령(마28:19-20)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은 어느정도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가장 뚜렷한 것은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의 목회철학과 교회성장에서 빼어놓을수 없는 요소가 이러한 형태의 제자훈련이다.
대략 1980년대에 한국교회에 정착되기 시작한 제자훈련은 기독교 사역의 현장에서 벌써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하여 충분한 실험을 거친 듯하다. 21세기를 몇 년 앞둔 지금 제자훈련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제자훈련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독교 사역의 다른 모델을 찾으려는 시도이거나 또는 지금까지의 제자훈련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여 더욱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을 '제자훈련을 넘어서려는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잘 알려진 제자훈련과는 대조적으로 잊혀진 운동이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일어난 갱신운동 가운데 뒷날까지 가장 크고 넓게 영향을 미친 경건주의가 그것이다. "경건주의의 역사는 곧 현대 개신교 운동의 역사이다"는 평가는 경건주의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잘 드러내준다. 그러나 160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경건주의는 그동안 신학사와 교회사에서 묻히고 잊혀진 운동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개신교가 여러 가지 점에서 경건주의의 유산을 받았음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경건주의적인 유산을 많이 가진 한국교회도 여기에서 빠지지 않는다.
소그룹 성경공부의 기원
경건주의가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연결되는 많은 끈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 가운데 하나는 제자훈련이다. 이 글에서는 제자훈련의 가장 분명한 특징인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중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와 경건주의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통한 제자훈련이라는 것으로 연관지으로 할 때 기억해야 할 해는 1675년이다. 이 해에 '경건한 요청-복음적 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으로 갱신하려는 심중으로부터의 요청'이라는 책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크푸르트교회의 수석목사로 있던 필립 야콥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1635-1705)가 이 책을 썼다. 그의 나이 40이었다. 이 책에는 그 이후로 경건주의의 방향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이 이 책의 출판으로써 경건주의가 시작됐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에 담긴 여러 가지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경건의 모임(collegia pietatis)'이다. 스페너 목사는 '경건의 요청'을 출판하기 5년 전 벌써 경건의 모임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위에서 스페너는 이 책을 통해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경건의 모임을 제안한 것이다. 그가 제안한 경건의 모임은 소그룹이었고 성경말씀을 나누는 것이 그 중심이었다. 내용상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과 거의 같다.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유형적으로' 살핀다면 성경에서 많은 보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역사적으로'는 경건주의에 그 시초가 있다. 특히 소그룹 모임이 교회 안에 정착하게 된 것은 교회사적으로 보아 경건주의에서 처음 있었던 일이다.
1670년대에 처음 시작된 경건의 모임은 그 뒤로 계속돼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독일 남서부의 뷔템베르크 주(州)교회안에 정착되어 있는 성경공부 시간은 1743년의 법령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소그룹 모임으로 인정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제자훈련의 초대사
스페너가 1670년에 경건의 모임을 시작한 다음부터 특히 1675년에 '경건한 요청'에 경건의 모임을 구체적으로 제안한 뒤부터 '경건의 모임'은 경건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에 대한 찬반은 처음부터 경건의 모임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을 변호하기 위해 1677년에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또한 경건주의 운동이 있었던 당시의 마지막 변증도 경건의 모임에 관한 것이다. 17,18세기에 경건주의와 경건의 모임이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도 한국교회에서 제자훈련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나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보면 경건의 모임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뿌리를 찾는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이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교회안에 정착될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그때의 어려움과 갈등 또는 문제점 무엇이었는지, 성공한 모델과 실패한 모델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살피는 것은 한국교회의 21세기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것이다.
경건운동의 태동
경건의 모임은 1600년대 경에 유럽 기독교 전체에 있었던 '경건성의 위기'에서 생겼다. 이 위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상황, 곧 종교개혁-정통주의-경건주의로 이어지는 교회사의 흐름을 살펴야 한다.
1. 종교개혁에서 정통주의로
1517년 마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95개조의 토론거리를 제시했다. 이후로 유럽에는 3개의 기독교 종파가 생겼다. 즉 루터파, 개혁파, 로마 가톨릭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서로를 정죄하며 무력으로 싸웠다.
이런 가운데 1555년 ,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이 아욱스부르크에서 종교 평화조약을 맺었다. 기원후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다음부터 12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유럽에서 정통종교는 하나였다. 그 참된 가르침을 돕고 지키는 국가도 하나였다. 종교도 하나, 국가도 하나라는 것은 중세를 지배한 기본도구였다. 참된 종교 말고는 모두 이단이었다. 1555년은, 물론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러한 구도가 깨지고 처음으로 둘 이상의 종교를 인정한 해인 것이다. 대략 1555년부터 정통주의 시대가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후에 세 종파가 서로 무력으로 싸웠다면 정통주의 시대는 논리로 싸운 때였다. 이 시대의 가장 큰 관심은 바른 가르침, 곧 정통교리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정통주의'라는 교회사적인 개념 자체가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정통'이라는 말과 '가르침', '견해'를 나타내는 단어를 연결한 것이 정통주의(Ortho-doxie)다. 루터파와 개혁파와 로마 가톨릭은 서로가 자신의 교리적 입장을 내세우며 논리로 싸웠다. 서로가 신조를 확정했다.이 시기를 가리켜 교리논쟁시대 혹은 신조시대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논리싸움을 하다보니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논리의 체계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체계가 개신교 신학에 다시 들어왔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거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초위에 세워진 중세신학을 스콜라신학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이 스콜라신학을 비판하고 신학을 성경위에 세웠다. "성경은 스스로를 해석한다"는 것이 루터의 신학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교리와 논리를 가지고 싸우다 보니 어느 틈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적 체계가 다시 신학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슬그머니 뒷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루터파와 개혁파 모두 이러한 흐름에서 거대한 신학의 체계를 세웠다. 정통주의 신학을 개신교 스콜라신학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정통주의에서 경건주의로
1600년 쯤에 신앙의 위기가 있었다. 젤러(W.Zeller)가 '경건성의 위기'라고 표현한 이 분위기는 이 즈음의 유럽 전체에서 발견되며, 특히 개신교에서 그러하다. 종교개혁 이후 3세대 정도인 이 때의 사람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다. 정통주의 시대의 여러 가지 복잡한 신학적, 교리적 논쟁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이 속한 교파의 교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아버지 세대와 할아버지 세대에서 절실했던 문제들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거기에 '공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찮게 보이는 문제까지 파고들어가 교리의 차이점을 밝히며 세운 엄청난 교리의 체계는 좋은데 그것이 나의 구체적인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문이 일었다. 중세에서 근세로의 큰 포물선은 '객과성에서 주관성으로의 변화'라는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3. 새로운 경건성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1600년 경의 새로운 경건성이 나타났다.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네덜란드의 '제2의 종교개혁운동' 그리고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셋 모두는 넓은 의미의 경건주의에 다 관련된다)에서 이 새로운 경건성이 모두 발견된다. 특히 독일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목사는 독일에서 새로운 경건성의 방향을 제시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아른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적다고 그 즈음의 교회를 비판했다. 교리도 필요하지만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교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좁은 의미의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스페너 목사는 아른트가 제시한 새로운 경건성을 좇았고 그 것이 꽃 피울 수 있는 구체적인 마당을 주었다. 스페너는 교리보다 중요한 것은 교리에 따른 삶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경건성에서 일어난 것은 '강조점의 이동'이었다.
흔히 경건주의를 평가할 때 경건주의가 객관성(교리, 제도, 학문적 신학 등)을 버리고 주관성(삶, 경험, 신앙 체험 등)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경건주의를 교회적 경건주의와 탈교회적 경건주의로 나눌 때, 주류인 교회적 경건주의는 분명히 그렇지 않다. 문제의 강조점의 이동이다.
경건의 모임이 탄생한 자리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경건성이다. 이렇게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큰 포물선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경건의 모임은, 그 범위를 좁혀볼 때, 어떤 사상적 틀 속에 있는가? 이 질문을 하면서 우리는 1600년대의 독일 속으로 들어간다.
1600년대의 독일과 교회 갱신
정통주의를 '죽은 정통주의'로 매도하는 것이 잘못임은 오늘날 널리 인정된 일이다. 개혁교는 처음부터 루터교보다 실천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나 루터교 안에서도 교리논쟁에만 관심을 쏟아서 삶의 변화에 무관심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는 흐름이 있었다. 1600년대에 이 흐름은 뚜렷이 관찰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요한 아른트가 대표적 인물이다. 아른트 이후로 그가 말한 새로운 경건성을 좇는 흐름이 1600년대의 독일의 일반적이이었다. 특히 '30년전쟁(1618-1648)'의 참화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사회적, 신앙적 피해가 컸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생각과 회개를 통하여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많은 사람이 교회갱신을 외쳤고 이 문제를 다룬 글도 많이 출판되었다. "늘 갱신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정통주의가 지배하던 당시의 독일에서 이러한 갱신의 흐름을 가장 분명하게 담고 있었던 도시가 스트라스부르크였다. 그 즈음 루터교 정통주의의 세 아성이었던 비텐베르크, 예나, 스트라스부르크 가운데서 마틴 부처가 일했던 스트라스부르크는 다른 두 도시와 비교할 때 신앙적 색깔이 달랐다. 스트라스부르크에는 개혁파 쪽의 영향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1600년대 전반에 이 도시의 교회와 대학교를 이끌었던 슈미트(Johann Schmidt)는 영국의 청교도주의 서적을 추천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비텐베르크와 예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스트라스부르크와 같은 경향의 루터교 정통주의를 '갱신적 정통주의'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 분위기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가 자라고 공부했다. 스페너가 1675년에 쓴 「경건한 요청」은 다른 영향도 있었지만 교회갱신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스트라스부르크 정통주의의 영향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경건의 모임은 바로 이러한 교회갱신의 틀 속에 위치하고 있다.
1. 「경건한 요청」의 출판
책 출판의 외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다. 1675년에 프랑크풀트의 출판업자인 요한 다비드 쭌너(Johann David Zunner)가 아른트의「복음서 설교집」을 출판했다. 요한 아른트의 글은 당시에 가장 많이 읽히는 글 가운데 하나였는데, 쭌너는 당시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였던 스페너에게 그 책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황제의 직할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 자리는 당시의 독일에서 유명한 자리였다. 게다가 5년 전부터 스페너가 이끌어 온 경건의 모임은 벌써 독일 전역에 유명해져 있었다. 쭌너는 가장 잘나가는 글을 출판해 내면서 유명세있는 목사에게 서문을 부탁한 셈이다. 스페너는 이 서문에 자신의 교회 갱신론을 마음껏 털어 놓았다. 그러나 외적인 동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동기였다. 사실 스페너는 오래 전부터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로 일하면서 스페너는 교회의 갱신에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마도 스페너는 교회갱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칠 알맞은 기회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서문이라는 그 때의 글 양식은 오늘날과는 달랐다. 어떤 사람의 책을 추언하기 위하여 칭찬을 몇 자 적는 정도가 아니었다. 꽤 길게 쓰기도 하며 그 안에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을 충분히 표현하던 것이 그 당시 서문의 특징이었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저술 양식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1621년에 이미 작고한 아른트 목사의 글은 당시에 꾸준히 많이 팔리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의 서문, 곧 스페너의 글이 특히 큰 호응을 얻었다. 여섯 달 정도가 지나면서 스페너의 서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할 필요가 생겼다. 스페너의 글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값비싼 「복음서 설교집」을 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고, 또한 출판된 아른트의 설교집이 이미 다 팔렸기 때문에 스페너의 글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그 설교집을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페너는 1675년 가을 책 시장에 자신의 글을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붙은 제목이 바로「경건한 요청」이었다.
'경건한 요청'이라는 제목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갱신을 요청하는 글이나 책들이 벌써 많았다. 그러나 당시의 글들과 스페너의 글이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다. 1600년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교회갱신의 요구를 창조적으로 통합했다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미래를 희망하며 갱신론을 펼쳤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갱신론 가운데 탈교회적 집단들의 견해와 뚜렷이 다른 점이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 책에 정통주의 시대인 그때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임 사상'과 교회의 미래를 희망하는 '천년왕국적인 사상'이 그것이다.
2. 「경건한 요청」의 서론
스페너는「경건한 요청」을 내면서 이책의 서론을 섰다. 「경건한 요청」서론은 본문보다 6개월 늦게 쓰인 셈이 된다. 「경건한 요청」을 크게 둘로 나누자면 서론과 본문으로 나뉜다. 서론은 대단히 중요하다. 본론의 전반적인 구도가 여기에 다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페너는 서론에서 의학 용어로써 교회의 상태를 분석한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인 교회는 병들어 있고 그래서 처방약이 필요하다. 병든 교회를 고치는 일이 쉽지는 않다. 인내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다릴 때 하나님의 시간은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경건한 요청」전체를 꿰뚫고 있는 주제는 "실천"이다. 이것이 서론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교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약을 찾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교회를 이론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스페너의 목적이 아니었다. 독자들을 교회 갱신에 참여하게 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것이 스페너가 글을 쓴 목적이었다.
3. 「경건한 요청」의 본문
「경건한 요청」의 본문은 셋으로 나뉜다. 첫째, 타락한 교회의 현재를 진단함, 둘째, 교회의 미래를 전망함, 셋째, 현재와 미래를 이을 수 있는 갱신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함이다. 스페너는 본론의 첫 부분에서 당시의 교회를 진단한다. 교회가 타락한 원인을 찾아가는 스페너의 모습은 마치 광산의 막장에서 광맥을 찾아 지칠줄 모르고 땅을 파헤치는 광부와도 같다. 스페너는 겉으로 드러난 원인보다 속에 숨겨진 원인을 찾아간다. 교회가 타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다. '바른 교리'와 '그에 따른 삶'이다. 스페너가 보기에 당시의 루터파 교회에는 이 둘 가운데 바른 교리는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삶이 없었다. 말하자면 교리와 삶의 분리, 지식과 실천의 분리, 신학과 목회 현장의 분리를 지적한 셈이다.
본문의 둘째 부분은 교회의 미래에 관한 것이다. 스페너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이 지상에서 아직 더 나은 상태를 약속하셨다"고 믿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 말고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많은 유대인이 개종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바벨론(로마 가톨릭 교회)이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언이 이루어지면 곧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이어질 것이다.
스페너는 본론의 세 번째 부분에서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여섯 가지를 제안한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 더 풍성하게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풍성하게'라는 첫째 제안은 나머지 다섯 제안 모두를 꿰뚫고 있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두 번째 제안은 '만인 제사장직'을 부지런히 실천하자는 것이다. 스페너는 개혁자들의 이 사상을 영적 제사장직이라고 표현했다. 스페너는 루터가 발견한 이 진리가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영적 제사장직의 실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서로 나누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는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인 삶에 관계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서 네 번째 제안이 이어진다. 스페너는 당시 정통주의 시대에 한껏 유행한 종파 간의 논쟁을 비판하면서 교리적 논쟁이나 변증보다 기독교의 근본 덕목인 사랑이 더 우선임을 강조한다.
다섯 번째는 신학교육의 개혁에 관한 것이다. 신학은 단순한 학문이나 지식의 체계가 아니다. "신학의 본질은 실천에 있다."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스페너의 뜻을 밝혀 말하자면, '신학대학의 목회자'이다. 신학교육에서 지식의 습득이나 학업성적보다 경건한 삶과 신앙 인격을 기르는 데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스페너는 신학교육에서 학문적인 전문성과 깊이가 필요함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스페너 자신이 처음에 학자의 길을 가려던 사람이었고, 뛰어난 신학자였으며, 문장학과 계보학에 있어서는 독일에서 선구자였다. 그러나 학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건성이다. 거룩한 삶을 훈련하는 것이다. 마지막 제안은 신학 교육에서 목회를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주로 설교에 관해서다. "설교 강단은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전파하는 곳이다." 그 때는 예술사적으로 바로크시대였다. 설교 강단의 문장의 조직학과 화려한 수사학이 넘치고 있었다. 스페너가 당시의 설교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겨냥한 것이었다.
교회갱신의 대안, '경건의 모임'
경건의 모임은 경건성의 위기란 교회사적 자리에서, 교회갱신이란 사상적 틀 안에서 나온 책「경건한 요청에」표현되었다. 아른트가 경건성의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새로운 경건성을 제시한 반면 스페너는 경건의 모임으로써 새로운 경건성이 활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마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면 그 경건의 모임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떤 것인가?
1. 개교회에서
스페너는「경건한 요청」에서 경건의 모임을 구체적으로 두 곳에서 언급한다. 본문의 세 번째 부분, 곧 갱신을 위해 여섯 개의 제안을 할 때이다. 먼저는 첫 번째 제안에서, 다음으로는 다섯 번째 제안에서이다.
첫 번째 제안은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풍성하게 하자는 것이다. 스페너는 이를 위하여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을 말한다. 첫째, 가정에서 개인 성경 읽기, 둘째, 교회에 모여 같이 성경 읽기 그리고 셋째, 경건의 모임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을 근거로 삼으며 경건의 모임을 제안하는 스페너의 말은 이렇다.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옛 사도들이 했던 방식을 다시 교회 모임에 시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정규적인 설교예배 외에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묘사했던 것과 같은 모임을 하는 것이다. 이 모임에서는 공예배에서처럼 한 사람만이 가르치지 않는다. 목회자 말고 은사와 깨달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도 무질서나 다툼이 없이 같이 이야기할 수 있고 말하는 주제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적 생각을 나눌 수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들어야 할 것이다."
스페너는 계속한다. "모임은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다. 한 교구에 많은 목회자들이 있을 경우에는 목회자들의 모임이 될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한 목회자의 인도 아래 성도들이 모일 수 있다. 성도들은 신앙이 꽤 성장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신앙성장을 원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곧 자발적 참여자들로 모임이 구성되어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모인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낭독하고, 읽은 구절마다 신앙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형제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누구나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고 그 구절을 이해한 다른 사람이(목사나 성도) 말해줄 수 있다. 서로 나눈 이야기가 성경과 성령의 뜻에 적합한지를 모두가 잘 살펴야 하되, 특히 인도자에게 그러한 책임이 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유익을 얻을 것이다. 모임의 목표는 영적 성장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농담이나 논쟁 또는 개인을 자랑하려는 것과 같은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특히 모임의 인도자로 참석한 목회자가 이 일을 책임져야 한다."
이런 경건의 모임을 통하여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스페너는 목회자와 성도를 염두에 두면서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목회자가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신뢰가 생긴다. 셋째,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충분히 연습함으로써 신앙이 빨리 성장하게 된다. 이런 성도들은 곧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스페너는 다른 모임과 비교하여 경건의 모임의 장점을 말한다. 먼저 공예배와 비교할 때 공예배 때는 설교가 쉬는 시간이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와 닿은 것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경건의 모임은 그렇지 않다. 또한 지도자 없이 가정이나 교회에서 성경을 읽는 모임에서는 의심나거나 모르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경건의 모임에서는 충분히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미 소그룹 모임과 같은 여러 형태의 모임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스페너가 제안한 모임이 그렇게 새롭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건의 모임에 목사나 또는 교회의 공적인 지도자가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스페너의 견해가 고리타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사실 공적인 모임 외에 다른 모임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스페너의 제안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스페너의 이 제안이 오늘날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의 원초적 형태인 것이다.
2. 대학교에서
스페너가 '경건한 요청'에서 경건의 모임을 언급한 두 번째 장소는 다섯 번째 제안을 하면서다. 다섯 번째는 신학교육 갱신론이다. 스페너는 신학대학에서 ''경건의 모임'을 가지자고 제안했다. 전반적으로는 개교회의 경건의 모임과 같다. 신앙이 좋은 교수가 이 모임을 인도하면 좋을 것이다.
이 모임에서는 성경의 한 본문을 택하여 읽고 연구하며, 각자가 살피고 느껴 깨달은 것을 나눈다. 지식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체적인 삶과 연관시켜서 성경을 나누어야 한다. 특히 성찬에 임하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거룩한 삶을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너가 제안한 신학대학의 경건의 모임은 매우 깊게 삶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지도하는 교수든 참석하는 학생이든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열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려는 결단이 없이 이런 모임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삶과 이어지는 마당이 바로 대학 안의 경건의 모임이다.
3. 기본 구상
'경건한 요청'은 교회 갱신론이며, 경건의 모임은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의 기본 원리는 교회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먼저 모으고 목회자가 이들을 먼저 양육하는 것이다. 이들이 신앙의 본이 될 정도로 성장하면 이들이 누룩이 되어 전체 교회가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페너는 이러한 기본 구상을 사실 '경건한 요청'의 서론에서 이미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들을(목회자들:역자)헌신합시다. 각 목회자들이 개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들을 먼저 양육하여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점점 가까이 끌 수 있게 되며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신앙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신앙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들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져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서론의 이 부분은 '경건한 요청' 모두의 핵심이며 요약이다. 경건주의의 교회 갱신 방법이 벌써 여기에 고전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통주의가 법적인 치리를 통하여 전체 교회를 한꺼번에 개혁하려고 했다면, 경건주의는 경건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앙의 헌신을 통하여 누룩이 퍼지듯이 점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교회사적으로 소그룹 성경공부 무임이 처음으로 교회 안에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스페너가 제안한 경건의 모임 때문이었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는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의 아버지인 것이다.
질문들
경건주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며 누구나 알고 있는 질문 가운데 스페너의 경건의 모임과 관련된 것이 있다. 스페너는 1686년 프랑크푸르트를 떠난 뒤로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는 더 이상 경건의 모임을 갖지 않았다. 스페너가 교회 갱신론을 펼치면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을 왜 나중에 계속하지 않았는가?
스페너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목회하면서 경건의 모임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자기와 같이 경건의 모임을 하던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분리주의자들이 생겼고, 이것이 평생 스페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다면 이런 어려움 때문에 나중에는 경건의 모임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질문은 남는다. 그러면 스페너는 교회 갱신을 포기한 것인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경건의 모임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해 가면서 우리는 경건주의 창시자 스페너의 가장 훌륭한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경건주의가 오늘의 한국교회에 특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날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의 교회 정착'이 그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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