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운동 : 필립 스페너
경건주의 운동 : 필립 스페너
http://cafe.naver.com/modernth/1082
독일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의 시작은 필립 제이콥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부터이다. 비록 후세인(後世人)들에 의해 '경건주의'가 불리웠던 움직임을 구성한 수많은 요소들이 이전부터 독일에는 유포되어 이었으나 필립 스페너를 '경건주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는 1635년 알사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철저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국의 청교도들에 관한 책들과 독일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는 중 이같은 사상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그는 독일의 존 안트의 저서 '참된 기독교'를 읽고 경건주의에 눈을 떴다. 또한 청교도 목사 레위스 베일의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학생시절에 경건과 행위에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졸업 후 제네바에 가서 칼빈과 여러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곳 교회생활에 대해 연구했고, 후에 독일 내 여러 대학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그가 1666년 안수를 받고 프랑크후르트의 목사로 있을 때, 웨드게스덴의 궁정 설교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 자신의 견해를 따르는 추종자로 삼았다.(후스트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3권. 이 형기, 차 종순 역. 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부, 1989, 394)
당시의 설교가 이론에만 치우쳐 사람의 마음 속에 큰 감명을 주는 바가 적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설교를 실제적이면서도 신앙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하게 되었으며, 1976년 그는 자기 집에서 형식적인 종교에 불만을 갖는 자들과 함께 작은 집회를 만들었다. 이 집회를 '경건회'(Cellegia Pietatis)라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 때문에 교회 안에 있던 그 운동을 스페너에 의한 경건주의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기도하였고 스페너가 주일날 4회 설교를 토론하였다. 특히 경건회를 통해서 신앙적인 독서를 통해 영적 생활을 함양하는데 전력하였다.
1674년에 안트의 설교집에 설교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긴서문을 통하여 경건주의 운동의 요강을 발표 하였다. 1675년에 이 글은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이란 표제로 출판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을 육성하기 위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책으로 스페너는 일약 경건주의 운동에 창시자로 인정을 받게 되도 이 책의 출판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하게되었다.
경건한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 스페너의 주장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당대의 도덕적인 타락, 미온적인 신앙생활, 파괴적인 신학논쟁,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생활, 성직자의 잘못된 생활 등 여러가지 점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번 째 부분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개혁해야 할 운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제의하였다.
● 성서 연구: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집회나 가정모임에서 경건한 영구를 통해서 성경을 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고 심도 깊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신자의 영적 제사장직 활용: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집회에서 책임있는 일을 부여함으로서 신자가 만인제사장의 의미를 재발견하기를 원했다.
● 기독교의 실천적 성격: 기독교 본질이 교리적인 공식속에 갇혀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신앙의 실제적 자체인 경험, 삶 자체를 통한 태도임을 깨닫기 원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실제적 경험과 실천이라 했다.
● 종교적 논쟁의 비 유익성: 세번째의 결과로 임해서 모든 논쟁을 자비심을 갖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신학교육의 혁명: 목회자의 훈련은 논리적 정통 신학을 넘어서서 경건한 책과 훈련에 흠뻑 젖으며 또한 양떼를 치는 실제적인 활동과 경험을 동시에 수반할 것을 바랬다.
● 설교의 개혁: 강단은 실제생활과 거리가 먼 묵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가르치고 감찰시키고 양육하는 본래의 목적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스페너는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시의 기존교리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에 관한한 완전 승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리가 개인적 신앙의 내용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참으로 그는 기독교를 하나의 생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다 뜨겁고 보다 영적인 기독교가 되게하는 방법으로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세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기독교는 지적인 지식 보다는 더욱 생활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설교는 교리적이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생활을 개조할 의도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다만 헌신적 생활과 봉사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마치 영국의 청교도들과 같이 극장에 가는 것과 댄스와 카드 놀이를 반대하였다. 또한 의복과 음식에도 절제를 요구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심한 반대를 받았으며 다른 여러 목사들에게도 좋지 못한 감정을 사게 되었다.
스페너는 당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다. 그러나 그는 인기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전형적인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생활, 확고한 도덕적 영성과 엄격성, 무엇보다도 의무와 책임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게 하고 또한 여러가지 창의적인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심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설교자와 교리의 교훈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아우구스트 프랑케
스페너의 동역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이 운동을 교육과 사회사업과 선교사업으로 이끌어 경건의 힘을 실생활에 발휘한 사람이다. 프랑케는 1663년 루벸(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법학박사인 아버지 밑에서 학구적인 분위기 소기에서 자랐다. 킬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고 1684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1686년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성서연구회(Collegium Philolilicum)로 함께 모여 연구했으며, 프랑케는 라이프지히 대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1687년 신생(新生)의 신비로운 경험을 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드레스덴에서 스페너와 함께 몇 달 지내는 사이에 경건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열정으로 강의를 하였다.
그후 1689년부터 그는 여러 곳을 순회하며 그이 주장을 보급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건주의적 활동은 학교 당국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고 결국은 1691년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스페너가 그를 할례대학 교수로 초빙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뒤를 이어 할례 대학교를 경건주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거기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스페너의 할레 대학을 물려 받아 그곳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삼았고, 거기서 1727년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할례 대학에서의 프랑케
브렌르크의 선체후인 프레데릭 3세는 토마시우스를 초빙해서 할례대학교를 설립하게 하고(1694) 그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이때 스페너가 신학부 강의를 프랑케에게 맡기길 권유하여 프랑케를 초청하였다.
프랑크는 동료 안톤과 함께 새로운 교수 및 목회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할레 대학을 중심하여 경건주의 운동은 조직적으로 학문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할레 대학을 독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활동하게될 경건주의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중심지가 되도록 변모시켰다. 그는 스페너 보다도 훨씬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독일에 있어서 경건주의 운동이 최고의 절정에 오르게 한 이는 프랑케인 것이다.
할레에도 프랑케의 방침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프랑케의 방침은 여전히 실천되어 갔다. 인품의 매력으로 보는 자를 쉽게 얻은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한 표본처럼 되어 있다. 그는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열심으로 연구하여 충분히 준비된 설교를 하며, 공부를 하기 전후에 기도를 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는 돈이 없었으나 기도의 응답을 믿었다. 비록 기도에 의지했으나 방법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프랑케의 공헌
프랑케는 정책에 능한 사람이요 또한 조직에 재능이 있었다. 프랑케는 후진양성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할레 시민의 어려운 사정에 동정하여 사회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아울러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교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아원의 하나이고 개신교 최초의 유명한 할레 고아원을 설립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그는 또한 학교 내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신학교, 사범학교,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학교,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학교 등을 세웠다. 그 밖의 화학실험실과 약국, 성서공회, 서점과 인쇄소,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과부와 걸인과 그 밖의 빈민들을 위한 수용소를 세웠다.
이러한 시설들은 프랑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들로서, 이러한 선교사업의 계획은 독일 교회에 새 생명을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한개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되게 하였던 것이다. 할레 대학이 창설된지 3,40년 동안에 6,000명의 신학자가 배출된 것만 보아도 그 단편을 알수 있을 것이다.
프랑케는 해외 선교사업에도 관심이 컸다. 윌리암 케리보다 약 100년전에 해외 선교를 위해 이미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의 문하생 지겐발그 프레드릭 4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에 성교사로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할례는 프랑케의 주도하에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어갔다.
--------------------------------------------진센돌프 백작과 모라비안파
또 한사람의 경건주의 지도자로서 우리는 니콜라스 본 진센돌프(Nicholas von Zinzendorf, 1700-1760)백작을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경건파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정치에 몰두하여 처음에는 경건주의자들과의 깊은 유대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30년 전쟁에서 캐톨릭의 박해를 모면하려고 모라비아에서 피난해 온 이들이 갈 곳이 없어 허덕일 때에 자기 영토 안에 거주하기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그는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가 되게 되었다.
이들은 루터교의 경건을 살리며 궁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반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채택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자, 여력으로 세계복음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60인마다 선교사 하나를 외지로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개발하였으며,1732-1752년 간에 있어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숫자는 그 이전에 개신교 전체가 한 것보다 많았다. 모라비아인들로 인헤 형성되어진 경건운동은 영국 감리교도들(Methodists)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
경건주의 업적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연구에 큰 자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신학적 이론에서 실제적 방면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여 중용을 얻을 수 있게 하였고, 성령의 감화(感化)와 개인의 중생(重生)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
또한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에 잇는 영적으로 냉각된 루터파교회를 많이 재건시켰다. 경건주의자들의 깊은 종교적 열성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각 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의 가장 성공한 업적중의 하나는 이교도인 백성들을 위한 외국선교사업을 시작한 일이다. 특히 이 정신은 모라비안파에게 영향을 주었고, 모라비안파는 각국에서 경건주의 계열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에 성과를 올렸다.
역사적 과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그들의 길이 기억될 만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역사적 과오를 남기기도 하였다.
● 세계관: 첫째로 그들의 세계관의 문제이다. 경건주의는 현세도피적(現世逃避的) 성향 때문에 개신교의 토양에 부활된 중세 수도원 주의를 탈피 못할 느낌이 적지 않다.
● 교회관: 둘째로는 그들의 교회관에 있다. 교회의 개혁을 시도함에 있어 열심있는 소수를 구분하여 '교회안의 교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지나친 독선주의적인 구별의식을 심어주는 목회적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 교리관: 세째로 교리의 경시로 기독교의 변질을 쉽게 초래하는 결과를 얻게 한 점이다. 종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경건생활의 열매를 강조하는 나머지 정통신앙고백의 중요성이 외면될 때'아무렇게나 믿어도 좋다'는 사상적 개방주의가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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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경건주의(敬虔主義) 운동의 시작은 필립 제이콥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부터이다. 비록 후세인(後世人)들에 의해 '경건주의'가 불리웠던 움직임을 구성한 수많은 요소들이 이전부터 독일에는 유포되어 이었으나 필립 스페너를 '경건주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는 1635년 알사스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철저한 루터파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국의 청교도들에 관한 책들과 독일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는 중 이같은 사상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그는 독일의 존 안트의 저서 '참된 기독교'를 읽고 경건주의에 눈을 떴다. 또한 청교도 목사 레위스 베일의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학생시절에 경건과 행위에 있어서 많은 이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는 졸업 후 제네바에 가서 칼빈과 여러 교회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곳 교회생활에 대해 연구했고, 후에 독일 내 여러 대학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그가 1666년 안수를 받고 프랑크후르트의 목사로 있을 때, 웨드게스덴의 궁정 설교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 자신의 견해를 따르는 추종자로 삼았다.(후스트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3권. 이 형기, 차 종순 역. 서울: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부, 1989, 394)
당시의 설교가 이론에만 치우쳐 사람의 마음 속에 큰 감명을 주는 바가 적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설교를 실제적이면서도 신앙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하게 되었으며, 1976년 그는 자기 집에서 형식적인 종교에 불만을 갖는 자들과 함께 작은 집회를 만들었다. 이 집회를 '경건회'(Cellegia Pietatis)라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 때문에 교회 안에 있던 그 운동을 스페너에 의한 경건주의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으며, 기도하였고 스페너가 주일날 4회 설교를 토론하였다. 특히 경건회를 통해서 신앙적인 독서를 통해 영적 생활을 함양하는데 전력하였다.
1674년에 안트의 설교집에 설교를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긴서문을 통하여 경건주의 운동의 요강을 발표 하였다. 1675년에 이 글은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이란 표제로 출판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신자들의 경건을 육성하기 위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책으로 스페너는 일약 경건주의 운동에 창시자로 인정을 받게 되도 이 책의 출판과 함께 경건주의 운동의 새 시대가 도래하게되었다.
경건한 욕망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본 스페너의 주장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당대의 도덕적인 타락, 미온적인 신앙생활, 파괴적인 신학논쟁, 정치인들의 부도덕한 생활, 성직자의 잘못된 생활 등 여러가지 점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번 째 부분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개혁해야 할 운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6가지로 제의하였다.
● 성서 연구: 그리스도인들은 조그마한 집회나 가정모임에서 경건한 영구를 통해서 성경을 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고 심도 깊게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신자의 영적 제사장직 활용: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집회에서 책임있는 일을 부여함으로서 신자가 만인제사장의 의미를 재발견하기를 원했다.
● 기독교의 실천적 성격: 기독교 본질이 교리적인 공식속에 갇혀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신앙의 실제적 자체인 경험, 삶 자체를 통한 태도임을 깨닫기 원했다. 기독교인의 삶은 실제적 경험과 실천이라 했다.
● 종교적 논쟁의 비 유익성: 세번째의 결과로 임해서 모든 논쟁을 자비심을 갖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신학교육의 혁명: 목회자의 훈련은 논리적 정통 신학을 넘어서서 경건한 책과 훈련에 흠뻑 젖으며 또한 양떼를 치는 실제적인 활동과 경험을 동시에 수반할 것을 바랬다.
● 설교의 개혁: 강단은 실제생활과 거리가 먼 묵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가르치고 감찰시키고 양육하는 본래의 목적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나 스페너는 이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시의 기존교리의 교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교리에 관한한 완전 승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리가 개인적 신앙의 내용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참으로 그는 기독교를 하나의 생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는 보다 뜨겁고 보다 영적인 기독교가 되게하는 방법으로 '교회안의 작은 교회'를 세울 것을 제안한 것이다. 기독교는 지적인 지식 보다는 더욱 생활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설교는 교리적이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생활을 개조할 의도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기독교는 다만 헌신적 생활과 봉사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실제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는 마치 영국의 청교도들과 같이 극장에 가는 것과 댄스와 카드 놀이를 반대하였다. 또한 의복과 음식에도 절제를 요구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심한 반대를 받았으며 다른 여러 목사들에게도 좋지 못한 감정을 사게 되었다.
스페너는 당시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다. 그러나 그는 인기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전형적인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생활, 확고한 도덕적 영성과 엄격성, 무엇보다도 의무와 책임에 대한 그의 굳은 신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게 하고 또한 여러가지 창의적인 활동을 하게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심적인 의무감을 가지고 설교자와 교리의 교훈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아우구스트 프랑케
스페너의 동역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는 이 운동을 교육과 사회사업과 선교사업으로 이끌어 경건의 힘을 실생활에 발휘한 사람이다. 프랑케는 1663년 루벸(Lubeck)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법학박사인 아버지 밑에서 학구적인 분위기 소기에서 자랐다. 킬에서 학생 시절을 보내고 1684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1686년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함께 성서연구회(Collegium Philolilicum)로 함께 모여 연구했으며, 프랑케는 라이프지히 대학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가 1687년 신생(新生)의 신비로운 경험을 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드레스덴에서 스페너와 함께 몇 달 지내는 사이에 경건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열정으로 강의를 하였다.
그후 1689년부터 그는 여러 곳을 순회하며 그이 주장을 보급했으며, 그의 이러한 경건주의적 활동은 학교 당국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되었고 결국은 1691년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스페너가 그를 할례대학 교수로 초빙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뒤를 이어 할례 대학교를 경건주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거기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스페너의 할레 대학을 물려 받아 그곳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삼았고, 거기서 1727년 죽을 때까지 사역하였다.
할례 대학에서의 프랑케
브렌르크의 선체후인 프레데릭 3세는 토마시우스를 초빙해서 할례대학교를 설립하게 하고(1694) 그로 하여금 강의하게 하였다. 이때 스페너가 신학부 강의를 프랑케에게 맡기길 권유하여 프랑케를 초청하였다.
프랑크는 동료 안톤과 함께 새로운 교수 및 목회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할레 대학을 중심하여 경건주의 운동은 조직적으로 학문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할레 대학을 독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활동하게될 경건주의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중심지가 되도록 변모시켰다. 그는 스페너 보다도 훨씬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할 기쁨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독일에 있어서 경건주의 운동이 최고의 절정에 오르게 한 이는 프랑케인 것이다.
할레에도 프랑케의 방침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프랑케의 방침은 여전히 실천되어 갔다. 인품의 매력으로 보는 자를 쉽게 얻은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한 표본처럼 되어 있다. 그는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열심으로 연구하여 충분히 준비된 설교를 하며, 공부를 하기 전후에 기도를 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는 돈이 없었으나 기도의 응답을 믿었다. 비록 기도에 의지했으나 방법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프랑케의 공헌
프랑케는 정책에 능한 사람이요 또한 조직에 재능이 있었다. 프랑케는 후진양성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할레 시민의 어려운 사정에 동정하여 사회 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아울러 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선교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아원의 하나이고 개신교 최초의 유명한 할레 고아원을 설립한 것도 이 당시의 일이다.
그는 또한 학교 내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신학교, 사범학교,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학교,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학교 등을 세웠다. 그 밖의 화학실험실과 약국, 성서공회, 서점과 인쇄소,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과부와 걸인과 그 밖의 빈민들을 위한 수용소를 세웠다.
이러한 시설들은 프랑케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들로서, 이러한 선교사업의 계획은 독일 교회에 새 생명을 넣어 주었고, 또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생명이 없는 한개의 전통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실제의 종교가되게 하였던 것이다. 할레 대학이 창설된지 3,40년 동안에 6,000명의 신학자가 배출된 것만 보아도 그 단편을 알수 있을 것이다.
프랑케는 해외 선교사업에도 관심이 컸다. 윌리암 케리보다 약 100년전에 해외 선교를 위해 이미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의 문하생 지겐발그 프레드릭 4세의 요청에 따라 인도에 성교사로 파송하였다. 계속하여 할례는 프랑케의 주도하에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어갔다.
--------------------------------------------진센돌프 백작과 모라비안파
또 한사람의 경건주의 지도자로서 우리는 니콜라스 본 진센돌프(Nicholas von Zinzendorf, 1700-1760)백작을 들 수 있다. 그는 본래 경건파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정치에 몰두하여 처음에는 경건주의자들과의 깊은 유대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30년 전쟁에서 캐톨릭의 박해를 모면하려고 모라비아에서 피난해 온 이들이 갈 곳이 없어 허덕일 때에 자기 영토 안에 거주하기를 허락하였다. 이로써 그는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가 되게 되었다.
이들은 루터교의 경건을 살리며 궁지에서 생존하기 위해 반수도원적인 공동생활을 채택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자, 여력으로 세계복음화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들은 60인마다 선교사 하나를 외지로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개발하였으며,1732-1752년 간에 있어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의 숫자는 그 이전에 개신교 전체가 한 것보다 많았다. 모라비아인들로 인헤 형성되어진 경건운동은 영국 감리교도들(Methodists)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
경건주의 업적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연구에 큰 자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신학적 이론에서 실제적 방면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여 중용을 얻을 수 있게 하였고, 성령의 감화(感化)와 개인의 중생(重生)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
또한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에 잇는 영적으로 냉각된 루터파교회를 많이 재건시켰다. 경건주의자들의 깊은 종교적 열성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각 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의 가장 성공한 업적중의 하나는 이교도인 백성들을 위한 외국선교사업을 시작한 일이다. 특히 이 정신은 모라비안파에게 영향을 주었고, 모라비안파는 각국에서 경건주의 계열에서 가장 뛰어난 선교에 성과를 올렸다.
역사적 과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그들의 길이 기억될 만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역사적 과오를 남기기도 하였다.
● 세계관: 첫째로 그들의 세계관의 문제이다. 경건주의는 현세도피적(現世逃避的) 성향 때문에 개신교의 토양에 부활된 중세 수도원 주의를 탈피 못할 느낌이 적지 않다.
● 교회관: 둘째로는 그들의 교회관에 있다. 교회의 개혁을 시도함에 있어 열심있는 소수를 구분하여 '교회안의 교회'운동을 전개한 것은 지나친 독선주의적인 구별의식을 심어주는 목회적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
● 교리관: 세째로 교리의 경시로 기독교의 변질을 쉽게 초래하는 결과를 얻게 한 점이다. 종교를 개인적인 것으로 경건생활의 열매를 강조하는 나머지 정통신앙고백의 중요성이 외면될 때'아무렇게나 믿어도 좋다'는 사상적 개방주의가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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