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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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2.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
3.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4. 하이데거의 키에르케고어 비판
5.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지닌 문제점
1.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ab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가 인간 이성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살아있는 실천으로 묘사한데 들어있는 잠재적이지만 키에르케고어에 의해서는 발전되지 않은 존재론을 보완했다고 평가되어왔다1). 더나아가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사유에서의 개인의 완성 또는 자기 정직성(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이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실존적 목적을 방법론적 측면을 포함해 확장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한 개인이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부터의 사유라는 키에르케고어의 도전은 서양 존재론의 비역사적이며 추상적 방법을 극복함으로써 철학을 구체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초기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실존적 사상가로 범주화할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왔다.
ab하이데거 자신이 실존적 사고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2), 언어가 인간 상호작용의 의미 맥락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존재에 대한 물음(존재론) 역시 개인적 실존이라는 실존적 문제에는 관계되지 않는다.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존재와 시간』, 특히 본래적인 결단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이 존재적인 구체성의 논리와 형식적 추상화의 경향간의 긴장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ab키에르케고어의 윤리적 삶(본래성)이라는 개인적 개념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론을 주제화하려는 방법론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형식적, 방법론적 그리고 인지적 실천으로 축소함으로써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사고의 설득력있는 전용을 보여주지 못한다. 반대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범주를 존재론화함으로써 하이데거는 개인의 교육에 초점을 맞춘 키에르케고어 사유가 지닌 윤리적 의미를 고갈시킨다.3) 하이데거는 실존 철학으로부터 현존의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자신의 기획을 이론적으로 구분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철학자들이 역사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상황속에서의 인간에 대해 오직 존재적-실존적4) 묘사를 주는데 비해, 현상학은 그러한 이론들에서 전재하고 있는 망각된 존재론적-실존론적 분석을 제공한다.
ab키에르케고어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종교적 상황에서 경험되는 실존에 관심을 갖는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론적 분석을 이끌어 내는데 관심을 갖고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이고 실존론적인 묘사는 오직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해명이 잠재적으로 존재론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선험적 구조를 이끌어냄으로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인 분석은 키에르케고어의 작품에서 표현되었지만 철학적으로 분석되지는 않은 삶의 선택과 가능성들에 대한 보편적 설명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에 대한 논의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들의 존재론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어떠한 문제점을 지닐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
ab키에르케고어에서 실존의 철학적 구성은 「순수 존재」(pure Being)의 존재론에 기초해 있다. 실존은 순수 존재에 대립되는 작용 요인(즉 시간적인 것 the temporal)이 있는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순수존재와 시간적인 것의 독특한 혼합은 순수존재 자체에게는 낯선 인간의 범주(실존 범주)를 만든다. 이러한 실존적 범주는 두개의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구조 - 순수 존재와 시간성 - 의 일치점이 된다는 것에 의하여 그 고유한 긴장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5) 시간성이 과정이고 연속이며 순수 존재는 구성요소가 됨을 초월하는 하나의 점이라면 순수 존재인 점이 어떻게 그것의 반대의 것이 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시간성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ab인간이 신적인 것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6)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인간은 자신의 순수 존재를 완전히 붙잡음으로써 스스로 탈출할 수 없으며, 시간성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잃음으로써 그리고 영원한 것이 그를 구성하지 않는 척함으로써 벗어날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키에르케고어가 마주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역설이란 사고의 정열이다.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한다. 오성의 최고의 정열도 또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의 파멸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의욕한다. 그러나 오성이 그의 역설적인 정열로 말미암아 충돌하며, 인간의 자기인식까지도 어지럽히는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알고 있는 한, 어떤 인간은 물론 아니며, 또 인간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신이라고 부른다.7)
ab오성의 역설적 정열은 끊임없이 이 알려지지않은 것에 부딪친다. 그것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성은 그 이상 더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오성은 그의 역설로 말미암아 이리로 와서 그것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성이 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끊임없이 다다르는 한계이며, 그러한 한 그것은 운동의 규정을 정지의 규정과 바꾼자면 상이한 것,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다8). 그러나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란 사람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아무런 징표도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한 것이다. 오성은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 차이성은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파악된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근본에 있어서는 자의에 의한 것이다.
ab그러나 우리는 역설 앞에 서 있다. 신이 상이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만도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인간은 신이 자기와 절대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신이 절대적으로 인간과 상이한 것이라면 그 상이성의 원인은 인간이 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 가운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신과 동족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 가운데에, 즉 자기 자신이 지은 죄에 있다.
ab그러나 이처럼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된다. 키에르케고어는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자기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또 자기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상기에 의해 설명한다. 즉 배우는 것이나 구하는 것은 모두 상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 내기 위하여 오직 생각나게 해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며 진리는 밖으로부터 그의 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된다.9) 그러나 순간이 결정적인 뜻을 갖기 위해서는 구하는 자가 바로 진리를 얻는 그 순간까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야만 한다. 무지의 형식으로도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순간은 다만 하나의 기연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자에게 진리를 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달을 조건까지도 아울러 주는 교사가 필요하다.
ab인간은 스스로 진리이해의 조건을 잃어버렸으며 또 지금도 잃고 있다. 그러므로 기연이 되어서 배우는 자가 비진리이며 또한 그것이 자기 자신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교사는 신 자신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허물로 비진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므로, 그의 전향은 그가 자기의 비진리를 확실히 자각하지 않고서는, 즉 그 비진리가 자기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자각에 의하여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와 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바로 「뉘우침」이다.
ab신은 사랑에 의해 진리와 진리의 조건을 함께주는 교사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는 불행하다. 왜야하면 신과 인간은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신이 자기를 이해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서로 다른 점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성과 역설이 「순간」에 있어서 행복하게 만날 때가 바로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시간적이 것과 역사적인 것을 배제하는 영원한 것의 인식이든가, 아니며 순수하게 역사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식도 「영원한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하는 이 불합리」를 그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필연적인 것은 완전히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 필연성을 가지고 생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필연성이 생성될 수 없으며, 또 어떤 것이 생성됨으로써 필연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행은 자유에 의하여 일어난다. 어떠한 생성도 필연적이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기 전에도 필연적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생성된 후에도 필연적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생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식이 아니라 자유의 행위이며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3.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ab하이데거는 개념으로서의 순수 존재를 거부한다. 순수존재에 대한 거부와 함께, 대치된 존재 개념은 본질적으로 연장적인 것이다. 존재가 아무리 얇게 썰리더라도 항상 존재는 점이 아니라 장(field)을 포함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10) 존재의 연장으로 특징지워지는 장으로의 이러한 변화은 하이데거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된다. 현존재에서 그것의 연장에 작용하는 것은 염려이다. 후기에는 존재를 무속에, 무를 존재속에 뿌리박게 함에 의해 마찬가지의 작용이 찾아진다. 무의 작용은 존재의 견고함을 해소하고 구성요소가 되지 않고 따라서 연장되지 않은 어떠한 지역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존재는 더이상 현존이 아니라 일어남(happening)이다.
ab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랜동안 망각되어 왔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존재자가 어떻게 설명되든 존재자는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문제의 이해에 있어서 최초의 철학적 진보는 즉 옛날 얘기를 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진보는 마치 존재가 존재자일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진 거처럼 존재자를 다른 또 하나의 존재자로 소급해서 그 유래에 좇아 규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므로 존재는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증시방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도 고유한 개념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개념성은 존재자를 의미상으로 규정하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11).
ab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빠져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숨가쁘게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실제적 탐구의 주제적 물음으로서는 침묵해 버리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이 이룩한 성과는 여러 가지 첨삭과 덧칠을 거쳐 헤겔의 논리학에 까지 일관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반복해야 할 필요성은 다음과 같은 선입견들을 비판함으로써 제기한다.
ab1.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제일 먼저 인지되는 것은 존재이며, 존재의 이해는, 사람들이 존재자에 있어서 파악하는 모든 것 속에 그 때마다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존재의 보편성은 유의 보편성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유와 종에 따라 개념적으로 분절되는 한 존재자의 최고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명칭을 따르면 초월자이다.
ab2. 존재 개념은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들은 이 개념의 최고의 보편성에서 추론하였다. 사실 존재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는 없다. 존재에는 어떤 성질도 덧붙일 수 없다. 존재에 존재자를 귀속시키는 방식으로는 존재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를 통해 상위 개념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개념에 의해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 귀결되는 것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계내에서는 정당화된 존재자의 규정양식은 존재에는 적용될 수 없다.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바로 그 대문에 존재의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ab3.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모든 인식과 언표에서 존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존재가 사용되거니와 그 때 그 표현은 구말 없이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균적 이해는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한 이해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모든 태도와 존재에는 아프리오리하게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 때마다 이미 존재 이해를 가지고 살고 있건만 존재의 의미는 동시에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함 물음을 반복해야 할 원칙적인 필요성을 보여 준다12).
ab하이데거는 서구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사유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존재자가 무엇인가라고 물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존재자가 그 자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형이상학적 표상은 존재의 빛에 힘입어 이러한 시야를 얻고 있다. 이때 이 빛 자체는, 다시말해 그러한 사유가 빛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바로서의 그것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그러한 사유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언제나 존재자만을 존재자의 관점 아래에서만 표상하기 때문이다.13) 형이상학은 끊임 없이 아주 여러 상이한 변형을 통해 존재를 표현하여 말하고 있다. 형이상학 자신은 마치 자기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며 그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일깨우면서 그 인상을 확고히 굳힌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어느 곳에서도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도대체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ab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함으로써만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면서 존재에 대해 말한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칭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발언들은 그것의 시작으로부터 그것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기이하게도 철저하게 존재자와 존재를 뒤바꾸고 있다. 물론 이 혼동을 존재의 사건으로 생각해야지 하나의 결함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혼동은 그 근거를 결코 사유의 태만함이나 말함의 과실에 두고 있지 않다.14) 존재자 그 자체의 표상에서부터 존재의 진리에 대한 사유에로 넘어가려는 시도는, 존재자 그 자체의 표상에서부터 출발하여 어떤 형태로는 존재의 진리도 여전히 표상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기서의 표상은 필연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 되며, 결국 그것은 표상으로서는 사유되어야 할 그것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형이상학에서부터 유래하여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진리의 연관에로 파고드는 관계를 하이데거는 「이해」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해는 동시에 존재의 비은폐성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그것은 탈자적인 기획 투사, 다시 말해 개방된 것의 영역 안에 들어서 있는 내던져진 기획 투사이다. 이 기획 투사 속에서 열려져 있는 것으로서 드러나는 영역, 그래서 그 영역 안에서 어떤 것(여기서는 존재)이 어떤 것(여기서는 자신의 비은폐성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으로서 입증되는 그 영역이 의미이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
ab우리는 습관적으로 존재자를 현실적인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과 존재자로서 입증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존재라고 사유하는 그것은 결코 존재자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였던 바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존재자가 아닌 것, 즉 존재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존재는 과연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라는 어려움은 최종적으로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은채 남아있다. 그럼에도 하이데거에게는 존재 일반이 사유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였으며, 이 태도는 그의 탐구의 시작이래로 끝까지 지속되었다15).
ab어려움은 우리가 대상적인 표상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 및 대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 낱말로, 다시말해 대상적인 영역에서 우리에게 친근한 그 낱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그 사실에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 자체는 결코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결코 대상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지만, 그 존재는 마치 존재자 일반이 밝혀지듯이 우리에게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은 인간이 현존재로서 열린장 (Da-sein의 Da-) 가운데 서 있으면서 저 생기된 훤한 밝힘(Lichtung)을 견지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열린 장 가운데 서 있을 때 존재자는 개방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존재의 훤한 밝힘 가운데에 서 있음을 인간의 탈존(Ek-sistenz)이라고 부른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탈존은 이성 즉 ratio의 가능성에 그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탈존은 그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자기 규정의 유래를 간직하게 되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탈존은 인간이 자기의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기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고자 애쓰는 실존주의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열려 있음(개방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훤한 밝힘으로 나와 서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이 열려 있음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거나 작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그 모든 창조함과 작용함을 떠받들고 있다.16) 이제 더 이상 존재자에 관해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을 기투하는 그런 주관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존재로부터 즉 존재에 대한 인간의 연관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처해 있다.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자성으로 사유하면서 이 둘(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사유하지 않는 형이상학의 영역에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
4. 하이데거의 키에르케고어 비판
ab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키에르케고어를 비판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순간의 실존적 현상을 아주 날카롭게 천착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상응해서 실존론적 해석도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통속적 시간 개념에 붙잡혀 있어서 순간을 지금과 영원의 도움을 받아 규정한다. 그가 시간성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인간의 시간-내-존재를 가리킨다. 시간 내부성으로서의 시간으로는 지금을 알 뿐 순간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순간이 실존적으로 경험된다면, 비록 실존론적으로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보다 더 근원적인 시간성이 전제되는 것이다.>>17)
여기서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순간의 이해가 「지금」(now)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의 영원성에 대한 이해는 「지금」을 의미하는 결코 변하지 않는 현존의 이해이다. 하이데거에 다르면 키에르케고어는 모호한 시간개념에 고착해 있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흘러감으로써 시간을 구성하지만, 그로 그러한 방식으로 순수 존재의 현존을 반영하는 지금의 연속에 기초해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이해는 그처럼 구성요소가 되지 않는 개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간에 대한 그의 이해는 지금에 정향될 수 없으며 현존으로서의 순간이 아니라 연장의 개방으로서의 순간으로 향하고 있다.18) 이처럼 순간의 개념은 하이데거에 의해 그 자신의 존재론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의 존재론은 순수 존재와 그것의 시간적인 표현에게, 지금, 현존, 또는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ab19세기에 키에르케고어는 실존 문제를 신존적 문제로서는 분명하게 포착하고 철저하게 사유하였다. 그러나 실존론적 문제성은 그에게는 매우 생소해서,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그는 전적으로 헤겔 및 헤겔을 통해 보여진 고대철학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 불안의 개념에 관한 논문을 제외하면 - 철학적으로 배울만한 것은 그의 이론적 저술족보다 교화적 저술 쪽에 많다.19) 헤겔의 순수 존재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반론은 사유자의 관점과 순수 존재의 관점의 동일시에 대한 공격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동일시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사유자가 구성하는 체계가 추상적인 것에게는,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는 완벽하게 타당해도 인간인 사유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에르케고어의 공격은 순수 존재와 사유자의 상황의 동일시에 향하고 있지 순수 존재 자체로 향하지는 않는다. 키에르케고어의 노력은 헤겔의 존재론적 범주의 근본적인 해체가 아니라 그것들의 새로운 병치이다.
ab하이데거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는 존재적, 실존적 수준에 남아있고 존재론적, 실존론적인 수준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가 존재 자체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존재의 문제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음으로써 주체적인 실존이 아니라 사유속에 연루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존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주체적인 사유에 반대되는 객관적 관심을 표현한다. 따라서 존재 자체의 문제를 제시하길 거부한 것은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정향의 결과이며 그가 채택한 입장에 고유한 것이다.20) 개인적 실존의 철학이 직접적 경험이 존재의 창조적 근원으로의 입구라고 주장한다면, 직접적 경험을 묘사하는 개념이 동시에 존재 자체의 구조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소위 말하는 감정은 존재론적 의미를 갖지 않은 단순히 주관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 자체의 구조에 대한 반 상징적(half-symbolic), 반 실재적(half-realistic) 지시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ab실존적 존재론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경험들로 서술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모든 경험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의미있는 경험들이 마찬가지 의미를 갖지 않은 것들에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으로 쓰이는 앞선 존재론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탐구의 참된 실존적 성격을 파괴할 것이다. 문론 하이데거가 그의 경험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고 있지만, 그러한 기준 없이는 선택의 다른 방법은 없다. 어떤 근거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선택된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화(exemplary)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론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문제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염려(Sorge)는 현존재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개의 통찰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개의 경험적 경우를 선정하고 그것을 존재론적 예화로 선언하는 것이다.21) 하이데거가 안고 있는 난점은 현존재의 분석은 예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실존이외의 것이라고 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다른 현존재에게 예화되는 그러한 현존재가 있을 수 없다.
5.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지닌 문제점
ab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주제를 존재론적 범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시간적인 탈존(과거, 현재, 미래)과 관련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존재(현존재)에 대한 선험적이고 구조적인 설명을 제시하였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존재는 존재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자기지식(개인적 정체성)의 가능성은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미래로 기투되며, 현재속에서 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임무는 자기 창조의 가능성의 지속적인 회복을 포함한다.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삶에 대한 설명은 "Mitsein" 또는 함께있음이 존재론적으로 인간 존재에 구성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창조를 맡는 능력의 발전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이해가 항상 이미 그들 또는 "das Man"과의 동일화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키에르케고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그들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삶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택을 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어떻게 현존재가 자신의 세계와 처해진, 그러나 여전히 비판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22)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윤리적 의식의 결정적인 함축중 하나는 본래적 삶이 문화적 역사적 진공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정체성에 대한 나의 감각에 비판적으로 관계됨은 개인적인 뿐만 아니라 내속으로 나의 유산을 의문시하는 능력을 주입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되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권고를 확장하면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이미 갖고 있는 전제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철학은 본래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존적 차원에서 본래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닮은(das Man) 비본래적 존재에 대한 반대 경향이다. 해석학적 차원에서는 실존과 시간성과 관련한 현존재의 본래적인 해석은 현존과 관련한 현존재의 퇴락하는 해석에 대한 반대 경향이다. 우리의 퇴락은 다름아니라 퇴락된 존재론의 반영이다.23)
ab하이데거에 의하면 서양 존재론은 실존의 역사적 양태인 현존재가 정적인 범주속에서 이론화되었기 때문에 비본래적이라고 비판한다. 사유는 순수한 객관적 반성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이기 때문에 퇴락한 존재론은 표현의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개념화의 비본래적인 양상은 망각이나, 또는 우리의 철학적 유산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는데 실천적으로 실패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본래성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 없이는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있다. 더나아가서 형이상학이 본래적 존재론을 만드는데 무능력함을 폭로함으로써, 해체는 전면적인 개념적 혁명으로 나아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살아있는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은 이 혁명에 의해 보호될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 의식과 방법론적 의식의 두 단초를 하나로 짜넣으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실패 했다.24)
ab하이데거가 본래성의 반복이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윤리적 관점을 존재론화 하는 방식은 개인의 교육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적인 요구를 구체화하는 대신 포기한다. 비판적 의식으로의 내적인 성작의 과정없이 하이데거적인 본래성은 태도의 전화와는 반대되는 추상적이고 인지적인 성취에만 제한되게 된다. 윤리적인 내면성 상실의 결과는 첫째, 하이데거의 사유가 금욕적(stoic) 의식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 하이데거는 실존의 윤리적 양태의 키에르케고어적인 개념을 도덕성자체로 해소하며 그럼으로써 도덕성을 결경론적 틀에 기초지운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에서는 본래성이 나를 비판적 자기 의식의 윤리적 삶을 감행하도록 부르는데 비해,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전통의 철학적 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인지적 시도로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 - 심리적, 실존적인 것과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것 - 는 그들의 철학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첫째 키에르케고어의 본래적인 삶의 모델이 변증법적인데 비해 하이데거의 것은 대립적이다. 둘재, 하이데거와는 달리 키에르케고어는 윤리적 개인을 공공적 규범에 대한 반대로 만들지 않는다. 키에르케고어는 이웃으로서의 개인들의 참된 공동체의 가능성과 군중을 구분한다. 참된 공통체가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의 진정한 유대를 나타내는데 비해 군중은 그러한 유대를 이루는데 실패한다. 관계들이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악화될때 군중이 탄생한다. 키에르케고어의 뛰어난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의 유배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공동체 내에서 유배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동적 세계의 부분이 되면서도 여전히 그안에서 고립의 방식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결단한 윤리적 개인은 질적인 측면에서 말할때만 군중으로 부터 분리된다.
ab그러나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변증법적 인 내면성에 근거짓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적 자아와 공공적 세계 사이의 관계의 모델은 대립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공공적 영역 자체와 비본래적인 그들 사이의, 실존의 공공적 사회적 성격과 군중사이의 모호한 구분에서 오는 난점속에서 작업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맺는 방식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비판적 자기 지식으로의 운동을 이론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실패한다. 본래성이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의 능력과 공감을 포함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극단적인 고립으로, 다른 것에 대한 자아의 무관계성으로 제시한다.25) 불안의 경험에 대한 하이데거적인 분석은 현존재를 일상 세계속에서의 상실과 낯선 느낌으로 묘사한다. 사유속에서 금욕주의는 자유를 성취한다. "사유속에서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전적으로 나 자신과의 공유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겔의 말이 불안 속에서, 죽음을 향해 있음에서, 죄와 양심과 결심속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개인화와 다른 것에 무관계함에 대한 하이데거의 묘사에서 울리고 있다.
ab어쨌든 자아-공공 관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립적인 모델은 본래성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적 관점의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측면을 포함할 수 없다. 그대신 금욕주의의 대립적인 의식은 삶에 대한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관점을 강화시킨다. 자연적인 특성이 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식의 성장속에서만 구분된다는 키에르케고어적인 관점과 반대로 하이데거적인 본래성은 존재론적으로나 자연주의적으로 근거된 엘리트주의에 대한 그리스적인 관념을 불러 일으킨다.26) 인간은 모두가 가장 최고로 자기의식을 발전시킬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원리 대신에 앞서주어진 특성과 능력에 의해 구분된다. 따라서 30년대의 하이데거가 시인, 사유가, 정치가들 특별한 영웅들과 그리스, 독일 같은 정신적으로 뛰어난 국가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창작자는 일반인은 할 수 없는, 즉 인간성의 더 높은 목적을 보고, 포함하는 더 나은 권위로서 태어났다.
1.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Kierkegaard in Post/Modernity』, Martin J.Matustik and Merold Westphal ed, Indiana university Press,1995,43p
2. 하이데거는 『Uber dem Humanismus』에서 실존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주의는 여전히 인간의 주체 중심주의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역사안에 놓여 있다. 이글 p6이하 참조.
3. Patricia J.Huntington은 하이데거가 국가 사회주의에 개입하도록 이끈 그의 엄숙주의와 결정론도 바로 이러한 키에르케고어의 내면성 개념으로부터의 하이데거의 추상화에서 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44p
4. 존재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의 구별은 단순하게 말하면 사실과 이론간의 구별이다. 존재자를 묘사, 서술, 취급, 연구하는 것은 존재적이고, 존재자를 그것에 고유한 존재를 겨냥해서 해명, 해석하는 것은 존재론적이다. 존재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학은 존재적이고, 그 과학의 가능근거를 탐구하는 철학은 존재론적이다. 실존적(existenziell)과 실존론적(existenzial)의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소광희 옮김, 경문사, 1995, 15p, 주 h.
5.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Routledge&Kegan Paul LTD, 1954, p123.
6. "지금까지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해왔다. 즉 이것 또는 저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물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학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말이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 사람은 이와 정반대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학문이,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진다고 말이다. 역설은 양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이며, 실존하고 인식하는 정신과 영원한 진리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존재론적 규정이다." 표재명, 「키에르케고어의 역설의 개념」, 『키에르케고어 연구』, 1995, 지성의 샘, p65이하에서 재인용.
7. Soren Kierkegaard, 「Philosophical Fragments」, 『Kierkegaard's writings 7』, Howard V.Hong and Edna H.Hong ed&tr, pre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p39.
8. 키에르케고어에게서 역설의 개념은 1.사고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의 역설로부터 2.인간의 오성적 사고가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를 이루는 절대적 상이성으로서의 역설을 거쳐, 3.시간 안에 들어온 영원자라고 하는 절대적 역설, 즉 사람이 된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의 계시의 성격으로서의 존재 개념이 된다. 이러한 절대적 역설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분노와 신앙이다. 표재명, 「키에르케고어의 역설의 개념」, p65.
9. Soren Kierkegaard, 「Philosophical Fragments」, p9.
10.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4.
11. Martin Heidegger, 『Sein und Ziet』, Gesamtausgabe, 1977, S.8.
12. 『Sein und zeit』, S.3f.
13. Martin Heidegger, 『Was ist Methaphysik?』,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4, p13이하.
14. Martin Heidegger, 『Was ist Methaphysik?』, p25.
15. 발터 비멜,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한길사, 1997, p188.
16. 발터 비멜, 『하이데거』, p198.
17. 『Sein und Zeit』, S.447f.
18.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5f.
19. 『Sein und Zeit』, S.313.
20.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9.
21.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39.
22.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6.
23.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6.
24.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7.
25.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50.
26.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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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2.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
3.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4. 하이데거의 키에르케고어 비판
5.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지닌 문제점
1. 키에르케고어와 하이데거
ab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가 인간 이성을 구체적이고, 역사적이고, 살아있는 실천으로 묘사한데 들어있는 잠재적이지만 키에르케고어에 의해서는 발전되지 않은 존재론을 보완했다고 평가되어왔다1). 더나아가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사유에서의 개인의 완성 또는 자기 정직성(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성)이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실존적 목적을 방법론적 측면을 포함해 확장시킨 것으로 나타난다. 한 개인이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부터의 사유라는 키에르케고어의 도전은 서양 존재론의 비역사적이며 추상적 방법을 극복함으로써 철학을 구체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초기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를 실존적 사상가로 범주화할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끊이지 않고 제기되어 왔다.
ab하이데거 자신이 실존적 사고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2), 언어가 인간 상호작용의 의미 맥락을 구성하는 방법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제시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존재에 대한 물음(존재론) 역시 개인적 실존이라는 실존적 문제에는 관계되지 않는다. 현재에는 일반적으로 『존재와 시간』, 특히 본래적인 결단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이 존재적인 구체성의 논리와 형식적 추상화의 경향간의 긴장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ab키에르케고어의 윤리적 삶(본래성)이라는 개인적 개념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존재론을 주제화하려는 방법론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형식적, 방법론적 그리고 인지적 실천으로 축소함으로써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사고의 설득력있는 전용을 보여주지 못한다. 반대로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범주를 존재론화함으로써 하이데거는 개인의 교육에 초점을 맞춘 키에르케고어 사유가 지닌 윤리적 의미를 고갈시킨다.3) 하이데거는 실존 철학으로부터 현존의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자신의 기획을 이론적으로 구분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철학자들이 역사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상황속에서의 인간에 대해 오직 존재적-실존적4) 묘사를 주는데 비해, 현상학은 그러한 이론들에서 전재하고 있는 망각된 존재론적-실존론적 분석을 제공한다.
ab키에르케고어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구체적인 윤리적 종교적 상황에서 경험되는 실존에 관심을 갖는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론적 분석을 이끌어 내는데 관심을 갖고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이고 실존론적인 묘사는 오직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경험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적이고 실존적인 해명이 잠재적으로 존재론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선험적 구조를 이끌어냄으로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이고 현상학적인 분석은 키에르케고어의 작품에서 표현되었지만 철학적으로 분석되지는 않은 삶의 선택과 가능성들에 대한 보편적 설명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에 대한 논의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이들의 존재론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어떠한 문제점을 지닐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2. 키에르케고어의 절대적 역설
ab키에르케고어에서 실존의 철학적 구성은 「순수 존재」(pure Being)의 존재론에 기초해 있다. 실존은 순수 존재에 대립되는 작용 요인(즉 시간적인 것 the temporal)이 있는 상황을 함축하고 있다. 순수존재와 시간적인 것의 독특한 혼합은 순수존재 자체에게는 낯선 인간의 범주(실존 범주)를 만든다. 이러한 실존적 범주는 두개의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구조 - 순수 존재와 시간성 - 의 일치점이 된다는 것에 의하여 그 고유한 긴장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5) 시간성이 과정이고 연속이며 순수 존재는 구성요소가 됨을 초월하는 하나의 점이라면 순수 존재인 점이 어떻게 그것의 반대의 것이 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시간성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ab인간이 신적인 것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속에서 영원을 만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6)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인간은 자신의 순수 존재를 완전히 붙잡음으로써 스스로 탈출할 수 없으며, 시간성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잃음으로써 그리고 영원한 것이 그를 구성하지 않는 척함으로써 벗어날수 없다는 사실이 바로 키에르케고어가 마주하고 있는 인간 실존의 본성이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 역설과 마주치게 된다. 역설이란 사고의 정열이다. 모든 정열의 극치는 항상 자기 자신의 파멸을 의욕한다. 오성의 최고의 정열도 또한, 충돌하면 결국은 자기의 파멸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충돌을 의욕한다. 그러나 오성이 그의 역설적인 정열로 말미암아 충돌하며, 인간의 자기인식까지도 어지럽히는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간을 알고 있는 한, 어떤 인간은 물론 아니며, 또 인간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신이라고 부른다.7)
ab오성의 역설적 정열은 끊임없이 이 알려지지않은 것에 부딪친다. 그것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성은 그 이상 더 나갈 수 없다. 그러나 오성은 그의 역설로 말미암아 이리로 와서 그것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성이 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자기의 관계를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하려고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끊임없이 다다르는 한계이며, 그러한 한 그것은 운동의 규정을 정지의 규정과 바꾼자면 상이한 것,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다8). 그러나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란 사람이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아무런 징표도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한 것이다. 오성은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을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 차이성은 결코 파악되지 않는다. 파악된다고 하면, 그것은 언제나 근본에 있어서는 자의에 의한 것이다.
ab그러나 우리는 역설 앞에 서 있다. 신이 상이한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만도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인간은 신이 자기와 절대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신이 절대적으로 인간과 상이한 것이라면 그 상이성의 원인은 인간이 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 가운데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신과 동족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 가운데에, 즉 자기 자신이 지은 죄에 있다.
ab그러나 이처럼 절대적으로 상이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된다. 키에르케고어는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자기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또 자기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상기에 의해 설명한다. 즉 배우는 것이나 구하는 것은 모두 상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스스로 생각해 내기 위하여 오직 생각나게 해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할 뿐이며 진리는 밖으로부터 그의 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안에 있는 것이 된다.9) 그러나 순간이 결정적인 뜻을 갖기 위해서는 구하는 자가 바로 진리를 얻는 그 순간까지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야만 한다. 무지의 형식으로도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순간은 다만 하나의 기연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우는 자에게 진리를 줄 뿐만 아니라 진리를 깨달을 조건까지도 아울러 주는 교사가 필요하다.
ab인간은 스스로 진리이해의 조건을 잃어버렸으며 또 지금도 잃고 있다. 그러므로 기연이 되어서 배우는 자가 비진리이며 또한 그것이 자기 자신의 허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교사는 신 자신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허물로 비진리 가운데 있었던 것이므로, 그의 전향은 그가 자기의 비진리를 확실히 자각하지 않고서는, 즉 그 비진리가 자기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 자각에 의하여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와 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바로 「뉘우침」이다.
ab신은 사랑에 의해 진리와 진리의 조건을 함께주는 교사로서 이 땅 위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는 불행하다. 왜야하면 신과 인간은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신이 자기를 이해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서로 다른 점을 없애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성과 역설이 「순간」에 있어서 행복하게 만날 때가 바로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인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시간적이 것과 역사적인 것을 배제하는 영원한 것의 인식이든가, 아니며 순수하게 역사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식도 「영원한 것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하는 이 불합리」를 그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필연적인 것은 완전히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 필연성을 가지고 생성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필연성이 생성될 수 없으며, 또 어떤 것이 생성됨으로써 필연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행은 자유에 의하여 일어난다. 어떠한 생성도 필연적이 아니다. 그것이 생성되기 전에도 필연적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생성된 후에도 필연적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생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식이 아니라 자유의 행위이며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3.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
ab하이데거는 개념으로서의 순수 존재를 거부한다. 순수존재에 대한 거부와 함께, 대치된 존재 개념은 본질적으로 연장적인 것이다. 존재가 아무리 얇게 썰리더라도 항상 존재는 점이 아니라 장(field)을 포함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10) 존재의 연장으로 특징지워지는 장으로의 이러한 변화은 하이데거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된다. 현존재에서 그것의 연장에 작용하는 것은 염려이다. 후기에는 존재를 무속에, 무를 존재속에 뿌리박게 함에 의해 마찬가지의 작용이 찾아진다. 무의 작용은 존재의 견고함을 해소하고 구성요소가 되지 않고 따라서 연장되지 않은 어떠한 지역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존재는 더이상 현존이 아니라 일어남(happening)이다.
ab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랜동안 망각되어 왔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다. 존재자가 어떻게 설명되든 존재자는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그 때마다 이미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신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문제의 이해에 있어서 최초의 철학적 진보는 즉 옛날 얘기를 하지 않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진보는 마치 존재가 존재자일 수도 있는 성격을 가진 거처럼 존재자를 다른 또 하나의 존재자로 소급해서 그 유래에 좇아 규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므로 존재는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증시방식을 요구한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도 고유한 개념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개념성은 존재자를 의미상으로 규정하는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11).
ab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빠져 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숨가쁘게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실제적 탐구의 주제적 물음으로서는 침묵해 버리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이 이룩한 성과는 여러 가지 첨삭과 덧칠을 거쳐 헤겔의 논리학에 까지 일관되어 왔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반복해야 할 필요성은 다음과 같은 선입견들을 비판함으로써 제기한다.
ab1. 존재는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제일 먼저 인지되는 것은 존재이며, 존재의 이해는, 사람들이 존재자에 있어서 파악하는 모든 것 속에 그 때마다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존재의 보편성은 유의 보편성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유와 종에 따라 개념적으로 분절되는 한 존재자의 최고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존재의 보편성은 모든 유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존재는 중세 존재론의 명칭을 따르면 초월자이다.
ab2. 존재 개념은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들은 이 개념의 최고의 보편성에서 추론하였다. 사실 존재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는 없다. 존재에는 어떤 성질도 덧붙일 수 없다. 존재에 존재자를 귀속시키는 방식으로는 존재는 규정될 수 없다. 존재는 정의를 통해 상위 개념으로부터 도출될 수도 없고, 하위개념에 의해 서술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 귀결되는 것은 존재는 존재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계내에서는 정당화된 존재자의 규정양식은 존재에는 적용될 수 없다. 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바로 그 대문에 존재의 물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ab3. 존재는 자명한 개념이다. 모든 인식과 언표에서 존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에서, 존재가 사용되거니와 그 때 그 표현은 구말 없이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균적 이해는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한 이해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모든 태도와 존재에는 아프리오리하게 하나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그 때마다 이미 존재 이해를 가지고 살고 있건만 존재의 의미는 동시에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존재의 의미에 대함 물음을 반복해야 할 원칙적인 필요성을 보여 준다12).
ab하이데거는 서구의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사유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존재자가 무엇인가라고 물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존재자가 그 자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형이상학적 표상은 존재의 빛에 힘입어 이러한 시야를 얻고 있다. 이때 이 빛 자체는, 다시말해 그러한 사유가 빛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바로서의 그것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그러한 사유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언제나 존재자만을 존재자의 관점 아래에서만 표상하기 때문이다.13) 형이상학은 끊임 없이 아주 여러 상이한 변형을 통해 존재를 표현하여 말하고 있다. 형이상학 자신은 마치 자기가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며 그에 대해 대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일깨우면서 그 인상을 확고히 굳힌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어느 곳에서도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은 도대체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ab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함으로써만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전체로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면서 존재에 대해 말한다. 형이상학은 존재를 칭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발언들은 그것의 시작으로부터 그것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기이하게도 철저하게 존재자와 존재를 뒤바꾸고 있다. 물론 이 혼동을 존재의 사건으로 생각해야지 하나의 결함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혼동은 그 근거를 결코 사유의 태만함이나 말함의 과실에 두고 있지 않다.14) 존재자 그 자체의 표상에서부터 존재의 진리에 대한 사유에로 넘어가려는 시도는, 존재자 그 자체의 표상에서부터 출발하여 어떤 형태로는 존재의 진리도 여전히 표상하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기서의 표상은 필연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 되며, 결국 그것은 표상으로서는 사유되어야 할 그것에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렇게 형이상학에서부터 유래하여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진리의 연관에로 파고드는 관계를 하이데거는 「이해」로 파악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해는 동시에 존재의 비은폐성에서부터 사유되고 있다. 그것은 탈자적인 기획 투사, 다시 말해 개방된 것의 영역 안에 들어서 있는 내던져진 기획 투사이다. 이 기획 투사 속에서 열려져 있는 것으로서 드러나는 영역, 그래서 그 영역 안에서 어떤 것(여기서는 존재)이 어떤 것(여기서는 자신의 비은폐성에서 드러나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으로서 입증되는 그 영역이 의미이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와 존재의 진리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
ab우리는 습관적으로 존재자를 현실적인 그 무엇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과 존재자로서 입증되지 않은 그 모든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존재라고 사유하는 그것은 결코 존재자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대변하였던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보였던 바로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존재자가 아닌 것, 즉 존재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존재는 과연 어떻게 사유될 수 있는가라는 어려움은 최종적으로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은채 남아있다. 그럼에도 하이데거에게는 존재 일반이 사유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였으며, 이 태도는 그의 탐구의 시작이래로 끝까지 지속되었다15).
ab어려움은 우리가 대상적인 표상방식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 및 대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 낱말로, 다시말해 대상적인 영역에서 우리에게 친근한 그 낱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그 사실에 있다. 하이데거에게서 존재 자체는 결코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는 결코 대상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지만, 그 존재는 마치 존재자 일반이 밝혀지듯이 우리에게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파악은 인간이 현존재로서 열린장 (Da-sein의 Da-) 가운데 서 있으면서 저 생기된 훤한 밝힘(Lichtung)을 견지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열린 장 가운데 서 있을 때 존재자는 개방적인 것으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존재의 훤한 밝힘 가운데에 서 있음을 인간의 탈존(Ek-sistenz)이라고 부른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된 탈존은 이성 즉 ratio의 가능성에 그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탈존은 그 안에서 인간의 본질이 자기 규정의 유래를 간직하게 되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탈존은 인간이 자기의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기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고자 애쓰는 실존주의적 의미에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열려 있음(개방성)이라는 의미에서의 훤한 밝힘으로 나와 서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이 열려 있음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거나 작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그 모든 창조함과 작용함을 떠받들고 있다.16) 이제 더 이상 존재자에 관해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을 기투하는 그런 주관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존재로부터 즉 존재에 대한 인간의 연관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처해 있다. 우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자성으로 사유하면서 이 둘(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사유하지 않는 형이상학의 영역에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다.
4. 하이데거의 키에르케고어 비판
ab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다음과 같이 키에르케고어를 비판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순간의 실존적 현상을 아주 날카롭게 천착하였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상응해서 실존론적 해석도 성공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통속적 시간 개념에 붙잡혀 있어서 순간을 지금과 영원의 도움을 받아 규정한다. 그가 시간성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인간의 시간-내-존재를 가리킨다. 시간 내부성으로서의 시간으로는 지금을 알 뿐 순간은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순간이 실존적으로 경험된다면, 비록 실존론적으로는 명확하지 않더라도, 보다 더 근원적인 시간성이 전제되는 것이다.>>17)
여기서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순간의 이해가 「지금」(now)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키에르케고어의 영원성에 대한 이해는 「지금」을 의미하는 결코 변하지 않는 현존의 이해이다. 하이데거에 다르면 키에르케고어는 모호한 시간개념에 고착해 있다. 이러한 시간 개념은 흘러감으로써 시간을 구성하지만, 그로 그러한 방식으로 순수 존재의 현존을 반영하는 지금의 연속에 기초해 있다. 하이데거의 시간이해는 그처럼 구성요소가 되지 않는 개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순간에 대한 그의 이해는 지금에 정향될 수 없으며 현존으로서의 순간이 아니라 연장의 개방으로서의 순간으로 향하고 있다.18) 이처럼 순간의 개념은 하이데거에 의해 그 자신의 존재론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의 존재론은 순수 존재와 그것의 시간적인 표현에게, 지금, 현존, 또는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ab19세기에 키에르케고어는 실존 문제를 신존적 문제로서는 분명하게 포착하고 철저하게 사유하였다. 그러나 실존론적 문제성은 그에게는 매우 생소해서,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그는 전적으로 헤겔 및 헤겔을 통해 보여진 고대철학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 불안의 개념에 관한 논문을 제외하면 - 철학적으로 배울만한 것은 그의 이론적 저술족보다 교화적 저술 쪽에 많다.19) 헤겔의 순수 존재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의 반론은 사유자의 관점과 순수 존재의 관점의 동일시에 대한 공격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동일시의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키에르케고어에 따르면, 사유자가 구성하는 체계가 추상적인 것에게는,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는 완벽하게 타당해도 인간인 사유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에르케고어의 공격은 순수 존재와 사유자의 상황의 동일시에 향하고 있지 순수 존재 자체로 향하지는 않는다. 키에르케고어의 노력은 헤겔의 존재론적 범주의 근본적인 해체가 아니라 그것들의 새로운 병치이다.
ab하이데거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키에르케고어의 사유는 존재적, 실존적 수준에 남아있고 존재론적, 실존론적인 수준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가 존재 자체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존재의 문제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음으로써 주체적인 실존이 아니라 사유속에 연루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존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주체적인 사유에 반대되는 객관적 관심을 표현한다. 따라서 존재 자체의 문제를 제시하길 거부한 것은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정향의 결과이며 그가 채택한 입장에 고유한 것이다.20) 개인적 실존의 철학이 직접적 경험이 존재의 창조적 근원으로의 입구라고 주장한다면, 직접적 경험을 묘사하는 개념이 동시에 존재 자체의 구조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소위 말하는 감정은 존재론적 의미를 갖지 않은 단순히 주관적인 정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실재 자체의 구조에 대한 반 상징적(half-symbolic), 반 실재적(half-realistic) 지시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개인적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ab실존적 존재론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경험들로 서술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모든 경험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고려되는 것은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의미있는 경험들이 마찬가지 의미를 갖지 않은 것들에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분의 기준으로 쓰이는 앞선 존재론이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탐구의 참된 실존적 성격을 파괴할 것이다. 문론 하이데거가 그의 경험을 매우 신중하게 선택하고 있지만, 그러한 기준 없이는 선택의 다른 방법은 없다. 어떤 근거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선택된 경험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화(exemplary)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론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문제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염려(Sorge)는 현존재의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개의 통찰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하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개의 경험적 경우를 선정하고 그것을 존재론적 예화로 선언하는 것이다.21) 하이데거가 안고 있는 난점은 현존재의 분석은 예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실존이외의 것이라고 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이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다른 현존재에게 예화되는 그러한 현존재가 있을 수 없다.
5. 하이데거에 의한 키에르케고어의 존재론화가 지닌 문제점
ab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주제를 존재론적 범주로 옮겨 놓았다. 그는 시간적인 탈존(과거, 현재, 미래)과 관련한 실존으로서의 인간 존재(현존재)에 대한 선험적이고 구조적인 설명을 제시하였다.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존재는 존재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자기지식(개인적 정체성)의 가능성은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미래로 기투되며, 현재속에서 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의 임무는 자기 창조의 가능성의 지속적인 회복을 포함한다. 하이데거의 비본래적 삶에 대한 설명은 "Mitsein" 또는 함께있음이 존재론적으로 인간 존재에 구성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 창조를 맡는 능력의 발전에 앞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이해가 항상 이미 그들 또는 "das Man"과의 동일화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키에르케고어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그들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삶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택을 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어떻게 현존재가 자신의 세계와 처해진, 그러나 여전히 비판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22) 하이데거는 키에르케고어의 윤리적 의식의 결정적인 함축중 하나는 본래적 삶이 문화적 역사적 진공속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정체성에 대한 나의 감각에 비판적으로 관계됨은 개인적인 뿐만 아니라 내속으로 나의 유산을 의문시하는 능력을 주입하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되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권고를 확장하면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으로 말해서 이미 갖고 있는 전제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철학은 본래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존적 차원에서 본래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닮은(das Man) 비본래적 존재에 대한 반대 경향이다. 해석학적 차원에서는 실존과 시간성과 관련한 현존재의 본래적인 해석은 현존과 관련한 현존재의 퇴락하는 해석에 대한 반대 경향이다. 우리의 퇴락은 다름아니라 퇴락된 존재론의 반영이다.23)
ab하이데거에 의하면 서양 존재론은 실존의 역사적 양태인 현존재가 정적인 범주속에서 이론화되었기 때문에 비본래적이라고 비판한다. 사유는 순수한 객관적 반성이 아니라 존재의 양태이기 때문에 퇴락한 존재론은 표현의 단순한 오류가 아니다. 개념화의 비본래적인 양상은 망각이나, 또는 우리의 철학적 유산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는데 실천적으로 실패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적 본래성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 없이는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있다. 더나아가서 형이상학이 본래적 존재론을 만드는데 무능력함을 폭로함으로써, 해체는 전면적인 개념적 혁명으로 나아간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살아있는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은 이 혁명에 의해 보호될 것이다. 그러나 실존적 의식과 방법론적 의식의 두 단초를 하나로 짜넣으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실패 했다.24)
ab하이데거가 본래성의 반복이라는 키에르케고어적인 윤리적 관점을 존재론화 하는 방식은 개인의 교육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적인 요구를 구체화하는 대신 포기한다. 비판적 의식으로의 내적인 성작의 과정없이 하이데거적인 본래성은 태도의 전화와는 반대되는 추상적이고 인지적인 성취에만 제한되게 된다. 윤리적인 내면성 상실의 결과는 첫째, 하이데거의 사유가 금욕적(stoic) 의식에 빠져들게 된다. 둘째, 하이데거는 실존의 윤리적 양태의 키에르케고어적인 개념을 도덕성자체로 해소하며 그럼으로써 도덕성을 결경론적 틀에 기초지운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어에서는 본래성이 나를 비판적 자기 의식의 윤리적 삶을 감행하도록 부르는데 비해,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전통의 철학적 틀에 대한 문제에 대한 인지적 시도로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 - 심리적, 실존적인 것과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것 - 는 그들의 철학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첫째 키에르케고어의 본래적인 삶의 모델이 변증법적인데 비해 하이데거의 것은 대립적이다. 둘재, 하이데거와는 달리 키에르케고어는 윤리적 개인을 공공적 규범에 대한 반대로 만들지 않는다. 키에르케고어는 이웃으로서의 개인들의 참된 공동체의 가능성과 군중을 구분한다. 참된 공통체가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의 진정한 유대를 나타내는데 비해 군중은 그러한 유대를 이루는데 실패한다. 관계들이 무관심과 무감동으로 악화될때 군중이 탄생한다. 키에르케고어의 뛰어난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의 유배로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다. 공동체 내에서 유배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동적 세계의 부분이 되면서도 여전히 그안에서 고립의 방식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결단한 윤리적 개인은 질적인 측면에서 말할때만 군중으로 부터 분리된다.
ab그러나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변증법적 인 내면성에 근거짓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적 자아와 공공적 세계 사이의 관계의 모델은 대립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공공적 영역 자체와 비본래적인 그들 사이의, 실존의 공공적 사회적 성격과 군중사이의 모호한 구분에서 오는 난점속에서 작업하고 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맺는 방식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비판적 자기 지식으로의 운동을 이론화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실패한다. 본래성이 다른 사람에 대한 염려의 능력과 공감을 포함한다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이데거는 본래성을 극단적인 고립으로, 다른 것에 대한 자아의 무관계성으로 제시한다.25) 불안의 경험에 대한 하이데거적인 분석은 현존재를 일상 세계속에서의 상실과 낯선 느낌으로 묘사한다. 사유속에서 금욕주의는 자유를 성취한다. "사유속에서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전적으로 나 자신과의 공유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겔의 말이 불안 속에서, 죽음을 향해 있음에서, 죄와 양심과 결심속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개인화와 다른 것에 무관계함에 대한 하이데거의 묘사에서 울리고 있다.
ab어쨌든 자아-공공 관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립적인 모델은 본래성에 대한 키에르케고어적 관점의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측면을 포함할 수 없다. 그대신 금욕주의의 대립적인 의식은 삶에 대한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관점을 강화시킨다. 자연적인 특성이 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식의 성장속에서만 구분된다는 키에르케고어적인 관점과 반대로 하이데거적인 본래성은 존재론적으로나 자연주의적으로 근거된 엘리트주의에 대한 그리스적인 관념을 불러 일으킨다.26) 인간은 모두가 가장 최고로 자기의식을 발전시킬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원리 대신에 앞서주어진 특성과 능력에 의해 구분된다. 따라서 30년대의 하이데거가 시인, 사유가, 정치가들 특별한 영웅들과 그리스, 독일 같은 정신적으로 뛰어난 국가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한 창작자는 일반인은 할 수 없는, 즉 인간성의 더 높은 목적을 보고, 포함하는 더 나은 권위로서 태어났다.
1.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Kierkegaard in Post/Modernity』, Martin J.Matustik and Merold Westphal ed, Indiana university Press,1995,43p
2. 하이데거는 『Uber dem Humanismus』에서 실존주의 사상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주의는 여전히 인간의 주체 중심주의라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역사안에 놓여 있다. 이글 p6이하 참조.
3. Patricia J.Huntington은 하이데거가 국가 사회주의에 개입하도록 이끈 그의 엄숙주의와 결정론도 바로 이러한 키에르케고어의 내면성 개념으로부터의 하이데거의 추상화에서 부터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44p
4. 존재적(ontisch)과 존재론적(ontologisch)의 구별은 단순하게 말하면 사실과 이론간의 구별이다. 존재자를 묘사, 서술, 취급, 연구하는 것은 존재적이고, 존재자를 그것에 고유한 존재를 겨냥해서 해명, 해석하는 것은 존재론적이다. 존재자를 대상으로 연구하는 과학은 존재적이고, 그 과학의 가능근거를 탐구하는 철학은 존재론적이다. 실존적(existenziell)과 실존론적(existenzial)의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소광희 옮김, 경문사, 1995, 15p, 주 h.
5.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Routledge&Kegan Paul LTD, 1954, p123.
6. "지금까지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해왔다. 즉 이것 또는 저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물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학문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말이다. 여기에 잘못이 있다. 사람은 이와 정반대의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학문이, 그것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혼란에 빠진다고 말이다. 역설은 양보가 아니라 하나의 범주이며, 실존하고 인식하는 정신과 영원한 진리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존재론적 규정이다." 표재명, 「키에르케고어의 역설의 개념」, 『키에르케고어 연구』, 1995, 지성의 샘, p65이하에서 재인용.
7. Soren Kierkegaard, 「Philosophical Fragments」, 『Kierkegaard's writings 7』, Howard V.Hong and Edna H.Hong ed&tr, preinceton university press, 1985, p39.
8. 키에르케고어에게서 역설의 개념은 1.사고의 본질적인 성격으로서의 역설로부터 2.인간의 오성적 사고가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를 이루는 절대적 상이성으로서의 역설을 거쳐, 3.시간 안에 들어온 영원자라고 하는 절대적 역설, 즉 사람이 된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의 계시의 성격으로서의 존재 개념이 된다. 이러한 절대적 역설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분노와 신앙이다. 표재명, 「키에르케고어의 역설의 개념」, p65.
9. Soren Kierkegaard, 「Philosophical Fragments」, p9.
10.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4.
11. Martin Heidegger, 『Sein und Ziet』, Gesamtausgabe, 1977, S.8.
12. 『Sein und zeit』, S.3f.
13. Martin Heidegger, 『Was ist Methaphysik?』,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4, p13이하.
14. Martin Heidegger, 『Was ist Methaphysik?』, p25.
15. 발터 비멜,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한길사, 1997, p188.
16. 발터 비멜, 『하이데거』, p198.
17. 『Sein und Zeit』, S.447f.
18.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5f.
19. 『Sein und Zeit』, S.313.
20.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29.
21. Michael Wyschogrod, 『Kierkegaard and Heidegger』, p139.
22.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6.
23.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6.
24.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47.
25.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50.
26. Patricia J.Huntington, 「Heidegger's Reading of Kierkegaard Revisted」,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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