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현대신학자료1

생철학/쇼펜하우어/키에르케고르/실존주의

생철학/쇼펜하우어/키에르케고르/실존주의  
http://cafe.naver.com/modernth/353   
  
● 생의 철학(生-哲學)

생철학은 쇼펜하우어를 시조로 하고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짐멜 등에 의해 대표되는 철학이다. 원래 이것은 헤겔의 이성주의, 주지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생을 경화된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살아 있는 생,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생으로 파악하려 한다. 그리고 생을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개념, 판단 등 합리적 방법에 의하지 않고 생에 적응해서 생을 직접 파악하려고 하는 직관적.비합리적 방법을 가진다.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이성주의를 정면에서 반대하고 칸트의 물자체(物自體)를 '살려고 하는 맹목적 생존 의지'로 봄으로써, 의지를 세계와 삶의 본질 또는 기초로 삼았다. 의지의 활동은 결코 쉬지 않고, 또 영원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서 무정부적 경쟁, 약육 강식, 만인 투쟁의 현실 사회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고뇌로 차 있으며 여기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금욕과 무의지에 의한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야 한다는 허무적 염세주의를 주장하였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부정적 생철학을 반대하고 비합리적 생을 비합리적인 그대로 긍정하려는 생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므로 니체야말로 진정한 생철학자라 할 만하다. 니체도 세계의 본질을 의지에 두었으나 쇼펜하우어의 의지가 맹목적인 데 반하여, 니체의 의지는 부단히 보다 큰 힘을 추구하며, 부단히 성장.강화하려는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이다. 힘의 성장에는 물론 파괴가 수반된다. 우리는 힘의 성장에서 환희를, 힘의 파괴에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고통의 총량은 열락의 총량을 능가한다는 이유로 생을 부정하고 의지를 근절하려는 약한 염세관을 니체는 취하지 않는다. 창조의 일면에 파괴가 따르는 자기 모순적인 디오니소스적 생성, 언제나 같은 일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영겁 회귀의 세계, 그것은 확실히 허무한 세계임이 틀림 없다. 그러나 이 허무한 세계를 허무한 그대로 받아들여 생을 긍정하고 살아가는 운명애(運命愛)의 태도, 이것을 니체는 장래의 새로운 인간인 초인이 지녀야 할 태도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한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로 자처한다. (임석진 역, 세계철학사, 분도출판사, 1980 pp.350 이하)
 
● 쇼펜하우어(1788.2.22~1860.9.21)

독일의 철학자. 염세사상의 대표자로 불린다. 단치히 출생. 은행가와 여류작가인 부모 덕택에 평생 생활에 걱정 없이 지냈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자유도시 함부르크로 이사하였고, 1803년에는 유럽 주유의 대여행을 떠났다. 1805년 그를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고타의 고등학교를 거쳐 1809년부터는 괴팅겐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우고, G.E.슐체의 강의를 들었다. 이어 11년에는 베를린대학으로 옮겨, J.G.피히테와 F.E.D.슐라이어마허를 청강하였으며,`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13)로 예나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때를 전후한 사교가인 모친 요한나와의 불화˙대립은 유명한데, 이로 인해 햄릿과 같은 고뇌에 빠졌고, 그의 독특한 여성혐오, 여성멸시의 한 씨앗이 싹텄다.
 바이마르에서 살면서 J.W.괴테와 친교를 맺었고, 그에게서 자극을 받아 색채론(色彩論)을 연구하여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16)를 저술하였다. 또한 동양학자 F.마이어와의 교우(交友)로 인도고전에도 눈을 뗬다. 드레스덴으로 옮겨 4년간의 노작인 저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19)를 발표하였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20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G.W.F.헤겔의 압도적 명성에 밀려 이듬해 사직하고, 22∼23년의 이탈리아 여행 후 31년에는 당시 유행한 콜레라를 피해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가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의 철학은 Ⅰ.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피히테, F.W.J.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하였으나, 그 근본적 사상이나 체계의 구성은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論) 및 인도의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사상의 기조로 한다.
즉, 그는 칸트와 같이 인간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는 시간˙공간˙카테고리(category), 특히 인과율(因果律)이라는 인간의 주관적인 인식의 형식으로 구성된 표상일 뿐, 그것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우리들의 표상이며 세계의 존재는 주관에 의존한다.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이며, 이것이 곧 물(物) 자체로서, 현상은 이 원적(原的) 의지가 시간˙공간인 개체화(個體化)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에 의하여 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물 자체를 인식불가능으로 한 칸트와는 달리, 그는 표상으로서의 현상세계(現象世界) 배후에서 그것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는 물 자체를 의지로써 단적으로 인식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세계의 원인인 이 의지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 바로 그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형이상학설을 배경으로 할 때, 인간생존의 문제는 이 의지에서 출발하여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삶은 끊임없는 욕구의 계속이며, 따라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는 무욕구의 상태, 즉 이 의지가 부정되고 형상세계가 무로 돌아가는 것[열반(涅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그는 이와 같이, 엄격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해탈과 정적(靜寂)의 획득을 궁극적인 이상의 경지로서 제시하였고, 또한 그렇게 하여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 즉 동고(同苦:Mitleid)를 최고의 덕이자 윤리의 근본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思潮)에 영합하여 크게 보급되었는데, 의지의 형이상학으로서는 F.W.니체의 권력의지에 근거하는 능동적 니힐리즘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밖에도 W.R.바그너의 음악, K.R.E.하르트만, P.도이센의 철학을 비롯한 여러 예술분야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 키에르케고르(1813.5.5~1855.11.11)

덴마크의 철학자.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중(辨證)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大地震)’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43~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43) 《반복》(43) 《공포와 전율》(43) 《불안의 개념》(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非學問的後書)》(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講話)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신(神)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49) 《그리스도교의 수련》(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이  키에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 실존주의(實存主義)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또는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사상으로, 주체적 존재로서의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최초의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은 합리적 체계 속에서는 해소될 수 없는 구체적 개별적 단독자로서의 존재이다. 실존이란 그러한 현실 존재 또는 참된 진실 존재로서의 참된 본래적 자기를 가리킨다. 이 참된 본래적 자기를 어떠한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지만, 대체로 신을 인정하는 유신론적 입장과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마르셀, 베르자예프 등이 있고, 후자에는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 등이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대지(大地:現實)에 충실을 기하고 현실적 생에 대한 긍정적 사랑을 역설하는 무신론적 실존을 주장하며, 그 목표는 운명애와 '권력에의 의지'를 원리로 삼는 초인의 이념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을 밝혀 주는 독특한 방법을 실존 해명(實存解明, Existenzerhellung)에서 찾는다. 실존 해명은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자아 존재에 눈뜨게 하고 자기 자신이 되게 한다. 특히 죽음.고뇌.투쟁.책임 같은 한계 상황에서 실존은 가장 잘 해명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속으로 뛰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우리 자신이 깊이 해명된다. 이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 필연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세계 내 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로 본다.
 인간이 세계 내 존재인 한, 인간은 사물과 인간에 대한 염려.관심(念慮.關心, Sorge)과 불안(不安, Angst)을 갖고 살기 마련이다. 즉, 현존재의 존재 방식은 염려이며, 이 염려는 현존재의 유한성과 시간성을 드러내 준다. 죽음 앞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현존재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이해는 시간성의 시계(視界, Horizont)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zum-Tode)이며, 절대적 한계점으로서의 죽음을 직시하는 현존재이다. (임석진 역, 앞의 책, P. 424 이하)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