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변명
키에르케고르의 변명 백 도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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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아브라함과 미카엘 키에르케고르
2. 미카엘 키에르케고르와 죄렌 케에르케고르
3. 죄렌 키에르케고르와 레기네 올센
4. 종교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Ⅲ. 결론
Ⅰ. 서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이 말은 신약성서 4복음서 가운데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일컬어지는 앞의 세 복음서에 기록된 말로서 예수가 수제자 베드로에게 던진 물음이다.
예수의 이 물음은 예사로운 물음이 아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가장 성실성 있는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언행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듣고 보았던 제자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인간을 시험하여 인간의 이해력과 인식능력을 가슴 졸이며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신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의 지상강림은 현실적으로 믿기 어렵다.'는 불신앙의 벽을 깨뜨리고, 새롭고도 낯선 신앙에로의 참된 전환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혹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반문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베드로가 여전히 일말의 의혹을 -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거나 혹은 그의 인식능력에 결함이 있거나 해서 생기는 - 가지고 있었다면 대뜸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든지 "당신은 요셉의 아들 아니오? 목수질 하는" 라고 반문당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이 말을 물어보아야 할 정도로 예수는 초조하였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염려는 기우였다. 베드로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리하여 베드로에 의해서 인간은 또 한 번 신으로부터 그에게 바쳐질 믿음에의 가능성을 인정받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즉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류가 아브라함의 백성을 이어, 하나님의 실재하심과 예수가 그의 아들임을 긍정함으로써 신약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은 성경의 역사에서 특정한 때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열심인 자를 골라 던지는 절실한 물음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혹은 예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의 결과로서의 신앙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아브라함에 의해 구약의 시대가 열렸고,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신약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19세기 무신앙의 시대 한 복판에서 죄렌 키에르케고르(S ren Kierkegaard)는 자신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죄렌은 어려서부터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았다. 그는 겨우 네 살이던 때로부터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kael Kierkegaard)로부터 종교적 교육을 받았고, 이것은 그의 영혼 속에 지워질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물론 그도 아버지 미카엘이 지워준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애썼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부름을 받고 양육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나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의 말씀을 외면했던 한 순간의 실수 같은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속죄를 구하게 되고, 그런 후에 더욱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렌에게 주어졌던 시험은 그 후에 찾아왔다. 그 시험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이었으며, 그는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함으로써 이 시험을 이겨내었다. "레기네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나는 다음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너는 거칠고 방종한 생활에 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종교성 - 그것은 목사들의 그것과 같이 김빠진 그런 것이 아니다 - 으로 향하느냐, 어느 편이다."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의 포기는 신과의 사랑을 온전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아버지 미카엘로부터 받은 기독교 교육이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함으로써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는 아이러니(irony)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같은 비리를 자행하고서도 선한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죄렌의 변명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Ⅱ. 본론
1. 아브라함(Abraham)과 미카엘(Michael)
이 논문에서 언급되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인용하는 아브라함과 미카엘의 이야기란, 특히 본 논문에 인용하는 부분은 너무 평범해서 대부분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굳이 그 의미를 말하려 한다면 정도 이상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진 한 노인이 윤리적 차원을 넘어 결행하려 했던 특수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죄렌이 그러한 사실을 주지시켜준 데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행위의 천재는 일상적이 아닌 것에서 일상적인 것을 경험해 내며, 정신의 천재는 일상적인 것에서 일상적이 아닌 것을 경험한다"는 말을 음미케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발견은 단순히 죄렌의 안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방식, 즉 그리스도교를 모험해 봄"에 의해서이다.
이리하여 그는 모험이라는 재현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의 현장으로 끌고 간다.
마침내 그는 이 옛이야기 떄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 버렸다. 그의 마음에는 아브라함과 만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원, 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단 하나의 소원밖에 없었다. 그의 소원은 동방의 아름다운 산천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아브라함이 다가오는 슬픔을 마주보면서 곁에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간 그 삼일간의 나들이에 동행하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 첫머리의 '그' 라는 삼인칭 단수는 죄렌의 부친 미카엘을 지칭한 것이다. 죄렌은 마치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진리의 현장'에 모시고 다니듯이 그의 부친을 앞세우고 있다. 미카엘은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여행에 동행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생애와 사상이 불가분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죄렌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소원은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 산을 바라본 그 순간, 그가 나귀를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 산으로 올라가는 그 순간에 함께 있는 것이다.
죄렌은 그의 {공포와 전율}에서, 그의 부친 미카엘의 체험 가능성을 네 가지 예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든 미카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영원한 즐거움이며 기쁨" 이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목숨보다 천 배나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아들 이삭을 신에게 번제의 제물로써 바치려고 심장 위에 비수를 겨누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만다. 그것은 한량없는 비애와 탄식의 장면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정하리만치 굳은 표정으로 행하는 패륜적인 하나의 동작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그 행위 뒤에 숨겨진 신앙을 본다.
그는 자신을 시험하는 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았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실 때에는 바치기 어려운 제물이란 하나도 없음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칼을 뽑았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탄식의 노래도 없다. 슬퍼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요,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일도 인간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으로서 자연인이 알 수 없는 용기를 획득하였는데 그것은 곧 더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기를 배운 결과이다. 그리하여 "믿는 자를 본받고 더욱 복받을 것"을 배운다. 또한 그는 이와 비슷한 많은 방법으로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난 나들이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는 피로에 지쳐서 팔짱을 끼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사람은 과연 아무도 없다. 감히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리하여 미카엘의 마음속에 아브라함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나이는 신앙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그런데 미카엘은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 여행에 동행하려 했을까? 그것은 그가 일찍이 신앙을 잃고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신의 불공평한 처사를 저주했다는 죄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의 죄의식은 그의 성격을 우울하게 했으며 이것은 그의 아들 죄렌에게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을 지웠던 것이다. 그의 죄의식, 아브라함과 모리아 산의 동행, 그리고 신이 내린 저주의 관념 등은 후에 죄렌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그때 엄청난 지진이, 무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모든 현상의 새로운 해석을 강요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장수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형벌이 그 위에 있음이 틀림없다.'
2. 미카엘과 죄렌
신은 죄렌을 교육함에 있어서 두 사람을 이용했다. 이들은 죄렌의 인생관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불가결한 과업을 그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증언에도 그의 두 선생이란 바로 "한 백발노인의 고귀한 현명과 한 여인의 사랑스런 무지" 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말할 것도 없이 '레기네 올센'이고 노인은 미카엘이다. 이 아버지 미카엘을 언급하지 않고는 죄렌을 도저히 논할 수 없다.
미카엘은 죄니 죽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인생과 종교의 근본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엄숙성이 그의 생활과 성격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를 그렇게 되게 하였던 과거의 괴로운 사건이 있었다. 죄렌의 {유고} 속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어렸을 때 유틀란트 황야에서 양을 치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운 나머지 언덕에 올라가서 신을 저주한 이단자의 무서운 운명을, 그는 82세가 되었어도 과거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신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그를 헐벗음과 굶주림 속에 방치해 둠으로써 이 세상의 행복한 자들과의 사이에 불공평을 행하였던 신을 저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적극적으로 신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훼방하였던 것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이며 이 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미카엘은 자기의 죄를 알았다. 용서받지 못할 죄, 이제 그에게는 신의 축복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그의 영혼은 불치의 병,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얻는다. 그 때의 절망적인 심정이 그의 아들의 입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나는 때때로 캄캄한 구멍 속에 갇힌다. 그러면 나는 고통 속에 이리저리 기어 헤매도 아무것도, 여하한 출구도 보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가 그토록 갖기 원하던 재산과 안락한 집과 많은 자식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로 난 천국의 문을, 이 유한한 생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구를 닫아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갖기 원하던 것을 가졌을 때 그의 주위에는 소망이, 축복이 맴돌지 않고 죽음의, 저주의 냄새가 짙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여하한 방법으로도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천국의 문을 찾아 나섰다. 아브라함과의 모리아 산의 여행도 그 노력의 하나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체험한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 자신의 목숨이나 아내나 재산보다도 - 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문득 미카엘은 깨닫는다. "믿음을 행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도 그의 아들 죄렌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선 아들 죄렌에게 매우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시키고, 그런 다음에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해라." 이것이 그가 아들 죄렌에게 어릴 적부터 베푼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그는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 천국으로 난 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힘껏 두들겼다.
미카엘의 죄렌에 대한 교욱은 엄격하였다.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한 분이었다. 일견 살풍경하고 산문적이었다. ...가끔 아버지는 묵묵히 아들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응시하면서 '가엾은 애다. 너는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의 우수의 책임자라고 믿고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걱정의 원인이라 믿었지만 서로의 생각은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카엘의 엄한 기독교식 교육은 죄렌이 일견 살풍경하게 느끼는 한에 있어서는, 그의 행위가 사랑으로 이해되기 전까지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행복과 희망 대신에 절망만을 안겨 준 것이 되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또한 몹시 기뻐해 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소년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미칠 듯이 우울하였다.
미카엘에게 있어서 죄렌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양이었던 것이다. 죄렌은 태어나면서부터 결박당해 있었다. 행위의 자유도, 의사표시의 자유도 없었다. 언제나 미카엘이 하나님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치켜든 비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처음엔 미카엘의 뜻을 알지 못했으나, 알고 난 후에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도망을 쳤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의 결별과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서 비롯된 것들 - 우울, 하나님께 대한 신앙 등 - 을 버렸다. 그는 아버지 집을 나와 하숙생활을 하였고, 또 카페나 요정에도 출입하여 약간의 빚도 지게 되었다. (이 빚은 후에 그의 아버지가 갚아준다.) 그는 후에 그때를 회고하여 "나는 방탕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이 한 때의 방탕,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미카엘이 황야에서 목동이었을 때 배곯음과 추위 그리고 외로움 때문에 신을 저주한 것이 미카엘의 일생 동안 씻지 못할 죄의식을 갖게 했었듯이, 죄렌에게도 똑같은 죄의 흔적을 그의 마음속에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죄렌은 그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비밀, 즉 '커다란 지진'을 듣게 되며 자신의 운명을 꺠닫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장수(長壽)와 물질적 풍요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이며 아버지는 그것 떄문에,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이제 막 그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꺠닫게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로 인해 나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확고한 것으로서 참된 아르키메데스적 공리의 점인 신적인 아버지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훈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자.
어떤 한 순간의 터득에 의해서 죄렌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조금씩 명랑해졌고 신앙심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는 미카엘의 뜻대로 "진실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20대 청년으로서의 탐미적(探美的) 삶에 대한 열망도 자라고 있었다.
3. 죄렌과 레기네 올센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잊어 주십시오. 한 처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던 한 사나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구절은 죄렌이 그의 약혼녀 레기네 올센에게 보낸 약혼파기의 통첩이다.
여기에 대한 레기네 올센의 답은 "당신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버리시는 것은 저를 죽이는 일입니다." 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울며 그것을 철회해 줄 것을 바랐으나, 이미 돌이켜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종교적인 것만 가지고 있으면, 레기네 없이도 살 수 있고, 또 지금도 살 자신이 있다." 이처럼 이미 그는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을 그 자신에게 있어서 차선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의 천국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죄렌이 열심히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레기네는 곁에 앉아 있긴 했으나 거의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에 대한 무감동을 의미한다고 죄렌은 판단하였다. "레기네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그가 내린 최후의 결론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특수한 환경, 특수한 사색을 하고 있던 그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신과 레기네,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었다.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은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과 양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레기네와의 사랑은 버려져야 한다. 선택은 엄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레기네와의 파혼에 의한 고통은 외부에서부터, 또는 내부에서도 너무도 세차게 몰려왔다. 외부에서부터 온 것은 사회적 비난이었고, 내부에서 온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를 위로하고 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혼의 사유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죄냐? 무죄냐?} 하는 논문에서 그는 그 이유를 다섯 개로 들고 있다.
첫쨰, 자기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데 반해 레기네는 정반대로 외향적 성격이다. 둘째, 그는 우울한 데 반해 그녀는 쾌활하다. 셋째, 자신은 본질적으로 사색가이지만 그 여자는 그렇지 않다. 넷쨰, 그는 윤리적이고 변증법적이나 그녀는 미적이고 직접적이다. 다섯째, 그는 동정적인 데 비해 여자는 전적으로 직접적이고 따라서 순진하지만 자기애적이다.
이상과 같이 약혼파기의 이유를 들었지만 그 진정한 이유가 될 만한 것이 한마디도 없다. 그 진정한 이유는 아마도 저 '아브라함의 침묵'과 같은 성질의 것일 것이다. 이 진정한 이유를 밝혀보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앞서 논했던 그의 아버지 미카엘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날 죄렌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행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아버지의 비밀, 즉 '커다란 지진'에 부딪혔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란 자기가 아버지에 의해서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죄렌은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었으며 욥의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레기네 올센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기를 엄습해 오는 불안을 의식해야만 했다. 그리고 레기네에게 다가올 불운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신에게 바쳐진 제물로서, 또는 저주받은 인생이 가서는 안 되는 삶의 궤도를 가고 있다는 자각 떄문이었다. "신 앞에 온전한 신앙을 바치기 위하여 레기네를, 그녀에게 거는 희망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는 전율하였다. 그것은 흡사 미친 행동이었다. "기독교는 광기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함이 없이 그 일을 행했다. 후에 언젠가의 편지에서 기록한 "그가 나를 희생으로 바친 신" 이란 글귀에서 우리는 레기네 올센도 자신이 죄렌에 의해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레기네 올센은 또 하나의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 되었고, 죄렌은 그녀와의 파혼과 함께 신과의 약혼을 하게 되었다.
4.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이상에서 살펴 본 바의 죄렌의 생애는 처음부터 특이하게 종교적으로 교육 받은 생애였으며, 그 자신이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놓고 더욱 종교적 결단을 내리는 것을 그의 특이한 논리 방식 속에서 숙명으로 알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내려진 신적 명령 -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해라 - 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독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그 대답을 찾으며 살았던 생애였다. 그의 수십 권의 저술은 결국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는 그의 방법, 즉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정언명령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그리하여 언제나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 위에 섰다는 확신 하에 군중을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시대에 대항해서, 또는 헤겔에 반대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것은 정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은 동적인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윤리성을 내포하지마는 그것은 동시에 정적(靜的)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욕심 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것은 분명히 행동을 지시하며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종교와 신앙의 영역인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비교에서 윤리적인 영역은 그것이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긴 하나 현존하는 인간에게 정적인 것 이상으로의 접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써 신의 구원에 손을 내밀기에 너무 부족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신에 대하여 적극적인 봉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신의 원래의 의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그것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동적(動的)인 종교적 영역에서는 인간은 신의 뜻을 좇아 언제나 최선의 것을 좇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가능성에 대한 참된 도박일 수가 있다. 그런데 헤겔은 그의 철학으로 인간을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만들어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대정신을 따라 호흡하기만 해도 천국시민이 될 수 있는 듯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죄렌은 그의 사고방식이야말로 기독교에 얼마나 해독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헤겔 자신은 그의 철학으로 수천년 간의 기독교를 그 교리면에 있어서 완성자로 추대되고 싶어하지만, 오히려 헤겔 같은 학자가 배출되도록 한 일천 팔백여 년의 기독교사까지도 모두 무로 돌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죄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는 학설이 아니라 존재전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독교에는 오로지 신앙이 있을 뿐이지 신학과 철학이 그것을 대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또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구세주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학설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강의하지 않았다. ...그의 학설은 실제에 있어 그의 삶이고 성찰이었다."
그는 헤겔의 철학에서 논리적 체계와 사유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실존하는 인간의 참된 고독과 신앙을 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헤겔의 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가 자기의 독자성을 거부하고 진리에 있어서 방관자가 되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서운 거짓에 대하여 또 한번 전율하였다.
중요한 것은 터득이다.
그가 터득한 것은 헤겔의 보편정신이 아니라 개별자요, 단독자이다. 그 개별적인 단독자는 또 실존으로 파악하고 실존은 다시 주체성으로 규정하고 주체성의 깊은 의미는 내면성에서 나타나고 그 내면성의 깊은 핵심은 기독교적 신앙이다. 죄렌의 사상은 바로 거기서 출발하였다. 신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신뢰이다. 따라서 신앙은 초가치적이므로 때때로 인간의 도덕성과 인륜성과 합리성까지도 초월한다. 그는 그러한 것을 {공포와 전율}에서 세 개의 명제로 이끌어 나간다. 첫째,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인 보류라는 것이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가? 셋째, 아브라함이 사라나 이삭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침묵에 붙여버린 것을 그가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죄렌은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읽어내려 하였다. 우리의 상식이라는 메카니즘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죽일 권리는 전혀 없다. 따라서 그같은 견지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위에서의 행위는 용서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으로 신을 믿고 그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성이 마비된 채였다면 그의 행위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그의 모든 합리적·지성적 판단을 일단 보류하고 신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의 행위는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따라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인 보류를 포함한다. 그는 단독자로서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다. ...믿음의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또 두 번째 명제에 대해서 "신앙의 기사는 홀로 자기자신에게 의뢰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무가 존재하든지 -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의무는 단독자가 단독자로서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라는 것과 단독자로서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는 상술한 역설이지만 - 혹은 그런 경우 신앙이 항상 있기 떄문에 그 의무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아브라함이 헛되거나... 어느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세 번째 명제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것인 것 같다. "아브라함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가 없다. 이 점에 그 고난과 불안이 존재한다. 즉 내가 말함으로써 나를 이해할 수 없게끔 한다면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의 고민은 그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그러한 고난의 짐을 침묵으로 감당하려 한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신의 명령을 행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그의 고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다. 개별자로서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선다는 역설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헛되든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브라함의 저 잔인한 행위를 "단독자와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라는 의미임을 터득함에 의해서 죄렌은 다시금 그의 아버지 미카엘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약혼녀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리고 덴마크 교회의 수장 뮨스터 감독의 비순교자적 신앙에 대한 공격과 그 문제에 대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마르텐젠 교수 와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행위와 무례에 대하여 가장 옳은 판정을 내릴 수가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어떠한 행위도 진지하게 행해졌다는 성실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싸운 대상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가 없다. 단지 모든 문제가 신앙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신만이 그 문제에 개입해서 심판자가 될 것이다. 그는 신이 주재하는 법정의 피고인이며 우리는 또 다른 피고로서 방청객일 뿐이다.
Ⅲ. 결론
그의 언행과 모든 저술들에서 그의 진실된 마음과 신앙을 보여주려 했던 죄렌은 거짓된 무리(단독자로서 신 앞에 서지 않는 군중)들과 싸우다가 순교자로서 죽었다. 그는 "참된 신앙의 기사이자 증인이지 결단코 선생이 아니다." 라고 한 그의 말처럼, 한 번도 교단에 서거나 강연장에서 강연을 한 적이 없으나, 그 어느 강사보다도 문제의 핵심을 확실히 깨달았고 그것으로 인해 인류역사상의 극소수 "인간정신의 참된 형성자"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다름 아닌 기독교의 검토가 필요하다. 1800년이란 세월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제거해 버려야 한다." 또한 그의 익명인 안티클리마쿠스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수다이며 비기독교적 혼돈이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도들이 존재할 떄 어느 세대에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다. 그들은 앞서간 기독교도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모든 것은 동시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한다. 그의 생은 인류와 함께 지나고 개별적으로는 인간 개개인과 함께 지난다. 영원한 역사로서 지상에서 그의 삶은 영원한 동시성을 지닌다.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또 말한다.
나는 오늘 이 코펜하겐에서 이미 천 수백년 전의 옛날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 이윽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몸을 희생시킨 것을 어떻게 나 자신의 속에서 실현하면 좋은가? 나는 절대적인 것을, 전체를, 나 자신, 나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생에서 도저히 체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천 수백년 전의 팔레스티나에서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 한 유대인이 기적을 행한 것도, 십자가상에서 희생이 된 것에도 무관심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세 구절 속에서 우리는 죄렌에 의해, 오랜 안개 저 넘어 빛나는 태양이 항상 존재함에 대한 확신을 배운다. 우리는 안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넘어 비치는 태양을 보려하는 것이다. 죄렌은 거기로 우리를 가능한 방법으로 인도한다.
그것을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자! 이것이냐 저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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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아브라함과 미카엘 키에르케고르
2. 미카엘 키에르케고르와 죄렌 케에르케고르
3. 죄렌 키에르케고르와 레기네 올센
4. 종교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Ⅲ. 결론
Ⅰ. 서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는 이 말은 신약성서 4복음서 가운데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일컬어지는 앞의 세 복음서에 기록된 말로서 예수가 수제자 베드로에게 던진 물음이다.
예수의 이 물음은 예사로운 물음이 아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가장 성실성 있는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언행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듣고 보았던 제자이다. 이 점에서 예수는 인간을 시험하여 인간의 이해력과 인식능력을 가슴 졸이며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신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신의 지상강림은 현실적으로 믿기 어렵다.'는 불신앙의 벽을 깨뜨리고, 새롭고도 낯선 신앙에로의 참된 전환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혹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반문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베드로가 여전히 일말의 의혹을 -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거나 혹은 그의 인식능력에 결함이 있거나 해서 생기는 - 가지고 있었다면 대뜸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든지 "당신은 요셉의 아들 아니오? 목수질 하는" 라고 반문당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이 말을 물어보아야 할 정도로 예수는 초조하였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염려는 기우였다. 베드로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리하여 베드로에 의해서 인간은 또 한 번 신으로부터 그에게 바쳐질 믿음에의 가능성을 인정받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즉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류가 아브라함의 백성을 이어, 하나님의 실재하심과 예수가 그의 아들임을 긍정함으로써 신약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은 성경의 역사에서 특정한 때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열심인 자를 골라 던지는 절실한 물음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하나님(혹은 예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의 결과로서의 신앙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보여준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아브라함에 의해 구약의 시대가 열렸고,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신약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19세기 무신앙의 시대 한 복판에서 죄렌 키에르케고르(S ren Kierkegaard)는 자신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죄렌은 어려서부터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았다. 그는 겨우 네 살이던 때로부터 그의 아버지 미카엘 키에르케고르(Mikael Kierkegaard)로부터 종교적 교육을 받았고, 이것은 그의 영혼 속에 지워질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물론 그도 아버지 미카엘이 지워준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애썼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부름을 받고 양육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나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의 말씀을 외면했던 한 순간의 실수 같은 것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속죄를 구하게 되고, 그런 후에 더욱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렌에게 주어졌던 시험은 그 후에 찾아왔다. 그 시험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이었으며, 그는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함으로써 이 시험을 이겨내었다. "레기네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 나는 다음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너는 거칠고 방종한 생활에 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종교성 - 그것은 목사들의 그것과 같이 김빠진 그런 것이 아니다 - 으로 향하느냐, 어느 편이다."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의 포기는 신과의 사랑을 온전히 하기 위함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아버지 미카엘로부터 받은 기독교 교육이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함으로써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는 아이러니(irony)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같은 비리를 자행하고서도 선한 결과가 나온다고 하는가? 이제 우리는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죄렌의 변명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Ⅱ. 본론
1. 아브라함(Abraham)과 미카엘(Michael)
이 논문에서 언급되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인용하는 아브라함과 미카엘의 이야기란, 특히 본 논문에 인용하는 부분은 너무 평범해서 대부분 사람들의 주목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굳이 그 의미를 말하려 한다면 정도 이상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진 한 노인이 윤리적 차원을 넘어 결행하려 했던 특수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죄렌이 그러한 사실을 주지시켜준 데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실로 "행위의 천재는 일상적이 아닌 것에서 일상적인 것을 경험해 내며, 정신의 천재는 일상적인 것에서 일상적이 아닌 것을 경험한다"는 말을 음미케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발견은 단순히 죄렌의 안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방식, 즉 그리스도교를 모험해 봄"에 의해서이다.
이리하여 그는 모험이라는 재현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의 현장으로 끌고 간다.
마침내 그는 이 옛이야기 떄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 버렸다. 그의 마음에는 아브라함과 만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소원, 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단 하나의 소원밖에 없었다. 그의 소원은 동방의 아름다운 산천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아브라함이 다가오는 슬픔을 마주보면서 곁에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간 그 삼일간의 나들이에 동행하는 일이었다.
이 이야기 첫머리의 '그' 라는 삼인칭 단수는 죄렌의 부친 미카엘을 지칭한 것이다. 죄렌은 마치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진리의 현장'에 모시고 다니듯이 그의 부친을 앞세우고 있다. 미카엘은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여행에 동행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생애와 사상이 불가분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죄렌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소원은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모리아 산을 바라본 그 순간, 그가 나귀를 남겨두고 이삭과 단 둘이서 산으로 올라가는 그 순간에 함께 있는 것이다.
죄렌은 그의 {공포와 전율}에서, 그의 부친 미카엘의 체험 가능성을 네 가지 예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든 미카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영원한 즐거움이며 기쁨" 이고 아브라함이 "자기의 목숨보다 천 배나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한" 아들 이삭을 신에게 번제의 제물로써 바치려고 심장 위에 비수를 겨누는 장면을 목격하고야 만다. 그것은 한량없는 비애와 탄식의 장면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정하리만치 굳은 표정으로 행하는 패륜적인 하나의 동작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그 행위 뒤에 숨겨진 신앙을 본다.
그는 자신을 시험하는 이가 하나님인 것을 알았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에게 요구하실 때에는 바치기 어려운 제물이란 하나도 없음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칼을 뽑았다.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탄식의 노래도 없다. 슬퍼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이요,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일도 인간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훌륭한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한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으로서 자연인이 알 수 없는 용기를 획득하였는데 그것은 곧 더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기를 배운 결과이다. 그리하여 "믿는 자를 본받고 더욱 복받을 것"을 배운다. 또한 그는 이와 비슷한 많은 방법으로 그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난 나들이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는 피로에 지쳐서 팔짱을 끼고 말하였다.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사람은 과연 아무도 없다. 감히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리하여 미카엘의 마음속에 아브라함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이상한 사나이는 신앙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그런데 미카엘은 어떤 이유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 산 여행에 동행하려 했을까? 그것은 그가 일찍이 신앙을 잃고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신의 불공평한 처사를 저주했다는 죄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의 죄의식은 그의 성격을 우울하게 했으며 이것은 그의 아들 죄렌에게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을 지웠던 것이다. 그의 죄의식, 아브라함과 모리아 산의 동행, 그리고 신이 내린 저주의 관념 등은 후에 죄렌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그때 엄청난 지진이, 무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모든 현상의 새로운 해석을 강요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장수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형벌이 그 위에 있음이 틀림없다.'
2. 미카엘과 죄렌
신은 죄렌을 교육함에 있어서 두 사람을 이용했다. 이들은 죄렌의 인생관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불가결한 과업을 그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증언에도 그의 두 선생이란 바로 "한 백발노인의 고귀한 현명과 한 여인의 사랑스런 무지" 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말할 것도 없이 '레기네 올센'이고 노인은 미카엘이다. 이 아버지 미카엘을 언급하지 않고는 죄렌을 도저히 논할 수 없다.
미카엘은 죄니 죽음이니 구원이니 하는 인생과 종교의 근본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엄숙성이 그의 생활과 성격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를 그렇게 되게 하였던 과거의 괴로운 사건이 있었다. 죄렌의 {유고} 속의 한 구절을 읽어보자.
어렸을 때 유틀란트 황야에서 양을 치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운 나머지 언덕에 올라가서 신을 저주한 이단자의 무서운 운명을, 그는 82세가 되었어도 과거를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신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그를 헐벗음과 굶주림 속에 방치해 둠으로써 이 세상의 행복한 자들과의 사이에 불공평을 행하였던 신을 저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적극적으로 신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훼방하였던 것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이며 이 죄에 대해서만큼은 신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미카엘은 자기의 죄를 알았다. 용서받지 못할 죄, 이제 그에게는 신의 축복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그의 영혼은 불치의 병,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얻는다. 그 때의 절망적인 심정이 그의 아들의 입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표현된다.
나는 때때로 캄캄한 구멍 속에 갇힌다. 그러면 나는 고통 속에 이리저리 기어 헤매도 아무것도, 여하한 출구도 보지 못한다.
그에게는 그가 그토록 갖기 원하던 재산과 안락한 집과 많은 자식들이 있었다. 그러나 신은 그에게로 난 천국의 문을, 이 유한한 생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출구를 닫아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갖기 원하던 것을 가졌을 때 그의 주위에는 소망이, 축복이 맴돌지 않고 죽음의, 저주의 냄새가 짙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여하한 방법으로도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천국의 문을 찾아 나섰다. 아브라함과의 모리아 산의 여행도 그 노력의 하나다. 그리고 거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체험한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 - 자신의 목숨이나 아내나 재산보다도 - 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문득 미카엘은 깨닫는다. "믿음을 행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도 그의 아들 죄렌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우선 아들 죄렌에게 매우 엄격한 기독교 교육을 시키고, 그런 다음에는 그를 목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해라." 이것이 그가 아들 죄렌에게 어릴 적부터 베푼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그는 마침내 출구를 찾았다. 천국으로 난 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힘껏 두들겼다.
미카엘의 죄렌에 대한 교욱은 엄격하였다.
아버지는 대단히 엄격한 분이었다. 일견 살풍경하고 산문적이었다. ...가끔 아버지는 묵묵히 아들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응시하면서 '가엾은 애다. 너는 조용한 절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가 아들의 우수의 책임자라고 믿고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걱정의 원인이라 믿었지만 서로의 생각은 묻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카엘의 엄한 기독교식 교육은 죄렌이 일견 살풍경하게 느끼는 한에 있어서는, 그의 행위가 사랑으로 이해되기 전까지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세상의 아름다움과 행복과 희망 대신에 절망만을 안겨 준 것이 되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또한 몹시 기뻐해 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소년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미칠 듯이 우울하였다.
미카엘에게 있어서 죄렌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바쳐진 양이었던 것이다. 죄렌은 태어나면서부터 결박당해 있었다. 행위의 자유도, 의사표시의 자유도 없었다. 언제나 미카엘이 하나님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치켜든 비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처음엔 미카엘의 뜻을 알지 못했으나, 알고 난 후에는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도망을 쳤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의 결별과 동시에 아버지에 의해서 비롯된 것들 - 우울, 하나님께 대한 신앙 등 - 을 버렸다. 그는 아버지 집을 나와 하숙생활을 하였고, 또 카페나 요정에도 출입하여 약간의 빚도 지게 되었다. (이 빚은 후에 그의 아버지가 갚아준다.) 그는 후에 그때를 회고하여 "나는 방탕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이 한 때의 방탕,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 미카엘이 황야에서 목동이었을 때 배곯음과 추위 그리고 외로움 때문에 신을 저주한 것이 미카엘의 일생 동안 씻지 못할 죄의식을 갖게 했었듯이, 죄렌에게도 똑같은 죄의 흔적을 그의 마음속에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죄렌은 그의 아버지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비밀, 즉 '커다란 지진'을 듣게 되며 자신의 운명을 꺠닫는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장수(長壽)와 물질적 풍요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이며 아버지는 그것 떄문에,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이제 막 그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꺠닫게 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로 인해 나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확고한 것으로서 참된 아르키메데스적 공리의 점인 신적인 아버지 사랑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훈련]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자.
어떤 한 순간의 터득에 의해서 죄렌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조금씩 명랑해졌고 신앙심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는 미카엘의 뜻대로 "진실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20대 청년으로서의 탐미적(探美的) 삶에 대한 열망도 자라고 있었다.
3. 죄렌과 레기네 올센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잊어 주십시오. 한 처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던 한 사나이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 구절은 죄렌이 그의 약혼녀 레기네 올센에게 보낸 약혼파기의 통첩이다.
여기에 대한 레기네 올센의 답은 "당신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버리시는 것은 저를 죽이는 일입니다." 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울며 그것을 철회해 줄 것을 바랐으나, 이미 돌이켜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종교적인 것만 가지고 있으면, 레기네 없이도 살 수 있고, 또 지금도 살 자신이 있다." 이처럼 이미 그는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을 그 자신에게 있어서 차선의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의 천국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죄렌이 열심히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레기네는 곁에 앉아 있긴 했으나 거의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에 대한 무감동을 의미한다고 죄렌은 판단하였다. "레기네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그가 내린 최후의 결론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특수한 환경, 특수한 사색을 하고 있던 그에게는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신과 레기네,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었다.
그의 신에 대한 사랑은 레기네 올센과의 사랑과 양립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레기네와의 사랑은 버려져야 한다. 선택은 엄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레기네와의 파혼에 의한 고통은 외부에서부터, 또는 내부에서도 너무도 세차게 몰려왔다. 외부에서부터 온 것은 사회적 비난이었고, 내부에서 온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허탈감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를 위로하고 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혼의 사유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죄냐? 무죄냐?} 하는 논문에서 그는 그 이유를 다섯 개로 들고 있다.
첫쨰, 자기는 극단적으로 내성적인 데 반해 레기네는 정반대로 외향적 성격이다. 둘째, 그는 우울한 데 반해 그녀는 쾌활하다. 셋째, 자신은 본질적으로 사색가이지만 그 여자는 그렇지 않다. 넷쨰, 그는 윤리적이고 변증법적이나 그녀는 미적이고 직접적이다. 다섯째, 그는 동정적인 데 비해 여자는 전적으로 직접적이고 따라서 순진하지만 자기애적이다.
이상과 같이 약혼파기의 이유를 들었지만 그 진정한 이유가 될 만한 것이 한마디도 없다. 그 진정한 이유는 아마도 저 '아브라함의 침묵'과 같은 성질의 것일 것이다. 이 진정한 이유를 밝혀보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앞서 논했던 그의 아버지 미카엘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날 죄렌이 아버지가 자기에게 행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아버지의 비밀, 즉 '커다란 지진'에 부딪혔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란 자기가 아버지에 의해서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죄렌은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었으며 욥의 아들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레기네 올센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기를 엄습해 오는 불안을 의식해야만 했다. 그리고 레기네에게 다가올 불운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신에게 바쳐진 제물로서, 또는 저주받은 인생이 가서는 안 되는 삶의 궤도를 가고 있다는 자각 떄문이었다. "신 앞에 온전한 신앙을 바치기 위하여 레기네를, 그녀에게 거는 희망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는 전율하였다. 그것은 흡사 미친 행동이었다. "기독교는 광기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함이 없이 그 일을 행했다. 후에 언젠가의 편지에서 기록한 "그가 나를 희생으로 바친 신" 이란 글귀에서 우리는 레기네 올센도 자신이 죄렌에 의해 어떻게 되었는지를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레기네 올센은 또 하나의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 되었고, 죄렌은 그녀와의 파혼과 함께 신과의 약혼을 하게 되었다.
4.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이상에서 살펴 본 바의 죄렌의 생애는 처음부터 특이하게 종교적으로 교육 받은 생애였으며, 그 자신이 언제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을 놓고 더욱 종교적 결단을 내리는 것을 그의 특이한 논리 방식 속에서 숙명으로 알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내려진 신적 명령 -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해라 - 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진정한 기독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그 대답을 찾으며 살았던 생애였다. 그의 수십 권의 저술은 결국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는 그의 방법, 즉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정언명령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그리하여 언제나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 위에 섰다는 확신 하에 군중을 향해서, 사회를 향해서, 시대에 대항해서, 또는 헤겔에 반대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인 것은 정적인 것이고 종교적인 것은 동적인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윤리성을 내포하지마는 그것은 동시에 정적(靜的)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욕심 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벗어주라"는 것은 분명히 행동을 지시하며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종교와 신앙의 영역인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비교에서 윤리적인 영역은 그것이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긴 하나 현존하는 인간에게 정적인 것 이상으로의 접근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써 신의 구원에 손을 내밀기에 너무 부족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신에 대하여 적극적인 봉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신의 원래의 의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로 방치함으로써, 그것과 거리가 먼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의 동일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나 동적(動的)인 종교적 영역에서는 인간은 신의 뜻을 좇아 언제나 최선의 것을 좇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가능성에 대한 참된 도박일 수가 있다. 그런데 헤겔은 그의 철학으로 인간을 마치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만들어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대정신을 따라 호흡하기만 해도 천국시민이 될 수 있는 듯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죄렌은 그의 사고방식이야말로 기독교에 얼마나 해독을 끼치고 있는가를 보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헤겔 자신은 그의 철학으로 수천년 간의 기독교를 그 교리면에 있어서 완성자로 추대되고 싶어하지만, 오히려 헤겔 같은 학자가 배출되도록 한 일천 팔백여 년의 기독교사까지도 모두 무로 돌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죄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는 학설이 아니라 존재전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독교에는 오로지 신앙이 있을 뿐이지 신학과 철학이 그것을 대신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때문에 또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구세주이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학설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강의하지 않았다. ...그의 학설은 실제에 있어 그의 삶이고 성찰이었다."
그는 헤겔의 철학에서 논리적 체계와 사유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과, 실존하는 인간의 참된 고독과 신앙을 보지는 못했다. 오히려 헤겔의 철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두가 자기의 독자성을 거부하고 진리에 있어서 방관자가 되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서운 거짓에 대하여 또 한번 전율하였다.
중요한 것은 터득이다.
그가 터득한 것은 헤겔의 보편정신이 아니라 개별자요, 단독자이다. 그 개별적인 단독자는 또 실존으로 파악하고 실존은 다시 주체성으로 규정하고 주체성의 깊은 의미는 내면성에서 나타나고 그 내면성의 깊은 핵심은 기독교적 신앙이다. 죄렌의 사상은 바로 거기서 출발하였다. 신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신뢰이다. 따라서 신앙은 초가치적이므로 때때로 인간의 도덕성과 인륜성과 합리성까지도 초월한다. 그는 그러한 것을 {공포와 전율}에서 세 개의 명제로 이끌어 나간다. 첫째,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인 보류라는 것이 있는가? 둘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무라는 것이 있는가? 셋째, 아브라함이 사라나 이삭 앞에서 자기의 계획을 침묵에 붙여버린 것을 그가 윤리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가?
죄렌은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읽어내려 하였다. 우리의 상식이라는 메카니즘으로는 부모가 자식을 죽일 권리는 전혀 없다. 따라서 그같은 견지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위에서의 행위는 용서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으로 신을 믿고 그의 지시대로 따랐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성이 마비된 채였다면 그의 행위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그의 모든 합리적·지성적 판단을 일단 보류하고 신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그의 행위는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따라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인 보류를 포함한다. 그는 단독자로서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다. ...믿음의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또 두 번째 명제에 대해서 "신앙의 기사는 홀로 자기자신에게 의뢰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무가 존재하든지 -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 의무는 단독자가 단독자로서 보편자보다 고차적이라는 것과 단독자로서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는 상술한 역설이지만 - 혹은 그런 경우 신앙이 항상 있기 떄문에 그 의무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혹은 아브라함이 헛되거나... 어느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세 번째 명제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것인 것 같다. "아브라함은 침묵한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가 없다. 이 점에 그 고난과 불안이 존재한다. 즉 내가 말함으로써 나를 이해할 수 없게끔 한다면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의 고민은 그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그러한 고난의 짐을 침묵으로 감당하려 한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신의 명령을 행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그의 고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 것이다. 개별자로서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 가운데 선다는 역설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헛되든지 이것이냐? 저것이냐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브라함의 저 잔인한 행위를 "단독자와 절대자와의 절대적 관계"라는 의미임을 터득함에 의해서 죄렌은 다시금 그의 아버지 미카엘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약혼녀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리고 덴마크 교회의 수장 뮨스터 감독의 비순교자적 신앙에 대한 공격과 그 문제에 대하여 그의 스승이었던 마르텐젠 교수 와의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행위와 무례에 대하여 가장 옳은 판정을 내릴 수가 없다. 단지 우리는 그의 어떠한 행위도 진지하게 행해졌다는 성실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싸운 대상에 대해서도 판정을 내릴 수가 없다. 단지 모든 문제가 신앙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신만이 그 문제에 개입해서 심판자가 될 것이다. 그는 신이 주재하는 법정의 피고인이며 우리는 또 다른 피고로서 방청객일 뿐이다.
Ⅲ. 결론
그의 언행과 모든 저술들에서 그의 진실된 마음과 신앙을 보여주려 했던 죄렌은 거짓된 무리(단독자로서 신 앞에 서지 않는 군중)들과 싸우다가 순교자로서 죽었다. 그는 "참된 신앙의 기사이자 증인이지 결단코 선생이 아니다." 라고 한 그의 말처럼, 한 번도 교단에 서거나 강연장에서 강연을 한 적이 없으나, 그 어느 강사보다도 문제의 핵심을 확실히 깨달았고 그것으로 인해 인류역사상의 극소수 "인간정신의 참된 형성자"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다름 아닌 기독교의 검토가 필요하다. 1800년이란 세월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제거해 버려야 한다." 또한 그의 익명인 안티클리마쿠스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적 기독교는 수다이며 비기독교적 혼돈이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도들이 존재할 떄 어느 세대에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동시대적이다. 그들은 앞서간 기독교도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모든 것은 동시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한다. 그의 생은 인류와 함께 지나고 개별적으로는 인간 개개인과 함께 지난다. 영원한 역사로서 지상에서 그의 삶은 영원한 동시성을 지닌다.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또 말한다.
나는 오늘 이 코펜하겐에서 이미 천 수백년 전의 옛날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 이윽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몸을 희생시킨 것을 어떻게 나 자신의 속에서 실현하면 좋은가? 나는 절대적인 것을, 전체를, 나 자신, 나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생에서 도저히 체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천 수백년 전의 팔레스티나에서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른 한 유대인이 기적을 행한 것도, 십자가상에서 희생이 된 것에도 무관심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세 구절 속에서 우리는 죄렌에 의해, 오랜 안개 저 넘어 빛나는 태양이 항상 존재함에 대한 확신을 배운다. 우리는 안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 넘어 비치는 태양을 보려하는 것이다. 죄렌은 거기로 우리를 가능한 방법으로 인도한다.
그것을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자! 이것이냐 저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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