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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죄이다.

절망은 죄이다. 박 상 욱(서양철학 석사과정)
http://cafe.naver.com/modernth/349   

  Ⅰ.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자기의식은 점차로 상승해 나아가는 것이다. 의식의 규정아래에서 고찰된 절망은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는데, 두 번째로 고찰된 것 가운데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절망." 즉, 키에르케고르가 "반항"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절망자가 '자신은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가?' 하는 이유를 의식하게 되면 반항(절망)은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제 절망자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기 때문이다. 반항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한다. 반항에는 자기에 대한 의식의 상승작용이 있으며, 절망이 무엇인가에 관한 의식과 자기 자신의 상태가 절망이라는 것에 관한 의식이 보다 더 커지게 된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자기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절망은 자기 외적인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로부터 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행동적인 자기"와 "수동적인 자기"를 구별한다. "절망한 자기가 행동적인 자기인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무엇을 시도하더라도, 자기는 본래 언제나 실험적으로만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p115) 자기는 절망하여 자신 스스로가 만들려고 자기 자신을 전개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욕구한다. 수동적인 자기도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자기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그것을 욕구하지 않는 절망자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인 자기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절망자 스스로가 욕구하고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젊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이런 고뇌자 가운데 의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절망의 강도는 더욱 강해져서 그것은 악마적인 것이 된다"(p120) 여기서 "악마적"이라는 표현은 키에르케고르의 독창적인 것으로써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고뇌에 대한 정열을 뜻한다. "악마적인 것"은 "밀폐된 정열"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각주43참조)
  키에르케고르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가장 낮은 형태의 절망으로부터 시작하여, 절망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자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악마적인 단계에서는 "절망은 반항하거나 반항적으로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고, 반항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한다. 그것은 자신의 자기를 설정한 힘으로부터 반항하여 떠어내려고 욕구하지 않으며, 반항을 위하여 그 힘에 대하여 강요하고 도전하며 악의를 품고서 그 힘을 붙들고 있으려 욕구한다."(p123-124)  
 
  제 2편 절망은 죄다.
 
  Ⅱ. 제1장의 절망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설명이 정신분석학적 또는 심리학적인 서술이였다면 제2장은 본격적으로 그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절망을 죄'라고 규정짓고 죄의 정의를 바로 신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죄라는 것은 신 앞에서 혹은 신의 관념을 받으면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지 않는 것, 혹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욕구하는 것이다."(p127)
  키에르케고르는 시인의 실존은 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의 실존은 "존재하는 대신에 시작(詩作)하고, 공상(空想)에 의하여 선(善)과 진(眞)에 관계할 뿐이며, 진과 선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여기서 문제로 삼는 시인의 실존은 그것이 신에 대한 표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나 신의 면전에 있다는 점에서 절망과는 상이한다. 그러나 시인의 실존은 대단하게도 변증법적이며, 자신이 죄라는 의식을 막연하게나나 어는 정도 갖고 있는가에 대하여 측량할 수 없는 변증법적인 혼란 속에 있는 것이다"(p127-128) 시인은 매우 깊은 종교적 요구를 가질 수 있으며, 그의 절망 내부에는 신의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자기를 의식하는 것은 신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자아에 불과하다. 그는 엄밀한 의미로 신앙자가 아니다. 시인은 절망은 하고 있지만 종교적인 신앙의 갈망은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제1편에서 설명한 자기 의식의 단계 전체가 이제는 새롭게 변증법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문제삼고 있었던 것은 자기의식의 단계가 인간적인 자기 혹은 인간을 척도로 하는 자기라는 것에 의하여 새로운 성질과 자격을 갖게 된다. 이 자기는 이제 단순한 인간적 자기가 아니고 오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며, 내가 신학적인 자기, 신과 맞서 있는 자기라고 부르려는 것이다. 자기가 신 앞에 현존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며, 즉 신을 척도로 하는 인간적인 자기가 된다면, 자기는 얼마나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하게 될까...!"(p130)
 언제나 우리 인간은 현실적인 것에만 집착하여 아집과 독단을 만들어 내고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의 가치의 척도를 신에게로 전환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지게 될 것이다. "죄를 두려워해 하는 것으로 만든 것은 신앞에 있다는 것이다."(p131) 우리는 사물의 가치판단의 기준을 절대로 인간자신에게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신의 관념을 욕구하지 않고, 신에 대하여 관계맺지 않고 복종하지 않을 때, 수 많은 죄가 발생한다.
 "신의 관념이 증가됨에 따라 "자기"도 그만큼 증가하며, "자기"가 증가됨에 다라 그 만큼 신의 관념도 증가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이려고만 욕구할 때 죄가 발생한다."(p133) "인간이 자기라는 것이 보다 은밀한 소망과 생각 하나하나에 관해서도, 이 자기에 대하여 신이 무엇을 욕구하고 있는지 나타내 주는 아주 조용한 신의 눈짓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귀담아들어 언제까지나 그것에 복종하려는 준비성에 대해서도 한없는 깊은 의미로 신에 대하여 복종하도록 의무 지워져 있음을, 정신을 갖지 않기 때문인지 오만 불손한 때문인지 언제까지나 알지 못하는 죄 또는 그것을 알지 못한채 있으려는 죄다, 즉 아집이라는 저 휘항찬란한 악덕인 것이다."(p135)
  자 이제 다시 2편의 제목에 관심을 기울려 보자. 키에르케고르는 죄는 분명 신앙에 근거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고 말했다. 그럼 "절망은 죄다."라는 제목에서 유추해볼 때, 이제까지 우리가 삶에서 무수히 절망한 것은 바로 신앙에 그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에서 절망을 극복하고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로 나아살 수 있는 길은 결국 신앙인 것이다.
 "신앙이란 '자기'가 자기 자신이며, 또 가지 자신이려고 욕구함에 있어서 신의 내부에 투명하게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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