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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와 키에르케고르

샤르트르와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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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 실존주의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1946년에 사르트르는 한 대중 강연에서 실존주의를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갈래로 나누고, 야스퍼스와 가브리엘 마르셀을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하이데거와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로 명명했다. 이 두 줄기의 근원에 19세기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와 니체가 있다. 실존주의가 키에르케고르(1813-1855)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엄청나게 다르다. 「절망」, 「절규」,「슬픔」등의 키에르케고르적 감수성을 사르트르에게서 기대하는 독자가 있다면 실망할것이 틀림없다. 가령 키에르케고르의 일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즉 「나의 온 생애는 하나의 감탄사이며…… 나의 슬픔은 울부짖는 절망이고, 열광적인 시적 감흥인 나의 기쁨은 하나의 율동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는 다분히 감각적이고 낭만주의적이다. 그에게는 논리적인 체계가 없다. 그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빈틈없는 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내가 그속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라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말로 논리적 체계의 불필요성을 역설했다. 헤겔과는 반대로 순리적(純理的)지식이 결코 개인적 실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그의 사상에서 「주관성이 곧 진리이다」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객관적 진리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 누구에게나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나」라는 주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될 수 없는 예외자이며 단독자이다. 이처럼 개별성, 주체성으로서의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양식이 실존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인간적 실존의 과제는 참된 자기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참」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 「참되다」, 「성실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참된 자기자신을 되찾는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다.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감성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세 단계의 자기 형성을 제시했다. 첫째, 감성적 실존이란, 감성적 욕구의 충족 즉,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젊을때 방탕한 생활을 했던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체험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런데 말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러한 실존의 양식은 참된 자기의 발견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상실이다. 이 사실을 문득 깨달은 인간은 윤리적 실존이라는 두번째의 단계로 넘어간다. 이것은 양심을 가지고 윤리적인것을 의무로서 이행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윤리적 사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족한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윤리적 실존도 참된 자기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제 인간은 최종적으로 가장 완벽한 실존인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 이것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단계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이다. 까뮈의 문학을 말할 때 흔히 우리는 「이방인」, 「페스트」, 「전락」의 세 시기를 구분하여, 감각적 쾌락의 인간인 뫼르소, 헌신적 인류애의 화신인 리유의사, 그리고 자신의 윤리적 삶에 회의를 느끼는 변호사 클라망스를 대표적 성격으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이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형성의 3단계와 거의 일치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사르트르에게서는 이러한 단계를 볼 수 없다. 마지막에 종교로 이어지는 키에르케고르의 귀결은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사르트르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각 인간은 예외자, 단독자이어서 그 어떤 보편적, 객관적 진리도 그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는 「주관성의 불환원성」(irr ductibilit du subjectif )은 무신론이나 기독교의 입장을 떠나, 모든 실존주의의 공통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와 공통되는 부분은, 신을 지향하는 그 내용이 아니라, 생성(devenir)과 선택(choix)이라는 실존형성의 방법에 있다. 우선 생성의 문제를 보자.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실존의 단계에서, 신앙은 한번 얻으면 절대로 잃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마다 새로이 획득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물처럼 딱딱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긴장상태를 실존의 성격으로 보는 것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한번 주어지면 영원히 지속되는 그런 자질, 또는 기본성격이 없다. 인간은 존재( tre)하지 않고 실존(exister)한다. 이때 존재란 사물의 존재양식, 즉 딱딱하게 굳어져 더 이상 어떤 변화 생성이 이루어지지않는 상태를 말하며,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연한 상태이다. 실존하면서 인간은 조금씩 자기를 만들어간다. 인간에게는 어떤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란 그의 앞에 있는것, 그가 실현시켜야할 어떤 것이다. 인간은 개념에 의해서 규정되기에 앞서 먼저 실존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 자기자신을 만들어간다. 사람이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이것이다. 사르트르가 악시옹(Revue Action, 1944, 12)지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이 철학적 명제를 손쉽게 풀이한 것이다. 『인간은, 우선 여기에 있고, 그 다음에 이것 또는 저것이다. 그가 조금씩 자기를 규정해 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기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투쟁함으로써이다. 따라서 한 인간에 대한 정의는 언제나 열려있는 상태이다.』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의 두번째 공통점은 선택의 문제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실존형성의 3단계는 각기 질적으로 다르고 또 비연속적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처럼 「이것도 저것도」(sowhl als auch)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 oder)의 문제이다. 즉 지양에 의한 종합의 결과가 아니라 좌절에 의한 비약의 결과이다. 방탕한 생활에서 윤리적인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방탕을 지양하여 윤리성이라는 종합을 이루는것이 아니라, 뼈아픈 어떤 좌절의 계기를 통해 방탕을 버리고 윤리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때,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고, 자유이다. 바로 이점이 사르트르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의 철학 체계에서 자유만큼 중요한 개념은 없다. 모든것이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선택과 동의어이다. 앞서 우리가 실존의 개념을 논할 때, 한번 굳어지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물적 존재양식과 달리 실존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긴장 상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단순히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옮겨간다고 해서 그것을 실존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예컨대 불에 빨갛게 달구어진 쇠막대기나, 수압으로 돌아가는 터빈이 잠시 후 다른 상태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실존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의 변화는 물리적 인과율에 의한 자연현상일 뿐이다. 참된 생성과 참된 실존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 상태 변화의 매 단계마다 선택이 개입되며, 그 선택은 자유에 의해 내려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택 이전에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어떤 권위도 없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게 해주는 그 어떤 가치 척도도 없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자신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3부작 소설인 「자유의 길」은 이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한 일종의 주제소설이다. 제1권 「철들 나이」에서 마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자유의 절대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그가 바라던 것을 할 수 있었다. 아무도 그에게 충고할 권리가 없었고, 그가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선도 악도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모든것이 그의 자유다. 그런데 자유란 선택하는 자유이다. 선택하지 않는 자유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선택하지 않음이란 실상,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유와 선택의 동일성, 그리고 자유의 절대성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만 빼고는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라고 썼고, 자유가 「가치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까지 말했다. 실존이 자유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실존은 인간만의 특권이고, 인간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실존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이끌려 진짜 자신의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야스퍼스나 하이데거처럼 사르트르에게 있어서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스스로 형성하는 사람, 자기 일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실존하다. 소설「철들 나이」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속하고 싶다』라는 다니엘의 말은 그런점에서 실존적 인간의 모습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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