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호튼의 <세상의 포로된교회> 서평
마이클호튼의 <세상의 포로된교회> 서평
복음과 율법, 그리고 교회와 국가
-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비판하는 호튼의 지적에 동의하며
- <세상의 포로 된 교회>(마이클 호튼, 부흥과개혁사)
들어가며
생각보다 괜찮았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단 한 마디로 느낌을 표현하자면 이렇다. 마이클 호튼은 미국에서 고백적 복음주의(confessional evangelicalism) 또는 개혁주의적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한국에도 그의 저작이 여러 권 번역이 되어 있고, 특히 ‘부흥과개혁사’에서 마이클 호튼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그의 책들을 지속적으로 번역하여 출간을 하고 있다.
사실 내가 마이클 호튼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십계명을 해설한 책인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부흥과개혁사)였다. 십계명을 조목조목 해설한 이 책은 나의 십계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여러 가지로 유익했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평이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또, 두 번째로 접했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부흥과개혁사)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한 펠라기우스주의(찰스 피니)와 영지주의, 그리고 형통복음(조엘 오스틴)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인 이머징 교회 운동(브라이언 맥클라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역시 독서를 통해 비판의 핵심적인 신학적 논지를 이해함으로써 현대 교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는데 유익을 주었으나, 생각만큼 논리가 치밀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물론, 호튼의 주장은 일관되고 명확하다.). 아마 데이비드 웰스라는 걸출한 미국 신학자의 책들을 공부한 후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이클 호튼에 대한 기존의 긍정적인 평가들로 인한 과도한 기대감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던 차에 사실상 마이클 호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포로 된 교회>(부흥과개혁사)―원제는 ‘Beyond Culture Wars’―를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에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원제는 'Made in America'―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과 더불어 이 책이 아마도 현재까지 마이클 호튼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대표적인 두 권의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나는 이 책들을 읽어보진 못했기 때문에 호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진 못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주의 전통에 속한 사회 개혁적 전통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뭔가 전혀 이상한 맥락으로 변질되어 작동되고 있다는 미묘한 느낌을 신학적/논리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데이비드 웰스를 통해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이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일차적인 대답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이클 호튼을 지난 두 권을 통해 읽었을 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대체로 파편적이고 약간은 과격한 문체로 진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측면들이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자인 마이클 호튼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사회 개혁적 특징을 조금은 지나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마이클 호튼에 대한 나의 ‘오해’도 풀고, 또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와 문화 명령/사회 개혁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읽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마이클 호튼이 왜 대단한가(비록 ‘1급 신학자’로서의 명성까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와 왜 그가 그토록 현대 교회의 정치/사회적 치우침에 대해 조금은 지나치다 여겨질 정도로 비판을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입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해는 오해였다는 것을 확인할 때 항상 기쁜 법이다.
교회와 국가의 구별
마이클 호튼의 비판의 핵심은 데이비드 웰스의 <신학 실종>이나 정통 개혁주의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마이클 호튼의 개성이 듬뿍 담긴 문체와 내용 전개 방식이 색다름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대체로 대표적인 화란 개혁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을 따라, ‘교회’와 ‘국가’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서 각자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도 교회’의 본질적 임무(사명)는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적 임무(이 말의 의미는, ‘국가’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거룩한 임무를 위임한 제도라는 의미가 된다.)는 강제력을 가지고 사회적 정의를 지켜내서 인간 사회가 악하게 되어 고통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호튼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두 왕국론’(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해 있으며,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임무(이중적 임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를 사명으로 부여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에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교회’로 모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또한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이 되어 자기가 속한 영역(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가정 등)에서 문화 명령과 사회 정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문제, 즉 구원의 문제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문화 명령/사회 정의’ 보다는 중요도와 긴급성에서 앞선다(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이 고백하는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즉 하나님은 두 번째의 우선순위로서 ‘문화 창조와 사회 개혁(정의)’의 사명을 신자에게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신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영역 속에서 국가나 사회의 시민으로서 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사회 참여의 필요성). 성경은 ‘복음’과 ‘율법’ 두 가지를 모두 계시해 주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주된 역할이며, ‘율법’을 일정한 수준에서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물론, 교회에서도 율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권력을 통해 ‘강제’할 수는 없다.).
복음과 율법의 혼동
그런데 마이클 호튼이 볼 때(호튼의 설명은 주로 90년대 이후의 미국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 즉, 현대 교회는 사회적 권력(대중 캠페인, 여론몰이, 특정 정당지지와 압력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 등)을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국가와 사회에서 하도록 위임받은 일을 ‘제도 교회’를 통해 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신학적 혼란’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적 혼란이라는 근거를 다시 정리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며 교회에 위임된 것이고, 문화 명령과 사회 개혁의 사명은 모든 인류에게 창조와 더불어 내려진 명령으로 국가와 사회의 시민 자격으로 수행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정치적 좌파와 우파로 분리 되었으며, ‘교리’나 ‘신학’이 아닌 ‘정치적 입장’이 교회를 정의하는 척도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어떤 교회나 목사가 특정한 정치적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는지에 따라(예를 들면, 낙태 법안에 대한 반대 등) 그 교회나 목사를 판단한다. 어떤 교리나 신학을 말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교에는 특정한 정치적 정책을 지지하라는 소위 정치적 설교가 주를 이룬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죄 용서를 선포하는 ‘복음 설교’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잘못된 문제 진단
이와 같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신학과 교리 중심에서 정치적 행동주의로 중심이동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호튼의 대답은 상당히 날카롭고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혁주의자들의 분별력을 분명하게 해 준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근대 이후로 현대 사회가 철저히 ‘세속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 사회는 그 건국부터 정통적인 복음주의자들과 이신론적 기독교인들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적 배경’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화’의 씨앗이 이미 심겨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세부적인 논의는 생략하더라도, 과거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 오던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세속화의 물결 앞에 미국이 점령당하고 그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 매우 불안했다. 특히, 이에 대한 현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진단은 ‘정치적 세력’을 세속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것이 문제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세속화된 문화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치적 세력’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문화에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미국이 세속주의자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빼앗김으로써 세속화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세속화 테제’에 대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진단은 자연스럽게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호튼은 바로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잘못된 진단이 그들을 잘못된 처방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호튼이 볼 때, 현대 문화가 ‘세속화’된 것은 세속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세속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미 진리 싸움, 즉 오랜 기간의 사상 전쟁에서 세속주의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 전반에서 세속주의 ‘사상’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 결과 정치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은 그 힘을 사용하여 국가의 공적 체계를 세속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속주의 사상이 미국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호튼은 세속주의 사상이 미국에서 세력을 얻어갈 때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강력한 토대를 가지고 복음주의자들이 복음과 진리에 대해 제대로 된 ‘변증’과 ‘설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같은 잘못된 신학에 경도되어, 일반 문화와는 철저히 분리되고 게토화되어 자신들만의 고립된 ‘기독교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분리주의적이고 방어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로 세상을 방관하며 살아왔다(이것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 일컫는다.). 미국 사회가 ‘기독교적 토대’에서 점점 벗어나 근대와 탈근대로 접어드는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포기하고 방관해 왔던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독교 학교’, ‘CCM’ 등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일반학교’와 ‘일반 문화/예술’ 속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싸워야하는 책임을 방기했다. 결국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여, 종말에 불타 없어져버릴 세상이기에 오직 구령 사역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역사의식 속에서 ‘지성’과 ‘변증’, ‘진리 싸움’을 포기했을 때, 세상은 ‘절대적 진리의 토대’를 잃어버리고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치’가 아니고 ‘사상’이라는 것이 호튼의 중심 주장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문화 명령의 수행’과 ‘사회 정의(justice)’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필요하다면 항의 집회에도 참여할 수 있지만, ‘교회’로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기여’다. 인간과 사회, 우주의 ‘절대적인 지적 토대’는 ‘신학’에서 나온다. 교회는 절대 진리인 ‘복음’을 끊임없이 선포하며, 또한 정치적인 차원이 아닌 ‘신학적 차원’에서 ‘율법’을 제시하고 설명함으로써 사회에 ‘절대적 지적 토대’를 회복시킨다. 즉, 신학적이고 사상적으로 세상을 섬기는 곳이 ‘교회’이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 즉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논증하여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로 모였을 때, 그 교회가 영원한 진리인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시민에게 위임된 ‘정치적 권력의 행사’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교회는 자신에게 위임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혼란에 빠진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 지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정치적 행동주의를 내려놓고 ‘신학’을 회복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진리 전쟁’ 즉, 정치적 행동이 아닌 ‘사상의 싸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지만, 세상에서도 ‘무식하고 과격한 일방주의자’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복음 진리의 ‘탁월한 지적 깊이’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신학/교리)이 무엇인지, 왜 이것이 세상이 믿고 있는 ‘세속주의적 사상들’과 차원이 다른 지적으로 훨씬 설득력이 있는 ‘진리’인지를 논증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어 복음을 세상에 ‘강요’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 사상이 반(反)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왜 ‘성경적 진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달리 ‘진리’이며 인간을 참되게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변호할 수 있는 ‘지성’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교회가 반(反)지성주의적 흐름에 치우치는 데 다소간 기여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지적 토대’는 다 잃어버리고 ‘경건한 체험’에 휩쓸린 현대 교회가 결국 신학을 경시하고 주변부로 밀어낸 이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행동주의자가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하고 절망적인 왜곡의 역사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과 신학, 그리고 지성을 주변부로 밀어내 버리고, ‘체험’과 ‘행동’을 앞세우는 현상이 한국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회가 한국 교회의 부패와 비리를 비판하고 지적할 때마다 (특히 몇몇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방송국 앞에 떼를 지어 몰려가서 기독교 비판을 ‘힘’으로 막아서려 하였으며, 정치적 권력을 지닌 자리에 ‘엘리트 기독교인’들을 어떻게든 올려 보내 ‘정치의 힘’으로 이 나라를 ‘기독교화’하려는 엉뚱한 시도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는 점은 사실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상당히 우세한 한국 교회에 신학과 교리는 껍데기만 남아 주변부로 밀려나고 실용주의(마케팅과 심리치유 기법) 사상과 정치적 행동주의(‘기독교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가 지배하게 된 것은 미국의 세속화 물결을 한국 교회가 따라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복음 전도와 문화 명령의 균형과 제자리 찾기
호튼은 어거스틴주의와 칼빈주의라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의 입장에 바로 서 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오직 ‘복음 전도’이며, ‘문화 명령’에 따라 일반 사회에서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두 나라’에 속한 신자의 엄중한 사명이다. 다만, ‘교회’와 ‘국가’를 혼동하지 말고,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두 나라에 속한 신자답게 두 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칼빈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견해나, 교회는 세상과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되며 철저히 사회와는 분리되어 정치/사회/문화에는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개혁 당시의 극단적인 재세례파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구별된 거룩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제도 교회’가 일반 사회에 할 수 있는 것은, ‘신학과 교리’를 제시함으로 세상의 잘못된 사상과 문화를 철저히 비판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일이며, 정치와 정책의 구체적인 일들은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사명이다.
나오며 : 그리스도인의 이중 사명, 교회와 시민으로서의 삶
결국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시민으로서 루터와 어거스틴이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라는 서로 다른 사회에 속해 있는 이중 시민권자이다. 근본적이고 영원한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것이 더 본질적인 우리의 정체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나라에서 살면서 그 책임을 다하여 ‘소금’이 되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 또한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져 있다.
참된 신자라면, 두 나라를 서로 혼동하여 그 경계가 무너지도록 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두 사명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신앙과 정치, 창조와 구속, 문화 변혁과 복음 전도라는 개혁주의자의 이중 사명이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과연 한국에 참된 개혁주의 교회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과연 얼마나 존재했는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과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에서 나온 개신교 교단들은 많이 존재했지만, 참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깨닫고 실천해 온 교회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서구 역사에서 성경적 신앙으로부터 이탈된 중세 교회를 철저히 개혁했던 ‘종교개혁 시대’가 한국에 적어도 한 번은 와야 하지 않을까? ‘종교개혁 시대’를 한국에 허락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 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며 그 길을 준비해야 할 책임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로 넘어온 것 같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5069
복음과 율법, 그리고 교회와 국가
-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비판하는 호튼의 지적에 동의하며
- <세상의 포로 된 교회>(마이클 호튼, 부흥과개혁사)
들어가며
생각보다 괜찮았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단 한 마디로 느낌을 표현하자면 이렇다. 마이클 호튼은 미국에서 고백적 복음주의(confessional evangelicalism) 또는 개혁주의적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한국에도 그의 저작이 여러 권 번역이 되어 있고, 특히 ‘부흥과개혁사’에서 마이클 호튼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그의 책들을 지속적으로 번역하여 출간을 하고 있다.
사실 내가 마이클 호튼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십계명을 해설한 책인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부흥과개혁사)였다. 십계명을 조목조목 해설한 이 책은 나의 십계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 여러 가지로 유익했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평이했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었다. 또, 두 번째로 접했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부흥과개혁사)는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침투한 펠라기우스주의(찰스 피니)와 영지주의, 그리고 형통복음(조엘 오스틴)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인 이머징 교회 운동(브라이언 맥클라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 역시 독서를 통해 비판의 핵심적인 신학적 논지를 이해함으로써 현대 교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갖는데 유익을 주었으나, 생각만큼 논리가 치밀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물론, 호튼의 주장은 일관되고 명확하다.). 아마 데이비드 웰스라는 걸출한 미국 신학자의 책들을 공부한 후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마이클 호튼에 대한 기존의 긍정적인 평가들로 인한 과도한 기대감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던 차에 사실상 마이클 호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포로 된 교회>(부흥과개혁사)―원제는 ‘Beyond Culture Wars’―를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첫째, 한국에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나침반)―원제는 'Made in America'―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과 더불어 이 책이 아마도 현재까지 마이클 호튼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대표적인 두 권의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나는 이 책들을 읽어보진 못했기 때문에 호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진 못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칼빈주의 전통에 속한 사회 개혁적 전통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 뭔가 전혀 이상한 맥락으로 변질되어 작동되고 있다는 미묘한 느낌을 신학적/논리적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 데이비드 웰스를 통해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이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일차적인 대답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이클 호튼을 지난 두 권을 통해 읽었을 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대체로 파편적이고 약간은 과격한 문체로 진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측면들이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자인 마이클 호튼이 그렇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면서도,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전통 속에 존재하는 사회 개혁적 특징을 조금은 지나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마이클 호튼에 대한 나의 ‘오해’도 풀고, 또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와 문화 명령/사회 개혁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의 입장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읽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마이클 호튼이 왜 대단한가(비록 ‘1급 신학자’로서의 명성까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와 왜 그가 그토록 현대 교회의 정치/사회적 치우침에 대해 조금은 지나치다 여겨질 정도로 비판을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의 입장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해는 오해였다는 것을 확인할 때 항상 기쁜 법이다.
교회와 국가의 구별
마이클 호튼의 비판의 핵심은 데이비드 웰스의 <신학 실종>이나 정통 개혁주의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마이클 호튼의 개성이 듬뿍 담긴 문체와 내용 전개 방식이 색다름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그 주장의 핵심은, 대체로 대표적인 화란 개혁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을 따라, ‘교회’와 ‘국가’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서 각자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도 교회’의 본질적 임무(사명)는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적 임무(이 말의 의미는, ‘국가’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그 거룩한 임무를 위임한 제도라는 의미가 된다.)는 강제력을 가지고 사회적 정의를 지켜내서 인간 사회가 악하게 되어 고통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호튼은 어거스틴과 루터의 ‘두 왕국론’(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해 있으며,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임무(이중적 임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를 사명으로 부여 받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에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교회’로 모여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또한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이 되어 자기가 속한 영역(정치, 경제, 문화, 예술, 학문, 가정 등)에서 문화 명령과 사회 정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문제, 즉 구원의 문제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이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문화 명령/사회 정의’ 보다는 중요도와 긴급성에서 앞선다(이것이 복음주의자들이 고백하는 ‘복음 전도의 우선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도 말씀하셨는데, 즉 하나님은 두 번째의 우선순위로서 ‘문화 창조와 사회 개혁(정의)’의 사명을 신자에게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신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영역 속에서 국가나 사회의 시민으로서 이와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사회 참여의 필요성). 성경은 ‘복음’과 ‘율법’ 두 가지를 모두 계시해 주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의 주된 역할이며, ‘율법’을 일정한 수준에서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물론, 교회에서도 율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국가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권력을 통해 ‘강제’할 수는 없다.).
복음과 율법의 혼동
그런데 마이클 호튼이 볼 때(호튼의 설명은 주로 90년대 이후의 미국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대 교회는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있다. 즉, 현대 교회는 사회적 권력(대중 캠페인, 여론몰이, 특정 정당지지와 압력을 통한 정치권력의 장악 등)을 통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바르게 가르치고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국가와 사회에서 하도록 위임받은 일을 ‘제도 교회’를 통해 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신학적 혼란’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적 혼란이라는 근거를 다시 정리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며 교회에 위임된 것이고, 문화 명령과 사회 개혁의 사명은 모든 인류에게 창조와 더불어 내려진 명령으로 국가와 사회의 시민 자격으로 수행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와는 관계가 없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는 정치적 좌파와 우파로 분리 되었으며, ‘교리’나 ‘신학’이 아닌 ‘정치적 입장’이 교회를 정의하는 척도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어떤 교회나 목사가 특정한 정치적 정책이나 입장을 지지하는지에 따라(예를 들면, 낙태 법안에 대한 반대 등) 그 교회나 목사를 판단한다. 어떤 교리나 신학을 말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교에는 특정한 정치적 정책을 지지하라는 소위 정치적 설교가 주를 이룬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죄 용서를 선포하는 ‘복음 설교’는 거의 사라지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잘못된 문제 진단
이와 같이 현대 복음주의 교회가 복음과 율법을 혼동하고, 신학과 교리 중심에서 정치적 행동주의로 중심이동을 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호튼의 대답은 상당히 날카롭고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혁주의자들의 분별력을 분명하게 해 준다.
첫째, (미국을 중심으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근대 이후로 현대 사회가 철저히 ‘세속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미국 사회는 그 건국부터 정통적인 복음주의자들과 이신론적 기독교인들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적 배경’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속화’의 씨앗이 이미 심겨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세부적인 논의는 생략하더라도, 과거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 오던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세속화의 물결 앞에 미국이 점령당하고 그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이 매우 불안했다. 특히, 이에 대한 현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진단은 ‘정치적 세력’을 세속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것이 문제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미 세속화된 문화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정치적 세력’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문화에 발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미국이 세속주의자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빼앗김으로써 세속화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세속화 테제’에 대한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진단은 자연스럽게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도록 이끌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논리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호튼은 바로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잘못된 진단이 그들을 잘못된 처방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호튼이 볼 때, 현대 문화가 ‘세속화’된 것은 세속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가 정치적인 차원에서 ‘세속화’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미 진리 싸움, 즉 오랜 기간의 사상 전쟁에서 세속주의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사회 전반에서 세속주의 ‘사상’이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 결과 정치적으로 세속주의자들이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은 그 힘을 사용하여 국가의 공적 체계를 세속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속주의 사상이 미국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호튼은 세속주의 사상이 미국에서 세력을 얻어갈 때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강력한 토대를 가지고 복음주의자들이 복음과 진리에 대해 제대로 된 ‘변증’과 ‘설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같은 잘못된 신학에 경도되어, 일반 문화와는 철저히 분리되고 게토화되어 자신들만의 고립된 ‘기독교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분리주의적이고 방어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태도로 세상을 방관하며 살아왔다(이것을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 일컫는다.). 미국 사회가 ‘기독교적 토대’에서 점점 벗어나 근대와 탈근대로 접어드는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포기하고 방관해 왔던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만들기 위해 ‘기독교 학교’, ‘CCM’ 등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내면서 ‘일반학교’와 ‘일반 문화/예술’ 속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싸워야하는 책임을 방기했다. 결국 교회가 잘못된 신학에 휩싸여, 종말에 불타 없어져버릴 세상이기에 오직 구령 사역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역사의식 속에서 ‘지성’과 ‘변증’, ‘진리 싸움’을 포기했을 때, 세상은 ‘절대적 진리의 토대’를 잃어버리고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정치’가 아니고 ‘사상’이라는 것이 호튼의 중심 주장이다. 세상을 바꾼다고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문화 명령의 수행’과 ‘사회 정의(justice)’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필요하다면 항의 집회에도 참여할 수 있지만, ‘교회’로 모였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적 기여’다. 인간과 사회, 우주의 ‘절대적인 지적 토대’는 ‘신학’에서 나온다. 교회는 절대 진리인 ‘복음’을 끊임없이 선포하며, 또한 정치적인 차원이 아닌 ‘신학적 차원’에서 ‘율법’을 제시하고 설명함으로써 사회에 ‘절대적 지적 토대’를 회복시킨다. 즉, 신학적이고 사상적으로 세상을 섬기는 곳이 ‘교회’이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 즉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논증하여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교회로 모였을 때, 그 교회가 영원한 진리인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시민에게 위임된 ‘정치적 권력의 행사’를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교회는 자신에게 위임된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혼란에 빠진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 지칭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정치적 행동주의를 내려놓고 ‘신학’을 회복해야 하며, 그리스도인은 ‘진리 전쟁’ 즉, 정치적 행동이 아닌 ‘사상의 싸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지만, 세상에서도 ‘무식하고 과격한 일방주의자’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복음 진리의 ‘탁월한 지적 깊이’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신학/교리)이 무엇인지, 왜 이것이 세상이 믿고 있는 ‘세속주의적 사상들’과 차원이 다른 지적으로 훨씬 설득력이 있는 ‘진리’인지를 논증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정치적 행동주의자가 되어 복음을 세상에 ‘강요’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 사상이 반(反)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 전에, 왜 ‘성경적 진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달리 ‘진리’이며 인간을 참되게 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변호할 수 있는 ‘지성’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교회가 반(反)지성주의적 흐름에 치우치는 데 다소간 기여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지적 토대’는 다 잃어버리고 ‘경건한 체험’에 휩쓸린 현대 교회가 결국 신학을 경시하고 주변부로 밀어낸 이후 세상을 바꾸겠다는 행동주의자가 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하고 절망적인 왜곡의 역사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미국 교회를 닮은 한국 교회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복음과 신학, 그리고 지성을 주변부로 밀어내 버리고, ‘체험’과 ‘행동’을 앞세우는 현상이 한국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회가 한국 교회의 부패와 비리를 비판하고 지적할 때마다 (특히 몇몇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방송국 앞에 떼를 지어 몰려가서 기독교 비판을 ‘힘’으로 막아서려 하였으며, 정치적 권력을 지닌 자리에 ‘엘리트 기독교인’들을 어떻게든 올려 보내 ‘정치의 힘’으로 이 나라를 ‘기독교화’하려는 엉뚱한 시도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라는 점은 사실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상당히 우세한 한국 교회에 신학과 교리는 껍데기만 남아 주변부로 밀려나고 실용주의(마케팅과 심리치유 기법) 사상과 정치적 행동주의(‘기독교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가 지배하게 된 것은 미국의 세속화 물결을 한국 교회가 따라가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복음 전도와 문화 명령의 균형과 제자리 찾기
호튼은 어거스틴주의와 칼빈주의라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의 입장에 바로 서 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오직 ‘복음 전도’이며, ‘문화 명령’에 따라 일반 사회에서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일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두 나라’에 속한 신자의 엄중한 사명이다. 다만, ‘교회’와 ‘국가’를 혼동하지 말고, 각각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두 나라에 속한 신자답게 두 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적극적이고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거스틴과 칼빈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견해나, 교회는 세상과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되며 철저히 사회와는 분리되어 정치/사회/문화에는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종교개혁 당시의 극단적인 재세례파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구별된 거룩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제도 교회’가 일반 사회에 할 수 있는 것은, ‘신학과 교리’를 제시함으로 세상의 잘못된 사상과 문화를 철저히 비판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일이며, 정치와 정책의 구체적인 일들은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사명이다.
나오며 : 그리스도인의 이중 사명, 교회와 시민으로서의 삶
결국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시민으로서 루터와 어거스틴이 제시한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라는 서로 다른 사회에 속해 있는 이중 시민권자이다. 근본적이고 영원한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라는 것이 더 본질적인 우리의 정체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나라에서 살면서 그 책임을 다하여 ‘소금’이 되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 또한 우리에게 분명히 주어져 있다.
참된 신자라면, 두 나라를 서로 혼동하여 그 경계가 무너지도록 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두 사명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나면, 신앙과 정치, 창조와 구속, 문화 변혁과 복음 전도라는 개혁주의자의 이중 사명이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과연 한국에 참된 개혁주의 교회가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과연 얼마나 존재했는가?’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과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에서 나온 개신교 교단들은 많이 존재했지만, 참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깨닫고 실천해 온 교회가 있었는가? 나의 대답은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서구 역사에서 성경적 신앙으로부터 이탈된 중세 교회를 철저히 개혁했던 ‘종교개혁 시대’가 한국에 적어도 한 번은 와야 하지 않을까? ‘종교개혁 시대’를 한국에 허락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 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며 그 길을 준비해야 할 책임은 이제 우리 세대에게로 넘어온 것 같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5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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