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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성령론-by 존 오웬

성령론-by 존 오웬


성령론-by 존 오웬
THE HOLY SPIRIT HIS GIFT AND POWER John Owen

발표자 : 김진원


제3부

제1장

새 창조에 있어서 
중생 시키는 성령의 사역

1. 새 창조의 완성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어두움과 죽음이 들어왔다. 

2.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1) 중생의 성격

 중생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 : 3 - 6)
 영으로 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2)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이란 지금까지 존재하여 있었고 앞으로 있을, 또는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할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 똑같은 사역에 의하여 -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태가 모두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악함에는 그 차이가 있으나, 그들의 상태(state)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한 가지로 저주 아래 있다.(시 51:5; 요3:5,36; 롬3:19; 5:15; 엡2:3; 딛3:3,4)
 중생한 사람의 상태는 모두 같다. 중생의 정도는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아름답다. 거룩함과 성화의 차이는 있어도 중생의 차이는 없는 것이다.

(3)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란 세례 의식에 참여함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란 단지 외적인 표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도나 방법에 의해서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뿐이니라”(갈 6 : 15).
 ex) 마술사 시몬

(4) 중생은 생활의 변화로 되어지지 않는다

 세례를 받고 신앙을 고백하고 회개하였다고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개혁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지 않는다. 중생이란 우리의 본성이 영적으로 혁신되는 것이다. 그의 영혼 속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의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중생이 영적으로 새로운 요소, 즉 성령의 산물이라고 하는 성경적인 증거는 매우 많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질, 새로운 능력, 새로운 힘으로 새롭게 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부른다.(벧후 1: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중생의 기초는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새롭게 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또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12:2)
 따라서 중생의 요소(principle)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6:6) ex) 언어
 중생은 단지 삶의 개혁이 아니다.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의 삶에 변화가 있는데 도덕적인 부분에서만 변화가 있다면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영적인 교훈이 분명하게 성취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인 범위에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지 온전히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온 영과 몸이 완전히 성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인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나 광희, 또는 음성 비슷한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인 황홀경을 가져오지 않는다. 성령은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을 사용하신다. 성령은 믿는 사람들의 이성을 사용하셔서 합리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 위에 강압적인 힘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본성에 알맞게 우리들의 능력 안에서 능력에 따라서 역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제 6 장

어거스틴의 실례를 통하여 본 회심의 방법

1. 인간의 부패된 본성을 제거하시고 치료하시는 성령의 방법

(1) 인간의 타락된 죄의 원리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58:3)
 “점점 나는 나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줄 사람들에게 나의 뜻을 표시하고픈 특정한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잘 발버둥치고 격렬히 울었으며, 나의 뜻이 잘못 이해되었거나 내가 바라는 것이 나에게 해로왔기 때문에 나의 뜻을 들어 주지 않았을 때 나는 나의 부모나 유모에게 격노하였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때리거나 마음 상하게 하려 했으며 소리내어 울부짖음으로써 복수를 하려고 했다.”
 어린이들에게서 보는 이와같은 비정상적인 행동들은 그들 속에 죄가 내재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인 것이다.

(2) 타락한 본성은 점점 자라간다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전 11:10)
아마도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아무런 도덕적 악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것은 순진함이 아니다. 똑같은 원리와 똑같은 마음의 습관이 보다 성숙한 나이와 보다 커다란 사건들에 이어져 보다 큰 죄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 타락한 본성은 실제적인 죄악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특별히 거짓말을 들 수 있다. 이 거짓말하는 죄에 어린이들은 매우 자주 빠지게 된다. 어린이들이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허락되지 않은 것을 훔쳐내는 것도 역시 같은 성질의 죄악이다.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 28:24)

(4) 죄는 점점 자라 기반을 구축한다

 사람들이 자라감에 따라 죄는 더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정욕의 도구가 되는 여러 가지 정신 기능들과 감각 기관들, 그리고 육체의 부분들은 날마다 점점 더 그것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되어지고 점점 더 그것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그것의 뜻에 쉽게 따르게 된다.
 오늘날에는 정욕의 대상도 매우 증가되어 있다.

(5) 죄가 극으로까지 자라가는 이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죄를 범하는 옛사람의 성품은 똑같은 것이다. 차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이 은혜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결코 넘어서지 못할 범위 안에서 지키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정욕과 유혹의 결합 속으로 빠져 모든 종류의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나는 내가 짓지 아니한 죄도 모두 당신의 덕분으로 돌립니다. 사악함 자체를 사랑했던 내가 당신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 죄들을 짓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의 약함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어느 누구가 감히 자기의 순진함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 돌리고, 나아가 죄를 용서하시고 회심시키시는 당신의 자비가 마치 자기에게는 덜 필요했던 것인양 당신을 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2. 죄된 인간을 향한 은혜의 방법

1) 우리의 타락된 본성의 잔재 속에는 아직도 천상적인 불꽃에 대한 일말의 빛줄기가 남아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사람들의 외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역사하신다.
 ① 갑작스럽고 놀라운 심판을 내리심으로써 하나님은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나타내신다.” 왈도는 함께 들판을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아 회심하게 되었다.
 ② 개인에게 고통을 주심으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다. (욥33:19,20; 시78:34,35;  호5:17)
 고통의 기간은 곧 생각하는 기간이고 만일 사람이 극도로 강퍅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반드시 그 고통을 누가 보냈으며 왜 보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③ 시리아인 나아만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주목할 만한 구원과 자비를 통해서도 역사하신다(왕하5:15 이하)
 ④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행동을 통해(벧전 3:1,2)
 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전파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중요한 수단일 것이다.

3.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

 앞서 언급하였던 여러 가지 경고들은 깊은 잠 속에서 듣는 부르심의 목소리와 같다. 즉 그것을 듣는 사람은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고 하지만 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어거스틴이 표현했던 대로) 다시 누워 잠들게 되는 것이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교만한 마음으로 하여금 죄와 죄의 성격 및 경향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의 마음의 어두움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교만함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놀랄 만한 교만함을 우리의 자녀들과 하인들과 친척들에게서 매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붙들어 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니 그 얼마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들의 마음을 죄에 고정시키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들의 목전에 차례로 베푸시어”(시 50:21) 그들로 하여금 과연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돌아서야 하는지를 주목하게 하신다.
 단순한 죄에 대한 명상은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만일 그분의 직접적인 간섭이 없다면 우리는(죄를 알게 하는) 율법을 일생 동안 듣는다 하여도 단 한 번의 감동도 받지 못할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현명하고도 거룩한 섭리를 통해, 자기가 부르시고 회심시키려는 자들의 외적 환경을 강력히 통제하심으로써 소기의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은 마땅히 우리의 주목을 받을 만한 것이다.
 그들의 기호와 계획은 물론 그들의 실망까지,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와 그들의 친척, 사교 및 생활의 여러 관계까지 모두가 회심이라는 거대한 목적을 돕도록 섭리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의 사색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카르타고로부터 로마로, 또 로마로부터 다시 밀라노로 보내어 매주일 마다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게 하셨던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결국에 가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자신이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저버리고 전보다 더 방탕한 죄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고집스러운 결과를 일으키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우리의 정욕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욕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다만 억제하고 저주하는 데서 그친다면 그 힘은 점점 커져서 우리의 모든 확신을 뒤엎어버릴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영적인 인도하심으로 오해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ex) 마니교, 헛된 친구들
 또 하나는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에 대한 수정이나 개혁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한다. 이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항상 또 다른 종류의 죄와 유혹을 불러들일 뿐이다. 
 어거스틴도 그가 커다란 확신을 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회심하지는 않았던 시기에 겪은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다름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무쇠 같은 의지의 사슬에 의해 묶여 있었다.…”
 “오, 나의 하나님, 내 속에 새로이 생긴, 즉 나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케 하는 새로운 의지는 아직 그 힘이 미약하여 오랜 동안의 습관에 의해 확고히 굳어진 나의 이전의 의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두 의지, 곧 하나는 옛것이고 하나는 새것이며, 하나는 육적이고 하나는 영적인 두 의지는 서로 다투어 나의 영혼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때 나는 내가 성경에서 읽은 것, 곧 육체가 얼마나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며 성령이 얼마나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가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이러한 혼란이 야기될 때 하나님께서는 자주 복음의 전파나 혹은 다른 몇 가지 수단을 통해 합당한 진리의 말씀으로 그것을 가라앉히신다. 이러한 소동의 한 가운데서 그분은 오셔서 말씀하신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이 말씀과 함께 그분은 자신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 반역하려는 힘을 물리치시고 죄의 힘을 정복하시며 인간의 마음으로 하여금 영원히 죄를 포기하도록 결심하게 하신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주님이 주시는 공포를 겪을 그 당시 그는 마치 미친 사람과도 같이 때로는 기도하고, 때로는 울부짖으며, 때로는 홀로, 때로는 친구와 함께, 때로는 걷기도 하고, 때로는 땅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는 어떤 이상한 계기에 의해 성경을 한 권 펴서 읽도록 권고를 받았다. 그때 마침 그의 옆에 있었던 책이 바울의 로마서였는데 그 책을 펴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온 구절이 바로 다음의 구절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롬 13:13,14) 이 말씀을 읽은 즉시 그의 모든 혼란된 갈등은 끝이 났다고 한다.

4. 죄에 대한 분명한 자각

 회심에 앞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사실에 대해서만은 충분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죄에 대한 확신, 즉 죄의 상태와 경로 및 실제적인 죄에 대한 깨달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싫어하게 할 만큼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는 정도로까지 지치고 목말라서 구원을 찾아 헤매지 않는 사람을 그분은 결코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다.
 ②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에 제시된 방법 말고는 영혼을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과 그것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한 이해와 단호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을 믿음에 이르도록 설득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죄는 너무나 커서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상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5. 그리스도에 의한 회심의 작업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행사하는 것은 그와 불가분리적으로 모든 거룩한 순종에 온전히 마음을 쏟는 것은 물론, 모든 알려진 죄를 버리고 삶의 완전한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내는 결과를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영혼은 곧 이전에 범했던 여러 가지 죄로 인해 경건한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고, 그 결과, 이제 영혼의 기능들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함을 사랑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 회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교회 안으로 받아들여져서 신비한 삶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 하시는 두 번째 위대한 사역이다.

느낀 점

 신약 시대를 흔히 성령의 시대 또는 은혜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님이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참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들을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보고 계십니까? 아니 이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가 얼마나 선포되어지고 있습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이 귀한 중생의 복음이 전혀 선포되어지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는 영혼의 중생에 있으며, 이것은 깊이 연구되어지고 묵상되어지며, 체험되어져야할 진리입니다.
 오웬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되고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귀한 말씀이 계속 도전을 받고 방해를 받는 것을 볼 때에 더욱 깨어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말씀의 표준에 합당하게 다 변화되어 사단을 비웃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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