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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성화론(2)

로이드 존스 성화론(2)


로이드 존스 성화론(2)


로이드 존스 성화론 VII 

두 번째 위험은, 용서만을 먼저 구하고, 그리고 나중에 성화를 구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위험이다. ‘ 아, 그래’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 그래서 구원을 간구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래서 그의 죄를 용서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성화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칭의와 용서의 첫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가 성화로 나아가 그가 칭의를 받았던 것처럼 성화를 받게 하도록 애쓰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그릇된 생각이다. 사람들은 왜 용서를 구하는가? 그들이 용서를 갈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한 가지 답 밖에 없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함의 보았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 죄악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그들은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범죄하게 만든, 그들을 위험으로 빠뜨린 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분명히 그러한 바램이 용서를 구하는 근거이다. 그것이 용서를 구하는 근거가 아니라면 ‘용서’라는 단어에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 당신이 용서에 관하여 관심이 있다면 당신은 지옥에 가야 할 죄인으로서의 당신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회개를 다루면서(역자 주: 이 변역 범주 밖의 것임) 우리들은 용서의 의미에 관하여 자세하게 파고 들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정한 회개에는 전인(whole person)이 참여함을 지적하였다; 지성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마음이 그것을 느낀다. 우리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회개를 연약함과 부서진 사람, 그리고 그들이 평화를 찾지 못하여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것 등과 관련하여 생각하였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회개이며, 수 세기를 통하여 그것이 회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회개하는 사람이 그런 것들을 감지하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그런데, 회개가 그런 것들 모두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이미 성화의 시작이다. 우리들이 죄의 사악함을 알고, 죄로부터 분리되기를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있고 싶고, 하나님을 기뻐하기를 원한다면 그것 속에 이미 성화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됨의 시작 것이다. 


세 번째, 사람들에게 일종의 임시방편적 고통의 경감 또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주는 데만 관심을 두고 성화의 결정적인 중요함을 다그치지 않는 가짜 복음주의는 매우 심각한 위험이다. 용서에서 정지하는 복음주의는 성서적 복음주의가 아니다. 죄를 짖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진짜로 설교한다면, 모든 설교의 핵심은 성화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들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그는 성화를 십자가 상의 죽음으로 가르친다; ‘너희 몸은 ……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닌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 – 20). 바울 사도는 성화를 설교할 때에 성령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십자기를 설교한다. 예를 들면 그의 데살로니가의 초기 복음 전도 중에 전도의 효과는 이 사람들이’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살전 1:9)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성화이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첫 번째 메시지는 성화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복음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화해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그분을 위하여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소개함에 있어서 그분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신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항상 함께 다루어져야 하며 성화는 복음전도 메시지의 일부로 항상 함께 설교되어야 한다. 

이제 마무리해 보자. 성화에 관한 모든 논란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우리 자신 중심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치명적인 성향에서 발생한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들의 문제, 우리들의 죄 그리고 우리들의 필요를 생각하며, 우리들이 성화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의 마음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차있다. 거기에 모든 오류가 있다. 사도 베드로는 성화를 설교함에 있어서 정반대의 순서를 따랐다. 그는 이렇게 설교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순종하는 자식처럼’ –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당신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왜? – ‘내가 거룩하므로’(벧전 1:13 – 16). 

요즈음 이러한 생각이 시의를 얻어 특정의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진료소에서 거룩함이 설교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벗어버릴 수 없는 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진료소’에 찾아 가도록 권면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성화되어야 하며 거룩해져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죄 짓는 삶을 살 권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화의 문제에 임하는 자세는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간격이나. 접속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어 계속하시며 완성시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거듭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이전에 성화의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내가 신의 성품을 받는 순간, 내가 거듭나는 순간 이전에, 나를 죄로부터 격리시킬 어떤 것이 내 속으로 들어 왔다. 영어로 번역하는 가운데서 적절하게 이해되지 못하는 야고보의 선언을 들어보자.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 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5) 개정판(영어)이 이를 매우 잘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너희 속에 계시는 성령이 너희들을 세상과 세상의 정신으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 붙이기 위하여 질투하기 까지 열망함을 아지 못하느냐?’ 바로 그 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순간, 나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는 과정은 이미 내 속에서 일하기 시작하였으며, 내 속에서 이미 일하기 시작한 성화의 과정 없이는 나는 거듭날 수 없다. 육체와 성령의 투쟁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투쟁은 전적으로 나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투쟁이다. 

당신은 무엇이 두렵고, 무엇에 떠는가? 

이제 둘 째번 원칙을 생각해 보자. 성화에 있어서 행위자(agent)는 누구인가? 성화가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성화가 구원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면, 성화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성화는 우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주의 해야 한다. 교리에 따라서는 성화를 하나님 혼자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거듭남에 있어서 우리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이다. 칭의를 위해서도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칭의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우리의 양자됨도 똑 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다른 한편,우리들의 회개와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지만,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다.우리들은 죄를 고백하고 죄를 떠나야 한다.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나님께서 시작해 주시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다 – 그러나 시작된 후에는 우리들은 그 믿음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화이다. 

우리들의 능동적 참여가 빌 2장에서 말씀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2 – 13). 여기서 우리는 온전하게 제시되는 균형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성화가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성화는 주로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문을 열어야 한다; 우리가 성화를 소원하게 하고 성화를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놀랄 만큼 분명하게 말씀한다. 성경에서는 성화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께서 공동으로 함께 하시는 일이다.성경 말씀을 보자. 살전 5:23은 성부의 일을 이렇게 가르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히브리서에도 중요한 말씀있다. ‘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 20 – 21).성화를 이루시는 분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우리들을 온전하게 만드실 분은 성자 예수를 부활 시키신 성부하나님 이시다. 

그런데 성경은 똑 같이 성화가 성자의 일임을 말씀한다. 이 교리들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똑 같은 일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공동으로 하시는 것을 파악하였는가?( 역자 주;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880페이지 달하는 교리론의 중간에 위치하는 부문임). 벌레같은 내가 구조되어 구속되며 운전하게 만들어져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삼위께서 협력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 처럼 우리를 고양시키는 것은 없다.성자에 관한 말씀을 보자: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예 5:25-26). 그 분께서는 교회를 성화시키기 위하여 죽으셨다. 똑 같이 디도서 2:14에서 그분은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왜? 단순히 우리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들이 지옥을 면하도록 하기 위헤서 만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들의 양심이 평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아니다. 그 분깨서는‘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다. 

그런데 성화는 또한 똑같이 성령의 일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편지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별하는 성화를 성령의 일로 여기는 다른 말씀들이 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미듬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그러므로 우리들은 성화는 성삼위의 일이라고 할 수있지만,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중보하는 분이 성령이시고,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우리들에게 적용하는 분이 성령이시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를 형성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므로,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성화는 특히 제 삼위이신 성령의 일이다. 

우리들은 성화는 우리 속에서 성령을 통한 그리고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일임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로서 크리스천인 당신이 성화가 없으며 당신이 자작으로 성화를 이루겠다는 생각은 철저하게 비 성서적이다. 그것은 불가능 하다. 성화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성화는 그분의 의도이다; 성화는 그분의 목적이다; 성화는 그 분께서 자신의 용도로 구별하신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 분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화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 속에서 성화가 이루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성화는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빌 2:12-13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의 두 번째 부문으로 가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에 조심하라; 당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아라; ‘두렵고 떨림’의 의미를 깨달아라 

이제 다시 칭의와 성화 간의 중요한 차이를 생각해 보자. 칭의에 있어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언(declaration)하시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는 우리는 행위하도록 요구 받는다. 이 점은 성화의 교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 특히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곤난에 빠진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거듭나면 그 인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성품을 주셨으므로 거듭난 사람들은 새 성품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들은 성경을 묵상하여 이해하고 생활에 적용함으로써 그렇게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의 성화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그들 자신들이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오류임을 이미 이야기했다. 성화는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시동(first move), 동기, 원동력 등 모두가 우리 속에서 우리들이 ‘소원하게 하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을 회피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또 다른 극단으로 가서, 우리들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이 행해지므로 우리들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앞의 강의에서 나는 부지깽이와 구명대 이야기를 했었는대 ,그 비유 둘 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고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주님께서 모든 일을 다하신다고 주장하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으로 빌 2:12 – 13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요 15장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하며, 그 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한다. 요한 15장은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이다;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이니’(5절). 그들은 나무가 모든 일을 하고 가지는 열매를 보여 주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가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는 우리 주님의 비유를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나무의 가지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못하는 , 생명이 없는, 속빈 튜부같은 것이 아니다. 가지는 생명으로 가득차 있다. 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지 않으면 가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수액을 받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수액을 받으면 가지는 활력과 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 가지는 공기로부터 탄산가스를 빨아 들인다. 기자는 공중으로 산소를 내보낸다. 가지에 달린 잎마다 탄소동화작용을 하느라고 매우 활동적이다. 

그러므로 비유가 얼마나 쉽게 오해될 수 있는지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서 일을 시작하지 않으시면, 당신을 이룰 수 없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일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속에서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의지를 갖게 일하시고 , 그 의지가 행동하도록 일하시고 , 그 행동이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그러므로 나는 소원을 가져야 하고, 행동하여야만 한다. 

성경에는 똑같은 말씀들이 많다. 우리들은 이 말씀들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롬 6장을 보면 그러한 말씀들이 많이 모여 있다. 바울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롬 6:11)라고 말한다. 여기(=간주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아무도 여기(=간주하)는 것을 나를 대신하여 해줄 수 없다. 내가 여기는(=간주하는) 행위에 몰두해야 한다. 내 속에서 일하시는 성령께서 내가 그러한 간주를 하도록 인도하신다. 나는 그렇게 간주하도록 훈계를 받는다. 그것은 나를 향한 간청이다; 그것은 성화의 일부이다. 바울은 나아기서 이를 부정어법으로 말한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12절). 당신은 죄가 당신 속에서 왕노릇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댜. 그것은 당신에 대한 훈계이다. 바울은 이를 다시 긍정어법으로 말한다:’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너희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13절)’.우리들은 우리들의 몸의 지체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능동적인 일이다. 

바울은 또 다시 롬 8에서 말한다: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들은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렇다 당신은 성령을 통하여 조심하게 될 것이다. 성령 없이는 우리들은 그것을 할 수 없다. 우리들이 성령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수도원 제도와 모든 도덕학의 오류가 있다.그러나 성령을 받아 성령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면, 그러면,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은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이 골로세서 3;5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구절들도 있다: ‘싸우라’(딤전 6:12)바울은 싸우라고까지 훈계한다! 그것은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서 디모데에게 구체적으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딤후 2:22)라고 말한다. 그는 디모데에게 피하라고 명령한다. 붙잡혔다가 구출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딤전 6:11에 바울은 말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을 좇으라’디모데는 그것을 원하고 그것에 진력해야 한다.우리들은 (엡 4;22,24)’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나는 때로는 모든 관련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고후 7:1이라고 생각한다: ‘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이 말씀을 대신할 말씀이 어디 있겠는가? 앞에서 본 모든 말씀들은 한 가지 방향을 가르킨다, 내가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신약의 서신서들은 당초에 기록될 필요가 없었다. 성화를 위하여 우리가 할 것은 없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들을 포기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라면, 사도들은 ‘그러므로 저것에 비추어 그것을 적용해랴; 이것을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라, 너희 자신을 깨끗케하라’라고 말하면서 교리에 대하여 우리들과 논란하느라고 많은 양의 잉크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한 것이다. 우리들은 오직 포기하고, 기다리고, 바라보며, 그리고 거하기만 하면 된다면, 사도들은 어찌하여 그 토록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망하게까지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쨋든 우리가 혼동되지 않토록 성경을 의곡하지 않는 데 조심하자.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그 분께서 우리를 이미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분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 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며,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방법을 말해주신다.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여김, 이러한 이해, 이러한 죽임 등이며 결국은 – 이러한 깨끗케 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중요한 균형이 있다 – 주로, 당초에, 아주 중요하게, 성화는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일이다. ‘갖난 애’, ‘크게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은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으로 거룩하라는 훈계를 받는다. 그리고 구속에 있어서 그 분의 전적인 목적은 우리들이 그 명칭에 걸맞게 참으로 그 분의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성화는 주로 하나님의 일이나, 우리들도 해야 할 부문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여러 가지로 이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국면, 즉 우리 속에서 성화가 이루어지는 방법과 모양에 관하여 생각할 차례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상이한 교파들이 가장 날카롭게 논란을 벌리는 부문이다. 이 문제를 가장 편리하게 접근하는 것은 다음의 세가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첫째로 성화는 밖으로부터 받은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칭의를 받았으므로 당신의 성화를 받아라; ‘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한다. 20세기 초에 유명했던 한 교수는 말 버릇처럼 이렇게 이야기했다. ‘ 당신은 손에 한 개의 지갑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에 두 개의 1파운드짜리 금화가 들어 있다. 첫 번째 꺼내는 금화는 칭의이고 두 번째 꺼내는 금화는 성화이다. 그런데 매우 많은 크리스천들이 첫 번째 금화만 꺼내고 두 번째 금화는 꺼내지 않는 데 비극이 있다.’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두 손에 금화를 하나씩 쥐고서 여러분들에게 ‘와서 가져가라’ 고 말한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오른손에 있는 칭의 만을 가져간다. 여러분이 첫 번째 금화를 가져간 것처럼 두 번째 금화도 가져가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화를 설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칭의를 받았다. 이제 성화도 같은 방법으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화를 단번에 받은 것으로 가르친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러한 가르침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인용하기를 즐기는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우리 주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사명을 주는 부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바울에게 가서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신다. ‘그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8)’ ‘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거룩케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것으로 논란은 결론이 나고 토론은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생각한다. 당신이 앞에 이야기한 거룩함의 두 가지의 의미, 즉 신분상의 거룩함과 도덕상 거룩함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룩함이란 신분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구별됨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정결케 하고 순결케 하는 신자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전이 아니라, 구별하여 세상으로부터 때어 놓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을 ‘거룩한 산’으로 칭함을 기억할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벧전 1:2에서 ‘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여기서 성화는 믿음을 언급되기도 전에 언급되는 성화이다. 그리고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 11)’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칭의를 언급하기 이전에 성화를 말하고 있다. 

위의 모든 예에서의 거룩함은 “구별하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위의 행 26장의 거룩함도 구별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해놓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업을 얻게 됨을 설교하도록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6장을 더 읽어 가면 ‘ 믿어 거룩케됨’ 은 이방인들이 기업을 위하여 구별됨을 의미함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 분명함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2:7).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모든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나, 행 26에서의 거룩하게 됨은 구별됨을 의미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견해를 갖는 사람들은 요한일서를 인용하기를 좋아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신다고 가르치는1장 7절과 3장 8-9절을 잘 인용한다. 우리는 여기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빛 가운데를 걸어가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과 함께 빛 가운데를 걷는 다는 생각은 좋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죄 중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때는 나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크리스천은 질문할 수 있다.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일단 끊어지나, 당신이 당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분은 신실하시어 당신을 용서하시고 당신을 모든 불의로부터 씻어 주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요한 일서가 다루는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그리고 성자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 죄지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죄로 더러워짐이 지워지는가를 가르쳐줌으로써 우리가 버림받은 자가 될 필요가 없고, 우리가 빛에 대하여 범죄하였다는 자책감에 빠져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필요가 없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항상 요일2: 1-2가 이를 정확하게 잘 매듭짓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는 나아가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요한은 그들이 범죄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위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어떤 것을 받음으로 다시는 죄를 짓게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있다: 화목제물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이 견해를 가진 모든 친구들이 가장 잘 인용하는 구절은 롬 8:1-2 이다: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들은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한다; ‘여기서 반작용의 법칙이 입장한다. 즉 두 개의 법이 있다. 내 속에는 나를 끌어 내려 죄를 짓게 하는 죄와 사망의 법이 있다. ‘오 그렇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 내가 그분을 바라보는 한, 그리하여 그 속에 거하는 한,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다.’ 당신은 부지깽이와 구명대의 비유를 기억할 것이다. 

롬 8: 2는 가장 중요한 절로 위와 같은 해석은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면 이 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고 기록한다. ‘ 왜? – 여기에 해답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앞의 두 장에서 여러 차례 이미 이야기 한 것을 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제 6장에서: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 1-2)’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그 누구나 아담의 타락과 원죄를 유산 받음으로 인하여 죄의 세력 하에 놓여 있다. 죄가 자연인을 지배하며, 다스리고 좌지우지한다. 인간은 이를 의식할 수 없으며, 그러한 세력을 죄라고 믿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죄의 노예들이다. 죄가 그들의 주인이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들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첫 번째 언급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롬 6:18에서’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이는 ‘ 당신은 이미 해방되었음’ 또는 ‘당신은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발생했으며 단호히 최종적으로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크리스천들은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말로 바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우리들이 죄가 없고 온전하다고 말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이 온전치 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는 동일 한 것을 다시 의미할 뿐이다. 우리들은 죄가 더 이상 우리들이 주인이 아니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들은 율법이나 죄의 세력 하에 놓여 있지 않다. 그는 14절에서 이미 이를 말하였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그리고 그는 나아가서 이를 8:2에서 다시 가장 흥미롭고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롬 8; 2는 5장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설파한다. 

바울은 다시 롬 6; 20에서 말한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죄의 노예됨을 의미한다 – ‘너희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바울이 사용하는 대조법에 유의하라. 우리들이 죄의 종이 었을 때에 우리들은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으나, 우리들은 이제는 의의 종이므로 죄로부터 자유한다. 이 구절은 우리들이 롬 8:2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뿐아니라 매우 중요한 7: 4–6과 일치를 보여준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 당하였다’ 는 ‘ 이미 당하였음’, 즉 완료의 시제이다; 이는 ‘ 단번에 최종적으로’ 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과거시제다;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 바울은 결혼한 여인의 비유를 사용한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여인은 그에게 매여서 그 남편의 법 아래 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자유를 갖게 된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간부가 되지만, 남편이 죽었으므로 그 법은 더 이상 그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그녀는 다시 결혼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4절)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칭의를 받은 후에 뒤따라 갖게 되는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과 그분의 의로움으로 칭의를 받았을 때에, 당신은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이제 당신은 다른 사람, 즉 부활하신 그분과 결혼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한다.’ 바울은 그가 좋아하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를 다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여인이 남편과 연합하여 자녀(열매)를 낳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크리스천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는다. 바울은 계속하여 말한다. ‘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7: 5)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7: 6). 7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얼마나 분명해 지는가. 그러므로 8: 2를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 

8:2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고 말씀한다. 이제 이것을 분명하게 하자; 그것은 7장의 시제와 동일한 과거시제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단번에 최종적으로 다시 할 필요가 없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이미 자유롭게 만들고, 이미 해방시켰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이 매우 길게 언급하여 오고 있는 법이다. ‘죄의 법’이란 불신자의 삶을 주관하고, 지배하며, 좌지우지하는 죄이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이 법 아래 태어났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이제 더 이상 그 법 아래 놓여 있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활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각자의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이전에 그 아래에서 살았던 죄의 지배와는 관계가 단절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사도는 롬 5장의 중간에서 다루기 시작한 신자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8: 2에 이르기 까지 계속하여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아직도 롬 8: 2 이 말씀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에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심각한 오류인 것인가. 그러한 견해의 주창자들은 ‘ 오 그렇다, 그들은 용서를 받고 칭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해방시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라는 이 놀라운 것에 대하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이 8: 2 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키는 일을 계속 하고 있음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과거 시제(현재 완료)로 이야기 하고 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해방하였음이라(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made me free)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다. 바울은 8:2 에서 그 사실을 다시 돌아본 것이다. 그 사건은 발생 완료되었으며, 단번에 다시 발생할 필요 없이, 절대적인 끝 맺음을 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간에 나와 죄와 사망의 법과의 관계는 절단되었다. 내가 또 다시 체험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내가 또 다시 그 절단을 체험해야 된다면 나는 전혀 크리스천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은 가르침이다. 

당신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인가를 다시 한번 보았으며 롬 8: 2도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주장의 근거를 제공해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크리스천 누구에게나 불가피하게 진실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새 신랑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당신이 옛 남편과는 끝났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죄나 사탄 또는 율법의 세력 아래 있지 않다. 당신은 은혜 아래 있다. 롬 8; 1-2은 바울이 그것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 1)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성화는 밖으로부터 받는 것도 일종의 체험도 아니다. 

성화를 밖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잘못 사용되는 성경구절들을 다루었지만, 성화란 밖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다른 이유들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성화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담당하는 부문, 즉 당신과 내가 행해야 되는 것이 크게 중요함을 우리들은 앞에서 보았다. 만약 성화가 내가 받는 것이라면,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서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강력하게 설파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왜 그렇게 많은 당부들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바울의 서신서들의 구절들을 들어 생각해보았으므로 이제 베드로 사도의 구절을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11).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성화를 받는다면,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해방돠었을 것이다. 아니다. 베드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우리 자신을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지키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화를 밖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이러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않는 비극을 범하고 있다. 

바울 서신의 다른 구절을 보자: ‘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엡 4: 28). 도적질하는 자는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도적질을 하지 않도록 성화를 받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에 도적질을 하지 말 것을 명령 받고 있다. 이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그것들을 하지 말아라(엡 5: 4).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롬 12: 2). 당신이 성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 순간까지도 당신이 이 세대를 본 받고 있다면, 당신은 곧 본 받기를 말아야만 한다. 

사람들은 성화에 관련하여 내게 와서,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매우 열심히 애써왔으나, 나는 이 체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성경이 당신으로 하여금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청결케 하라’(약 4: 8) 다시 말하거니와 성화가 밖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명령들은 무의미하며 순전히 잉크의 남용을 초래할 따름이다. 만역 성화가 밖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다: ‘ 죄의 문제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단번에 당신의 성화를 받을 수 있으며, 그 때가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성화를 유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분명하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그 어떤 서신서이든 위대한 성화의 교리를 가르치고 도적적 행위를 호소하며 당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을 다루었다: 성화란 밖으로부터 받는 것인가?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다루어 보자: 성화는 일종의 체험인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수 많은 이야기를 늘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펼친다. 경이로운 체험을 얻은 많은 사람들, 예를 들면 성품이 포악했던 사람들과 같은 이들의 체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들은 수년 동안 그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했는데 도저히 그것을 해결할 수 없어서 마침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는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 경이로운 체험을 얻었으며, 그 이후로는 다시는 성질을 부리는 일이 없어졌다. 금연, 알코올 중독 등등에 관련하여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들은 이러한 체험들을 동정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이러한 체험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저함 없이 받아드린다. 감사하게도 나 자신도 내 삶 속에서 있었던 그러한 체험을 간증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체험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여기 내 답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에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이 성화라고 말하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것이 성화의 일부일 수는 있으며, 그것이 성화를 크게 도울 수는 있겠지만, 그 것 자체가 성화는 아니다. 내가 바로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우리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신약성경의 서신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의 서신서들은 그러한 주장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성화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의 성장이다. 


내가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에, 나에게 와서 모든 죄로부터 해방되는 체험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들었다고 하며, ‘나도 그것을 추구하며 기도해 오고 있다. 나는 자신의 나쁜 성질에 대하여 기도했던 사람에 대하여 읽었다. 나는 형편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알고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그분께서 그 사람에게 하셨던 대로 나에게도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문을 구하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해야 했다. 수 많은 여러 가지 유형의 죄와 관련하여 위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며 실패하는 사례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 그래요, 문제는 어딘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답이 못 된다. 하나님께 굴복하려고 자진해서 애쓰고, 그들이 아는 한 무엇이던지 기꺼이 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얻지 못하는 정직한 영혼들이 있다. 그들에게 우리의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체험을 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면, 그것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방법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이 어떤 한 가지 죄에 대하여 작용할 수 있다면, 왜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하여 작용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들 모두가 죄가 없고 절대적으로 완전해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한 성질을 제거할 수 있다면, 왜 죄 없는 완전한 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하는가? 우리들이 아무도 그러한 죄 없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체험의 문제를 매우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불신자들 중에서도 유사한 체험을 간증하거나, 어떻게 자신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나쁜 성질 또는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개인으로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받은 사람 중의 하나는 그녀를 절망케 한 것으로부터 벗어난 한 크리스천 과학자이다. 한 모임에서 그녀는 병적인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증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영적인 요인이 전혀 아닌 심리적 요인에 의한 해방이 있을 수 있다. 

이제 이 체험의 문제에 관하여 약간의 원칙을 생각하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로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갑작스런 해방을 허락하실 수도 있고 하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나는 같은 교회에 출석하는 두 사람을 안다. 둘 다 대단한 술 주정뱅이였었는데, 둘 다 모두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되었다. 한 사람은 그가 회심한 저녁을 기하여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다시는 생기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자신을 전혀 괴롭히지 않는다. 그는 다시는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다른 여느 건물을 지나는 것과 똑같이 술집 앞을 지나갈 수 있다. 다른 한 사람도 훌륭한 성도가 되어 술을 끊었지만, 그가 술집 앞을 지날 때는 매우 큰 유혹과 투쟁해야 하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술집을 그냥 지나가도록 해주신다고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였다. 술로부터 해방된 두 성도에게 있어서 한 성도에게는 술이 생각나지만, 다른 성도에게는 술이 생각나지 않는다. 체험을 일반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 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교리를 체험에 기초를 두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한다. 

둘째로 성화는 특정한 죄나 죄들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나와의 총체적 관계의 문제이다. 나는 어떤 특정한 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나 나는 영적으로 아직도 매우 어리고 유치할 수 있다. 우리들이 생각해본 다른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한 순간에 완전하게 성화될 수 있으나, 다음 순간 죄 한 가지를 범함으로써 나의 성화를 상실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성화를 획득해야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화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 잃어다가 찾았다가 하는 변화하기 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광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 18)’고 말씀하고 있다. 성화는 성장이며, 발전이다; 성화는 전진한다. 성화가 체험이라는 주장은 우리들이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얻게 되는 상이한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은혜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성화는 체험이 아니라 상태이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성화는 체험을 갖게 되며 그 체험으로 도움을 얻게 되나, 체험이 성화는 아니다. 예화로 설명하는 것은 항상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용기를 내어 한 예화를 들어 설명해 보자. 나는 체험과 성화는 보리, 밀 또는 귀리 등을 심는 밭과 비 및 햇볕 간의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농부가 밭을 갈고, 흙을 분쇄한 후, 씨앗을 뿌린다; 농부는 그 후에 흙을 판판하게 고름으로서 그가 할 일은 일단 끝냈다. 씨앗이 싹터서 자라며 마침내 작물이 모양을 나타낸다. 

그리고 몇 차례 날씨가 변동을 부릴 것이다. 농부는 날마다 밭은 바라보나 별 변동이 눈에 띄우지 않을 것이다. 작물이 하루 동안에 눈에 띠게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살아 꿈틀거리며 매우 천천히라도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갑자기 일기가 쾌청하고 햇볕이 따갑기 시작한다. 가장 반가운 비가 쏟아지고, 또 찬란한 햇볕이 뒤 따른다. 다음 날 아침 밭에 나온 농부는‘ 쑥쑥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네’라고 환희 할 것이다. 

이 예화가 이해되는가? 성화는 그 자체가 생명이며, 우리가 구원 받는 순간, 우리가 칭의 받는 순간,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다. 때에 따라서는 그 진행이 아주 미미하여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것이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며 당신에 대한 그 분의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런대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체험을 성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지 안다. 체험은 비 쏟아짐 및 햇볕 쏟아짐과 같은 것이다. 체험은 성화를 자극하고 증진시키지만 그러나 성화는 아니다. 서로 본질적으로 상이한 체험과 성화를 혼동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체험은 성장을 돕고 자극하기는 하지만 성장의 과정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체험은 갑작스럽고, 그리고 극적으로 갖게 될 수 있다. 당신은 부차적으로 받는 축복인 체험들을 많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화는‘부차적 은총(second blessing)’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 큰 정서적 격변을 겪게 된다; 그 후 수년 동안에 걸쳐 그러한 체험을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후 그들은 다시 부차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이 주님을 체험하면 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삶 속에서 그 분에게 순종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체험은 우리의 성화를 증진시킨다. 그러나 되풀이하거니와, 체험은 성화가 아니다. 

우리들은 이런 모든 일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갑자기 진리의 모습을 깨달을 수가 있으며, 그러한 깨달음의 결과로 그들의 삶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오기 이전까지는 그들이 성화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거듭난 순간부터 그들은 성화되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그들의 성화를 진전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당신이 밭을 보고 있는 동안에 밀 밭이 싹을 튼 것처럼 그들의 성화의 과정에 뛰어 오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의 시작은 아니다. 우리는 성화가 체험이 아닌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변하며, 체험은 단속적이므로, 성화를 체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성화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XIV) 

당신은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조금씩 성장한다. 

이제 세 번째 질문을 다룰 차례이다: 성화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앞에서 생각해온 것들과 관련되는 질문이다. 성화를 체험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성화는 갑자기 일어난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앞서 펼친 모든 사유에 비추어 성화는 분명히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너희는 거듭 태어났다’,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다(고전3: 1). 요한은 ‘나의 자녀들’, ‘청년들’ 그리고 ‘아비들’(요일 2)을 말한다. 이 성경의 용어들은 성장을 가리킨다. 당신은 태어나서 갑자기 어른이 되지 않는다. 아니다, 당신은 거의 알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전진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것이 성화이다. 당신은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조금씩 성장한다. 

사람들은 구약으로부터의 비유를 좋아한다.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나도 비유 하나를 사용해보자.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 자녀의 역사는 한 영혼의 구원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번에 애급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애급 사람들은 홍해에 빠져 죽었다. 이제 이스라엘인들의 고통은 끝이 났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가나안으로까지 인도되었으나, 그들은 가나안에서도 고난을 받았으며, 그들은 성화된 신분을 가졌음에도 적과 싸워야 했으며, 문제와 어려움을 가졌었다. 그것은 바로 크리스천의 삶과 같다. 이것은 성경의 어디에나 편만한 하나님의 방법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영역에서 일하시는 원칙의 통일성보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없다.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 주님께서는 땅에 씨앗을 뿌리고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깨고 하는 농부의 일상 생활을 비유로 사용하셨다. 농부는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씨가 자라기 시작하였고 계속 성장하였다(막 4:26-29).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라고.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성화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왜 그렇게 성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서 원하셨다면 우리 모두를 단번에 전혀 죄가 없는 온전한 존재로 만드실 수 있었다. 아무 것도 그 분을 제지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그 분은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신약의 서신서들은 똑 같은 것들을 우리들에게 가르친다.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순간에 왜 사탄이 멸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왜 사탄이 계속 일하도록 허용된 것인가? 알겠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분은 종말에 그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의 때에 아주 간단하게 사탄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다만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지 않으셨을 뿐이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매너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망을 일괄하여 없애 버리지 않으셨는가? 그 분께서는 어느 날 그렇게 하실 것이다. 왜 크리스천들도 사망을 회피할 수 없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망을 없애지 않으셨는가? 유일한 답은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성화에 관련해서도 정확하게 똑 같이 적용된다. 하나님의 성화의 방법은, 우리들이 이제까지 알아보았고 도 더 분명하게 알게 되기를 소망하는 바, 거듭남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계속되고 또 계속된다; 우리가 갖는 체험들은 어느 것이나 성화를 촉진하며, 우리들은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한다. 우리는 전진하며 발전한다. 우리는 일년 전 보다 지금 더 성화되었어야 하며, 그 전진은 계속되어서 마침내, 영광 중에, 우리들은 흠도 티도 없이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 
(자료출처 
http://kidok.net/bbs/view.php?id=sinhak&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95&PHPSESSID=656b86335cabe160aad3137f21869858)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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