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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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1) :신분적 성화와 윤리적 성화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1) :신분적 성화와 윤리적 성화
로이드 존스의 성화론 
성화 : 상이한 견해들 


여기서 다시 주의를 환기 시키지만, 교리에 관한 이 강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상이한 국면들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교리와 관련하여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 이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크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에 이르렀다. 우리가 얻게 된 신분을 이렇다: 우리는 새 품성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거듭 태어났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 받았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렇다, 그렇다면, 죄의 문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우리들은 별안간에 온전하게 만들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신자의 생활 속에 죄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성화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루는 교리이다. 

이 교리에 대해서는 수 많은 상이한 견해와 이론들이 있기 때문에 매우 논쟁이 많으며, 성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다 성화가 정확하게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관련하여 쟁론이 많다, 성화는 어느 정도까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문제의 핵심이다. 특히 지난 200여 년 동안 많은 쟁론이 있어왔는데 그 주된 원인 제공자는 다름이 아니라 위대한 존 웨슬레 이다. 존 웨슬레는 그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이론을 발의하였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이를 가르쳤으며 그의 설교자들이 그것을 설교하도록 가르쳤다. 그것은 위대한 토론을 낳았는데 나는 똑같이 선량하고 똑같이 복음주의적인 크리스천들 간의 표독스런 토론을 낳는 것은 두려워한다. 

신학과 이 일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편의 존 웨슬레와 그의 보좌인 이며 조력자인 마델레이의 존 훌레처, 그리고 다른 한편의 조지 휘트휠드, 아우구스투스 톱레디 그리고 기타 신학자들 간의 위대한 토론을 읽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크리스천 신앙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중요하다. 그 때 시작된 토론은 그 후로도 다소간에 지속되어 오고 있는데, 이는 존 웨슬레가 여러 가지로 그 이래로 주장되어오고 있는 성화에 관한 여러 인기 높은 견해들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구세군의 교리도 존 웨슬레로부터 직접 도입한 것이다. 윌리암 부스는 감리교인 이었는데 그는 감리교회의 교리를 인수하여 그 교리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 중에 생긴 여러 가지 성화 운동들 모두가 존 웨슬레의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을 들을 때, 어떤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어떻게 믿든 뭐가 중요한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음을 잘 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당신은 존 웨슬레가 조지 휘트휠드 만큼 크리스천이었다고 믿는가?’나의 대답은 ‘그렇게 믿는다’이다. 나는 나아가서 조지 휘트휠드가 한 유명한 행사에서 받은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인용하고자 한다. 어느 날 오후 조지 휘트필드의 매우 힘있고 적극적인 지원자가 물었다, ‘휘트휠드 선생님, 우리가 조지 웨슬레를 천국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조지 휘트휠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요, 그는 매우 높고 고상한 신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나 나는 거기서 그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그러한 태도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화론(II) 

그 견해가 어떤 것이 던 간에 성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의하여 우리의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화에 대하여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신자인 크리스천은 항상 성경을 연구하여 교리라는 진리의 가장 성서적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러한 연구를 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귀찮다면, 그러한 일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진리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를 주장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람의 신학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가 군중들을 모우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대려 온다면 그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상 진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은 오직 결과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단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그럴듯한 교리가 당신 앞에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평가할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그것을 믿게 될 위험한 지경에 자신을 집어 넣고 있는 것이다. 인기 좋은 여러 가지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성공하는 것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올바른 논거를 공부하는 고통스러움을 회피하는 데 있다. 우리의 문전에 그들의 서적과 그들의 이론을 가져오는 사람들은 그들의 논거를 알고 그것에 관하여 연습하고 훈련을 받았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리를 모른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창피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상관할게 무어냐?’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러한 결과를 피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려는 성화론은 사람들이 성화에 관한 생각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오류가 종국적으로 그들의 성화를 막지는 못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화에 접근함에 있어서, 정의(definition)를 내리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자. 성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구 약 성경에서 성화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찾아 볼 수 있는데, 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자. 신학자들은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완전하게 동의하지를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은 밝은 광선처럼 ‘빛난다’ 를 의미한다고 하고 다른 이들을 그것은 ‘잘라 낸다’, ‘구별한다’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의미 모두가 성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련이 된다고 생각되므로 나는 두 가지 의미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라 내는 것이다. 구별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진정한 성화는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산에 있었던 후에 모세의 얼굴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빛남을 수반한다. 거룩함에는 빛남, 영광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 둘 다가 구약 성경에는 있다. 신약에서도 성화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단어가 구별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음에 유념해야 한다. 

성화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과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위한 구별함이다. 이는 신구 약 모두에 걸쳐서 성화의 중대한 의미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만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에도 사용됨은 참 흥미 있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산은 ‘성산’ 또는 성화된 산으로 불린다. 그것이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한 산이 되었다. 성전 건물은 거룩한 것으로 불리며, 그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다. 성전의 즙기, 도구 등은 모두 성화된 것으로 구별되어 거룩하게 만들었다. 

구별됨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이거나 불결하거나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러한 즙기는 일반적인 용도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일단 성화가 되면, 일반적인 용도로부터 구별되었다. 그러나 둘째로 그것은 또한 적극적인 의미로 성화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용도로 사용하시도록 하나님에게만 헌신되고, 받쳐지고, 제공되었다. 그런 의미에 관련하여 ‘성화시키다’라는 말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련하여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두 번에 걸쳐 그것이 발견된다. 첫째로 요한 10:36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정체에 대하여 주님에게 묻고 있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시는 가운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아버지께서 나를 성화시키셨다, 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는 ‘아버지가 사용하시기 위하여 구별하였다’를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 17:19, 주님은 말씀하신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을 수 있기 위하여 필수적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용하심에 맡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구별함과 하나님에게만 쓰여짐 이라는 이중 의미 속에서, 이 성화라는 단어는 움직이지 못하는 물건과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까지 사용된다. 

신분적 성화와 윤리적 성화 
(로이드 존스 성화론 III) 

또한, 당신은 ‘성화시키다’는 단어가 신자들에 대한 의미로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약간의 예를 들어보자.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큰 사명을 주셨다. 사도행전 26장 중 특히 18절에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다.‘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 중의 거룩케된 무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무리를 의미한다. 

가장 흥미 있고 중요한 절인 고전 6:11을 보자. 우리들은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성화가 칭의를 뒤따르는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고전 6:11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거룩함이 의롭다 하심을 선행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고린도 크리스천들을 세상 밖으로 취하여, 타락한 고린도 사회로부터 끄집어 내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 씻고 구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소용으로 구별된 것이다. 

히브리서 10:10에서도 거룩함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서 거룩함은 구별됨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히브리서 10: 14을 보자. ‘저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제물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여기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께서는 구별된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 중의 거룩하게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를 찾아보자: 베드로 전서 1: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이 말씀 중에서도 거룩하게 하심은 세상으로부터 취하여 구별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베전 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베드로는 여기서 출애급기 19장에서 사용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사용한 단어를 적용한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성화된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구별하셨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사역으로 이미 단번에 영원히 거룩하게 성화되었다. 

그러나 성화는 신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인 두 번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걸 맞는 우리들을 만드는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윤리적 의미,‘거룩하게 만든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위한 구별이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의미는 우리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 지는가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들을 더욱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우리들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우리 속에서 진행되는 순결케 함과 정결케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 성화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이다. 사람들이 ‘성화에 관하여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어떤 사람이 성화되었음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라고 물을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내부 청결화와 내부 순결화를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만들어 짐을 의미한다. 

의화와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로이드 존스 성화론IV) 

그리하여, 나는 이제 다음과 같이 성화를 정의한다: 성화란 그 분께서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님의 은혜스럽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분명하게 해두자: 그것은 그분이 칭의된 죄인 – 이미 의롭다고 여김 받은 자 – 을 ‘죄의 오염으로부터’ – 이미 이루어진 바, 더 이상 죄로부터가 아니라 - 구하는 성령님에 의한 은혜롭고 지속적인 일하심이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칭의가 해결하였다. 그는 의롭다고 선언되었다. 죄는 처리되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세력과 오염에 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 ‘그가 선한 일을 하도록 그의 모든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는 것’ 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칭의란 간편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칭의를 통하여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가 번 것이 아닌데 우리 구좌에 입금시켜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자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그분은 온전히 성화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드리신다. 카톨릭은 의화와 성화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번 기회에 소개하고자 한다 – 역자주.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 빠져있는 남녀를 보시면서도, 그들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다. 그것은 전가된(imputed) 의로움이다. 

그러나 성화는 나눠진(imparted) 의로움을 이야기 한다. 성화는 우리의 구좌에 입금되어진 의로움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지고 생산된 의로움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명백한 구분이다. 교부들은 전가된 의로움과 나눠진 의로움 간의 차이에 대하여 거의 습관적으로 많이 이야기 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이 우리들에게 친숙하지 않는 것은 우리들이 얼마나 저속해 졌는가를 말해준다. 그 용어들은 17세기, 18세기, 그리고 19세기 까지도 매우 중요한 용어들이었다. 금세기의 우리들은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우리들은 왜 위대한 용어들과 그들의 위대한 의미들을 상실하였는가? 

그러므로 성화는 우리들의 거듭남과 칭의 이후 죄의 문제를 다루는 하나님의 도이다. 성화에 관한 정의의 문제를 떠나기 전에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성화를 정의함에 있어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우리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 우리의 윤리적 상태와 상황의 관점에서 성화를 정의하도록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그들이 성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성화라는 용어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의 개념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화란 도덕성과 순결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성과 순결이다. 그래서, 내세울 수 있는 최고로 도덕적인 사람과 성화 되어 가고 있는 크리스천간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성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3가지 다른 견해 
(로이드 존스 성화론 V) 

성화의 정의에 대해선 이 정도로 끝내고 다음으로 가자.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성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청결하게 하고 순결하게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적으로 일치시켜가는 과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상이한 견해들의 핵심이 있으며 세가지 주된 그룹으로 분류되는 사상이 있다. 


첫째로 내가 온전주의자(perfectionist) 견해라고 묘사하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세상 속에서 온전한 크리스천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견해가 있다. 나는 정확을 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언어로 묘사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이 순간에 여러분은 무엇이 온전함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상이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음에 무관하게,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의 온전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이 이 첫 번째 그룹이 갖는 사상의 내용과 분파들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을 시도해보자. 그들 중에는 크리스천으로부터는 죄가 온전하게 제거되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의 정원에 들어가서 잡초를 보고 잡초의 보이는 부문만이 아니라 삽으로 잡초를 뿌리까지 파 내버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성화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온전하게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들은 한 해 또는 십 년의 기간 동안에 훨씬 많이 할 수 있으나, 온전함이란 당신이 이 순간에 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온전함의 슬라이딩 스케일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를 들면 유명한 Charles G. Finney과 그의 동료, Ezra Mayhem과 같은 소위 미국의 Oberlin School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존 웨슬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크리스천 남녀가 주어진 순간에 죄로 알고 있는 죄를 고의로 짓지 않는 것이다. 존 웨슬레에 따르면,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란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죄를 범할 수 있으나, 이미 죄라고 일고 있는 죄는 고의로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간과 순간의 상태이다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당신은 다음 순간에 범죄할 수 있으나 당신은 이 순간에는 온전하다. 그리고 그것은 죄라고 알고 있는 죄에만 해당된다. 웨슬레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이 모르고 죄를 짓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나중에 당신에게 알려 질 것이고, 그리고 당신이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순간에 그 죄를 당신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성화는 온전함을 의미하지만 절대적인 온전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른 이들은 죄로부터 온전하게 씻김을 받은 정결한 마음이라는 관점에서 성화를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죄라고 알고 있는 죄 그리고 마음 먹고 짐짓 지은 죄로부터의 씻김을 받은 마음을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나는 다시 성화를 ‘온전한 사랑’으로 묘사하기를 좋아하는 존 웨슬레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크리스천들은 죄인지 모르고 범죄할 수가 있다. 그들은 아직 연약하며 많은 면에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면, ‘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온전하다 할 수 있는가?’ 그는 만일 그들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 생활과 행실에서 비록 온전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다. 그들은 그 순간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다 들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웨슬레는 말한다. 나중에 더욱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순간에 있어서는 그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다. 우리가 보아온 바와 같이, 웨슬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온전함과 성화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의 특징은 성화는 순간적으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화를 열망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화를 간구하면, 그분께서 성화를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화를 순간에 눈깜짝하는 사이에 받을 수 있다. 온전주의자들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기를 즐긴다: ‘당신이 칭의를 받을 때에 당신의 성화도 받아야 한다.’그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험적인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은 소위 반작용의 법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17 및 18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이직도 인기가 있다. 이 견해는 죄의 제거는 믿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하게 죄의 제거를 가르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패배하기 위하여 일생을 통한 투쟁을 하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법칙이 있다. 이들의 가르침은 로마서 8:2를 기초로 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죄는 신자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리고 믿음으로 그분에게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죄지음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이다. 크리스천 속에는 죄의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것을 없에는 반작용을 하고 남을 정도로 더 크다. 그리고 많은 예화들이 사용되었다. 

Evan Hopkins 목사가 그러한 예화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유명한 두 개를 소개한다: 첫째는 부지깽이 예화이다. 부지깽이는 차갑고, 까맣고 단단하다. 그러나 이 부지깽이를 불 속에 넣으면 어떻게 변하는가? 빨갛게 되고, 뜨겁고 말랑 말랑해 진다. 그것을 불에서 꺼내면 다시 차갑고, 까맣고 단단해 진다. 이것이 이 학파의 성화에 관련한 가르침이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당신은 빨갛고, 뜨겁고 말랑 말랑하다; 당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전과 똑 같은 상태로 되돌아 간다. 

다른 하나의 예화는 구명대에 관한 것이다. 중력의 법칙은 무거운 몸을 물 속으로 가라 앉힌다, 한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수영할 줄을 모르면 가라 앉는다. 그런데 반작용의 법칙이 있다. 공기로 부풀린 구명대를 그 사람에게 입히면 어떻게 되는가? 그를 가라 앉게 한 법칙에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 사람이 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명대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옛 법칙이 작용하여 그는 가라 앉게 된다! 그는 구명대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 바라보고 신뢰해야 한다. 그것이 전체적인 영적 상태이던, 특정의 죄이건 간에 크리스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뿐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가 항상 승리하도록 지켜주실 것이다. 온전주의자들의 견해와 같이 이 가르침은 그것은 정상적인 경우, 경험으로 시작하여 과정으로 계속된다. 다시 말하면, 성화란 수령해야 하는 것이며, 순간에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나서는 그 경험 속에 거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 할 전부이다. 

세 번째 가르침은 성화란 우리의 거듭남의 순간에 시작되는 과정이며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지속되며 죽음을 지나서만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견해가 앞의 두 견해와 크게 다른 점은 이 견해는 성화를 칭의에 뒤이어 받을 수 있는 경험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다; 이 견해는 성화는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시작되어 우리의 육신이 최종적으로 영화를 입어 타락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로마서 8:22-23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화가 완성되는 것은 우리의 몸이 종국적으로 구속될 때인 것이다. 


이 가르침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Holiness by Bishop Rile를 읽을 것을 권면한다. 이 책은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한 여러 가지 다른 아이디어와 이론들을 다루고 있다. 내가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다시 말하거니와, 이런 가르침들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들을 분파 의식을 가지고 검토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방위하며 다른 가르침을 비난 하는 자세로 읽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자주 말하지만, 나는 존 웨슬레에게 크게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성화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빚진 자이다. 나는 그의 가르침 전부를 받아드리지는 않는다. 이것은 반드시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 중에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온전주의자들의 성화 및 거룩함에 관한 서적들을 읽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된 강조점들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그들의 저서를 읽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내 속에서의 성화가 진척되었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간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게 한 것을 감사 드린다. 


그러므로 온통 성경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저서들을 읽자. 그리고 성경으로 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냉정하게 그들의 가르침을 검토하여 이 문제에 관한 진리에 도달하도록 애쓰자. 우리들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복을 받아 풍부해지며, 우리들은 성화의 교리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의 목적은? 


19 성화 – 하나님의 일과 우리 몫 

우리는 성화의 교리에 관하여 세가지 다른 견해를 생각해 보았는데 이제 더 직접적으로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은 세가지 원칙을 매우 명백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그 세가 견해와 이론을 검증해야 한다. 

신구약을 통해서 어디서나 발견되는 첫 번째 중요한 원칙은 성화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이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3 은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것이 출발점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분께서 구약에서 하신 모든 일의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성화이다.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갈라디아 4:4)의 목적도 우리들의 성화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그 목적도,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도 우리들의 성화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것의 모적, 그리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이 성화이다. 

우리들이 이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더 많은 증거를 원한다면 요한 17:17을 묵상하라: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떠나려 하실 때에 그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 하셨다. 주님은 무엇을 기도했는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19절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란 말씀은 주님께서 그분의 아버지에게 ‘ 저는 저 자신을 아버지의 처분에 맡깁니다; 저는 당신께서 저에게 하라고 하신 이 마지막 일을 위하여 제 자신을 구별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마지막 일이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 상의 죽음이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성화 되도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2: 14)라고 말씀한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의 성화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성화 이하의 그 어떤 것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훌륭하게 읊은 시가 있다: 

그 분은 우리들이 용서 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네;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분은 우리들을 선하게 만들려고 죽으셨다네. 

-Cecil Frances Alexander 

그런데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십자가 상의 죽음을 용서에만 결부시키고 두 번째 부문은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고수해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성화는 구원의 모든 과정의 목적 이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회피해야 할 분명한 위험들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첫째로 큰 위험은 이러한 여러 가지 구원의 과정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서로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는 위험이다. 우리가 항상 강조해온바, 성경 전체를 통하여 살피면 칭의 성화 등은 모두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들 모두가 모여 하나가 된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은 느슨하게 연결된 연결되지 않고 조각 조각의 가르침들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결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제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구분하는 것과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유를 진척시킬 목적으로 성경에 따라서 성화로부터 칭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와 칭의를 분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의 과정의 부분이며,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의 부분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결코 성화와 칭의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결코 그 중 하나가 없어도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성화됨이 없이 의화될 수 있다거나, 다만 차후에 성화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비 성서적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의 위대한 바울의 선언을 보자,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사도는 이 구원의 전 과정이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서 일을 시작하실 때, 모든 일이 이미 완성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분리하는 의미로 구분하거나 구별하는 것은 크게 옳지 안다. 사도의 다른 선언을 고리도전서 1:30에서 보자. ‘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니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들에게 칭의와 성화와 구속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음의 이유 때문에 그들을 분리하여서는 안 된다; 즉 당신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다! 당신들은 주안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든지 밖에 거하든지 이다. 당신들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당신들의 것이다. 

우리들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역자 주: 이 번역 범주 밖의 주제임)를 다룰 때에 로마서 5 및 6장의 위대한 가르침을 매우 분명하게 보았다. 바울은 말한다: 당신들은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당신들은 그 분과 함께 죽었다. 당신들은 그 분과 함께 묻혔다. 당신들은 그분과 함께 부활하여 그 분과 함께 천국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 분은 우리들에게 칭의 뿐 아니라 성화와 구속(영화)이 되신다. 그 분이 전부이며 모든 것 중에 계신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고, 이 둘은 본래 관련성이 없다고 말하는 분들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리스도가 나뉘었는가?’ (고전 1: 13) 라고 물을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으로 이루신 모든 일, 구원의 모든 일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의 성화이다. 

성화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
(자료출처 
http://kidok.net/bbs/view.php?id=sinhak&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94&PHPSESSID=656b86335cabe160aad3137f21869858)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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