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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개혁주의 성령론>

존 오웬의 <개혁주의 성령론>


존 오웬의 <개혁주의 성령론>

이 글은 존 오웬 목사님의 <개혁주의 성령론>에서 중생과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설명한 글이다. 오웬 목사님은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증명해 나간다. 특히 존 오웬 목사님은 중생은 새창조의 역사로서, ‘성령의 주입’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과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적인 원리,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 또는 은혜로운 능력들이, 중생으로 인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 또는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주입이라는 개념은 오웬 목사님의 중생론의 핵심이다. 이 개념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중생론에서 더욱 발전된다. 특별히 존 오웬 목사님에게나 에드워즈 목사님에게나 성령의 주입된 은혜는 새로운 삶의 원리가 된다.

“중생의 원리가 우리들 가운데 주입될 때 우리들의 심령을 전면적으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는 모든 영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리는 옛 사람을 싫어하고 부패한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의 원리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 6:6).”

그러나, 존 오웬 목사님은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과 신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성령의 감화라면, 신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성령의 주입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웬 목사님은 구약시대 때도 중생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신약에 비해 미약하다고 주장한다. 신약 시대 때는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구약 시대 때 중생의 사건이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의미가 없거나 축약되게 된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때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십자가를 지고 오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롬 3:23)라고 하셨다. 즉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을 주셔서 의롭게 해주시고,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한편 오웬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영광>에서도 구약과 신약을 구별하지 않고 적용하기도 한다. 이는 존 오웬 목사님의 한계이기도 하다.

청교도의 왕자(황태자)라 불리우는 존 오웬 목사님의 ‘성령론’은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따라서 에드워즈 목사님의 ‘성령론’과 비교해서 보면 매우 유익할 것 같다.

* 차례

1. 새 창조의 완성

2.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1) 중생의 성격
(2)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3)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4) 중생은 생활의 변화로 되어지지 않는다
(5)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 아니다



제1장

새 창조에 있어서 중생시키는 성령의 사역

새 창조의 완성 /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구약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더욱 명백한 성령의 사역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생활이 변화도니다고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변혁이 일어나고 중생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을 동반하지 않는다. 중생의 교리는 중요하다.


1. 새 창조의 완성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 준비되고 형성될 때 성령의 사역이 있었다는 시실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고 복음 국가와 교회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께서 하신 일의 전부는 아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준비하셨던 것같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을 준비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룩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준비하셨던 것같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을 준비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이룩하셨다. 성령께서는 옛날 창조하실 때에 역사하신 것같이 새로운 창조 때에도 역사하셨다.

첫 번 창조 때에 모든 만물은 흑암과 생명이 없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도, 생명의 근원도, 생명의 기미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성령께서는 준비된 물질 위를 운행하시며 생명이 필요하고 생명을 가져야 할 모든 것들에게 생명의 요소를 주시어서 그것들로 하여금 활기를 띠게 하셨다.[“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이것도 새로운 창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어두움과, 죽음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영적인 생명의 요소와 그 기미까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상태 하에서 성령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게 되었다. 즉 의로운 사람들이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민들과 유효적으로 교통하시기 위하여 영적인 생명의 요소를 그 선민들에게 부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민들의 중생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셨다. 이제 성령께서 행하신 중생의 사역을 살펴보자.


2. 성령의 특별 사역으로서의 중생

(1) 중생의 성격

중생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3~6).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은 고대 유대 교회의 교사이며 책임자로서 유식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이러한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셔야”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와서 거듭나는 문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의 믿음과 순종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중생하기 위한 요소들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아신다.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 중생이 필요한 것도 잘 알고 계신다.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중생에 대한 교훈은 제일 첫 번째 있었던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중생에 대한 성격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주님은 중생의 이유와 중생의 효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중생은 물과 성령에 의하여 된다고 하셨다. 제일 주요하고 유효한 요인으로서의 성령과, 중생의 증거와 표시와 보증으로서의 물로서 중생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맨 처음에 하신 약속의 증표이기도 하였다. 물로 씻는 예식, 즉 세례는 세례 요한에 의해 사람들에게 이미 가르쳤던 교리이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다시 말씀하신 것은 배로 증가시켜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물로 말씀하셨고 종종 그렇게 약속하셨다.

중생의 사역에서 성령은 유효적인 원인이 된다. 따라서 중생은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3:8). 똑같은 목적에 대한 말씀이 또 있는데 그 말씀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느니라”(요 1:13)이다.
중생은 피나 육이라고 하는 자연적이고 육적인 방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온전히 거부되고 다만 하나님에 의하여 유효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한 것은 육적인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과 성령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중생은 영적인 문제이며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 즉 다시 태어난다고 부르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요3:6).

이것은 비슷한 언급인 동시에 정반대의 언급이기도 하다. 영으로 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활동적이며 활기차게 살게 된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 새롭게 살아났기 때문이다(엡 2:1,5). 그래서 지난 날과는 다르게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이기” 때문이다(요 6:63;롬8:9,10).

같은 진리를 주장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4-7).

이러한 말씀들을 살펴볼 때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도 분명히 구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사랑에 있다. 이러한 인자하심과 사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우리에 오신 바 되시고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중보를 연결시키시는 유효적이며 직접적인 요인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이 유효적으로 회복되고 중생의 씻음이 되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정화하여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분이시오 중생의 창시자이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고대 사람들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기 위해 힘찬 논쟁들이 있었고 그 사역의 위대성과 권위에 대한 격론들이 있었다). 온전한 기독신자라고 한다면 대체적으로 이러한 진리가 조롱을 받고 파괴되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이 진리를 더욱 입증하고 옹호하여야 한다. 나는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중생의 교리를 완전하게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겠다.

중생에 관해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루었으므로 지금 내가 다루고자 하는 점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여러 가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원리를 확고히 세우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격렬한 공격과 독성을 내뿜는 주장에 대하여 변증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1]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 어떤 사람들이 중생하였다는 구약 성경의 중생에 대한 교리, 또는 중생에 관한 계시는 그렇게 선명하지 못하다. 선명하지 못하다는 말은 중생에 관해서 언급된 복음서의 밝고 분명한 내용을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분명한 복음서의 언급은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중생의 교리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에 니고데모는 감탄과 놀라움으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라고 소리치며 질문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고 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중생의 교리가 이미 알려졌는데 어찌하여 선생 된 사람이 모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중생의 교리는 성경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그렇게 중요하고 기본적인 교리에 무식하니 그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무와 교리를 가르치지만 말고 자신의 무식함을 깨닫고 자신이 먼저 성경을 배우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과 대화가 없었더라면 중생에 대한 교리와 그의 무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이미 구약 성경에 언급되었고 약속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한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돌같은 마음을 버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약속하셨다.

[2] 그러나 우리가 보는 대로 중생의 교리는 그렇게 밝고 선명하게 선언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가르치는 당시 최고의 교사였던 니고데모 자신도 중생에 대하여 아는 바각 없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생이란 단지 삶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말씀에 따라 다스림을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니고데모도 만일 모세와 선지자들의 책을 읽었다면, 분명히 그의 삶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제안하신 것은 그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전에는 그러한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이름으로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지했던 것이고 신성모독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모르지만 은유적으로 삶을 고쳐야 한다는 표현에서 중생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자유로운 일인지 모른다. 만일 중생이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 이상이 아니라면 그들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생에 관해서 가르치신 것은 유대의 선생들에게서, 이방의 철학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는 흑암과 모호한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던지신 것이다.

비록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분명하고도 실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도덕적 의무를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중생의 교리는 전에 그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우월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중생이 도덕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였다면 그것은 어둡고 무지한 가운데 있다고 보겠다.

신약 성경을 기록하는 데 의도되어진 사람들의 영혼 위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신비함과 은밀함은, 삶을 개혁시키고 도덕적인 훈련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적인 기능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 서신과 같이 세상에 이미 출간된 모든 책 속에는 중생의 교리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1

우리는 중생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을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사람들에게서도 전달받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밝고 분명하게 나타난 사실을 본 그대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생과 중생의 교리는 구약성경에도 있다. 하나님의 모든 선민들은 그들 당대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복음서를 보면 중생에 관한 교리는 더 크게 확장되어 옛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중생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생의 사역은 더욱 분명하고도 독특하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중생의 영혼의 의사 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교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고치시되 우리의 병든 인성을 내적으로 치료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싸매 주시고 부패한 본성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교정시켜 주신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복음서에 더 이상의 충분하고도 평이하게 선포된 중생의 교리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슬픈 본성들은 진리의 빛과 증거를 거부하고 성령의 위대하고 거룩한 사역을 멸시하고 적대하기 때문이다.2
 
(2) 중생은 모두 동일하다

중생이란 지금까지 존재하여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또는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존재할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똑같은 사역에 의하여-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중생의 역사는 외적으로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되어 일어난다. 그 어떤 명령도 이 방법을 제한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이란 ‘썩지 않게 하는 씨’라고 말씀하셨다. 때때로 어린 아이들에게는 말씀이 없이도 중생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울의 경우와 같이 특별한 역사도 있고 일반저인 방법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방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는 제도이다.

중생의 사역은 그 역사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자각) 다양한 면이 있는가 하면 은밀하여 외적으로 나타나지 않아 우리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요 3:8).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에서, 또는 양심 가운데서 분명한 증거와 표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속에 ‘나타내셨다’고 하였다(갈 1:16).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하셨다(고후 5:17). 즉 ‘거듭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안다. 많은 사람들이 흑암 가운데에 살고 있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사 1:10). 그러나 그들은 어두움 속에서 행하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은 다양한 방면에서 성장하고 완전을 향해 역사한다. 어떤 사람은 속도가 빠르지만, 또 어떤 사람은 늦다. 뿐만 아니라 열매도 적은 것을 맺게 된다. 성령의 사역은 본성적으로 한 분의 사역이요 같은 사역이지만 나타나는 모양은 다양하다. 구약 성경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선민들의 중생이 다르고 신약 성경 속에 있는 성도들의 중생이 다르다. 중생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한 사람) 기적적으로 회심하는 경우도 있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신비한 은사를 받아 일시에 수천 명씩 회개하는 경우도 있다.

신비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중생하는데, 여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성령에 의해 중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결단코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고집한다. 이것은 대단히 무식한 생각의 결과이며 잘못 믿는 것이다. 저들은 성령의 사역을 낡아빠진 옛날의 기적으로 취급하고, 이제는 이성적인 법칙으로 이해하고, 이성적인 방법에 의해 중생한다고 주장한다. 중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유효한 사역으로 중생을 경험하였음에도 헛된 말을 하는 것은 믿음 없는 소치인 것이다. 중생의 사역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태가 모두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그 이상의 것은 없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악함에는 그 차이가 있으나, 그들의 상태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멀리하고 한 가지로 저주 아래 있다(시 51:5, 요 3:5, 36, 롬 3:19, 5:15, 엡 2:3, 딛 3:3, 4). 본질상 성령의 사역은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길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방법은 성령의 역사밖에는 없다.

[2] 중생한 사람의 상태는 모두 같다. 중생의 정도는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아름답다.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소유했고 아버지의 영향 아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사이에 거룩한 정도의 차이나 성화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중생의 정도의 차이는 없다.

[3] 중생의 유효한 사역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에 의한 역사이다. 중생의 사역은 우리들의 내적인 부분을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시고 내적으로 성령의 은혜와 교통하는 것이다. 동시에 외적으로는 성령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준에서 볼 때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높은 체하고 성령의 사역을 멸시하고 그들의 생각을 고집할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을 시도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보다는 자기의 관심거리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살고 있다. 그들은 위장된 기쁨을 소유하며, 거듭나야 하는 진리를 그들의 이성으로 경멸하고 새 생명을 질시하며 산다. 하나님을 따라 인내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참지 못하시고 벌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요구하고 가르치는 대로 증거하고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된 것이 무엇이며, 참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해야 한다.

(3) 중생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란 세례 의식에 참여함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면서 세례 의식이 중생하는 데 요긴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허황되고 미런스럽고 주제넘은 것이다. 세례를 받아야만 중생한다는 생각은 죄용서를 받고 거듭나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창조적으로 중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란 죄인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turning to God).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사역에 의해 하나님을 따르며 섬기는 것을 말한다.

중생이란 단지 외적인 표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도나 방법에 의해서 중생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외적인 것들은 본질적으로 수단과 표시인 것이다. 세례란 믿음의 교리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베풀어지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경우를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

세례 의식의 외적인 시행은 물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다. 물로 씻는다는 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례는 양심을 씻어 선하게 하는 표이다. 죄로부터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도덕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거룩한 순종을 하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히 9:14; 롬 6:3-7). 사도 바울은 외적인 의식과 중생을 평이하게 구별하여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자뿐이니라”(갈 6:15).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할례라는 것은 모세 율법의 의식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무할례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선포된 복음에 참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구별하여 언급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즉 중생한 자가 구원에 참예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세례받는 것이 중생하는 것이라면, 모든 세례받은 사람은 반드시 중생이 필요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자면, 마술사 시몬이 전도자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중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중생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행 8:12-24). 그가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중생하지 못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보고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았다(행 8:17). 시몬의 경우를 볼 때 분명히 그는 세례를 받았지만 새롭게 중생은 하지 못한 기록을 볼 수 있다.

(4) 중생은 생활의 변화로 되어지지 않는다

중생은 삶과 행동에 있어서의 도덕적인 개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중생을 모든 알려진 실례들로 확대해서 생각하려고 한다. 음탕한 사람이 절제하게 되고, 약탈자가 의롭게 되고, 교만과 부정한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에서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즉 모든 실례를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천성과 같은 것으로, 또는 가장 엄격한 도덕주의자의 규칙으로 규정된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중생을 이 세상에서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서, 노력과 정확과 신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인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므로”(벧후 2:20)와 같은 말씀을 복음적인 설교로 듣거나, 또는 그런 교리를 복음으로 들음으로 설득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 위에 믿음과 회개의 공언과 함께 세례를 추가한다고 해도 그것이 중생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이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한, 우리들 중에 몇몇이, 그들의 지리멸렬한 생각과 궤변에 가까운 표현을 우아하게 만들어, 도덕성인 체하는 주장을 여기에 확대하여 포함시킨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실제적인 의로움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선천적이고 타고난 의로움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을 부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복음을 뒤엎는 자이며, 성령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전 역사를 부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야만 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주장이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거부되기도 하고 조롱받기도 하였다. 우리의 주장을 거부하는 자들은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의 적이라고 불리운다. 우리는 교리에 의해서,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도덕적으로 반대 받고 배척받는다. 그러므로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심판하시고 선언하실 것이다. 만일 저들이 관심을 가지고 시종일관 진리에 대하여 신앙을 고백한다면 양심적으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어떤 법령을 범할 자유를 소유하지 못했으면서도 저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리나 주장보다도 부패하지 않은 그 어떤 자유를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우리들의 열매(결과)에 의해서 우리들의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우리들의 교리를 부인한 자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단언하는 것은 우리들의 윤리나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서 계획이 없다 하더라도 기독교 윤리와 도덕은 앞으로 개선된다고 하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은 올바른 기초 위에 정착되어 무성하게 성장할 것이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에게는 선을 행하는 선한 사람이 또한 증가될 것이다. 무지하거나 타락한 사람들의 소동과 소요에 의해서 이러한 계획이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내려놓고 경멸하고 거부하고 논쟁만을 일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성공의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는 사람이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에는 새롭고 참된 영적 요소가 그 안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란 단순히 삶과 변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증거하고 확증하였으나 다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이 삶의 개혁은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인 의무이고, 필연적으로 요구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중생이나, 또는 중생을 포함하고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의 전 과정과 복음에 따라서 중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삶의 개혁안에 중생의 여지가 있거나, 중생이 그것으로 구성된다고 실제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후에 하나님께도 선언하실 것처럼, 하나님께서 수용해야할 의무로서 포함시키지 않을, 실제적-복음에 대한 순종에 관한한 외재적 것(삶의 개혁)을, 중생이라고 설명하고 묘사한다.

[2] 분명하고 확실한 개혁이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하게 일어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불완전하게 일어나는데, 개혁의 요소는 분명히 신실한 것이다.
중생을 수동적이거나,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고려하기에 앞서 묘사된 원리가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삶의 개혁이 항상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없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몇 명 사람에게는 더욱더 완전하게 일어나고, 몇 몇 사람에게 불완전하게 일어나지만, 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믿을만하다. 왜냐하면 본질상 같은 은혜가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등급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그 관심과 열심의 정도의 다소간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삶의 개혁이 다양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분명하다.

[3]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차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중생이 우리의 성정의 영적인 삶의 개혁을 포함한다고 믿고 말한다. 현대 소시니언들은, 중생을  도덕적 개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성정의 회복이 삶의 도덕적 개혁을 낳을 것이라고 분명히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이러한 삶의 도덕적 개혁이 우리 성정의 영적인 회복으로부터 나온다가고 여긴다면, 이러한 차이는 문제가 안 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 믿음의 조상들이 주장한 것은 먼저 성령을 받음으로서, 모든 은혜가 그에게 나타나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비성경적으로, 더 나은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며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위한 기회를 얻기 위해, 혼동스러운 결과와 원인들, 습관과 행동, 기능과 동력 그리고 임시적인 조치들, 주입된 원리들과 요구된 습관, 영적이고 도덕적인 은혜와 습성들을 말하려고만 한다면, 나는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적인 원리, 주입된 은혜의 경향성, 또는 은혜로운 능력들이, 중생으로 인해 요구되어지거나, 또는 그 안에 성령의 역사 또는 산물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태어난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중생에 있어서 이러한 특성은 아주 분명하다. 이에 관해서는 성경에 풍부하게 증명되어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질, 새로운 능력, 새로운 힘으로 새롭게 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을 ‘신의 성품’이라고 부른다(벧후 1:4). 이 신의 성품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 가운데 주관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누어가졌다는 뜻도 아니다. 신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은 사역의 요소이며 신적이며 영적인 요소이다.-습관적으로 거룩한 요소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들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여기에 보면 중생의 사역이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기초는 우리의 심령으로부터 새롭게 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또는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12:2).

중생의 원리가 우리들 가운데 주입될 때 우리들의 심령을 전면적으로 변화를 시키기 때문이다. 중생의 원리는 모든 영적인 행동과 도덕적인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리는 옛 사람을 싫어하고 부패한 본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의 원리는 모든 행동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롬 6:6).

중생의 원리는 누추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게 하며 우리의 말씨를 근원적으로 새롭게 구사하도록 이끈다. 왜냐하면 중생의 요소는 사람의 말씨까지도 다르게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새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이며 유효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다. 창조의 역사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중생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은 누구든지 새로운 창조력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인데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어진다. 그러므로 중생은 단지 삶의 개혁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아심이니라”(엡 2:10).

하나님은 우리들 속에 하나님을 따라서 선행을 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새 사람이란 “의 안에서 창조된 사람이며 진실한 거룩함 속에서 창조된 사람”을 뜻한다. 이 사람은 천진난만함 속에서 창조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란 삶이 개혁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덕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결코 선행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그의 전 인격이 의롭고 바르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중생(복음적으로 인생이 개혁됨)하여야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눅 6:43). 나무가 존재하는 본질은 열매를 맺는 데 있다. 열매가 나무의 본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의 본질(품질)을 바꾸는 것이다.

나무의 형편에 따라 그 열매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 3:30)는 말씀처럼 좋은 열매(결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 본성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중생의 은혜와 택함받은 자들의 순종과 거룩함을 구별하고 있다(겔 36:25;렘 31:33;32;39).

즉,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우리들의 본성을 씻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다. “돌같은 마음을 제하여 버리시고 살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법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기시는 것이고, 우리들 속에 영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유효한 결과에 의해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고 하나님께 순히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말씀들이 성경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롬 6:3-6;골 3:1, 5;엡 2:10;4:23 등).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역이 성경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만일 어떤 사람의 삶에 변화가 있는데 도덕적인 부분에서만 변화가 있다면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영적인 교훈이 분명하게 성취도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인 범위에서만 영향을 받은 것이지 온전하게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온 영과 몸이 완전히 성화도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원인적으로, 유효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언급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중생이란 명칭도 없고, 약속도 없고, 의미도 없고 능력도 없고,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는 무례한 펠라기안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파괴시키는 자들이다.

이러한 무모한 발상들은 원죄를 부인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만일 사람이 본래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영적으로나 내적으로 복구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죄 짓는 습관을 버리고 삶의 변화가 있을 때 언어가 바뀌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중생이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영적인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들의 완악한 고집을 내버리고 새 생명의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우리들의 무질서한 기질들이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정면으로 반대하던 견해가 바뀌어져서 초대 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고 경험 많은 신자들의 체험을 하게 되어 무지한 자리에서 확신의 자리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5)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인 중생은 열광적인 황홀경이나 광희, 또는 음성 비슷한 소리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일부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 가장된 적이 있었고 잘못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위장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들이나 이러한 것들을 기대하도록 가르치는 교훈들이 묵인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회심하는 것같이 중시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에 거룩하게 되는 것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성화를 중상하고 잘못된 것인양 비방도 하였다. 물론 우리들의 글이나 가르침이 충분히 증거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들의 견해가 부정적인 원리처럼 여겨졌었고 성령은 다만 그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에서 역사하였고, 사람들의 본질에 동의하는 정도에서 역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성령은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을 사용하신다. 악한 영이 사람들의 몸과 씨름하는 것같이, 성령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이성을 사용하셔서 합리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는 진리의 영을 받는다. 실로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의 심령을 일깨운다[고대 사람들은 이것을 항상 은혜의 영감이라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창조적인 능력 이상의 것을 부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와같이 성령은 기록된 말씀과 같이 역사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들의 영혼의 능력 위에 강압적인 힘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본성에 알맞게 우리들의 능력 안에서 능력에 따라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지만 중생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을 세상은 이미 보았다(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광적이며 열광적이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예는 예후에게도 볼 수 있다(왕하 9:11).

물론 예수님도 미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적이 계셨다. 특히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여 붙들러 나갔다는 기록이 있다(막 3:21). 또한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서 베스도가 미쳤다고 하였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에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행 26:24, 25). 지혜서 저자들도 이러한 표현을 하였다.

성령의 사역인 중생은 복음을 전하고 듣는 자들에게서 많이 언급 되었고 생각하게 되었다. 복음 전파자들은 특별한 이유에서 중생에 대하여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역을 할 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이며 이것은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은 성도들이 회심하고 믿게 될 때 자신을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말할 때 그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몬 10). 주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문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26:17,18).

이것은 또한 우리들의 목회 사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의무와 사역을 이해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중생의 교리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고, 중생의 성질, 원인, 효과, 그리고 확증 등은 목회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옳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역자는 부끄러운 일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성령을 격노케 하고, 경멸하고, 비방하고, 모욕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은 지루한 기차와 같다고 말하고, 중생은 파악하기 어려운 과정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머리를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유인하고, 경건한 슬픔으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굴욕적인 징조가 있다”고 중상모략한다. 저들은 특별한 사람들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도전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섣불리 이러한 자들을 반격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진리로부터 멀어져간 자들과, 종교의 힘에 떨어져 나간 자들과, 복음의 원리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과, 종교의 힘에 떨어져 나간 자들과, 복음의 원리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내버리고자 하는 자들은 우리들의 개혁교회의 온전한 지위에 이르지 못하고 슬프고도 불길한 조짐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자신을 바로잡고 억제하지 않는 한 소망이 없는 것이다. 내가 단언하는 것은 저들의 본성을 바로잡는 길은 모든 복음 전파자들의 의무이며 책임인 것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저들에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중생-의 본질을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더 이상 도전하거나 중상하지 못하도록 복음 전파자들은 그들의 직임을 잘 감당하여야 한다.

복음 전파자들의 말을 만일 저들이 듣는다면 “죄와 허물로 죽은”상태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자들이라면 저들은 중생의 과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중대한 사역을 게을리하고 소홀히 여기기는 것은 정신이 잘못된 사람일 것이다. 중생의 교리에 대해 무지하고, 하찮게 여기고, 중생의 경험을 그 심령에 사모하지 않는 자는 생명이 없는 자이며, 우리들 가운데 중생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역자는 무익한 사역을 한 자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르칠 필요가 있는 것이고 또 들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 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하는 점을 모든 기독교 교수들이 개인별로 연구하여야 한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이 저들로 하여금 방해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저들에게 눈가림을 하고 속이는 자들은 지옥으로 갈 자들이다. 이러한 교리는 우리들에게 이미 평범하고도 충분히 계시되고 가르쳐졌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의무와 권면이 중요함을 알았고 우리의 본성과 관심이 무엇인가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어리석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행할 수 없고 나태하고 태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러한 문제에 속아 넘어갈 사람들이 있다는 큰 위험성이 있고, 이 일로 인하여 영원한 상태로 떨어질 요인도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들이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서 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듭났든지 거듭나지 못했든지 간에(요 3:6) 아직도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령론>, 존 오웬, 여수룬, pp.177-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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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구원> '38장 존 오웬의 중생론'에는 오웬 목사님의 거듭남의 정의와 그 특징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2. 거듭남의 정의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 마음속에 비추어진 구원하는 영적인 빛에 의하여 우리 마음속의 타고난 무지와 어둠과 소경됨이 제거되고, 영적인 생명과 의의 새로운 원리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 의지의 부패함과 완고함이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 속에 부어져서 우리 정서의 무질서함과 반역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은 새로운 원리의 주입
"거듭남에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적인 생명과 빛과 거룩과 의로움을 갖기 위하여 영혼과 영혼의 기능 속에 새롭고, 실제적이고, 영적인 원리가 주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그것과 정반대되는 원리, 즉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을 대하여 적의를 갖게 하는 타고난, 습관적 원리를 축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2) 오늘날에도 성경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불경한 일이고 극도로 경솔한 일이 아닌가? 교회의 고귀함은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말씀에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에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가! 사도는 다방면으로, 서신을 기록함으로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었다. 사도라 기록된 글 가운데에서 실수를 하였거나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일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수를 하시거나 죄를 지으실 수 있겠는가?-[Ed.] [본문으로]
몇몇 사람들이 중생이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처음에 이것을 뒤집어엎으려고 한 사람은 펠라기우스이다. 그는 일반적이고도 널리 이 교리를 흐리게 하고 넘어뜨리려고 책략을 썼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그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많은 사람들을 속였다. 그는 합법적으로 사제들의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교회를 그의 잘못되고 독소가 있는 견해로 멍들게 하려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경건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을 세우시지 않으셨다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 우세할 뻔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등장하여 그의 잘못을 만천하에 드러내므로 그의 괴변을 꺾여 버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들이 우세하였으나 뒤에는 저들이 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의 주장은 휴지처럼 찢겨져 버렸고 저들의 어두운 열매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다. 그래도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박멸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남아있어서 사람들을 미혹한다. 비록 펠라기안파들이 지금도 펠라기우스를 추종하면서 배우고 경건하게 살려고 한다고 하나 결국 저들은 애매모호한 속으로 떨어져 헤매이는 것뿐이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godlysalvation/125)


 







esesang91.com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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