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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Was Calvin a Calvinist?)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Was Calvin a Calvinist?) Richard A. Muller
(Calvin Theological Seminary, USA)
자료출처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
 
문제제기: ‘칼빈주의’에 대한 여러 이해들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라는 늘 제기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물음 자체가 종교개혁 시대와 종교개혁 이후의 정통주의 시대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잘못된 여러 현대적 개념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 나는 앞서 던져진 물음의 배후에 잠복해 있는 사안들을 탐구할 것이며, 연속성과 불연속성뿐만 아니라 신적인 작정과 예정론과 소위 제한적 속죄론 같은 교리들에 대한 개혁주의 입장 진술에서 일어난 발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를 주목하되 칼빈이 가지는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의 입지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상당히 유명한 ‘튤립(TULIP)’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에 어떤 단서를 달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의 물음에 간단히 답한다면, ‘그렇다’, ‘아니다’, ‘아마도’ 정도일 것이다. 이 모든 대답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자의 이해에 의존할 것이다. 사실 질문 자체가 심각한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답변은 혼합적이거나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칼빈주의’ 및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들은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으며 그 이해에 따라서 물음을 묻는 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결정될 것이며,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도 결정된다.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는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한 칼빈 자신의 입장, 아마도 예정론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서술하는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대체로 사용되어 왔으며, 칼빈의 추종자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였고, 개혁주의 신학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했다. 이와 유사하게 ‘칼빈주의’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첫째, 칼빈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들을 가리키되, 어떤 경우에는『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칼빈의 신학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였다. 둘째, 때때로 이것은 칼빈을 추종하는 자들의 신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셋째, 나아가 ‘칼빈주의’ 라는 말은 ‘개혁주의’ 혹은 ‘개혁주의 전통’의 유사어로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다.

 
1. 칼빈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가리키는 ‘칼빈주의’
 칼빈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뜻한다는 ‘칼빈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를 푼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즉 ‘그렇다, 당연히 칼빈은 칼빈주의자다.’ 이는 ‘칼빈주의’ 및 ‘칼빈주의자’가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심지어 철학적 각종 사안들에 대한 칼빈의 특별한 입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예정론에 대한 칼빈의 여러 글들을 번역한 헨리 콜이 예정론 글모음집 제목을『칼빈의 칼빈주의』로 정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런 용법은 피터 툰과 바질 홀 같은 학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홀은 ‘칼빈주의’ 용어의 의미를 제한해서 소위 완벽하게 ‘균형 잡힌’ 칼빈의 1559년판『기독교 강요』신학에 적용하는 과도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다양한 문제들을 수반하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는(노골적인 의도성을 가지고) 칼빈을 유일한 칼빈주의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런 접근법은 1559판『기독교 강요』에 어떤 기준이 적용되어 왔는지를 묻는다. 이는 쯔빙글리, 오클람파디우스, 부써, 불링거, 버미글리, 무스쿨루스, 우르시누스 및 칼빈과 함께 개혁주의 전통에 속하는 다른 인물들의 ‘다소 균형이 떨어지는’ 신학과는 달리『기독교 강요』는 ‘완벽하게 균형잡힌’ 신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기준이란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접근법의 여러 요소들에 대한 개개인의 신학적 기호일 뿐이며 이는 마치 칼빈의『기독교 강요』가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벌카우어 혹은 어떤 다른 현대 신학자의 현대적 신학 시스템의 원형인 것처럼 역사적 문맥을 이탈한 현대적『기독교 강요』이해로 이어지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 이해, 그의 기독론 중심적인 관점, 혹은 신비로운 연합 개념에서 발견되는 일이라고 주장되는 그 균형은 칼빈의 동시대 인물들의 사상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통일성 있는 교의학적 중심성’이 칼빈의 사상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을 옹홓하는 자들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런 중심성은 실제로 칼빈의 사상 안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통일성을 추구하는 접근법은 칼빈을 유일한 칼빈주의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칼빈의 칼빈주의를 슐라이어마허 사상의 원형, 바르트 사상의 원형, 벌카우어 사상의 원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소 매끄럽지 못한 용어를 개발하고 있다).

 
 만약 신정통주의 혹은 다른 주제들과 관련된 통일성 문제의 현대적 미신들이 제거되면 보다 심화된 문제가 등장한다. 즉 칼빈주의를 칼빈 자신의 고유한 교리들로 규정할 경우에 칼빈 안에서 그만의 고유한 교리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칼빈의 예정론’, ‘칼빈의 기독론’, 혹은 ‘칼빈의 성찬론’ 같은 탈문맥적 주제설정 및 해석을 시도하되 마치 칼빈이 실제로 전혀 새로운 교리라도 제안하는 듯이 주장하는 여러 문헌들을 살펴볼 때에 극명하게 확인된다. 우리는 16세기 제네바에 입성한 유일하게 고유한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를 성한 몸으로 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유하고 개별화된 교리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칼빈의 목표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칼빈의 예정론에 어떤 고유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을 이어온 과거 인물들의 문헌에서 발출한 요소들을 자기의 신학적 골격에 맞도록 융화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 할지라도 실상은 칼빈이 부써, 비레,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등의 신학적 체계와 놀랍도록 유사한 골격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아담과 작정의 관계와 같은 주제처럼 여러 부분에서 상이성을 보이는 불링거의 신학적 체계도 칼빈의 가르침과 확연한 밀착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칼빈의 성찬론에 독특한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부써와 멜랑톤의 입장에서 도입한 내용들도 대단히 많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공통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단지 말 그대로의 고유한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어떠한 신학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며, 신학을 구축하고 싶은 정도로 충분한 관련 동기들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얻게 될 신학은 칼빈의 신학이 아니라 잘게 다져진 재료들을 가지고 뒤섞어서 만들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일종의 줄리아 차일드식 교의학적 혼합물 정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칼빈주의를 칼빈의 고유한 신학으로 규정하는 것은 궤변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이 가진 보다 심각한 마지막 문제는 이것이다. 즉 우리의 물음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이후의 모든 인물들이 속한 신학적 전통이 칼빈 자신들의 신학을 토대로 세워졌다는 것과, 칼빈의 신학, 특별히『기독교 강요』1559년 최종판과 동일시되는 신학이 그 전통의 회원가입 여부를 좌우하는 근본적인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물음의 유형은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이 쯔빙글리, 부써, 오클람파디우스, 불링거 등을 추종하지 않고 오직 칼빈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했거나 되어야만 했다는 것과, 칼빈을 추종함에 있어서도 칼빈의 여러 소책자, 논문, 주석, 설교 및 1539, 1543, 1550년판『기독교 강요』전반에 나타난 신학이 아니라 오직『기독교 강요』1559년 최종판만 따른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러한 유형의 이해는『기독교 강요』에만 오로지 또는 주로 기초하고 칼빈의 선행자들 및 동시대 인물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여러 칼빈신학 관련 문헌들에 의해 지원되고 충동되고 있다. 이로써 칼빈의 사상은 자신의 사상을 평가하는 그 자체의 기준이 되고 말았으며, 넓게는 칼빈주의인 모든 것들의 유일한 안내자가 된 셈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너무도 잘못되어 세세한 반박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이 관점은 칼빈의 광범위한 저술들의 신학적 중요성을 거절하고 칼빈을 그의 역사적 문맥과 그가 속한 전통에서 분리하여 결국 칼빈을 칼빈 자신과도 분리하고 있다.

 
2. 칼빈 ‘추종자’의 신학적 접근법을 가리키는 ‘칼빈주의’
 ‘칼빈주의자’가 칼빈의 추종자를 가리키고 ‘칼빈주의’가 칼빈 추종자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사람도 칼빈 자신의 추종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첫 번째 선택은 칼빈을 유일한 칼빈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었고, 이번 두 번째 선택은 칼빈을 칼빈주의자로 규정할 수 없게 하고 첫 번째 선택을 지원하는 성경을 띠는 것으로서 칼빈의 신학에는 산출해낸 좁은 규범에 기초하여 칼빈의 추종자를 결정하는 입장이다.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자들이 칼빈의 정확한 모방자인 경우가 거의 희박하고 아마도 전혀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볼 때 칼빈이 칼빈주의자라는 물음의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소위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자들이 칼빈의 지적 복사판이 아니기 때문에 칼빈은 그들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칼빈의 생각이 이후의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규범을 제공하고 있다는 견지에서 본다면 대개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자들은 칼빈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 문제아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 우리의 질문은 꾸며진 질문임에 분명하다. 이것은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을 모두 그들의 문맥에서 분리하며, 역사적 분석을 교의학적 일반화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정론과 그리스도 만족론과 같은 교리들이 형성되는 궤적을 추적할 때에 발견되는 몇 가지 특수한 부분들을 탐구할 때에 다룰 것이다.

 
 다소 복잡한 국면으로 들어가자.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은 ‘칼빈주의자’라는 용어가 칼빈 자신은 물론 칼빈 이후로 백여년 동안 칼빈과 동일한 신학적 궤적 혹은 전통을 고수해온 목회자들, 신학자들, 주석가들 모두에 의해서 적극 환영을 받은 호칭일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그들 모두에 대해서 거짓이다. 칼빈 자신은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를 모욕적인 언사로 여겼으며 자기 자신의 신학을 ‘범교회적’ 진리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칼빈주의’ 및 ‘칼빈주의자’는 칼빈의 대적자들, 특별히 성찬론에 대한 칼빈의 문헌들을 비판했던 루터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생성된 용어이다. 어떤 인물들이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칼빈에게서 비롯된 어떤 독특한 전통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복음적인’ 사람으로 이해했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의식적으로 자신들을 개혁주의 혹은 루터주의 같은 구별된 고백적 그룹으로 분리했던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불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윌리엄 바렛은 자신이 칼빈, 버미글리, 베자, 잔키우스 및 유니우스의 가르침을 공격했던 1595년에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유들 중에서 특별히 여기에 열거된 영웅적인 믿음의 사람들을 ‘칼빈주의자들’이라는 “불쾌한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 “칼빈주의자”와 “칼빈주의”라는 용어들의 상대적인 수락은 개혁파 정통주의의 발생이나 영국 청교도주의의 발생의 특징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17세기 후기에 시작하여 대략 18세기에 정통주의의 쇠퇴 때 특징이 된 것이라 보이는데, 그 때는 개혁파 전통이 매우 많이 발전해서 그것을 ‘칼빈주의자’와 동일시함이 그것의 좀 더 광범위한 교리 체계보다는, 유명한 TULIP, 즉 유래가 의심스러운 두자어(頭字語)에 자리 잡고 앉은, 몇몇 특징적인 요점들의 지지에 의거하고 있을 때였다. 요컨대, 사실상,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란 질문에서 고려되는 인물들 중에 어떠한 신학자도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논의를 확대하면, 이 물음은 추종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은 우리의 탐구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역사적인 문맥 설정을 요구하는 어려운 주제이다. 추종자를 명명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추종자를 규정한 자를 추종자로 부를 수 있다면, 칼빈 이후로 1세기 동안 모이세 아미로가 유일한 칼빈주의자일 것이다. 허나 아미로의 소위 가정적 보편주의 입장을 반박한 여러 학자들은 아미로의 ‘칼빈적인’ 사상을 특별히 칼빈의 인용한 부분에서 그가 칼빈 신학의 정수를 심각하게 이탈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이후로 18세기와 19세기에는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로 규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칼빈의 신학적 핵심에 분명한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와 무관하게 단지 예정론의 한 형태를 옹호했기 때문이며 또한 소위 ‘알마니안 학자들’을 반대하되 그들이 실제로 알마니안 가르침을 추종한 것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단지 그들의 구원론적 협력설로 인해 그들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칼빈 추종자로 규정하는 16세기와 17세기의 상당히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을 칼빈 추종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칼빈 이전 세대에 속하는 쯔빙글리, 부써, 오클람파디우스, 파렐과 같은 개혁주의 전통의 설립자들 경우처럼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기들이 보호해야 하는 어린 인물들 중 한 사람의 추종자로 자신들을 규정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칼빈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무스쿨루스, 버미글리, 불링거, 아 라스코와 같은 개혁주의 인물들도 자신들을 칼빈의 추종자로 혹은 어떤 대가의 들러리로 간주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잔키우스, 폴라누스, 심지어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와 같이 칼빈 이후의 세대에 속한 개혁주의 인물들 중에서도 자신을 칼빈의 추종자 혹은 ‘칼빈주의자’라 주장했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

 
 추종자의 자기 규정 문제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보다 광범위한 전통의 문맥에서 추종자를 규정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전통은 어떤 단일한 인물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의도와는 무관하게 형성된 내용과 성격을 가졌으며, 한세기 반이 지나도록 ‘칼빈주의자’라는 이름을 유용한 호칭으로 수용하지 않았던 전통이다. 칼빈보다 12살이 많았고, 파두아와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했고, 스트라스버그와 옥스퍼드와 쮜리히에서 가르쳤고, 칼빈과 대체로 동의하긴 했으나 이중 예정론을 말하지 않고 예정론을 선택으로 규정했고, (특별히 토마스 아퀴나스 및 그레고리 리미니와 같은)중세 스콜라 학자들을 칼빈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자신을 칼빈의 추종자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히브리어 실력에 있어서는 칼빈보다 월등했던 신학자를 어떻게 칼빈주의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 신학자는 바로 피터 마터 버미글리이며, 그의 글은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은 스스로 그렇게 규정하지 않았어도 때때로 (현대 학자들에 의해)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을 (칼빈주의자가 아닌) ‘개혁주의자’로 규정했고, 감독제를 옹호했고, 그의 가르침은 칼빈의 교리적 체계와 상당부분 공통된 토대를 가졌으나 버미글리, 잔키우스, 베자, 우르시누스 및 올레비아누스 사상과의 근접성을 보이며, 행위언약-은혜언약 구분과 같이 앞선 인물들의 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은 후기 개혁주의 사상의 특징들을 보여주는 신학자를 어떻게 칼빈주의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 신학자는 바로 윌리엄 퍼킨스다. 그러나 그는 여러 문헌에서 칼빈주의자로 불리우고 있으며 그러면서 그와 칼빈의 사상적 차이 때문에 ‘칼빈주의자들과 대립하는 칼빈’ 주장을 펼치려는 시도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명되는 인물이다. (이처럼 칼빈주의자로 규정될 수 없는 인물들의)목록은 폭넓게 확대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질문을 약간 바꾸어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겠다. ‘칼빈주의자들은 정말 칼빈주의자들인가?’ 혹은 보다 정교하게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이 되고자 하였는가?’ ‘칼빈주의자’가 의도적인 칼빈 추종자 혹은 칼빈 사상의 모방자 혹은 복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대답은 간단하다. ‘아니다.’ 즉 우리가 첫 번째 유형의 개념규정 언급에서 칼빈을 유일한 칼빈주의자로 지적한 것을 논외로 한다면 칼빈주의자는 없다는 것이다.

 
3. 개혁주의 전통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칼빈주의’
 ‘칼빈주의자’ 및 ‘칼빈주의’라는 용어들의 세 번째 용법은 그것들이 개혁주의 전통과 관련된 인물들과 가르침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페리 밀러, 존 맥닐, 그리고 필립 베네딕트 같은 역사가들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다 보편적인 경우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물음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칼빈은 개혁주의자인가?’ 및 ‘칼빈과 동일한 고백적 범주에 속하는 다른 인물들도 그들이 칼빈의 추종자로 이해되는 것과 무관하게 개혁주의자인가?’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단순하게 ‘그렇다’일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올바른 의미에서 개혁주의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칼빈주의자’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개혁주의적’이라는 말이 칼빈의 신학과 (그것이 온전한 규모와 다양성 속에서 이해되는 1559판『기독교 강요』안에서만 이해되든) 어떻게 다소 일치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 위의 변형된 질문들도 단순한 것은 아님을 확인한다. 질문을 역사적 문맥과 문헌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수정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칼빈의 사상과 개혁주의 신앙고백 테두리 안에 있는 후기 신학자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및 유사성과 차이점의 본질과 근원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신학적 고찰을 요청한다.

 
 
신학적 고찰: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과 칼빈의 관계

 
 물론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 라는 물음은 다양한 신학적 사안들, 특별히 그 유명한 ’튤립‘과 연계된 5대교리 중 예정론과 ’제한속죄‘ 및 언약론과 관련해서 광범위한 논의가 있었다. 우리의 물음이 이러한 형태로 설정될 때, 그 물음은 문제가 대체로 심각한 이유들에 근거하여 주로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예를 들어,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입장은 다양한 이유에서 후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예정론과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칼빈은『기독교강요』에서 신론과의 밀착성을 탈피하여 예정론을 보다 부드럽고 온후한 위치로 ’옮겼으나‘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을 신론과 가까운 위치로 옮겼으며 결국 예정론적 및 형이상학 의존적 신학의 체계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칼빈의 신학은 예정론 중식적인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체계이나, 후기 칼빈주의 인물들은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잃었다고 한다. 혹은 혼동적인 신학 방법론 및 내용과 관련해서 칼빈은 신학에 대한 언약적 접근법을 취하는 인문주의 학자이나, 이후의 칼빈주의 인물들은 이 운동의 선구자가 가졌던 인문주의 성향을 상실한 예정론적 및 스콜라적 학자라고 한다. 끝으로 어떤 경우에는 칼빈 신학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향의 근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 사역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이후의 예정론 중심적인 칼빈주의 신학에서 형성된 ‘제한적 속죄’의 '엄격한’ 관점과는 반대로 ‘무제한적 속죄’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한다. 요약하면, 칼빈은 정교하게 조화를 이룬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가르친 반면,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은 신적인 작정에 강조점을 두었으며 결국 첫글자로 만들어진 ‘튤립’ 즉 ‘5대교리’로 요약되는 엄격한 스콜라적 신학 시스템을 산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 튤립의 문제
 이상의 사안들을 논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TULIP 자체의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튤립은 단어들의 첫 글자로 이루어진 두자어(頭字語, scrostic)로 개혁주의 전통에 대해 많은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며 지금도 칼빈과 칼빈주의 관계성에 대한 혼돈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칼빈주의 전체를 1618-1619년 네델란드에서 작성된 특별한 문헌과 연결하고 그 전체의 의미를 TULIP으로 축소하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비역사적 태도이다. 튤립의 화란어 단어는 ‘튤립(tulip)’이 아니라 '툴프(tulp)'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Tulip'은 화란어 단어가 아니다. 난 알미니우스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해당되는 'I'를 생략해서 고소를 당했을 때 단지 그는 어떤 사람의 스펠링을 교정하려 한 것은 아닌지 때때로 궁금해질 정도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두자어 TULIP과 도르트 신조 사이에는 어떠한 역사적 연관성도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 알 듯이 두자어 TULIP의 형성과 ‘칼빈주의 5대교리’와 관련된 활용은 모두 영미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19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는 신조어다. 이렇게 이상한 개념들이 어떻게 그렇게 급속하게 번졌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결국 칼빈의 칼빈주의 연관성 문제가 이렇게 유명한 ‘꽃에 대한 고찰’(칼빈이 튤립을 가르쳤는가?)로 축소되면, 어떠한 답변도 그릇된 토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칼빈 자신은 물론이고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이후의 인물들도 이러한 튤립 형태의 가르침을 생각하지 않았다. 논점을 달리해서 말한다면,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은 비록 도르트 신조로 이어지는 교리들을 주장하긴 했으나 칼빈이나 그의 동시대 인물들 및 도르트 신조를 산출한 성직자들 중 자신의 고백적 입장을 TULIP으로 축소시킬 의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T'와 'L'의 경우에 분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그 두자어 TULIP이 칼빈이나 칼빈주의 사상과 얼마나 무관한 것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적인 의지와 인간적인 능력들의 전적인 결함 혹은 부패에 대한 칼빈의 진술들은 신인 협력설 혹은 반펠라기안 사상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며 죄의 파급력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런 개념을 ‘전적 부패’라는 구호와 동일시할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칼빈은 ‘제한적 속죄’라는 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용어들은 실제로 도르트 신조에 나타나지 않으며, 이러한 용어들 중 어떠한 것도 17세기의 개혁파 혹은 칼빈과 정통주의 언어의 대표성을 지니지 않았다. TULIP과 같은 용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영미권의 창작물일 뿐이다.

 
 물론 칼빈 자신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혹은 ‘전적으로 타락했다’ 같은 구절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으며’ 저주 아래 거하게 되었고 영원히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도르트 신조에는 그런 표현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튤립의 'T' 문제에 있어서는 도르트 신조의 용어가 칼빈의 용어보다 더 잘 어울린다. 최소한 영어 구어체로 이해된 ‘전적인 부패’는 너무도 어두운 색조를 지녔기 때문에 그것은 루터주의 신학자 마띠아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의 신학에나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타락 이전과 이후라는 이원론적 이해를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사탄의 형상에 의해 전적으로 교체가 되었으며 그 타락한 인간성의 실체는 죄라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칼빈이나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았으며 그 방향을 고집한 루터주의 학자들의 일치신조 안에 등장하는 이런 종류의 언사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기존의 학문연구 문헌에서 발견되는 ‘전적인 부패’라는 용어의 기만으로 어둡게 되었지만 그 개념의 실질적인 핵심은 우리에게 어떠한 선도 없다는 선의 전적인 부재가 아니라 죄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인간의 무능력에 있다. 칼빈이 불법, 사악, 부정직, 성품의 부패 등을 가리키는 결핍 및 이와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에 외적으로 순종하는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를 더럽히고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가치한 존재로 만든 성품의 광범위한 내적 뒤틀림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학적 견지에서 볼 때, 칼빈의 신학과 이후의 개혁주의 사상 사이에는 분명한 연속성이 발견된다.

 
 튤립에서 'L' 문제 즉 ‘제한속죄’ 대 ‘보편속죄’ 문제도 칼빈이 칼빈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문제도 일련의 현대적 혼돈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애매하고 시대 착오적인 언어를 16세기 및 17세기 사안에 적용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칼빈, 베자, 도르트 신조 및 16-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 중 어떠한 사람도 제한적 속죄를 언급하지 않았다. 언급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그 교리를 가르쳤을 리는 만무하다(속죄(atonement)라는 말도 영어이며, 그 시대의 신학 문헌들은 거의 전부 라틴어로 쓰여졌다.) 요점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 역사적 문헌에 충실을 기하면서 말한다면, 16-17세기에 논의된 이 문제는 구원이 어떤 자들에게 특별히 택자 혹은 신자에게 제한된 것임을 가리키는 많은 성경 구절들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속죄물이 되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모든 자들 혹은 온 세상의 구원을 의지하신 것이라는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와 관련된 문제였다. 이것은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교부들과 중세 교회들도 논의했던 문제이며 피터 롬바르드 시대 이후에는 구속 선포의 보편성과 관련된 그리스도 만족의 충분성 및 유효성 관점에서 논의되어 온 오래된 주제이다.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 사이에 논의되고 있는 이 문제는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 혹은 공로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죽음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충분한 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은 실제로 그들 모두가 동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구원받을 것이냐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알미니우스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점을 바꾸어서 말한다면, 만약 ‘속죄’가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 혹은 충분성을 뜻하는 말이라면 어떤 사람도 제한적 속죄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만약 속죄가 특별한 사람에게 성취된 실질적인 구원을 뜻하는 말이라면 어떠한 사람도 무제한적 속죄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비난을 받고 있는 사무엘 후버는 예외일 터이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이해된 용어를 따라 생각해 본다면, 풀어야 할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알미니우스가 제기하고 도르트에서 답변된 물음으로, 모든 죄에 대한 값으로서 그리스도 죽음의 충분성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 죽음의 효력이 어떤 사람에게 제한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알미니우스 관점에서 본다면, 그 효력이 어떤 사람들은 믿기로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기로 한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며 예정은 이러한 인간적인 선택의 신적인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효력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방식을 따라 오직 하나님의 택자에게 제한되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은 분명하다. 즉 그리스도 죽음의 적용 혹은 효력은 택자에게 제한된다.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이런 결론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둘째, 16세기 개혁주의 인물들의 신학적 체계의 다양성 속에 함축되어 있었고 도르트 총회를 따르는 일련의 17세기 논쟁들 안에서 분명히 논의된 문제로서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가 효력에 있어서 가정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는 하나님이 원하기만 하였다면 모든 죄에 대하여 충분하게 될 그런 가치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 죽음의 가치가 모든 사람이 믿으면 모두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그런 가치를 뜻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칼빈은 침묵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충분성-유효성 도식을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아미로에 의해서 제기된 택자를 구원하는 절대적 작정 이전에 믿는 모든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는 구원의 가정적 혹은 조건적 작정에 대해서도 칼빈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추가적인 설명 없이 그리스도가 세상의 죄를 사했으며 이 ‘은택’은 ‘모든 자들에게 차별 없이’적용되는 것이라고 때때로 말하였다.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각자의 서로 다른 입장을 논증하기 위해 모두 칼빈의 도움을 구하였다. (오직 소수의 17세기 및 18세기 인물들이 그리스도 죽음은 오직 택자들의 죄를 위해서만 충분한 값이라고 주장했다.)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은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보다 뚜렷한 입장을 취하였고, 칼빈은 다소 애매한 입장은 도르트 총회에서 채택된 입장도 그러하듯 다양한 입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2. 예정론, 기독론 중심주의 및 중심교리 문제
 예정론 문제는 다소 난해하다. 비록 일부 학자들이 기독론 중심적인 칼빈은 1559년 최종판『기독교 강요』에서 예정론을 보다 부드러운 자리로 옮겼으나 그를 계승한 자들은 예정론을 다시 신론과 연관시켜 그 교리에 대한 보다 ‘엄격한’ 해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어느 누구도 칼빈이 그 교리를 가르친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칼빈은 예정론을 여기저기 이동하지 않았다. 그는 교리교육 목적에 적합한 바울서신 순서를 따라 예정론을 처음 위치시킨 그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리가 예정론의 보다 부드럽고 고상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정과 선택과 유기에 대한 칼빈의 정의가 예정론의 위력을 무디게 만드는 것과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이 없으며 신학적 체계 속에서의 예정론 위치와는 무관하게 칼빈의 정의가 이후 개혁주의자들의 정의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예정론의 위치와 신학 저술들의 문헌학적 장르 사이의 관계성에 무지하지 않았으며 예정론의 위치를 설정하되 어떤 이들은 칼빈의 교회론적 위치를 그대로 따랐고 다른 이들은 전통적인 입장을 따라 신론과 밀착된 위치를 지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교리문답 및 신조 형식에 부합한 위치와 보다 정밀하게 발전된 신학의 대학교육 상황에 부합할 수 있도록 보다 학문적인 혹은 교의학적 논의에 적합한 위치 사이의 구분에 기초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소위 중심교리 문제이다. 칼빈과 칼빈주의 관계성 문제가 대두되는 많은 이유들은 19세기와 20세기에 나타난 전형적인 현상으로 칼빈의 신학이 예정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일관된 주장과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가정은 칼빈 이후의 모든 개혁주의 전통이 예정론에 집중적인 초점을 두고 그것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왔다고 보는 경향과 더불어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연속성 개념을 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사상 연구의 추세는 변하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20세기 신학은 칼빈을 ‘기독론 중심적인’ 인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수정된 견해가 됨에 따라,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성을 주장하는 것과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서 예정론 중심적인 신학으로 바뀐 것에 대해 베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주의 전통의 광맥 혹은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으로 인해 변화된 역사적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고도의 교의학적 접근법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치 칼빈의 사상이 신정통주의 식의 그리스도 중심성의 예표로 축소될 수 있고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단지 예정론 중심적인 학자들일 뿐인 것처럼 교의학적 해학을 꾸미고 서로 대립되는 구도를 설정하는 결함도 가진 경향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오류투성이의 논증을 극복하고 있으나 동일한 문제에 대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정도의 극복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사실 ‘그리스도 중심성’ 용어는 옛것이 되었으며, 이제는 칼빈의 신학에 ‘그리스도 연합’ 모델의 부과하여 결국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에게 동일한 종류의 부정적 비판을 가하려는 새로운 중심주의 현상이 시도되고 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 연합을 강조한 인물로 묘사하고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런 개념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인물들로 묘사한 후 그들이 칼빈 사상과의 극단적인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합 문제가 수습되면 칼빈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이 중심으로 여기는 것들 혹은 생략한 것들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칼빈 사상의 또 다른 그릇된 중심성 개념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작정론적 강조점과 병행하는 그리스도 중심성 혹은 기독론적 강조점 문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혹은 17세기적 관심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20세기의 독톡한 신학적 패턴에 기초하여 가공된 이슈이다. 만약 ‘그리스도 중심성’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그리스도 중심성에 있어서 결코 칼빈보다 못하거나 과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 희생을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 여겼으며 또한 예정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작정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 중심성’이 다른 어떠한 것, 즉 ‘그리스도 사건’을 하나님의 고유한 계시로 간주하고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의미를 가졌다면, 그 용어는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 될 것이다. 나아가 2세기에서 19세기까지 어떠한 신학자 및 신학에도 적용되지 않는 용어가 된다는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 중심성’은 칼빈과 정통주의 시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의 관계성을 평가하는 유용한 범주가 되지 못한다.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이 칼빈의 사상과는 이질적인 결정론 혹은 ‘예정론적 형이상학’ 형태를 취한 ‘작정론적 신학’ 형성의 주범이란 비판 문제와 관련하여, TULIP처럼 ‘제한적 속죄’와 ‘그리스도 중심성’ 같은 용어들은 모두 16세기와 17세기에 그 뿌리를 두지 않았으며, 하나의 고안된 문제에 대한 20세기적 묘사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이전의 기독교 전통에 등장한 신학자들 모두가 공유했던 명목상 형이상학적 전제로서 하나님을 절대적 혹은 필연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과 창조된 질서를 상대적인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일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렇다고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 형이상학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며 결정론의 한 형태로 분류되는 것은 더더욱 불가하다.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은 칼빈보다 명확하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자유롭고 정반대를 의지할 수 있으신 분으로 묘사했고, 세상을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이성적인 피조물을 ‘행위의 자유(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자유)’와 ‘선택의 자유(어떤 것을 행하거나 다른 것을 행하는 자유)’를 가지고 각자의 본성을 따라 자유롭게 행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의 일말의 불연속이 있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과 이후 개혁주의 학자들의 문헌들을 면밀히 읽어보면 전자는 결정론적 관점으로 읽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나 후자는 조금 희박하다는 정도의 불연속일 뿐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예정론에 있어서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점은 간단하다. 칼빈 이전과 동시대와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과 칼빈 자신은 모두 로마서 9장과 다른 성경 본문에서 가르치는 예정론의 어거스틴 입장, 즉 구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의존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구원으로 선택되고 다른 사람들은 선택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부터 의도된 것이라는 입장의 범주 안에서 어떤 형태를 저마다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래 동안 폭넓게 수용되어 온 신학적 유형이기 때문에 칼빈 혹은 다른 사람들을 ‘칼빈주의자’로 규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3. 스콜라-인문주의 이분법들
 스콜라-인문주의 이분법은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관계성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한다. 아주 단순한 하나의 형태는 칼빈의 인문주의와 이후 개혁주의 학자들의 스콜라주의를 대립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칼빈은 인문주의 학자인데, 이후의 칼빈주의자들은 스콜라적 학자라는 것이다. 당연히 칼빈은 칼빈주의자일 수 없다. 이런 접근법은 인문주의 방법론과 스콜라적 방법론에 속한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 문헌의 저자들을 논하되 (그들 개개인 안에서)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방법이라 하겠다. 최근의 연구에서 잘 지적된 것처럼, 칼빈은 비록 인문주의 학자로서 문헌학과 수사학 훈련을 받은 자이지만 주제별 및 논박적인 모델을 혹은 다양한 구분들과 같은 스콜라적 방법의 여러 요소들을 자신의 사상에 주입했고,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 즉 ‘미개하게 보이는 칼빈주의 학자들’은 보다 정교한 겹으로 이루어진 학문적 및 논박적 활동에서 스콜라적 방법론을 따를 뿐만 아니라 문헌학과 수사학과 같은 인문주의 학문들의 유용한 도구들을 활용했다. 사실 문헌학적 인문주의 훈련을 받은 것은 스콜라적 정통주의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개념설정 및 표준 논제들의 조직화 혹은 보편논제 같은 소위 스콜라적 방법론의 여러 요소들은 사실 인문주의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스콜라-인문주의 이분법의 또 다른 형태는 칼빈은 전적인 인문주의 학자이며 이후의 개혁주의 인물들은 전적인 스콜라적 학자라는 주장의 명백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칼빈의 심리를 둘로 분할하고 칼빈의 인격 이편에는 자애롭고 언약적인 인문주의 성향이 있고 저편에는 어두운 예정론적 스콜라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 접근법은 불행히도 칼빈의 인문주의 성향을 간과하고 칼빈의 유산에서 스콜라 예정론적 측면만을 지지했던 칼빈주의자들과 인문주의적 칼빈 사이의 대립을 조장한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독특한 문제점을 지닌 접근이다. 첫째, 부스마의 연구가 입증해 주었듯이 이 접근법은 칼빈 안에 이분화된 심리가 있다는 실증되지 않은 심리학적 주장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게 이분화된 심리의 한 쪽을 인문주의 사상과 연결하고 다른 한 쪽을 스콜라 사상과 연결하는 것은 독단일 뿐이다. 현대의 한 신학자 자신의 기호에 기초하여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낸 이 접근법은 마치 어떤 신학자가 인문주의 예정론자 혹은 스콜라적 언약론자일 수 없다는 듯 인문주으 l및 스콜라적 방법론을 특별한 내용과 결부시켜 논점을 헛갈리게 만들고 있다. 종교 개혁자들 사상 안에 인문주의와 언약적 사유를 묶고 예정론 혹은 결정론을 스콜라적 사유와 결부시킬 어떠한 근거도 없다. 우리는 결정론적 철학을 옹호했던 피에트로 폼포나찌 및 로렌쪼 벨라같은 인문주의 학자들과 언약론적 학자들이 저술한 스콜라적 문헌들을 쉽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언약 신학자들, 특별히 언약 신학자의 원조격인 요하네스 코케이우스와 그의 제자 프란쯔 버만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들은 전형적인 개혁주의 예정론을 주장했고 스콜라적 방법론을 취하였던 자들이며, 튜레틴과 같은 개혁주의 학자들도 지적할 수 있는데 그들은 비록 스콜라적 방법론과 예정론 때문에 (아마도 부당하게) 지명되고 있지만 그들은 또한 정통적인 개혁주의 언약론을 가르쳤던 자들이다.

 
4. 칼빈, 칼빈주의 및 언약신학
 칼빈의 사상과 개혁파 정통주의 언약신학 사이의 관계도 많은 논쟁을 일으켰던 주제이다. 어떤 사람들은『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겉으로 보기에 일방적인 언약론을 간략하게 진술한 것에 근거하여 그를 언약론 사상가가 아니라고 한 반면 이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언약적 사유에 심취해 있었으며 언약의 쌍방적인 성격을 일관되게 강조해 왔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칼빈이 은혜를 강조하는 열렬한 언약론적 사상가며 이후의 칼빈주의 인물들은 그런 은혜에 대한 강조점을 상실하며 율법주의 및 예정론 중심적인 사상에 함몰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견해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역사적 실재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나 역사적 실재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복잡성 속에서도 칼빈과 소위 칼빈주의 사이의 관계성 문제를 명료하게 풀어줄 것이다. 첫째, 언약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확고한 일방적 언약으로 이해하는 학파는 칼빈이 언약의 일방적은 측면과 쌍방적인 측면을 신중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연구를 일관되게 무시하며 그런 구분이 발견되는 칼빈의 주석들도 탐구하길 거절한다. 언약의 이러한 구분이 16세기와 17세기 개혁주의 사상에서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논증될 수 있으며, 이는 칼빈의 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개혁파 정통주의 학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된다.

 
 칼빈의 신학적 작업과 개혁주의 언약신학 사이에는 또 다른 중요한 관계성이 있다. 무엇보다 칼빈은 은혜언약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라고 규정하며 경영 혹은 경륜에 있어서는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은혜언약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칼빈의 개념은 17세기 언약신학 속으로 옮겨졌다. 당연히 이런 은혜언약 개념에 있어서 칼빈은 유일한 옹호자도 아니며 최조의 주창자도 아니었다. 이는 쯔빙글리 및 불링거의 초기 문헌에도 동일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위 칼빈의 예정론 중심성과 구별되는 언약신학 출범의 근원을 불링거로 보는 학문연구 일반은 은혜언약 개념이 그들 안에서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다는 이 사실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칼빈이 단일한 은혜언약 개념과 관련된 자신의 언약적 사상을『기독교 강요』의 신구약을 논하는 부분에서 확립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즉 그의 은혜언약 개념과는 별도로,『기독교 강요』에서 건져낼 수 있는 언약신학 내용은 많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기독교 강요』는 이후의 개혁주의 언약론 학자들에 의해 왕성하게 인용되지 않았다. 그들이 빈번하게 인용했던 것은 언약에 대한 칼빈의 사상이 활발하게 개진된 그의 주석이며 이는 헤르만 위치우스 같은 학자들의 문헌을 통해 쉽게 입증될 수 있다.

 
 
결론

 
 개혁주의 전통의 실체와 그 전통이 칼빈과 더불어 가지는 관계성을 규정함에 있어서 ‘칼빈주의’라는 용어도 두자어 튤립(TULIP)처럼 다양한 문제들을 초래한 주범이다. 이 두 가지 용어들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이는 과도한 단순화를 추구한 결과이다. ‘칼빈주의’의 여러 의미들은 제각각 칼빈의 사상 및 그것과 16-17세기 개혁주의 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을 양산했다. TULIP의 사용이 비록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도르트 신조를 편협한 관점으로 이해하게 만들었고 이는 개혁주의 전통과 칼빈의 신학에 대한 헷갈리는 이해로 이어졌다.

 
 칼빈의 신학과 이후 개혁주의 전통 간의 신학적, 지성사적 관계성에 관해 위에서 언급했던 사례들과 칼빈주의 및 튤립 같은 용어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어떤 전통 내에서의 연속성 및 발전의 특성과 다양성에 관계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전통의 본질과도 관계된 것이다. 칼 트루만이 최근에 지적한 것처럼,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는 미묘한 구분을 요구한다. 첫째,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의 분파로서 개혁주의 및 루터주의 신학 모두에서 발견되는 범교회적, 신조적 보편성에 대한 기초적인 전통이란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다. 둘째, 종교개혁 및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 만들어진 특정한 신앙 고백적 전통에 속한 광범위한 연속성 문제가 있다.

 
 특별히 개혁주의 신앙고백적 전통의 경우에는 갈리칸 신조, 벨직 고백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및 영국의 39조항 등과 같은 16세기 중반에 작성된 주요 신앙 고백적 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공통된 신학적 토대라는 연속성이 있다. 이 모든 산앙 고백들은 칼빈과의 대화 속에서 혹은 칼빈에게 도움을 받은 개신교 진영 안에서 작성된 것이며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칼빈도 포함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국제적 연합체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두 가지 사례들은 칼빈과 그의 동시대 인물들 사이뿐만 아니라 칼빈과 이후의 개혁주의 전통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이 있는데 이는 칼빈 사상의 개별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이 한 부분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적 문맥이 달라지는 복잡성을 따라 발전하고 변천해 온 전통과 칼빈의 사상 간의 관계성 문제도 중요하다. 자주 언급된 것처럼 칼빈은 비록 개혁주의 전통에서 항상 사상 간의 관계성 문제도 중요하다. 자주 언급된 것처럼, 칼빈은 비록 개혁주의 전통에서 항상 사상의 현저한 발전 혹은 체계화를 산출한 주도적인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이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 중에 가장 탁월한 인물로서 종교 개혁 신학의 제2세대 편찬자들 중 하나이다. 윌러스틴 워커의 평가에 따라면, ‘칼빈은 창조적인 지성보다 오히려 체계 형성적인 성향을 가졌다.’ 칼빈의 신학은 쯔빙글리, 부써, 멜랑톤, 파렐, 오클람파디우스 같은 선행자들 신학을 반영하고 있으며, 칼빈은 불링거, 버미글리, 무스쿨루스, 비레, 아 라스코 같은 동시대 인물들과 소통하고 논쟁을 벌였던 인물이며, 그의 글은 환영을 받았고, 정교하게 변증되어 왔으며, 그의 신학적 작업들(무엇보다 그의 주석적 작업들)은 참조되고 수정되어 발전하고 변화하고 다양화된 신학적 전통 속에서 통합되어 갔다. 칼빈은 이 전통을 창시하지 않았으며, 이 전통의 초기 집대성에 있어서 유일한 대변자도 아니며, 이 전통의 발전에 규범적인 역할을 한 것도 아니다.

 
 본 논문의 첫 부분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칼빈과 칼빈주의 사이의 관계성 문제는 특별히 ‘칼빈주의’가 대개 개혁주의 전통을 의미하고 있다는 바른 해석에 근거해서 본다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마감된 이후 몇 세기동안 스스로를 ‘칼빈주의자’ 혹은 ‘칼빈주의적’이라고 규정해 온 여러 인물들과 그룹들 때문에 여전히 복잡한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그룹들 중에는 침례교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유아세례 거부 때문에 칼빈의 제네바 그룹이나 정통주의 시대의 고백적 개혁주의 분파에서 환영받지 못하였다. 16-17세기의 개혁주의 진영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했을 엄격한 형이상학 결정론 혹은 양립론에 근거하여 스스로를 칼빈주의 추종자라 부르는 현대의 여러 신학자들 및 철학자들 또한 여기에 언급될 수 있겠다.

 
 칼빈과 소위 ‘엄격한’ 정통주의 사이의 대립을 설정하는 시도드 속에서 고도의 시대착오 및 비꼼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는 정통주의 시대의 실패로 인하여 단절된 칼빈 신학의 확고한 재 생산 의지와 19세기 및 20세기에 고안된 교리적 표준들 및 교리적 선동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문헌들에 대한 보다 정밀한 탐구에서 확인된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의 실상은 그것이 교회의 보다 앞서 전통들과 수다한 종교 개혁자들 그룹, 즉 칼빈의 선행자들 및 동시대 인물들의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많은 선행적인 신학적 움직임과 더불어 다양한 운동으로 전개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개혁파 정통주의 사상의 다양성은 그 사상을 엄격한 것으로 규정할 수 없도록 만든다. 나아가 만약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이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란 의문을 제기한 자들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공포한 그런 방식, 즉 칼빈의 사상을 계속해서 복사하는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고백적 운동으로 존속하지 못하고 극도의 엄격성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개혁주의 전통은 칼빈을 그 전통의 여러 확립자적 인물들 중에 한 사람으로 여겨 그에게 의존했고 도움을 받았다. 동시에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은) 개혁주의 신앙의 제2세대적 체계화 작업에서 발휘한 그의 능력들과, 정밀한 기술적 소양을 발휘함에 있어서의 한계들과 변화된 상황과 시대적 변천 속에서 개혁파 정통주의 인물들이 당면한 과제들을 칼빈이 다 다룰 수는 없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칼빈은 칼빈주의자인가’란 우리의 초기 물음으로 돌아가 매듭을 짓고자 한다. 답변은 당연히 부정적인 것이다. 칼빈은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도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들은 개혁주의 전통에 모두 기여한 자들이다. 본 논문이 다룬 주제의 교훈은 칼빈과 다양한 개혁주의 신앙 고백들과 소위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칼빈주의자들’ 모두가 서 있었던 공동의 발판을 이해하는 것이며, 개혁주의 전통은 처음부터 (물론 신앙 고백적 테두리 안에서의) 다양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장미꽃 봉오리를 꺾을 수 있을 때에 꺽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의 정원에 튤립(TULIP)은 아예 심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주일 특별대담] 장종현 목사와 리처드 멀러 교수..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500794&cp=du
 
황대우 교수님의 리처드 멀러의 "칼빈의 칼빈주의" 비판
[논문] 일반논문 : 칼빈과 칼빈주의: 리차드 멀러 교수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
http://blog.daum.net/nzesjltj/384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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