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2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2
http://cafe.daum.net/homoousion/56TM/13
김길성 교수의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제8장 투쟁하는 기독교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투쟁의식,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만일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신자와 옹호자가 되는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다른 곳보다는 주로 볼티모어에 있는 나의 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나의 형제인 아더 메이천 주니어(Arthur Machen Jr.)와 토마스 메이천(Thomas Machen)과 함께 자랐습니다. 1915년 88세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1931년 82세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독교가 특정한 현대의 대체물들과 다른지를 배웠습니다. 나는 또한 기독교적 신념이 폭넓은 인생관과 학문의 추구를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메이천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셨는데 그분의 사무실은 메릴랜드 주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 사무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메이천 부친의 특별한 “취미”는 초기 판본들, 특히 15세기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 판본들에 대한 연구와 수집이었다. 그는 몹시 기독교적인 사람으로서, 거룩한 신앙 속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들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탐독했다. 진지하게 명상하였다. 그의 기독교적인 경험은 감정적이거나 경건주의적 유형에 속한 것이 아니라 깊이 흐르는 물을 가진 조용한 시내와도 같았다. 하지만 진정한 학문과 참된 경건함이 동반되었다.
메이천은 모친의 영향은 훨씬 강했다고 말한다: “나의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대단히 폭넓은 독서가였습니다. 그녀는 보다 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또한 숲과 들의 그 무한한 감미로움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이따금씩 무정한 세상의 조직들과 슬프게도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께 헌신적인 무정한 교회기구의 조직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의 영혼을 그 언덕의 친절함으로 새롭게 하는 것을 배운 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사랑과 더불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으로서, 그 근저에는 모든 미와 진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만유였으며, 그녀는 오직 성경이 가르쳐 주는 새롭고 산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다른 무언가가 기독교 속에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항상 확신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나의 어머니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던 것이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성경내용에 관한 더 나은 지식들을 12살에 얻었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소요리문답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천의 어머니는 그에게 성경과 우리 교회의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신 것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하셨다. 메이천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또한 의심하고 있었던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자신이 지적인 투쟁을 경험하셨고 청년기부터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한 반대들에 대하여 용감하게 맞섰기 히 나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나는 내가 대단히 존경했던 나의 형 아더 메이천 주니어와 내 사촌 르로이 그레스햄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신앙과 불신 사이의 전투를 오로지 홀로 싸워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애처로운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메이천은 1902년 가을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 나는 마침 신학교 총장의 직책을 맡았던 프랜시스 패턴의 격려를 받았다. 그는 메이천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의혹들을 이겨내도록 하였고, 곤경 속에서 그를 도와 주었다.
메이천은 “현대적인 비평 방법론을 신약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신약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하여 유해하지 않으면서도 확증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나에게 있어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라면서 현대적인 비평에 대해서 언급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이 가진 매력 알고 있었다: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
메이천은 말부르크(Marburg)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나는 신약학 교수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신약 과목들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리츌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의식 가운데 자신의 존재 중심에 도덕적인 모 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변증적 난제들에 대한 리출의 해결책이 실패했던 두 번째 이 유는 그것이 보존하고자 애쓰는 종교적 체혐의 유형이 전혀 진정한 기독교적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접촉했던 어떤 사람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고매한 지지자였던 그 종교가 진정한 기독교적 종교였습니까? 그것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약분야의 경우, 나는 말부르그에서 네 명 정도의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평가로는 율리허가 분명히 으뜸이었는데, 당시 그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내가 말부르크에 있었을 때, 바이스는 다소 율리허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는 명석하고 인기 있는 강사였습니다. 하지 만나는 그를 심오한 학자라기보다 통속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이러한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의 놀라울 정도로 풍 부하고 학문적인 고린도전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나로 하여금 현대 신 약학자 가운데 가장 유능한 한 사람에 대한 나의 청년기의 오해를 뉘우 치도록 하였습니다.”
메이천은 독일에서 놀란 사실을 언급하면서 성경을 대하는 신학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호소한다: “최소한의 수면을 취하면서 한 독일 학생이 성취할 수 있는 지적인 활동의 양이었다. 분명히 그 비밀은 독일 학생들이 즐거운 대학의 학기들이 시작되게 전에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개의 경우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이 얻을 수 있었던 지적인 열정과의 적은 교제마저도 오늘날에 와서는 한편으로 상향이 아니라 지나친 하향 평준화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으로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우리 미국의 위대한 교육학적 발견이 가진 자유로운 운영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절망적인 시대에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희망에 대해서 논한다: 수많은 반대들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모든 보이지 않는 세 계는 저 멀리 희미하게 잊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는 이 상황을 직시합시다. 이전에 우리에게 그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던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진정으로 포기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때에 삶은 우리들에게 절망적인 공허함처럼 보여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을 장난삼아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본다면, 진정 우리의 미음 중심과 정신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 주님을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져 버렸고, 파멸이 내 영흔을 구성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 하였을 때, 램프가 희미하게 빛나는 저녁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종종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보다 훨씬 심오한 무언가를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란 우리가 매순간 이상적으로 완전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도록 우리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 의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습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교수로서 프린스톤에서의 일정은 다소 힘겨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활발하게 만드는 고급 과정들이 있었으며, 나도 역시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 고역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흔히 퍼져있는 것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그 경험들을 나의 보잘 것 없는 책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 속에 구체화하였습니다. 나는 언어 교사, 혹은 초급 교재의 저자가 결코 자신의 언어학적 지식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언어에 대한 독해 지식을 전해주는데 다른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종교”라고 선언한다: “나는 나의 작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 문제는 같은 종교의 두 가지 다양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고와 생활 방식의 두 유형 사이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분류들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현대주의와 초자연주의, 혹은 다르게 비교리적 종교와 역사적 기독교라는 그 두 경향은 판이한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이 자유주의적 흐름에 편승하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프린스톤과의 결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 프린스톤 신학교가 처음에는 시대의 대세에 저항하였지만 이후 그것에 굴복하였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사람들은 구 프린스 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학문적 전통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그것에 동감하지 않는 새 이사회 밑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프린스톤에서 성공적으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다른 곳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계속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전통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소망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교제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신학에서 ‘보수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들이 만일 단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떤 것을 필사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생각되어진다면, 심각하게 잘못 전달된 것입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단지 현존하고 있는 조건들이 지속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메이천은 보수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힌다: “나는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나는 스스로를 그와 같은 용어로 부르는 사람들과 매우 온정어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토록 장구하고 명예로운 역사를 지니는 기독교가 갑작스럽게 “~주의”가 되어야만 하고 낯설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져 야 하는지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메이천은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1925년, 「신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신앙과 지식사이에 설정된 그릇된 분리인 현대주의적 교회의 반지성주의와 논쟁하였으며, 신앙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신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 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당연한 결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메이천은 기독교 통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됨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통일을 저해하는 교회 연합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나는 기독교 통일에 가장 치명적인 적인 교회 연합을 반대합니다. 나는 전개신교 교계를 한 경향을 지닌 전제적인 위원회와 이사회 아래에 두는 독점적인 개신교 교회 연합에 대한 암울한 이상을 옹호하는 마음과 노력을 반대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들 안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점진적으로 방해받는 것을 반대합니다. 나는 은밀한 교회의 임원회의나 권정 위원회를 반대합니다. 나는 교회가 채택하도록 제시한 법안들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지난번 장로교 총회의 결정과 같은 의결들을 나의 온힘을 다해 반대합니다. 나는 단지 자유를 믿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발적인 모임이 가진 정당성을 믿습니다. 나는 장로교회와 같은 자발적인 모임의 정당성을 믿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나는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가 없을 때 평화를 를 외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장로교회에 관한 두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1)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2) 성령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이 매우 겸허하게 그분이 그렇게 해 주시도록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도 피상적인 낙관론과 같이 참된 기도를 소멸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비열하게 반 지성주의 속으로 도주하지 않고 논쟁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장로교회와 다른 교회 안에서 시종일관 기독교의 남은 자들이 된 사람들은 가견 교회가 그 방황으로부터 참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해야 합니다.…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의 신학 연구 방법론에 대해
1. 역사적-문법적으로 신학 연구: “성경영감에 대한 확신으로 신학 연구”
메이천은 역사의식을 대단히 강조햇다. 그가 볼 때 신약은 역사(적 사실)였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철학적 전제 위에 세워졌으며 무력하게 될 뿐이라고 경고했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문화”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역사적인 연구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이천이 볼 때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이며 기독교신앙을 봉사하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역사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볼 때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메이천이 지적 학문활동에 열정을 쏟은 이유는 역사주의로 기독교를 파괴하고 변질시키려는 자유주의에 맞서고 기독교 복음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가만히 들어온 형제들’을 경계한 것과 같다. 이처럼 메이천은 기독교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과 지성으로 무장하여 투쟁한 학자요 목자였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철저히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를 분석하되, 누가복은 첫 두 장의 문학적 통일성을 밝혀냈다. 동시에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역사성을 주장했다. 메이천은 하르낙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의 기원을 탐구한 결과,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이라고 밝혔다. 언어적 증거를 추적하고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천은 하르낙과 같은 역사주의자들과 자신이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하지만 본문의 ‘기원’에 대해서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신적 개입을 인정하는 여부”에 있다고 말한다. 메이천은 성경에 대해서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겸손하고 철저하게 본문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메이천은 “2세기의 동정녀 탄생”을 연구할 때도 철저하게 역사적-문법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있는 증거들을 찾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문법적-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AD 110년에 이미 기독교 공동체에서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메이천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110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이미 그 뿌리가 교회의 삶에 깊이 내리고 있었다. 예컨대, 저스틴의 문헌을 연구한 결과 유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보고 공격했다. 반면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반대자들의 공격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메이천이 볼 때, 동정녀 탄생에 대해 확신한 자료는 2세기 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2세기초부터 동정녀 탄생 신앙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메이천은 역사적-문법적 연구를 하기 때문에 2세기 초까지의 자료를 찾아내서 연구를 했다. 메이천은 2세기 경의 기독교를 연구해야 1세기의 기독교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신약을 연구했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적인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증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개연성만 부여하거나 설명되지 않으면 교회의 신앙이라면서 원문의 영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메이천이 얼마나 신앙과 학자적인 자세를 겸비한, 정직한 신학자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메이천은 “예수님과 바울”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브레데의 입장에 반대하여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며 예수님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견해와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 낼 때, 초자연적인 구속 종교인 기독교를 역사적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을 말하지만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을 반대했다. 동시에 역사주의에 빠져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적 성경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에서 자유주의적 접근을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 반대하고 변증했다. 메이천은 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했고, 초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과 교제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처럼 역사적 해석과 초자연적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메이천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바로는 바울은 기독교의 창설자가 아니라 열렬한 추종자요 제자였다. 바울 복음의 기원은 다메섹 사건에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새 종교의 창설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따라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예수와 관련하여 혁신자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2. 개혁신학적 신학연구
메이천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법적-역사적인 입장과 함께 신학적인 접근을 했다. 메이천이 세 가지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메이천이 신학적인 접근을 할 때, 그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전제로 갖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나의 전통으로만 소유한 것을 넘어서서 어려운 시절, 즉 자유주의자들이 지성주의로 혹은 반지성주의로 기독교를 공격할 때 위안을 주는 신학 사상으로 생각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고 했다.
메이천은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자긍심을 가졌으면서도 노력을 강조했다. 메이천은 신학자나 신학도가, 특히 성경의 무오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은, 성경 연구에 정열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메이천은 독일 신학도들과 미국 신학도들을 비교하면서 미국 학생들이 하향평준화 되고 성경에 대해 열정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지적한다 그는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이라면서 지적인 훈련이 결핍된 문제를 꾸짖는다. 개혁주의자인 메이천은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보수는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신학적 지식,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무지할 것이라는 사실이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학적 보수주의자이지만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한다고 했다. 메이천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주의’를 붙여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부분에 항의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으로 성경을 연구했다는 것은 성경무오의 입장을 가졌다는 말이다. 메이천은 개혁신앙의 핵심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이라고 보고 장로교회의 목사는 성경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을 가지면서도, 개혁신학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경험했다. 메이천은 많은 반대와 회의적인 시대의 모습이 주는 불신의 현장에서 칼빈주의가 주는 유익을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과 소망 안에서, 곧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
3. 지성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신학방법론
메이천은 신앙을 강조했지만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경계했다. 사람들은 현대 신학의 흐름이 대단히 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이천은 오히려 현대주의적 신학이 반지성적으로 흐른다고 경계했다. 놀라운 지적이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여겨 역사적인 탐구에 열정을 보였다.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역사적인 기독교를 부정하고 종교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메이천은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라면서 역사적 탐구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메이천은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틸의 전제주의처럼, 메이천은 지성주의적 접근으로 신앙을 갖도록 하는 한계를 지적했다.
메이천은 “신학은 원칙과 기초에서부터 견실하게 출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신학의 원칙과 기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제대로 원어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면 탁상공론에 빠지지 않으며, 이 능력은 배경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메이천은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를 집필하는 등 원어 탐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2세기의 동정녀 탄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원어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는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이 강조한 지성적 투쟁은 성경연구에도 나타난다. 메이천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면서도 성경을 역사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다. 메이천은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메이천은 기독교가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메이천이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한 부분에서 오늘날의 근본주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설, “역사와 신앙”에서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다”고 외쳤다. 메이천은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4. 신실한 신자로서 신학 연구
메이천은 당대 최고의 신약신학자이면서도 그의 신앙이 참으로 충성스럽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메이천은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신학방법의 뿌리에 ‘신앙’이 있다. 따라서 메이천의 신학방법론을 다룸에 있어서 ‘신앙’을 간과할 수 없어 메이천의 신앙을 신학방법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메이천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는다. 실로 옳은 진단이다. 성경을 가르기고 배우나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부르지만 온 목숨을 다해 충성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문제가 아닐까?
역사적인 접근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메이천이 성경무오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신앙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다고 밝혔다. 메이천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확신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메이천은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학문을 하는 방향에 대해서 배웠다. 그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성경 원어와 고전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신앙 고전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메이천은 학문과 경건성의 조화를 고향의 집에서 배운 셈이다. 메이천은 모친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도록 몸소 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다. 그는 이미 성경 내용에 관한 지식을 12살에 얻었다고 할 정도로 어린시절부터 교리와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
신학을 하다보면 신앙과 학문, 경건과 신학이 괴리될 수 있으나 메이천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행복과 안식을 누리면서 신학을 했다. 메이천은 모친께서 하신 말씀,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의 것이라는 감격을 알았다. 메이천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감격을 아는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그는 장로교회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복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예수님과 바울”에서 강조한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감격과 확신이 있었고, 거기에 기초하여 신학의 혼돈기에서도 복음신앙 안에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천은 겸손함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겸손함은 제자들에 대한 입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겸손함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연결되며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와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메이천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은혜로운 교제를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존귀하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지적 탐구에 열정적이면서도 개혁신앙에 철저한 위대한 개혁신학자인 메이천을 통해서 신앙과 신념, 열정과 겸손함을 보게 된다. 그의 신자로서의 순결함과 교회를 향한 열정과 학문을 향한 진지함과 탁월함이 나의 삶에도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http://cafe.daum.net/homoousion/56TM/13
김길성 교수의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제8장 투쟁하는 기독교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투쟁의식,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만일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신자와 옹호자가 되는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다른 곳보다는 주로 볼티모어에 있는 나의 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나의 형제인 아더 메이천 주니어(Arthur Machen Jr.)와 토마스 메이천(Thomas Machen)과 함께 자랐습니다. 1915년 88세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1931년 82세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독교가 특정한 현대의 대체물들과 다른지를 배웠습니다. 나는 또한 기독교적 신념이 폭넓은 인생관과 학문의 추구를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메이천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셨는데 그분의 사무실은 메릴랜드 주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 사무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메이천 부친의 특별한 “취미”는 초기 판본들, 특히 15세기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 판본들에 대한 연구와 수집이었다. 그는 몹시 기독교적인 사람으로서, 거룩한 신앙 속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들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탐독했다. 진지하게 명상하였다. 그의 기독교적인 경험은 감정적이거나 경건주의적 유형에 속한 것이 아니라 깊이 흐르는 물을 가진 조용한 시내와도 같았다. 하지만 진정한 학문과 참된 경건함이 동반되었다.
메이천은 모친의 영향은 훨씬 강했다고 말한다: “나의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대단히 폭넓은 독서가였습니다. 그녀는 보다 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또한 숲과 들의 그 무한한 감미로움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이따금씩 무정한 세상의 조직들과 슬프게도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께 헌신적인 무정한 교회기구의 조직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의 영혼을 그 언덕의 친절함으로 새롭게 하는 것을 배운 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사랑과 더불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으로서, 그 근저에는 모든 미와 진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만유였으며, 그녀는 오직 성경이 가르쳐 주는 새롭고 산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다른 무언가가 기독교 속에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항상 확신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나의 어머니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던 것이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성경내용에 관한 더 나은 지식들을 12살에 얻었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소요리문답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천의 어머니는 그에게 성경과 우리 교회의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신 것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하셨다. 메이천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또한 의심하고 있었던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자신이 지적인 투쟁을 경험하셨고 청년기부터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한 반대들에 대하여 용감하게 맞섰기 히 나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나는 내가 대단히 존경했던 나의 형 아더 메이천 주니어와 내 사촌 르로이 그레스햄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신앙과 불신 사이의 전투를 오로지 홀로 싸워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애처로운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메이천은 1902년 가을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 나는 마침 신학교 총장의 직책을 맡았던 프랜시스 패턴의 격려를 받았다. 그는 메이천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의혹들을 이겨내도록 하였고, 곤경 속에서 그를 도와 주었다.
메이천은 “현대적인 비평 방법론을 신약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신약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하여 유해하지 않으면서도 확증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나에게 있어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라면서 현대적인 비평에 대해서 언급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이 가진 매력 알고 있었다: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
메이천은 말부르크(Marburg)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나는 신약학 교수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신약 과목들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리츌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의식 가운데 자신의 존재 중심에 도덕적인 모 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변증적 난제들에 대한 리출의 해결책이 실패했던 두 번째 이 유는 그것이 보존하고자 애쓰는 종교적 체혐의 유형이 전혀 진정한 기독교적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접촉했던 어떤 사람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고매한 지지자였던 그 종교가 진정한 기독교적 종교였습니까? 그것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약분야의 경우, 나는 말부르그에서 네 명 정도의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평가로는 율리허가 분명히 으뜸이었는데, 당시 그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내가 말부르크에 있었을 때, 바이스는 다소 율리허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는 명석하고 인기 있는 강사였습니다. 하지 만나는 그를 심오한 학자라기보다 통속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이러한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의 놀라울 정도로 풍 부하고 학문적인 고린도전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나로 하여금 현대 신 약학자 가운데 가장 유능한 한 사람에 대한 나의 청년기의 오해를 뉘우 치도록 하였습니다.”
메이천은 독일에서 놀란 사실을 언급하면서 성경을 대하는 신학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호소한다: “최소한의 수면을 취하면서 한 독일 학생이 성취할 수 있는 지적인 활동의 양이었다. 분명히 그 비밀은 독일 학생들이 즐거운 대학의 학기들이 시작되게 전에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개의 경우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이 얻을 수 있었던 지적인 열정과의 적은 교제마저도 오늘날에 와서는 한편으로 상향이 아니라 지나친 하향 평준화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으로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우리 미국의 위대한 교육학적 발견이 가진 자유로운 운영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절망적인 시대에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희망에 대해서 논한다: 수많은 반대들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모든 보이지 않는 세 계는 저 멀리 희미하게 잊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는 이 상황을 직시합시다. 이전에 우리에게 그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던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진정으로 포기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때에 삶은 우리들에게 절망적인 공허함처럼 보여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을 장난삼아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본다면, 진정 우리의 미음 중심과 정신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 주님을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져 버렸고, 파멸이 내 영흔을 구성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 하였을 때, 램프가 희미하게 빛나는 저녁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종종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보다 훨씬 심오한 무언가를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란 우리가 매순간 이상적으로 완전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도록 우리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 의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습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교수로서 프린스톤에서의 일정은 다소 힘겨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활발하게 만드는 고급 과정들이 있었으며, 나도 역시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 고역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흔히 퍼져있는 것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그 경험들을 나의 보잘 것 없는 책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 속에 구체화하였습니다. 나는 언어 교사, 혹은 초급 교재의 저자가 결코 자신의 언어학적 지식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언어에 대한 독해 지식을 전해주는데 다른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종교”라고 선언한다: “나는 나의 작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 문제는 같은 종교의 두 가지 다양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고와 생활 방식의 두 유형 사이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분류들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현대주의와 초자연주의, 혹은 다르게 비교리적 종교와 역사적 기독교라는 그 두 경향은 판이한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이 자유주의적 흐름에 편승하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프린스톤과의 결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 프린스톤 신학교가 처음에는 시대의 대세에 저항하였지만 이후 그것에 굴복하였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사람들은 구 프린스 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학문적 전통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그것에 동감하지 않는 새 이사회 밑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프린스톤에서 성공적으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다른 곳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계속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전통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소망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교제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신학에서 ‘보수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들이 만일 단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떤 것을 필사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생각되어진다면, 심각하게 잘못 전달된 것입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단지 현존하고 있는 조건들이 지속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메이천은 보수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힌다: “나는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나는 스스로를 그와 같은 용어로 부르는 사람들과 매우 온정어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토록 장구하고 명예로운 역사를 지니는 기독교가 갑작스럽게 “~주의”가 되어야만 하고 낯설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져 야 하는지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메이천은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1925년, 「신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신앙과 지식사이에 설정된 그릇된 분리인 현대주의적 교회의 반지성주의와 논쟁하였으며, 신앙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신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 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당연한 결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메이천은 기독교 통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됨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통일을 저해하는 교회 연합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나는 기독교 통일에 가장 치명적인 적인 교회 연합을 반대합니다. 나는 전개신교 교계를 한 경향을 지닌 전제적인 위원회와 이사회 아래에 두는 독점적인 개신교 교회 연합에 대한 암울한 이상을 옹호하는 마음과 노력을 반대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들 안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점진적으로 방해받는 것을 반대합니다. 나는 은밀한 교회의 임원회의나 권정 위원회를 반대합니다. 나는 교회가 채택하도록 제시한 법안들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지난번 장로교 총회의 결정과 같은 의결들을 나의 온힘을 다해 반대합니다. 나는 단지 자유를 믿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발적인 모임이 가진 정당성을 믿습니다. 나는 장로교회와 같은 자발적인 모임의 정당성을 믿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나는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가 없을 때 평화를 를 외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장로교회에 관한 두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1)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2) 성령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이 매우 겸허하게 그분이 그렇게 해 주시도록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도 피상적인 낙관론과 같이 참된 기도를 소멸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비열하게 반 지성주의 속으로 도주하지 않고 논쟁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장로교회와 다른 교회 안에서 시종일관 기독교의 남은 자들이 된 사람들은 가견 교회가 그 방황으로부터 참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해야 합니다.…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의 신학 연구 방법론에 대해
1. 역사적-문법적으로 신학 연구: “성경영감에 대한 확신으로 신학 연구”
메이천은 역사의식을 대단히 강조햇다. 그가 볼 때 신약은 역사(적 사실)였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철학적 전제 위에 세워졌으며 무력하게 될 뿐이라고 경고했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문화”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역사적인 연구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이천이 볼 때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이며 기독교신앙을 봉사하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역사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볼 때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메이천이 지적 학문활동에 열정을 쏟은 이유는 역사주의로 기독교를 파괴하고 변질시키려는 자유주의에 맞서고 기독교 복음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가만히 들어온 형제들’을 경계한 것과 같다. 이처럼 메이천은 기독교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과 지성으로 무장하여 투쟁한 학자요 목자였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철저히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를 분석하되, 누가복은 첫 두 장의 문학적 통일성을 밝혀냈다. 동시에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역사성을 주장했다. 메이천은 하르낙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의 기원을 탐구한 결과,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이라고 밝혔다. 언어적 증거를 추적하고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천은 하르낙과 같은 역사주의자들과 자신이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하지만 본문의 ‘기원’에 대해서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신적 개입을 인정하는 여부”에 있다고 말한다. 메이천은 성경에 대해서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겸손하고 철저하게 본문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메이천은 “2세기의 동정녀 탄생”을 연구할 때도 철저하게 역사적-문법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있는 증거들을 찾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문법적-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AD 110년에 이미 기독교 공동체에서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메이천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110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이미 그 뿌리가 교회의 삶에 깊이 내리고 있었다. 예컨대, 저스틴의 문헌을 연구한 결과 유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보고 공격했다. 반면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반대자들의 공격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메이천이 볼 때, 동정녀 탄생에 대해 확신한 자료는 2세기 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2세기초부터 동정녀 탄생 신앙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메이천은 역사적-문법적 연구를 하기 때문에 2세기 초까지의 자료를 찾아내서 연구를 했다. 메이천은 2세기 경의 기독교를 연구해야 1세기의 기독교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신약을 연구했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적인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증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개연성만 부여하거나 설명되지 않으면 교회의 신앙이라면서 원문의 영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메이천이 얼마나 신앙과 학자적인 자세를 겸비한, 정직한 신학자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메이천은 “예수님과 바울”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브레데의 입장에 반대하여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며 예수님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견해와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 낼 때, 초자연적인 구속 종교인 기독교를 역사적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을 말하지만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을 반대했다. 동시에 역사주의에 빠져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적 성경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에서 자유주의적 접근을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 반대하고 변증했다. 메이천은 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했고, 초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과 교제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처럼 역사적 해석과 초자연적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메이천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바로는 바울은 기독교의 창설자가 아니라 열렬한 추종자요 제자였다. 바울 복음의 기원은 다메섹 사건에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새 종교의 창설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따라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예수와 관련하여 혁신자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2. 개혁신학적 신학연구
메이천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법적-역사적인 입장과 함께 신학적인 접근을 했다. 메이천이 세 가지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메이천이 신학적인 접근을 할 때, 그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전제로 갖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나의 전통으로만 소유한 것을 넘어서서 어려운 시절, 즉 자유주의자들이 지성주의로 혹은 반지성주의로 기독교를 공격할 때 위안을 주는 신학 사상으로 생각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고 했다.
메이천은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자긍심을 가졌으면서도 노력을 강조했다. 메이천은 신학자나 신학도가, 특히 성경의 무오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은, 성경 연구에 정열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메이천은 독일 신학도들과 미국 신학도들을 비교하면서 미국 학생들이 하향평준화 되고 성경에 대해 열정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지적한다 그는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이라면서 지적인 훈련이 결핍된 문제를 꾸짖는다. 개혁주의자인 메이천은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보수는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신학적 지식,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무지할 것이라는 사실이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학적 보수주의자이지만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한다고 했다. 메이천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주의’를 붙여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부분에 항의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으로 성경을 연구했다는 것은 성경무오의 입장을 가졌다는 말이다. 메이천은 개혁신앙의 핵심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이라고 보고 장로교회의 목사는 성경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을 가지면서도, 개혁신학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경험했다. 메이천은 많은 반대와 회의적인 시대의 모습이 주는 불신의 현장에서 칼빈주의가 주는 유익을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과 소망 안에서, 곧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
3. 지성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신학방법론
메이천은 신앙을 강조했지만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경계했다. 사람들은 현대 신학의 흐름이 대단히 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이천은 오히려 현대주의적 신학이 반지성적으로 흐른다고 경계했다. 놀라운 지적이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여겨 역사적인 탐구에 열정을 보였다.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역사적인 기독교를 부정하고 종교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메이천은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라면서 역사적 탐구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메이천은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틸의 전제주의처럼, 메이천은 지성주의적 접근으로 신앙을 갖도록 하는 한계를 지적했다.
메이천은 “신학은 원칙과 기초에서부터 견실하게 출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신학의 원칙과 기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제대로 원어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면 탁상공론에 빠지지 않으며, 이 능력은 배경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메이천은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를 집필하는 등 원어 탐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2세기의 동정녀 탄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원어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는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이 강조한 지성적 투쟁은 성경연구에도 나타난다. 메이천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면서도 성경을 역사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다. 메이천은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메이천은 기독교가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메이천이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한 부분에서 오늘날의 근본주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설, “역사와 신앙”에서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다”고 외쳤다. 메이천은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4. 신실한 신자로서 신학 연구
메이천은 당대 최고의 신약신학자이면서도 그의 신앙이 참으로 충성스럽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메이천은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신학방법의 뿌리에 ‘신앙’이 있다. 따라서 메이천의 신학방법론을 다룸에 있어서 ‘신앙’을 간과할 수 없어 메이천의 신앙을 신학방법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메이천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는다. 실로 옳은 진단이다. 성경을 가르기고 배우나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부르지만 온 목숨을 다해 충성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문제가 아닐까?
역사적인 접근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메이천이 성경무오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신앙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다고 밝혔다. 메이천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확신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메이천은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학문을 하는 방향에 대해서 배웠다. 그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성경 원어와 고전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신앙 고전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메이천은 학문과 경건성의 조화를 고향의 집에서 배운 셈이다. 메이천은 모친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도록 몸소 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다. 그는 이미 성경 내용에 관한 지식을 12살에 얻었다고 할 정도로 어린시절부터 교리와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
신학을 하다보면 신앙과 학문, 경건과 신학이 괴리될 수 있으나 메이천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행복과 안식을 누리면서 신학을 했다. 메이천은 모친께서 하신 말씀,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의 것이라는 감격을 알았다. 메이천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감격을 아는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그는 장로교회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복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예수님과 바울”에서 강조한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감격과 확신이 있었고, 거기에 기초하여 신학의 혼돈기에서도 복음신앙 안에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천은 겸손함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겸손함은 제자들에 대한 입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겸손함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연결되며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와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메이천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은혜로운 교제를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존귀하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지적 탐구에 열정적이면서도 개혁신앙에 철저한 위대한 개혁신학자인 메이천을 통해서 신앙과 신념, 열정과 겸손함을 보게 된다. 그의 신자로서의 순결함과 교회를 향한 열정과 학문을 향한 진지함과 탁월함이 나의 삶에도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