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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신앙감정론_제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헤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6~7

신앙감정론_제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헤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6~7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taelinj/30104816620

여섯 번째 소극적 표지 : 사랑의 피상적 표현
 
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술이 진리와 신앙감정의 본질에 반대 되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야말로 감정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확실한 표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단은 사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본성이 적개심과 악의인 사단과 정반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사람의 정신보다 더 탁월하고, 천상적이며, 신적인 것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은 지식이나, 예언이나, 기적이나, 사람과 천사들의 방언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숭고한 것이며, 참된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며 요체다. 사랑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습에 가장 근접하게 되며, 지옥과 마귀의 모습에 가장 반대 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성질 때문에 사랑에는 모조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어떤 것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것의 모조품들은 더욱 많다. 그래서 철이나 청동보다는 금이나 은의 모조품들이 더 많다. 가짜 다이아몬드와 루비는 많지만 누가 흔한 돌의 모조품을 만들려고 할까? 어떤 것들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그 본질과 내적 성질을 닮은 모조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그 모조품들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 외형을 정확하게 모방하려고 더 많은 공교한 기술들을 사용한다. 따라서 아주 탁월하고 효험이 있는 약품들을 사면서 사기를 당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가치와 본질 때문에 그 약품들의 모조품을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다 하더라도, 만들어진 모조품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미덕과 은혜도 마찬가지다. 사단의 교묘함과 사람에게 있는 기만성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이런 미덕들과 은혜를 모방하는 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보다 더 많은 모조품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랑과 겸손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특별하게 나타나는 미덕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에게 일종의 종교적인 사랑이 있더라도,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신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2-13).
 
하반절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하고 식어지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매우 강하고 진하게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랑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하게 이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주 높이 칭송하였으며, 고기나 물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던 시대에 그리스도를 가짜로 사랑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는 듯,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함없이'라는 말은 원문으로는 '부패함 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불순하고 영적이지 않게 사랑하고 있었음을 사도 바울이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역시 가짜로 모방될 수 있다.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없이도 사람들은 이런 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이 좋은 실례일 것이다. 그들을 그들의 눈이라도 뻬어 사도 바울에게 주려고 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헛된 것으로 드러날까 봐 그리고 그가 그들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된 것이 될까 봐 두려워했다(갈 4:11, 15).
 
 
 
 
일곱 번째 소극적 표지 : 감정의 정도
 
사람들이 여러 신앙감정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거짓된 믿음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이 되기 쉬우며, 참된 믿음 안에 있는 온전함과 조화가 없지만, 매우 다양한 거짓 감정들을 합하면 은혜로운 감정과 닮은 것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은혜로운 모든 감정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다. 방금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나 사울이나 아합이나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처럼 죄에대한 경건한 슬픔에도 가짜가 있다(출 9:27 ; 삼상 24:16-17, 26:21 ; 왕상 21:27 ; 민 14:39-40).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우상들을 섬겼던 사마리아인들에게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도 모조품이 있다(왕하 17:32-33). 시편 66편 3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들도 하나님께 굴복하지만 그런 경외와 굴복은 가짜다. 홍해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과(시 106:12), 문둥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앗수르의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도 모조품이 있다.
 
그리고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마 13:20) 특히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서처럼(요 5:35) 영적인 기쁨에도 모조품이 있다. 예후와(왕하 10:16) 회심하기 전의 바울과(갈 1:14, 빌 3:6)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서처럼(행 22:3 ; 롬 10:2) 열심에도 가짜가 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발람의 갈망들과 같은 진지한 종교적 갈망이 있을 수도 있다. 발람은 모든 다른 열방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된 상태를 특별하게 내다보며 이런 갈망들을 표현했다(민 23:9-10). 바리새인들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강하게 소망할 수도 있다.
 
회심하기 전 상태에서 사람들이 신앙감정과 유사한 모든 감정 가운데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유사한 감정을 동시에 함께 체험할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자주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짓된 감정이 높이 고양될 때 다른 많은 거짓 감정들도 함께 체험하는 것 같다. 나사로를 기적적으로 다시 일으키신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를 맞이한 다수의 군중은 동시에 아주 많이 신앙심으로 감동된 것 같다. 그들의 마음은 찬탄으로 가득 찬 것 같았고, 또한 그리스도가 밟고 가시는 길에 옷을 깔면서까지 큰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크고 선한 일을 크게 감사하며 큰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찬양했다. 그들을 예수께서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믿고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열망했으며 그 나라를 크게 소망하고 많이 기대하면서 그 나라가 곧 나타날 것을 고대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찼고, 그들의 외치는 소리는 크게 고조되어 온 예루살렘이 그들의 소동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열정을 가지고 아무 주저 없이 예수님을 맞이했고 거대한 유월절 축제 기간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어떤 감정이 매우 크게 고조될 때 왜 그것이 다른 감정들을 자극하는지는 자연의 원리와 감정의 본질에서 볼 때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들에게처럼 고조되는 감정이 사랑의 모조품일 때 그 사랑은 다른 감정들을 자극하게 된다. 자연적으로 사랑은 다른 많은 감정들을 자극하여 이끌어 낸다. 왜냐하면 상술한 것처럼 사랑은 모든 감정 가운데 으뜸이며, 원천이기 때문이다. 얼마동안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큰 고통과 공포 속에 있다가 심한 고민과 염려로 마음이 약해져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까지 갔던 어떤 사람이 사단의 속임수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셨으며, 자신을 깊은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확신하게 되었다고 하자. 아름다운 얼굴로 자신을 향해 웃으시며 두 팔을 벌리고,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갑자기 어떤 환상이나 강렬한 생각이나 상상으로 생겨났을 때, 이 사람이 복음에 계시된 구원의 길과 그리스도의 신적 탁월성과 충만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경험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에게 '내 아들아, 기뻐하라, 너의 죄가 사함을 받았느니라' 또는 '두려워 말라 너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을 때 이전에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고 또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마음을 드린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이 말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다양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또는 연이어서 생겨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또한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이 아주 두려운 파멸의 늪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상상 속의 하나님이나 구속주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과 놀라운 기쁨으로 하늘까지 높아지는 이유는 단순한 자연의 법칙으로도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영혼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놀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상상 속의 하나님이나 구주를 특별히 사랑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이제 그 사람의 마음은 경탄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되고, 그는 입을 열어서 그가 체험한 것을 늘어놓게 된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다른 것은 거의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높이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기뻐하자고 권유하고, 기쁨에 찬 얼굴을 한 채 큰 소리로 자신의 체험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불평으로 가득 찼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쉽게 순복하게 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며, 자신의 타락성을 크게 통곡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겸손하게 되어, 잘 길들여진 양처럼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면서, '왜 저입니까? 왜 저입니까?'라고 외치게 된다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말한 사울처럼 그리고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말한 다윗처럼; 삼하 7:18).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의 행복한 상황을 인정해 주고 또 찬양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자기와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존중하면서 경탄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 또한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체험한 것들을 경시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감을 가지게 되며, 노골적으로 그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면서, 마치 자신의 편에 속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듯 행동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의심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에게 어려움을 주는 듯한 사람에게는 경멸적이고 비난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감정의 열기가 지속되는 동안, 그는 그런 감정적 체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잘되게 하려고 힘꺼 수고하며, 자신의 유익을 거부한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는 것처럼 자신의 편에 속한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려고 진지하게 욕구를 노력하는 듯하다.(156)
그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도 계속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사랑의 모조품에서 다른 거짓된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양자의 경우 모두 사랑은 감정의 원천이며 다른 감정들은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다. 사람에게 있는 다양한 기능과 원리와 감정은 마치 하나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통로들과 같다. 그 샘의 근원에 달콤한 물이 있다면, 그 달콤한 물은 그 곳에서 다양한 통로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만일 그 원천의 물에 독성이 있다면, 그 독성 있는 물이 다양한 통로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통로들과 물줄기들은 서로 비슷하며 일치하겠지만, 그 물의 본질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의 본성은 한 뿌리에서 나온 수많은 가지를 가진 나무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그 뿌리의 진액이 좋으면, 그 좋은 진액이 가지 전체로 전달될 것이고 맺히는 과실 역시 좋고 싱싱할 것이다. 하지만 뿌리와 나무 둥지의 진액이 썩어 있다면, 가지에 전달되는 진액 역시 그러할 것이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과실은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나무 자체는 비슷하고 그 모양이 아주 닮아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열매를 먹어 보면 그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적어도 어느 정도로는 성도와 위선자 사이에 종종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나 경험한 사람이 표현하는 것을 보면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 사이에는 때로 매우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차이와 비슷하다. 그 꿈들을 매우 닮아 있는 듯했다.
 
요셉이 그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 그가 옥에서 풀려나게 될것이고 바로의 은총을 다시 입게 되어, 궁중 안에서 그 영예로운 직위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빵 굽는 관원장은 큰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였지만 그는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그의 꿈은 자신의 동료의 꿈처럼 길하고 좋은 징조의 꿈인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꿈은 그것과 정반대의 꿈이었다.
 
 
(156)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지는 못한다. 교회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슬픔과 영혼의 회심에 대한 갈망도 그것을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이런 것들은 육신에 속한(carnal)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참된 은혜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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