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믿음의 선진들

신앙감정론_제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헤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신앙감정론_제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헤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taelinj/30096827662

1. 첫 번째 소극적 증거 : 감정의 강도
 
신앙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에 지나친 감정 모두를 쉽게 정죄한다. 어떤 사람들의 신앙감정이 특이할 정도로 도를 넘어서는 것 같을 때, 이 사람들은 그런 감정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되며 더 이상 조사해 보지도 않은 채 그런 감정들은 기만적인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위에서 검증한 바와 같이 만일 참된 믿음이 신앙감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참된 믿음이 강하게 존재하는 곳에는, 신앙감정이 크게 발휘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의 심령 속에 있는 참된 믿음이 높이 고양되면, 신령하고 거룩한 감정 역시 고양될 것이다.
 
사랑은 하나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리스도인이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크고도 깊이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우리는 죄를 너무 크게 미워해서는 안 되며 죄를 너무 깊게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비와 타락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해 크고도 깊은 감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또는 하나님과 거룩함을 아주 크고 강하게 갈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의 신앙감정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믿음에 속한 일들에 대해 더 이상 감정적으로 자극되지 않는 것 때문에 내가 수치스럽게 느낄 이유는 없어. 내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지 않는 것과 죄를 더 크게 미워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해 더 크게 감사하지 않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어느 누가 벌레 같은 죄인들과 반역자들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셔서 죽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읽고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더 이상 감동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감동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누가 지나친 감정은 부적절하며 그리스도인이 열광주의자가 되는 것은 너무 바람직하지 못하고 참된 믿음에 해롭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도에 지나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성경 본문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을 말씀하면서 크고 높이 고양된 감정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은 가능한 언어 가운데 최상급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종종 우리가 매우 높이 고양된 감정들을 품도록 요구한다. 그래서 율법의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마치 말로는 그 정도를 표현하기 부족한 듯이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도들은 아주 큰 기븜을 가지도록 요구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마 5:12)고 말씀하신다.이런 말씀도 있다. "의인을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시 68:3). 같은 시편에서 성도들은 종종 "즐거운 소리로 외칠지어다"라고 요구받으며 누가복음 6장 23절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말씀하신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깊이 감사드리도록, 그들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마음을 다해 높여 드리도록, 그들의 영혼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찬양하며, 주님의 놀라운 일들을 선전하고, 그분의 사역을 선포하도록 요구받는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들의 지고한 감정적 체험들을 표현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마치 자기의 사랑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는 또한 죄를 깊이 혐오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시 139:21-22). 시편 기자는 또한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표현한다. 그는 자기의 죄악이 자기의 머리에 넘펴서 무거운 짐 같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종일토록 슬픔으로 다니며, 자신의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고, 슬픔으로 자신의 뼈가 쇠했다고 말한다. 또한 시편 기자는 종종 가장 강한 표현들을 많이 사용ㅇ하여 깊은 영적 갈망들을 표현한다. 그는 주를 갈망하기를 물이 없어 마르고 메마른 땅이 물을 갈망하듯 하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며, 그의 육체와 마음이 함께 주를 찾아 외치고, 그의 영혼이 부서지는 듯 주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시편 기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극도로 슬퍼한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시 119:136). 같은 장 53절은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라고 말씀한다. 그는 또한 큰 기쁨을 표현한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시 21:1).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시 71:23).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 63:3-7).
 
사도 바울은 지고한 감정적 체험을 자주 표현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동정심과 관심 때문에 자기 마음이 고통당하고 있음을 자주 표현한다. 그는 크고 열정적이고 풍성한 사랑과 진지한 갈망과 열망과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그는 앞에서 이미 인용된 구절들에서 자신의 영혼이 경험하는 환희와 승리, 간절한 기대와 소망, 풍성한 눈물, 영혼의 고통, 불쌍히 여기는 마음, 슬픔, 간절한 갈망, 경건한 질투심 그리고 불타는 열정에 대해 말한다.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했던 그 복된 여인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신앙감정이 고조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마 28:8).
 
장차 땅 위에 복된 시기가 올 때에 하나님의 교회가 크게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 자주 예언되었다.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빛에 다니며 종일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며 주의 의로 인하여 높아지오니"(시 89:15-16).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슥 9:9). 같은 내용이 수없이 많은 구절에서 제시된다. 큰 기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낳는 당연한 참된 열매이기 때문에 천사는 이 복음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불렀다.
 
최고로 완벽한 경건을 소유하고 있는 천국의 성도들과 천사들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들을 보고 묵상할 때 감정적으로 크게 감화될 것이다. 그들 속에 있는 사랑과 크고도 강한 기쁨과 감사로 그들 모두는 하늘에 속한 순수한 불꽃과 같이 된다. 그들의 찬양은 많은 물소리와 같고, 커다란 천둥소리와 같다. 그들의 감정이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감정보다 훨씬 더 높이 고양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을 감화시키는 대상들을 더 참되게 바라보고, 그들의 감정을 그 대상들의 본질에 더 일치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상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앙감정의 천상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과 그 본질과 종류가 같다면, 지상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이 더 높이 고양될수록, 천국에서 누릴 감정에 더 근접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써 지상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이 천국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과 좀더 일치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신앙감정이 매우 높이 고조된다는 것이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없기 때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감정이 너무 고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열광주의자로 정죄하는 사람들은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앙감정이 단지 크게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그 감점ㅇ들이 반드시 영적이고 은혜로 말미암았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영적인 일들을 판단할 때 확실하고도 무오한 기준인 성경은, 매우 높이 고양되긴 했지만 영적이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신앙감정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의 감정이 크게 고조되었지만 그것들이 결국에는 헛것이었으며,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말씀한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 4:15). 11절에서 사도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홍해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심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크게 감화되어 하나님을 찬송햇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또한 시내 산에서 하나님 자신의 놀라운 현현을 보고 크게 감동했고, 하나님께서 거룩한 언약을 세우셨을 때 크게 관심을 보이며 아주 당당하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응답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나 빨리 이런 큰 담대함과 관심이 사라져 버렸던가? 얼마나 빨리 그들은 마음을 돌려 다른 신을 좇고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 주위를 돌며 즐거워하고 소리쳤던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내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큰 무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극도로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마치 땅이 예수께서 타신 나귀가 밟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듯이 그들은 감람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펴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하여 온 성이 소란스럽게 되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떤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보고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요 12:18). 이 때에 큰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치자, 바리새인들은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서로 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는 당시에 참된 제자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이 야단법석을 끝이 나 버렸던가? 이 모든 소동은 예수께서 잡히셔서 흉포를 입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시며 채찍을 맞으시고, 정죄를 받아 사형에 처해졌을 때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전처럼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이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침이었다. 그것은 '호산나, 호산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었다.
 
신앙감정이 매우 높게 고양된다 할지라도, 참된 신앙과 완전히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정통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136)
 
 
(136) 스토다드 목사는 일반적 감정이 때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감정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말한다. Stoddard, A Guide to Christ(Boston, 1735, 1st ed. 1714), p.21. [에드워즈는 1735년 판을 인용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스토다드의 저작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앞의 편집자 서문을 보라].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