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감정론_제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2.
신앙감정론_제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2.
자료출처http://blog.naver.com/taelinj/30096714793
제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 1~10 중 7~10
7.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전체 교회의 머리로,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참된 믿음과 미덕의 완전한 모범으로, 그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양무리가 따라야 할 목자로 보내신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심령을 가진 분이셨다. 그리고 주님의 미덕은 거룩한 감정들로 많이 표현되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가장 강하고 생생하고 열렬하게 사랑하신, 가장 위대한 모본이셨다.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씨름하실 때, 극심한 갈등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능력은 너무나 커서 죽음보다 더 강했으며,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두려움과 슬픔 같은 강력한 본성적인 감정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은 또한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도 감정으로 가득 찬 분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시편 69편을 성취하는 주님의 큰 열심을 읽게 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시는 주님에 대해 읽게 된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또한 우리는 경건치 못한 자들의 죄와 비참을 생각하시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읽으며,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누가복음 13장 34절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을 읽게 된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심(마 15:32, 18:34; 눅 7:13)을 읽게 되며 민망히 여기심(마 9:36, 14:14; 막 6:34)을 읽게 된다. 우리는 또한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버니의 일 때문에 슬픔에 잠겨서 원망과 눈물로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우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대로 비록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곧 기쁨이 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그들의 슬픔을 느끼시고 그들과 함께 우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설교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따.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된 고별 설교에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갈 것이며, 주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은 세상에서 큰 환난과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으며,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 아넹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마치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요한복음 17장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제자들과 당신의 모든 교회를 위해 사랑이 넘치는 중보 기도를 하시면서 고별설교를 마무리하셨다. 사람이 기록하거나 입으로 전달한 설교 가운데 이 설교가 가장 애정이 넘치고 감정이 넘치는 설교인 것 같다.
8.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그것도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 역시 주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으로 고양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도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과 똑같이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혈과 육에서 떠나 있고,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라는 법칙을 따라 그들 영혼의 감정들과 함께 움직이는 체액들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넘치는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닐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감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감정들을 말하는데 그 감정 가운데서 주된 것은 사랑과 기쁨이다. 이런 감정들이 영혼 속에 있기 때문에 영혼이 몸 속에 있든 몸 밖에 있든 상관 없이 영혼은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고 움직이게 된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정도로 사랑과 기쁨 같은 감정들이 영혼 속에 있을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게 되고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강하게 감정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 밖에 있는 영혼 또는 영화된 몸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영혼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분리된 영혼 속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같은 종류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하늘에 속한 빛과 생명과 축복의 시작이요 여명이다. 그리고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비록 그 정도와 환경은 다를지라도 천국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과 유사한 것이며 본질상 같은 것이다. 여러 성경 구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는데 그 중에 잠언 4장 18절, 요한복음 4장 14절, 6장 40절, 47절, 50-51절, 54절, 58절, 요한일서 3장 15절, 고린도전서 13장 8-12절이 있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이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과 비교할 때 그 정도와 환경뿐만 아니라 그 본질에서도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혈액과 본능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비록 혈액과 본능이 마음의 감각에 어떤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혈액과 본능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감각이 있는데 이것은 체액에 미치는 어떤 영향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이 마음의 감각은 몸 안에 있는 체액들의 움직임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몸이 없는 영혼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몸 안이든 밖이든 어디든지 바로 이 마음의 감각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감각 또는 일종의 영적 감각 또는 느낌 그리고 영혼의 움직임 바로 이것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껴서(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움직일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이런 내적 감각과 움직임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처럼 매우 강하게 작용할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한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 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감각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며 활력을 주고 사로잡으며 그들을 뜨거운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니라면 '감정' 이라는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얼굴과 그들의 구속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구속주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하고, 그들을 위해 구속주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음을 깊이 생각할 떄, 그들의 마음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감정적으로도 절대로 영향받지 않을 걳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에 내재한다. 어떤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려면 우리는 그 사물이 순수하고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금의 참된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금광석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순화된 상태에서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된 경건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함과 혼합도 없이 최고로 완벽한 상태에서 오로지 참된 경건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참으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외인들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위로부터 낳음을 입었고, 하늘이 그들의 본향이며, 이런 신적인 출생으로 생긴 그들의 본성은 하늘에 속한 본성이다. 그들은 하늘에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참된 경건과 믿음의 원리가 그들 안에 있으며, 그것은 하늘의 경건이 전달된 것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장차 그들이 받을 영광의 여명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영광스러운 세계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9.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과 경건의 표현 수단으로 제정하신 여러 원리와 의무의 본질 그리고 양식을 보면 분명해진다.
기도를 예로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완전성. 존엄. 거룩하심. 선하심. 자기 충족성. 우리의 비참함. 허망함. 의존성. 무가치함 그리고 우리의 소원과 갈망을 선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신다.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울어지게 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강요하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우리의 심령을 적절하게 감정적으로 자극하게 하여 우리가 구하는 복들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에배할 때 습관적으로 겸손과 경외심을 표현하도록 의도된 제스처나 외적 행동 양식들은 우리들 자신의 심령이나 다른 사람들의 심령을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신앙감정을 고무시키고 표현하기 위해 만드신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때 산문으로가 아니라 시로써, 그것도 음악과 함께 하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구조가 시와 음악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례의 본질과 양식도 같은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 인간의 구조를 염두에 두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위대한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귀로 듣도록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런 일들에 대해 교훈을 얻도록 정하셨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위대한 일들이 성례라는 시각적인 표상으로 우리 눈앞에 제시되도록 하셨다. 그것은 성례가 우리의 감정에 더욱 큰 영향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일들을 인간의 심령과 감정에 각인시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의 위대하고 중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당신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열려지고 적용되며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단지 사람이 훌륭한 성경주석서나 강해서를 갖거나 훌륭한 경건서적을 갖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제도를 세우실 때 마음 속에 품으셨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뿐만 아니라 이런 서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교리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설교만큼 사람의 심령과 감정에 인상을 심어 주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설교로 사람에게 특별히 생생하게 적용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설교야말로 믿음과 경건에 속한 중요한 사항들 즉 인간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그 비참함을 치유하는 치료책의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그 치유책의 영광스러움과 충분함에 대해 죄인들을 감정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다. 설교는 종종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배운 바 있는(벧후 1:12-13) 경건에 속한 위대한 일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적절한 체계로 제시함으로써 성도들의 순수한 마음을 각성시키고 그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사랑과 기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또는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또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사랑 아넹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엡 4:1-12).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사역을 가르치고 권면할 때 사도는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중요한 목적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한다(딤전 1:3-5).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수단으로 성도들에게 고양시키고자 하시는 또 하나의 감정은 기쁨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부른다(고후 1:24).
10.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도처에서 죄와 마음의 완악함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3:5). 사람들은 이런 완악한 마음 때뭉네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가 쌓는도다"(롬2: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3:7). 광야에 있었던 완악하고 반역적인 세대가 사악했던 이유는 그들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7-10). 시드기야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었다.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대하 36:13). 마음의 강퍅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63:17).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 역시 그들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행19: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 마음의 죄악과 부패함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요12:40). 사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가는 악한 마음과 강퍅한 마음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노하심을 격동하여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8).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2-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겔 11:19; 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것은 감정이 없는 마음 또는 덕스러운 감정들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감동되지 않고 쉽게 인상을 주기 어려운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굳은 마음을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읽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두 마음은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인상을 받는 마음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요시야를 칭찬하셨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다는 말은 그의 마음에 경건한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22:19).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의 본문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굳은 마음이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타조는 자기 새끼를 본성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욥기는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욥 39:16)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감정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강퍅한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퍅함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죄의 근원은 거룩함의 결여나 부족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따라서 죄가 강퍅한 마음과 경건한 감정이 결여된 마음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거룩함은 그런 경건한 감정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감정들이 부드러운 마음의 산물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미움과 분노와 허영과 다른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높이는 감정들은 강퍅한 마음에서 잘 자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강퍅함과 마음의 부드러움은 감정들과 관련된 표현이고, 마음이 어떤 감정들에게서는 쉽게 영향을 받지만 어떤 감정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여러 감정들은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요컨대 나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고도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 마음 속에 현존해 있는 감정의 강도와 정확하게 일치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들의 마음 속에도 영적이지 않은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신앙감정은 종종 혼합되어 있다. 모든 감정들이 은혜의 산물은 아니며 대부분 본능적 감정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감정들이 거하는 곳이 몸은 아니라 하더라도 몸의 상태는 마음 속의 현존하는 감정에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감정은 습관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정도를 감정이 작용하는 습관의 정도와 강도에 따라서 판단해야지 감정의 작용 자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습관성의 강도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현상 또는 마음의 생각이 갑작스럽게 변하면서 나타나는 내적인 영향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진리의 빛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습관과 원리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감정적 작용에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자료출처http://blog.naver.com/taelinj/30096714793
제1부 감정의 본질과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1. 감정이란 무엇인가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3. 신앙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 적용
2. 감정은 참된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 : 1~10 중 7~10
7. 하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전체 교회의 머리로,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참된 믿음과 미덕의 완전한 모범으로, 그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양무리가 따라야 할 목자로 보내신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심령을 가진 분이셨다. 그리고 주님의 미덕은 거룩한 감정들로 많이 표현되었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가장 강하고 생생하고 열렬하게 사랑하신, 가장 위대한 모본이셨다. 주님이 간절히 기도하시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씨름하실 때, 극심한 갈등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사랑의 능력은 너무나 커서 죽음보다 더 강했으며,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에 두려움과 슬픔 같은 강력한 본성적인 감정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런 거룩한 감정 때문이었다. 주님은 또한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도 감정으로 가득 찬 분이셨던 것 같다. 우리는 시편 69편을 성취하는 주님의 큰 열심을 읽게 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슬퍼하시는 주님에 대해 읽게 된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또한 우리는 경건치 못한 자들의 죄와 비참을 생각하시고 눈물로 호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읽으며,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통곡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1-42). 누가복음 13장 34절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원을 읽게 된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심(마 15:32, 18:34; 눅 7:13)을 읽게 되며 민망히 여기심(마 9:36, 14:14; 막 6:34)을 읽게 된다. 우리는 또한 마리아와 마르다가 오라버니의 일 때문에 슬픔에 잠겨서 원망과 눈물로 주님께 왔을 때 주님은 그들과 함께 우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대로 비록 주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면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곧 기쁨이 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주님은 그들의 슬픔을 느끼시고 그들과 함께 우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설교는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따.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에 기록된 고별 설교에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갈 것이며, 주님께서 떠나신 후에 제자들은 세상에서 큰 환난과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셨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으며,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성령 아넹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마치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언을 하시듯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요한복음 17장이 기록하고 있는 대로 제자들과 당신의 모든 교회를 위해 사랑이 넘치는 중보 기도를 하시면서 고별설교를 마무리하셨다. 사람이 기록하거나 입으로 전달한 설교 가운데 이 설교가 가장 애정이 넘치고 감정이 넘치는 설교인 것 같다.
8.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천국에는 의심할 바 없이 참된 믿음과 경건이 있다. 그것도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경건이 있다. 천국을 묘사한 성경에 따르면 하늘에 속한 믿음과 경건 역시 주로 거룩하고 강렬한 사랑과 기쁨 그리고 이 사랑과 기쁨이 열정적으로 고양되도록 표현한 찬양 속에 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도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경건과 똑같이 사랑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혈과 육에서 떠나 있고, 영혼과 육체의 연합이라는 법칙을 따라 그들 영혼의 감정들과 함께 움직이는 체액들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넘치는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닐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육신의 감정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감정들을 말하는데 그 감정 가운데서 주된 것은 사랑과 기쁨이다. 이런 감정들이 영혼 속에 있기 때문에 영혼이 몸 속에 있든 몸 밖에 있든 상관 없이 영혼은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고 움직이게 된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정도로 사랑과 기쁨 같은 감정들이 영혼 속에 있을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게 되고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다시 말하면 강하게 감정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 밖에 있는 영혼 또는 영화된 몸 안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즉 우리는 그런 상태에서 영혼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분리된 영혼 속에 있는 사랑과 기쁨이 같은 종류라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하늘에 속한 빛과 생명과 축복의 시작이요 여명이다. 그리고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은 비록 그 정도와 환경은 다를지라도 천국에서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과 유사한 것이며 본질상 같은 것이다. 여러 성경 구절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는데 그 중에 잠언 4장 18절, 요한복음 4장 14절, 6장 40절, 47절, 50-51절, 54절, 58절, 요한일서 3장 15절, 고린도전서 13장 8-12절이 있다. 따라서 천국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사랑과 기쁨이 지상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거룩한 사랑과 기쁨과 비교할 때 그 정도와 환경뿐만 아니라 그 본질에서도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한 천국의 성도들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혈액과 본능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비록 혈액과 본능이 마음의 감각에 어떤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혈액과 본능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감정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마음의 감각이 있는데 이것은 체액에 미치는 어떤 영향보다도 선행한다. 따라서 이 마음의 감각은 몸 안에 있는 체액들의 움직임에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몸이 없는 영혼 속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몸 안이든 밖이든 어디든지 바로 이 마음의 감각이 있게 된다. 바로 이런 내적 감각 또는 일종의 영적 감각 또는 느낌 그리고 영혼의 움직임 바로 이것을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이 무엇인가를 느껴서(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에 따라 움직일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이런 내적 감각과 움직임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처럼 매우 강하게 작용할 때 영혼은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에서 천국을 묘사한 것을 보면 천국의 성도들에게 있는 사랑과 기쁨은 넘치도록 크고 활기 차서 가장 강하고 가장 생생한 감각작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달콤하게 심령을 움직이고 성도들을 강력하게 자극하며 활력을 주고 사로잡으며 그들을 뜨거운 불꽃과 같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랑과 기쁨이 감정이 아니라면 '감정' 이라는 단어는 언어학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얼굴과 그들의 구속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구속주가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하고, 그들을 위해 구속주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음을 깊이 생각할 떄, 그들의 마음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감정적으로도 절대로 영향받지 않을 걳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과 기쁨 가운데 있는 천국의 경건과 믿음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참된 경건은 거의 감정에 내재한다. 어떤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려면 우리는 그 사물이 순수하고 완벽하게 나타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금의 참된 본질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금광석의 상태에서가 아니라 순화된 상태에서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된 경건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함과 혼합도 없이 최고로 완벽한 상태에서 오로지 참된 경건만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참으로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외인들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위로부터 낳음을 입었고, 하늘이 그들의 본향이며, 이런 신적인 출생으로 생긴 그들의 본성은 하늘에 속한 본성이다. 그들은 하늘에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 참된 경건과 믿음의 원리가 그들 안에 있으며, 그것은 하늘의 경건이 전달된 것이다. 그들이 받은 은혜는 장차 그들이 받을 영광의 여명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영광스러운 세계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9.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과 경건의 표현 수단으로 제정하신 여러 원리와 의무의 본질 그리고 양식을 보면 분명해진다.
기도를 예로 들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완전성. 존엄. 거룩하심. 선하심. 자기 충족성. 우리의 비참함. 허망함. 의존성. 무가치함 그리고 우리의 소원과 갈망을 선포하도록 정해 놓지는 않으신다. 또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울어지게 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강요하라고 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표현하는 것들이 우리의 심령을 적절하게 감정적으로 자극하게 하여 우리가 구하는 복들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에배할 때 습관적으로 겸손과 경외심을 표현하도록 의도된 제스처나 외적 행동 양식들은 우리들 자신의 심령이나 다른 사람들의 심령을 감정적으로 자극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노래로 찬양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신앙감정을 고무시키고 표현하기 위해 만드신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표현할 때 산문으로가 아니라 시로써, 그것도 음악과 함께 하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구조가 시와 음악을 들으면 감정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례의 본질과 양식도 같은 사실을 가르친다. 우리 인간의 구조를 염두에 두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위대한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귀로 듣도록 하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런 일들에 대해 교훈을 얻도록 정하셨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그리스도의 구속과 관련된 위대한 일들이 성례라는 시각적인 표상으로 우리 눈앞에 제시되도록 하셨다. 그것은 성례가 우리의 감정에 더욱 큰 영향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신적인 일들을 인간의 심령과 감정에 각인시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의 위대하고 중요한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당신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열려지고 적용되며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단지 사람이 훌륭한 성경주석서나 강해서를 갖거나 훌륭한 경건서적을 갖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제도를 세우실 때 마음 속에 품으셨던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뿐만 아니라 이런 서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하게 교리적으로 또한 철학적으로 이해시키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설교만큼 사람의 심령과 감정에 인상을 심어 주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설교로 사람에게 특별히 생생하게 적용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설교야말로 믿음과 경건에 속한 중요한 사항들 즉 인간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그 비참함을 치유하는 치료책의 필요성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그 치유책의 영광스러움과 충분함에 대해 죄인들을 감정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다. 설교는 종종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배운 바 있는(벧후 1:12-13) 경건에 속한 위대한 일들을 성도들로 하여금 다시 기억하게 하고, 성도들에게 적절한 체계로 제시함으로써 성도들의 순수한 마음을 각성시키고 그들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바 있는 사랑과 기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또는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또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사랑 아넹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엡 4:1-12).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 사역을 가르치고 권면할 때 사도는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는 중요한 목적이 사랑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한다(딤전 1:3-5).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수단으로 성도들에게 고양시키고자 하시는 또 하나의 감정은 기쁨이다. 그래서 사역자들을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부른다(고후 1:24).
10. 참된 믿음 또는 거룩한 심령이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죄를 마음의 완악함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성경은 도처에서 죄와 마음의 완악함을 연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을 향해 근심하시고 노하셨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3:5). 사람들은 이런 완악한 마음 때뭉네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가 쌓는도다"(롬2:5).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3:7). 광야에 있었던 완악하고 반역적인 세대가 사악했던 이유는 그들 마음이 강퍅했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시95:7-10). 시드기야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한 것 역시 그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었다.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대하 36:13). 마음의 강퍅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게 된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63:17).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 역시 그들 마음의 강퍅함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행19: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 마음의 죄악과 부패함에 내버려 두시는 것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표현한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요12:40). 사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가는 악한 마음과 강퍅한 마음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노하심을 격동하여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8).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3:12-13). 사람을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며 그 부패함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으로 묘사한다(겔 11:19; 36:26).
여기서 굳은 마음이라는 것은 감정이 없는 마음 또는 덕스러운 감정들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마음은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지하며 감동되지 않고 쉽게 인상을 주기 어려운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굳은 마음을 돌과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며, 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되는 마음과 상반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읽게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두 마음은 상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드러운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적으로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인상을 받는 마음인가?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요시야를 칭찬하셨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음이 부드러웠다는 말은 그의 마음에 경건한 신앙감정이 있어서 쉽게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22:19).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은 어린 아이들이 다른 일들로 쉽게 감동받는 것처럼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로 쉽게 감정이 영향을 받고 감동되는 마음을 뜻한다.
성경의 본문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굳은 마음이란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타조는 자기 새끼를 본성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욥기는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욥 39:16)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위험에 빠졌을 때에도 감정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강퍅한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잠 28:14).
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경건한 감정이 없는 마음을 뜻하며, 성경은 자주 마음의 죄와 부패함을 마음의 강퍅함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그 반대로 은혜로운 마음과 거룩함은 경건한 감정을 소유하는 것과 그런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죄의 근원은 거룩함의 결여나 부족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따라서 죄가 강퍅한 마음과 경건한 감정이 결여된 마음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거룩함은 그런 경건한 감정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감정들이 부드러운 마음의 산물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미움과 분노와 허영과 다른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높이는 감정들은 강퍅한 마음에서 잘 자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강퍅함과 마음의 부드러움은 감정들과 관련된 표현이고, 마음이 어떤 감정들에게서는 쉽게 영향을 받지만 어떤 감정들에게는 굳게 닫혀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 여러 감정들은 뒤에 가서 더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요컨대 나는 참된 믿음과 경건은 대부분 감정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고도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이 마음 속에 현존해 있는 감정의 강도와 정확하게 일치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들의 마음 속에도 영적이지 않은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신앙감정은 종종 혼합되어 있다. 모든 감정들이 은혜의 산물은 아니며 대부분 본능적 감정일 수 있다. 그리고 비록 감정들이 거하는 곳이 몸은 아니라 하더라도 몸의 상태는 마음 속의 현존하는 감정에 매우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거룩한 감정은 습관적이기 때문에 믿음의 정도를 감정이 작용하는 습관의 정도와 강도에 따라서 판단해야지 감정의 작용 자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습관성의 강도는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현상 또는 마음의 생각이 갑작스럽게 변하면서 나타나는 내적인 영향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앙은 대부분 감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이 없이는 참된 신앙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진리의 빛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마음 속에 거룩한 감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습관과 원리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감정적 작용에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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