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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진들

장 칼뱅

장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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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칼뱅
Jean Calvin
출생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국기 프랑스 피카르디
사망 1564년 5월 27일
스위스의 국기 스위스 제네바
직업 신학자
개혁주의
(칼뱅주의)
배경
개신교
아우구스티누스
종교개혁
다섯 솔라
도르트 총회
95개조 논제
특징
5대 강령 (TULIP)
언약신학
예배의 규정적 원리
주요 문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기독교 강요
제네바 성경
종교 개혁 이전 운동
후스파
롤라드파
발도파
종교 개혁 시기 운동
재세례론
성공회
칼뱅주의
반종교 개혁
루터주의
폴란드 형제회
항의파
교파
개혁교회
장로교회
개혁침례교회
주요 인물
장 칼뱅, 마르틴 루터, 존 낙스,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휘트필드, 찰스 스펄전, 아더 핑크, 프란시스 쉐퍼, 마틴 로이드 존스, 로버트 스프로울, 존 파이퍼, 김홍전 v  d  e  h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장로교를 창시한 프랑스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성공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유럽 각 나라의 언어마다 조금씩 다르게 불린다. 한국에서는 칼뱅, 칼빈, 캘빈,깔뱅 등으로 불린다.

목차

[편집] 칼뱅의 언어별 이름

  • 프랑스어: Jean Calvin(장 깔뱅)
  • 영어:John Calvin(존 캘빈, 존 칼빈)
  • 독일어:Johann Calvin(요한 칼빈)
  • 라틴어:Ioanis Calvinus(요아니스 칼비누스, 칼뱅을 칼빈이라고 부르는 것은 칼뱅의 라틴이름에 기인한다.)
  • 네덜란드어:Johannes Calvijn(요하네스 깔페인)

[편집]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35년)

[편집] 출생

장 꼬뱅(Jean Cauvin, 장 칼뱅의 본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역의 누와용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누와용이란 도시는 한때 성 머다드(St. Merdad) 성 엘오이워스 (St. Eloiwas)와 같은 주교들이 살았던 유명한 곳이었다. 또한 후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즉위한 카롤루스 대제가 768년 당시 누우스트리아(라틴어: Neustria, 새로운 땅)이라 불린 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곳이며, 987년에는 카페 왕조의 창시자이자 프랑스의 왕이었던 위그 카페가 왕으로 즉위한 곳이었다. 역사가 윌 듀란트에 따르면 누와용이 교회와 감독에 의하여 지배받는 교회 도시였으며, 이는 칼뱅의 신정정치의 개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처음부터 칼뱅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직자들에 의하여 사회가 지배되는 신정정치의 한 예를 보았다고 한다. [1] 교회도시라는 누와용의 특징으로 인해 칼뱅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가깝게 느꼈다. 칼뱅의 이런 의식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꼬뱅(Gérard Cauvin)은 교회 서기였으며 어머니 쟌느 르프랑(Jeanne Lefranc)은 칼뱅이 어릴 때 사망했다. 칼뱅의 어머니는 깜브레(Cambrai)의 여인숙 주인의 딸인 쟌느 르 프랑끄(Jeanne Le Franc)이었다. 제라드는 노용에서 2 마일 쯤 떨어진 항구로서 외스(Oise)강을 가로지르는 퐁 레베크 (Pont l'Eveque)라는 작은 마을에서 사공(boatman)을 하거나 아니면 물통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아버지의 예리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받았으며 어머니의 경건심을 이어 받았다고 알려진다. 물론 그의 용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누와용 주교 비서 그리고 후에 대성당 참사회 소송 대리인과 그리고 주교의 재정 공중인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와 관련된 제라드의 직업은 부르주아로 신분의 상승을 의미하였고 노용에 있는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갖게 했고 후에 칼빈으로 하여금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다.[2]
제라르과 잔느 르프랑 사이에는 5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샤를르(Charles)는 로마 가톨릭사제가 되었지만 1537년 이단으로 고발되어 파문된 채 사망했다. 둘째가 칼뱅이었고, 셋째인 앙뚜완느(Antoine)는 제네바에서 칼뱅과 합류하여 칼뱅의 신실한 협력자로 일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동생인 앙뚜완느와 프랑수와(François)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3]
칼뱅의 아버지는 아내가 사망한 후 재혼하여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칼뱅의 두 이복동생 가운데 마리(Marie)는 두 오빠를 따라 제네바로 와서 살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한 명은 누와용에 남았다.

[편집] 소년학교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와용의 로마 가톨릭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의 아버지가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카톨릭 교회와의 갈등 그리고 전반적인 신조주의의 대기가 바뀌면서 아들에게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편집] 마르슈

1523년 8월에 칼뱅과 몽모르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칼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4]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다. [5] 꼬르디에르는 근대식 교수법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뱅은 이 학교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562년 꼬르디에르는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다.

[편집] 몽테귀 컬리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Ioanis Calvinus 요아니스 칼비누스로 개명했는데, 이로 인해 이후 프랑스어: Jean Calvin 장 칼뱅[*]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라블레 등에게 배울 수 있었다. 칼뱅이 재학하였던 1514년부터 1528년까지 몽떼귀 컬리지의 교장은 삐에르 땅뻬뜨(Pierre Tempête)였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노엘 베다의 계승자였다.[6] 칼뱅은 여기서 수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는 공동생활형제단근대적 경건 운동과 유명론 등이 신학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콥(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다. 프랑수와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은 당대의 다양한 인문주의종교 개혁 사상을 가진 그룹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의 아들 사형제는 칼뱅의 친구였다. 칼뱅은 콥 가문을 드나들면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칼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그의 사촌인 삐에르 로베르 올리베땅(Pierre Olivetan) 등이 있다. [출처 필요]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7]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그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편집] 법학 공부

젊은 시절의 장 칼뱅
1527년 9월 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뜨비여(Martheville)의 쌩 마르뗑(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 프랑수와 드 꼬낭, 니꼴라 뒤쉐맹등이 있다. .[8]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 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9]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편집] 기독교 강요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파리 국회는 연설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와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èvre d’E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é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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