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비키의 '칼빈주의' : 칼빈주의의 핵심 -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 영광
조엘 비키의 '칼빈주의' : 칼빈주의의 핵심 -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께 영광
blueknif.egloos.com/4710857
3장 하나님 중심주의
이 세상에서 본질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칼빈주의가 아닌 참된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신앙적인 것만큼 우리는 칼빈주의적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서 신앙이 전적으로 올바르게 실현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칼빈주의는 단지 참된 종교의 희망이 아니다. 이 세상에 참된 종교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 벤자민 워필드
3장에서는 칼빈주의의 핵심, 정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1.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
칼빈주의의 핵심 원리들을 3가지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참된 정수는 무엇인지 얘기하려고 한다.
• 예정론
어떤 학자들은 예정론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시간 세계 안에서 발생할 사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으며 모든 일이 절대적인 예정론에 의해 파생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는 대단히 오해할 만한 진술이다. 이러한 극단적 칼빈주의는 성경적 계시를 일종의 이성주의적 신학으로 옮겨 가는 경향을 낳게 된다.
• 언약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 관계가 매우 강조되지만, 이것이 지배적인 개념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든지 아니면 언약의 파괴자라는 위치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칼빈이 모든 교리들을 이 중요한 진리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 하나님의 주권
주권은 ‘통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수위권 곧 최상권, 하나님의 왕권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그분의 주권은 하나님의 불가해한 삼위일체,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선포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야 말로 칼빈주의의 정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을 모든 국면에서 완전하신 분으로, 그리고 모든 의와 거룩을 소유하신 분으로 선언하는 그분의 모든 속성들 안에서 행사된다. 높이 계신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단 4:35) 분이시다. 또한 다른 모든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고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통치하고 명령하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롬 11:36)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예정론에 대해 벤자민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 기자들은, 사건의 과정과 결정과 그 모든 결과들이 의로우며 거룩하고 신실하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보증과 확신 안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위로를 발견했다…신적인 예정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바로 이것을 통해서 가장 은혜로운 행위로서의 예정이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성육신에서도 발견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화하고도 부성적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동의가 있다는 확신 속에서 평강을 누린다. 갈보리 언덕을 향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사랑 안에는 온 세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중심주의(Theocentrism)
메이슨 프리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 사상을, 침레교는 거듭남의 신비를, 루터교는 이신득구 교리를, 모라비안 교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희랍정교회는 성령의 신비를,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최전방에 두는 것과 같이, 칼빈주의자는 언제나 최전방에 하나님을 둔다.”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만물을 향하여,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들의 노력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하여 포괄적이고도 주권적이며 부성적인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오직 의무만 가지고 있을 뿐 청구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신론,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성적이며 주권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다. 스프롤(R. C. Sproul)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이간의 본질과 성격, 성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역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질, 하나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구원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여 세워지는 표준으로서의 윤리의 본질, 그리고 다른 수많은 신학적 고찰들을 이해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교리를 하나님 중심으로 정의한다. 죄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혐오스러운 것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지극히 훌륭한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만유 가운데 만유로 계시는 곳이니 영광스러운 곳이며, 지옥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진노를 나타내는 곳이기 때문에 참으로 지독하게 끔찍한 곳이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학적 진술들은 대부분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품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셨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은밀한 것까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도나 부흥이 그들의 가장 위대한 관심사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에 마땅히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다. 곧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 영광돌리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최대 목적이다.
3. 교회와 칼빈주의의 표지
지난 수세기 동안 ‘하나님 중심’이라는 슬로건은 교회의 이정표였고, 특히 칼빈과 칼빈주의의 표지였다. 여기에 몇 가지 실례들이 있다.
• 어거스틴
“그 모든 배역의 시기에 나의 자유의지는 어디 있었을까? 내가 한때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무익하고도 쓸데없는 기쁨들을 모두 없애 주신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진실하신 주님만이 나의 주권적인 기쁨이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서 몰아내셨다. 모든 빛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님께서 나에게 그 모든 쾌락보다 더 달콤핟고도 아름다운 기쁨이 되어 주셨다…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빛이시여, 나의 행복이시여, 나의 구원이시여!”
• 칼빈
칼빈의 삶 자체가 하나님 중심주의에 대한 풍성한 주석과 설명을 제공해 준다. 여러 결점들이 있었지만,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분투했다.
• 조나단 에드워즈
청교도들은 칼빈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들로서, 모든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람이 바로 18세기 뉴잉글랜드의 개혁주의 신학인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행복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위해 천국에 가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또는 자녀들과 세상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모두 다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본체이시다. 이것들은 모두 다 흐트러진 빛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양이시다. 이것들은 다 시내요 개울이지만, 하나님은 그 시내의 근원이시다. 이것들은 모두 다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대양이시다.”
• 그 밖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고백
앤드류 보나르(Andrew Bonar)와 같은 장로교도의 일기나 존 뉴턴(John Newton)같은 영국국교도의 편지, 스펄전과 가은 침례교 목사의 설교에도 하나님 중심주의가 잘 들어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인 열정은 오늘날 우리의 타락과 신학적 과오로 말미암아 대부분 상실되고 말았다. 소위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고, 결국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도 잃어버렸다. 복음주의는 인간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에 제시된 실재와 아주 거리가 먼 견해를 조장하고 증진시켰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다루기 쉬운 하나님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결국 평안과 안락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거북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어떤 값으로라도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오직 하나님에게만 푹 빠져 있으며,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칼빈주의적 종교 개혁의 참된 아들과 딸인가?
blueknif.egloos.com/4710857
3장 하나님 중심주의
이 세상에서 본질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칼빈주의가 아닌 참된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신앙적인 것만큼 우리는 칼빈주의적이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서 신앙이 전적으로 올바르게 실현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칼빈주의는 단지 참된 종교의 희망이 아니다. 이 세상에 참된 종교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 벤자민 워필드
3장에서는 칼빈주의의 핵심, 정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1.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
칼빈주의의 핵심 원리들을 3가지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참된 정수는 무엇인지 얘기하려고 한다.
• 예정론
어떤 학자들은 예정론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시간 세계 안에서 발생할 사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으며 모든 일이 절대적인 예정론에 의해 파생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는 대단히 오해할 만한 진술이다. 이러한 극단적 칼빈주의는 성경적 계시를 일종의 이성주의적 신학으로 옮겨 가는 경향을 낳게 된다.
• 언약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 관계가 매우 강조되지만, 이것이 지배적인 개념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든지 아니면 언약의 파괴자라는 위치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칼빈이 모든 교리들을 이 중요한 진리를 바탕으로 구성한 것은 아니다.
• 하나님의 주권
주권은 ‘통치’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수위권 곧 최상권, 하나님의 왕권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그분의 주권은 하나님의 불가해한 삼위일체,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한도 내에서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선포한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야 말로 칼빈주의의 정수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을 모든 국면에서 완전하신 분으로, 그리고 모든 의와 거룩을 소유하신 분으로 선언하는 그분의 모든 속성들 안에서 행사된다. 높이 계신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단 4:35) 분이시다. 또한 다른 모든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롭고도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처음과 마지막이시며,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통치하고 명령하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롬 11:36)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예정론에 대해 벤자민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 기자들은, 사건의 과정과 결정과 그 모든 결과들이 의로우며 거룩하고 신실하며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보증과 확신 안에서 끊임없이 그들의 위로를 발견했다…신적인 예정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바로 이것을 통해서 가장 은혜로운 행위로서의 예정이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성육신에서도 발견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화하고도 부성적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동의가 있다는 확신 속에서 평강을 누린다. 갈보리 언덕을 향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사랑 안에는 온 세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중심주의(Theocentrism)
메이슨 프리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 사상을, 침레교는 거듭남의 신비를, 루터교는 이신득구 교리를, 모라비안 교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희랍정교회는 성령의 신비를,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보편성을 최전방에 두는 것과 같이, 칼빈주의자는 언제나 최전방에 하나님을 둔다.”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만물을 향하여,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하여, 모든 피조물들의 노력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하여 포괄적이고도 주권적이며 부성적인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오직 의무만 가지고 있을 뿐 청구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 9:20)
신론,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성적이며 주권적이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다. 스프롤(R. C. Sproul)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이간의 본질과 성격, 성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역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질, 하나님에 의해 영향을 받는 구원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여 세워지는 표준으로서의 윤리의 본질, 그리고 다른 수많은 신학적 고찰들을 이해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교리를 하나님 중심으로 정의한다. 죄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혐오스러운 것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에 지극히 훌륭한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만유 가운데 만유로 계시는 곳이니 영광스러운 곳이며, 지옥은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진노를 나타내는 곳이기 때문에 참으로 지독하게 끔찍한 곳이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학적 진술들은 대부분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품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셨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은밀한 것까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화목제물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셨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전도나 부흥이 그들의 가장 위대한 관심사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것들에 마땅히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오직 하나뿐이다. 곧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 영광돌리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최대 목적이다.
3. 교회와 칼빈주의의 표지
지난 수세기 동안 ‘하나님 중심’이라는 슬로건은 교회의 이정표였고, 특히 칼빈과 칼빈주의의 표지였다. 여기에 몇 가지 실례들이 있다.
• 어거스틴
“그 모든 배역의 시기에 나의 자유의지는 어디 있었을까? 내가 한때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던 무익하고도 쓸데없는 기쁨들을 모두 없애 주신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진실하신 주님만이 나의 주권적인 기쁨이다. 주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나에게서 몰아내셨다. 모든 빛보다도 더 밝게 빛나고…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님께서 나에게 그 모든 쾌락보다 더 달콤핟고도 아름다운 기쁨이 되어 주셨다…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빛이시여, 나의 행복이시여, 나의 구원이시여!”
• 칼빈
칼빈의 삶 자체가 하나님 중심주의에 대한 풍성한 주석과 설명을 제공해 준다. 여러 결점들이 있었지만,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분투했다.
• 조나단 에드워즈
청교도들은 칼빈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들로서, 모든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다. 이러한 삶의 목적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람이 바로 18세기 뉴잉글랜드의 개혁주의 신학인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일한 행복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위해 천국에 가는 것이 지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또는 자녀들과 세상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모두 다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본체이시다. 이것들은 모두 다 흐트러진 빛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양이시다. 이것들은 다 시내요 개울이지만, 하나님은 그 시내의 근원이시다. 이것들은 모두 다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대양이시다.”
• 그 밖의 많은 그리스도인의 고백
앤드류 보나르(Andrew Bonar)와 같은 장로교도의 일기나 존 뉴턴(John Newton)같은 영국국교도의 편지, 스펄전과 가은 침례교 목사의 설교에도 하나님 중심주의가 잘 들어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인 열정은 오늘날 우리의 타락과 신학적 과오로 말미암아 대부분 상실되고 말았다. 소위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고, 결국 성경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도 잃어버렸다. 복음주의는 인간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에 제시된 실재와 아주 거리가 먼 견해를 조장하고 증진시켰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우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다루기 쉬운 하나님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결국 평안과 안락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거북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어떤 값으로라도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오직 하나님에게만 푹 빠져 있으며, 하나님만을 높이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칼빈주의적 종교 개혁의 참된 아들과 딸인가?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