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자 존 칼빈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 존 칼빈에 대하여
생애
출생과 학창시절
장 칼뱅은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뱅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뱅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여기서 토론 방법을 배웠다.
[편집] 종교개혁 운동 참여
152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칼뱅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주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뱅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주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칼뱅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뱅과 같이 일하게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뱅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하였다.
이 무렵 칼뱅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랑세스 1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도들을 일컫는 위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3년 칼뱅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문제는 그 연설문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념을 일부 추가했다는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자의 설교로 제소 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 18일 밤에 열광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로마 가톨릭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칼뱅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라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뱅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뱅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 칼뱅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 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세르베투스는 《Restitutio Christianismi》(기독교의 회복)이란 책을 써서 칼빈의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그는 '삼위일체론', '유아세례' 등의 교리에 비판을 가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카톨릭 교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리용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러던 중에 탈옥하여 제네바로 왔다. 그는 결국 칼빈의 교회에서 체포되어 유스티니안 법정에서 칼빈과 심각한 논쟁을 한 후 칼빈의 주도로 소의회에서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산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을 언도 받았다. 결국 그는 1553년 10월에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은 결국 칼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제네바의 개혁을 자행하는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빈파에서 선출됐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빈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빈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교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기에 이르른다.
죽음
그는 1564년 4월 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 19일에는 개신교 목사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준 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뱅의 임종을 보러 왔다. 칼뱅은 마지막 며칠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54년 동안의 삶을 마감하였다.
칼뱅과 세르베투스
칼뱅의 생애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있어 칼뱅의 역할이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적고 있다. (삼위일체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함께 동의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고 칼뱅 역시 알고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1534년에 칼뱅과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고 제의했고 칼뱅은 수락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1] 그 당시 이교도들에 대해서 무자비했던 로마교회가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
1546년에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약 2년간 계속된 서신 교환이 계속되었다. 첫 편지에서는 세르베투스는 "Michel de Villeneuve"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논쟁은 뜨거워졌고 세르베투스는 갖은 모독을 하였다. 심지어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뱅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뱅은 거절했다. 한 편지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칼뱅이 편지를 그만 쓰겠다고 전함으로써 서신 교환은 끝나게 된다.[3]
이 당시 칼뱅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다 (라틴어 초판은 1536년, 프랑스어 초판은 1541년에 나왔다). 세르베투스는 이에 대한 반론격인 《Restitutio Christianismi》를 1553년에 출간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반대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는 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을 중심으로 훗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뱅에게 보냈다. 그는 책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것임을 알았다.
칼뱅의 말년의 사역
제네바의 개혁을 자행하는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뱅파에서 선출됐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뱅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뱅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교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기에 이르른다.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한 비판
칼뱅과 종교국
칼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목적과 행위들을 종교국을 통하여 성취해나갔다. 이 종교국은 칼뱅이 개혁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조직체였다. 어떤 것도 그들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
칼뱅에 대한 역사적 증언
1) 칼뱅이 불과 1만 3천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를 4년 동안 통치하며 그 자신은 물로 그가 장악한 종교국을 통해 죽인 공식적인 인원만도 무려 58명에 이르며 추방한 인원은 76명에 달한다. 2)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에서 35명이 화형 당하였다. [5] 3) 칼뱅의 옆에서 칼뱅의 행적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는 증언하기를 '칼빈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렸다' [6]
칼뱅의 사형의 사례
1) 칼뱅의 예정설을 비난했다고 불로 태워 화형에 처함. [7] 2) 살상하는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8] 3) 세례 받기를 거부해서 80세의 노파와 여섯 아이의 어머니를 처형시킴. [9] 4) 칼뱅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는 자유사상사이면 화형에 처해 죽임.[10] 5) 어느 출판업자가 칼뱅을 비난했다고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자름.[11] 6)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화형.[12] 7) 자신의 신학이론에 반대하는 자를 국사범으로 취급함.[13] 8) 두 명의 뱃사람이 싸움질을 하였다고 두 사람 모두 사형시킴.[14]
칼뱅의 고문방법의 사례
1)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잡아당기는 참혹한 고문.[15] 2) 칼로 찢고 고문.[16] 3) 해충들이 뜯어 먹게 방치하고 배설물조차 치우지 못하게 함.[17] 4)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박수치게 하는 정책을 실시함.[18]
기타 잔악한 교회 규범
1) 칼뱅은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정치는 국가의 간섭이나 그밖에 누구의 간섭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목사,장로,집사,교사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19]
2) 칼뱅은 성경해석자로서 최후의 판결권을 독점한 왕자의 지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종교법원을 좌우할 수 있는 판사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의 성경 해석 여하에 따라 모든 죄의 유무와 경중이 결정되었다. 교회 규율을 엄격히 하기 위하여 수많은 신도들을 투옥,추방하고 사형까지 시켰다.
칼뱅의 영향
칼뱅의 개혁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552년 파리 대회에서 칼뱅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뱅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뱅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등을 통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한 칼뱅주의 개신교도들로서,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한 칼뱅은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성서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음을 선언한 종교개혁자이기도 하다. 장 칼뱅은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개신교 신학이 존중된 성격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일치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그리고 각 개신교 종파들을 단결시키고자 하였다.그래서 교회사학자중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국교회가 신학에 대한 생각차이로 분열한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
칼뱅은 주로 활동한 제네바에서 시민권이 없었지만,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칼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칼뱅 자신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면서 재세례파 및 세르베투스 등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비난한다.[21] 여기서 보통 간과되는 사실은 재세례파가 신정정치를 펴려다 혹독한 독재정치를 펴서 발생한 뮌스터 반란 사건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할 것 없이 전 유럽에서 저주 받을 사람들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칼뱅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또한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의 부정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으며 여전히 유럽 전역의 사법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교회에 미친 훌륭한 영향이 그의 단점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한다
http://blog.daum.net/kkho1105/1431
생애
출생과 학창시절
장 칼뱅은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뱅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뱅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여기서 토론 방법을 배웠다.
[편집] 종교개혁 운동 참여
1528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칼뱅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주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뱅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주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칼뱅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뱅과 같이 일하게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뱅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 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하였다. 1532년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하였다.
이 무렵 칼뱅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는데, 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랑세스 1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도들을 일컫는 위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533년 칼뱅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문제는 그 연설문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념을 일부 추가했다는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자의 설교로 제소 하였으며, 국회는 이에 동의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년 10월 18일 밤에 열광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로마 가톨릭을 비난하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칼뱅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라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뱅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년 10월에 칼뱅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 칼뱅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부르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 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세르베투스는 《Restitutio Christianismi》(기독교의 회복)이란 책을 써서 칼빈의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그는 '삼위일체론', '유아세례' 등의 교리에 비판을 가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카톨릭 교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리용 감옥에 수감되었고 그러던 중에 탈옥하여 제네바로 왔다. 그는 결국 칼빈의 교회에서 체포되어 유스티니안 법정에서 칼빈과 심각한 논쟁을 한 후 칼빈의 주도로 소의회에서 삼위일체와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죄목으로 산채로 화형에 처해질 것을 언도 받았다. 결국 그는 1553년 10월에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처형은 결국 칼빈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제네바의 개혁을 자행하는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빈파에서 선출됐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빈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빈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교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기에 이르른다.
죽음
그는 1564년 4월 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 19일에는 개신교 목사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 칼뱅이 스위스에서 종교개혁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준 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뱅의 임종을 보러 왔다. 칼뱅은 마지막 며칠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27일 54년 동안의 삶을 마감하였다.
칼뱅과 세르베투스
칼뱅의 생애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있어 칼뱅의 역할이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적고 있다. (삼위일체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함께 동의하는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고 칼뱅 역시 알고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1534년에 칼뱅과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고 제의했고 칼뱅은 수락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1] 그 당시 이교도들에 대해서 무자비했던 로마교회가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
1546년에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약 2년간 계속된 서신 교환이 계속되었다. 첫 편지에서는 세르베투스는 "Michel de Villeneuve"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논쟁은 뜨거워졌고 세르베투스는 갖은 모독을 하였다. 심지어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뱅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뱅은 거절했다. 한 편지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칼뱅이 편지를 그만 쓰겠다고 전함으로써 서신 교환은 끝나게 된다.[3]
이 당시 칼뱅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다 (라틴어 초판은 1536년, 프랑스어 초판은 1541년에 나왔다). 세르베투스는 이에 대한 반론격인 《Restitutio Christianismi》를 1553년에 출간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반대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는 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을 중심으로 훗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뱅에게 보냈다. 그는 책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것임을 알았다.
칼뱅의 말년의 사역
제네바의 개혁을 자행하는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1555년 2월 선거에서 소 의회의 행정관 4명 모두 칼뱅파에서 선출됐으며 200명의 의회도 절대다수가 친 칼뱅파에서 선출되었다. 자유파에 속하여 칼뱅 반대 운동을 전개했던 페랑과 버틀러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제네바를 떠났다. 장로교는 정부의 간섭 없이 출교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권한을 승인 받기에 이르른다.
칼뱅의 종교개혁에 대한 비판
칼뱅과 종교국
칼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목적과 행위들을 종교국을 통하여 성취해나갔다. 이 종교국은 칼뱅이 개혁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조직체였다. 어떤 것도 그들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다. [4]
칼뱅에 대한 역사적 증언
1) 칼뱅이 불과 1만 3천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를 4년 동안 통치하며 그 자신은 물로 그가 장악한 종교국을 통해 죽인 공식적인 인원만도 무려 58명에 이르며 추방한 인원은 76명에 달한다. 2)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에서 35명이 화형 당하였다. [5] 3) 칼뱅의 옆에서 칼뱅의 행적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는 증언하기를 '칼빈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렸다' [6]
칼뱅의 사형의 사례
1) 칼뱅의 예정설을 비난했다고 불로 태워 화형에 처함. [7] 2) 살상하는 칼뱅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8] 3) 세례 받기를 거부해서 80세의 노파와 여섯 아이의 어머니를 처형시킴. [9] 4) 칼뱅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는 자유사상사이면 화형에 처해 죽임.[10] 5) 어느 출판업자가 칼뱅을 비난했다고 불타는 쇠꼬챙이로 혀를 자름.[11] 6)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화형.[12] 7) 자신의 신학이론에 반대하는 자를 국사범으로 취급함.[13] 8) 두 명의 뱃사람이 싸움질을 하였다고 두 사람 모두 사형시킴.[14]
칼뱅의 고문방법의 사례
1)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잡아당기는 참혹한 고문.[15] 2) 칼로 찢고 고문.[16] 3) 해충들이 뜯어 먹게 방치하고 배설물조차 치우지 못하게 함.[17] 4)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박수치게 하는 정책을 실시함.[18]
기타 잔악한 교회 규범
1) 칼뱅은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정치는 국가의 간섭이나 그밖에 누구의 간섭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목사,장로,집사,교사에 의해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19]
2) 칼뱅은 성경해석자로서 최후의 판결권을 독점한 왕자의 지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종교법원을 좌우할 수 있는 판사의 역할까지 담당했다. 그의 성경 해석 여하에 따라 모든 죄의 유무와 경중이 결정되었다. 교회 규율을 엄격히 하기 위하여 수많은 신도들을 투옥,추방하고 사형까지 시켰다.
칼뱅의 영향
칼뱅의 개혁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1552년 파리 대회에서 칼뱅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는 칼뱅주의자 브라이(Bray)에 의해 1561년 벨직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1560년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다. 독일 남부 지역은 칼빈주의 일색으로 변하여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이 칼뱅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등을 통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한 칼뱅주의 개신교도들로서,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또한 칼뱅은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성서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음을 선언한 종교개혁자이기도 하다. 장 칼뱅은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한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개신교 신학이 존중된 성격의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일치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그리고 각 개신교 종파들을 단결시키고자 하였다.그래서 교회사학자중에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국교회가 신학에 대한 생각차이로 분열한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
칼뱅은 주로 활동한 제네바에서 시민권이 없었지만,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칼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칼뱅 자신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면서 재세례파 및 세르베투스 등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고 비난한다.[21] 여기서 보통 간과되는 사실은 재세례파가 신정정치를 펴려다 혹독한 독재정치를 펴서 발생한 뮌스터 반란 사건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할 것 없이 전 유럽에서 저주 받을 사람들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칼뱅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또한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의 부정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으며 여전히 유럽 전역의 사법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교회에 미친 훌륭한 영향이 그의 단점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한다
http://blog.daum.net/kkho1105/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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