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칼빈은 고의적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갈로 인해 생활은 점점 힘에 겨웠다. 개혁 반대자들은 칼빈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두 번째 후예’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결국, 의회는 파렐과 칼빈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도 썼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과 연속되는 고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중단될 수 없는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의 과도한 고난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칼빈의 설교에 감동받기 어려운 요소는 그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연속된 시련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개혁신앙 때문에 제네바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고통은 대단했다. 온갖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지킨 칼빈을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삶을 표본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엄청난 저항과 맞바람을 맞은 결과물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그가 관계를 단절한 로마, 즉 과거의 로마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진용을 정비한 로마가 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더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설교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칼빈은 목사 또는 설교자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했다. 그것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말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세 가지 측면이 항상 양호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의 관계에 있어서 역동적인 긴장이 엿보인다.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 있어서도 갈등이 많았다. 특히,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설교자의 제사장 역할로는 중보자와 의식 집행이 있다. 이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치유와 용서의 사역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제사장은 병든 자나 고뇌하는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그들을 위해 중보한다. 선지자는 미래적인 예언보다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평화, 의, 죄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역할은 설교자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한 사역이다. 가장 근대적 개념인 매니저로서의 왕의 역할은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의 다스림, 곧 조직을 관리하는 사역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역할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도의 개념 아래서 통일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칼빈은 오늘날의 설교자 또는 목사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사신이요, 증인으로서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을 함께 통일하는 사역자이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만약, 한 방면에 소홀히 하면 자연히 사역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사장적인 위로와 용서만을 강조하면 선지자적인 메시지로서의 회개, 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청중들을 의식하다보면 선지자적 메시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선지자적 메시지에 치우쳐 의를 선포하고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말씀에만 집중하면 백성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호하고 치료하는 사역들이 전혀 등한시 될 수 있다.
칼빈에게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칼빈은 다양한 표현으로 설교자의 사명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
칼빈은 설교자야말로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임을 강조한다(Richard Stauffer,<칼빈의 설교학>, pp.124-136).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교회론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를 정의함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계속해서 그는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Ⅳ. 3, 1).
“선지자가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반역하는 자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갖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임을 압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의 직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그대로 그 직분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John Calvin, Calvin's Sermons on The Book of Jeremiah, 박건택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257).
사도의 계승자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또는 신학교 교수를 지칭한다)은 고대의 선지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목사(기존 신자들에게 제자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
‘사도’라는 말은 본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칼빈은 주께서 자신의 사자로 파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적인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목사들이 이와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바울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목사에 대한 이런 고등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다.
제자 됨의 도리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나 또는 연장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을 새롭게 충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때 새롭게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목사는 일생 동안 배워야 한다는 말의 중요성을 서로 나누곤 한다. 그러나 설교에서 만큼은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말씀의 사역자 칼빈의 자세는 도리어 그 반대다.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먼저 제자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지혜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남을 깨우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큰 오해라는 것이다(김재성, “존 칼빈의 생애와 시대”, p.73). 칼빈에 따르면, 설교란 설교자의 생각을 강론하여 추종자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설교자와 회중을 함께 해석하도록 둘 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이 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어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유보해 두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랑거리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만, 세상이 하나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하려는 헛된 생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John Calvin, <에베소서 설교 상>, 김동현 역, 솔로몬출판사, p.252).
신성한 말씀의 일꾼
칼빈은 “목사란 ‘신성한 말씀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목사에게 부여된 직무들은 설교와 비교해 볼 때 부차적인 것이다. 그는 성례의 시행, 조직과 권징보다 신성한 말씀의 설교를 늘 앞세웠다. 칼빈은 만일 목사가 설교할 수 없다면 당연히 목사가 아니라고 까지 말했다(T. H. L. Parker, <칼빈과 설교>, 김남준 역, 솔로몬, p.5).
칼빈의 설교 예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 말씀 전달)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기독교 강요>, Ⅳ. 3. 11).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고 강조했다.
http://blog.daum.net/kkho1105/1447
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칼빈은 고의적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갈로 인해 생활은 점점 힘에 겨웠다. 개혁 반대자들은 칼빈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두 번째 후예’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결국, 의회는 파렐과 칼빈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도 썼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과 연속되는 고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중단될 수 없는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의 과도한 고난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칼빈의 설교에 감동받기 어려운 요소는 그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연속된 시련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개혁신앙 때문에 제네바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고통은 대단했다. 온갖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지킨 칼빈을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삶을 표본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엄청난 저항과 맞바람을 맞은 결과물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그가 관계를 단절한 로마, 즉 과거의 로마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진용을 정비한 로마가 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더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설교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칼빈은 목사 또는 설교자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했다. 그것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말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세 가지 측면이 항상 양호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의 관계에 있어서 역동적인 긴장이 엿보인다.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 있어서도 갈등이 많았다. 특히,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설교자의 제사장 역할로는 중보자와 의식 집행이 있다. 이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치유와 용서의 사역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제사장은 병든 자나 고뇌하는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그들을 위해 중보한다. 선지자는 미래적인 예언보다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평화, 의, 죄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역할은 설교자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한 사역이다. 가장 근대적 개념인 매니저로서의 왕의 역할은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의 다스림, 곧 조직을 관리하는 사역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역할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도의 개념 아래서 통일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칼빈은 오늘날의 설교자 또는 목사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사신이요, 증인으로서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을 함께 통일하는 사역자이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만약, 한 방면에 소홀히 하면 자연히 사역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사장적인 위로와 용서만을 강조하면 선지자적인 메시지로서의 회개, 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청중들을 의식하다보면 선지자적 메시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선지자적 메시지에 치우쳐 의를 선포하고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말씀에만 집중하면 백성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호하고 치료하는 사역들이 전혀 등한시 될 수 있다.
칼빈에게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칼빈은 다양한 표현으로 설교자의 사명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
칼빈은 설교자야말로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임을 강조한다(Richard Stauffer,<칼빈의 설교학>, pp.124-136).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교회론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를 정의함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계속해서 그는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Ⅳ. 3, 1).
“선지자가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반역하는 자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갖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임을 압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의 직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그대로 그 직분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John Calvin, Calvin's Sermons on The Book of Jeremiah, 박건택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257).
사도의 계승자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또는 신학교 교수를 지칭한다)은 고대의 선지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목사(기존 신자들에게 제자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
‘사도’라는 말은 본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칼빈은 주께서 자신의 사자로 파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적인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목사들이 이와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바울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목사에 대한 이런 고등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다.
제자 됨의 도리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나 또는 연장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을 새롭게 충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때 새롭게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목사는 일생 동안 배워야 한다는 말의 중요성을 서로 나누곤 한다. 그러나 설교에서 만큼은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말씀의 사역자 칼빈의 자세는 도리어 그 반대다.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먼저 제자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지혜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남을 깨우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큰 오해라는 것이다(김재성, “존 칼빈의 생애와 시대”, p.73). 칼빈에 따르면, 설교란 설교자의 생각을 강론하여 추종자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설교자와 회중을 함께 해석하도록 둘 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이 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어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유보해 두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랑거리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만, 세상이 하나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하려는 헛된 생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John Calvin, <에베소서 설교 상>, 김동현 역, 솔로몬출판사, p.252).
신성한 말씀의 일꾼
칼빈은 “목사란 ‘신성한 말씀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목사에게 부여된 직무들은 설교와 비교해 볼 때 부차적인 것이다. 그는 성례의 시행, 조직과 권징보다 신성한 말씀의 설교를 늘 앞세웠다. 칼빈은 만일 목사가 설교할 수 없다면 당연히 목사가 아니라고 까지 말했다(T. H. L. Parker, <칼빈과 설교>, 김남준 역, 솔로몬, p.5).
칼빈의 설교 예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 말씀 전달)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기독교 강요>, Ⅳ. 3. 11).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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